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학교는 상당한 고급 아파트촌과 그저그런 주택가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고, 그런 만큼 소년들은 거의 정확히 두 세계로 나뉘었다. 그것은 소년들의 입성과 도시락 반찬들만 보아도 대략은 짐작할 수 있었다. 교복은 아무 것도 감추지 못하고, 점심을 알리는 종소리는 아무 것도 말해주지 못한다. 사실 그것을 정확히 나뉜 두 세계라고 말하는 것은 옳은 것일까. 한 세계가 다른 한 세계 안에 종속되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소년들은 사실 많은 것을 안다. 어른들이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안다. 그들은 어디까지 허용되는지 알며, 어디가 가장 약한 지점인지도 안다. 한 세계의 소년들은 끼리끼리 몰려다녔고, 다른 한 세계의 소년들도 끼리끼리 몰려다니며 차례로 타겟이 되었다.  

그저그런 주택가에 살며, 그마저도 변변치 못한 축에 들었던 소년은 그래도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다행히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으니까.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고, 소년들의 학력 수준은 당연하게도 부모의 부의 종속변수가 된지 오래였다. 나뉜 두 세계는 그들의 현재만을 말해주지 않았고, 우악스럽게도 미래의 세계를 펼쳐내보이고 있었다. 운이 좋은 소년이었지만, 타겟의 운명을 그렇다고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소년은 몇번인가 책을 잃어버렸으며, 노트에 찢어진 자국을 발견했고, 한 두 번은 가벼운 시비에 휘말렸다. 그러나 아무튼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아주 좋은 조건에 속했다. 그래도 쥐꼬리만한 선생님의 관심을 받았고, 그것은 그나마도 없는 소년들에 비하면 꽤나 든든한 방패에 속했다. 그리고 여전히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했던 수많은 소년들은 차례로 타겟이 되었고, 다음 새로운 흥미거리가 생겨나기까지 그 극장의 배우로서 충실히 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재빨리 바톤을 넘기고는 어느새 그 극장의 관객이 되었다. 

소년은 사실 많은 것을 잊으려 노력했고, 그 노력의 결과로 실제로 많은 것을 잊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 때 일어난 일들 자체만큼, 그 때에 가졌던 느낌과 생각들도 잊었다. 그러나 아직도 몇 가지를 기억한다. 그 그룹의 소년들 중 자신을 유달리 괴롭혔던 S군과 그가 갑자기 교문 앞에서 따귀를 날리고 지었던 미소를. 갈색의 철봉들로 만들어졌던 그 교문과 그 교문을 둘러싸고 있었던 담쟁이 덩굴들을. 그 그룹의 소년들 중 그래도 소년에게 가장 친절을 보여줬던 J군을 졸업식날 기어코 찾아가 사진을 찍자고 했던 것과 그 때 그가 지었던 또다른 의미에서의 어색한 미소를.  

1992년의 어느 풍경들. 그 짧고도 짧은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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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 들어와 가끔 놀라는 때가 있다. 그것은 상당히 일방적이며, 직설적이고, 폭력적인 글들이 높은 추천을 받고 있는 것을 볼 때이다. 정확히 말해서 놀란다기 보다는 그저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 일단은 이 알라딘이라는 공간의 특성적인 문제. 내 추측일뿐이지만, 아마도 이곳에는 책을 좋아하고, 그만큼 글쓰기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분들이 다수를 이룰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글들도 결국은 어느 정도는 타 곳들과 비슷해진다는 것.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면, 뭔가 다를 것이다라는 것은 결국 어떤 착각에 불과했던 것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어쩌면 나의 생각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즉 어쩌면 그런 것을 폭력적이며, 일방적이라고 받아들이는 나의 성향이 이상한 착각을 야기하는 것은 아닐까. 요즘에 들어서 내가 쓰는 글들이 퇴보를 향해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도무지 발전이 없고, 계속 한 얘기를 반복해서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얼마전 내 블로그 글들을 자주 읽어주는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친구의 말로는 내 글이 너무 '모호함'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후에 내가 지금껏 쓴 글들을 꼼꼼이 다시 반복하여 읽어보았는데, 확실히 내 블로그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표현들은 '일종의 문제', '~수 있다', '어떤 경향성', '조금은', '~까', '부인할 수 없다' 등등이다. 어떤 것이 좋다고도, 그리고 혹은 나쁘다고도 쉽게 말하지 않는 모호함의 문제, 회색의 덧칠들 그런 것들이 너무 눈에 띈다. (즉 글이라는 것이 결국은 누군가에게 읽히기 위함임을 전제로 했을 때, 나 자신도 읽으면서 안개 속을 걷는 형국이라면, 누가 그 글을 읽겠는가.) 

이제 이런 나약한 글쓰기는 그만두고 치열하게 부딪히는 환경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일까. 생각을 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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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1-10-31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똑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듯해요. 어떻게 된 것이 책은 읽을수록 읽어야할 책은 점점 더 많아지는지.. 그리고 뭔가를 안다고 말하기가 겁나고 매사에 무언가를 확신한다는 것이 두려워져요.

맥거핀 2011-10-31 20:58   좋아요 0 | URL
한 때 더 많이 알게 되면, 더 많이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이제 잘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 분명히 나보다는 무엇인가를 많이 아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무엇인가를 말할 때를 보면요. 아는 것과 그로 인해 무엇인가를 갖추게 되는 것은 다른 문제일까..도리어 많이 알게 될수록 말하기가 힘들어지는 걸까요? 아니면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그저 '아는 척'만 했기 때문일까요? 아무튼 생각을 해야합니다. 지금 이대로는 아닌 것 같아요.

꽃도둑 2011-11-01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가을이군요... 독서의 계절이 아니라 사색의 계절..
맥거핀 님의 생각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거에요. 무엇보다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사람들이라면 한번 쯤은 고민해보았을 듯 싶은데요... 누구처럼 써보고 싶다는 열망은 결국 나를 넘어서는 일이어야 할텐데...한계라는 것은요..쉽사리 무너지는 게 아니더라구요.
아주 조금씩 조금씩 발전하는 나를 보곤 하죠... 많이 읽고 쓰고 생각하고 그 길밖에는 없는데...
뭐 굳이...저는 그래요. 뭐 굳이.. 그냥 쓰는 순간 몰입하고 그걸로 잊어버리곤 하죠..^^
그리고 어디가서 별로 아는 척 안해요 쩍팔려서...^^


맥거핀 2011-11-02 01:20   좋아요 0 | URL
뭔가를 쓰려고 하는 사람들은 한번쯤 하는 고민인가요..? 그래요. 확실히 뭔가를 넘어서기는 해야하는데, 자주 주저하게 되는 것 같아요. 과연 이게 올바른 방향인가, 이게 더 나은 것인가 의문도 들고..하기는 제가 생각하는 좋은 글의 기준도 예전을 돌이켜보면 많이 바뀌었으니까요. 예전에 좋은 글이라고 생각했던 글들을 지금 읽어보면, 거의 대부분 별 감흥이 없거나, 도리어 싫어지기도 하니까. 그만큼 자기 기준을 확고히 다지는 것이 어려운 것이겠지요. 그러나 어렵다고 해도 노력은 해야죠.^^

마녀고양이 2011-11-02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맥거핀님께서 저랑 같은 날짜에 유사한 맥락의 글을 올리셨었군요.
따스하게 주고 받았으면 좋겠다는게 제 생각인데,
댓글에서 다른 의견이 있었답니다. 그 정도 글은 글쓴이 자체에 대한 공격이 아니기 때문에, 비평 자체가 더욱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의견이었죠. 음, 사람마다 느끼는게 다르구나 하고 한참 생각했었습니다. 아마 그런 글을 주고 받는게 일상화된 분이라면, 다르게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남자와 여자 또는 직업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면이 다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추워지는데, 따스한게 저는 좋습니다만. ^^

맥거핀 2011-11-02 20:56   좋아요 0 | URL
방금 전에 몇몇 글을 보고나니, 뭐라고 말을 잘 못하겠네요. 다만, '이것이 사람마다 느끼는게 다르다는 말로만 봉합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아니라고 답하겠습니다.(물론 마녀고양이님께 뭐라고 하는 것은 절대 아니구요.^^) 제 블로그 대문에 쓰인대로 '무엇을 말하지 않을 것인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아무튼, 저도 따스한게 좋습니다.^^
 

He said “I’ll protect you like you are the crown jewels” yet
Said he’s feeling sorrier for me
the more I behave badly I can bet

그가 말했죠 “왕관의 보석처럼 너를 지켜줄 거야” 하지만
말했죠 내가 못된 행동을 할 수록
더 미안해 진다고

Hey Lloyd I’m ready to be heartbroken
I can’t see further than my own nose at the moment

그대, 난 마음이 아플 준비가 돼 있어요
이 순간 나는 내 한치 앞도 볼 수 없어요

Jealousy is more than a word now I understand
You can stay a girl by holding a boy’s hand

질투는 단어 그 이상이라는 걸 이해해요
소년의 손을 잡아 소녀를 안도할 수 있어요

Hey Lloyd I’m ready to be heartbroken
I can’t see further than my own nose at the moment
Hey Lloyd I’m ready to be heartbroken
I can’t see further than my own nose at the moment

그대, 난 마음이 아플 준비가 돼 있어요
이 순간 나는 내 한치 앞도 볼 수 없어요
그대, 난 마음이 아플 준비가 돼 있어요
이 순간 나는 내 한치 앞도 볼 수 없어요

I’ve got my life a compilation here to sort out
I’ll take myself to an east coast city and walk about

이제 내 삶을 정리하려고 여기로 왔어요
이스트코스트 도시로 가서 돌아다닐 거에요

Hey Lloyd I’m ready to be heartbroken
I can’t see further than my own nose at the moment
Hey Lloyd I’m ready to be heartbroken
I can’t see further than my own nose at the moment
Hey Lloyd I’m ready to be heartbroken
I can’t see further than my own nose at the moment

그대, 난 마음이 아플 준비가 돼 있어요
이 순간 나는 내 한치 앞도 볼 수 없어요
그대, 난 마음이 아플 준비가 돼 있어요
이 순간 나는 내 한치 앞도 볼 수 없어요
그대, 난 마음이 아플 준비가 돼 있어요
이 순간 나는 내 한치 앞도 볼 수 없어요 

 

.................................. 

예전에 어떤 블로그 이웃 분이 추천하셔서 알게 된 노래. 가끔 우울할 때 들으면서 따라 부르면 이상하게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는 마법을 지닌 곡. 사실 가사를 보면 '난 마음이 아플 준비가 돼 있다고' 하는 노랜데...매일 노래만 듣다 유투브 뮤비를 보니, 이 뮤비 또한 참 묘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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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10-27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거운 음악이예요,
감기 걸리고 약에 취해서 몽롱한데... 머리를 조금 식혀주네요.

감기 조심하셔요!

맥거핀 2011-10-27 17:27   좋아요 0 | URL
저런..요즘 감기 독합니다. 저는 이미 한번 휩쓸고 지나갔기에..아무튼 하실 일도 많으신 것 같은데, 몸관리 잘 하세요. 사실은 감기에는 그저 아무 것도 안하고 푹 쉬는 것이 제일 좋은데..^^;
 

 

조금 된 글이지만, 영화 <숨>을 보게 된 계기가 된 글이기에 옮겨둔다. 
 

   
 

뒤틀린 몸과 시선을 이해하다 [한겨레 21 2011.09.05 제876호] 

[문화] 장애인 시설 다룬 두 편의 영화, 조금 다른 접근법… 선악구도 선명한 <도가니>와 장애인의 주체적 욕망 중시한 <숨>

장애인 시설의 실화를 다룬 영화가 잇달아 개봉한다. 광주 ‘인화학교’ 사건을 다룬 <도가니>와 전북 김제 ‘기독교 영광의 집’ 사건을 모티브로 한 <숨>이 개봉할 예정이다. 두 영화는 장애인 시설의 성폭력 사건을 소재로 삼지만 접근법이 다르다.  


직설적이고 계몽적으로 사건 알려

인화학교는 청각장애 기숙학교로, 교장과 교직원들이 장애학생에게 상습적인 성폭행을 가했다. 아이들은 침묵 속에 갇혔고, 교사들은 모른 척했다. 가해자들은 지역 유지로, 이들과 연루된 교육청·시청·경찰 등은 재단을 감사하거나 조사하지 않았다. 2005년 일부 교직원이 장애인 성폭력상담소에 제보하고 ‘인화학교 성폭력대책위’가 꾸려지며 오랜 침묵의 카르텔이 깨졌다. 문화방송 을 통해 전국에 알려졌고, 본격적인 수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재단은 임원을 해임하지 않았다. 해임을 촉구하는 대책위의 천막농성이 해를 넘기고 등교 거부와 천막 수업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학생들이 교장에게 계란과 밀가루를 던지는 일이 발생했다. 교장은 학생들을 폭행 혐의로 고소했고, (1991년 정원식 총리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여론은 악화되었다. 그러는 사이 재단은 성폭행 혐의로 직위 해제되었던 교직원들을 복직시켰고, 대책위에 참여한 교사와 보육사를 파면·해임했다. 2007년 법원은 교장과 행정실장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고, 평교사 한 명만 징역 10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학교로 돌아온 교장은 나중에 암으로 사망했고, 다른 가해자들은 지금까지 인화학교에서 근무한다.

‘인화학교’ 사건이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질 즈음, 공지영의 르포 소설 <도가니>가 나왔다. 소설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어떤 권력의 메커니즘에 의해 일어나는지를 냉철하게 그렸다. 영화 <도가니>는 소설을 원작으로 비교적 충실하게 사건을 고발하고, 진실을 위해 싸우는 이들의 심경을 조명했다. TV <인간극장>의 실화를 바탕으로 해외 입양인의 문제를 그린 영화 <마이 파더>를 찍었던 황동혁 감독이 연출을 맡고, 끔찍한 진실을 파헤치려고 분투하는 교사와 인권센터 간사 역할을 공유와 정유미가 맡았다. 영화의 시선은 직설적이고 계몽적이며, 장르영화의 기법 속에 선명한 구도와 문제의식을 담아냈다.

<숨>은 전혀 다른 스타일의 영화다. 극영화라기보다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질감의 화면에, 명쾌함이 아닌 애매함을 지향한다. 2007년 한국방송 전주총국과 전북장애인시설인권연대의 조사로 김제 ‘기독교 영광의 집’의 성폭행과 횡령 사건이 밝혀졌고, 이란 프로그램에 세 차례 방영되었다. 사건이 알려지기 전 ‘기독교 영광의 집’은 원생들끼리 합동결혼식을 시켜주는 훈훈한 시설로 언론의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운영자인 목사가 지적장애 여성을 15년간 성폭행하고 증거인멸을 위해 자궁적출 수술까지 받게 한 사건이 알려진 뒤, 시설은 폐쇄되었고 피해여성은 쉼터로 보내졌다. 2009년 목사는 성폭행 혐의로 징역 3년에, 부인인 원장은 횡령 혐의로 징역 10개월에 처해졌다.


고발이 놓치는 지점의 리얼리티

<숨>의 감독은 당시 한국방송의 자료를 토대로, 시설과 쉼터를 생생한 리얼리즘으로 재현한다. 그러나 영화는 고발이 아니라, 고발이 놓치는 지점에 주목한다. 수희는 뇌병변장애로 언어장애와 약간의 운동장애가 있으며, 지적장애는 없다. 노동능력이 있는 수희는 청소와 빨래를 도맡아 한다. 그녀는 지적장애인 민수를 몰래 보일러실로 데려와, 여느 연인처럼 립스틱을 바르고, 거울로 알몸을 비추어보며 성관계한다. 수희는 과거에 목사에게 성추행당한 적이 있지만, 지금은 민수의 아이를 임신했다. 임신 사실을 안 목사는 수희에게 민수와 결혼시켜 시설에서 살게 해주겠다고 말한다. 수희는 희망에 부푼다. 그러나 원장의 아들이 지적장애 여성을 성폭행해 임신시킨 것을 알게 된 외부 사회복지 관계자들이 시설에 들이닥치고, 임신한 수희를 ‘보호 조치’한다.

영화는 <도가니>가 취하는 선악의 구도가 아니라, 판단 유보의 지점을 보여준다. 임신 사실을 안 원장이 수희를 강제로 데려간 곳은 산부인과일 것이란 예상과 달리, 웨딩숍이었다. 원장 부부의 약속이 어디까지 사실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우리는 오랫동안 같이 산 가족이고, 이 공동체를 유지하며 사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원장의 말은 표독스럽게 들리지만, 한편으론 진실처럼 느껴진다. 시설은 폭력적인 곳이지만, 그곳에서 수희는 ‘노동하는 주체’였다. 반면 쉼터는 극도로 친절하지만, 수희는 ‘보호 대상’일 뿐이다. (시설에서 수희는 다른 사람을 목욕시켰지만, 쉼터의 상담사는 매니큐어를 칠하고 있는 수희를 끌고 가 목욕을 시킨다.) 쉼터 상담사는 부드러운 어투를 사용하지만, 수희의 말을 듣지 않거나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 상담사는 수희가 성폭행을 당했다고 단정하며, 가해자를 계속 추궁한다. 말을 하는 도중 수희가 “안 할래”라고 하지만, 상담사는 성폭행 당시의 거부 의사로 알아들을 뿐, 말을 그만하겠다는 뜻으로 듣지 못한다. 상담사는 언어장애가 있는 수희를 당연히 지적장애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지적장애인의 경우 어린아이와 같은 무성적 존재로 취급한다. 장애여성은 성 문제에서 오로지 성폭행의 피해자로만 사유될 뿐, 성적 욕망과 행위의 주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다. 이는 장애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사고할 때 흔히 빠지는 오류이자, 장애여성의 성폭력 피해 문제를 이슈화하는 영화들이 놓쳐온 지점이다. 피해자성이 강조될수록,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핵심적 화두는 멀어진다. 장애여성은 모성의 권리도 무시된다. 장애여성은 보살핌의 대상이지 보살핌의 주체가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모성이 배제된다. 수희가 인형을 껴안는 행위는 모성적 욕구의 표시지만, 유아적 행위로 간주된다. 수희가 육아 책을 본다는 사실은 간과된 채, 상담사는 수희에게 어린아이를 대하는 말투로 아이는 입양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장애인-되기’로 장애인과 눈 맞추기

<숨>은 시설과 쉼터를 이분법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 대신 처음부터 끝까지 수희의 뒤통수에 카메라를 밀착시킨 채 그녀의 눈높이와 시선으로 사건을 보여준다. 관객은 그녀가 본 만큼 알고, 그녀가 답답한 만큼 답답해하며, 시설과 쉼터의 태도가 똑같이 폭력적이란 것을 체험하게 된다. 이는 중요한 성과다. <도가니>와 비교해보면 차이점이 명확해진다. <도가니>가 처한 상황에서는 시설은 악이고, 선생님과 인권활동가라는 외부 세력은 선이다. 절대 악의 폭력에 시달리는 무고한 장애인들과 이들을 구출하려고 위험을 감수하는 외부인의 고군분투를, 외부인의 시점에서 그려나간다. 소설을 바탕으로 하는 영화는 선명한 선악의 구도 속에서 관객은 착하고 잘생긴 비장애인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장애인은 순결한 피해자로 객체화될 우려를 안고 간다. 물론 이런 방식을 통해서라도 장애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관심을 갖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뒤틀린 장애인의 몸과 시선을 일치시키며, 남루하지만 열정적인 그녀의 섹슈얼리티를 납득하게 하고, 그녀가 일상적으로 겪는 소외를 경험케 함으로써 시설이나 쉼터나 동일한 폭력성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하는 <숨>의 관람 체험은 소중하다. ‘장애인-되기’를 통해 장애인의 주체성을 사고할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수희의 마지막 대사와 표정에서 결기를 느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장애인과 눈을 맞추고 대화할 수 있는 첫 관문에 닿은 것이다. <숨>은 9월1일, <도가니>는 9월22일에 개봉한다.

황진미 영화평론가

 
   

 


황진미 평론가의 글은 평소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이 영화에 대한 전체적인 코멘트에는 동감한다. (다만, 이 영화의 목표 지점이 '장애인-되기'인가,라는 점에는 의문이 든다.) TV 시사고발 프로그램에서 자주 하는 그런 이야기라고 지레짐작하던 관객이 조금은 이상함을 느끼는 순간의 시작은, 시설 원장이 임신한 수희를 (낙태를 목적으로 한) 병원이 아닌, 웨딩샵에 데려가는 장면일 것이다. 물론 아주 간단하게만은 말할 수 없다. 원장 부부의 호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다르게 보면 사건을 간단하게 무마하려는 그들의 시도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한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과연 이 시설에 어떠한 사건들이 있었는지, 수희가 그간 겪어왔던 일들이 무엇이었는지 명확하게 짐작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위 글에서는 시설에서 목사가 행한 '어떤 일'들이 단정적으로 있었으리라 결론을 내리고 있지만, 적어도 영화상으로는 그것은 뉘앙스로만 짐작될 뿐, 세부적인 정황을 판단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관객들이 원하는 명확한 진실은 관객들에게 끝끝내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위의 글에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의 시점이 거의 철저하게 주인공인 수희의 시점에 맞춰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수희가 모르는 것은 관객도 모르며, 수희가 짐작하게 되는 것은 관객도 짐작한다. 그런데 거기서 영화가 한 발짝 더 나아가고 있는 것은 그렇다고 해서 관객인 '우리'가 수희가 아는 것은 적어도 알고 있는가, 즉 그녀의 생각을 알 수 있겠는가라는 점이다. 우리는 수희가 처해 있는 상황과 거기서 그녀가 취하는 미세한 반응들만 영화를 보면서 알게 될 뿐, 그것에 있어서 수희가 진정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점이 무엇인지 명확하게는 잘 모른다. 물론 우리는 대강의 어떤 것을 짐작하게 되고, 누군가의 행동이 옳은가 그른가를 영화를 보면서 심판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느낌일 뿐, 그 때 그녀도 그렇게 느꼈을까, 혹은 우리가 저 위치에 처해있다면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라는 것은 쉽게 이야기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은 물론 수희가 처할 수밖에 없는 위치와 우리가 현재 처한 위치가 달라서이기도 하겠지만, 스크린을 앞에 둔 우리의 입장이 기본적으로 방관자이고, 방조자일 수밖에 없음에 그 이유가 있다.

위의 글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 영화의 선악 구분은 모호하다. 그러나 그것이 아마도 진실에 더욱 가까울 것이다. 이 사회에는 아직도 나쁜 것들이 도처에 널려있고, 대체로 나쁜 것들이 오래 지속되고, 그 생명력을 질기게 이어나가는 것은 그것이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까닭이므로. 눈에 쉽게 보이는 상처는, 카메라가 쉽게 잡아내 그 명확한 실체를 밝혀낼 수 있는 악은, 사실 많지 않다. (물론 나는 이 문장이 명확한 악이란 없다, 만들어진 것이다, 그보다는 보이지 않는 악이 더욱 중요하다,라는 식으로 읽히는 것 또한 경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골똘히 고민하게 되며, 조심스럽게 그 환부를 헤치고, 몇 가지 의문을 던지게 된다. 그 의문에는 아마도 이런 것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이 일들에 대해서 일종의 공범이 아닐까. 우리 역시도 장애인이 우리의 눈 앞에 드러나지 않고 어딘가에 갇혀서 적당히 '보호'되고 있는 것을 어느 정도는 긍정하고 있었던 것, 바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그들의 욕망이란 없다고, 그들의 욕구란 없다고, 그들은 단지 인큐베이터 안에 잘 담겨져 있어야 할 대상이라고 어느틈에 편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시사고발 프로그램을 보고 느끼는 우리의 분노란, 어쩌면 아주 조금은 우리 자신의 죄의식을 다른 누군가에 대한 분노로 돌렸던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 이 질문은 이런 것과도 맞닿아 있다. 나는 이 영화에서 한 두 차례 등장하는 주인공 수희의 노출 장면을 보면서 어떤 불편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불편함을 이 영화에서 그런 것이 필요했을까 라는 물음으로 치환하려 애썼다. 그러나 그 질문은 온당할까. 그것을 불편해하는 나의 내면에는 무엇이 담겨 있는가. 다른 이의 악들을 들여다보기 전에, 나의 내면부터 깊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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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와우북페스티벌에 들러 몇 권의 책과 함께 수잔 와이스만의 <빅토르 세르주 평전>을 들고 왔다. 러시아 혁명을 다룬 주요한 저작 중의 하나인 <러시아 혁명의 진실>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 그다(이 책 <빅토르 세르주 평전>에는 원제에 충실하게 <러시아 혁명의 첫 해>라는 제목으로 나와 있다). 책날개에 붙어있는 그의 삶을 정리한 간략한 글은 어떠한 의미에서는 참 전형적이다. "러시아의 혁명 인민주의자 집안에서 태어난 세르주(본명 : 빅토르 키발치치)는 열다섯 살까지 벨기에에서 살았다. 고국 러시아에 처음 발을 내디뎠던 1919년, 스물여덟살 되던 해에 볼셰비키 당원이 되었으며 다양한 정치적 임무를 띠고 세계 곳곳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그러나 1923년 독일판 10월혁명이 실패한 뒤 러시아로 다시 돌아가 좌익반대파와 함께했다. 언제나 정치적 반대파였던 세르주는 자본주의와 스탈린주의, 그 어느 편에도 서지 않았다. 그로 인해 평생을 핍박 속에서 가난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다. 결국 1936년 러시아에서 쫓겨나 파리와 마르세유를 전전하다가 지독한 가난과 생명의 위협 속에 1947년 멕시코에서 눈을 감았다." 

전형적이라는 것은 그의 삶이 우리가 흔히 상상할 수 있는 실패하고 몰락한 자의 초상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독한 가난 속에서 태어났고(세르주는 어린 시절 딱딱하게 말라붙은 빵을 커피에 적셔 먹는 끼니를 서술했으며, 그의 동생은 쫄쫄 굶는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아홉 살에 굶어 죽었다), 한 때 꿈을 가지고 혁명 전선에 뛰어들었으나, 그 혁명이 그 혁명을 지지해준 자들에게 적으로 돌아서는 광경을 목도하고는 그 반대편으로 돌아서고자 했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는 그가 결코 지지할 수 없는 것이 있었고, 아무 조직과 힘이 없었던 그가 오로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기고할 수 있었던 모든 매체를 통하여 치열한 반대 의사를 지속적으로 표명하고, 진정한 혁명을 향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술하였듯이 그 와중에 그는 당연하게도 지독한 가난과 생명의 위협에 시달렸고, 결국 거의 지구의 반대편까지 쫓겨간 후에 숨을 거두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그런 이야기. 아마도 영화로 만들고자 시나리오로 잘 정리하여 제작자의 책상에 정성껏 올려둔다고 해도, 두어 줄의 간단한 시놉만 보고도 그것은 쓰레기통 속으로 던져질 것이다. 지금의 이 때에 이런 것을 읽는다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차라리 다른 의미에서라면, 성공한 혁명가의 책, 아니 성공한 혁명가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다고 해도, 이보다는 훨씬 낭만적으로 보이는 다른 혁명가의 평전들 - 대표적으로 체 게바라 - 을 읽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러나 이상하게도 몰락한 혁명가의 생애, 아니 굳이 혁명이라는 말을 아예 없애버리고라도 몰락한, 몰락해가고 있는 것들에 대해 흥미가 생긴다. 이건 무슨 이상 심리일까. 어쩌면 몰락해가고 있는 것들을 통해 나의 삶에 대한 조금이나마 위안을 찾으려는 당연한 심리일까. 



2.
몰락한 것은 한 러시아 혁명가의 삶 뿐만이 아니다. 매일 저녁 프라임시간에도 지금 몰락한 자들의 이야기가 방송되고 있다. 그것도 비극물이 아니라 시트콤이다. 물론 그것은 김병욱의 새 시트콤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의 이야기이다. 김병욱은 이번 시트콤의 키워드를 '몰락'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인터뷰했다. 물론 김병욱의 전작들에서도 몰락의 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등장하였으며, 몰락한 캐릭터들도 가끔 등장하기도 하였다. 어쩌면 웃음이라는 것은 그렇게 몰락해 가고 있는 자들이 망가져 가는 틈에서 원래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김병욱의 이야기들은 꽤나 자주, 깔깔깔 웃음이 터지는 와중에서도 가슴이 서늘해지는 순간을 만들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서늘한 순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부러 묘한 웃음들을 끼워넣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것의 가장 직접적인 증거가 그의 시트콤의 주인공들에게 마지막 순간에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죽음이 아닐까. 김병욱의 시트콤들은 이제 웃음은 뚝!, 이라는 식으로 마지막 순간에 시청자들에게 당혹스러운 순간들을 여러번 선물하였다. 그것은 각각의 에피소드를 끊어버릴 때도 그랬고, 전체 이야기를 종결해 버릴 때도 그랬다. 그리고 그 덕분에 시트콤에서 상쾌하게 웃는 것으로 끝내고 싶었던 많은 시청자들에게 원망을 받기도 하였다. 하기는 김병욱의 시트콤을 보는 시청자들이 가장 자주 되묻던 질문은 "이거 시트콤 맞아?" 였으니까.

(글쎄. 앞의 심리와 연결될지도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는 김병욱의 시트콤에서 그런 서늘한 순간들을 더욱 좋아했던 것 같다. 나는 김병욱의 시트콤들을 어떤 시트콤을 대하는 느낌보다는 그냥 드라마를 보는 느낌으로 받아들였으니까. 많은 시청자들을 '김병욱 안티'로 돌아서게 만들었던 바로 전작의 꽤나 비극적인 결말도 내심 속으로는 상당히 괜찮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 결말을 본 후 주위의 하이킥 팬들과 이야기를 할 때도, 겉으로는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결말이야!, 라고 했었지만, 집에 와서는 그 마지막 회를 몇번인가 돌려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몰락'은 이번에는 전면에 나섰다. 집안의 가장인 안내상은 절친한 친구의 배신으로 하루아침에 집도 절도 없는 신세로 내몰렸으며, 그 덕분에 아들 종석은 모든 것을 걸었던 아이스하키를, 그리고 딸 수정은 미국 유학을 접어야만 했다. 그러나 몰락의 이야기는 이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얹혀 사는 계상의 옆집에는 청년 실업의 상태로 선배 언니에게 얹혀 살고 있는 진희가 있으며, 이 집의 집주인인 지원에게도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뭔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아직 캐릭터의 중심을 잡는 초반임에도 길바닥에서 누워서 자고, 바다에 뛰어들기도 하고, 툭하면 나타나는 빚쟁이들을 피해 집 바닥 땅굴로 공습경보를 받고 대피하듯이 달려가기도 하고, 조폭들을 피해 쓰레기통에 숨기도 하고, 사기 당하여 학교 공금을 날리기도 하는 등, 그간 다른 김병욱표 시트콤들보다 훨씬 더한 고초를 겪고 있는 중이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몰락은 어떤 사건들보다도 이 캐릭터 자체에 더욱 밀착되어 일종의 징후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안내상은 별 것 아닌 일에 집착하고, 때로는 필요 이상으로 비굴해지는 성격이 도드라지며, 백진희의 경우는 그의 삶의 피곤이 중첩된 몽유병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것을 기이하게 만드는 것은 나레이션의 등장이다. 이 나레이션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사건을 설명하거나, 이들의 속마음을 보여주려는 목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행동을 마치 인류학적 보고서를 써내려가듯이 차분하게 분석하고 설명한다(물론 이는 미래의 이적이 과거의 어떤 때를 회상하는 식이라는 이 시트콤의 거대한 액자와도 관련이 있다). 즉 이 시트콤은 이들의 흥미로운 이야기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이 흥미로운 이야기 속에서 이들이 보이는 어떤 '징후적인 신호'에 관심이 있다. 이 시트콤은 이 몰락한 시대의 징후를 잡아내 거대한 분석 보고서를 만들고 싶은 것일까. 이 몰락한 세기의 징후를 어떤 식으로 포착해 낼 것인가. 그리고 한편으로 이들의 몰락은 마지막에 극적으로 회복될 수 있을까. 아니면 전작처럼 결국 몰락의 종말인 죽음에 이르게 될까.

3.
그리고 여기 한국프로야구에도 몰락의 거의 대명사가 되어가는 팀이 있다. 9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라는 위업을 남긴 팀이자, 내 20년 가까이 되는 응원팀인 트윈스다. 9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라고 하니, 뭔가 상당히 어려운 미션을 실패하는 것 같지만, 이 리그는 수십개의 팀 중에 달랑 몇 팀 포스트시즌 진출하는 그런 리그가 아니다. 8개 팀 중에 4팀 포스트시즌 나가서 뚝딱뚝딱 아장아장한 다음 우승팀 가려내는 그런 작은 리그다. 그런 트윈스를 보는 팬들의 심정은 뭐랄까, 9년 넘게 반등수 50% 안에 못들고 있는 그런 자식을 보고 있는 심정이랄까. 그런 트윈스는 올해는 더욱 기적적인 드라마를 연출했다. 시즌 초중반까지 2-4위권을 유지했고, 초반 30승도 다른 어떤 팀보다 빨리 올렸음에도 결국 6위(그것도 공동이니 사실상 7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런 트윈스 상당수의 팬들이 바라는 것은 이번 야구 시즌이 빨리 끝나는 거였다. 망가져가고 있는 팀을 보면서 DTD니, 내려갈 팀이니 하는 비아냥을 더 듣고 싶어하지 않는 마음들도 있었지만, 이번 시즌이 끝나면 무엇인가 희망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늘상 스토브리그에 가장 바쁜 것은 트윈스팬들이었고, 가장 설렜던 것도 트윈스 팬들이기는 했다. 그러나 올해는 여러 시기가 맞아떨어지는 듯 했고, 마침 박감독의 사퇴 발표로 팬들은 올것이 왔다고 잔뜩 기대했다. 트윈스 홈페이지 게시판과 각종 야구 게시판에는 희망적인 꿈을 가득 담은 각종 카더라와 설들이 난무하였고, 팬들은 곧 거의 예정되어 있는 김연아 금메달을 생각하며 마지막 프리를 즐기자는 심정으로, 발표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올것이 왔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올 것이.

팬들이 분노하고, 그 분노를 넘어서, 허탈과 그에 따른 이탈을 예고하는 것은 단순히 원하지 않는 감독이 선임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김감독이 새로 부임하여, 나은 성적을 올리고, 포스트시즌에 진출시킬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거의 기대하지 못하고, 혹은 기대한다고 해도 다른 면에서 분노하는 것은 일종의 학습효과 때문이다. 트윈스 팬들이라면, 몇년 동안 이어진 트윈스의 부진이 단순히 야구 실력적인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물론 야구 실력의 문제가 가장 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야구실력이란 것이 결국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트윈스나 다른 어느 팀이나 기본 자원은 같다. 좁은 한국 고교야구가 그것이다). 그간 부임해왔던 정치적인 인사들과 아직 프런트 및 코치진에 자리잡고 있는 정치적인 인사들이 팀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조금씩 보아왔다. 그런 정치적인 인물들을 이번에 갈아엎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구단의 생각은 팬들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학교로 따지자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에는 관심없고 교장의 비위만 맞추는데 혈안이 되어있던 교사를 아이들 성적이 엄청 떨어져서 해고했다고 좋아했더니, 교장의 친인척이 와서 그 자리를 메우는 꼴이다. 옆 명문학교의 정말 잘 가르치기로 소문난 교사들이 몇 명씩 놀고있는데도 말이다.

결국 역설적으로 팬들이 이번에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현재가 아니라, 우리 프로야구의 기원에 있는 것들이다. 군사독재의 선전용, 혹은 귀막음 도구로 재벌들의 결합으로 시작된 우리의 프로야구. 그 프로야구는 그들이 말한대로 결국 국민들과 어린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 위해 시작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 한국프로야구에서 구단은 결국 그것을 가진 기업의 소유물이라는 것을 말이다. 팬들의 목소리라는 것이 현재 전혀 들어갈 틈이 없게 짜여진 이 구조에서, 팬들의 바람이란 결국 헛된 카더라일 뿐이라는 것. 내 소유물을 내가 원하는 대로 하는데 당신들이 왜 나서는가, 아마도 트윈스 구단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팬들은 포스트시즌 진출을, 우승을 열망하지만 구단도 그것을 열망하고 있을까. 어쩌면, 뭐 우승...하면은 좋기야 한데, 뭐 안해도 항상 야구장에는 관객들 그득하고, 어차피 적자인 상황에서 야구단이야 일종의 홍보물일 뿐이고...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확률이 훨씬 더 높아 보인다. 그리고 현재 트윈스 홈페이지의 회원게시판은 감독 선임 이후 며칠 째 오류를 핑계로 작동되고 있지 않는 중이다(뭐 어쩌면 엘지의 기술력이 이 수준일지도..). 그런 상황에서 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현수막을 들고 야구장에 갔다가 폭도로 몰리거나, 지나친 팬심이라는 엄중한 경고를 뉴스에서 듣는 것 뿐이다. 그리고 이미 길들여져 버린 우리들은 오늘도 여전히 멍하니 야구중계를 튼다. 

 
    

4.
자꾸 몰락이라는 것을 이야기했더니, 몰락과는 사실 별 상관이 없는, 장정일 작가가 <빌린 책/산 책/ 버린 책 2>(이 책 역시 와우북페스티벌에서 사왔다)에 쓴 "독서는 몰각과 자각, 이 양켠 모두에서 쾌락을 느낄 수 있습니다."라는 문장이 떠오른다. 장정일 작가는 책 뒤에 다음과 같이 썼다. "쾌락이란 어떻게 보면 모순되고, 서로 길항하는 두 개의 근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보다 더 큰 전체에 몰각됨으로써 얻는 쾌락이 있고, 전체와의 일체감 속에서 자신을 명료하게 느끼는 쾌락이 있습니다. 마약이나 알코올에서 느끼는 쾌락이 전자라면, 신비주의에 귀일해서 얻는 쾌락은 후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독서는 몰각과 자각, 이 양켠 모두에서 쾌락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지은이의 생각에 완전히 녹아들기도 하고, 그 속에서 반성적이 되거나 자각을 얻기도 합니다."

몰각과 자각, 명확하게 구분이 되지는 않지만, 함경록 감독의 영화 <숨>을 보고 나오면서 그런 생각을 하기는 했다. 예를 들어 <도가니>와 같은 영화가 몰각에 가까운 것이라면, 이 영화 <숨>은 자각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물론 영화는 기본적으로 몰각에 가까울 것이라는 생각은 있다. 스크린과 합일하여 충만해지는 상태적인 쾌락이 몰각이라면, 아마도 영화보기는 그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내가 <숨>을 보고 나오면서 그것을 떠올린 것은, 이 영화 <숨>이 <도가니>와 가까운 이야기를 상당히 다르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숨>에서는 결국 장애인 여주인공의 결혼과 가정이라는 꿈이 외부의 선을 표방한 사람들에 의해 깨어지게 된다. (<도가니>를 아직 보지 않았기 때문에 확정하여 말할 수는 없지만, 그간 <도가니>에 대한 여러 글을 읽어본 바에 따르면) <도가니>의 명확한 선악 구분과 달리, 이 영화의 선악 구분은 상당히 모호한 데가 있다. <도가니>가 분노하게 만드는 영화라면, 이 영화 <숨>은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다. 즉 분노가 일종의 쾌락과도 맞닿아 있다면, 그것은 몰각에 가까울 것이고, 생각과 반성은 일종의 자각에 가까울 것이다.

물론 나는 <도가니> 보다 <숨>이 더 영화적으로 낫다고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 영화를 보지도 않았을 뿐더러, 사람들을 분노하도록 하는 목적을 가지는 영화가 사람들을 충분히 분노하게 만든다면(즉 몰각을 시도한 영화가 그 몰각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있다면), 그것만큼 충분한 것은 없을 것이다. 다만, 이 영화 <숨>은, <도가니>와 그로 인해 이어져가고 있는 광주 인화학교를 둘러싼 일련의 진행들을 보면서 조금은 우려되는 부분들, 조심해야할 부분들에 대해 생각하도록 해준다. 그것은 이 분노가 무엇을 위한, 진정으로 누구를 위한 분노인가라는 점이다. 어쩌면 이 분노는 나의 쾌락적인 만족감과 맞닿아 있는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 광주인화학교 대책위에서 과도한 관심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 것이나, 학교 폐쇄를 우선으로 하고 있는 정부의 대책들을 보면 조금은 여러 생각이 미치게 된다. 그리고 또 동시에 일반적인 성폭력 사건은 물론이거니와, 아동이나 장애인을 상대로 한 성폭력 사건은 더더욱 조금은 조심스럽고 최대한 피해자들을 보호해가면서 사건을 밝혀내야 할 것이다. 어쩌면 <도가니>의 열풍 속에서 그런 조심스러운 접근을 또 조금은 간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이 영화를 보면서 했다.

아무튼 이 영화 <숨>은 굳이 <도가니>와 연결짓지 않아도 그 나름의 영화적 성취 속에서 또다른 윤리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 윤리의 문제 역시 우리가 되돌아보아야만 한다. 그 영화적 성취나 윤리의 문제는 혹시라도 쓰게 될 다음 포스트에. <도가니>를 본 사람에게 추천, 곧 내려갈 것 같으니 더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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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1-10-09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전에서 시트콤으로 야구로 책으로 영화로....숨가쁘게 따라 읽었습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그 중 어느 하나도 읽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만 이렇게 다양한 문화영역을 몰락이라는 주제로 꿰어가시다니... 놀랍습니다.

맥거핀 2011-10-10 18:23   좋아요 0 | URL
왠지 요즘 보고, 듣고 한 것들 중에 뭔가 통하는 게 있는 것 같아서, 무리하게 연결해 본 글입니다. 사실은 다른 건 훼이크고, 요즘 트윈스 구단 때문에 너무 열받아서 쓴 글..이라는 게 더 정확한 사실에 가깝구요.^^;

노이에자이트 2011-10-09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혁명에 대한 책이 요즘 안 팔리죠.좌익반대파의 우두머리인 트로츠키 관련 서적도 잘 안 팔리는데 세르쥬 같은 사람의 전기가 팔릴 리가 없습니다만...

몇 년 전 중국의 트로츠키주의자인 왕범서의 회고록이 번역되었던데 이 책도 몇 부나 팔렸을지...여하튼 시대가 많이 변했으니까요.

맥거핀 2011-10-10 18:41   좋아요 0 | URL
하기는 책을 싸게 판다는 와우북페스티벌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감안한다고 해도, 정가 18,000원의 책이 5,000원에 팔리고 있더군요. 그나마도 잘 안팔려 다른 책들보다 많이 남아있기도 했고, 다른 평전 시리즈보다 이 책이 더 유달리 싸기도 했구요.
말씀하신 책도 한 번 찾아봐야겠네요. 중국 트로츠키주의자 회고록도 번역된 적이 있었군요.

노이에자이트 2011-10-10 22:45   좋아요 0 | URL
공산당 당수 하다가 트로츠키주의자로 전향한 진독수 평전은 절판된 지 20년이 넘으니 왕범서 것이라도 읽어야죠.요 몇 년 새 일본의 아나키스트들 전기도 나오고 그렇더라구요.역시 갈수록 세상은 발전하죠.예전엔 이런 책들 구경도 못하고 소문으로만 들었으니까요.

맥거핀 2011-10-11 22:23   좋아요 0 | URL
아..그렇군요. 노이에자이트 님은 어찌 그리 다양한 영역에 대해서 잘 아시는지..늘상 여러 가르침주셔서 감사합니다.

2011-10-10 1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11 2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