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브 - Driv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결말부 내용이 '약간' 있음)

 

 

 

아무래도 이 영화는 극장의 큰 스크린으로 봐야지 싶어서, 영화가 거의 씨가 마르려는 시점에 극장에 다녀왔다.

 

개봉 이후 이 영화 <드라이브>에 대한 평은 대체로 두 개로 나뉘는 것 같다. 하나는 수많은 걸작 영화들을 떠올리게 하는 멋진 장면들과 환상적인 씬들이 가득한 영화광을 위한 영화라고 말하는 평과 다른 하나는 관습적이고 뻔한 스토리의 할리우드 액션 영화를 유럽 영화의 소스와 멋진 음악을 살짝 얹어 그럴듯하게 포장한 영화라는 평(이러한 것은 영화 속 '버니'가 자신이 예전에 만들었던 영화들에 대해 자조적으로 냉소하면서 말하는 것과 정확하게 겹친다)이다. 물론 이 두 가지 평들이 공유하는 지점도 역시 두 가지 정도 있는데, 그 하나는 그야말로 멋지고 환상적인 음악들이 영화 전체를 뒤덮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영화는 유독 '폼'을 잡는 영화라는 점이다. 그것을 <씨네 21>의 김도훈은 다음과 같이 재미있게 표현했다(<씨네21> 829호). "<드라이브>는 그저 개폼의 영화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뭔가가 존재하는 영화인가. 물론이다. 니콜라스 윈딩 레픈의 <드라이브>는 처음부터 끝까지 개폼으로 달려가는 영화다. 다만 우리는 좋은 개폼과 나쁜 개폼을 구분해야만 한다." 과연 '좋은 개폼'이란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쳐두고라도, 이 말은 적어도 한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은 이 영화 <드라이브>가 그 '폼'을 영화 내내 전혀 숨길 생각이 없다는 점, 도리어 그 폼을 영화 내내 과시하면서 뻔뻔하게 (거의 일부러) 내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많은 액션 영화, 누아르 영화에서 그 폼을 일부러 내보이던 것은 거의 일종의 장르적 관습과도 같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의 과도한 '폼' 즉 허세 또는 '젠체'는 영화 전체를 너무 뒤덮고 있어, 약간은 기이해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영화를 영화 <아저씨>와 비교하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는 설정상의 여러 부분을 <아저씨>와 공유하고 있다. 정체가 전혀 설명되지 않은 한 남자가 이웃집의 여자와 어린 아이를 위해 전모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사건에 끼어든다는 것. 그러나 내 생각에는 그것은 설정상의 부분일 뿐이고, 영화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아저씨>와는 조금은 다른 측면들이 있다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아저씨>는 거대한 조직과 일인의 대결 양상이다. 사건은 처음에 커다란 무게로 몰아닥치고, 주인공은 하나 하나의 미션을 클리어해가며 적의 심장부로 잠입해 들어간다. 반면, <드라이브>는 처음에는 아주 작아 보였던 사건이 점점 혼란스럽게 꼬여간다는 인상이 짙다. 예전 숀 펜이 나왔던 영화 <유 턴>처럼, 주인공의 사건은 조금씩 비틀어지며, 점점 걷잡을 수 없이 상황이 악화되고, 처음의 작은 사건은 나중에는 그야말로 주인공의 모든 것을 걸어야하는 커다란 사건이 되어 버린다. 보다 근본적인 차이는 이 영화를 도대체 어떤 영화로 보아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아저씨>의 경우 전형적인 액션물이다. 즉 관객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원빈의 머리깎기나 몸매이기도 하겠으나) 주인공의 액션이다. 그러나 사실 이 영화 <드라이브>를 액션물로 보기에는 조금은 무리가 따른다. 결정적이고 무자비한 액션이 몇 군데 나오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액션 장면은 몇 장면 되지도 않을 뿐더러, 거의 눈깜박할 새 지나가 버린다. 도리어 '액션 그 자체'보다 영화가 중시하는 것은 액션의 전후이다. 예를 들어 그 액션이 막 시작되기 이전의 숨막히는 긴장감, 액션이 시작되기 이전 그가 뒤집어 쓰는 가면, 적을 만나러 가면서 꺼내드는 장도리를 클로즈업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즉 다른 말로 하자면,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액션 그 자체가 아니라, 액션을 둘러싼 아우라, 다시 말해서, 액션의 '폼'이다.

 

이것을 이렇게 비유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저씨>는 대전 액션 게임, 혹은 슈팅 게임이다. 스테이지를 거쳐갈수록 적은 강해지며, 최종전에는 그 적의 보스를 무너뜨리고 '클리어'를 쟁취해야 한다. 물론 대전 액션 게임에도 스토리는 있다. 그러나 그 스토리는 사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그저 뒷 배경에 불과하다. 보다 중요한 것은 각 스테이지에서 적과 싸우는 것을 만끽하는 것, 그 자체이다. 그에 반해서 이 영화 <드라이브>는 전략 시뮬 게임이다. 전략 시뮬 게임 같은 것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전략적인 사고, 빠른 판단력, 민첩한 행동 모두 중요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폼'이다. 즉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의 시뮬성, 현실감이다. 예를 들어 전장(戰場)을 배경으로 한 전략 시뮬 게임에서 헤드셋을 쓰고, 분대장의 지휘를 받고, 서로 무선교환을 하며 진지하게 게임에 임하는 것. 그런 게임을 전혀 좋아하지 않거나, 겉에서 단순하게 볼 때는 그것은 그저 바보 같아 보이는 개폼일 뿐이다. 그러나 그 게임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은 적을 잘 조준해 총을 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 실제의 전장에 있는 것 같은 시뮬성, 아우라, 폼을 느껴보는 것. (예를 들어 바로 그런 것을 위해서, 스타크래프트 중계를 하는 사람들이 마치 실제의 전쟁인 것처럼 그렇게 피를 토하고, 게임에 임하는 게이머들에게 우주복처럼 생긴 옷을 입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단순히 '게임을 잘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그 옷은 도리어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뮬, 아우라, 신화화를 덧붙이는 것은, 그것에 사람들을 빠져들게 하려면, 다른 말로 해서 고도로 '상품화'하려면 필수적이다.) <드라이브>도 비슷한 전략을 쓴다. 그 폼을 지속적으로 관객들에게 주입시켜, 영화 속 어떤 것들을 거의 체험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것. 영화의 첫 장면, 카메라는 드라이버(라이언 고슬링)의 시점에 맞추어져 있다. (이것은 예를 들어 영화 <아저씨>에서 원빈이 "내일만 사는...' 하는 유명한 대사를 하는 장면과 비교된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운전하는 원빈을 정면으로 잡는다.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그 멋있는 대사를 내뱉는 원빈의 얼굴을 잡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운전하는 라이언 고슬링을 정면으로 잡는 시점은 제한적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 차에 타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라이언 고슬링의 얼굴을 정면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수정 주: 2-3개의 정면샷은 거의 라이언 고슬링의 얼굴을 반쯤 가리고 눈깜빡할 사이 지나가버린다. 반면 원빈의 정면샷은 조명의 도움을 받고, 길게 지속된다.)) 경찰 무선과 농구 중계를 동시에 틀어놓고, 드라이버는 운전대를 잡고 5분의 시간 안에 '일'을 마치고 의뢰인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5분이 거의 다 되어, 그들이 나오고 경찰의 추격을 받기 시작하는 순간, 영화의 모든 관객들은 드라이버와 같이 경찰의 추격을 따돌려야 하는 입장이 된다. 도로에서의 경찰의 추격을 따돌리는 전략 시뮬 게임. 자 이제 어떤 전략으로 추격을 따돌릴 것인가. 물론 드라이버는 멋지게 미션을 클리어하고, 곧이어 환상적인 음악과 함께 제목이 스크린에 떠오른다. (아마도 상당수의 관객은 여기에서부터 입이 떡 벌어졌을 것이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영화적인 체험', 말 그대로 영화로 느낄 수 있는 것의 극대로구나!)

 

 

 

 

그러나 영화가 흥미로워지는 것은 한편으로 이 이후이다. 대부분의 시뮬이 그 시뮬성을 자연스럽게 중화시켜 그 시뮬을 현실에서 체험하는 데에서 느끼는 모순을 최대한 덜 인식도록 하는 데에 비해, 이 영화는 그 시뮬성을 거의 의도적으로 드러내보이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시뮬을 이야기하는 시뮬레이션, 일종의 메타 시뮬이 된다. 그것은 영화 속에서 지속적으로 드러나는데, 예를 들어 라디오 속 농구 중계가 현실의 농구 경기장으로 이어지는 아까 말한 처음의 장면도 그러하거니와, 주인공의 직업을 스턴트맨이라고 하면서 그에게 가면을 쓰도록 하거나, 버니와 같은 영화제작자를 등장시키는 것이 그러하다. 영화 속에서 스턴트맨으로서 가면을 쓰고 (주인공 대역으로서) 가상 영화의 스턴트를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시뮬 속의 시뮬이며, 동시에 영화라는 것이야말로 그 시뮬을 지속적으로 되풀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주인공의 최후의 액션이 그의 그림자로 보여지는 것이 이것의 일종의 상징은 아닐까. 그림자야말로 우리 가까이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뮬이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당신이 손으로 '그림자 개'를 만든 경험을 떠올려 본다면 말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다른 것을 연상하게끔 하도록 한다. 이 주인공의 기이한 무표정들과 대사를 처리하는 방식들이 불러오는 이상한 SF의 뉘앙스들 말이다. 마치 우리가 시뮬로 만들어진 가상의 캐릭터를 볼 때에 오는 이상한 착각. 예를 들어 마지막 주인공이 그러한 공격을 받고도, 별 충격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것은 이상하게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으며, 도리어 일종의 해피엔딩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마치 게임의 가상 캐릭터가 죽어도 다시 돈을 넣으면, 다음 게임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따라서 이 영화를 누아르로 보기에도 뭔가 꺼림칙한 부분이 있다. 누아르라면 주인공의 비극적인 파멸이 뒤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영화 전체적으로의 보여지는 '시뮬임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시뮬레이션'은 단순히 몇 장면만으로 이야기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니콜라스 윈딩 레픈은 기이한 모순의 화법을 쓴다. 시뮬레이션은 결국 모순적인 성격을 지닌 것, 즉 최대한 현실에 가깝게 만들어져야만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현실이 아님을 그 시뮬을 행하는 자들에게 최후에는 인식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시뮬레이션 속의 시뮬성을 드러내는 방법은 그것이 가진 기이한 모순성을 자꾸 끄집어내어 관객들에게 인식시키는 방법이다. 위의 김도훈의 말을 다시 가져와 본다면, 이 영화는 분명 개폼의 영화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개폼임을 지극히 잘 알고 있는, "나 개폼 맞아. 그러니 이 개폼을 더 잘 보도록 해"라고 하며, 자꾸만 드러내는 개폼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좋은 개폼이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또 다른 문제라고 하겠다.) 그것은 장병원이 리뷰에서 말한(<씨네 21> 830호 전영객잔) 신화적 세계의 히어로가 가질 수 밖에 없는 경계의 모순, 즉 인간에 가까운 내면과 초인에 가까운 외면이 보여주는 모순이 이 주인공 캐릭터에 투영되어 있다는 사실로도 나타나고, 로맨스와 극도의 폭력이 결합된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뇌리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엘리베이터 씬에서도 나타나지만, 한편으로는 영화 속에서 시종일관 깔리는 아름답고 환상적인 80년대 레트로 풍의 음악과 이 긴장감을 자아내는 폭력적인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는 화면들과의 불균질한 매치로서 보여지기도 한다.

 

그 음악들 중 처음 주인공 드라이버와 아이린(캐리 멀리건)과 아이가 차로 드라이브를 하는 장면과 나중에 영화 후반부에 다시 한 번 흐르던 'A Real Hero'라는 아름다운 음악이 있다. 그 반복되는 후렴구 "Real human being and a real hero". 가사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리얼의 인간과 리얼의 영웅. 진정한 인간만이 진정한 영웅이 될 수 있다. 시뮬레이션 속 가상의 드라이버는 리얼한 'Human Being'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리얼한 'Human Being'은 아닐지라도 리얼한 'Hero'였다. 캐릭터는 떠나갔지만, 나는 다시 동전을 집어 넣고 스타트 버튼을 누른다. 게임 속 캐릭터는 결코 죽지 않으니까. 이게 바로 게임이라고. 아니, 이게 바로 영화라고.

 

 

덧.

 

누군가가 올해의 가장 멋진 영화가 <드라이브>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뭐 그럴 수도...라고 하겠지만, 누군가가 올해의 가장 멋진 캐릭터가 이 영화 속 '드라이버'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화가 날 것 같다. 라이언 고슬링은 새로운 형태의 마초맨을 만들어냈다. 캐리 멀리건도 그 덕분에 아주 아름답게 나온다(상대역이 멋있어야 역할이 빛이 나는 법이니까). 라이언 고슬링에게 '올해의 캐릭터'를, 라이언 고슬링과 캐리 멀리건에게 '올해의 커플'을 내맘대로 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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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12-22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거 그냥 달리는 영화로 보이는데, 저는 스릴러를 가장 좋아하고 그담이 범죄나 공포고, 사실 액션도 고만고만/멜로나 드라마는 거의 안봤어요, 지금까진. 올해의 가장 멋진 영화가 될 수도 있을까요, 이 영화. 드라이버는, 제가 운전 자체를 못해서 논할만한 것도 못되고.. 아하! 영화음악은 맥거핀님을 떠올리며 볼 수도 있겠어요!^^

맥거핀 2011-12-23 12:05   좋아요 0 | URL
매우 추운 날, 잘 지내고 계신가요? 아..서울이 아니라서 좀 덜 추우실 수도 있겠네요. 서울은 이번 겨울들어 간만에 매우 추운 날씨. 아무 대비없이 밖에 나갔다가 귀가 떨어져나갈뻔..ㅎㅎ

사실 이 영화는 제목이 드라이브지만, 드라이브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은 아니구요. 뭐..개인적으로 멜로물로 볼 수도 있지 않나..생각됩니다. 저는 초반에 이 영화처럼 쭉 빨려들어가는 느낌은 간만이었어요. 거의 영화관에서 몸을 앞으로 빼고, 어...거리면서 봤지요. 나중에 기회가 되신다면 꼭 한 번쯤 보시는 게 어떨까 생각이 됩니다. 물론 영화음악도 좋구요.^^

Shining 2011-12-23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글 읽지 않았습니다!(당당히 말하기) 왜냐하면 저는 이 영화 언제라도 꼭 보고 말거니까요ㅠ 그러니까 이 글은 영화 본 후에 읽을래요, 그래도 되죠?^^ 얼핏 듣기만 해선 모르지만, 이 영화 왠지 완전 제 스트라이크존 같거든요. 보고말테야..라고 타오릅니다ㅋ

맥거핀 2011-12-23 12:08   좋아요 0 | URL
이 영화 카피가 `당신의 심장에 드라이브를 건다..` 뭐 그런거였던 거 같은데요. 네..드라이브 겁니다. 강력 회전 스핀 드라이버 뭐 그런거. 저 같은 경우는 영화 후반부보다 전반부가 훨씬 좋았던 것 같아요. 그 불안하고, 두근두근한 뭐 그런거. 영화 초반 30분까지는 거의 올해 영화 중 넘버원급이네요.

뭐 리뷰야 영화본 이후에 읽어주시는 게 저로서는 좋죠. 할 얘깃거리도 있구요. 영화를 안 본 분에게 아무리 얘기해봤자, 그거 뭐 결국 아저씨랑 똑같네..이런 소리밖에 못 듣죠. 대신 나중에 꼭 읽기로 합의합시다.-_-;

Shining 2011-12-24 14:12   좋아요 0 | URL
네, 합의할게요ㅋㅋ 영화 보고나서 꼭 읽겠습니다-_-*

2011-12-27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도무지 언제쯤 이 영화를 보게 될지 몰라서, 일단 읽었습니다.
대놓고, 끝까지, 개폼 잡는 영화. 그런 영화 좋아해요. 게다가 음악과 장면이 모두 아름다운 영화라면 더 좋아해요.
시뮬을 얘기하는 시뮬이라.. 어떤 영화일지 궁금해집니다. 관심 가졌으니, 언젠가 기회가 오겠지욧.^^

맥거핀 2011-12-28 12:50   좋아요 0 | URL
음..좋은 크리스마스를 보내셨는지, 괜찮은 연말을 보내고 계신지 궁금하네요. 언제쯤이 될지 모르지만 이 영화 꼭 한 번쯤 보셨으면 좋겠네요. 특히 더구나 개폼을 좋아하신다면 말입니다.^^ 이 영화는 뭐 개폼을 빼면 영화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정도니까요. 음악도 정말 좋구요.

ICE-9 2011-12-28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게도 정말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멜빌의 `사무라이`를 강하게 연상시키기도 하더군요^ ^ 아무튼 올해의 발견이라 할 만한 영화에요.

맥거핀 2011-12-28 12:5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헤르메스님.^^ 평론가들이나 리뷰어들 사이에 멜빌의 그 작품을 비교하여 이야기하시는 분들이 조금 있더라구요. (저는 사실 그 영화를 보지 못해 할 말이 없지만요. 고전영화 잘 몰라요.;) 저도 올해의 베스트에 뒤늦게 넣어 봅니다. 초반부 몰입감이 상당했어요.

Shining 2012-02-20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약속대로 <드라이브> 보고 맥거핀님의 리뷰 읽었습니다-_-*
예상대로 제 스트라이크 존이었어요. 라이언 고슬링의 연기도, 캐리 멀리건의 샤방한 얼굴도 영화에 적합했다는 것에 동의하구요. 오오, 헤르메스 님의 댓글을 보니 멜빌의 <사무라이>를 떠올린 것이 엉뚱한 예측은 아니었군요.

그나저나, 저는 언제나 맥거핀님처럼 일관성있고 조리있게 글을 쓸까요(휴).

맥거핀 2012-02-21 00:02   좋아요 0 | URL
네..모두들 이렇게 Shining님처럼 약속을 잘 지킨다면, 우리 사회가 정말 따듯하고 아름다운 사회가 될텐데, 라는 국정홍보처스러운 뻘생각을 뜬금없이 해봅니다.

그쵸..이 영화 상당히 괜찮습니다. 처음에 음악이 깔리고, 제목이 화면에 떠오를 때 두근두근하지 않았나요? 여러 분들이 멜빌 영화를 이야기하시니 한번쯤 봐서, 저도 나중에 다른 영화 얘기할 때 써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Shining 2012-02-21 10:13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저 아이리시스님한테도 의지짱이란 소리 들었는데ㅋ
저는 공정하고 깨끗한 사회를 응원합니다-_-(이러기ㅋ)

맞아요, 두근두근하면서 뭔가 빠져드는 느낌. 엘리베이터신도 좋지만,
그래도 역시 이 영화의 백미는 오프닝+_+

맥거핀 2012-02-22 01:25   좋아요 0 | URL
요새도 오프닝에 깔렸던 음악을 가끔 듣고 있어요. 들을 때마다 뭔가 내가 그 영화의 주인공이 된 듯 기분이 묘해집니다. 이런 말은 오바인듯도 싶지만, 영화가 뭔가 아름다워요.
 

글: 원승환(전직 독립영화인) [2011.10.11]

(원문 주소: http://www.kmdb.or.kr/indie/board/column_list.asp?seq=49&GotoPage=1)

 

 

영화를 접하는 것은 점점 쉬운 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과거 영화관 같은 상영 공간에서만 볼 수 있었던 영화는 TV의 등장으로 관람 공간이 확대되어 집에서도 접근할 수 있게 되었고, 비디오 매체의 등장으로 관람 시간 마저 자유로워졌습니다.(보고 싶은 때에 재생할 수 있고, 관람 도중 중단하고 재개할 수도 있습니다.) 케이블 TV의 등장으로 영화전문채널도 생겼고, 네트워크가 발전하면서 WEB으로, VOD로 영화를 접하는 것도 훨씬 편해졌습니다. 최근엔 VOD 서비스가 확대되면서 (케이블TV나 IPTV를 통해) 개봉과 동시에 영화를 접할 수도 있습니다. 독립영화를 접하는 방법도 훨씬 많아졌고 편해졌습니다. 과거에는 영화관에서 찾아볼 수 없었지만, 독립영화전용관 사업이 시작된 이후 개봉 상영도 많이 보편화되었고, 지상파 TV에서도 방영되며(KBS [독립영화관], EBS [독립다큐관]), 온라인 다운로드 서비스도 선보였으며(인디플러그), (아직은 많은 지역에서 서비스되고 있지 못하지만) 독립영화 전문 케이블 채널(인디필름)도 생겼습니다.

이렇게 보면 마음만 먹으면 독립영화를 접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영화관에서 독립영화를 보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습니다. 독립영화를 상영하는 스크린은 한국 전체 스크린의 1%도 되지 않으며, 예술영화전용관이 존재하는 지역이 아니면 개봉되는 독립영화를 영화관에서 보기란 언감생심입니다. 개봉한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영화관에서 독립영화를 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독립영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났다는 말은 '영화관에서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외'한 기회가 늘어났다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영화를 영화관을 통해 관람하는 관객들은 조금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워낭소리>처럼 엄청난 관객을 모으는 영화가 등장한 것은 아니지만, 2011년엔 1만명 이상의 관객이 찾은 독립영화가 많아졌습니다. 독립영화인들이 영화관을 통해 상영하는 기회를 늘이기 위해 애쓰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관객들이 독립영화를 보고 싶어하며 찾아주기 때문이겠지요.

개인적으로 이런 분들이 존경스럽습니다. 존경이라는 말이 과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대단한 분들인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주류의 취향과는 다른 취향으로 영화를 선택하고 보는 일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독립영화 관련 일을 그만 두고 관객으로 돌아가 영화관에서 독립영화를 봐야하는 상황이 되자, 영화관에서 독립영화를 본다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새삼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영화관에 영화를 보러가는 일에 대해 상상해봅시다. 대부분 이런 식이겠지요. 영화를 먼저 선택하고 영화관을 찾거나, 가기 편한 영화관을 먼저 선택하고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영화 중 볼 영화를 선택해서 봅니다. 인기 있는 주류 영화의 경우, 매진이 되는 경우 등을 제외하면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도 관람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게다가 요즘 영화관들은 몇 개의 스크린을 가진 멀티플렉스이기 때문에 한 편의 영화를 상영하는 스크린도 많고, 이에 따라 상영 시간 역시 다양하게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편하게 관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독립영화를 보러가는 일은 이와는 많이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영화를 보는 일처럼 행동해서는 곤란합니다. 아무 영화관에 찾아가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독립영화를 자주 상영하는 예술영화관 같은 곳을 찾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곳을 찾는다고 해서 보고 싶은 영화를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영화를 선택하고, 영화관을 찾더라도 상영시간이라는 장벽을 만나게 됩니다. 상영시간과 자신의 일정이 맞지 않으면 영화를 볼 수가 없습니다. 최근엔 독립영화나 예술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의 숫자에 비해 개봉하려는 영화가 많은 탓에, 대부분의 예술영화관들이 하루에 여러 편의 영화를 상영하여 영화당 1회씩 상영하는 경우가 잦아 무작정 영화관을 찾아서는 보고 싶은 영화를 볼 수 없습니다. 어느 사이 개봉 독립영화를 보러 가는 일이 영화제나 시네마테크를 찾는 일처럼 변해버렸습니다. 주로 스크린이 하나인 예술영화관이 보다 많은 영화를 상영하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 개의 스크린을 가지고 있는 멀티플렉스는 어떨까요? 유감스럽게도 멀티플렉스의 상황도 마찬가지 입니다. 여러 개의 스크린이 있다 하더라도 독립영화를 상영하는 스크린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있다고 하더라도 역시 스크린이 하나 뿐이라 하루에 여러 영화를 교차상영하기 때문에 상영시간에 내 일정을 맞출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듯 영화관에서 독립영화를 보는 것은 영화관의 사정에 내 일정을 맞춰야 하는 조금은 특별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원하는 영화를 꼭 보기 위해서 희생해야하는 것들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독립영화나 예술영화를 찾는 관객들이 있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그분들이 존경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요? 만족스럽지 않은 상영 환경에도 불구하고 독립영화를 찾아주시는 관객 분들이 고마울 따름입니다.

독립영화 관객이 된 후, 상영 시간의 아쉬움 말고 또 다른 아쉬움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예술영화 스크린을 찾으면서 알게된 것인데요, 다른 영화와 똑같은 관람료를 지불하고 영화관이 지정한 시간에 자신의 일정을 맞춰 영화관을 찾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영화를 보는 관객에 비해 '항상' 열악한 환경에서 영화를 봐야합니다. 멀티플렉스의 예술영화 스크린은 해당 극장의 스크린 중에서 좌석수가 가장 적은 곳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다른 영화들 처럼 넓은 스크린에서 영화를 감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주 상영하지 않는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는다는 것은 그만큼 영화에 대한 애정과 영화관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뜻일텐데, 보러가는 영화가 시장성이 떨어지는 영화란 이유로 늘 홀대를 받고 있는 셈입니다.

예술영화 스크린을 운영하는 멀티플렉스들은 관객에게 대단한 혜택을 돌려주고 있는 마냥 스스로를 홍보합니다. 엄청난 이익을 거둘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예술영화 스크린을 운영하는 것처럼 포장하지만 사실 예술영화스크린의 좌석수는 각 멀티플렉스 체인이 가진 전체 좌석수의 1%에도 미치지도 못하는 매우 낮은 수준입니다. (무비꼴라쥬라는 브랜드로 가장 많은 9개의 스크린을 운영한다는 CGV의 무비꼴라쥬 좌석수는 9관을 다 더해도 1천석에 미치지 못하며, CGV 전체 사이트 좌석수의 1% 미만입니다.) 그리고 그 스크린의 관객들 역시 동등한 입장료를 내고 영화관을 찾습니다. 시장성 있는 영화를 상영하는 것보다 수익이 낮을 수는 있지만, 대단히 많은 수익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멀티플렉스의 예술영화스크린이 존재에는 사업자 측의 배려도 있겠지만, 다른 영화에 비해 열악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이를 감수하는 관객들의 배려 역시 중요한 근간임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상황을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일까요? 그렇게 삐딱하게만 볼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공간이라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지켜내야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과거 독립영화가 애초에 개봉 상영을 못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의 환경이 얼마나 나아진 것인지 생각하며 행복해야 마땅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현재의 조건을 무조건 긍정해야 한다는 것에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습니다. 멀티플렉스가 한국에 등장한 이후, 각 멀티플렉스 사업자들은 영화관으로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많은 노력과 새로운 시도를 해왔습니다. 그 결과 한국의 영화관객수는 멀티플렉스가 생기기 이전보다 늘어났습니다. 이런 변화가 독립영화와 무관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영화를 선택하고 찾아보는 환경이 지금 보다 조금 더 나아진다면, 개인의 일정을 영화의 일정에 맞추지 못해 관람을 포기한 관객들이 영화를 찾게 될 것이고 보다 많은 새로운 관객들 역시 유입될 수 있을 것입니다. CJ E&M 픽쳐스의 계열사인 필라멘트 픽쳐스가 배급한 <파수꾼>은 영화관이 배려한다면 독립영화 역시 조금 더 많은 관객이 찾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작은 스크린, 작은 상영관 크기 등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멀티플렉스의 예술영화스크린은 관객들에게는 매우 소중한 공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 영화관을 사랑하는 관객들도 매우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멀티플렉스 사업자들이 이런 열성적인 관객들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 더 개선되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영화를 공짜로 보는 것도 아니고, 영화관람료 이상의 개인적 비용을 지불하고도 기꺼이 영화를 보러 오는 관객들이 보다 나은 환경에서 영화를 볼 수 있도록 조금 더 신경쓰는 일은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가까운 미래의 어느 때엔 지금보다 큰 상영관의 넓은 스크린에서 독립영화를 보게 되는 날이 오기를 살며시 바래봅니다.

 

 

어떤 자기위안으로 이 글을 가져온 것은 아니다. 다만, 이 글의 두 가지의 문제의식에 적극 공감하기 때문이다. 일단 하나는 멀티플렉스에 대한 것인데, 현재 대기업들이 운영하는 많은 멀티플렉스는 대부분, 독립영화들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거나, 있더라도 구색맞추기에 불과하다. 한 개의 영화를 몇 개의 스크린에 동시에 걸어, 멀티플렉스라는 말이 무색하게 관객의 선택권을 빼앗아버리는 것은 하루이틀의 문제가 아니고, 대부분의 멀티플렉스의 경우 독립영화나 '소위' 예술영화들을 거의 상영하지 않는다. 서울을 예로 들자면, CJ CGV의 무비꼴라쥬나 대한극장 등이 그나마 작은 영화들을 상영하는 극장인데, 그 라인업을 보면 거의 구색맞추기에 가깝고, 또 상당수의 영화들이 1-2주의 상영으로 그치거나, 심한 경우에는 개봉 하루이틀만에 교차상영(2개 이상의 영화를 번갈아 한 관에 상영하는 것)이 되는 경우도 흔하다. 그래서 작은 영화들에 대한 정보를 겨우 찾아야만 알 수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보고 싶은 영화가 있더라도, 이미 상영관을 확인해보면, 상영이 끝난 이후인 경우가 허다하다.

 

보다 문제는 이런 영화들이 작은 상영관, 작은 스크린, 불편한 관람 환경에서 상영되는 것이 거의 당연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대형 멀티플렉스에서 작은 영화들은 지하 1-2층, 혹은 아주 꼭대기의 아주 작은 상영관에서 상영되는 경우가 허다하며, 독립 영화들과 예술 영화들을 주로 상영하는 극장들은 일단 극장을 찾는 교통편에서부터 고역을 치러야 하며, 작은 스크린과 좁은 의자에, 앞사람의 머리가 스크린을 가리는 불편한 환경을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글쎄. '좋은 영화'를 보여주므로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것일까. '좋은 영화'를 상영하기 때문에 이 정도는 관객들의 '호의'로 웃어넘겨야 하는 것일까. (요즘 왠만한 멀티플렉스에서 앞 사람의 머리가 불편함을 느낄 정도로 스크린을 가린다면, 아마도 관객들의 항의가 빗발칠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로 작은 영화관에 갈 때는 도리어 사람이 많다면 걱정부터 되기도 한다. 평소와 같이(?) 사람이 없다면, 자리를 골라 앉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때로는 웃어넘길 수 없을 정도로, 불편한 경우도 많다. 단순히 '자리'의 불편함을 넘어, 형편없는 영사 환경에서 영화가 상영될 때가 그런 경우인데, 예를 들어 대한극장을 관리하는 분들은 작은 영화가 주로 상영되는 지하 1층 상영관이 거의 1년 내내 핀트가 나간 상태에서 영화가 상영되며, 그래서 때로는 심할 정도로 뿌연 화면을 보여주는지를 알고 있는지, 그리고 CGV 관계자들은 대학로 CGV 지하에 있는 작은 상영관인 5관의 스크린 가운데에 미세한 찢어진 틈이 있어 빛이 새어 나오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서울이라서, 이런 영화들이라도 볼 수 있으니 낫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이런 작은 영화관들이 사라지지 않고 그나마 버텨주고 있어서 고맙다고 해야하는 것일까(그간 작은 영화들을 상영하던 많은 영화관들이 사라졌으므로). 구색맞추기라도 멀티플렉스들에서 독립영화들을 (아주) 가끔 상영해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정말 잘 모르겠다.

 

 

덧 1.

 

그래서 요즘 고마움을 느끼는 것이 두 군데가 있는데, 하나는 주로 독립영화나 예술영화들을 상영하면서도 거의 최상의 상영환경을 자랑하는(멀티플렉스들과 비교해도 동급최강의), 건대에 있는 KU시네마테크이고, 다른 하나는 큰 영화제는 물론이고, 작은 영화관들에서 상영되는 자잘한 영화제들이나 상영 소식들을 잘 정리해서 전달해주는 여기 '알라딘 무비 어드바이저' 서재이다. 개인적으로 작은 영화들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여러 사이트를 전전하는 편인데, 어느 사이트를 보더라도 여기 서재처럼 총망라하여 잘 전달해주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담당자님의 성실한 노력에 감사를 표할 뿐이다.

 

덧 2.

 

 글이 링크가 된 트위터에 다음의 추가 문구가 달려 있던데, 적극 동감한다. "새롭게 안 사실인데, 이 나라에서 독립영화 따위를 극장에서 보려면, 우선 졸라 자유업이거나 백수거나 둘중에 하나여야 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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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1 18: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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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1 18: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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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2 17: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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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3 00: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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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3 12: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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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4 14: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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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5 12: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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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2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은 관이라도, 온전히 독립영화에 할애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교차상영, 조기종영.. 어찌나 짠지 말입니다. 대기업 멀티플렉스들, 16개관이나 되고 그러면, 작은 관 하나쯤 시원스레 통째 내줘도, 여러 모로 손해보단 이익이 많지 싶은데... 라고 인천 살 때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아랫동네로 내려오고 보니, 아예 접근불가능인 영화가 아주~ 많네요.
독립영화 따위를 보려면, 졸라 자유업 + 백수 + 수도권 거주..여야 하는 거지요.-.-

맥거핀 2011-12-22 17:39   좋아요 0 | URL
맞는 말씀입니다. 대기업들이 영화 사업에 뛰어들면서 작은 영화관들이 많이 사장되었고, 대기업이 운영하는 극장들보면 독립영화에 대한 배려를 거의 하지 않습니다. 그저 나 그래도 뭐 하고 있음..이런 수준이지요. 가끔은 멀티플렉스가면 서글플 때가 있어요. 니네는 지하가서 봐! 이러는 거 같아서..그렇다고 독립영화 관객이 돈을 적게 내는 것도 아닌데요.

하기는 또 이것도 분명히 배부른 소리일 수 있겠지요. 저도 확실히 다른 분들보다는 일이 자유로운 편이라 그나마 몇 개의 영화를 보는 거니까. 거기다가 수도권 거주구요. 다른 분들에 비해 상당히 좋은 조건이네요.^^; 지방에도 시네마테크나 독립영화 전용관들이 많이 생기면 좋으련만, 이 나라의 문화정책이란 게 점점 퇴보하고 있으니..독립영화라는 것은 아무래도 조금 더 지원을 해줘야 상영도 하고, 영화를 제작할 수도 있는데, 뭐 거의 자유방임이거나 도리어 방해하는 측면도 있고..좀 다른 얘기겠지만, 얼마전 씨네21에서 대기업들의 영화 사업에 대해 다각도로 분석한 글을 보았는데, 조금 걱정이 되더라구요. 통합과 거대화가 도움이 되는 사업도 있겠습니다만, 영화에서 만큼은 거대화와 그에 따른 계량화란 다양성을 무너뜨리는 지름길인데, 다양함이 없는 문화란 곧 쇠퇴의 길로 접어들기 마련이죠.

ICE-9 2011-12-28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격하게 공감이 가는 글입니다. 사실 멀티플렉스가 도입될 초창기 부터 영화의 선택권이 오히려 제한적일 것이라는 견해가 더욱 지배적이었죠. 몇 년 전 있었던 김기덕 감독의 항변 역시도 그 때부터 예견된 일이기도 했구요. 사실 영화에 대한 비평 담론에 사람들이 무관심해지고 더이상 영화가 오락거리 이상의 의미가 되지 못하게 된 것도 영화 산업이 대자본 중심으로 급격하게 재편되면서 맞물려 일어난 현상이 아닌가도 싶어요. 박정희가 보여주었던 압축적 근대화 그대로 헐리우드 영화 따라잡기 식의 산업적 주도와 그로 인한 유행이 그 전까지만 해도 풍부했었던 유럽 영화적 경험을(타르코프스키의 `희생`에 대한 우리나라 관람객수는 유럽 영화계까지 놀라게 만들 정도였죠.) 점차 일소시켰고 그렇게 더욱더 획일화되고 협소화된 영화적 경험의 창구로 인해 다양하고 풍부한 경험을 가지지못한 대중이 이제 거기에 길들여져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구요. 생각해보면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들을 극장에서 볼 수 있었던 것도 언제였나 싶네요. 길은 영화를 더이상 지금과 같은 신자유주의에 맡겨두어서는 안되고 말씀하신대로 국가의 적극적 개입과 정책이 있어야 할 듯 한데 참으로 요원한 게 사실이고 보니 그저 답답한 마음만 가득이로군요. 영화팬들은 이제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적 경험을 위해 게릴라가 되어 각개격파할 수 밖에는 없는 걸까요?

맥거핀 2011-12-28 13:17   좋아요 0 | URL
네..동의합니다. 최근 대기업들이 영화 시장을 장악하면서, 한국영화는 점점 이상해지고 있는 것 같아요. 대기업들은 오로지 산업에 기반한 사고만을 하니까요. 예를 들어 대기업 제작사들의 경우 시나리오를 신별로 모니터링을 하여 점수를 매겨 수정한다고 하던데, 참 우려되는 일입니다. 그렇게되면 필연적으로 `적당히 좋은` 시나리오만 살아남게 될 테니까요. 5점과 0점이 공존하는 영화가 매력적이지, 4점만 줄줄이 보여주는 영화는 무슨 매력이 있을까요.

박찬욱, 봉준호, 이창동, 홍상수, 김기덕, 김지운..등등의 새로운 작가주의 감독들과 특유의 프로듀서 시스템이 결합하여 만들어냈던 한국의 영화 르네상스는 지금으로서는 쇠퇴기에 접어든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박찬욱과 김지운은 할리우드로 갔고, 김기덕은 지쳐버렸고..새로운 박찬욱, 새로운 봉준호가 점점 튀어나와야 하는데, 현재의 대기업 시스템에서 가능할까요? 회의적입니다.

뭐 예술영화, 독립영화를 볼 수 있는 창구의 숫자 자체가 줄어들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기업 멀티플렉스의 소위 `예술관`들이 선호하는 영화는 또 그 중에서도 따로 있다는 거죠. 지금 있는 영화들을 예로 들자면 그런 예술관들은 <르 아브르>나 다르덴 형제의 <자전거 탄 소년>은 틀지 몰라도, <잼 다큐 강정>이나 <하얀 정글>, 혹은 지나간 고전 같은 영화는 안 틀겠죠. 그 영화를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영화를 우리도 튼다` 이 사실 자체가 더 중요하니까. 그래서 저는 대기업들이 궁극적으로 예술영화나 독립영화들에 손 뗐으면 좋겠어요. 그런 예술영화나 독립영화는 정부의 지원 하에 독립된 상영관, 시네마테크에서 충분히 상영이 되는 시스템. (멀티플렉스들은 그토록 좋아하는 블록버스터나 잔뜩 하라죠. 뭐.)

근데 문제는 헤르메스님도 말씀하셨듯이 이게 가능해지려면 문화를 보는 신자유주의적 사고는 집어치우고, 보호와 지원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현재 이 정부 밑에서 가능할까요. 진보정권이 집권하면 무엇인가 달라질까요. 현재로서는 억지로 영화들을 찾아보면서, 최대한 정치적으로 행동하는 수밖에는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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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12-13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의 중독음악.

맥거핀 2011-12-13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 갖은 노력으로 새로운 편집기의 기능을 사용하여 동영상을 올리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예전의 방법으로 성공.
 

 

 

 

<르 아브르>에 대한 짧은 평. 이 영화는 소위 말하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이다. 악인은 벌을 받고, 선인은 착한 일에 대한 보답을 받는다. 불가능은 가능해지고, 기적은 (말그대로)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그런데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는 그 내용만 동화와 비슷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 형식이나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도 동화 혹은 아주 어린아이들을 상대로 한 만화와 비슷해진다. 그것은 영화의 첫장면에서부터 감지할 수 있는데, 무표정한 등장인물들의 모습에 뭔가 코믹적인 분위기가 감돌고, 사건은 과장된 효과음으로만 제시되며, 그것은 이들에게 (그리고 그것을 보는 우리에게도)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아이들을 위한 만화에서 등장인물이 크게 얻어맞아도 우리는 그가 죽지 않을 것을 안다. 왜냐하면 이것은 아이들을 위한 만화(동화)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톰과 제리>에서 우리는 결국 톰의 모든 악행이 제리에게 위해를 끼치지 못할 것을, 그리고 결국 톰이 제리를 잡아먹지 않을 것을 안다.) 그러므로 이것은 따스하고 유머러스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동시에 뭔가 약간은 기괴한 인상을 풍기는 것도 사실이다. (많은 동화가 결국 아주 기괴한 이야기임을 생각해본다면 말이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여기에 아주 힘든 이야기가 결합된다는 점이다. 아프리카인들의 유럽으로의 (아마도 불법적인) 밀항(인간 거래), 그리고 그 와중에서 한 소년의 탈출. 많은 이들이 결코 상상하지 않는, 아주 먼, 뉴스에서나 나올, 아니, 뉴스에서도 잘 나오지 않을 그런 이야기. 동화적인 분위기와 이 힘든 서사가 결합하였을 때 어떤 이야기가 탄생할 것인가. 그런데 이 영화는 이 힘든 서사가 결국 한계에 부딪혔을 때마다 쉬운 선택을 한다. 이 아주 힘든 서사가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혀 좌초될 위기에 이를 때마다 쉬운 동화적 데우스마키나가 출현하여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몇몇 장면들을 이야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소년이 컨테이너에서 탈출할 때의 동화적인 시퀀스들, 감옥에서 소년의 할아버지를 만나야 할 때 동화적 거짓말이 먹혀드는 것, 혹은 소년의 탈출 비용으로 3000유로가 필요했을 때 남편과 아내의 조금은 우스꽝스러워보이는 동화적 화해.

 

글쎄. 이것이 어떤 영화적 솔직함이라고, 현실을 과장하거나 기만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물론 우리는 늘 영화에서 표면적으로 이야기되는 것과, 그와 다른 층위에서 작동하는 것들을 분리하여 바라볼 필요가 있다. 또한 한편으로 늘 동화라는 것이 그 표면에서 이야기하는 권선징악 외에 다른 층위에서 중요한 진실을 이야기하여 왔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 인물들의 소박한 진심이 서사적인 커다란 벽에 부딪혔을 때, 그 커다란 벽이 그저 간단한 동화적 처치로 사라져버리는 것을 보면서, 불편함을 조금 느낀 것도 사실이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도중에 찾아오는 몇 개의 작은 (거짓과 같은) 기적들 속에서 마침내 찾아온 진짜 기적, 그 기적을 보며 헛웃음이 나왔던 것은 아마도 나뿐이었겠지.

 

 

덧.

 

같은 이야기를 다르덴 형제의 <약속>은 소년과 아프리카 여인을 지하철 속의 출구없는 통로에 가둬놓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리고 지하철의 소음은 화면이 사라진 이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아주 아름다워 보이나, 그것을 애써 들여다보기 불편한 세계가 <르아브르>의 세계라면, 처절하고 고통스러워보이나, 기꺼이 들여다봐야할, 그리고 들여다볼 수 밖에 없는 세계가 <약속>의 세계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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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3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영화 보고 참 좋았었는데, 그와는 별도로 맥거핀 님 비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정말 "거부할 수 없는" 의견이군요. 이 글은. (-대부의 조악한 패러디ㅋ)
마지막 문장 좋습니다. <약속>을 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문장입니다.

맥거핀 2011-12-13 21:42   좋아요 0 | URL
음..그럼 악인은 저군요. 대부에서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는 것은 늘 조금 더 나쁜 쪽이니.^^
제가 연말도 되었고 한데 마음이 불량스러워서 그런가봐요. 이런 영화보고 감동도 좀 받고, 마음도 좀 따스해지고 그래야하는데..뭐 못만든 영화도 아니고, 아키 카우리스마키니까..기꺼이..이래야하는데, 그 기꺼이가 안되네요.^^;

꽃도둑 2011-12-14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크 저는 듣도보도 못한 영화네요.
하기야 영화 보는 거 연말결산해봐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니...
표면과 또 그 이면에서 드러내고자 한 진실을 보고자 한 리뷰 매력적입니다.

맥거핀 2011-12-14 23:27   좋아요 0 | URL
뭐 꽃도둑님이야 영화 외에 다른 문화생활 많이 하시니..^^(절에도 다녀오시고..책도 열심히 읽으시고..) 저도 올한해 여러 영화를 봤지만, 기억에 아직 남아있는 영화는 몇 편 안되요.

표면과 이면의 진실 같은 거라기 보다는, 위에도 썼지만 제가 마음이 악해서..

아이리시스 2011-12-14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형제 하니까 말인데, 다르덴 형제와 코엔 형제와 스콧 형제 중에 저는 단연 스콧이거든요! 영화들도 좋아하고, 미드시리즈 <넘버스>도 좋고! 코엔 형제는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보고 나가 떨어졌고, 다르덴은 아예 관심도 없어요. 최근에 나온 게 맥거핀님 메인사진 포스터 저 약속이죠? <약속>이 다르덴 형제 것이고, 이 영화가 같은 이야기라길래 안보고도 "어른들의 동화"를 보기에 저는 때가 많이 묻었다는 생각이, 흙흙. 우리 기꺼이 하지 마요. 마음을 따라야죠. 크리스마스에만 따스해지란 법 있나요? 히히히히.

맥거핀 2011-12-14 23:35   좋아요 0 | URL
아아..스콧형제! 뭐 형이야 이미 거장이 된지 오래고, 동생은 스타일리쉬한 그만의 작품 세계를 이미 가지고 있지요. (그래도 저는 여전히 다르덴에 소심하게 한표를..) 영화도 확실히 유전인가봐요. 우리나라에도 정가형제도 있고, 곡사형제도 있고, 조금 다르지만, 류승완, 승범 형제도 있고..그러고보니 이 영화 <르 아브르>의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도 그의 형 미카 카우리스마키 감독이 있죠. 아..나도 영화 잘 찍는 형이라도 있었음 좋았을 것을...^^

저도 이미 마음이 썩었어요. 동화를 보면 뭔가 이상하고, 기괴한 것부터 눈에 들어오니..기적을 들려줘도 그 기적을 의심하고 앉아있으니, 아마도 기적은 저에게 찾아오지 않을 겁니다.^^

아이리시스 2011-12-15 18:20   좋아요 0 | URL
형제들이 많네요! 그렇다면 저도 다르덴에 꼭 한 번 도전해보겠습니다. 웬만하면 매니아적으로 좋아하는 것만 보는 취향을 고치려고요. 저는 오래전부터 노력했는데, 다양성을 인정하려는 노력과도 연관되구요. <르 아브르>도 형제라니 이건 정말로 전혀 모르겠는 거네요. 제가 졌음ㅋㅋㅋ

맥거핀 2011-12-16 12:16   좋아요 0 | URL
형제 배틀에서 승리 Get!!(아..이건 아니고..;;) 저는 개인적으로 사실 영화는 편협하고, 매니아적으로 보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멜로, 판타지, 액션, 스릴러, 공포, 다큐멘터리 뭐 이렇게 다양하게 보는 것도 좋지만..매니아적으로 한 분야만 또 열심히보다보면, 거기에서 영화를 보는 시각도 좀 길러지는 듯하고, 조금 더 깊이있게 볼 수도 있게 되겠지요. 아무래도 같은 영화라도 장르(장르라고만 하기는 좀 그렇습니다마는..)에 따라 문법과 구성이 많이 달라지니까요.
뭐 책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여러 분야를 넓게 보는 것도 필요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경우 한 분야를 깊게 보는 것이 더 필요할 때가 많지요. 거창하게 말하자면, 세상에 조금 더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 한 분야를 깊게 파고든 사람들이기도 하겠구요.;
 
아멘 - Ame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영화의 내용이 글에 전반적으로 들어있습니다.)

 

 

 

나는 이제 김기덕의 새영화 <아멘>에 대해 악의적인 리뷰를 쓸 참이다. 물론 이 첫문장을 보고 당신이 머금었을 희미한 웃음을 짐작한다. 대체로 '악의적인 무엇인가를 하겠다'라고 말을 하는 자들일수록 그 악의라는 것과 가장 거리가 먼 자들이니까. 그렇다면 이것은 리뷰쓰기의 새로운 전략인가, 아마도 당신은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튼 나는 이 리뷰가 결국 악의적인 리뷰가 될 것임을 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이다. 먼저 첫 번째 이유는 나는 이 영화의 이야기들을 결국 '해석'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애정의 대상이지, 해석의 대상이 아니다. 해석이라는 것은 결국 잘게 나누어, 각각의 것을 본 다음, 그것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재조립하겠다는 것이다. 그 틈바구니에서 영화는 종종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되고, 누군가가 겨우 얻게된 마음의 안식이나 감동을 때로는 고스란히, 그리고 폭력적으로 앗아가버린다. 어떠한 경우에서든 해석이 애정의 우위를 점할 수는 없다. 두 번째 이유는 해석인데다가, 그것이 감독의 현재 주위를 둘러싼 어떤 일들에 기초한 해석이기 때문이다. 즉 이 해석은, 감독 김기덕에 대해 여러 매체를 통해 알게된 부정확한 사실들에 기초한 해석이다. 영화가 그 의도한 바와 다르게 스크린 외부의 어떤 것들에 의해 지배되며, 그 자장 안에서만 해석될 때, 영화는 때로 저열한 프로파간다가 되거나, 누군가의 이익을 위한 도구만이 된다. 물론 나는 이제와서, 지금 이런 시대에, 영화의 순수성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단지 한 영화가 그 영화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 분리된 채, 그것을 보는 이에게 영화 외부의 어떤 것들만 끊임없이 환기시킨다면, 그것은 또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것이 슬픈 이유는 그것은 그 영화 자체의 내적인 존재목적을 묻게 하기 때문이다. 결국 다른 어떤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이 영화의 목적이었다면, 그 영화는 그런 형태의, 그런 내용일 이유가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 이 두 가지 이유를 들은 누군가는 그럼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아, 그렇다면, 리뷰가 결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면, 리뷰 자체를 아예 안쓰면 되지 않나. 그러나 나는 이런 식의 말도 안되는, 악의적인 리뷰라도 이 영화에게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뒤에서도 잠깐 이야기하겠지만, 결국 가장 잔인한 것은 무관심이며, 가장 잔악한 행동 중의 하나는 그 무관심을 무기로 휘두르려고 할 때일 것이므로. 그리고 한편으로 이 영화야말로 어떤 의미에서는 그 무관심의 무기에 맞고 비틀거리는 사람의 간곡한 호소일 것이므로.

 

감독 김기덕을 둘러싼 여러 소문들이 있었다. 폐인설도 있었고, 후배감독과의 불화설도 있었고, 계약이나 영화의 진행과도 관련한 여러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영화 <아리랑>이 세상에 나왔고, 그 영화의 특이한 형식과 내용을 둘러싸고도 여러 이야기들이 오갔다. (자세한 내용은 <씨네21> 832호에) 그리고 그 <아리랑>과 짝을 이룬다고 할 수 있는, <아리랑>이 병적 질문들로 가득한 영화라면, 그에 대한 종교적 치유물일 <아멘>이 연이어 공개되었다. <아멘>은 프랑스로 날아가고 있는 여자(김예나)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별로 이야기라 할만한 것은 없다. 이 여자는 파리에서부터 시작하여 베니스, 아비뇽 등 여러 곳곳에서 '이명수'라는 남자를 찾아다니는데, 이 '이명수'는 여자가 찾아가는 곳마다, 이미 어디론가로 떠나버린 후다. 이 영화는 그런 여자를 그저 건조하게 쫓아다닐 뿐인데, 사건이라 할 만한 것은 그 여자를 몰래 관찰하고 따라다니는 방독면을 쓰고, 군복을 입은 남자가 있다는 것이다(이 남자는 김기덕 자신이 연기하고 있다. 물론 계속 방독면을 쓰고 있기 때문에 얼굴을 확인할 길은 없지만, 뒷모습만으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이 남자는 야간열차 안에서 이 여자가 자는 틈을 타서 이 여자를 강간하는데(이 장면은 직접적으로 제시되지는 않는다), 여자는 후에 선명한 두 줄의 임신선을 통해 자신의 임신 - 당신은 이제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라는 - 것을 알게 되고, 이 방독면을 쓴 남자는 여자에게 자신의 아이를 고향(한국)에 돌아가 낳아달라고, 자신은 자수를 하고 죗값을 치르겠다는 쪽지(아기신발과 군복에 쓴)를 보낸다. 그리고 낙태를 할 것 같아 보이던 여자는 결국 아이를 낳으려고 결심하는 것처럼 보이며 영화가 마무리된다.

 

물론 이러한 줄거리만 본 분들은 또 그런 (변태적인) 이야기인가..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김기덕의 영화세계에서 그렇게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고, 그간 해왔던 이야기에 비하면 그렇게 발전한 것도 없는 이야기처럼도 보인다. (초중반까지는 <나쁜 남자>의 프랑스 버전 같아 보이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현재 김기덕을 둘러싼 여러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 이야기가 조금은 다르게 읽히는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아리랑>의 연장선상에서, 이 여자와 방독면을 쓴 남자를 김기덕의 여러 다른 분신들로 보는 견해들이 있다. (사실 <아리랑>을 아직 보지는 않았지만) <아리랑>은 인간 김기덕과 감독 김기덕의 여러 분신들이 출몰(충돌)하는 영화라고 하니까. 그러나 <아리랑>을 건너뛴 입장에서 보면, 조금 더 단순하게 읽히는 측면도 있다. 군복을 입고, 방독면을 쓴 남자를 쓴 김기덕 자신이 연기하는 것으로 볼 때, 그가 김기덕을 상징하고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군복은 그간 김기덕 영화세계에서 주요한 클리셰들 중에 하나였고, 방독면은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간단하게 외부세계와의 차폐적 의미로, 현재 외부와 차단된 그의 자폐적 심리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의 영화세계에 대한 보호적인 측면으로는 보는 것이다. 방독면이라는 것은 결국 외부의 오염을 막기 위해 필요한 장비이기 때문이다. 즉 이미 오염된 것은 외부세계이고, 보호되어야 할 순수한 것은 그 방독면 안에 있는 것, 즉 김기덕의 영화세계이다.

 

이것을 기초로 하여 이 여성을 생각해 보면, 이 여성(김예나)은 한국의 영화인들, 평론가들, 관객들이다. 남자가 주위를 맴돌고 있으나, 결코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다가갈 때마다 거부반응을 보이는 이 여자는 왠지 한국의 관객들에 대한 김기덕의 비유로 읽힌다. 상징적으로 볼 때도, 후반부에 이 여자의 대한민국 여권을 클로즈업하는 불필요해 보이는 장면은 그런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이 여자에게 이 방독면을 쓴 남자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아이(작품)를 낳아주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작품이란 결국 감독 혼자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영화는 결국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남자는 기괴하게, 그리고 한편으로는 간곡하게 고향에 돌아가 아이를 낳아줄 것을, 즉 한국의 스크린들에 자신의 영화가 성황리에 받아들여지기를 고대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이것이 결국 잠든 여자에 대한 강간의 형식, 즉 여자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이 여자에게 조심스레 다가가려 애쓰면서, 자신의 물건 - 겉옷, 군복, 아기신발 - 들을 여자에게 전해주려 애쓴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이 여자가 찾아다니는 것은 오로지 '이명수'라는 실체를 알 수 없는 남자라는 것. 파리에도, 베니스에도, 아비뇽에도, 즉 유럽 어느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남자. 여자는 돈이 떨어져 동냥을 하면서까지 이 실체없는 실체를 찾아다니고, 때로는 바보같아 보일 정도로, '이명수~!'라는 공허해보이는 외침을 내지른다. 이것이 바보같아 보이는 이유는 그 행동도 행동이지만, 이 때만큼은 유독 더 바보같은(즉 아주 단순해보이는) 컷들과 편집을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인데, 중간에 남자의 이름을 외치는 여자의 모습과 그녀의 외침이 가닿는 모습을 형상화하는 듯한 줌인컷을 번갈아 넣는 장면이 대표적이라 해야할 것이다. 즉 이 행동들은 바보같은 행동이라는 것이 결국 김기덕의 말인 셈인데, 그것은 두 가지 이유인 것처럼도 보인다. 즉 그것은 이 여자가 결국 한국의 관객들을 상징한다는 연장선상에서, 아직도 한국의 관객들은, 동냥을 하면서까지 프랑스의 실체 없는 실체만을 찾아다니는 여자가 상징하듯이 외부(국)의 영화적 권위와 영화적 자본에 길들여져 있다는 의미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 후반부에 말해주는 것처럼 결국 이 '이명수'가 누구인지를 알아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그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사실 기차로 지속되는 지금까지의 이 여행은 방독면을 쓴 남자가 준 돈으로 지탱되었다. 명확히 제시되지는 않지만, 동냥으로는 거의 돈이 모이지 않았고, 그 때마다 거금을 전해준 사람은 방독면을 쓴 남자였다. 이를 조금 더 악의적으로 말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우리의 영화계는 지금껏 베니스에서, 그리고 칸에서 통할 수 있는 '이명수'를 찾고, 지지를 모으기 위해 애썼지만, 역설적으로 해외에서 가장 인정받고, 지지를 받고, 우리 관객들을 조금이나마 그 베니스와 칸에 가깝게 데리고 간 것은 여자(관객)에게 그토록 외면받는 방독면을 쓴 남자 - 김기덕 감독인 것.)

 

영화 후반부, 여자가 애타게 찾아다니던 '이명수'가 결국 방독면을 쓴 남자일지 모른다는 암시가 제시된다. 그리고 여자는 (낙태를 위해) 병원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리고, 방독면을 쓴 남자는 경찰서로 향한다. 그리고 여자는 열차 안에서 남자의 방독면을 쓰고, 군복을 입고, 한참 후 그것을 홀연히 벗더니 카메라를 향해 스크린을 만들어 보인다. 결국 김기덕 감독이 바라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을까. 여자가 남자가 입었던 군복과 방독면을 쓰고 그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처럼, 한국의 관객들이 자신(김기덕 감독)의 영화세계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고. 자신이 이제 앞으로 만들어낼 새로운 스크린 앞으로 조금이라도 더 나와 주는 것. 여러 연이은 사건들로 인해 폐쇄된 자신을 조금이라도 끌어당겨줄 수 있는 사람은 결국 한국의 관객들밖에 없다는 그런 의미.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자신도 반성하고 새롭게 자신의 영화세계를 만들어 나가겠다는 것(경찰서로 걸어들어간 남자)은 아닐까.

 

그래서 나는 애타게 그의 새로운 영화가 보고 싶다. 인간 김기덕과 현재 그를 둘러싼 여러가지를 연상케 하는 영화, 그래서 악의적인 리뷰를 쓸 수 밖에 없게 하는 그런 영화보다도, 그가 만들어낼 새로운 세계, 현재의 모든 것을 넘어서 관객에게 충격을 안길 수 있는 새로운 세계의 영화를 보고 싶다. (마치 그의 첫 영화가 세상에 나왔을 때처럼 말이다. 그의 첫 영화는 충격적이었고, 많은 관객들을 기꺼이 그의 안티로 만들거나, 그의 추종자로 만들었다. 이 <아멘>에서 우려되는 점 중의 하나는 이 영화가 아직도 어떤 성(聖)으로서 간단한 봉합을 하려 든다는 점이다. 변성찬 평론가가 지적한 바대로 이 영화의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이 영화의 성당 씬과 관련된 부분들이다.)

 

 

 

덧.

 

<씨네21> 832호 김영진 평론가는 이 영화에 대한 반대평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썼다. "예술의 살인적인 또는 자기 파괴적인 속성의 비유라는 것 외에 김기덕의 영화팬이 아니라면 이 영화를 볼 필요가 있을까(그런 면에서 이 영화를 정식 개봉하지 않은 것은 김기덕의 양심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평론가이기 전에 한 명의 관객으로서, 나는 <아리랑>과 <아멘>에서 김기덕이라는 예술가가 에고를 과시하고 투정부리는 것을 왜 봐야 하는지 모르겠다."

 

<평론가 매혈기>나 다른 여러 매체들에서 보여준, 김영진 평론가의 평소 영화에 대한 견해들을 즐겨 읽고 때로 공감을 느끼기도 했던 독자이나, 이러한 문장들에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영화로 밥을 벌어먹고 산다는 평론가의, 한 영화에 대한 무관심의 선동을 나는 받아들일 수도 없고, 이해하기도 힘들다. 영화의 세계에서, 누군가의 영화에 대한 무관심을 표할 것을 이렇게 언론매체에 대놓고 주장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휘둘러져서는 안될 무기이다. 그가 말했듯 한사람의 관객이기도 하지만, 그가 단순히 한 사람의 관객으로 읽는 이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그러니 이렇게 <씨네21>에도 '기고'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단순히 '관객의 입장에서' 여기에 기고를 한 것인가). 물론 '반대'는 당연히 가능하다. 그러나 '반대'와 '선동'은, 특히 '무관심에의 선동'은 단호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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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2 1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12 2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1-12-12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굉장히 좋은데요, 다른 분들은 어찌 말씀하실지 모르나 저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제일 처음 제시한 두가지 기준이라면, 인간은 그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짜피 주관적 경험에 주관적 해석 아닙니까. 아무리 정확하고 객관적인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정확하고 객관적인지는 의문스럽습니다.

김기덕 감독을 좋아합니다만, 그를 보면 이번에 임재범 씨의 인터뷰가 생각납니다.
흔히 천재, 또는 재능있는 분들이 그렇습니다만.. 애정을 갈구하고 인정을 갈구하지만
자신이 있는 그대로, 무엇을 하든 사랑받기를 원하지 않나 싶습니다. 하지만 가끔 그것은 타인에 대한 터무니없는 오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렇기에 훌륭한 작품이 나오는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영화인지 궁금하네요.. 일산에서는 이런 영화들 개봉 자체를 하지 않아요. ㅎ

맥거핀 2011-12-12 21:40   좋아요 0 | URL
아..감사합니다.^^ 물론 말씀하신 바대로 해석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해석이 객관적이라고 말해지는 순간 그 해석이야말로 가장 주의해야할 해석이겠지요. 다만, 저는 요즘의 어떤 해석들이 두려울 따름입니다. 수잔 손택의 말대로 해석이 지식인이 가하는 복수가 되어, 누군가의 감성, 예술적 감수성을 잡아먹을 때의 두려움이요. (김기덕의 영화도 그간 많은 해석가 - 특히 심리적 해석가 - 들에 의해 난도질되어, 거의 사이코들의 영화가 되어버린 측면도 있구요.) "비평의 기능은 예술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이 어떻게 예술작품이 됐는지, 더 나아가서는 예술작품은 예술작품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여사의 말을 다시 되새겨봅니다.

예술가들이 종종 에고가 지나쳐 주위를 망가뜨리고, 더 나아가 자신마저 망가뜨리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의 경우 여러가지 벌어진 일들과 겹쳐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구요. 그의 이 영화가 그런 지나친 에고가 가득한 측면이 분명 있습니다만, <아리랑>이나 <아멘>은 조금 특수한 상황으로 보아야 할 듯 싶구요, 그의 다음 영화가 정말 눈이 번쩍 뜨일 좋은 작품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일산에도 좋은 영화들이 많이 상영하길 바라며..)

2011-12-13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진짜 김기덕 영화는 너무 드러내 놓거나 너무 절제하거나 였던 거 같아요. 근데 제가 좋아한 영화는 주로 절제한 쪽... (파란 대문이야말로 내가 젤 좋아할 듯도 한데, 안 봤으니까 패스~) 제가 좋아했던 것은 <빈 집>, <사마리아>,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사실 마지막 영화는 봤을 당시엔 앞의 것과 다름없이 좋았지만, 그 뒤에 기억에 남기론 앞의 두 영화가 더 좋아요.) <나쁜 영화>은 좀 힘든 설정들만 빼면 좋았고. <비몽>과 <파란대문>은 안 봐서 후회했고, <수취인불명>과 <섬>은 절대 못 볼 것 같고... <활>은 잘 모르겠고. <아멘>과 <아리랑>은 볼래야 볼 수가 없네요. 여튼 그가 맥거핀님 말씀대로 상처받기보단 좀 더 펼쳐나갔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김기덕 감독은 여러 모로 굉장히 연구대상, 흥미로운 분입니다.
그나저나 영화광인 맥거핀님께 자랑 하나 지르자면, 저 18일 (일)에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클로즈 업> + 관객과의 대화, 간답니다...으하하하ㅎ 맥거핀님이 젤 부러워해주실 듯 하여, 여기에다 자랑질...ㅋㅋㅋ

맥거핀 2011-12-13 22:12   좋아요 0 | URL
음..맞아요. 김기덕 감독에게 한국 최고의 감독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약간 주저되지만, 항상 최고의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감독임에는 틀림이 없지요(절대 빈정대는 말이 아니구요). 그만큼 스타성도 있는 감독이구요.
섬님의 댓글을 보고, 네이버가서 김기덕의 필모를 보면서 예전에 본 영화들을 생각해봤어요. 저는 <야생동물보호구역>이나 <실제상황>, <수취인불명> 같은 초기작이 좋았고 (나름)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이미지들도 그러했지만(진짜 몇 장면은 큰 스크린으로 보며 다리가 후들후들했던 기억이..), 그보다는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나, 될대로되라 식의 주인공 설정 등이 그랬었지요(그래서 아직도 조재현 씨 보면 지금 이미지들에 몰입되지가 않아요). 그 후에 <시간>이나 <빈 집> 같은 중간의 작품들을 봐도 처음만큼 새롭지는 않더라구요. 아무튼 김기덕 감독의 경우 보여줄 것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는 생각인데, 뭔가 괴물같은 충격적인 영화가 나왔으면 좋겠어요.

오..압바 감독이 한국에 왔군요. 몰랐어요. 하이...섬님께 미션 하나드리지요. 이란어로(한국어나 영어 안됨) 정곡을 찌르는 질문 하나 하시고 그 결과를 블로그에 알려주세요. 심통나서 드리는 말씀임!

2011-12-14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야생동물보호구역, 씨네21에서 20자평이나 리뷰를 보며, 진짜 설정 독특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네요. (아, 제목 격 안난 영화가 <실제상황>이군요. 이 영화는 좀 보고 싶어요..ㅎ)
전, 선점하는 스타일은 아닌가 봐요. 그니까 예를 들어 드라마도, 소문난 뒤에 5,6회부터 보는 스타일?! 그렇군요. 맥거핀님이 말한 초기작이 더 좋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모든 경험은 당대에 해야, 특히 영화는 개봉관에서 봐야 제 맛이니 이미 놓친 거지요.^^

여튼 한국의 다른 먹물 감독들과 비교할 수 없는 말그대로의 독특함이 있는 감독 맞아요. 다만 그것을 낳은 그의 `비범한` 인생이 그에게 남긴 상처도 있는 듯 합니다. 여배우들에 대한 소문(좀 비하인드로 들은 거라 믿을 만한 소식통이라 생각되는 소문..)도 그렇고, 그 외에도 관객이나 평론가, 아니 한국 사람들 전체에 대한 그의 거칠고도 솔직한 + 양가적인 모습에서도 그렇구요. 어쨌든, 다른 무엇보다 `볼 가치가 있는 영화`로 말을 하는 사람이니 한국영화계의 소중한 사람은 맞지요...
(그는 진짜 `궁금해지는` 인물인지라, 정성일이 엮은 <김기덕, 야생 혹은 속죄양>이란 책을 읽게 되더군요. 읽은 결과는, 역시나 대단히 흥미로운 사람이구나.였지요.)

맥거핀 님의 미션에서 힌트 하나 얻었네요. 이란어 인사 하나 공부하고 + 뇌리를 파고드는 예리한 질문 하나 던져서, 압바 감독님께 잊지 못할 추억 하나 남겨드릴까요? 결과 인증은 압바감독님과 제가 함께 있는 사진으로 대신하고용. 으흐흐흐흐흐 (사실 적극성 결핍증이 있어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만. 둘 다.)

맥거핀 2011-12-14 23:24   좋아요 0 | URL
저는 키노였던가, 씨네21이었던가에서 계속 문제적 감독이니 어쩌니 논쟁들이 붙어서, 도대체 영화가 어떻길래..하고 처음에 김기덕을 접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실제상황>의 경우 옛 여친님이 주진모 씨 광팬이어서, 어쩔 수 없이..^^;) <수취인불명> 같은 경우는 정말 극장도 황량했는데, 영화는 그보다 훨씬 황량했었구요.

사실 김기덕에 대한 가십들은 별로 들은 바가 없습니다. 항간에는 엄청 순수한 사람이라고도 하고, 뭔가 이상하다는 얘기도 있는 걸로 아는데, 글쎄요. 사람을 가까이서 접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지요. 뭐 아무튼 감독은 작품으로 말하면 되니까요. 아주 큰 흠결이 있기 전에는 대체로 그의 작품이 좋으면 그를 지지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밑에 제가 글을 쓴 로버트 알트만 감독 같은 경우에도, 사생활 측면에 있어서는 많은 소문을 가지고 다녔지만, 뭐 영화가 저렇게나 좋다면야...)

그리고, 뭐 그럼 이젠 압바 님과 섬 님의 인증을 기다리면 되는 건가요? 뭐 인증은 안하시더라도, 압바 님이 해주신 좋은 얘기 있으면 전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