소년의 학교는 상당한 고급 아파트촌과 그저그런 주택가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고, 그런 만큼 소년들은 거의 정확히 두 세계로 나뉘었다. 그것은 소년들의 입성과 도시락 반찬들만 보아도 대략은 짐작할 수 있었다. 교복은 아무 것도 감추지 못하고, 점심을 알리는 종소리는 아무 것도 말해주지 못한다. 사실 그것을 정확히 나뉜 두 세계라고 말하는 것은 옳은 것일까. 한 세계가 다른 한 세계 안에 종속되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소년들은 사실 많은 것을 안다. 어른들이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안다. 그들은 어디까지 허용되는지 알며, 어디가 가장 약한 지점인지도 안다. 한 세계의 소년들은 끼리끼리 몰려다녔고, 다른 한 세계의 소년들도 끼리끼리 몰려다니며 차례로 타겟이 되었다.  

그저그런 주택가에 살며, 그마저도 변변치 못한 축에 들었던 소년은 그래도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다행히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으니까.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고, 소년들의 학력 수준은 당연하게도 부모의 부의 종속변수가 된지 오래였다. 나뉜 두 세계는 그들의 현재만을 말해주지 않았고, 우악스럽게도 미래의 세계를 펼쳐내보이고 있었다. 운이 좋은 소년이었지만, 타겟의 운명을 그렇다고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소년은 몇번인가 책을 잃어버렸으며, 노트에 찢어진 자국을 발견했고, 한 두 번은 가벼운 시비에 휘말렸다. 그러나 아무튼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아주 좋은 조건에 속했다. 그래도 쥐꼬리만한 선생님의 관심을 받았고, 그것은 그나마도 없는 소년들에 비하면 꽤나 든든한 방패에 속했다. 그리고 여전히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했던 수많은 소년들은 차례로 타겟이 되었고, 다음 새로운 흥미거리가 생겨나기까지 그 극장의 배우로서 충실히 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재빨리 바톤을 넘기고는 어느새 그 극장의 관객이 되었다. 

소년은 사실 많은 것을 잊으려 노력했고, 그 노력의 결과로 실제로 많은 것을 잊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 때 일어난 일들 자체만큼, 그 때에 가졌던 느낌과 생각들도 잊었다. 그러나 아직도 몇 가지를 기억한다. 그 그룹의 소년들 중 자신을 유달리 괴롭혔던 S군과 그가 갑자기 교문 앞에서 따귀를 날리고 지었던 미소를. 갈색의 철봉들로 만들어졌던 그 교문과 그 교문을 둘러싸고 있었던 담쟁이 덩굴들을. 그 그룹의 소년들 중 그래도 소년에게 가장 친절을 보여줬던 J군을 졸업식날 기어코 찾아가 사진을 찍자고 했던 것과 그 때 그가 지었던 또다른 의미에서의 어색한 미소를.  

1992년의 어느 풍경들. 그 짧고도 짧은 회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돼지의 왕 - The King of Pigs
영화
평점 :
현재상영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데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돼지로 살 수밖에 없었고, 돼지의 왕이 되고 싶었으나 끝끝내 되지 못했던 모든 이들에게 이 영화를 추천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알라딘에 들어와 가끔 놀라는 때가 있다. 그것은 상당히 일방적이며, 직설적이고, 폭력적인 글들이 높은 추천을 받고 있는 것을 볼 때이다. 정확히 말해서 놀란다기 보다는 그저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 일단은 이 알라딘이라는 공간의 특성적인 문제. 내 추측일뿐이지만, 아마도 이곳에는 책을 좋아하고, 그만큼 글쓰기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분들이 다수를 이룰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글들도 결국은 어느 정도는 타 곳들과 비슷해진다는 것.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면, 뭔가 다를 것이다라는 것은 결국 어떤 착각에 불과했던 것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어쩌면 나의 생각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즉 어쩌면 그런 것을 폭력적이며, 일방적이라고 받아들이는 나의 성향이 이상한 착각을 야기하는 것은 아닐까. 요즘에 들어서 내가 쓰는 글들이 퇴보를 향해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도무지 발전이 없고, 계속 한 얘기를 반복해서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얼마전 내 블로그 글들을 자주 읽어주는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친구의 말로는 내 글이 너무 '모호함'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후에 내가 지금껏 쓴 글들을 꼼꼼이 다시 반복하여 읽어보았는데, 확실히 내 블로그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표현들은 '일종의 문제', '~수 있다', '어떤 경향성', '조금은', '~까', '부인할 수 없다' 등등이다. 어떤 것이 좋다고도, 그리고 혹은 나쁘다고도 쉽게 말하지 않는 모호함의 문제, 회색의 덧칠들 그런 것들이 너무 눈에 띈다. (즉 글이라는 것이 결국은 누군가에게 읽히기 위함임을 전제로 했을 때, 나 자신도 읽으면서 안개 속을 걷는 형국이라면, 누가 그 글을 읽겠는가.) 

이제 이런 나약한 글쓰기는 그만두고 치열하게 부딪히는 환경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일까. 생각을 해야만 한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반딧불이 2011-10-31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똑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듯해요. 어떻게 된 것이 책은 읽을수록 읽어야할 책은 점점 더 많아지는지.. 그리고 뭔가를 안다고 말하기가 겁나고 매사에 무언가를 확신한다는 것이 두려워져요.

맥거핀 2011-10-31 20:58   좋아요 0 | URL
한 때 더 많이 알게 되면, 더 많이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이제 잘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 분명히 나보다는 무엇인가를 많이 아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무엇인가를 말할 때를 보면요. 아는 것과 그로 인해 무엇인가를 갖추게 되는 것은 다른 문제일까..도리어 많이 알게 될수록 말하기가 힘들어지는 걸까요? 아니면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그저 '아는 척'만 했기 때문일까요? 아무튼 생각을 해야합니다. 지금 이대로는 아닌 것 같아요.

꽃도둑 2011-11-01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가을이군요... 독서의 계절이 아니라 사색의 계절..
맥거핀 님의 생각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거에요. 무엇보다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사람들이라면 한번 쯤은 고민해보았을 듯 싶은데요... 누구처럼 써보고 싶다는 열망은 결국 나를 넘어서는 일이어야 할텐데...한계라는 것은요..쉽사리 무너지는 게 아니더라구요.
아주 조금씩 조금씩 발전하는 나를 보곤 하죠... 많이 읽고 쓰고 생각하고 그 길밖에는 없는데...
뭐 굳이...저는 그래요. 뭐 굳이.. 그냥 쓰는 순간 몰입하고 그걸로 잊어버리곤 하죠..^^
그리고 어디가서 별로 아는 척 안해요 쩍팔려서...^^


맥거핀 2011-11-02 01:20   좋아요 0 | URL
뭔가를 쓰려고 하는 사람들은 한번쯤 하는 고민인가요..? 그래요. 확실히 뭔가를 넘어서기는 해야하는데, 자주 주저하게 되는 것 같아요. 과연 이게 올바른 방향인가, 이게 더 나은 것인가 의문도 들고..하기는 제가 생각하는 좋은 글의 기준도 예전을 돌이켜보면 많이 바뀌었으니까요. 예전에 좋은 글이라고 생각했던 글들을 지금 읽어보면, 거의 대부분 별 감흥이 없거나, 도리어 싫어지기도 하니까. 그만큼 자기 기준을 확고히 다지는 것이 어려운 것이겠지요. 그러나 어렵다고 해도 노력은 해야죠.^^

마녀고양이 2011-11-02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맥거핀님께서 저랑 같은 날짜에 유사한 맥락의 글을 올리셨었군요.
따스하게 주고 받았으면 좋겠다는게 제 생각인데,
댓글에서 다른 의견이 있었답니다. 그 정도 글은 글쓴이 자체에 대한 공격이 아니기 때문에, 비평 자체가 더욱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의견이었죠. 음, 사람마다 느끼는게 다르구나 하고 한참 생각했었습니다. 아마 그런 글을 주고 받는게 일상화된 분이라면, 다르게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남자와 여자 또는 직업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면이 다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추워지는데, 따스한게 저는 좋습니다만. ^^

맥거핀 2011-11-02 20:56   좋아요 0 | URL
방금 전에 몇몇 글을 보고나니, 뭐라고 말을 잘 못하겠네요. 다만, '이것이 사람마다 느끼는게 다르다는 말로만 봉합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아니라고 답하겠습니다.(물론 마녀고양이님께 뭐라고 하는 것은 절대 아니구요.^^) 제 블로그 대문에 쓰인대로 '무엇을 말하지 않을 것인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아무튼, 저도 따스한게 좋습니다.^^
 
약속 - The Promis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가장 몫이 없는 사람들에게 향함으로써 결국은 자기 구원을 향해 달려간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맥거핀 2011-10-31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으려 노력하는 것은 항상 숭고하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잘못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마도 자기구원의 시작은 (타인의 잘못을 이야기하기 전에) 자신의 지난 일들을 돌이켜보는 것일 것이다. ...나는 나를 경계하고 있는가?
 
트리 오브 라이프 - The Tree Of Lif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서사를 깨버린 초반 30분은 거의 천상의 황홀경으로 이끌지만, 서사가 진행되면서, 그 황홀경은 반복된 메시지로 바뀌며 보는 이를 다시 지상으로 밀어낸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맥거핀 2011-10-28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씨네 21> 826호 정한석의 리뷰에서: "여기에는 흥미로운 점이 있다. 우리가 보는 우주와 지구의 이 생성 이미지는 적어도 상식에 의존한다면 진화론의 이미지일 것이다. 이것은 창조론의 천지창조가 될 수 없다. (중략) 그러므로 이 '트리 오브 라이프'의 이 우주론은 이상한 우주론이며 모순의 우주론이다. 세계의 기원인 것처럼 보여지는 시각적 이미지는 진화론에 입각해 있지만 영화 내내 울려퍼지는 사운드는 창조론을 믿는 자들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맬릭이 완수하고자 했던 이 대당의 관계를 누구보다 꿰뚫어본 것은 다름 아니라 브래드 피트였던 것 같다. 그는 "맬릭은 과학 안에서 신을 보고 신 안에서 과학을 본다"고 말했다."

맥거핀 2011-10-28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은 어쩌면 테렌스 맬릭식의 변형된 지적설계론인가? 신이 '진화의 방식으로' 창조를 행했다고 말하는 것. 영화는 분명히 빅뱅에서부터, 생물의 탄생, 공룡의 출현에 이르기까지 과학적 진화론에 따라 이를 보여주지만, 여기에는 분명히 단절적인 부분들이 있다. 테랜스 맬릭은 도리어 그 단절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무생물뿐인 지구에서 갑자기 어떻게 생명이 출현하였는가, 그리고 그 생명들은 어떻게 본능을 획득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인간을 포함한 생명들은 사랑과 증오, 영성 등등을 어떻게 얻게 되었는가.

맥거핀 2011-10-28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테랜스 맬릭은 이 영화에서 한 생명이 태어나고 사멸하는 것과 이 지구의 기원에서 생명이 출현하고 사멸하는 것을 거의 동일선상에 놓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한 어머니와 아버지를 신의 위치에 끌어올려 놓고는 이야기를 끝마쳐 버린다. 이 영화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신의 각각 다른 모습의 육화이다. 신은 자신에 대한 무한정의 복종을 요구하고, 그 복종을 거부하거나, 또는 모든 것을 바쳐 복종하려 노력하려 자에게(욥) 고통을 안긴다. 또한 동시에 신은 자신이 인간에게 금지한 것들을 스스로는 행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신은 모든 인간을 무한히 사랑하고,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는 존재이다. 그 모순의 극한 속에서 인간은 생하고, 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