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 가정용 곤충에 관한 은밀한 에세이 1881 함께 읽는 교양 9
조슈아 아바바넬.제프 스위머 지음, 유자화 옮김 / 함께읽는책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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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키에르케고르가 알면 썩 좋아하지 않을 제목을 가지고 있는 이 책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는 그 제목이 의미하는 바대로, 지금도 당신의 아주 가까이에서, 혹은 당신의 살 속에서 멋진 성찬을 즐기고 있을 가정용 곤충들을 설명하고 있다. 빈대, 이, 진드기, 파리, 개미, 바퀴벌레, 흡혈진드기 등등의 이 가정용 곤충들은 인간의 거의 모든 부분을 공격하고, 나무를 뜯어먹고, 애완동물의 피를 빨아 마시고, 수많은 2세들을 낳고, 서로서로를 잡아먹기도 하고, 이곳저곳 쉴새없이 뛰어다니면서 소동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우리네 인간들은 사실 그것을 거의 감지하지 못한다. 우리들은 눈에 보일 때마다 그들을 때려잡고, 가끔은 보이지도 않지만 후려치기도 하고, 이상한 가려움증을 느끼면서 손톱 끝으로 긁어내기도 하고, 더이상 못견디면 때로는 '벌레와의 전쟁'을 선포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극히 일부분에 대항하는 것일 뿐이다. 예를 들어 이 책에도 그런 내용이 나오지만, 우리가 어떤 벌레 한 마리를 우연치 않게 발견한다면, 우리가 보지 못하는 그 근처에는 그 개체가 분명히 한국시리즈 7차전을 관람하는 인파만큼 북적거리고 있으리라고 장담해도 좋다.

사실 이 책의 제목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보다 그 부제 '가정용 곤충에 관한 은밀한 에세이'는 이 책의 보다 많은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벌레들은 가정용 곤충(Household Bugs)들이다. 그리고 그 '가정용'이라는 말이 함의하는 것처럼 이 책은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 인간의 관점에서 쓰여진 책이다. 사실 이 가정용이라는 말이 어떻게 보면 참 웃긴 것이, 어떠한 '가정용 동물(가축)'도 우리에게 그렇게 불러줄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들은 그저 우리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그들에게 '가정용'이라는 명찰을 붙이고, 우리 곁에 놓아두고, 우리 멋대로 인간과 가장 친한(!) 동물의 지위를 그들에게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재미있는 점은 이 '가정용'이라는 말이 '곤충'이라는 말 앞에 붙을 때에, 그 관계는 역전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동물의 경우와는 달리, 우리들은 이번에는 그들이 최대한 우리들에게서 멀어지기를 바란다. 바퀴벌레 구이나 불개미 만두를 좋아하는 몇몇 사람을 빼놓고는, 우리 모두는 그들이 우리 눈에 최대한 띄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곤충들이 철저하게 그들의 필요에 의해서 우리 인간들의 곁에 달라붙어 있다. 그러므로 '가정용 곤충'이라는 말은 사실 어쩌면 다음과 같이, 즉 우리 인간들이 사실은 이 곤충들의 '가정용 숙주'라는 것으로 바뀌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익살스러운 경고문구를 표지에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생물학 서가에 놓일 책이 아닙니다. 당신과 한집을 쓰는 '작은 가족'에 대한 은밀한 에세이입니다.' 위 경고문구가 말하는 바대로, 이 책은 생물학적 도감이라기 보다는, 위트를 담은 에세이에 가깝다. 예를 들어 각 곤충의 소개 말미에는 이 곤충들을 퇴치하기 위한 방법이 소개되고 있는데, 그 소개방법을 그대로 따라하다가는 당신은 아마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사실 그러나 이 책의 방법들을 탓할 것도 못되는 것이, 기생생물을 퇴치하는 가장 완벽한 방법은 그 숙주(바로 당신!)를 없애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이 책의 내용들을 과학적인 관점에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일종의 호러 영화(ex. 에일리언)를 보는 마음가짐으로 그저 나와는 먼 일이라고 상상하고 읽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에일리언이 당장 내일 지구를 습격할 것이 명백하다면 우리가 그 영화를 즐길 수 있겠는가. 그 영화를 즐길 수 있는 이유가 그것이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믿기 때문에 가능한 것처럼, 우리가 이러한 일이 지금 우리 곁에서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 이 책을 훨씬 즐겁게 즐기는 방법이다.

개인적으로는 책을 읽는 내내 TV에서 하는 <스펀지>를 보는 느낌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 프로그램을 썩 좋아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도대체 그 정보들이 우리에게 유용한 것인지 전혀 공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병 속에 있는 달걀을 뒤집는 방법을 알 수 있다고 해서, 우리 삶의 뭔가가 달라질까. 잘 모르겠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가정용 곤충들의 아주 세부적인 생김새와 그들이 어떤 먹이를 좋아하는지 안다고 해서 우리가 이 곤충들과의 동거를 더 잘해낼 수 있을까. 역시나 잘 모르겠다. 어차피 그들과 같이 살아가야만 한다면, 어쩌면 모르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덧.

이건 조금 다른 얘긴데, 요새 프로야구 스카우팅 책자를 열심히 보고 있다. 게임을 자주 볼 수 없으니, 그 대안으로 그렇다면 책이라도 사서 보자,는 생각이 들어서 보고 있는데, 꽤나 재미있다. 그래서 그런 건지 몰라도 이 책을 읽으면서 왠지 이 책은 가정용 곤충들의 스카우팅 리포트같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특성, 습관, 그리고 상세한 사진, 그리고 (프로야구 스카우팅 리포트와 같이) 특정의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고 일종의 백과사전적이라는 점에서. 그래서 그저 재미로 적어보는 이 책에 나온 가정용 곤충들의 스카우팅 리포트. 인간이라는 투수를 상대로 한 타자 편이다. 컨택(어떤 범위에 나타나는가), 장타력(얼마나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는가), 타석에서의 끈질김(얼마나 퇴치하기 어려운가)라는 관점에서.

빈대: 전천후로 타구를 보낼 수 있는 스프레이 히터이다. 장타가 좋은 편은 아니나, 경기 후반 치명적인 뜬금포를 종종 터뜨린다. 타석에서 아주 끈질기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볼을 골라내어 1루로 출루할 수 있다. 발도 빠르니, 전형적인 1번타자 유형.

이: 투수가 비듬을 발라 던지는 스핏볼을 아주 좋아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타격이 좋은 편이라 보기 힘들고 장타력도 그다지 뛰어난 편은 아니다. 타석에서도 볼을 길게 보지 못하고 쉽게 휘두르는 스타일. 맞춰잡는 투구가 필요하다.

집먼지진드기: 이와 마찬가지로 비듬스핏볼을 아주 좋아한다. 장타력은 별로 없으나 타석에서 선구안이 아주 좋아, 낮은 타율에서도 높은 출루율을 자랑한다.

모낭진드기와 옴진드기: 무시무시한 생김새로 타석에서 투수에게 위압감을 주며, 넓은 컨택 범위와 한 시즌 20개 이상의 홈런을 칠 수 있는 장타력을 소유하고 있다. 전형적인 중거리 타자 유형.

서양좀벌레와 집게벌레: 언더핸드와 같은 특정 유형의 투수(책)에만 강점을 가지고 있다. 타석에서도 상당히 인내심을 가지고 있는 편이니 경기 후반 대타로 사용하면 좋다.

파리: 투수의 구질이 더러우면 더러울수록 좋은 타격을 자랑하는 특이한 유형의 타자이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플라이볼을 많이 양산하는 타자이며, 결승타를 유독 많이 쳐낸다. 실투는 아주 치명적일 수 있다.

개미: 투수의 공보다는 투구시의 습관이나 버릇 등을 관찰하고, 그것을 타격으로 연결해낸다. 컨택이 좋지는 않으나, 맞았다 하면 장타이다. 타석에서도 아주 끈질긴 편이며, 연습벌레, 일명 '기계'로 알려져 있다. 집안 대대로 야구를 해온 야구 가문.

바퀴벌레: 명예의 전당에 오를 수 있는 가정용 곤충계의 이대호(심지어 이대호와 체형도 비슷하다). 투수에게 아주 공포스러운 타자로 각인이 되어 있으며, 뛰어난 선구안을 자랑하며, 어떤 투수의 어떤 볼도 가리지 않는다. 컨택, 장타 모두 뛰어난 타자로 지난 수만년간 좋은 시즌을 이어오고 있으며, 이번 시즌도 당연히 기대된다.

흰개미: 서양좀벌레와 같이 특정 유형의 투수(나무)에만 강하다. 역시 특정 유형의 투수가 등판했을 때 기용할 수 있는 타자.

벼룩과 흡혈진드기: 넓은 컨택 범위를 가지고 있으며, 거의 모든 구질에 강점을 가지고 있다. 힘이 아주 좋아 단타보다는 주로 장타를 생산하는 유형. 벼룩의 경우 넓은 외야수비를 자랑하는데, 특기는 펜스 위로 점프하여 홈런 타구를 걷어내는 것. 일명 '홈런 도둑'.

의류해충과 부엌해충: 타격보다는 대주자, 대수비 요원으로서 강점을 가지고 있다. 단, 작전 수행 능력이 그다지 뛰어나다고 볼 수는 없는데, 감독의 지시를 거의 안듣고 스스로의 판단으로 게임에 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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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maker_1201 2011-04-21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덧'을 더 재미있게 봤습니다. 롯데 팬으로서, 현재 모든 가정용 곤충이 해충 이상의 실력발휘를 전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참 안타깝군요.ㅠㅠ

맥거핀 2011-04-22 00:55   좋아요 0 | URL
아..저는 요즘이 왠지 불안한 LG팬입니다.^^ 올해는 엘롯기 동반 포스트시즌 진출을 한번 해야할텐데요.ㅋ

네오 2011-05-04 0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스카우팅 리포트~ lg는 레벨 게이지 상승하려면 멀었다고 생각되는 엘지골수팬, 이럴때 떠오르는 문구 떨어질 팀은 떨어진다^^

맥거핀 2011-05-04 01:23   좋아요 0 | URL
아..LG팬이세요? 아 반갑반갑..흐흐 맞습니다. 잘놈잘이고, 내팀내죠. 그치만, 올해는 가을야구! 기대를 안하려 하는데, 기대가 되네요.
 
<대칭>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대칭 - 자연의 패턴 속으로 떠나는 여행 승산의 대칭 시리즈 4
마커스 드 사토이 지음, 안기연 옮김 / 승산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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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바흐 이전의 침묵>에는 바흐의 음악을 연주하는 (말그대로 사람없이 혼자 연주하는) 자동피아노가 나온다. 그 자동피아노는 긴 두루마리에 일련의 천공(穿孔)을 가진 악보로 연주되는데, 바흐의 음악도 음악이지만, 그 악보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였다. 흰종이에 구멍이 뚫려 있을 뿐인데, 그 구멍들의 놀라운 대칭적인 배열이란. 이 책 <대칭>을 보면서 그것이 우연이 아님을 알았다. 바흐의 음악에서 수학적인 대칭은 어떻게 활용되는가. 이 책 <대칭>은 그 대칭의 세계를 수학적인 이야기를 중심으로 차분히 들려준다.

우리가 수학을 어려워하는 이유는 수학의 세계는 일종의 단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집합과 명제로부터 시작하는 고등학교 수학 과정은 그렇게 짜여진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 수학에서는 전 단계를 모르고서는 다음의 단계로 넘어갈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인수분해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 다음의 이차방정식으로 나아갈 수 없다. 점핑은 거의 허용되지 않는다(아주 일부의 천재에게는 허용된다). 갑자기 책의 중간을 펴서 그것을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므로 수학의 세계에서는 당연히 낙오자들이 생긴다. 많은 학생들이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것을 알지만) 어느 순간 수학의 끈을 놓아버린다. 수학은 일종의 마라톤 랠리와 같다. 가장 기본적이고 정석적인 인내심을 요구한다. 수학은 지름길을 보여주지도 않고, 중간에 자동차를 타고 다음의 코스로 이동하는 것을 허락하지도 않는다. 마지막 완주의 환호를 느끼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뛰는 수밖에 없다.

이 책의 논의를 보면서도 그런 인상을 받았다. 처음 가장 기본적인 회전 대칭과 반사 대칭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알람브라 궁전의 17개의 서로 다른 대칭을 거쳐, 고차방정식의 해들과 그 속에 담겨진 대칭들, 거의 관계가 없어 보이는 대수들과 기하와의 환상적인 연결을 지나, 마침내 가장 근본적인 대칭의 언어인 군(group)으로 대칭을 말하고, 그 대칭의 지도에 셀 수도 없는 큰 대칭을 가진 몬스터 대칭을 그려넣기까지의 여정은 일종의 작은 마라톤 게임을 닮았다. 그러나 오해는 마시라. 이 마라톤은 별로 학생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수학 선생님의 인솔 하에 몇 명이 낙오되어도 상관없이, 그저 앞만 보고 나아가는 그런 서바이벌 마라톤 게임은 아니다. 저자 마커스 드 사토이는 때로 잠깐 앉아서 휴식을 할 것을 권하기도 하고, 뛰는 것에 집중하기 보다는, 주위의 풍경에 집중하게 하면서 독자들을 마지막 도착점까지 끝까지 데리고 간다. 아니, 아예 뛰고 싶지 않은 독자는 뛰지 않아도 된다. 중간중간 뛰어야만 하는 부분들을 건너 뛰고도, 즉 천천히 걸으면서 주위 풍경만 둘러보아도 볼 것은 아주 많다. 그 속에는 그간 힘든 여정에 기꺼이 뛰어들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 수학자들의 드라마가 있고, 수학적 논의보다 기차시간표에 열광하고, 술의 도수에서도 소수를 찾는 유머가 있고, 바흐의 음악이 있고, 에셔의 그림이 있다. 밑의 인용문이 암시하는 것처럼, 이 책에서 몇 가지 부분을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다른 부분이 뒤얽혀 있기 때문에, 이 책 전체의 재미를 무너뜨리지 못한다. 

   
  현재로서는 설사 그 논문에 어떤 오류나 결함이 남아 있더라도 그리 치명적이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 일반적이다. 스미스는 '증명의 신뢰성은, 증명의 많은 부분들이 극도로 병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나온다. 추리 소설 같은 것에서 논리적 결함이 나오면 작품의 전체 구조가 완전히 망가지는 일과는 다른 문제다.'라고 믿는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서, 이 증명은 수많은 실들로 뒤얽혀 있기 때문에 그중 하나를 뽑아낸다 해서 전체를 무너뜨리지 못한다. (p. 433)
 
   

 

인용한 문장에서 말하는 그 논문이란, '아틀라스'라고 불리는 대칭군들을 기록한 거대한 지도가 이제 완결된 것임을 말하는 논문을 말한다. 수학자들은 오랜 세월 동안 이 지도에 새로운 대칭군들을 추가하기 위하여 애썼다. 그리고 새로운 대칭군이 발견되면, 거기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고, 지도에 기록하였다. 그렇다. 이것은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다. 이는 마치 새로운 별을 발견하는 것과 닮았다. 사람들은 새로운 별을 발견하고는 거기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고, 거대한 별의 지도에 그것을 추가하였다. 별은 거기에 이미 있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대칭군도 거기에 이미 있었다. 수학자들이 새로운 아이디어와 지루한 계산들로 그것을 끄집어내기 전까지 그저 묻혀 있었을 따름이다. 그리고 수학자들은 그 지도에 이제 새롭게 더 추가할 대칭군이 없음을 밝히려 한다. 그러나 이 책 <대칭>의 마지막 한 장까지 이 논의는 완결되지 않는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언제 어디서 새로운 군이 추가될 가능성은 남아 있다. 더 추가될 수 없음을 증명한 논문에 오류가 들어있는지도 모른다. 가능성은 남아 있다. 어느 순간 우주의 반대편에서 외계인이 날아올 가능성이 남아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 이 책에 가장 인상을 받은 순간은, 대칭을 둘러싼 전체적인 논의보다도, 수학을 대하는 저자의 태도이다. 대칭군을 분류하는 것이 이제 거의 끝났음을, 그 분류의 지도(아틀라스)에 더 이상 기록할 것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서도, 일말의 가능성을 남겨놓는 앞의 태도도 그러하지만, 저자 마커스 드 사토이의 자신의 연구를 대하는 태도도 그렇다. 대칭의 한 부분을 파고드는 저자의 연구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난점이 있다. 저자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가지 노력을 하지만, 그는 그 난점을 인정하고, 그대로 그 연구를 발표하려 한다. 저자가 말했듯이 모든 수학자들은 자신이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놓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 영광은 아주 극소수의 수학자들에게만 주어진다. 이 책에서 보여지는 갈루아와 아벨 등의 많은 수학자들의 드라마에서 말해지듯이, 한 사람의 연구자는 자신의 연구가 일종의 완결을 이루기를 꿈꾸지만, 그것은 완결로 가는 하나의 여정일 뿐이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의 새로운 시작에 가깝다. 완벽함이란 불가능하다. 어떤 증명은, 그 증명 자체로는 완벽할 수 있어도, 수학이라는 거대한 지도의 아주 일부분일 뿐이다. 그 완벽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어떤 흥미로운 점이 있다. 이 책 <대칭>은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것들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곳에는 완벽하지 않은, 아니 결코 완벽해질 수 없는 것들이 숨어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를 조금 인용하자면, 페르시아의 직공은 완벽한 대칭 문양을 가진 직물을 만들면서도 한 부분을 무너뜨려 그것이 완벽해지지 않도록 했다. 일본의 건축가들은 대칭된 건물을 축조하면서도, 한 곳은 미완성의 상태로 남겨두었다. 완벽함으로 신의 노여움을 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완전한 대칭은 도리어 공포의 대상이 된다. 바이러스는 완전한 대칭의 모양을 가진다. 그것이 에너지를 최소화시켜 바이러스를 안정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부분을 읽으며, 영화 <올드보이>를 생각했다.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오대수가 갇혀 있던 방의 벽지에는 대칭적인 문양들이 수놓아져 있었고, 비밀이 밝혀지는 마법의 상자에도 대칭적인 문양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 인간은 완벽한 대칭을 꿈꾸지만, 완벽한 대칭은 도리어 사람을 불안하고, 무섭게 만든다. 대칭의 요소를 담으면서도, 일종의 창의적 변형을 남겨두었던 바흐의 음악은 아름답지만, 완벽한 대칭을 가진 쇤베르크의 무조음악은 듣기에 거북한 면이 있다. 그래서 영화 <블랙스완>에서 완벽한 공연을 만들기 위해 니나(나탈리 포트만)는 변형과 결여를 실행한다.

그래서 아마도, 완벽한 대칭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책 <대칭>은 완벽함을 끝내 이야기하지 않고, 일종의 미스테리를 남겨둔 채로 이야기를 끝맺음한 것은 아닐까. 이 책은 1장에서 12장이라는 12면체의 구조로 목차가 이루어져 있지만, 1월에서 12월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8월에서 시작하여, 다음해 7월에 끝난다. 그러므로 그것은 (한해로서) 완결되지 않고, 다음의 8월 이후의 이야기를 남겨놓고 있다. 물론 농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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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03-29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전 양해는 구했지만, 그래도 늦으니 양심에 찔리는군요.;; 그건 그렇고, 이 책을 읽고나서 에셔에 관심이 생겼는데, 혹시 [M.C.에셔, 무한의 공간]이라는 책, 저에게 넘기실 분 없나요? 출판사에까지 전화를 걸어보았는데, 완전히 절판이고, 더 책을 찍을 계획도 없다는 절망적인 답변이..

교고쿠도 2011-03-30 12:10   좋아요 0 | URL
<에셔, 무한의 공간> 저 작년에 어렵게 구했는데...이제는 출판사에도 없나봐요. 근데 영문판, 일본어판은 아직 구입할 수 있는거 같아요. ^^그리고 번역이 별로긴 하지만, 까치글방에서 나온 호프스태터의 <괴델, 에셔, 바흐> 역시 꽤 흥미롭습니다.
저도 아직 <대칭> 리뷰 못 썼는데, 악!! 대체 이런 무시무시한 수학책을 누가 선정한거임!!!괴로워하는 중입니다 ㅜ.ㅜ
확실히 맥거핀님의 리뷰는, 저의 저질 리뷰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흑. 역시 열심히 내공을 갈고닦아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cyrus 2011-03-30 13:44   좋아요 0 | URL
헉,, 저도 그 책 구하고 싶었는데,, 절판이군요,, ㅠ_ㅠ
교고쿠도님이 소개한 호프스태터의 책을 기회가 있으면 읽어봐야겠습니다,

맥거핀 2011-03-30 18:04   좋아요 0 | URL
교고쿠도님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어차피 그림 보는게 목적이었으니 일본어판이나 영문판이라도 구해봐야할까봐요. (그래도 일본어는 아예 독해를 못하니, 영문판이 낫겠네요.) 출판사에 전화를 해보았더니 이런 전화 너무 많이 받았다는 투로 능숙하게 절판임을 알려주셔서, 절망하던 참이었습니다.
에셔에 대한 검색어를 넣어보니, 그 책하고, 말씀하신 <괴델, 에셔, 바흐>가 나오더라구요. 이 책은 아무래도 그림보다는 분석이 위주가 된 것 같아서 좀 어려울 것 같지만, 도전해서 읽어보려고요.^^
교고쿠도님의 악!!소리를 들으니, 저 역시 이 선정에 일조(?)한 사람으로서,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네요. 뭐 그래도 잘 리뷰 쓰시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재미있지 않았나요..;;

교고쿠도 2011-03-30 18:57   좋아요 0 | URL
다시 검색해보니까...<에셔, 무한의 공간>의 영문판은 http://foreign.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0810924145 인 것 같고 일본어판은 <無限を求めて―エッシャ-、自作を語る> http://foreign.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4022596023 인듯해요.
맥거핀님이 대칭 선정하셨군요. herenow님과 더불어 과학화의 원흉(?)일지도...으핫

맥거핀 2011-03-30 23:07   좋아요 0 | URL
아니..이렇게 검색까지 해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제 검색능력보다 한수 위시네요..; 외국판은 또 어디서사나..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책선정에 따른 양심의 가책에 무게가 더해졌네요. 아무튼 정말 감사드립니다. 잘 찾아서 볼께요.^^

반딧불이 2011-03-30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혀 무관심 했던 대칭에 대한 책을 읽고나니까 도수 잘 맞는 안경을 낀 것처럼 보이는게 많아졌어요. 맥거핀님의 리뷰 읽으면 늘 재정리 하는 기분이 들어요. 고맙습니다.

맥거핀 2011-03-30 18:07   좋아요 0 | URL
네..저도 이 책을 읽고 난 후에 대칭에 대한 관심이 좀 생겨서 화장실의 타일문양도 괜히 유심히 들여다보고는 했습니다. 이거에는 몇 가지의 대칭이 있을까 하구요. 암튼 대칭이라는 것이 그렇게 여러 의미가 있는 줄 몰랐어요.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리뷰에 대해서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네오 2011-03-30 0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대칭이라~ 그런데 좋아하는 구절의 인용은 책 읽다가 밑줄치시나봐요? 항상 인용을 잘하시던데 문구도 멋있구요~ 참 잘뽑아내시는 것 같아요 <바흐이전의 침묵>, <올드보이>,<블랙스완>영화도 그렇구요~ 이런건 책을 읽어도 잘 생각하기 어려운 부분인데여~

아참~ 저 인문.사회 서평단의 뽑혔어여^^v(사실 긴가민가 했는데 절 선택하시더리구요ㅋ) 여기글 참조해서 글쓸려구요 ㅋㅋ(사실 여기글 많이 도움받았죠^^)

맥거핀 2011-03-30 18:13   좋아요 0 | URL
제가 책에 대해서는 약간의 결벽증(?)이 있어서, 줄 긋고, 접고 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편입니다. 인용문에 대해서는 사실 읽을 때에는 별 생각을 안하고, 다 읽은 후에 기억나는 문장이나, 괜찮았던 문장들을 한 두개 찾아보고는 합니다.(물론 그래서 어디서 봤는지 생각하느라 고생을 하지요.) 말씀하신 영화들은 최근에 본 영화라, 그저 한번 엮어본 것이구요. 뒤로 넘어지다가 쥐잡은 격이지요..
다만, 예를 들어 저번 도스토예프스끼 리뷰같은 경우에는 책을 읽다보니 좋은 문장이 워낙 많아서 인용을 많이 넣어야겠다라고 의식적으로 생각했고, 중간중간 읽으면서 괜찮은 문장의 쪽수를 휴대폰에 기록해뒀어요. 리뷰에 대한 강박이 있다보니 아무래도 그런 부분이 좀 있네요. 언젠가는 인용으로만 이루어진 리뷰를 써보는게 개인적인 소원입니다.^^;
아..그리고 이번 서평단에 뽑히셨군요. 축하드립니다!! 뭐 평소에도 워낙 글을 잘 쓰시니, 좋은 리뷰 잘 쓰실거예요. (저는 지금 하고 있지만) 서평단을 하신다니, 그래도 부럽네요~ 어떤 책을 추천하실지 기대해봅니다.

꽃도둑 2011-03-30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칭군으로 가기 위해서는 거쳐야 할 관문이 많네요...^^
맥거핀 님은 책에 대한 집중도가 높은 편인것 같아요. 한 권의 책을 제대로 읽어내려면 그래야겠지요. 자기화한 작업이(?) 느껴져요. 저는 이런 리뷰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 건지... 읽으면서도 기분 좋네요.

맥거핀 2011-03-30 18:17   좋아요 0 | URL
늘 과찬해주셔서, 그저 감사드린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네요.
더구나 항상 좋은 글 보여주시는 꽃도둑님의 칭찬이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근데, 솔직히 아직도 이 책의 많은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또 한고비(?)를 넘기니 만만치 않은 마지막 책들이 기다리고 있군요. 에고, 받기도 전에 걱정입니다.


cyrus 2011-03-30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제가 그 낙오자 중의 1人입니다 ^^;; 다시 수학 공부하라면 못할거 같아요ㅋㅋ
하지만 처음부터 차근차근히 이해하고 제대로 공부한다면,, 좋은 성적 나올거라고
스스로 자기위로해봅니다. ^^;;

맥거핀 2011-03-30 18:21   좋아요 0 | URL
저도 책 중간에 왜 그 행렬 나오잖아요. 근데, 도대체 이 행렬이 의미하는 바가 뭐더라..하고 한참 생각했어요. 그래도 간만에 책을 보면서 수학적 머리를 조금 썼더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옛날보다는 많이 맛이 갔지만, 아주 가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도 들구요.
사실 저 개인적으로는 고등학교 3년 동안에 배우는 수학의 범위랄까..그런 부분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그러니 공식같은 것에만 치우치다가 끝나는 경우도 있구요. 다른 분이 리뷰에서 이 책을 고등학생들에게 읽혀도 괜찮겠다고 썼던데, 제 생각도 이런 책을 읽히는 것도 괜찮을거라 생각이 듭니다. 적어도 정석책보다는 나은 것 같아요.
 
사진, 강을 기억하다
강제욱 외 사진, 이미지프레시안 기획 / 아카이브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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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장의 사진만 봐도, '아..이명박 XXX'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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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03-26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오해가 있을까봐..) 여기서의 XXX는 당연히(!) '대통령'입니다. 지도자의 호칭을 함부로 쓰지 않는 고래(古來)의 전통을 따랐을 뿐입니다.

네오 2011-03-29 21:45   좋아요 0 | URL
허걱 이런 깊은 뜻이~
주여~ 우리 위대하신 이명박 xxx 무슨행동을 하는지 (아호)예전에(譽前恚)이명박 xxx도 모릅니다^^

맥거핀 2011-03-30 01:19   좋아요 0 | URL
정말 우리 명박님은 XXX입니다. 본인 대에서 망가뜨리는 것은 그러려니 하는데, 앞으로 최소 몇 십년, 혹은 몇 백년은 영향을 줄 일들을 하고 있군요..참 맨날 잃어버린 10년을 말하는 한나라당인데, 우리는 앞으로 몇 년을 잃어버려야 할지..

네오 2011-03-30 08:22   좋아요 0 | URL
이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인디 타큐멘타리 페스티발에서 <꿈의 공장>을 봤어요~
콜텍노동자들의 투쟁도 자기대에서 끝나지 않을거란 불길한 운명을 예언하시더라구여~ 버티는자가 이겨내는자라고 하지만은 몇 백년까지 간다면 흠~
 
<도스또예프스키 평전>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도스또예프스끼 평전
에드워드 H. 카 지음, 김병익.권영빈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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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오만한 말이 용서될 수 있다면, 그의 평전을 읽고 도스또예프스끼에 드는 솔직한 감상은 '연민'이다. 물론 이 대작가의 삶에 내가 이러한 감상을 말한다는 것의 근저에 있는 여러가지를 모두 고려한다면, 이런 말은 웃기지도 않은 소리일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E. H. 카의 몇몇 문장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을 멈출 도리가 없다. "극단적인 쾌활함과 극단적인 침울, 익살맞은 허풍 그리고 견딜 수 없는 수치심과 자기 비하가 거듭되는 이러한 그의 정신적 증세는 외부 세계와의 관계에서도 나타났다. 바보스러운 행위를 범하고 있는 순간에도 그 행위의 근저를 눈치채고, 그 어리석은 행위와 거의 동시에 후회를 하게 되는, 그는 이런 불행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p.42)""도스또예프스끼의 비애는 자신이 자제할 수 없는 현상에 대해서 자세히 기술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마찬가지의 명석함을 가지고 그 원인도 분석할 수 있었다는 데 있다.(p.43)"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카의 <도스또예프스끼 평전>은 위의 문장들에서 보여지듯이, 일견 차가워보인다. 카는 도스또예프스끼와 시종일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그에 대해 공정한 기술을 하기 위해 애쓴다. 여러 자료들은 조심스럽게 취사선택되고, 몇몇 의심스러운 자료들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그에 대한 반박이나 해명을 시도한다. 또는 믿을 만하다고 생각되는 자료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을 인용하면서 신뢰를 보내기도 한다. 아마도 이는 이 책의 어떤 야심과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이 평전이 가지는 야심 또는 함의는 도스또예프스끼라는 한 개인의 삶을 세밀하게 추적하는 것을 넘는다. 저자의 도스또예프스끼에 대한 관심은 그의 삶이라기보다는, 그의 문학에 담긴 것들이다. 그리고 그것은 도스또예프스끼라는 한 개인의 문학 자체로 그치지 않는다. 카의 궁극적인 관심은 (영국인으로써)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이 대변하는 '러시아적인 것'을 밝혀내는 것이다. 즉 다른 말로 하자면 카는 러시아인들의 어떤 특질을 잘 나타내는 도스또예프스끼라는 한 개인의 삶과 그의 문학을 보여주는 것으로 러시아라는 세계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러므로 도스또예프스끼의 아주 지극히 개인적인 부분이나 그의 사상 못지않게, 그를 둘러싼 사람들과의 관계나 당시의 어떤 분위기를 때로 필요 이상으로 정밀하게 묘사하는 것, 그리고 그의 작품 하나하나를 면밀하게 살피는 것은 카에 있어서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즉 도스또예프스끼는 카에 있어서는 러시아 사회를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주는 작은 현미경이었고, 카는 그 현미경이 가지는 특징적인 왜곡에 휘둘리지 않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 평전의 약간은 독특한 구성을 살펴볼 수 있다. 이 책의 전체적인 제목들을 살펴보면 이 책이 가지는 어떤 특징적인 면을 볼 수 있다. 이 평전은 크게 네 개의 구분으로 도스또예프스끼의 삶을 나누고 있다. 성장기, 격동기, 창조기, 결실기. 제목들에 드러나듯이 이것은 그의 문학을 염두에 둔 구분이다. 즉 성장기, 격동기, 창조기, 결실기라는 이 제목들은 그의 삶의 성장이나 어떤 힘들었던 부분이나 좋았던 부분을 염두에 둔 구분이 아니라, 그의 문학이 성숙되는 시기, 흔들리는 시기, 꽃피우는 시기, 그리고 가장 문학적 최고의 정점에 오른 시기의 구분이다. 일례로 성장기와 격동기를 가르는 구분을 들 수 있다. 그의 삶으로 보면,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 <죽음의 집의 기록>을 집필하는 시기는 그의 삶의 격동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카의 문학을 중심에 둔 구분으로 보면, 이는 그의 문학의 기반을 성장시켜 준 성장기에 해당한다. 그의 문학적 격동기는 (카의 구분대로라면) 시베리아 유형이 끝나고 저널리즘에 몰두하며 상대적으로 좋은 작품을 써내지 못했던 <죄와 벌> 집필 이전까지를 의미한다. 즉 이 네 가지의 챕터는 그의 삶의 흐름보다는 그의 문학의 어떤 흐름을 생각하도록 한다. 그의 문학적 삶은 초기의 급격한 문학적 성장에 뒤이어, 일종의 침체기를 겪다가 폭발적인 창조의 시기로 접어들었고, 그것의 최정점에서 그는 급작스럽게 운명을 다하였다. 이런 문학 중심적인 평전의 구조를 반영하듯이, 평전의 구성으로는 특이하게도 이 <도스또예프스끼 평전>은 그의 대표작 <죄와 벌>, <백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등에 대해 각각 하나의 챕터를 할애하여 거의 평론에 가까운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그러나 이 평론은 한편으로는 너무 인물중심적인 비평으로 흐르고 있어, 온전한 비평으로 보기는 어렵다). 또한 그 외의 챕터들도 어떤 시간의 흐름으로 나누어져 있기 보다는 특징적인 키워드를 중심으로 나누어져 있다. 즉 각각의 챕터들은 시간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지만, 어떤 특정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뭉쳐져 있으며, 그 중심적인 이미지들은 읽는 사람들에게 그 시기에 대한 특징적인 인상을 남긴다.

그러므로 이 평전을 읽고나면, 도스또예프스끼 개인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는) 어떤 불안정하고도 복잡한 면들, 그리고 인간의 나약함과 그에 따르는 일종의 연민 혹은 안타까움이라는 복잡한 인상을 가지게 되지만, 그의 문학과 그 기저에 깔린 것들에 대해서는 일종의 흐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윤리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는 <죄와 벌>에서 윤리의 이상, 정치를 다루는 <백치>, <악령>으로의 발전, 그리고 죄와 수난이라는 종교적 도그마를 담는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까지 궁극적으로 이르는 도스또예프스끼 문학의 사상적 흐름과 그것들에 공통적으로 깔린 '러시아적인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예를 들어 그 대표적인 것들이란 이 책에서 러시아적인 것으로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러시아인들의 마음에는 하나의 원칙을 확인하는 것이, 그것에서 나타날 어떤 실제적인 결과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p. 228)""우리는 감정과 의견에는 관대하지만 행위에는 관대하지 않았다. 우리는 뒤늦게 회개하는 탕자의 방탕이 큰아들의 질투보다 왜 더 용서받을 만한 것이며 참회하는 한 사람의 죄인이 죄짓지 않은 99명의 존경받는 시민들보다 더 격려받고, 예수의 발 앞에 앉아 묵상하는 마리아가 식사를 차리는 마르따보다 더 사랑받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감정에 치중하고 행위에 냉담한 러시아인들은 그 이유를 이해하며, 미쉬낀은 바로 이 정신의 체현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행위의 규율에 관련해서 다른 나라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p.253)"

그러나 한편으로는 도스또예프스끼의 문학에 깔린 이러한 러시아적인 것은 뚜르게네프나 똘스또이, 그리고 그가 초기에 영향을 받았던 고골에서 보여지는 러시아성과 다른 그만의 특징적인 것이다. 마지막 챕터 '에필로그'에서 카는 이러한 도스또예프스끼 문학만이 갖는 특질을 소설의 등장인물이 전형을 벗어나는 것, 부조리한 인간에 대한 묘사, 원시적이고 근원적인 그러므로 불합리하고 불가해한 세계에 대한 천착, 그러면서도 거기에 내재된 신학적인 힘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전세대나 동시대 문학들의 특징을 뛰어넘는 것이며. 그 후의 전세계의 작가들에 크게 영향을 미친 요소이다. 카의 표현을 다시 빌리자면, "뿌쉬낀의 생애는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위대한 시기가 시작하고 있음을, 도스또예프스끼의 죽음은 그 시기가 끝나고 있음을 표지해 주었다.(p.374)" 즉 그는 기꺼이 한 시기를 닫았고, 새로운 시기의 기틀을 만들어주었다. 그 후의 많은 소설들에서 도스또예프스끼적인 인간은 빈번하게 등장하였고, 라스꼴리니꼬프 같은 인간, 혹은 이반 까라마조프 같은 인간은 일종의 원형이 되었다.

카는 마지막에 어떤 예언을 덧붙인다. 앞으로 백년 후(이 책의 출간년도는 1931년이다)가 되어서만이 그의 작품의 진정한 비중이 드러날 것이라는 점, 그리고 20세기 초의 논쟁으로부터 벗어난 후세대만이 그 예술의 전모를 생각할 것이라는 점. 이 예언은 맞을까. 20세기의 혼돈을 넘어, 21세기에 이른 지금, 우리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도스또예프스끼적인 세계를 맞고 있다. 그러나 카가 말한 바대로 우리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전제는 받아들였지만, 그의 결론은 거부하였다(혹은 거부되었다). 도스또예프스끼는 마지막에 러시아정교의 세계로 달려갔지만, 우리가 달려갈 곳은 없다. 거의 모든 종교는 해체되거나, 혹은 자체의 모순도 감당하기 어려워 보이고, 현대인은 내재된 분열과 이중성을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견딘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은 그것을 읽는 사람들에게 위안을 준다. 그러나 이 위안은 우리가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을 일종의 심리적 치유물로 받아들였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카의 예언은 이어진다. "현대가 도스또예프스끼의 심리학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의 작품에 대한 예술적 평가를 도와준다기보다 오히려 훼방한다. 그것은 우리의 관심을 예술적으로는 부적절한 쪽으로 기울게 하고, 흔히 우리의 예술적 인식을 왜곡시킨다.(p.385)"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들을 새롭게 읽어봐야겠다. 분열을 견디며. 예술적으로 생각하도록 애쓰면서.

리뷰에 인용한 부분 외에 흥미를 끈 문장들.

   
  안티테제를 제거해 버리면 인간은 결코 완전한 진테제에 도달할 수 없다. 죄악감을 없애 버리면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다. (p.307)

<인류를 사랑하면 할수록 개별적 인간, 다시 말해서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은 줄어든다>라고,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한 인물은 말한다.(p.77)

그는, 그의 신관과 떨어진 그의 인간관이 불가피하게도 오늘날 함몰되고 있는 도덕적 무정부 상태, 불모성, 비관주의로 인간을 몰고 가게 된다는 것을 인정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p.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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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03-24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스또예프스끼의 이름은 그의 삶 만큼이나 꽤나 복잡하다. 시프트를 3번이나 눌러야 한다...그건 그렇고 이 책의 번역은 약간 미심쩍다. 어딘지모르게 종종 이상한 문장이 있다. 오타도 좀 있는 편이고...

꽃도둑 2011-03-25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꼼하게 쓰셨네요...아직 다 읽지 못한 저로서는 기한안에 쓸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카가 쓴 평전을 읽어내기가 조금 까다롭더군요. 뭐랄까, 집중을 해서 읽어야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자꾸 문맥의 뜻을 놓치곤 했거든요.
그의 업적과 일생을 기리는 사실보다 거의 평론에 가까운 글쓰기여서 그런걸까요? 역사가다운!
잘 읽고 갑니다..^^

맥거핀 2011-03-26 21:14   좋아요 0 | URL
저는 <대칭>을 지금 아주 조금밖에 읽지 못해서, 기한 내에 리뷰를 올릴 수 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뭐 꼭 이 때문만은 아니지만, 러시아 사람들 이름이 너무 복잡해요. 읽다보면 자꾸 어지럽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도스또예프스끼가 참 안타까웠어요. 그 주위의 많은 사람들을 부양해야 하는 대목을 읽다보면 더 그렇구요. 카의 글쓰기는 전체적으로 싸늘해보이는 면도 있지만, 대작가에 대한 경의를 끝내 놓지 않는 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꽃도둑 님의 리뷰도 올라오면 읽으러 갈께요.

cyrus 2011-03-27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죄와 벌><백치><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어보지 않아서
사실 소설 내용이 언급되는 부분의 내용을 읽는데 힘들었습니다. 안 그래도
책의 서술 자체도 딱딱한데 말이죠,, 리처드 에번스라는 사학자가 말하기를
E.H. 카가 연구한 역사적 주제가 독자들의 관심이 끌기에 충분한 흥미로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문장 자제는 무미건조하다고 평가할 정도죠.

그리고 맥거핀님의 말씀대로 인쇄상 실수로 인한 오타도 있었구요,, ^^;;

맥거핀 2011-03-29 01:42   좋아요 0 | URL
저도 말씀하신 책들 중에서 딱 한 권만 봤습니다. 그것도 고딩 때. 그러니 지금 읽으면 그 때와는 확실히 다른 인상을 가지게 되겠지요.
카는 참 재미있는 문장들을 많이 쓰더군요. 문장 자체가 유머가 있어서가 아니라, 본의 아니게 느껴지는 유머랄까요. 즉, 본인은 전혀 웃길 의도가 없는데, 읽는 이는 쓴웃음을 짓게 하는 그런 문장들.
꽤나 딱딱할 줄 알았는데, 기대 이상으로 상당히 재미있는 책이었습니다.

네오 2011-03-29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스또예프스끼의 이름은 그의 삶 만큼이나 꽤나 복잡하다'라는 대목을 읽고 ㅋㅋ
성장기, 격동기, 창조기, 결실기의 네가지의 스텝이 있군여~ 전 그냥 계속 이분 생각하면 그냥 격동기만 생각나는데요ㅠㅠ 연민스러운 도스트예프스키의 삶은 그래도 지금은 생생하게 살아있으니 부럽네요^^

맥거핀 2011-03-29 22:55   좋아요 0 | URL
그게 바로 작가의 좋은(혹은 나쁜) 점이겠지요. 작가는 우리 곁에 없지만, 그의 작품은 영원히 남으니까요. 도스또예프스끼의 삶으로만 보면, 그의 삶이 격동으로만 이루어졌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듯 싶어요. 물론 그 격동의 상당 부분은 본인이 자초한 것이지만..

꽃도둑 2011-04-25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흐~~ 이달의 당선작이라....드뎌 결실을 보시는군요.
축하드립니다...^^

맥거핀 2011-04-26 15:4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리영희평전>을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리영희 평전 - 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
김삼웅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리영희 선생의 평전을 읽는 것은, 우리의 현대사를 읽는 것과 같다. 리영희 선생의 삶은 분단과 한국전쟁, 4.19 혁명, 5.16 군사쿠데타, 유신독재, 신군부와 광주, 6월 항쟁과 문민정부, 진보 정권, 그리고 이명박 정부까지 한국의 현대사와 오롯이 굴곡을 같이 한다. 리영희 선생은 그 숱한 현대사 굴곡의 최전선에서 가장 필요한 말들을, 그것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해왔다. 그러나 이 평전을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 것이 있다면, 리영희 선생의 말들은 대부분 우리를 향한 것이었지만, 그의 눈은 항상 밖을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사상은 분단과 독재로 점철된 갇힌 사고에 의해 끊임없는 제약을 받았지만, 그는 그 사고의 틀에 갇히지 않고, 세계사의 넓은 흐름 속에서 사고하려고 애썼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리영희 선생을 '의식화의 원흉'이라고 부르거나, '진보적 지식인, 언론인' 혹은 더 나아가 '사회주의자'로 부르는 것은 오해와 이분법으로 점철된 우리의 현대사를 그대로 평가에 투영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가 지향하는 바를 왜곡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리영희 선생이 원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상을 부수는 것이었다. 그의 저작의 제목 <우상과 이성>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선생은 이성의 힘으로 우상을 부수고자 하였다. 당시의 우리를 둘러싼 많은 우상들, 예를 들어 박정희 독재체제, 반공, 북한이라는 악마, 미국이라는 선, 중국에 대한 편협한 시각, 베트남전쟁의 당위성, 지역주의 등이 그가 원하는 파괴의 대상들 중 일부였다. 그것들이 이성의 힘에 의해 파괴되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그러한 우상들 때문에 우리들 대부분이 올바른 사고를 하지 못하여, 가치관이 왜곡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올바르게 사고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생존을 위험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주 단순하게 말해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미국에 대한 의존과 중국을 하찮게 보는 태도는 우리의 외교정책에 영향을 미쳐서 우리의 생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따라서 리영희 선생을 사회주의에 경도 되었다거나, 혹은 너무 진보적 관점에서만 세상을 바라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한편으로 그간의 진보 보수의 이분법적 프레임에, 즉 다른 말로 하면 이분법의 우상에 사로잡혀 그를 평가하는 것의 다름 아니다. 그의 발언이 그간 진보적 관점에 너무 치우쳤다는 것은 그저 우리 사회에서 그동안 그런 우상들의 힘이 너무 강력했다는 것을 반증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 우상들이 얼마나 강력함을 이 짧은 리뷰에 길게 적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자주 드나드는 인터넷 게시판에 가서 더도말고 딱 1시간만 '눈팅'을 한다면, (리영희 선생의 많은 노력에도) 그 강력한 힘들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머리 속을 얼마나 휘어잡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관점에서 이 평전의 이러한 진술을 이해할 수 있다.

   
  리영희가 유럽 중세에 태어났으면 이단심문소에 끌려가 화형을 당했을지 모르고, 나치시대에 독일이나 프랑스에서 살았으면 레지스탕스가 되었을 것이다. 제정러시아나 스탈린 시대 소련의 지식인이었다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을 터이고, 문화혁명기 중국에 살았다면 하방下放의 표적이 되었을 것이다. 해방정국에서 북한에 머물렀다면 아오지 탄광에 일생을 묻었을 터이고, 조선시대의 선비였다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출척을 당한 끝에 역모의 누명을 뒤집어 쓰고 사약을 받았을 것이다. (p.29)
 
   

그래서 아마도 리영희 선생에 가장 가까이 있는 말로는 휴머니스트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휴머니스트를 여러 결로 정의해 볼 수 있겠지만, 가장 간단하게는 인간의 생존과 삶을 제1의 가치에 두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의 정확한 이론적 탐구와 정세분석의 가장 밑바닥에는 우리 민중들의 삶과 생존에 대한 분노와 걱정이 깔려 있다. 안과 밖에서 이중으로 속박당하는 민중의 삶과 생존에 조금이나마 숨통을 틔워주는 것이 그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하고, 리영희 선생은 글을 쓰고 행동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그가 가장 존경한 인물 중의 하나였던 루쉰의 삶과도 맥이 닿아 있다. 루쉰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는 너무 오른쪽이라고, 그리고 오른쪽에 있는 자들에게는 너무 왼쪽이라고 공격을 받았지만, 그가 가장 걱정한 것은 이중의 속박에서 고통당하는 중국 민중의 삶과 생존이었다. 그가 존경한 루쉰을 보면, 그의 삶 속에서 결국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것은 휴머니즘이 아니었겠는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휴머니즘은 인간을 그저 생존시키는 것에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을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다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다운 사고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외세에 의한 분단이라는 아픔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이, 그 외세에 동참하여 타인에게 같은 아픔을 안겨준 베트남전쟁에 대하여 진정으로 참회하고 반성하는 것, 그것은 리영희 선생이 말하는 인간다운 사고이며, 삶이며, 리영희 선생의 태도이기도 하다.

이 책 <리영희 평전>이 평전으로서의 균형감각을 잃고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나는 그 문제를 지적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균형감각이라는 것을 말하려면, 적어도 그 평균대가 놓여진 평평한 대지를 우리는 상정하여야 할 것이다. 하워드 진의 유명한 말을 다시 한 번 가져와본다면,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달리는 기차 위에서 억지로 균형을 유지하려고 했다가는, 기필코 넘어지고야 만다. 그리고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까, 넘어질 때는 힘을 더 가진 쪽으로 넘어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의 기차는 보통의 기차가 아니다. 이상한 방향으로 달리는, 아주 고르지 못한 땅을 달리는 고속의 기차이다. 그 고속의 기차 위에서 리영희 선생은 어떻게든 모든 핍박받는 자들을 안전하게 기차에 앉히려고 애썼다. 그것은 그 사상적 어린아이들을 어떻게든 부여잡아 다독이는 억센 손이다. 그 억센 손을 세밀하게 묘사할 때도, 균형감각이라는 것을 상정해야 할까. 그러한 무서운 고속의 기차 위의 균형이란 무엇을 위한 균형일까.

그런 리영희 선생은 2010년 12월 5일 타계하셨다. 우리는 최근 연이어 사상의 은사를 잃고 있다. 그러나 꽃은 졌지만 향기는 남는다. 아직도 수많은 우상은 우리곁을 맴돌지만, 선생이 남겨준 우상을 없애는 이성의 무기, 사상의 무기는 여전히 벼려진 채 우리에게 남아있다. 그러므로 그를 추도하고 기억하는 또다른 방법은 그가 남겨준 힘을 이용하여 우리 삶에 아직 남아있는 우상들을 조금씩 밀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조금씩 더 인간다운 사고를 하게 될 때 우리는 조금씩, 리영희 선생에게 진 빚을 갚아나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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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02-28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제목은 예전에 읽었던 김서령 님이 김춘수 선생을 추모한 글의 제목을 조금 가져다 썼습니다.

네오 2011-02-28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상을 부수는 것이었다,,엄청나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아~ 반자본 발전사전을 서점에 가서 조금 읽어봤습니다..(아직은 사지는 않구여ㅠㅠ)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이네여,,좋은 책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맥거핀 2011-02-28 23:16   좋아요 0 | URL
조금 비싼 책이기는 하지만, 비싼 만큼의 값어치를 하는 책이라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합니다. <리영희 평전>도 물론이구요.

2011-03-02 2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03 17: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딧불이 2011-03-05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영희 선생의 말들은 대부분 우리를 향한 것이었지만, 그의 눈은 항상 밖을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무릎을 치게 하는 말씀이세요.

맥거핀 2011-03-06 17:39   좋아요 0 | URL
리영희 선생님은 항상 전체적인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나라를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어쩌면 동시대의 분들 중에서 그런 흐름의 파악이 가장 빨랐던 분이 아닐까?..하고 생각도 해봅니다. 제가 생각했던 리영희 선생님의 모습보다 훨씬 큰 모습이 담겨 있어서 책이 참 좋았어요. 다음 책도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