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 속으로 (Into the Abyss), 베르너 헤어조그, 2011

리스트 (LIST), 홍상수, 2011

잿가루 (Ashes), 아피찻퐁 위타세라쿨, 2012

샤크다 (Sakda), 아피찻퐁 위타세라쿨, 2012

일장춘몽 (Dream is Awakening), 궈펑 허, 위에 첸, 2011

 

 

미국의 어떤 사형수를 근접하여 보여주며 사형제도와 그것을 둘러싼 여러 것들에 대해 묻는 베르너 헤어조그의 다큐 <심연 속으로>는 정공법을 택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이런 영화에서 포인트가 되는 부분은 그 사형수가 어떠한 사람인가,라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베르너 헤어조그와 같이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입장에서(그는 영화 시작 부분에 자신이 사형제도를 반대한다고 밝힌다), 보다 쉬운 방법은 조금은 논쟁이 될 수 있는 사건, 혹은 그래도 어느 정도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는 사형수를 선택하여 그를 조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감독이 누군가. <아귀레, 신의 분노> 등에서 정면돌파를 선택했던 베르너 헤어조그가 아닌가. 그가 선택한 두 명의 범죄자, 이제 스무살을 갓 넘은 것으로 보이는 마이클과 그의 공모자 제이슨은 거의 구원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고작 차 한대를 훔치려고 세 사람을 죽였고, 도주하다가 잡혔다. 이들은 게다가 이어지는 인터뷰들에서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려는 듯이 보인다. 모두가 상대방이 더 큰 잘못을 저질렀고, 자신은 단지 상대방의 지시를 받아 움직인 것에 불과하다고 항변한다. 이어지는 내용들을 보면 더 기분이 묘해진다. 이들이 그 세 사람을 죽이고, 그 멋드러진 차를 몬 시각은 고작 72시간이 채 안되었고(그러니까 이들은 단지 3일간의 어떤 '즐거움' 을 위해서 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었다), 40년 형을 선고받은 제이슨(제이슨은 마이클의 종범이라는 것이 인정되어 형이 감형되었다. 마이클은 사형선고를 받았다)의 아버지는 모든 게 자신 때문이라며, 자신이 제이슨을 잘못 키웠기 때문이라고 한탄한다. 감옥 안에서, 자신도 예전의 어떤 범죄 때문에 아들과 동일하게 40년 형을 받아 복역하는 와중에 말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제목에서와 같이 관객을 깊은 '심연 속으로' 빠뜨리며 몇 가지 질문을 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저와 같은 자들에게 구원이란 불가한 것이 아닌가. 저들은 그야말로 '죽을 죄'를 저지른 것이 아닌가. 저들을 사형시키는 것이 바로 공정한 사회정의의 실현이 아닐까. 그러나 이렇게 '죽일만한 사람이 있다는 식의 생각'은 동시에 다른 질문도 가능케 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는 경우(그러니까 살려둘만한 경우)가 있을까. 예를 들어 어떤 중대한 이유 때문에 세 사람을 죽였다면, 그는 살려둘만한 여지가 있는 것일까. 이 영화에서도 제이슨의 경우 마이클의 지시를 받고 행동했다는 이유로 사형대신 40년 징역형이 부과되었는데, 이는 온당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일까. 그러므로 이런 영화의 정공법은 결국 이러한 질문이 필요하게 만든다. 그들의 삶과 죽음을 우리는 무슨 기준에 의거하여 결정하는가. 그 기준들이란 과연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을 결정할 정도로 정당한가. 그 기준을 우리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한가. 즉 살려둘만한 사람과 죽일만한 사람을 구분하여 나누는 것, 그것 자체가 무엇보다도 '반인간적'인 것은 아닐까. (물론 이의 반대편에서의 논리도 가능할 것이다. 다른 한 인간을 죽인 인간은 이미 다른 인간의 삶과 죽음을 스스로가 판단하여 결정하였으므로, 그 스스로가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했다는 논리. 그러나 그럼에도 여전히 개운치 않은 부분은 남는다. 과연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것이 '사형제'라는 제도로 인해 허용되어야 하는가. 법이라는 것은 결국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해하는 것을 막기 위해 탄생한 것이 아닌가. 다른 인간을 죽이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다른 인간을 죽여야만 하는가.)

 

(한 마디 덧붙이자면, 나는 사형제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다른 인간을 죽이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인간을 죽이는 것을 허용한다는 이 모순된 질문에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하겠고, 동시에 사형제와 범죄율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도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가끔 그렇다면 당신의 부모나 자식이 죽었을 때를 생각해 보라는 식으로 접근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에 대한 나의 답은 이렇다. 나의 가장 가까운 가족이 누군가에 의해 무고하게 살해된다면, 나도 분명 그 누군가가 대신해 죽기를 바랄 것이며, 분노에 몸서리칠 것이며 그를 내가 죽이고 싶어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그러한 것을 제도로 만드는 것과는 이미 별개의 위치에 와있다. 법이라는 것은 그런 사적복수를 가능하게 하지 않기 위해 탄생된 것이며, 법은 그런 사적복수의 집합체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적복수의 집합이 법이라면 법률 자체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 법은 가장 이성적인 판단의 집합체로서 존재해야 하며, 가족을 잃은 나는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일 것이므로.)

 

두 가지가 기억에 남는다. 하나는 아주 오랜기간 사형집행인으로 살아오다가 한 사형수가 죽는 것을 보고 갑자기 충격을 받아 연금을 포기하고 사형집행인의 길에서 벗어난 한 남자의 케이스. 사형인을 사형집행 침대에 데려가고 그를 침대에 묶고, 약물을 주입하고, 죽은 시체를 시체보관소에 옮기는 등의 합법적인 살인 행위를 저지르는 이 사형집행인을 그렇다면 그 누가 구원해 줄 것인가. 다른 하나는 사형 집행 과정에 대한 정밀한 묘사 중 사형이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면 실시될 수 없다는 규정에 대해서. 예를 들어 사형수의 질병과 같은 심각한 신체적 문제로 사형이 집행될 수 없다면 사형이 연기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를 죽이기 위해서 살려둔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가 이 세상에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기 위해 사형을 집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죽는 바로 그 순간'을 보기 위해 사형을 집행한다.

 

 

                                                   (<샤크다>의 한 장면)

 

마지막으로 본 영화는 몇 가지의 단편들이다. 아피찻퐁 위타세라쿨의 두 단편 <잿가루>와 <샤크다>는 형식상의 실험이 인상적이다. <잿가루>는 흔들리는 이미지들을 연속하여 이어붙임으로써 꿈을 효과적으로 우리의 눈앞에서 재현한다. <샤크다>는 마치 육체와 영혼의 분리를 보여주는 듯하다. 영화의 메시지대로 우리는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육체에 혹은 기계에 갇혀 남자가 되거나 여자가 되거나 가난한 자가 되거나 단지 목소리가 된다. 장률 감독의 <중경>에도 나왔던 배우이자 음악가인 궈펑 허가 그의 연인(이자 역시 음악가인) 위에 첸과 만든 <일장춘몽>은 옛 카바레의 전통을 계승하는 듯한 그림자극의 형식도 인상적이지만, 영화가 끝난 후 감독의 말도 인상적이다. 나와 너라는 두 사람의 관계에는 '내가 보는 나, 내가 보는 너, 네가 보는 나, 네가 보는 너'라는 네 가지가 늘 존재하며, 이 네 가지는 매우 다른 것이다.

 

물론 가장 흥미로운 것은 홍상수의 단편 <리스트>이다. <리스트>에는 다시 한 모녀가 등장한다. 딸 정유미와 어머니 윤여정. 이 조합을 아마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의 바로 그 딸과 그 어머니다. 배경은 <다른 나라에서>와 같다. 딸과 어머니는 바로 그 펜션에 갇혀 있으며, 이유도 동일하다(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장면을 그대로 쓰는 것 같기도 하다). 이들은 누군가의 사업실패로 이 펜션에 갇혀 있으며 무료해 미칠 것 같은 상태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서>와 차이점이 있다. <다른 나라에서>의 딸이 시나리오를 썼다면, 여기서의 딸은 리스트를 쓴다. 자신이 이곳에서 하고 싶은 일의 리스트. 그런니까 리스트를 쓰는 것과 이야기를 쓰는 것의 차이다(또 '차이'인가,하실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다음 문장이 기억이 났다. "사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내가 여기서 써 보일 수 있는 것은 단지 리스트다. 소설도 문학도 아니고 예술도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바꿔 말해, 그것은 패스티쉬(pastiche)이다." - 가라타니 고진 <역사와 반복>, p.164).

 

 

뭐 아무튼 그러므로 리스트는 시나리오, 즉 이야기라는 것과 미묘하게 달라진다. 시나리오에서 주인공 안느는 자유롭게 움직였지만, 리스트는 제약이 따른다. '실현가능성'이라는 제약이 말이다. 예를 들어 시나리오에서는 안느와 교수는 맛집에서 회를 먹지만, 이 리스트는 '맛집에 가서 먹는다'가 아니라 '맛집을 찾아본다'가 되며(즉 '맛집'이라는 것은 여기에 당연히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배드민턴을 친다'가 아니라 '배드민턴을 칠 사람을 찾아본다'가 된다. 그리고 딸과 어머니는 이 리스트를 하나하나 처리하려고, 아니 사실은 정말 무료하기 때문에 밖으로 나간다. 그런데 영화가 꽤나 흥미로워지기 시작한다. 딸과 어머니는 한 남자(유준상-그는 이 영화에서는 구조대원이 아니라 유명 영화감독으로 나온다)를 만나며 이 리스트에 있는 10가지가 넘는 모든 항목은 점차 현실이 된다. 물론 영화가 마무리로 가까워질수록 관객은 이 마지막을 대략 짐작한다. 실현되는 리스트, 그것은 분명 꿈일 것이므로. 마지막 장면에서 딸은 리스트를 쓴 테이블에서 엎드려 자고 있으며(<다른 나라에서>에서 앉아서 시나리오를 썼던 바로 그 테이블이다), 어머니는 그런 딸을 깨워 밖으로 나가자고 한다. 리스트는 과연 실현될 수 있을까.

 

이는 꿈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게 한다. 꿈이라는 말은 두 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루고 싶은 것과 그러나 이뤄지지 않는 것. 꿈이라는 말에는 이루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 '희망'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으나, 그 꿈이라는 말은 동시에 부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된다. "아주 꿈을 꾸고 있구나. 꿈 깨."할 때의 그 꿈 말이다. 이는 이 영화와 <다른 나라에서>를 비교하면 더욱 도드라진다. <다른 나라에서>는 화려하게 시작했던 이야기가 세 층위를 거치며 점점 현실과 비슷해지며, 결국에는 희망에서 꿈을 거쳐 현실의 어떤 것과 비슷해졌다. 반면 리스트에서는 현실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리스트'가 점점 실현이 되어가는 꿈이 되었다가 그것은 중의적인 다른 꿈, 그러니까 이루어질 수 없는 한낱 꿈으로 되돌아온다. 즉 현실에서 꿈으로 빠져나오는 것과 꿈에서 현실로 빠져나오는 것의 차이. 이는 왠지 영화라는 것의 속성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꿈은 꿈이나, 이루어질 수 없는 꿈으로서 존재하는 이 영화라는 것.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가 알고 있지만, 영화관에서는 누구나 꿈꾸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렇다. 우리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러 영화관에 간다. 꿈을 꾸는 것은 언젠가 꿈에서 깰 것을 각오하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누구의 꿈도, 혹은 누구의 리스트도 실현불가능하다고 욕할 수 없다. 우리는 그 각오를 존중해주어여만 한다.

 

이번 CINDI의 주제말이 'CINDI is not Digital'이던가. 그러므로 그건 디지털이 아니다. 그건 꿈이다. 혹은 그건 누군가의 리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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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10-19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월달에 본 영화를 9월달에 쓰고, 10월달에 쓰고...아주 막장이구나.

아이리시스 2012-10-19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두 번 읽었어요. 잘 모르면서 영화평론가들이 쓴 책을 하나씩 사들이는데 비슷한 느낌에서 맥거핀님 글은 두 번 읽고싶게 해요. 뉴스 간만에 보니까 사형제에 관해선 사회면이 떠들썩하던데, 살인하고 사형선고 받기도 꽤 어려운 모양입니다(농담이 아니에요ㅠ) 기본적으로 저도 사형제에 관해선 같은 생각. 우리 가족 건드리면(강아지까지도) 다 죽여버릴 거예요,이런 마음가짐.

근데 단편들이 좋네요. <일장춘몽> 감독의 말. 그럼 저는 요즘 '내가 보는 나'에 대해 많이 말하고 싶은 것 같은데 창피해서 글로는 못쓰고 쓸까봐 글을 자꾸 걸러내는 중인 것 같아요. 그러면 11월에도 뭐가 나오겠네요. (좋아요 좋아)

맥거핀 2012-10-22 16:07   좋아요 0 | URL
그 <일장춘몽>이라는 작품에 보면 인형이 나오는데, 그 머리에 '나'라는 글자와 '너'라는 글자가 붙어있거든요, 아마도 내 안의 많은 문제들이 내가 보는 나와 다른 사람이 보는 나가 다르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 같아요. 뭐 아무리 그래도 그 둘을 일치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요즘에 뭐 쓸 얘기가 없어서 예전에 본 영화들 재탕하고 있어요. 근데 재탕을 할려고 해도 머리 속에 남아있는게 별로 없어서 힘드네요. 아이리시스님도 그렇고 아주 오랜전에 본 것에 대해 글 쓰시는 분들 보면 대단..

2012-10-20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리스트를 생각해 보게 되는군요..ㅎ 그나저나 위타세라쿤 영화는 평생 한 편도 못 봤고, 홍상수 영화는 6년 내에 한 편도 못 봤어요.. 저의 영화광으로서의 리스트는 홀쭉해져만 가는군요.ㅎ

맥거핀 2012-10-22 16:10   좋아요 0 | URL
저도 뭐 남말할 처지는 아니고, 제 리스트는 요새 빈곤하다못해, 아주 너덜너덜할 지경입니다. 그래도 섬님은 최근에 저보다는 영화를 자주 보시는 것 같기도 한데요?
 

 

 

<씨네21>에서는 매년 가을 즈음에 영화를 이야기하는 책에 대한 기획 기사를 낸다. 이번에는 최근 1~2년 안에 우리나라에 출간된 책들 중에 읽을만한 몇 권의 책들을 여러 평론가가 각각 1권씩 추천하는 형식이다. 기사의 앞머리에 붙은 정성일 평론가의 글대로, '영화를 보는 것'과 '영화(책)을 읽는 것'의 간극은 점점 벌어지고 있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영화(책)들을 읽지 않으며, 영화(책)을 읽는 사람들은 (최근의) 영화들을 잘 보지 않는 것 같다. 몇 가지의 가정들이 맞는 것일까. 최근의 (대중)영화들은 영화에 대한 사유의 지점이 존재할 수 없도록 밀어내고 있으며, 반면 영화에 대한 고루한 이론들은 최근의 영화들을 이야기하는 데에는 점점 무딘 칼이 되고 있으며, 도리어 그 이해를 방해하는 것일까. (여기에 소개된 상당수의 책들이 이미 자국에서 오래전에 출판된 책들이거나, 고전 영화들을 다루는 책들이라는 점은 하나의 묘한 시사점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에 대상이 되는 대다수의 영화들이 최소 20년도 더 된 영화들이라는 점.) 정성일 평론가는 약간 다른 시선을 제안한다. 그것은 영화와 책을 억지로 묶는 것이 아니라 그 두 가지가 다른 꿈이자 다른 욕망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그 둘을 오가는 발길을 인정하는 것. ("만일 영화가 꿈이라면 그것을 선택한 행위가 당신의 욕망인 것이 아니라 그 꿈을 해석하려는 노력이 욕망인 것이다. 그때 책은 당신의 욕망에 대한 해석의 판본이 아니다. 그건 다른 꿈 안으로 당신을 끌어당기는 다른 욕망이다. (중략) 그래서 영화를 본 내가 더 잘 돌아오기 위해 더 멀어지는 행위이다.")

 

말이 필요 없는 정성일 평론가가 추천한 책은 크리스티앙 메츠의 <영화의 의미작용에 관한 에세이>이다. 1960년대 프랑스에서 처음 출간된 두 권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은 구조주의 기호학을 바탕으로 영화에 대해 기호학적으로 접근한 논문이다. (제목인 '에세이'에 속으면 안된다는 말이다. 상당히 난해한 책이다.) 정성일 평론가는 자신이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의 여러 (절망적인) 추억들을 이야기하며, 이 난해한 독서에 대해 겁을 주는 것으로 도전의식을 자극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당신이 영화 이론사를 공부하는 대학원생이거나, 기호학을 공부하는 전문적인 아카데미의 학자이거나, 1960년대 구조주의의 한 경향을 연구하는 사상사의 연구자가 아니라면 나는 당신에게 이 책의 독서를 말리고 싶다.") 나는 이들 중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지만, 이 책의 조각난 일부분을 일본어 번역본으로 접해야만 했던 정성일이 처한 상황보다는 조금 좋은 상황에 놓인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부산시네마테크의 원장으로 있는 허문영 평론가가 추천한 책은 토마스 엘새서와 말테 하게너가 공저한 <영화이론: 영화는 육체와 어떤 관계인가?>라는 책이다. 허문영 평론가는 좋은 영화개론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이 책과 로버트 스탬의 <영화이론> 두 권의 책을 말하고 있는데, 이 책이 스탬의 그 책보다 확실히 나은 점은 이 책이 제시하는 분류의 방법, 관류하는 질문의 태도라고 말한다. 즉 이 책은 새로운 이론을 전개하고 있지는 않지만, '창과 틀', '문과 스크린', '거울과 얼굴', '눈과 시선', '피부와 접촉', '귀와 공간', '뇌와 정신'이라는 창의적인 새로운 분류틀을 제안하고 있으며, 이 새로운 분류틀이 우리의 머리속에서 기존의 영화들을 새롭게 재배열할 수 있게 해준다(그럼으로써 새로운 사유가 출현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고전영화와 예술영화들에 대한 애정을 늘 드러내는 한창호 평론가가 추천한 책은 프란체스코 카세티의 <현대 영화 이론: 1945~1995년의 영화이론>이다. 이탈리아에 유학했었던 한창호 평론가는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이탈리아 영화학자가 쓴 이 책에 대한 애정과 공포심을 동시에 보여주는데, 이 책은 영화이론의 발달을 연대기순에 의해 세 가지의 패러다임 - 즉, 존재론적 이론, 방법론적 이론, 특수성의 패러다임 - 으로 나눈다. 위의 책과 비교해서 보다 고전적인 접근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영화라는 시간의 연대기를 차분히 살펴보는 데에는 이런 접근방식이 보다 나을 수도 있다. 다만 번역에 있어서의 몇 가지 문제를 지적하고 있으므로 그 부분은 주의할 것.

 

 

여러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는 김영진 평론가가 추천한 책은 하시모토 시노부의 <복안複眼의 영상: 나와 구로사와 아키라>이다. 이 책은 시나리오 작가이자 제작자였던 하시모토 시노부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과의 작업 과정과 그의 영화에 대해 말하고 있는 책인데, 특이한 점은 단순한 회고록이 아니라, 그의 영화들에 대해 냉정하게 비평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영진 평론가가 인용한 다음의 부분은 매우 인상적이다. "(구로사와는) 좋든 싫든 간에 새로운 작품을 모색하기 위하여 밟지 않으면 안되는 발걸음이라고 생각되어 예술가의 길로 나아갔기 때문에, 장인의 작업에는 큰 성공은 없어도 실패는 극히 드물고, 성공과 실패가 항상 종이 한장 차이인 예술가에게는 성패의 운명이 숙명적으로 따라다닌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예술가가 되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그러니까 구로사와 아키라는 장인의 길에서 예술가의 길로 나아갔기 때문에 결국 실패했다는 것이나, 그가 그렇게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

 

 

가끔 남들이 '예'할 때 '아니오'를 보여주는 신선한 평론가 남다은이 추천한 책은 하워드 휴스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의 심장을 겨누고 인생을 말하다>이다. 남다은 평론가는 글 내내 클린트 이스트우드에 대한 '길티 플레저'를 고백하고 있는데, 그의 영화 출연작이나 그가 연출한 영화들과 그가 평소에 하는 언행의 사이에 있는 있는듯 없는듯한 간극을 생각해보면 그의 이런 '의심스러운 애정'이 이해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아무튼 나 역시 그가 공화당 어쩌구 할 때마다 그게 뭔소리인가 싶고, '좋은 보수주의자', '진정한 보수주의자'라고 할 때마다 그게 뭐예요, 그거 먹는 거예요?,라고 묻고 싶어지지만, 그가 앞으로도 오래살아 더 많은 영화를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못한다.

 

 

그 밖에 <씨네21> 자체적으로 추천한 다른 책들은 위에서도 나온 로버트 스탬의 <영화이론>과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의 자서전 <로저 에버트: 어둠 속에서 빛을 보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시학에서 '이야기'를 건져내려는 노력 <영화 우화>(여기에서의 '우화'란 아리스토텔레스의 뮈토스muthos, 즉 이야기를 말한다), 디지털 시대에 필름 영화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를 묻는 데이비드 노먼 로도윅의 <디지털 영화 미학>, '느와르'라는 장르인 것도 같고, 아닌것도 같은 것의 정체성 찾기 프로젝트, 알랜 실버, 제임스 어시니 공저의 <필름 느와르 리더: 느와르에 관한 모든 것>까지 다섯 권이다.

 

 

 

 

이상 도합 열 권(사실은 11권)의 책. 올해 안에 모두 읽자(는 것은 당연히 꿈, 그러니까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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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0-14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이라도 거짓말이라도 좋은데요.^^ 별찜해두고 참고하겠습니다.

맥거핀 2012-10-15 12:58   좋아요 0 | URL
막상 써놓고 보니 올해가 별로 안 남았다는...시간이 빠르군요. (근데 사실 별찜이 무슨 말인지 몰라서 응?했어요. 찾아보고 알았죠. 알라딘 이런 기능도 있었구나..)

넙치 2012-10-15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책에 신경끈 지 너무 오래된 걸 상기시켜 주시네요. 덕분에 저도 한번 뒤적여봐야 겠어요. 감사합니다.

맥거핀 2012-10-15 12:59   좋아요 0 | URL
네..저도 의지를 다지는 의미로 굳이 이렇게 글로 남깁니다. 좀 가벼운 책보다는 이론서 격의 책들이 많아서 녹록하지는 않겠네요.;

Shining 2012-10-17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번 주 씨네21에 이런 내용이 있군요. 저는 기차 타면서 샀는데, 박찬욱-김지운-봉준호 감독들의 이야기가 있던데 그건 지난주 건가요?(기억이 가물;) 영화이론서는, 스물 한두살쯤에 많이 읽고 그 뒤엔... 그것도 아주 전설적인 책들만 읽은 초급수준이에요_-

이렇게 글 읽으니 오랜만에 이론서 읽고 싶네요. 먼저 읽으시면 간단한 단평이라도 남겨 주시와요 :D

맥거핀 2012-10-18 12:45   좋아요 0 | URL
아마 말씀하신 것은 지난주 책인 걸로 사료됩니다. 사실 정성일 평론가의 논의가 어느정도 맞는 말인 것도 같은게, 영화이론에 대해 많이 알게 되는 것은 일시적으로 도리어 영화감상을 저해하는 면도 있는 것 같아요. 영화 보면서 자꾸 다른 걸 생각하게 되니까. 그럼에도 결국은 그것이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해준다는 것도 사실인 것 같구요. (근데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면서 무슨 이론이 어떻고 저떻고, 무슨 주의가 어떻고, 하는 것은 뭐 그닥...) 뭐 암튼 그래서 이론서를 안본 것은 아니지만요.^^

시간이 없어서 댓글만 남기고 갑니다.

아이리시스 2012-10-18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역시 로저 에버트..가 제일 보고 싶어요. 그런데 영화이론서를 봐서 맥거핀님 리뷰는 감상리뷰에서 벗어나시잖아요. 저는 그게 좋아요.

저는 시간이 많아서 댓글만 남기지 않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이제 갑니다..(안녕!)

맥거핀 2012-10-19 17:05   좋아요 0 | URL
아..근데 저 마지막 문장이 오해의 소지가 있군요. '그래서 안봤다' 그 얘깁니다. 뭐 자랑은 아니지만요.; 로저 에버트 저 책 산지 꽤 되었는데, 아직도 사실 한 장도 안펴봤다는..에버트 씨의 저 웃는 얼굴을 볼 때마다 민망해 죽겠어요. 빨리 읽어야 하는데.

아니..시간도 많으신 분이 자주 좀 오세요. 오셔서 글도 쓰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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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이 올까, 생각했는데 아무튼 마지막이 왔다. (그러나 사실 실질적으로 아직도 써야하는 리뷰들이 5편이 남았으므로, 실질적인 마지막은 조금 후에 보게 될 것 같다.) 내가 하는 상당수의 일들이 그렇듯 의욕적으로 출발했으나 마지막은 역시 '의욕적'이란 게 그런 뜻이었나,하는 질문을 하게 되는 것 같다. 리뷰들은 거의 제 때 올리지 못했고, 매번 대장님에게 민망한 메일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고도 심지어는 그 메일의 기한마저 지키지 못하고 있으니 이 글도 보시게 될 대장님에게 송구할 뿐이다. <코뮤니스트> 리뷰는 빠르면 오늘 중, 늦어도 내일 중으로는 꼭 올릴께요.-_-) 내가 앞으로 서평단을 하려는 생각을 접는다면 그것의 8할은 이 민망함 때문이다. (나머지 2할은 읽고 싶지 않은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하는 것을 견디게 해준 박하사탕 값?) 예전에 알라딘 측에 직접 양해를 구할 때에는 솔직히 그런 생각이 별로 없었는데, 같이 리뷰를 쓰는 입장에서 말하자니...(아마도 알라딘에서 노린 것이 이것인듯.)

 

아무튼 하나 확실한 것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이상하게도 좋아보이는 책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다는 사실이고, 이게 착각인지 아니면 9월에 유달리 내 입맛에 맞는 책들이 많이 출간되어 그런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분명 다음 서평단의 책들을 보면서 울분을 토하겠지.) 그러니까 뭐든지 기회가 있을 때, 그 기회들을 소중히 다루어야 하는 법이다.

 

 

 

약탈적 금융사회 - 누가 우리를 빚지게 하는가 / 제윤경, 이헌욱 / 부키

 

로버트 서비스의 <코뮤니스트>는 공산주의 사회가 그 인민들을 폭력과 억압, 감시와 상호고발로 지배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는 그 국민들을 어떻게 지배할까. 그 지배전략 중의 하나는 그들을 빚지게 만드는 것이다. 일단 한 번 빚을 지기 시작하면, 직접적인 폭력 혹은 효과적인 수사 따위는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빚을 갚기 위해 뼈가 부서져라 '알아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채무자들은 2등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빚을 지지 않으면 되지 않겠냐고? 이 책은 왜 빚을 지지 않는 것이 불가능한지, 이 사회의 효율적인 메커니즘을 알게 해 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한겨레21>에서 제윤경 씨의 칼럼들을 재미있게, 그러나 등줄기의 서늘함을 때로 느끼며 읽었다.)

 

 

게임, 게이머, 플레이 - 인문학으로 읽는 게임 / 이상우 / 자음과모음

 

여전히 (컴퓨터) 게임은 (특히 모든 부모들에게) 악의 근원처럼 받아들여져 왔다. 이후 시기에 다시 중세와 같은 거대한 암흑이 도래하고, 인간의 7대악을 초래하는 수많은 물건들이 화형당한다면 아마도 (야동이 가득찬 하드들과 함께) 수많은 게임 소프트웨어가 기꺼이 한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러나 국민게임 애니팡이나 앵그리버드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한 번도 게임을 안해본 자, 여기에 성냥불을 당기거라,라고 하면 쉽게 성냥개비를 집어들 만한 사람이 있을까. (물론 야동도 마찬가지.) 그러니 우리는 싫든 좋든 그 이후에도 여전히 '게임과의 전쟁'을 계속해야 할 것이고, 그 게임들을 정벌할 십자군 기사가 되고 싶은 사람이거나, 기꺼이 수많은 정령들과 수도사와 마법사들과 함께 그 십자군에 맞설 사람들(그대가 레벨1일지라도 말이다) 모두 한번쯤 읽어볼 책이 아닐까 싶다. 

 

 

  

얽힘의 시대 - 대화로 재구성한 20세기 양자 물리학의 역사 / 루이자 길더 / 부키

양자 불가사의 - 물리학과 의식의 만남 / 브루스 로젠블룸 외 / 지양사

 

이번 달은 흥미롭게도 양자역학에 다룬 두 권의 책이 눈에 띈다. 한 권은 양자역학 중에서도 특히 양자 얽힘 현상에 대해, 대화라는 형식으로 풀어낸 책이고, 다른 한 권은 양자이론의 주요 내용들에 대한 교양강좌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튼 '쉽게 썼다'는 말이다. 물론 이런 책들의 쉽게 썼다는 말에는 함정이 있기는 하다. 예를 들어 최근에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산, 책 뒤편의 '대중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간략하고 명쾌한 수식으로 풀어냈다'고 문구가 쓰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보자. "하지만 물질의 특성에 대한 응력 성분의 의존성을 나타내는 방정식에 불변성이 있는지 조사하고, 이 불변성 조건을 바탕으로 압축성 점액에 관한 방정식을 작성하는 것이 좋다."와 같은 문장은 그나마 알아들을 수 있는 축에 들어간다. (그러니까 그 '대중'이 그 '대중'이 아니란 얘기다.) 그게 걱정되어 서점에서 두 책에 대해 꼼꼼이 살펴보았는데, 앞의 한 챕터 정도까지는 적어도 욱하는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아니, 도리어 꽤 재미가 있었다.

 

 

죽음 / 임철규 / 한길사

 

마지막 추천의 마지막 책에 어떤 책을 넣을까 고민했다. 유홍준, 김윤식, 강준만, 진중권, 강상중 등 쟁쟁한 필자들의 책들이 나온 9월이다. 그런데 이 문구를 보고서는 이 책을 집어넣을 수밖에 없다. 한 노학자의 평생에 걸친 '죽음'에 대한 성찰. 저자 임철규는 그리스 로마 문학 등의 문학 연구와 비평에 평생을 천착해 온 학자로, 마지막으로 모든 인간들의 피할 수 없는 형벌인 죽음을 맞닥뜨리고자 한다. 이 책은 문학, 신학, 정신분석학, 철학 등에 나타난 여러 다양한 죽음에 대한 사유를 통해 '살자'는 당위의 문제가 아닌 '죽음' 그 자체를 들여다보고자 하는데(물론 이들 문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은 인간에게 죽음이 없었으면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고찰을 통해서 우리가 죽음 전에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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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0-05 0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 담아둡니다^^

맥거핀 2012-10-05 23:19   좋아요 0 | URL
서점에서 봤는데, 책 자체가 뭔가 묵직한 느낌이 있어요.

2012-10-05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에세이 분야인 저도 근근히 했고, 막달이라 안도하고 있는데, 인문사회분야인 맥거핀님이야 오죽했겠습니까~. 그러나 분명 저도 다음달에 울분을 토하고 있겠지요.

저는 성냥불을 댕길 수 있는 사람인데.. 하드에 야동도 없고, 국민 게임조차도 손끝 하나 안 대본~~.ㅋㅋ 제가 안 좋아하는 두 가지는 게임, 윈도우 쇼핑입니다. 왜냐면, 둘 다 실질적으로 남는 게 없어서.. 전 가상 세계에 혹하지 않는 종류의 인간~.

그나저나 전 이미 약탈적 금융사회의 명백한 2등민이라, 약간의 소개글만 읽어도 등골이 서늘하네요. 읽고 나면 섬뜩하겠죠~

맥거핀 2012-10-05 23:24   좋아요 0 | URL
근데 정말 이상해요. 할 때는 이것도 그렇고 저것도 그렇고 툴툴대는데, 막상 끝날 때가 되면 그 '툴툴대기'자체가 너무 그리워져요. 아..그래도 저거라도 할 수 있는 때가 좋았어 그러고 있지요.

아..진짜요? 그건 믿기어려운데요. 어렸을 때 오락실 너구리는 해보시지 않았을까..(그것도 컴퓨터 게임입니다요. 야동은 믿습니다만.) 저는 하루에 컴퓨터를 끼고 있는 시간이 너무 긴 인간이라서요. 좀 줄이기는 해야하는데. 근데 저도 인터넷쇼핑은 잘 안해요. 돈이 없어서...;

신용카드를 가지고 있는 한 적어도 우리모두는 빚진 사람이죠. 제윤경 씨는 늘 모든 신용카드를 어서빨리 잘라버려라..하고 주장하지만.

2012-10-06 08:57   좋아요 0 | URL
ㅋ 죄송~ 성냥불 못 댕기겠군요. 현재만 생각했어요. (국민게임에 손끝 하나 안 댔다는 건, 위에 언급된 두 개에 대한 이야기..^^)
-과거엔 1943,1942에 동전 많이 바쳤었네요. PC로 헥사 하느라 눈알 빠진 적도 있고, 테트리스야 뭐 당연히.. 지금은 아무도 안하는 폭탄게임도 PC로 무진장 했었구만요.ㅋ (근데 아무튼 쓰고 보니 정말 조잡한 게임만 했었구나, 싶네요.)
근데 언제부턴가 모든 게임에 완전히 흥미를 잃었지용...

맥거핀 2012-10-08 12:01   좋아요 0 | URL
오..1942. 그거 재미있죠. 가끔 폭탄을 날릴때의 쾌감! 저는 어렸을 때 스포츠게임에 좀 미쳐있었죠. 신야구, 세이부축구, 버추어스트라이커..요즘에도 술마시고 어쩌다 오락실에 가는 때가 있어요. 술깨는 데는 그런 게임들이 가끔 도움을 주죠. 헥사..오랜만에 듣는 추억의 이름이네요. 요즘에도 헥사게임이 있나..(애니팡의 선조격?) 찾아봐야지.

가연 2012-10-05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파트장이라서.. 아무래도 우수리뷰 선정도 있고 그러다보니 공정성(?)을 위해서 일부러 평가단하시는 분들 글에는 잘 댓글을 달지 않는데, 혹은 모든 분들께(너무 바빠서 달지 못할 때도 있지만) 다 달거나.. ㅋㅋ 첫 문단을 읽으니 안달수가 없네요. 저는 리뷰 안올리신 분들 서재에 재촉 댓글 쓸 때가 그렇게 민망할 수가 없더라구요.. 내가 이렇게 재촉 댓글 달아도 되나, 이런 기분도 마구 들고.. 물론 이 댓글은 재촉 댓글이 아니랍니다, ㅋㅋ

맥거핀 2012-10-05 23:27   좋아요 0 | URL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방금 리뷰를 올리고 이 댓글을 봤다는 사실이네요. (너그러이 기다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사실 말이죠. 파트장 본인도 좀 늦고 그러면 별로 민망하지 않는데(원래 회사에서도 같이 지각하는 상사가 뭐라하면 별 신경 안쓰잖아요), 워낙 항상 빨리 하셔서..아무튼 늘 감탄하고 있습니다. 리뷰 빨리 쓰는 비결 좀..

아무튼 이제 거의 마지막이네요. 그간 수고 많으셨어요.^^
 

 

 

1. 충고

 

(아마도 사람마다 느끼는 것이 다르겠지만) 대체로 선배들의 충고란 별 가치가 없을 경우가 많다. 물론 충고도 충고 나름이어서, 실제적인 방법들 - 예를 들어 부장이 시킨 무가치한 일과 과장이 시킨 가치있어 보이는 일 중 어떠한 것을 먼저 해야하는가 - 같은 것은 꽤나 도움이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술자리에서는 시간이 지나면 실제적인 충고들은 점점 몸 안의 수분 농도처럼 옅어지고, 뜬구름잡는 이야기들, 두루뭉술한 인생의 비결들은 가득 쌓인 담배 연기만큼 짙어지고 만다. 물론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100만명의 인생에는 100만개의 개똥철학이 있고, 다른 사람의 개똥(철학)을 내 인생에 발라 약으로 만들기란 상당히 어려운 법이다.

 

반면 후배들의 충고는 대체로 가치가 있다. 물론 후배들의 충고란 평소에는 거의 듣기 힘들다. 그들에게 충고를 듣기 위해서는 밥을 사준다고 꼬셔서 싼 술집으로 데려간 다음, 그들에게 각종 폭탄주 레시피를 1번에서 마지막 번호까지 차례로 실험해보아야만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틈엔가 그들에게 이런 충고가 튀어 나온다. "형은 왜 그렇게 살아?!" (물론 이 말은 절대 이렇게 들리지는 않는다. 이 말은 대체로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본인의 혀에 대한 타박처럼도 들린다. "혀는 왜에 구러케 솨라?!") 그리고 그런 충고를 듣고 나면 정중히, 그러나 꽤나 난폭하게 후배를 화장실 변기와 타일을 구별할 수 있을만한 위치에 던져둔 다음,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된다. 아, 뭔가 문제가 있긴 있구나. 확실히 뭔가 문제가 있기는 있어. 그리고 그 '문제'라는 녀석을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그러므로 그 충고가 어찌 가치가 없다고 말할 수 있으랴.)

 

2. 다크나이트 라이즈

 

그 문제 중에 하나는 물론 게으름에 관계된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를 본 후 바로 기록을 남기지 않고 미적거리다가, 결국 쓸 수 없는 글들에 대한 것도 그렇다. 그러므로 매일 일기를 쓰는 사람들을 보면 사실 약간 경외감이 든다. 자신에 대한 것도 아니고, 눈 뒤에 숨어 자신이 본 것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것도 이렇게 미적거리게 되는데, 매일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을 글 속에 새겨 남겨놓다니. 아무튼 늘 메모들은 키워드들로만 남아 있고, 그 키워드들은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는 도대체 그 처음의 형태들을 복구해낼 수가 없다.

 

복구해낼 수가 없는 메모 중의 하나는 <다크나이트 라이즈>에 대한 것이다. (뭐 사실 모든 게 다 그렇지만) <다크나이트 라이즈>에 대한 메모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거리와 그다지 재미없는 이야기거리가 혼재되어 있다. 예를 들어 좀 재미있어 보이는 이야기거리에는 베인과 조커의 공통점 같은 것들이 있다. <다크나이트 라이즈>의 악의 중심인 베인과 <다크나이트>의 악의 중심인 조커는 악당들이란 점 이외에도 한 가지 눈에 띄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그 두 사람이 모두 망가진 입의 소유자라는 것인데, 조커는 잘 알려져있듯이 웃는 얼굴이 극도로 강조된, 양 옆으로 길게 찢어진 입의 소유자이고, 베인의 입은 영화 내내 마스크에 의해 가려져 있다. 하여튼 간에 두 사람 모두 불구의 입, 뭔가 비정상적인 입의 소유자이다. 물론 이는 별 것 아닌 공통점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숙적인 '다크나이트' 배트맨과 연결지으면 조금은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배트맨의 신체에서 우리가 유일하게 직접 마주하게 되는 부위는 그의 입이기 때문이다. 즉 배트맨의 모든 신체는 최신의 슈트로 가려져 있는 반면에 거의 유일하게 그 입만 공기 중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다크나이트 시리즈를 어쩌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입을 가진 자와 입을 가지지 못한 자의 대결.

 

이야기가 막 나가는 김에 조금 더 생각을 연장해 본다면 아마 이 입과 연관지어 두 가지 정도를 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입이라는 것은 우리의 얼굴에서 무엇을 담당하는가,라는 부분이다. 신체상으로 볼 때는 입은 물론 먹는 일을 담당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은 밀접하게 표정이라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주 간단하게 사람의 웃는 얼굴을 표현하고 싶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이렇게 하면 된다. :-) 반면, 그 사람의 화난 모습을 표현하고 싶다면 이렇게 한다. :-( 즉 입은 그의 겉으로 드러난 표정을 읽게 하는 지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커나 베인을 보며 공포를 느끼게 되는 것은 한편으로 그들이 표정이 없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베인은 실제의 마스크를, 그리고 조커는 웃는 얼굴이라는(그러나 사실은 웃지 않는- 이 부분과 관련지어서 조커가 자신이 웃는 표정을 가지게 된 이유를 술회하는 믿을 수 없는 진술을 떠올려보라) 마스크를 쓰고 있다. (물론 도둑이나 강도들도 대체로 입을 가린 마스크를 쓴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에게 공포를 느낀다.) 그러나 입 그리고 표정의 문제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이 영화 <다크나이트 라이즈>의 어떤 묘한 부분들과 연관이 되는데, 그것은 이 영화에 떠돌고 있는 무산혁명의 이미지이다. 가지지 못한 자들이 벌이는 공포스러운 혁명의 모습들, 즉석에서 이루어지는 재판과 사형과 추방, 미친 혁명가의 선동, 그리고 그 선동에 호응을 보내는 사람들. 무산자들이 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먹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입이 있었으나 그들에게는 그 입이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그들은 아무 것도 먹을 수가 없었고, 아무 것도 말할 수도 없었고, 동시에 그들에게는 어떠한 표정도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입을 가지지 못했던 그들은 결국 입을 드러낸 어둠의 기사, 배트맨과 복구된 경찰력에 의해 퇴치되고, 고담 시에는 평화가, 그러나 어쩌면 그들만의 평화가 찾아온다. 물론 당연하게도 이겨야하는 것은 다크나이트고, 미치광이에 의한 혁명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는 베인의 망가진 입을 보면서, 그리고 마지막 장면 꽤나 비싸보이는 찻집에서 커피를 입에 가져가는 고담 시의 수호자이자, (한때) 억만장자 기업인 브루스 웨인을 보며 약간 입맛이 썼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이 어둠의 기사의 마스크는 입은 드러내 보이되, 반대로 그 눈을 가리기 때문이다. 입은 웃고 있되, 눈은 웃고 있지 않은 자들, 이 현실을 수호(한다고 말)하는 자들도 그런 자들이다.)

 

3. 상상

 

아무래도 여기서 조금 더 길어지면 <다크나이트 라이즈>에 대한 리뷰가 될 것 같고, 이 글은 그저 잠이 안와서 쓰는 글일 뿐이니 이쯤에서 끊어야 할 것 같다. 아무튼 <다크나이트 라이즈>가 <다크나이트>와 다른 부분에서 흥미롭게 느껴졌던 것은 이 이야기는 전작과 다르게 어딘지모르게 헐거운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즉 모든 곳이 꽉 짜여져 있어 거의 물샐틈 없는 공간처럼 느껴졌던 그 전작과 달리 이 이야기 속에는 어떤 빈 공간이 있고, 그 빈 공간을 우리의 어떤 상상으로 채워넣어야만 완전한 이야기가 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채워넣어야 한다는 것은 예를 들어 이런 것들이다. 지난 연휴에 하릴없이 채널을 돌리다가 '넝굴당' 재방송을 보게 되었는데 그 장면 중에 시어머니인 윤여정이 예전 아들을 잃어버렸을 때 주위의 반응을 회상하며 울부짖으면서 억울해 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이 흥미롭고 윤여정의 연기가 돋보이는 이유는 이 장면에서 어떠한 실제의 회상씬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그녀의 가슴을 쥐어 뜯는 연기를 보는 우리들은 그녀가 받았을 예전의 상처의 정도를 상상하고, 그 크기를 짐작해보게 된다. 그러니까 그 크기는 그 답답한 흑백의 회상씬에 갇혀 있지 않다. 그 크기는 우리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보는 이들의 머리 속에서 부풀어 올라, 각자의 머리 속에서 커다란 흑백의 회상씬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그 상상만으로 우리는 그녀의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보게 되며, 그 억울함에 공감하고, 그 상처의 크기를 되레 짐작하게 된다. 아니면 이런 것은 어떨까. 예전에 왕가위의 <타락천사> DVD에 실려있는 정성일의 코멘터리 중에 그가 지나가며 언급하는 대목이 있다. 자신을 찍지 말라고 화내는 아버지 자신을 찍은 화면을 보고 있는 아버지를 금성무가 보고 있는 장면에 흐르는 금성무의 독백. 이 독백이 마음을 건드리는 이유는 우리는 그 장면에서 이 독백이 아버지가 이미 세상에 없는 후일의 어떤 시점에서야 가능하다는 것을 상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즉 그 아버지를 보는 자신의 모습을 후일의 어떤 시점에서 회상하는 것,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그의 사랑과 그에 동반되는 그리움의 크기를 역설적으로 상상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다른 여러가지 알 수 없는 것 속에서도 하나 유일하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당신에게 아무 것도 상상하지 못하게 만드는 영화(혹은 다른 어떤 것이라도)는 (적어도 당신에게 있어서는) 고급의 쓰레기일 뿐이라는 것. 그것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은 쓰레기더미 속에 자신을 방치해두는 것과 동일한 행위라는 것.

 

4. 위험

 

가끔 뭔가를 끄적거리다 보면 저절로 무엇인가를 쓰고 있다고 여겨지는 때가 있다. 줄줄이 손 끝에서 튀어나오는 문장들, 어느 틈에 정신을 차려보면 이미 쓰여져 있는 긴 문단, 이미 내려져 있는 스크롤바. 솔직히 그런 때가 항상 오기를 바라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마도 그런 때가 가장 위험한 때가 아닌가 싶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손 끝에 있지 않으니까. 손 끝에서 끄집어내는 이야기들은 다른 이야기를(그러니까 예전의 그 '문제'라는 녀석같은 것) 튀어나오지 못하게 하니까.

 

그런데, 그런데 인간의 신체라는 것은 참으로 웃긴 것이어서 그 문제를 생각해보려고 할 때마다 달콤한 무엇인가를 내보내 잠을 자라고 한다. 졸립다. 잠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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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03 07: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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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05 0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03 18: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05 0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hining 2012-10-04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제가 좋아하는(또는 기다리는?) 맥거핀님의 잠이 안와 쓰는 글, 새 페이퍼군요(그렇다면 저는 맥거핀님의 불면을 좋아하는.. 기다리는?_-). 충고, 에 대한 이야기 저도 비슷한 글을 쓰고 있는 중이었어요. 대체 왜 사람들은 남의 인생에 훈수를 두는가 하는 이야기_-(명절의 여파인가봐요)

날씨가 좋군요, 자전거 타고 달려야할 날씨에요. 명절은 어떻게 보내셨나요? :)

맥거핀 2012-10-05 02:22   좋아요 0 | URL
명절은 사실 전혀 특별한 게 없었어요. 누군가에게 그렇게 (충고를 가장한) 앞담화를 듣지도 않았구요. 평온하고, 조용하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확실히 그렇게 몸이 편해지니까 정신이 확 이완이 되어서 책들도 눈에 잘 안들어오더라구요. 예전에는 연휴 때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그래야지..하고 계획을 세우기도 했는데, 아주 무계획적으로 보냈습니다.

예전에 다운 받아 놓고 못 본 영화들도 몇 개를 봤어요. 옛날 일본영화들 몇 개를 봤는데 좋았어요.

그래서 자전거는 좀 타셨는지...
 

 

 

 

피에타, 김기덕, 2012

 

 

(전체적으로 영화의 줄거리와 결말부가 들어있습니다.)

 

  

 

화제의 중심에 올라있는 김기덕의 <피에타>를 보았다. 사실 그간 김기덕의 영화를 거의 보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모를까, 김기덕의 예전작들을 보아온 관객이라면 무엇인가 약간은 낯설다라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는데, 그것은 어떤 가시적인 부분에서라기보다는 비가시적인 어떤 '느낌'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이야기의 측면으로 봐서는 여러 평자들이 지적했듯 박찬욱이나 봉준호의 그림자를 언뜻언뜻 보게 되는데, 예를 들어 이 <피에타>의 이야기를, <마더>의 어머니가 <친절한 금자씨>의 공간으로 들어와 금자씨가 된다면, 혹은 <복수는 나의 것>의 공간으로 들어와 동진이 된다면 벌어질 일들을 김기덕 식으로 풀어낸 영화라고 할 수도 있다. 즉 김기덕의 이 이상한, 그러나 아주 낯설지만은 않은 이야기에서 우리는 언뜻 봉준호의 냄새나 박찬욱의 향취를 느끼게 되는데, 그것은 김기덕 고유의 분위기와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박찬욱이나 봉준호의 영화에서는 우리는 종종 영화 바깥에 머물러 있다. 즉, 영화를 보는 우리들은 그 고통을 내부에서 견디는 것이 아니라, 때로 바깥으로 빠져나오게 되며, 그 증거 중의 하나로 우리는 그 영화의 위계와 구조를 분석하고 싶은 충동에 빠지게 된다는 점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예전) 김기덕의 영화는 관객을 가장 가까이에 데려다놓고 이야기를 시작했으며(물론 관객이 원할 경우에 한해서), 일단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영화는 때로 '불가해' 그 자체, 끔찍스러운 이물의 어떤 것으로 남았다(우리는 고래의 뱃속을 빠져나가야만 비로서 그곳이 고래의 뱃속임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번 영화에서는 그런 것이 뒤섞여 있다. 처음 관객을 압도하면서 시작했던 이 영화는 중간 부분에 이르러 그 전체의 구도를 보여주는 듯 하다가, 다시 관객을 몰아붙이며 끝낸다.

 

영화는 제목에서부터 그 종교성을 드러내는데, 성모가 죽은 아들(예수)을 안고 있는 '피에타'라는 이 제목과 (그리고 포스터는) 어떤 종교적인 심상 몇 가지를 떠올리게 한다. 예를 들어 이 전체 이야기를 단테의 <신곡>에 느슨하게 빗대어 볼 수도 있는데, 처음 강도(이정진)의 악행은 <신곡>의 '지옥편'이다. <신곡>의 9층으로 이루어진 지옥, 그리고 청계천의 나뉘어진 수많은 지옥들. 이 지옥들에는 죄를 지은 자들, 그러니까 이 사회에서 '죄'라고 명명되는 '돈을 빌리고 갚지 못한 자들, 혹은 갚을 마음이 없는 자들'이 각각의 공간에 숨어 있다. 그리고 이 곳을 단테, 아니 강도가 차례로 방문한다. 그러나 물론 강도는 단테가 아니다. 강도의 악행은 그 이름대로 차라리 '강도'짓을 하는 게 더 나아보일 정도인데, 그는 이 지옥의 마지막에서 엄마(조민수)를 만나고 '연옥'으로 들어선다. 속죄자들이 자신의 죄를 돌아보고 정화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던 단테의 <신곡> '연옥편'처럼 강도는 거부하던 엄마를 일단 받아들인 후에는 이상스러울 정도로 급속한 변화를 보여주는데, 갑자기 존대말을 쓰는 것은 기본이고, 급기야는 돈을 받아내는 일을 포기하는 정도에까지 이른다. 그럼 단테에게 베아트리체가 천국을 인도했던 것처럼, 강도에게 엄마가 속죄와 천국의 길을 인도할 것인가. 그러나 이야기는 새로운 측면으로 나아가고, 그는 연옥에서 다시 지옥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처음 지옥과 비슷하지만 다른 공간, 이번에는 누구나 그를 증오하는 지옥. 불에 타 죽어버려라, 제발, 이 인간백정아.

 

물론 성모마리아와 아들 예수를 표현한 '피에타'가 그렇듯이 <피에타>는 엄마와 아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김기덕의 영화에서 아버지는 없었다. 아니 종종 있기도 했지만, 그건 아버지라기보다는 아버지의 탈을 뒤집어쓴 괴물에 가까웠고, 그 아버지들은 종종 아들에게 잡혀먹혔다. 그래서 늘 어머니와 아들만 남았다. 이번 영화에서도 하나 특이한 점은 이 세계 역시 아버지들은 이미 어디론가로 사라져버린 세계라는 점이다. (아니 유일하게 직접적인 부자 관계가 나오기는 한다. 연필을 손에 든 소년 말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 소년은 불구 아버지를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그 아버지는 괴물을 만들어내고 있었으니까.) 강도와 엄마, 엄마와 그녀의 죽은 아들, 그리고 또다른 늙은 엄마와 불구가 된 아들. 그럼 아버지들은 어디 갔을까. 극 중 한 아버지는 '보험금을 받는 게 복잡해진다'는 만류에도 옥상으로 올라가고(이렇게 표현하는 게 온당할까 싶다. 올라가는 아버지와 내려가는 강도를 잡는 이 씬은 인상적이다), 다른 아버지는 아버지가 되자마자 아들을 위해 두 손을 기꺼이 잘라서 먹이려 한다. 그러므로 옥상으로, 혹은 프레스기계 밑으로 아버지를 밀어넣은 강도는 동정심 따위는 가지지 않는다. 그곳으로 아버지 세대를 밀어넣는 것은 자신이 아니니까. 주의 영광, 할레루야 따위의 구호가 붙어 있는 이 청계천 공간 어디에도 주의 영광 같은 것은 없다. 아니 없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그 어디에도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누군가가 없다. 예를 들어 이곳에서 새건물을 지으려고, 이들에게 건물을 비워주고 나갈 것을 요구하는 누군가, 그 누군가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싸움이 어려워지는 것은, 그 적이 거대해지거나 더 무서워지기 때문이 아니다. 도대체 그 적이 누구인지 점점 알 수가 없게 되어가기 때문이다. 적이 아무데서도 보이지 않는데 도대체 누구와 싸워야한다는 말인가? 일주일만에 10배를 받아내려 하는 사채업자, 200원에 물건을 만들어내라는 전화 속 누군가, 그들이 적인가? 아니면, 그 10배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허가해주는 그 누군가, 아니면 200원에 만들어낸 부속물들을 사가서 그것으로 더 반질반질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누군가, 그들이 적인가? 아니면 그들을 이렇게 만드는 소위 '시스템'이 적인가? 알 수가 없어진 세상.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이 온다. 다시 단테의 <신곡>. <신곡>에서 단테는 베아트리체에 이끌려 마지막 천국을 본다. 그는 그 곳에서 '사랑'이라는 것을 다시 새롭게 배운다. 즉 이 '사랑을 배운다'라는 것. 영화 <피에타>에서 강도는 뒤늦게 나타난 엄마에게 무엇인가, 그러니까 뭐 사랑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무엇인가를 배운다. 영화 속에서 엄마가 강도의 악행에 대해 변명하듯이 반복하는 말들이 있다. 그건 얘의 잘못이 아니예요. 내가 없었기 때문에, 내가 일찍 이 아이를 버렸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즉, 강도의 악행은 어떤 근원적인 무엇인가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라는 것이 이 엄마의, 그리고 이 영화의 논리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어린아이들이나 좋아할 법한 풍선을 가지고 노는 강도의 천진난만함이나, 보다 더 근원적으로 마치 문명 자체를 배우지 못한 늑대소년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거칠게 거의 생식에 가까운 육식을 하고, 닭을 직접 잡는 그의 모습. 왜 그는 손질된 닭을 사지 않는 것일까. 손질된 닭이라는 것을 판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닐까. 농담이다.) 혹은, 엄마에게 "내가 뭐 잘못한 것 있어?"라고 되묻는 모습일 수도 있다. 아무튼 간에 그래서 이 엄마는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강도가 불쌍하다. 왜냐하면 무엇이 어찌되었건 간에, 이 강도에게는 (무엇인가를 가르쳐 줄) 그 누군가가 없었음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다시 어머니 성모와 아들 예수의 '피에타'. 그렇다면 우리는 강도를 죄를 대속하고 떠난 예수로 볼 수도 있을까. 예수와 강도의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사랑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어떤 것, 오로지 그것만을 알고 있던 존재였다는 점이다. 악마의 기원은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자들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아담과 이브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가르쳐준 자들. 그래서 선과 악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 자들. 그러나 예수는 이의 반대편에서 하나만 아는 사람들이 하는 이해되지 않는 말들, 예를 들어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내밀라는 식의 말을 한다. 그것은 너무 많이 아는 자들에게는 바보 같은 말일 뿐이다. 내 오른뺨을 1대 때리면 네 왼뺨을 10대 때리라고, 그것이 악마의 논리이다. (그러고보면 이 인물의 이름 '강도'도 심상치 않음이 사실이다. 예수 대신 풀렸던 자도 강도이고, 예수와 같이 못박혔던 자들도 강도였다.) 그래서 (물론 기독교식으로 볼 때) 유일하게 아는 사랑으로 전 인류의 죄를 대속하고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와 같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강도가 유일하게 엄마에게 배운 것, 혹 사랑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바로 그것이 강도를 속죄의 길로 이끌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아마도 그 마지막의 끝없이 이어지는 붉은 줄일 것이다. 그것은 강도의 피가 아니니까. (예수의 마지막에 기적이 있었던 것처럼, 이 마지막에도 기적이 있다. 고속도로에 끝없이 이어지는 붉은 피의 선은 기적의 현장이다.) 그것은 아마도 강도에게 빼앗겼던 모든 사람의 피, 아니 보이지 않는 적과 계속 싸워야만 했던 사람들의 피니까. 김기덕이 늘 원했던 것은 그런 것이었다. 그 참혹함을 기억해달라, 그 피를 기억해달라는 것. 그 피는 실제의 피니까. 실제의 청계천이 그렇게 만들어졌으니까.

 

아직 나는 마지막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것을 속죄로 볼 수 있을까. 솔직히 정말 잘 모르겠다. 김기덕의 영화에서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늘 육체의 고통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늘 정신적인 고통이 더 크게 도사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늘 자해를 하거나, 스스로에게 혹은 타인에게 육체의 고통을 가하곤 했다. 그것이 정신의 고통을 누그러뜨리는 방법이라는 것을 아니까. 이 마지막도 사실 그런 비슷한 것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다. 복수가 완성되려면 이 마지막이 이렇게 되어서는 안되었다. 그는 아무 것도 몰라야 했고, 살아 있는 채로 더 고통스러워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여자의 차 밑으로 들어갔고, 우리는 그녀가 이 어려운 상황을 맞닥뜨리고 나면, 집에 돌아와서는 더 큰 고통에 맞닥뜨리게 될 것임을 안다. (남자가 숨긴 것.) 영화 속에는 불길한 이미지들이 떠돌지만, 영화 속에서 가장 인상깊게 남아있는 것은 그 공간들이다. 강도가 텅빈 눈으로 들여다보는 흐릿한 창 안쪽의 공간들. 강도가 올까봐 공포에 떠는 사람들이 숨어 있는 그 이상한 작은 지옥들, 그리고 그 작은 지옥이 합쳐진 거대한 지옥 청계천이 있다. 강도가 사라졌어도 그 수많은 지옥과 지옥에서 만들어지는 증오들은 여전히 건재하고(그것은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죄많은 인간들의 죄를 모두 다 떠안고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지 2000년 가까이 되었지만, 세상은 여전히 수많은 증오들로 가득하니까.) 김기덕은 기억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억해야 했던 것은 예수의 부활과 샤방샤방한 천국이 아니라, 예수가 한걸음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흘리던 그 피였다. 그 피를 기억하라.

 

 

덧.

마지막으로 이 얘기는 덧붙이고 싶다. 김기덕의 영화에서 봉준호나 박찬욱의 그림자를 보게 되는 것은 사실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다. 단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김기덕이 봉준호나 박찬욱 식이 된다면 김기덕은 어디에 있지?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그간 김기덕 영화를 둘러싸고 있던 불가해한 '무언가'가 이 영화에서는 한결 약해진 느낌이고, 그것은 어떤 장점을 드러내는 것처럼도 보이지만, 동시에 그 '불가해함'에 가려져 있던 김기덕 영화의 단점들을 도드라지게 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라면 거친 감정선 같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강도는 너무 빨리 엄마와 가까워지고, 너무 빠르게 변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박찬욱이나 봉준호 식이 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비교의 도마 위에 스스로 오르게 된다는 의미도 된다.) 즉 이를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두 가지의 영화가 있다. 보는 이를 버티게 하는 영화와 버티게 하지 못하게 하는 영화. 김기덕의 예전 영화들과 <피에타>가 다른 점은 텐션을 끌어올리기는 하지만, 이 <피에타>는 결정적인 순간에 숨쉴 공간을 남겨놓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그 숨쉴 수 없는 한계점에 도달하려고 그간 김기덕의 영화를 보았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결국 김기덕 영화의 매력이었으니까. 인간은 불가해한 것에 대해서는 무서워하거나, 경외하지만, 이해할 수 있게 되면 곧 관심을 잃어버리게 마련이니까. 다음 영화를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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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09-13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 누나가 피에타를 보시고 무슨 감상을 이야기하실지 기다리고 있음.

넙치 2012-09-14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맥거핀님! 글 좋네요^^

맥거핀 2012-09-15 13:1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넙치님 피에타 글도 잘 읽었습니다.^^

카스피 2012-09-14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넘 멋진 영화 리뷰시네요^^

맥거핀 2012-09-15 13:18   좋아요 0 | URL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용.^^

프레이야 2012-09-15 0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리뷰, 역시 맥거핀님^^ 다시 많은 걸 생각나게하네요.

맥거핀 2012-09-15 13:19   좋아요 0 | URL
요새 많은 영화가 그렇지만,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것은 틀림이 없는 영화인듯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꽃도둑 2012-09-15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그닥 좋아하지도 많이 보지도 않지만 피에타 예고편 보고는 막 설레었어요.꼭 봐야지 하고 있었는데 맥거핀님의 리뷰라니...너무 근사해요,,^^

맥거핀 2012-09-17 23:40   좋아요 0 | URL
아직 안 보셨으면 챙겨보세요. 김기덕 영화를 좋아했던 관객이라도, 그리고 싫어했던 관객이라도 충분히 볼만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2012-09-16 0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나 잘 쓰셨다는..ㅋ 한 번 보고 이런 글이 써져요?! 여튼 영화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맥거핀 2012-09-17 23:43   좋아요 0 | URL
좋게 읽으셨다면 저야 기쁘구요. 좋은 영화는 늘 많은 이야기거리를 만들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Shining 2012-09-16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금 인터넷 기사를 읽었는데, 피에타가 현재 관객수 30만명을 넘긴 것도, 손익분기점이 25만명이라는 것도 놀랍군요.

저도 마지막 말씀에 공감합니다. 급작스러운 변화가 의아했고 봉준호/박찬욱의 느낌이 들었어요. 딱 꼬집어 어디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옅은 기시감이... 단테의 <신곡>에 비유하는 부분이 정말 흥미롭군요.

...못됐어요, 이렇게 글을 잘 쓰면 다른 사람은 어쩌라는 겁니까!!
제가 피에타 리뷰 안 쓰는 건 맥거핀님 때문이에요(저도 배웠어요, 떠넘기는 게 진리ㅋㅋ)_-

맥거핀 2012-09-17 23:51   좋아요 0 | URL
관객수 얼마나 예상하세요? 언론에서는 <나쁜 남자>의 기록을 깰 수도 있다고 하던데. 나쁜 남자가 70만인가..라고 그러던데요, 저는 개봉관 사정이 좀 받춰준다면, 그 이상도 갈 수 있으리라고 봐요. (근데 '광해'가 개봉을 앞당기면서... 좀 양아치 짓을 하긴 했더군요. 솔직히 말해서 저도 보고 오긴 했습니다만, 영화 자체로서는 그렇게 나쁘지는 않아서 꽤 관객이 들겠다 싶기는 하더군요.)

근데 아무튼 김기덕은 봉준호나 박찬욱이 될 수는 없어요. 김기덕을 폄하해서 하는 발언도 아니고, 봉준호나 박찬욱을 낮게 보는 것도 아니구요. 김기덕은 봉준호나 박찬욱이 가질 수 없는 장점들이 있어요. 그걸 더 극대화시켰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근데 이미 좋은 리뷰를 쓰셨던데요.^^

Shining 2012-09-18 12:15   좋아요 0 | URL
전 이 영화의 손익분기점이 25만명이라는데 사실 좀 놀랐거든요; 근데 보니까 제작비는 1억 5천, 7억 여원이 마케팅비라고 하네요(역시나). 지금 분위기 타서.. 잘만 하면 70만명은 넘을것 같군요, 다만 일시적 관심일 가능성이 높아서 슬리퍼 무비가 되기엔 약간 무리가 있을 것 같아요..

광해 보셨군요. 이병헌도 광해군도 팩션도 관심이 없는데 이상하게 이 영화는 보고 싶더군요. 이야기는 뻔한데 독특한 아우라 같은게 있더군요.

그럼요, 김기덕이 봉준호나 박찬욱이 되서는 안 되죠. 저도 폄하의 의사는 없구요ㅎㅎ 반대로 봉준호나 박찬욱이 김기덕이 되는 것도 반대입니다.

하하하하. 무슨 말씀을. 맥거핀님 덕분에 알라딘에 더 이상 피에타 리뷰가 안 올라오는 거 아시죠?(근거없이 음해하는 중....)

덧) 그런데 <나쁜 남자> 관객수가 70만이에요? 이것도 쇼킹한데요_-

맥거핀 2012-09-19 00:57   좋아요 0 | URL
음..근데 사실 지금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니 광해 외에는 그리 막강하다고 할만한 영화가 없어서 피에타로서는 나쁘지 않은 분위기 같습니다. 저도 아무튼 피에타에 관객이 꽤 들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김기덕 감독이 의욕이 생겨서 계속 영화를 찍을 것 같으니..

광해는 뭐 볼만해요. 괜찮아요. 아무튼 이병헌 씨가 연기를 잘해요.

허허허. 서평단 책 리뷰도 써야하고, CINDI 기록 2도 써야하고, 몇 개 글감도 있는데, 다 귀찮아서 이러고 있네요. 그러니 음해 마세요. 허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