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시대 - Show me the mo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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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특이한 영화를 보았다. 10명의 감독들이 10개의 이야기를 하는, 10개의 단편을 묶은 옴니버스 영화 <황금시대>. 그리고 그 10명의 감독들에는 꽤나 만만치 않은 이름들이 포진하고 있다. <후회하지 않아>로 독립영화계의 스타로 떠오른 이송희일 감독, <은하해방전선>으로 귀엽고 유쾌한 상상력을 보여줬던 윤성호 감독, <내 청춘에게 고함>으로 가난한 청춘의 감수성을 보여줬던(그러나 그 이후로 <보트>로 약간은 말아먹은) 김영남 감독,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로 꽤나 스트레이트한 묵직함을 보여준 양해훈 감독, 그리고 <여고괴담4>의 최익환 감독, <거울속으로>의 김성호 감독, <새드 무비>의 권종관 감독 등등..지난 몇 년간 큰 대박은 터뜨리지 못하였으나, 어느 정도 나름의 독특한 색깔을 보여준 감독들 10명이 각각 10여분 내외의 단편들을 선보이고 있다. 그래서 그런가. 이 영화 <황금시대>의 가장 큰 장점은 10개의 단편들이 어느 정도 고른 결과물들을 선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솔직히 말해서 매우 놀랍다 정도의 작품들은 없지만, 꽤나 인상깊은 결과물들을 보여주는 작품들은 여럿 있으며, 약간의 편차는 있지만, 그렇게 또 아주 떨어진다 싶은 작품들도 없다.

이 10개의 작품의 흐름을 관통하는 주제는 '돈'이다. 그러나 흐름을 관통한다고 해서, 이야기들이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일부러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10개의 이야기들은 상당히 다른 이야기의 흐름들을 보여준다. 그것은 일단 이 10개의 이야기들이 서로 다른 장르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서 비롯된다. 짧은 순간 집약되는 공포를 보여주는 김은경 감독의 <톱>이나 이야기의 흐름을 예측할 수 없게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는 사회성 짙은 드라마 <담뱃값>(남다정 감독), 음악을 이용해 감수성을 잘 이끌어내는 김성호 감독의 멜로 <페니러버>, 현재 사회 이슈들에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 누구라도 미친듯이 웃어제낄 수 있는 사회 패러디물 <신자유청년>(윤성호 감독), 묘한 분위기로 관객의 마음마저 불안하게 만드는 이송희일 감독의 <불안>...각 10개의 이야기들은 코믹반전, 생활스릴러, 공포특급, 슬로우액션 등 비슷한 소재를 다양한 이름으로 변주한다. 또 한편으로는 이러한 다양한 장르 속에서 각 감독들의 전작을 기억하고 있는 관객들이라면 색다르게 이 이야기들을 즐길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김성호 감독의 독특한 공포 스릴러 <거울 속으로>를 기억하고 있는 관객이라면 약간은 쓸쓸하게 느껴지는 감성 멜로 <페니러버>가 흥미로울 것이고, 양해훈 감독의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이상하고 의도적으로 어설픔을 강조하고있지만, 전작에서 보여줬던 독특한 직구를 이번작 <시트콤>에서도 살짝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돈이라는 소재를 내세웠다는 것은 연막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돈을 이야기하겠다는 것은 결국 우리 사회를 이야기하겠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사회 전반적인 것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라는 소재만큼 좋은 소재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돈 빠지고 이야기가 되는 것이 있던가.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 돈을 소재로 한 10편의 단편을 보는 것은, 젊은 영화인들이 현재 우리 사회를 바라보고 있는 프레임이 어떤 것인가를 바라보는 좋은 기회가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약간은 불행하게도, 이들이 보는 우리 사회는 뭔가 망가져가는 상당히 어둡고 불안한 사회다. 그 사회에서는 젊은 청년들이 자살하기 위해 유언을 작성하며(<유언>), 부부는 서로를 믿지 못하고 계속해서 싸우고(<불안>), 소녀는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서는 안될 일들을 저지르며(<동전 모으는 소년>), 노숙자는 지금도 어디선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구보다도 빨리 달린다. 그래서 아무도 그들에 주목하지 않고, 그들을 보지도 않는다(<가장 빨리 달리는 남자>).

그래서 어떤 이야기들은 명백하게 농담을 표방하고 있는데도, 별로 농담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야기도 있다. 예를 들어 <신자유청년> 같은 것들. 이 이야기는 임경업(임원희)이라는 청년이 50주 넘게 로또 1등에 당첨되어 벌어지는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정신이 없을 정도로 수없이 많은 패러디로 계속 농담을 던지는 영화이다. 이 짧은 이야기는 우리 사회의 모든 측면을 건드리고 있으며, 거의 모든 것들이 농담으로 희화화되고 있다. 그것은 소위 말하는 좌파나 우파를 가리지 않는다. 심지어는 진중권 씨도 진중권 씨 본인에 의해 희화화된다. 그쯤 되다 보니, 영화가 끝날 때 쯤에는 묘한 물음이 생긴다. 이게 농담일까. 어쩌면, 실제로 혹시 만약 그런 일이, 즉 누군가가 50주 넘게 로또 1등에 당첨되는 일이 벌어진다면, 실제로 이렇게 되지 않을까. 계속 웃게 만들긴 하지만, 이 웃음은 언젠가 영화 속 어떤 사건과 꽤나 비슷한 신문기사를 보고 웃었던 웃음과 비슷한 것 같은 기분이 떠오르는 것은 단지 기분 탓일까. 아..50주가 넘게 로또 1등에 당첨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구요? 무슨 소리. 이 사회가 항상 상상하던 것 이상을 보여주는 것을 몰라서 하는 소린가. 그래서 한편으로는 <시트콤>에서 끊임없이 깔리는 방청객들의 웃음소리가 참으로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이 시트콤은 전혀 웃기지 않기(혹은 웃을 수 없기) 때문이다. 웃기지 않는 코미디의 방청객의 녹음된 가짜 웃음소리만큼 기이하게 들리는 것이 있던가. 그리고 하나 더. 어떤 시트콤의 현실이 우리의 현실이 된다면, 우리는 웃을 수 있을까.

그래서 중간중간 꽤나 코믹적인 요소들이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어떤 씁쓰레한 뒷맛을 남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그렇게 힘들고 고달프고 버텨나가기 어려운 일만 있을까. 그렇지 만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렇다고 해도 인간은 버텨낼 수 있다. 김연수 작가가 말하지 않았던가. 인간은 백 팔십 번 웃은 뒤에 한 번 울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고 말이다. 그리고  아홉 개의 마음을 건드리는 이야기들이 지나간 후에야, 마지막 웃을 수 있는 하나의 이야기가 찾아온다. 김영남 감독의 <백개의 못, 사슴의 뿔>. 모질지 못한 공장노동자 미숙(조은지)과 빈틈이 많아 보이는 사장(오달수)과의 밀린 월급을 받기 위한 한판 대담은 유쾌한 속에서, 꽤나 명징한 해답을 남긴다. 결국 돈 밑에 사람 없고, 사람 위에 돈 없다는 것. 인간이 살기 위해서 돈이 만들어졌지, 돈이 살기 위해서 인간이 만들어진 건 아니라고 말이다. 이 명징하고도 당연한 대답을 하기 위해 영화는 꽤나 긴 시간을 달려온다. 달려온 긴 시간만큼 이 마지막은 꽤나 안도하게 만든다. 사슴의 뿔을 싣고 어디론가로 가는 할머니의 모습을 비추는 이 엔딩은 그래서 안도의 엔딩이다.

덧.

시사회에서 본 영화인데, 중간에 일어나는 관객이 조금 보였다. 아마 단편들의 옴니버스라는 이 영화의 성격을 잘 몰랐던 관객들이 아니었나 싶다. 단편들은 시간의 제약상 아무래도, 완결된 이야기나 잘 얼개가 짜인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아닐 때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한편으로 보면, 역으로 이 단편들의 재미가 그런데서 있는 것이 아닐까. 이야기의 얼개를 스스로 짜맞추고, 어떤 상상을 해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김은경 감독의 <톱> 같은 작품. 톱을 사간 그 여자는 그날 밤 어떤 일들을 겪었을까. 어쩌면 진짜 공포는 그가 꾼 악몽이 아니라, 그녀가 톱을 사가고, 그 후에 다시 찾아온 그 아침 사이에 그녀에게 일어난 어떤 일들이 아니었을지. 그 일들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단편도 단편 나름. 잘 짜인 얼개와 짧은 이야기에서 기막힌 반전을 보여주는 작품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좋은 작품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우리나라의 경우 반전 영화들에 지나치게 호의적인 평가들이 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 한편으로는 이 영화들의 배열을 좀 달리 해봤으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도 있다. 작품들의 수준은 고른 편이지만, 관객에게 친절하게 설명하는 영화도 있고, 한편으로는 조금 실험적으로 보이는 작품들도 있다. 일부러 그렇게 했는지도 모르지만, 초반과 마지막에 조금 친절한 작품, 중간에 조금 덜 친절한 작품들을 배열한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런 영화들을 번갈아 배치하는 것도 괜찮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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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9-09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금요일쯤 볼 예정인데.. 시사회에서 보셨군요.^^
덧말까지 잘 읽었습니다.

맥거핀 2009-09-11 02:19   좋아요 0 | URL
네..저는 시사회에서 봤지만,
영화관에서 봐도, 그리 돈이 아깝지 않은(?) 영화라고 생각됩니다.
무엇보다도 10개의 단편의 수준이 상당히 고르거든요.
10개의 다양한 영화를 보는 재미를 누릴 수 있지요.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늘 감사드립니다.^^
 
로프트 - Lo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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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용에 대한 상당한 미리니름이 있습니다.)



영화가 이대로 끝나는 건가 싶었다. 레이코(나카타니 미키)와 고고학자 요시오카(토요카와 에츠시)가 소녀의 시체가 물 속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기뻐하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할 때, 뭔가 밋밋한, 약간 기이해 보이기는 하지만, 실망스러운 마무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서 갑자기 기계가 둔중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소녀의 참혹한 시체는 물에서 끌어올려지고, 요시오카 교수는 반대로 물에 빠진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장면이라고 생각할 틈도 없이, 강한 시각적 충격이 생각을 정지시킨다. 그랬다. 이건,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였다.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사랑을 확인하며 끝나는 마무리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 반복을 통한 영원한 순환. 이 속에서 빠져나갈 구멍이 없이 마무리 되는 것이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영화다. 관객을 절망을 통한 공포에 빠뜨리는 것이 그의 영화다. 아마, 이 마무리 장면이 없었다면, 뭔가를 쓸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마무리 장면은 그 전의 장면을 생각하게 만든다. 편집장 기지마가 레이코를 습격해, 이상한 형태의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 나무를 통해 양쪽에서 목을 매는 기이한 형태. 반대쪽에서 아래로 내려감으로써 끌어올려지는(즉, 목이 매달리는) 구조. 이것은 이 마지막 장면과 상당히 유사하다(그리고 이 마지막 장면은 한편으로는 요시오카와 레이코가 땅을 파고 갑자기 사랑에 빠지는 그 전의 장면의 반복이기도 하다). 죽은 소녀가 끌어올려짐으로써 요시오카는 물에 빠진다. 한 쪽이 끌어올려지면, 다른 쪽은 반대로 하강한다. 이 끌어올려진다는 것, 끌어올려짐의 형태는 어떻게 보면 영화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된다. 일단, 미이라를 진흙 속에서 끌어올린 요시오카의 발굴 행위부터가 그렇다. 천 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진흙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미이라를 끌어올린 요시오카의 행위. 그리고 사실 이마저도 반복이다. 사실 이 미이라의 발굴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던 것. 1920년대 처음의 발굴이 있었다. 그러나 처음 발굴한 사람들은 어떤 이유에선가 이 미이라를 다시 진흙 속에 가라앉혔다. 그리고 이 미이라를 감시하는 기묘한 기록필름을 남겼다. 즉 이 미이라의 발굴 역시도 일종의 반복인 것, 그러니까 이 영화에는 기록된, 혹은 기록되지 않은 총 4번의 끌어올려짐이 나오는 셈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것이 다가 아닐는지도 모른다. 진흙을 토하는 레이코의 모습. 그런 것마저도 왠지 일종의 '끌어올림'을 연상시킨다. 뱃 속에 가득찬 진흙들이 식도를 타고 끌어올려진다...아니, 이것은 끌어올려짐을 너무 강박적으로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영화의 제목부터가 뭔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로프트(loft). 사전을 찾아보면, 다락방, 창고 같은 의미이다. 영화 팜플렛에 소개된 대로, 이는 레이코가 요양을 하기 위해 간 시골의 창고와 같은 집을 말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 '로프트'라는 말은 '리프트(lift)'를 연상시킨다. 끌어올린다는 의미의 리프트. 이 '로프트'라는 말이 '다락' 혹은 '집의 가장 높은 층'을 의미함도 생각해 볼 때, 어원학적으로도 '리프트'와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이 영화의 제목은 로프트 혹은 리프트다. 이 반복되는 끌어올려지는 행위.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가 늘상 그랬듯이 명확하게 제시되는 것은 없다. 단지, 어떤 불확실한 추측만 가능할 뿐이지만, 이는 왠지 어떤 욕구(욕망)와 관계되어 있는 것인 듯 싶다. 일단 욕구라는 것 자체가 가진, 끌어올려지는 어떤 속성. 우리는 흔히 욕구를 발산한다, 혹은 분출한다고 이야기한다. 발산한다, 분출한다는 것은 밑바닥에서 위로 끌어올려진다는 것이다. 내 속의 아주 깊은 진흙과도 같은 늪에 가라앉아 있던 욕망들을 끌어올린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의 거의 모든 인물들의 행위는 어떤 욕구(욕망)와 관련되어 있으며, 그로 인해 인물들은 파멸의 길에 다다른다. 1000년 전에 아름다움을 유지하고자는 하는 욕구로 진흙을 먹었던 어떤 여인은 영원히 죽지 못하는 미이라가 되었다. 그리고 편집장 기지마는 소녀를 범하려는 욕구를 채우려다 소녀를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요시오카는 천년된 미이라를 자신의 학문적(그리고 학문을 통한 입신양명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기어이 늪에서 다시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 역시 소녀에 대해 어떤 욕구를 품고 있다가, 소녀의 죽음에 책임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둘 다 파멸에 이르렀다. 그리고 레이코는...레이코의 파멸은 어떤 의미에서는 예정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소녀의 글을 자신의 이름으로 멋대로 출판했다. 그녀가 그 소설 원고를 봉투에 집어넣는 그 장면은 왠지 그녀의 어떤 파멸을 예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요시오카가 물에 빠지고 사라진 후, 남아있는 그녀의 모습은 멀지 않은 그녀의 파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에서 빠져나갈 공간이란 없다. 그녀는 또 어딘가에 가라앉을 것이고, 그 순간 또 누군가가 끌어올려질 것이다. 그리고 이 순환은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

어느 것이 끌어올려지고, 그의 반대편에서 또 어느 것이 가라앉는 것, 그 순환성과 영원한 반복, 그것에서 비롯되는 빠져나올 수 없는 공포로 이 영화를 잠깐 생각해 봤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지나치게 도식적인 해석일는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사실 상당히 모호한 얼개로 구성되어 있는 영화이다. 물론 이야기의 얼개를 전혀 짜맞출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상당수의 장면들이 현실과 꿈, 혹은 상상의 경계 속에서 희미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영화의 여러 등장인물들은 상당히 자주 잠에 빠져든다. 그리고 잠시 후에 깨어나서 어떤 것을 바라본다. 이것은 꿈인가, 현실인가, 혹은 빙의된 상태인가. 예를 들어 요시오카가 기계를 돌리며 무언가를 물 속에 가라앉히고 있고, 뒤에서 레이코는 그만두라며 비명을 지르고 있는 몽환적인 장면. 그 후에 바로 레이코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깨어나는 장면이 이어지는 이 장면을, 통상적인 영화 문법에 의해 관객들은 이를 꿈으로써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과연 이 장면은 꿈일까. 레이코는 실제로 이 장면을 본 것이 아니었을까. 혹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레이코는 혹시 누군가가(미이라가, 혹은 소녀가) 빙의되어 있는 상태가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이미 레이코도 죽은 상태가 아닐까. 진흙을 토한다는 장면도 그렇게 보면 심상치 않다. 이미 레이코는 죽어서 몸 속에 진흙이 채워져 있는 상태가 아닐까...아무래도 여기서 상상의 나래를 그만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이렇듯 꿈과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하다. 그리고 그 경계선 속에서 보는 우리는 빠져나갈 수 없는 공포를 느낀다. 악몽의 가장 희망적인 요소는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것, 언젠가 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깨어난 후에도 여전히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상태가 지속된다면, 여전히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면, 그만한 공포도 없을 것이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어떤 인터뷰에서 이 영화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희망과 절망의 경계선을 담아내기를 노린다." 그가 이 영화에서 그런 경계선을 그려내기 위해 활용한 방식은 독특한 카메라의 시점이다. 등장인물을 상당히 이상한 각도에서 바라보는 장면들은, 마치 어떤 유령의 시점을 연상시킨다. 즉 등장인물들이 공포에 떠는 것을 바라보는 다른 각도, 그 곳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 장면 어딘가에 있는 유령, 혹은 환영 밖에는 없다. 그 유령이 등장인물을 바라보는 순간, 그 바라보는 세계는 도리어 상당히 비현실적으로 음침하게 보인다. 마치 도리어 그 곳이 비현실이라는 것처럼. 그 경계선에 카메라는 서 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영화 속에는 있다. 요시오카와 레이코가 건물에 난 창을 가운데에 두고 서로를 지켜보는 장면(포스터에 있는 장면). 레이코가 창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고 바라보는 건물 안은,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비현실적인 공간이지만, 요시오카가 바라보는 관점에서는 밖에서 바라보는 레이코의 모습이 도리어 비현실적으로 이상하게 보인다. 그 경계선에 화면은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도 거기에 같이 위치하여 그 절망을 바라본다. 창 이쪽인가, 바깥인가. 어디로 나가도 당신은 피할 곳이 없다. 경계선 이쪽이나 바깥쪽이나 다를 것은 없다.

공포감은 거기에서 밀려온다. 그리고 거기에 이 영화의 소리를 활용하는 방식 또한 한 몫을 한다. 음악의 사용을 배제하고, 사물들이 발생하는 소리, 주위의 환경에서 들리는 소리들을 증폭시켜서, 공포감을 창출하는 방식은 영화 <불신지옥>과 조금 비슷해 보인다. 그리고 때로 이 소리들은 완전히 사라지고, 고요한 속에 그녀가 서 있다. 나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들을 볼 때마다 악몽을 꾼다. 아마 오늘 밤에도 악몽을 꿀지도 모르겠다. 꾸는 것은 무섭지 않다. 문제는 깨어난 다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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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9-05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쪽 저쪽 어느 쪽으로 발을 내딛어도 마찬가지라는 절박감,
그것이 공포감의 실체군요. 공포영화는 공간설정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구로사와 기요시는 여기서 로프트, 제목자체를 그렇게 둔 것 같네요.
볼까말까 너무 공포스러울까싶어 그러고 있는데 맥거핀님 리뷰 보니
보는 쪽으로 마음이 갑니다. 그나저나 악몽을 꾸셨는지요?
깨고나면 다 꿈인 것을요.. 그래도 그 경계의 모호성이 두려워요.

맥거핀 2009-09-06 22:44   좋아요 0 | URL
네..^^ 악몽 비슷한 꿈을 꾸기는 했습니다만, 뭐 그렇게 무서운 꿈은 아니었습니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공포물은 반응이 극단적으로 약간 갈리는 것 같아요.
전혀 무섭지 않다는 쪽과 어느 공포물보다도 무섭다는 쪽.
저는 아마도 후자쪽에 들어간다고 봐야하겠지요.
구로사와 기요시의 공포물은 볼 때는 그렇게 무섭다는 생각을 잘 못하는데,
이상하게 계속 어떤 이미지들을 떠올리며, 잠시 섬뜩해지곤 합니다.
 
로프트 - Lo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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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는 그것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없는 것을 알았을 때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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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지옥 - Posses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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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지옥이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있다면, 맹신지옥은 그 훨씬 가까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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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지옥 - Posses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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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한 과한 미리니름 있습니다.)



<불신지옥>이 꽤나 무서운 공포영화임을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음산한 스코어나 과도한 효과음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효과음들을 적절히 사용하여 공포를 창출하는 것이나, 공간이나 사물을 잘 활용하여- 예를 들어, 아파트 지하실 씬 같은 것 - 말 그대로, '일상의 공포'를 만들어내는 것도 다른 여러 좋은 리뷰들에서 잘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더이상 언급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또 영화의 여러 설명되지 않는 점들을 다시 잘 풀어서 설명하는 것도 나의 몫은 아닌 것 같다. 여러 리뷰들에 보면 재미있고, 기발한 설명들이 많은데, 그보다 더 재미있는 설명을 할 자신도 없다. 다만, 몇 가지를 이 영화는 생각나게 하는 점이 있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소진의 엄마(김보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씬이 있다. 교회에서 돌아온 엄마가 아파트 현관 문을 열려고 하는 장면. 주잠금장치와 몇 개의 보조잠금장치가 달려있는 현관. 엄마는 그 몇 개의 자물쇠에 열쇠를 꽂고, 돌리고, 문을 열려고 하나, 문은 열리지 않고, 도리어 잠긴다. 그리고 다시 몇 개의 자물쇠를 열었다가, 문을 당겼다가, 그래도 문은 열리지 않고, 가지고 온 물건을 떨어뜨리며 잠시 패닉에 빠질 즈음, 스르르 열리는 현관. 어떤 다른 리뷰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 장면은 '그들'이 문을 제대로 잠그지 않고 급하게 나가야만 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장면은 왠지 의미심장하게 읽히기도 한다. 하나는, 이 영화에서 줄곧 이야기하고 있는 믿음의 문제. 문이 열릴 것이다라는 굳건한 믿음으로 행한 행동이 사실은 반대로 잠그는 것이었다는 작은 아이러니, 그리고 그에 이어지는 엄마의 작은 패닉은 왠지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전주로서 읽힌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사실 그 몇 개의 잠금장치들이 더 흥미롭게 보이기도 한다. 그 여러개의 잠금장치들은 어떤 두려움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현관의 팻말 이면의 감추어진 많은 자물쇠들. 종교라는 굳건한 믿음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엄마, 그녀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그러나 아마도 이는 엄마만의 문제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서 스치고 지나가는 장면들을 보면, 그 아파트의 다른 집들도 거의 비슷한 여러개의 잠금장치들을 달고 있으며, 대부분 감옥을 연상시키는 방범창들을 설치해놓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러고보면, 영화의 시작 부분이 생각이 난다. 영화의 전체 줄거리와 크게 상관은 없는 부분이지만, 영화는 언니 희진(남상미)의 고단한 삶으로부터 시작을 한다. 학교를 다니고, 기침으로 콜록거리면서도 알바를 꾸준히 해야하는, 작은 자취방에 돌아와서는 침대에 쓰러져 죽은 듯이 잘 수밖에 없는 고단한 삶. 그런 희진이 동생 소진이 사라졌다는 전화를 받고, 고속버스에 지친 몸을 싣고 어느 지방 중소도시로 내려와 거대하고, 허름하면서도, 음산한 아파트 앞에 설 때, 어떤 느껴지는 공포감. 아마도 이 공포감은 그녀의 팍팍한 삶에서 전해지는 지독한 공포감일 것이다. 특별히 어떤 요행이 있지 않고서는 앞으로 그저그런 '88만원 세대'로 살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이는, 그녀의 지친 삶과 그녀가 한 때 몸담았던 낡은 서민 아파트와의 조합에서 불러일으켜지는 어떤 연민 같은 것들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을 무너지는 중산층의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있을 때만 해도, 적어도 중산층 이상의 삶은 유지했던 것으로 보이는 그녀의 삶이,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추락하고 있는 것, 이를 영화는 희진의 삶에 대한 몇 개의 컷과 아파트와 집안의 가재도구로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집안의 빨간 전자렌지가 인상적이었다. 그 빨간 전자렌지는 적어도 15년은 된 저가제품. 왜 아냐면 우리집도 아직 그 전자렌지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무너진 중산층들은 두렵다. 무엇이? 삶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말이다. 이 무서운 세상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 말이다. 이러한 두려움은 인간의 영혼을 잠식한다. 그래서 인간들은 그 속에서 조금씩 변해간다. 조금씩 변해가고 망가진,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삶들 말이다. 어쩌면 그런 것들을 소진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자들에게서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소진이 신들렸다고 말하는 무당(문희경)과 자신의 병이 낫기 위해 소진에게 부적을 쓰라고 강요하는 여자(장영남)와 주저하면서도 결국 그들에게 동조하는 젊은 여자(오지은)와 과거 참전용사로, 경비복인지 군복인지 모를 옷을 입고 다니는 경비원(이창직). 좀 도식적이긴 하지만, 왠지 이들은 각각 어떠한 것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뭔가가 무너져 내리는 시대, 그 시대의 무섭고도 기이한 자화상들 말이다. 이상한 사이비 세력('무속' 자체가 사이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 속 무당이 그렇다는 말이다)과 점점 이기적이 되어가는 30대와 방관적이고 무책임한 20대와 그들을 내리누르는 권위와 권력과 폭력의 망령들의 상징이라고 이들을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삶의 고통을, 그 고통에서 비롯된 두려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무엇인가를 믿는다. 그러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믿음은, 믿는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그 믿음의 대상인 그 무엇(종교이든 무속 신앙이든)도 망쳐 버린다. 일례로,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사람들이 고통 받았던 시기인 중세시대, 그 중세시대는 한편으로는 강한 믿음만이 존재하던 시기이기도 했고, 지나친 믿음은 종교의 타락을 낳았으며, 루터의 종교개혁을 불러 일으켰다. 명백하게도, 이를 가장 잘 반영하는 캐릭터는 소진의 엄마이다. 그녀의 지나친 맹신은 남편과 아이의 사고, 그리고 그 이후 남편의 죽음과 아이의 후유증이라는 삶의 고통과 큰 관계가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며, 그녀 또한 소진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자들 중에 한 명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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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이의 극복을 위해, 즉 무너져가는 중산층이 탐욕이나 방관이나 혹은 맹신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기 위해 회복해야 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어떤 가족주의, 그 수많은 가족의 힘으로부터 비롯된 어떤 공동체의 힘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떨어지는 희진을 필사적으로 껴안았던 엄마의 팔, 아버지를 잃은 소진, 그리고 아버지가 있지만 늘상 바쁘기만한, 병상에 누운 아이의 말들을 통해서 말이다. "아빠..아빠 언제 데릴러와?"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영화 속 학의 존재를 통해서도 그렇다. 물론 일반적으로 보았을 때 학을 소진의 영혼과 관계가 있는 어떤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옳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학은 옛부터 어떤 전통적인 공동체의 가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말해지기도 했다. 물론 이 영화의 마무리에서 이러한 것을 이끌어내는 것은 지나친 억측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마무리는 여전히 모호하며, 이는 한편으로는 영화가 마지막에 갈수록 힘이 떨어지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 보았을 때 이러한 가족주의, 공동체의 회복이 이 영화가 지향하는 바라고 했을 때, 그것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하는 또다른 물음이 생겨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질문을 다른 말로 바꾸면 이것이다. 이제는 제2의 소진이라고 할 수 있는 형사의 딸을 (소진처럼) 잃지 않으려면 진정으로 해야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가족주의와 공동체의 회복으로 가능할까.

맹신(盲信)의 반대말은 불신(不信)이 아니다. 영화 속 가장 믿지 않는 캐릭터인, 종교이든 무속이든 코웃음을 쳤던, 엄마에 의해서 사탄이라고 불렸던 형사 역시 이 영화에서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직접적인 책임은 아니지만, 소진의 죽음에 이 형사 역시 완전히 책임이 없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사건 초기에만 해도 형사 역시 단순가출에 불과하다며, 시큰둥한 반응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이 영화의 제목이 <맹신지옥>이 아니라, <불신지옥>임을 기억해야 한다. 너무 믿거나, 아예 믿지 않거나(종교이든 무속이든 다른 어떤 것이든 간에) 모두 어떤 위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말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어찌되었던 이 고통의 시기에, 야만의 시기에 우리는 무엇을 믿으면서(하다못해 '자신'이라도 믿으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나는 그 해답의 실마리를 얼마 전에 보았던 영화 <다우트>에서 찾고 싶다. 올해의 명장면 중에 하나로 꼽고 싶은 알로이시스 수녀(메릴 스트립)의 마지막 그 장면을 보면서 말이다. 나무 밑 벤치에 앉아서 "의심이 들어요."라며 울음을 터뜨리던 그 마지막 장면. <씨네 21>의 정한석 기자는 그것을 '회의(懷疑)'라고 불렀다. 아마도 맹신의 반대말은 회의에 가까울 것이다.



p.s. <불신지옥>...재미있는 제목이지만, 이 제목만 아니었어도 최소 오십만은 더 들었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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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8-24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오히려 내용을 깎았군요.^^
맹신의 반대말은 회의.. 맞는 말입니다.

맥거핀 2009-08-25 02:14   좋아요 0 | URL
네..아무래도 '불신지옥'하면 사람들이 기독교를 바로 연상하니까요.
기독교도도, 기독교도가 아닌 사람도 약간은 불편할 수 있는 제목이지요.
영화를 보니 도리어 감독은 기독교(더 나아가 종교라는 것)에 대한 논쟁을
되도록 피하고 싶어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