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보는 고대사 - 민족과 국가의 경계 너머 한반도 고대사 이야기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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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는 한국사회에서 특이한 존재이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한국 고대사를 전공하고, 한국에 귀화하여 '블라디미르 티호노프'가 아니라, 한국인 '박노자'가 된 그의 이력도 그러하지만, 그가 한국 사회에 직격으로 쏟아내는 비판들을 통해서도 그러하다. 박노자는 항상 우리에게 고정관념을 탈피할 것을, 우리를 둘러싼 몇 겹의 사회적 장벽들을 뛰어넘어 사고하기를 강변한다. 그의 발언들은 한국의 정치적인 문제에서부터, 사회적 제도의 문제, 지식인 사회의 문제, 스포츠나 생활 습관을 대하는 자세에 이르기까지 거의 한국의 전 사회에 걸쳐져 있다. 그리고 그는 거침없이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때로는 가끔 지나치다 싶은 데까지 나아가기도 한다. 그런 면에 있어서, 그는 한국 사회에 분명히 필요한 존재이며, 의견이 존중되어야 마땅한 인물이다. 한국인이면서도, 진정한 외부자의 시선을 자처하며,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고, 새로운 각도에서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역할을 그보다 잘해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그의 주종목인 고대사에서 '다르게 보기'를 자처하고 나섰다.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고대 가야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래로, 그는 한국 고대사에 대해 꾸준히 연구하고, 글을 써왔다. 주간 <한겨레 21>에 꾸준히 연재해온 "거꾸로 보는 고대사"라는 칼럼도 그 중의 하나인데, 이번에 책으로 묶어져 나왔다. 이 칼럼들에서 그가 원하는 것은 사실 이 제목에 농축되어 있다. 즉,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고대사에 대한 여러 지식들에 의문을 가져보자는 것. 학교 교육을 통해 가져온 고대사에 대한 어떤 인식들을 이번에 '거꾸로 보는' 작업들을 통해 다른 시각에서 살펴보자는 것이다.

 

물론 그간 다른 시각에서 우리의 고대사를 살펴보자는 논의들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왔다. 특히 기존의 주류 학계의 사관, 혹은 식민주의적 사관을 벗어나고자 하는 민족주의적 시각들을 기반으로 한 논의들이 그렇다. 그러나 박노자는 여기에 일침을 가한다.

 

세계 각국의 민족주의적 사학에는 한 가지 놀라운 공통점이 있다. 근현대사를 서술할 때 '우리들의 피해'를 강조하여 민족/국민의 상(像)을 역사적 정통성이 있는 '피해자'로 그리면서, 고대사의 상(像)은 '우리들의 위대성' 위주로 그린다는 점이다. 근현대사에서 '우리'가 타자를 침략했다면 그것은 '우리'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일로 인식되지만, 고대사에서는 위대한 정복군주들이 '우리'의 자랑거리가 되곤 한다. (p. 10)

 

그러나 오해가 없어야 할 것은 박노자의 이런 논의가 어떤 재야사학자들의 민족주의적 사관을 공격하고, 올바름을 가장한 '우리 역사 깎아내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박노자의 논의는 그보다는 어떤 제3의 시각을 향해 있다. 그것은 이제 우리의 고대사를 바라보는 해석의 시각이 미래의 시각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기존의 고대사를 해석하는 시각이, 지배계급 중심적인 시각이 반영된, 우리 민족의 위대성을 표출하여 국민국가로서의 정체성을 만드는 것이었다면, 이제 새로운 시각은 우리의 고대사를 다르게 해석함으로써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어가기 위한 기초를 닦아나가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오늘날 지배계급의 팽창적 야망이 아닌 다수 한반도인들의 진정한 이해관계에 맞는 고대사를 지향한다. (중략) 지금 우리의 과제는, 지역 내의 이웃나라들과 보다 잘 어울리고, 다양한 소수자들에 대한 관용을 가지고,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의 영향력을 견제할 수 있는, 성숙한 동북아시아의 사회민주적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중략)

한 마디로,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우리 선조들의 고대 국가들의 위대성'이 아니다. 고대 한반도를 둘러싼 지역에서 벌어지는 물적, 인적, 사상적 흐름, 국가가 아닌 민중을 비롯한 한반도 주민의 다양한 계층, 집단이 서술 대상이다. (p. 13-15)

 

우리가 가진 고대사에 대한 기존의 지식들을 깨뜨리기 위해 박노자는 계속 묻는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다. 1부에서는 "우리는 만주의 주인이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고조선이 중앙집권적 국가가 아니었음을 밝히며, 따라서 고조선에 의한 만주의 영토적 지배는 일종의 오해였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낙랑 및 한사군을 일종의 침략 세력으로 보거나, 고구려를 강대한 제국으로만 보는 시각에 문제가 있음을 밝히기도 한다. 2부에서는 "신라는 민족의 배신자였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을 하나의 민족으로 보는 시각의 위험성을 보여주며, 그 당시의 외교적 관계를 염두에 두며 당과 발해 등의 주변국가까지 포괄하여 전체 구도를 볼 것을 주문하고 있다. 즉 이러한 박노자의 시각으로 보면 통일 신라 역시도 단일민족이나 종족으로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3부에서는 "일본은 언제나 우리의 적이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임나 일본부설이나, 왜와 백제의 관계들을 다시 살펴보고 있다. 이를 생각하는 데에 있어서, 식민주의적 관점이나, 민족주의적 관점에 따른 시각, 즉 후대의 역사로 비롯된 일종의 콤플렉스적 시각들을 배제하고, 중립적인 시각에서, 그 당시의 맥락을 살펴볼 것을 주문한다. 마지막 4부에서는 고대의 성(性)문화나 민중의 생활사를 살펴보는 글들을 통하여, 기존의 고대국가를 살펴보는 시선들이 후대의 시각들에 의하여 새롭게 '창조'된 것임을 밝히면서, 고대 국가가 단순히 종교와 전제정치의 억압만이 존재하던 곳이 아니라, 사적 소유와 정치적 발언이 허용되던 활력의 국가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이 가치를 가지는 것은 위의 내용들에 의해서이기도 하지만, 사실 다른 부분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지점도 있다. 그것은 고대사 연구, 그 자체에 대한 박노자의 시각을 생각해봄으로써 가능하다. 그것은 아마도 고대사 연구란 '사실'의 문제라기 보다는 '해석'의 문제에 가깝다는 것을 밝히는 과정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박노자는 "역사쓰기는 늘 취사선택의 과정이고, 늘 서술 주체의 시각이 개입하게 돼 있다"라고 말하며, 머리말을 통해 자신이 고대사를 어떤 방향으로 해석할 것인가를 명확하게 밝히며, 이것이 무엇을 위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또한 상당수의 본문에서도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 보다는 이러한 방향으로 추측이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식으로, 조심스럽게 독자를 유도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의 고대사 논의들은 그렇지 않다. 그 논의들은 자신들의 '해석의 시각'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독자들에게 숨기며, 마치 명확한 사실만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독자를 이끌어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명확한 사실이란, 사실 얼마나 명확한 것인가. 고대사의 많은 자료들은 여전히 베일에 감추어져 있으며, 혹여 베일을 벗었다 할지라도, 그것에는 후대의 다른 시각들이 새롭게 덧붙여진 경우들이 많다. 또한 그 당시의 명확한 사실을 기술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어떠한 시각에서 기술했는가에 따라서 해석의 여지란 무한한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기술한 몇 개의 글들만이 1000년후의 사람들에게 공개된다면, 그들은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인가. 혹자는 촛불 시위를 예로 들며, 한국과 미국이 적대적이었다고 할 것이며, 혹자는 미군이 한국에 주둔한 것을 들며, 한국이 미국의 식민지였다고 밝힐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고대사를 이야기하는 데에 있어서, 박노자처럼 조심스럽게, 또한 자신의 해석 의도를 밝히는 것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박노자 역시 대다수의 고대사학자들처럼 일부의 자료들을 편의적으로 취사선택하는 경향이 있으나, 그것은 이러한 맥락에서는 이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박노자 글들은 앞에서도 논의하였지만, 미래를 지향하고 있다. 최근 며칠간의 아시안게임으로 촉발된 대만의 반한 시위와 그에 대한 우리나라 네티즌들의 경멸적인 대응을 보며, 이러한 것의 이면에 들어있는 것들을 생각해 보게 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러한 것들에는 분명히 그간 우리의 역사교육이 초래한 일말의 사고관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반만년 역사의 민족적 자긍심만을 강조하는 기존의 역사교육을 받아온 대다수들이(우리 및 대만 모두) 그런 일방적인 시각을 가지지 않을 도리란 없을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박노자와 같은 미래 지향적인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적어도 당신이 그런 대만의 시위에 맞서서, 우리도 대만의 국기를 불태우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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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트가 사라진다길래 예전에 리브로에 작성한 리뷰를 가져옴.

처음 작성일: 2010.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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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9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과 울나라에 대한 예시를 논거로 하니, 확 다가오네요..

맥거핀 2012-12-19 18:44   좋아요 0 | URL
박노자님 시각이 비판을 많이 받는 것으로도 알고 있는데 아무튼 책은 재미있었던 것 같은...(2년 전에 읽은 책이라 기억이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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얽힘의 시대 - 대화로 재구성한 20세기 양자 물리학의 역사
루이자 길더 지음, 노태복 옮김 / 부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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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자 길더의 이 책 <얽힘의 시대>는 양자물리학의 근본 개념 중의 하나인 '양자 얽힘' 현상과 그의 역사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이지만, 이 책을 다 읽은 나에게 그렇다면, 양자물리학, 양자얽힘 현상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할 것 같다. 이 책을 읽음으로서 조금이라도 알게 되는 단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양자물리학의 세계는 매우 복잡하고, 어지러우며, 그것을 이해하기는 매우 힘들다,라는 점이 아닐까. 그러나 문제는 아직 남아있다. 그것은 그 '이해못함' 마저도 이해했는지가 불확실하다는 점, 즉 '양자물리학이 복잡하고, 어지럽다'는 사실 자체를 이해했는지의 여부마저도 상당히 불확실하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일찌감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좌절할 필요는 없다. 위대한 물리학자 보어마저도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으니까. "만약 양자론에 대해 어지럽게 느끼지 않는다면 당신은 양자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이치에 누구보다도 가깝게 다가간 아인슈타인마저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아인슈타인은 그가 1935년 포돌스키, 로젠과 함께 발표한 논문(EPR)에서 양자역학은 불완전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즉 그마저도 양자역학의 모든 비밀을 밝혀내지도, 그러므로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했으며 그가 이런 견해를 밝히게 해준 '양자 얽힘' 현상은 그로부터 몇십 년 후 존 벨과 일단의 물리학자들에 의해 그 면모가 조금씩 드러나게 된다.

 

양자물리학이 그렇게 이해가 어려운 까닭은 무엇인가? 이 책을 읽고 난 후 어렴풋하게 생각하게 된 몇 가지를 이야기해 보면 그것의 이유 중의 하나는 양자물리학의 세계에는 그간 우리 세계를 작동시킨다고 믿어졌던 일반적인 원칙, 고전물리학의 법칙, 또는 만물의 근본적인 작동 원칙에 반하는 몇몇 현상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고전물리학의 법칙에 일차적으로 균열을 일으킨 것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다. 그러나 이 양자물리학은 이 상대성이론의 몇몇 원칙들과도 잘 들어맞지 않는다. 양자물리학은 양자의 세계, 그러니까 극소의 세계, 에너지와 물질이 더 작은 조각으로 나누어질 수 없는 궁극적인 조각인 양자의 성질에 대해 다룬다. 그런데 이 양자의 세계에서는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와 무엇인가 다른 일들, 우리가 그간의 상식으로 '그러하다'고 여기는 일들과는 다른 일들이 벌어진다. 그 큰 부분이 바로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양자의 '얽힘' 현상이다. '얽힘'은 아주 간단하게 말해서 '둘 이상의 물질이나 빛이 떨어져 있어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물리학의 토대가 되었던 '국소적 인과성'을 가지지 않을 뿐더러, '관찰과 무관한 실재'도 아니다.

 

즉 양자역학 이전의 물리학은 국소적인 인과성이나 관찰과 분리된 실재라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인과성이란 말 그대로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는 것이며, 이는 물리학의 세계에서는 국소적 영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그간의 믿음이다. 즉 한 물체는 오직 국소적인 연쇄 작용에 의해서, 다시 말해서 한정된 시공간에서의 연쇄 작용에 의해서 다른 물체에 영향을 미치며, 따라서 그 영향은 빛의 속력보다 빠를 수 없다(빛보다 빠른 물질은 없으므로). 예를 들어 우리가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본다면 그의 음파가 그의 성대에서 출발해 우리의 고막에 도착했기 때문이며, 그 속도는 당연히 빛의 속도보다 느리다. 그러나 양자 얽힘 현상에서는 두 광자가 아무리 먼 거리를 떨어져 있어도(비국소성), 어떤 동시적인 운동방식을 보인다. 물론 이 동시성을 어떤 무선통신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즉 한 광자가 자신이 운동하기 전 '재빨리' 다른 광자에게 어떤 것(그러니까 데이비드 봄이 이야기한 '양자 포텐셜'과 같은 것)을 보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 있으려면 그 '재빨리'는 빛보다 훨씬 빠른 '재빠름'이어야만 한다. 겨우 빛의 속도로 전파되는 물리적 신호로는 그런 현상(얽힘 현상의 동시성)을 설명해낼 수 없었다. 다시 말해서 완전히 다른 계에 있는 두 광자라도 한 번 얽히게 되면, 그 얽힘이 아무리 먼거리에서도 계속 유지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말이 안되는 것인지 생각해 보라. 예를 들어 오늘 아침 당신이 출근길에서 만난 한 사람과 우연히 옷깃이 한번 스쳤을 뿐인데, 그 이후로 두 사람이 얼마나 떨어져 있든 동일한 운동패턴, 혹은 동일한 상태를 보인다는 것, 그것이 무엇으로 가능하단 말인가? 빛보다 빠른 텔레파시?

 

더군다나 이는 관찰과 분리된 실재도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물리학은 아니 우리의 세계는 분리가 가능하다는 믿음, 그러니까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으며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아인슈타인의 말)를 가정하고 이루어진다. 즉 예를 들어 우리가 무엇인가를 관찰할 때(물리학 때문이든 다른 어떤 것 때문이든), 그것은 관찰자의 외부에 분리된 실재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양자얽힘에서는 이것이 보장되지 않는다. 양자의 세계에서는 한 양자의 운동량과 위치를 동시에 알 수가 없으며(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 그것은 어떤 확률에 의해서만 기술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면, 그것의 실재에 대해서 의심할 수밖에 없다. 어떤 것이 확률로서만 존재한다면 그것은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또한 그 확률이란 측정의 확률, 관찰자의 확률이기 때문에 관찰자와 관찰대상은 비분리된다. 슈뢰딩거의 실험에서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살았을 수도 있고, 죽었을 수도 있으며, 그것은 오직 관찰자가 보았을 때에만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관찰자가 보지 않았을 때에는 이 고양이는 살았는가, 죽었는가? "전체 시스템에 대한 파동함수는 이 상황을 설명하면서 살아 있는 고양이와 죽은 고양이가 섞여 있거나 스며들어 (이런 표현을 써서 죄송하지만) 있다고 할 것이다.(p.294)" 즉 고양이의 생사는 관찰행위의 영향을 받는다. 다시 말해서 이런 관점에서는 양자적 실체들은 관찰되기 전까지는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또 얼마나 웃긴 소리인가? 관찰자가 관찰대상에 영향을 미치다니? 그것이 무엇으로 가능하다는 말인가? 역시 텔레파시? "이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터무니 없는 발상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보지 않으면 달이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p.30)"

 

그러나 아무튼 문제는 양자물리학의 세계에 있어서 이 터무니없는 현상들이 실제로 '측정'된다는 데에 있다. 아인슈타인이나 보어, 드 브로이, 슈뢰딩거 등의 이론물리학자들의 세계에서는 사고실험(생각으로만 이루어지는 실험)에서 나타나던 것들이 존 벨이나 클라우저, 혼 등의 실험물리학자들의 세계로 넘어오며, 그러한 얽힘 현상은 실제로 실험실에서 나타났으며, 그것의 작동원리의 여러 부분은 많은 물리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의문 속에 남겨져 있다(예를 들어 그 의문 중의 하나는 양자세계에서 일어나는 얽힘 현상이 왜 그보다 큰 물질, 그러니까 양자들이 합쳐진 보다 큰 물질에서는 일어나지 않는가 등등이다. 차일링거 등은 이를 실험으로 증명하려 한다). 그래서 아직도 어떤 물리학자들은 말한다. 양자역학은 (아인슈타인의 견해와 같이) 아직도 불완전하다고. 고전물리학은 물론이고, 상대성이론마저도 아주아주아주 쉽게 설명한다면 중고생들에게도 그것의 본질을 이해시킬 수 있지만, 양자물리학에 대해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양자역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폴 디랙의 견해로는, 그러므로 현재는 양자물리학의 풀리지 않는 여러 문제가 이해되기에는 아직 이른 시기이기이며(1급 난이도 문제- 현재로선 해결될 만한 여건이 성숙하지 않은 문제), 얽힘 현상의 구성에 큰 기여를 한 존 벨마저도 이러한 것을 1964년 마이클 나우엔버그와 공동으로 쓴 논문 <양자역학의 도덕적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양자역학적 설명은 대체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 이론은 인간이 만든 모든 이론들과 마찬가지다. 특이하게도 그 이론의 최후 운명은 그 내부 구조에 명백히 잠재해 있다. 그 자체에 파괴의 씨앗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p.540)"

 

그렇다면 양자역학은 단지 어렵고 불완전할 뿐인, 언젠가 다른 것(예를 들어 초끈이론)으로 대체될 한정적인 이론일 뿐인가? 분명히 그렇지는 않다. 모든 물리학은 과거의 이론에서 얻어진 어떤 것들을 가지고 새로운 것들로 발전해나가며, 그것이 과거의 이론을 모두 뒤집는 어떤 것이라도, 그것은 과거의 그 이론 없이는 탄생되지 않았다. 양자물리학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며 그것은 고전물리학과 상대성이론의 어떤 것들을 바탕으로 해서 그 토대가 만들어졌다. 이를 이렇게 이야기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루이자 길더의 이 책 <얽힘의 시대>는 양자물리학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이야기하는 방식은 조금 특이하다. 책의 각 장은 특정의 한 시기에 이루어졌던 실제의 대화, 실제의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있으며, 그 수많은 대화들의 장면이 중첩되어 이 양자물리학의 역사가 만들어진다. 즉 이것은 거시적인 양자물리학의 역사가 아니라, 미시적인 양자물리학의 장면들의 집합이다. 다시 말해서 이 미시적인 장면들은 모두 이 거시계 속에서 '얽혀 있다'. 그것은 개별적인 물리학자들의 입장에서 보아도 그렇다. 양자물리학의 역사를 만들어낸 이 물리학자들은 책 속에서 모두 각자 나름의 역사를 부여받고 있으며(이 책은 모든 학자들에 대해 '그들이 왜 양자물리학에 빠져들게 되었는가'의 관점으로 그들의 약사(略史)를 기술한다), 이들은 양자물리학에 한 번 얽히게 된 이후에는 평생 그 양자물리학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들은 그렇게 얽혀 있었다. 즉 양자물리학이라는 것에 한 번 얽힌 이후에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 미스테리에 대해 동시에 골똘히 생각했다. 그들은 비국소적인 개체로서 얽혀 있었다. 이를 보다 더 큰 관점으로 보면 양자물리학은 고전물리학과 상대성이론과도 얽혀 있다. 즉 하나가 사라졌을 때 다른 하나가 존재할 것이라 가정할 수 없다.

 

(책에서 한편으로 실제적인 양자물리학의 가치로서 이야기하는 예들은 양자컴퓨터, 양자를 이용한 암호와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파인먼에게 있어서는 그 양자컴퓨터의 가치 또한 그것의 어떤 실생활에서의 목적보다는(양자컴퓨터는 일반 컴퓨터에서 상상할 수 없는 속도의 연산이 가능하다) 한편으로는 양자역학의 비밀을 밝혀내기 위한 것으로서의 가치였다. "파인먼에게 있어서 양자 컴퓨터가 지닌 위대한 의미는 그것을 만들고 작동시킴으로써 벨이 제시한 서로 관련된 입자들에게 대한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p.533)" 즉 이것은 양자컴퓨터가 어떻게 작동하는가, 그것이 무엇을 보여주는가가 양자론의 작동방식을 보여줄 수도 있다는 의미는 아닐까. 즉 물리학자들이 가지는 양자역학에 대한 난점을 '실제로 그것이 획기적으로 작동하는 어떤 방식'을 봄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는 (고전물리학적인) 귀납적인 믿음으로의 회귀라고나 할까.)

 

마지막으로 이 얘기는 하고 끝내고 싶다. 양자컴퓨터나 양자를 이용한 암호 등의 예에서 보듯이, 양자론, 양자물리학의 가치는 무한하다. 양자컴퓨터나 양자 암호 등의 발전 정도가 아직 무궁무진하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19세기의 이론물리학자인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도 "전기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p.536)), 다른 많은 부분에서도 양자물리학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작가 루이자 길더는 마지막에 이를 일종의 유머로서 살짝 암시한다. 책의 마지막에서 양자론의 비실재성과 인간중심성(관찰자가 존재하여야 한다는)에 의문을 제기하는 물리학자 테리 루돌프는 물리학자가 된 후에 어머니에게 숨겨진 비밀 하나를 듣게 된다.

 

외할머니는 아주 순진한 아일랜드 카톨릭교도였는데 스물여섯 살 때 나이가 훨씬 많은 남자와 관계를 가진 후 임신을 했다고 한다. 처녀의 몸으로 딸을 낳은 후 아이 아버지가 달라고 하자 아이를 그에게 주었다. 하지만 딸과 떨어져 지낸 지 2년이 지난 후 더블린의 한 공원에서 유모가 이끄는 유모차에 실려 있는 자기 딸과 우연히 마주쳤다. 외할머니는 유모차에 있는 딸을 낚아챈 다음 그 길로 딸과 함께 멀리 남아프리카로 떠났다.

그런데 1년 전에 처음으로 얽힘 현상에 대해서 알게 되어 그 결과 물리학 연구에 헌신하게 된 스물한 살의 루돌프는 이 이야기를 통해 비로소 자기 외할아버지가 슈뢰딩거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p.550)

 

전혀 다른 환경에서 아무 교류도 없이 오랜 기간 자라난 청년과 그의 외할아버지가 모두 물리학에 그것도 양자물리학에 헌신한다는 것, 이 미스테리에 담긴 것이야말로 얽힘 현상의 (보다 큰 물질에 있어서의) 재현이 아닌가. 얽힘 현상은, 그리고 양자물리학은 언젠가 세상의 모든 비밀을 밝혀낼지도 모른다. 그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빛보다 빠른 텔레파시가 가능할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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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12-03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허허. 드디어 서평단 마지막 리뷰를 썼음.

아이리시스 2012-12-03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허허. 맥거핀님 드뎌 서평단 임무 마감.

맥거핀 2012-12-03 18:13   좋아요 0 | URL
아주 좋아요. 기말고사 마지막 레포트를 제출한 느낌이랄까. 아 근데 하나 남았음..

2012-12-03 1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04 0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hining 2012-12-03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자역학......이래서 저는 인문쪽 지원은 꿈도 안 꿔본 겁니다(흑흑).
인문, 이 아니잖아요............

맥거핀 2012-12-04 00:30   좋아요 0 | URL
하지만 저희 정식 명칭은 '인문/사회/과학/예술'이라는 사실! 그래도 저자가 최대한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서, 반복해서 읽다보면 이해되는 부분도 조금은 있다,고 애써 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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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언 리더 지음, 배성민 옮김 / 까치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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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시작은 '미친 것(being psychotic)'과 '미치는 것(going psychotic)'을 구분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할 것 같다. 간단히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최대한 간단히 말해보면 '미친 것'은 이 책에서 말하는 '조용한 광기(quiet madness)'의 상태이다. 즉 정신병을 가지고 있으나 그 정신병이 눈에 보이는 현상, 증상으로 나타나지 않거나, 이상행동으로 촉발되지 않은 상태이다. 반면 한편에 있는 '미치는 것'은 우리가 흔히 아는 정신병의 상태이다. 어떤 망상을 가지고 있거나, 특이하고 반복된 행동을 보여주거나, 이상한 말을 하거나, 심지어는 살인을 저지르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이를 이렇게 나눌 수도 있다. 미친 것은 일상 생활과 완전히 양립이 가능하며,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일반인보다 더한 일반성을 보여주지만, 미치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 광기가 촉발되므로 그럴 수가 없다. 이런 예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우리 인간을 하나의 시계라고 생각해보면 '미친 것'은 예를 들어 정확하게 항상 5분이 늦는 시계이다. 항상 5분이 늦는 시계를 보며 우리는 정확한 시간을 알아내는 것도 물론 가능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은 분명 정상적인 시계라고 볼 수는 없다. 즉 그것은 매순간 정확하게 작동하고 있지만, 분명히 커다란 무엇인가가 어긋나 있다. 반면 '미치는 것'은 가끔 10분이 늦어지다가, 갑자기 5분이 빨라지다가, 혹은 바늘이 하루에 20바퀴를 돌기도 하는 그런 시계다. 즉 우리는 그 시계를 보고는 도저히 정확한 시간을 알 수가 없다. 물론 이 시계 역시 앞의 시계와 마찬가지로 무엇인가가 어긋나 있다. 즉 분명한 것은 두 시계 모두 무엇인가가 고장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까지의 이야기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사실이며, 그것을 정확히 밝혀내는 것이 상당히 어렵다는 사실이다. 즉 '미친 것'과 '미치는 것'을 그렇게 쉽고 간단하게 나눌 수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예스라고 대답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며, 그와 연관하여 이 사람이 미쳤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판단하기도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망상을 하나의 예로 들어 본다면, 우리가 흔히 망상을 가지고 있거나, 헛소리를 하는 사람을 보면, 정신에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망상은 그가 정상생활을 하는 데에 큰 버팀목이 되기도 하고, 도리어 그것은 정상으로 돌아온 증거가 될 수도 있다. 또한 '미친 것'을 일상생활과 양립이 가능하며, 그들 대부분의 경우 정상인에 거의 완전하게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고 했을 때, 그들이 '미친 것'이라고 어떻게 규정할 수 있겠는가? 예를 들어 책에 나온 에른스트 바그너의 사례를 보면 그는 1913년 9월 4일 밤에 자식 4명과 아내의 경동맥을 끊고, 뮐하우젠 마을로 가 9명을 사살하고, 12명에게 상해를 입히기 전까지 모범시민이자 가정을 소중히 하는 남자로 전혀 광기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는 말 그대로 미쳐 있었다. 즉 그가 광기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미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는 그 이전부터 미쳐 있었다. 그러니까 다시 시계로 돌아가본다면 '그'라는 시계는 매시 매순간 정확히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의 시계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는 말이다. 누군가 정확한 시간을 알아내기 전까지 말이다.

 

그래서 아마도 이 책의 저자 대리언 리더가 비판하는 정신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새로운 흐름이 나타난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저자 대리언 리더는 환자 한명 한명의 세세한 사례에 주목하고, 그들에게 세밀한 정신분석을 실시하고, 그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정신병적인 구조가 생겨나게 된 이유와 그것이 촉발하게 된 과정에 대해 분석하는 1950년대 이전 과거의 방식을 긍정하며, 현재와 같은 정신병의 진단과 치료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정신병의 눈에 보이는 증상에 주목하고, 그것을 하나의 질병으로 간주해 약이나 수술 같은 것으로 치료하려는 현재의 흐름을 저자는 비판한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 증상은 환자에 따라 모두 다르므로, 정신병이라는 진단의 가짓 수는 점점 늘어나게 되고, 그렇게 눈에 보이는 증상만을 약물로서 치료하려 하다보니 도리어 약에 반응할 것으로 예상되는 증상만이 연구되기 시작했다. 즉 이 책에서 말하는 '조용한 광기'는 어떠한 눈에 보이는 증상도 나타나지 않으므로 점점 정신의학계의 관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저자의 관점대로 보면, 이는 매우 위험한 것이다. 앞에서 말한 에른스트 바그너와 같은 극단적인 사례를 굳이 예로 들지 않더라도, '미친 것'의 상태를 정확히 알아내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증상에만 대증적인 처방을 하는 것은 정신병을 더 심화시킬 뿐만 아니라, 환자와 주위 사람들을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자가 시도하는 방식은 일단 정신병과 신경증을 구분하고(즉 '미친 것'이 어떠한 상태인지를 규명하고), 정신병을 큰 세 가지 줄기, 즉 정신분열과 편집증과 우울증으로 나누는 것이다. 신경증과 정신병을 나누는 것은 여러가지로 가능하겠지만, 이 책에서 나누는 방식 중에 하나는 프로이트가 말한 외상을 다루는 방식이다. 신경증자에게 외상은 억압된다. 대표적인 억압의 방식은 기억상실이나 대체이다. 즉 신경증자들은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히스테리나 강박으로 대체한다. 그러나 정신병자는 이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폐제(forclusion)한다. 즉 그런 생각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행동한다. 다른 말로 하면 억압한다는 것은, 그것이 생각 속에 어떻게든 남아 있다는 것이다. 즉 생각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망각되거나 대체하려는 노력이 일어난다. 그러나 정신병자의 폐제는 그것이 아예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외상은 폐제로 인해 완전히 없었던 것 같지만, 어떠한 계기로 인해 촉발되면 나중에 실물로서 실재계로서 정신병자에게 돌아온다. 이를 위해서는 라캉의 상상계와 상징계, 실재계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데, (여기서 자세히 논할 수도 없고, 논할 능력도 없지만) 간단하게 상징계는 언어와 법의 세계, 상상계는 몸의 이미지의 세계, 실재계는 몸의 리비도, 즉 흥분이나 자극으로 볼 수 있고, 상징계가 기능을 하지 못하거나 상징계에 무엇인가(예를 들어 외상)를 통합할 수 없을 때, 정신병이 생겨난다. (상징적 질서의 큰 부분은 '말(언어)'이 차지하고 있으므로 또한 이 책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은 정신병자의 말과 논리에 대한 부분이다.)

 

이를 라캉이 새롭게 해석한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fus complex)와 연관지어 살펴볼 수도 있다. 아버지의 남근에 대한 거세 위협으로 남자아이가 엄마를 오이디푸스처럼 사랑하지 못하게 되고, 반명 여자아이는 남근 덕분에 아버지를 사랑하게 된다는 이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라캉에 의해 조금 변형되었다. 즉 라캉은 이를, 아이가 상상계의 수준에서 엄마를 위한 팔루스(phallus, 남근상)가 되는 것을 포기해야 하지만, 상징계의 수준에서 팔루스를 가지거나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다시 말해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상상계의 수준에 남아있지 않고, 상징계의 수준으로 통합됨으로써 아이의 정신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이 상징계에 위치함으로 인하여 의미를 새로 세우고, 몸의 리비도가 활동할 영역을 제한하며, 타자(the Other)와의 거리를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이 상징계의 통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정신병이 나타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상징계가 아니라 상상계나 실재계에서 일어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물론 그것은 근친상간으로 금기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바로 정신병적인 형태로 말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정신병은 정신분열증과 편집증, 우울증의 크게 3가지로 나타날 수 있으며, 이는 각각 조금씩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실제로 이 3가지를 나누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며 상당히 복잡하다. 정신분열증자에게 의미는 불안정하며 분명하지 않다. 박해자(정신병자가 자신을 박해한다고 여기는 무엇)는 몸의 내부에 있거나 외부에 있을 수 있으며, 때로 신체감각의 통일성을 잃으며, 리비도는 몸에 집중된다. 반면 편집증자에게는 의미는 좀더 명확하며, 리비도는 박해자에게 집중된다. 즉 박해자는 편집증자에게 있어서는 항상 외부에 있다. 예를 들어 위에 논한 에른스트 바그너의 경우에 편집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주위 사람들과 자신이 죽인 뮐하우젠 마을 사람들이 자신을 박해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들 안에 있는 (자신을) 박해하는 잘못된 무엇인가를 제거하고 싶어했다. 반면 우울증자는 편집증자의 거울상이다. 우울증자의 경우 리비도는 자신의 이미지 안에 있다. 우울증자는 자신을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비하한다. 즉 편집증자에게는 잘못은 타자에게 있지만, 우울증자에게는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때로는 자신을 없어져야 할 존재로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이는 가장 간단하고 획일적으로 말한 것이며, 실제로는 사태는 훨씬 복잡하다. 우울증과 정신분열과 편집증의 차이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오랜시간 살펴보아야 하며, 이를 진단하는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아무튼 이렇게 정신병의 원인과 증상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은 각각의 경우에 맞게 올바르게 대응하기 위함이며, 정신병자와 주위 사람들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함이다. 즉 문제는 그들을 치료한다, 정상인으로 만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정신병 문제를 처음으로 다루었을 때 모든 스승들이 "정신병을 완전히 낫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릴 것"을 충고했다고 한다. 즉 저자가 긍정하는 예전의 정신의학 전통으로 돌아가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그가 태어난 바로 그 순간으로 돌아가지 않는 한 정신병이 없는 상태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정신분석들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즉 그를 '미치는 것'이 아니라, '미친 것'의 상태, 그러니까 정신병이 있기는 하지만 정상생활이 가능한, 거의 보통인과 구별할 수 없는 상태로 되돌리는 것은 가능하다. 그것의 방식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예를 들어 정신병자 스스로가 정신병을 다스리는 방법에서 힌트를 찾을 수도 있다. 정신병자는 자신의 정신병을 다스리기 위해서 몇 가지 기제를 쓰는데 대표적인 두 가지가 안정화와 창작이다. 안정화(동일시)는 예를 들어 자신을 어떤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신에게 이상적 이미지를 덧붙이는 것이다. 일례로 자신을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위대한 소설가라던가, 외로운 등반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창작은 어떤 상징적 질서나 새로운 체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신조어를 만들어내는 것이 대표적인 예인데, 정신병자는 어떤 특정 신조어를 창작해냄으로써 어떤 예외의 공간, 자신만이 도피할 수 있는 빈공간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흔히 정신병자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릴 때, 그를 '완전히 미쳤구나'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반대로 정신병자가 자신을 어떻게든 다스리려 하는 것, 정상생활이 가능한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생각하게 되는 것은 정신병의 문제는 실로 복잡하고, 수많은 사례와 수많은 분석을 통해서 접근해야 하며 그렇게 하더라도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아마도 그것이 대리언 리더가 원하는 것일 터이다. 이 책을 쓸 때 저자의 목적 중에 큰 하나는 정신병이 약이나 수술로서 처방이 가능하다는 현재 정신병을 다루는 주류적인 시각에 경종을 울리기 위함일 것이며, 환자 각각의 사례와 그의 정신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충고일 것이다. (물론 한편으로 중요한 것은 정신병을 이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정신병이 매우 복잡하고 다루기 어려운 것이라는 전대의 경험, 그러니까 대리언 리더가 칭송하는 이 예전의 경험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며, 이 정신분석들 역시도 어떤 위험을 여전히 내포한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책에서 두 번째 사례연구로 든 판케예프의 경우가 좋은 예일 것인데, 그가 정신분석가들의 어떤 분석이나 치료로서 좋아진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가 정신분석가의 동료로서의 위치를 점해서 좋아졌다는 이 사실 자체가 아이러니하게도 정신분석의 위험성을 또한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즉 정신병자에게 행해지는 정신분석의 경우, 그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에게 행해지는 정신분석'이라는 것 자체가 또 새로운 변수로 작용한다는 사실.) 다만 나와 같은 일반독자의 입장으로 보면 너무 논의가 깊숙하게 들어가는 부분이 있어 흥미진진하긴 하지만, 또 너무 어려워지는 경향도 있다. 일반서와 전문서의 경계에 서 있는 책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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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11-26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갑자기 생각이 났는데, 이 책에는 제임스 조이스의 정신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조이스는 일종의 '수신자'로서 그에게 들려오는 신호를 받았고(그러니까 환청을 들었고), 그는 정신병자가 이를 벗어나는 방법인 '수신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행위'로서 이를 벗어나려 했다고. 물론 그 다른 사람이란 우리 독자들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을 읽음으로써 그가 정신병을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언급된 <피네건의 경야> 같은 작품이 어떤 작품인지 궁금하군..

맥거핀 2012-11-26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억해 둘 만한 부분

우생학 계획이 도입한 차별 논리는 망상과 비슷한 것 같다. "우리"와 "그들"을 무척 엄격하게 구별하기 때문이다. 정신병적 사고에서도 이것이 때때로 나타난다. 여기서 세상은 단순한 이분법과 두 종류의 가치판단으로 나누어진다. 순수와 불결, 좋음과 나쁨, 흑과 백, 유죄와 무죄 등이 그것이다. 작가인 메리 라우든이 지적했듯이, "정신병에 대한 태도를 논할 때, 많은 사람이 타인이 어디에 속하는지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를 풀어야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지 결정되기 때문이다." (p.431)

2012-11-26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증 처방'이 문제가 있는 것은 몸의 치료에서만 그런 게 아니군요. (마음의 치료에서도 그렇군요.) 그리고 간편한 처치, 대응은 역시 또 문제.. 하지만 모든 인간이 그 인생을 송두리채 이해받을 만큼의 치료적 관심을 받기는 쉽지 않을 듯 해요. 예를 들어 헬렌 켈러에게는 결국 설리반이란 사람의 인생 하나가 다 필요했던 것인데, 모두 그런 기회를 얻을 순 없겠죠. 지도를 완전히 그리기 위해선 결국 그 지역과 같은 크기의 지도가 그려져야 한다는 말이 생각나네요.(보르헤스인가요? 저에게는 미지의 소설가.) 여튼 그런 치료는 불가능하더라도 저자의 말대로 올바른 관점에서의 최대한의 접근은 가능하겠군요. 이 책의 요지는 그것일텐데, 괜히 한 번 위와 같은 생각을 해 봤어요. 그냥..ㅋ / 여튼 읽고 많은 개념을 배웠네요. 정신병에 관해서..^^

맥거핀 2012-11-26 23:37   좋아요 0 | URL
지도를 완전히 그리기 위해선 결국 그 지역과 같은 크기의 지도가 그려져야 한다..이거 참 잘 들어맞는 비유네요. 실제로 책에 나온 사례들을 보면(예를 들어 위에 얘기한 판케예프) 한 사람을 상담하는 분량이 엄청나거든요. 하루에 몇 시간 씩 몇 년, 길게는 몇 십년을 상담을 합니다. (그런 면에서 프로이트와 라캉 등에게 모두 엄청난 상담을 받은 판케예프는 매우 운이 좋았던 케이스죠.)

근데 문제는 그러다보면 그 베낀 지도의 크기도 어마어마해질 뿐더러 그 원본지도가 변형이 되요. 즉 상담자의 어떤 태도, 말이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상담자와 맺는 어떤 관계가 이에 영향을 미치게 되더군요. 판케예프의 경우에는 다행히도 그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만, 반대로 부정적인 영향, 그러니까 예를 들어 환자가 상담사를 죽이려 든다거나 하는 일도 발생할 수 있는거죠.

아무튼 저는 정신병에 대해서는 푸코 식의 해석, 그러니까 사회규범을 반하는 행동이 정신병으로 규정된다는 식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책을 읽다보니 그런 규범과 별개로 '미친 것'으로 규정될 수 있는 상태가 있다는 저자의 의견에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었구요. 그와 더불어 한편으로는 저라는 사람의 광기에 대해, 혹시 조용한 광기가 나에게도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물론 자신이 그 구조를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만..)

책이 어려운 부분이 많아서 리뷰를 쓴다는 생각보다는 요약한다는 느낌으로 그저 정리해봤어요.

아이리시스 2012-11-27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언젠가에는 말이죠..저 광기를 부러워하기도 했었어요. 광기어린 표정으로 어떤 화가가 작품 하나를 뚝딱 그려낼 때, 작가가 미친듯이 글을 써내려갈 때, 밤새도록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헤맬 때. 그런 것도 광기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죠. 이 책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광기 같네요;; <피네건의 경야>는 대체 뭐길래 해석서가 발간될까요? 새로 완역본이 나왔던데 모처럼 욕심이 불끈!

어떤 심리학책을 보는데 거기 이런 말을 한 누군가가 있었어요. "지도는 땅이 아니다" 영향..그렇게 연결되기도 하네요.

네! 요즘 리뷰는 요약하는 느낌으로 쓰는 게 유행인 모양..^^

맥거핀 2012-11-27 23:47   좋아요 0 | URL
아무튼 저자에 의하면 조각을 만들거나, 음악을 작곡하거나 같은 창작활동은 정신병의 호전에 상당히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제임스 조이스가 정신병이라고 저자는 말하던데, 사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원래 조이스의 정신병이 유명한가요?) 간단하게 말하면 조이스가 메시지를 듣는 최종적인 수신자가 아니라, 그가 자신이 듣는 메시지를 건네는 일종의 매개자가 됨으로써 그가 정신병적인 구조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게 저자의 의견입니다만, 사실 전혀 모르니, 뭐 그렇다면 그런 줄 알고 있을 수 밖에요.

그러니 <피네건의 경야>가 뭔가 무시무시한 소설일 것 같기는 합니다. 그보다는 이번에 문학동네 전집 세일할 때 산 <더블린 사람들>이나 먼저 읽어야겠습니다.^^

마녀고양이 2012-11-27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신병의 경우, 약물을 무시할 수 없는게,
일단 상담을 통해서 치료를 하기 위해서 적어도 앉아 있거나 말을 통해야 하잖아요.
그 정도의 증상 완화가 약물이 병행되어야 가능하다는 점이 있고, 정신분석학의 이론은 정말 맞는거 같고 많은 증상이 설명되는거 같은데 증명이 안 된다는 점과 너무 오랫동안 치료를 해야 하는 점도 현실적 적용이 어려운 사항 같아요. 물론 약물로 원인을 고칠 수 없다는 점은 동의합니다.

아, 맥거핀님 페이퍼를 보니 또다시 생각이 많아지는게
머리가.... 흑.... 감기 몸살로 쉬는 중인데,, 책임지세요! ㅋㅋ.

맥거핀 2012-11-27 23:39   좋아요 0 | URL
네..맞는 말씀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저자는 약물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약에 대응하는 정신병만이 주목이 된다거나, 약은 궁극적으로 치료를 하지 못하고, 그를 멍하게, 둔하게 만들 뿐이라는 점 등등), 정신병에 있어서 약물의 필요성 역시 어느정도는 필요하다고 봅니다. 다만 저자가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현재에 약물에 의존하는 경향이 너무 심해졌다는 판단에 의한 것이겠죠. 말씀하신대로 결국 이 책을 읽어봐도 정신분석학 역시도 정신병을 완전히 치료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거든요. 부작용, 그러니까 정신병을 심화시키는 경우도 있구요. 물론 모든 환자를 그렇게 상담하는 것이 어렵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근데, 저도 감기 비슷한 증세로 계속 몸이 안 좋았거든요. 안좋은 상태에서 이해도 안되는 책을 읽고 쓴 글이니 이해해 주세요.^^ (아무튼 요즘에 감기 조심해야합니다.)

양철나무꾼 2012-11-27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렇게 어려운 도서가 신간평가단 도서란 말인가여~ㅠ.ㅠ

님이 예를 들어 잘 정리해주신 덕분에...감 잡았지만, 감히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맥거핀 2012-11-27 23:41   좋아요 0 | URL
저도 이런 기회나 되야 읽지, 아마도 평생 가야 들춰보지 않을 책 중에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근데 서평단 책이 두권인데요. 나머지 한 권은 '양자역학'에 대한 거거든요. 그 양자역학 책은 저도 추천한 거기 떄문에 할 말은 없지만, 나머지 한 권도 이런 책일 줄이야..OTL

2012-11-30 2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01 1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03 1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03 1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지그문트 바우만의 책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는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편지들을 열어보기 위해서 먼저 이 '유동하는 근대 세계'라는 것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이 '유동하는(liquid)' 근대 세계라는 것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끊임없이 액체가 흐르는 것처럼 유동하면서 변화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즉 이 세계의 모든 것은 매일매일 달라지고 있다. 미디어, 유행, 자본, 사조, 국가, 주권, 관계, 회사, 문화 등등 모든 것은 계속 변화하고, 동시에 그런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세계에 살고 있는 개인도 당연히 역시 같이 유동하게 된다. 즉 개인들은 변화하고, 변화할 수 밖에 없으며, 전혀 원치 않더라도 변화를 강요당한다. 예를 들어 요즘에 가장 각광받고 있는 말 중에 하나가 유연성(flexible)인데, 이는 유동하는 세계에 맞춰 자신을 유동시킬 수 있는 능력이며, 그것이 갖춰지지 않았을 경우 개인은 그 유동하는 세계 속에서 흐름에 떠밀려 가라앉는다(고 위협당한다). 이것은 정신적으로도 그렇고(생각의 유연성), 실제로 물리적으로도 그렇다(자본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이주시키는가). 막연한 얘기 같으니 직관적인 예를 들어보자. 최근 급격히 녹아들어가는 극 지방의 빙하들을 생각해보라. 예전에는 하나의 커다란 대륙이었던 극 지방의 빙하는 이제 여러 떠다니는 얼음 조각들의 집합체로 변모하고 있다. 즉 거대한 바다 위에서 수많은 얼음조각들은 말 그대로 유동한다. 그러므로 그곳에 살고 있던 북극곰들은 그 빙하들을 넘나드는 능력이라는 예전에 그리 필요하지 않았고, 유용하지도 않았던 능력들을 새롭게 갖추어야만 한다.

물론 이는 바우만이 지적하듯이 최근에 새롭게 재편된 세계이다. 예전의 세계에는 개인이 흘러다니지 않도록 하는 몇 가지의 보호막들(동시에 굴레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가부장이 지배하는 가정, 혹은 끈끈한 마을공동체, 혹은 안정적인 고용구조를 갖추는 있는 회사, 거대한 지배력을 갖추고 있는 국가, 신의 가호를 받는 종교공동체 등등. 그러나 최근에는 모든 것이 거의 해체되었고, 모든 권위와 그러므로 동시에 그 권위로 지속되던 모든 보호막은 거의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는 바우만의 표현대로 국가의 지배권력적으로 말하면 공위시대(한 국왕이 사망하고, 다음의 국왕이 즉위하기 전까지의 공백사태)이고, 종교적으로 말하면 '정치를 닮아가는 종교(동시에 종교를 닮아가는 정치)'이다. 즉 최근에는 종교인은 점점 정치적으로 변해가고, 정치인은 종종 이렇게 말하곤 한다. "일단 저를 믿으세요." 그것이 반복된다는 것은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의 불길한 초상이다. 그러므로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일단 믿으라는 이 시대에, 그리고 동시에 그러한 언술들이 잘 먹혀들어가는 이 시대에는 개인들은 무엇인가 붙잡으려 한다. 그러니까 북극곰이 떠다니는 해빙들에 어떻게든 매달려 있기 위해 꽉 붙들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떠밀려가지 않기 위해서 무엇인가에 필사적으로 매달린다는 것이다. 그것은 뭐 트위터일수도 있고, 페이스북일 수도 있고, 쇼핑일 수도 있고, 인스턴트 섹스일 수도 있으며. 유행에 대한 집착일 수도 있고, 물론 알라딘 서재일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것들에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그것은 점점 사람들을 각각의 벽 속의 한정된 구획 안으로 몰아넣고, 그 자신이 만든 틀 속에 갇혀있도록 만들며, 동시에 어떤 '사람들과의 관계'라는 것을 무너뜨린다는 점이다. 극명한 하나의 예(아마도 바우만이 우리나라에 와서 이 풍경을 본다면 이 책에 하나의 사례로 쓸 것이라 생각하는데)를 들어보자. 어떤 젊은 남녀가 커피숍에 마주보고 있다. 그러나 오랜시간 그들은 그저 서로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으며, 그들 사이의 대화는 트위터에 누가 이런 글을 올렸다느니, 카카오톡으로 누가 말을 걸었다느니 이런 것이 전부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서로 무엇인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것일까. 이것을 이런 방식으로 얘기할 수도 있다. 하나의 커다란 빙하가 아닌 현재와 같이 나뉘어진 유빙(流氷)들의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은 어떠한 것이 있을까. 구획된 질서라는 커다란 빙하 속에 존재하고 있을 때에는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하는 것이 존재증명의 한 방식이었지만, 현재 세계에서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자신의 역할을 아무리 잘 하더라도 그 매달려있는 세계가 떠밀려가버리면 끝이다. 그러므로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서 존재증명의 가장 유용한 방식은 나를 수없이 다른 나로 쪼개는 것이다. 나를 나뉘어진 모든 유빙들에 최대한 많이 쪼개서 보내는 것. 예를 들어 트위터 속의 나, 페이스북 속의 나, 혹은 파워블로거로서의 나, 쇼핑몰 VIP 고객으로서의 나 같은 것으로 말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그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벤치마킹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유동하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가장 유명하다는 사실이 알려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즉 다시 말해서 가장 자신을 많이 쪼갤 수 있는 사람이 그 세계에서는 가장 성공한 사람이기 때문이다(우리는 최근에 가장 잘나가는 연예인을 어떻게 선정하는가. 물론 그것은 TV에, 혹은 다른 어딘가에 가장 많이 얼굴을 비추는 사람이다. 가끔 TV에 틀면 나오는 연예인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사람들은 이 수없이 갈라진 자신을 어떻게 견뎌내지). 그러므로 우리들은 자신을 이들처럼 최대한 많이 쪼개고 싶어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 디스토피아에 44개의 편지를 띄운다. 그것은 달리 말해서 44개의 부표라든가, 구명보트라든가, 구명조끼, 혹은 우리들에게 보내는 동정을 가득담은 연서(戀書)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근대 세계의 근대인, 즉 우리들이 특별히 무엇인가를 엄청나게 잘못하였기 때문에 이 세계가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북극의 빙하들이 점차 부스러져 떠내려가게 된 것이 북극곰의 잘못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국가가, 자본이, 종교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살아왔으며, 우리는 그저 보통의 인간들로 보통의 삶을 영위해 왔을 뿐이다. 예를 들어 인간의 어떤 특정한 특성을 기준으로 분포도를 그려보면 그것은 대체로 가운데가 불룩한 '종'의 형태를 가진 가우스 곡선(정규분포곡선)이 되며, 우리들 대다수는 그 불룩한 가운데에 들어간다. 그런데 여기에서 바우만은 묻는다. 어쩌면 그 가운데가 불룩한 정규분포라는 것, 그 정상성의 범주에 우리들 대부분이 들어간다는 것이 혹시 문제는 아닐까. 책에도 나오지만, 이라크 포로수용소나 히틀러의 수용소에서 잔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거의 모든 사람들은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특별히 폭력적이거나 잔인한 사람들이 아니었으며, 가우스 곡선에서 가운데 불룩한 부분의 가장 높은 위치에 오를만한 아주 '정상'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웃에게 친절하고, 가족을 잘 돌보며, 주어진 일을 성심성의껏 해내는, 이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서 요구하는 최선의 인물(그러므로 아마도 상당히 유연한 그런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그문트 바우만이 요구하는 것은 도리어 그 이상성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성격을 가다듬는 것(여기서의 성격이란 '성격 좋다'고 할 때의 그 성격이라기 보다는 개성이나 결단성, 저항성 등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이며, 또는 반항한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유동하는 근대에서 요구하는 것들, 유연해질 것, 자신을 쪼갤 것, 무엇인가를 구매하고 소비할 것, 사이버 세계로 빠져들 것 등등의 수많은 유형의 무형의 규칙들에 대한 반항 말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유동하는 근대 세계는 그 세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싫어도 따라야 한다며 몇 가지 규칙을 내밀었고, 그 규칙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둘 빙하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에게 지그문트 바우만은 44개의 부표를 던져주며 말하고 있다. 지금은 새로운 규칙, 새로운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 생활방식)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그것은 어떤 방법으로 가능할까.

그것을 실천하는 하나의 방법은 어쩌면 '역설적으로 생각하기'일지도 모른다. 이 책에는 수많은 역설적인 통찰들이 있다. 몇 개의 편지들은 제목에서부터 이미 역설적인 것들을 요구하고 있고(예측할 수 없는 것을 예측하기, 계산할 수 없는 것을 계산하기. 예측할 수 없는 것을 예측하는 유일한 방법은 미래의 사건들을 우리가 바라는 것에 일치하게끔 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수많은 역설적인 통찰들이 이 책에는 가득하다. 역설적 사고가 필요한 이유는 이곳이 유동하는 근대이기 때문이다. 유동하는 근대에서 지금까지와 같은 모두스 비벤디는 점점 의미가 없어지며, 유동하는 근대에서 만들어지는 메시지들에 그대로 따르는 것은 우리의 유동을 도리어 더 강화시킬 뿐이다. 예를 들어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쇼핑하라!'는 메시지는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내부의 신호가 아니라, 새로운 수요를 그 메시지를 내보내는 자들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즉 그 메시지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우리는 결코 뒤떨어진 적이 없었고, 그것이 필요한 적이 없었다. 무엇인가를 따라잡기 위해서 새로운 것들을 배우라는 메시지는 어떨까. 이 유동하는 세계에서 그에 따른 가장 큰 문제점은 그 새로운 것들을 따라잡는 사이에 그보다 더 훨씬 새로운 것들이 몇 배는 더 만들어진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영원히 우리는 무엇인가를 배워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외에도 쏟아지는 수많은 메시지들을 뒤집어서 볼 필요가 있다.

물론 뒤집어서 볼 필요가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아마도 이 책의 제목일 것이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은 그러므로 단지 '고독을 되찾으라'는 것만은 아니다. 고독을 되찾는 것은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며, 필요한 경계를 긋는 것이다(경계는 동시에 접속 지점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바우만의 지적에 따르면 벽은 동시에 이곳이 통행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통행할 수 있는 지점이기 때문에 벽을 세우는 것이다). 이는 유동하는 근대 세계의 질서를 회복하고 타인과의 진정한 관계를 되살리는 첫 시작이다. 다른 말로 하면 수없이 쪼개진 자신을 다시 조용히 하나로 합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정상이라고 규정되는 범주를 벗어나는 일이며, 이 유동하는 근대는 우리가 정상 궤도에서 벗어나면, 그러니까 떠다니는 유빙들을 꽉 붙잡지 않으면 우리가 차가운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말 것이라고 끊임없이 경고한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도 있다. 우리가 그 유빙들을 아무리 꽉 붙잡아도 그 유빙들은 언젠가 녹아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사실이다(그리고 당연하게도 더 꽉 붙잡으면 붙잡을수록 녹는 속도는 더 빨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작은 유빙에서 더 큰 유빙으로 옮겨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유빙들을 결합시키는 것, 더 이상 각자가 외로운 섬으로 남아있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역시 역설적으로 사고해야만 한다. 우리가 유빙들을 결합시키기 위해서는 결국 그것을 어느 정도는 녹여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역설이 필요하다. 우리는 정상이 되기 위해 정상에서 벗어나야만 하며, 삶의 태도를 모방하기 위해서 특정의 양식을 모방하는 것을 거부해야만 하며, 안전해지기 위해서 안전한 울타리를 없애고, 고독해지지 않기 위해서 고독해져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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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10-26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쪼개기를 잘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많이 힘들지만, 불필요한 일을 복잡한 사회에 살기 때문에 해야 하긴 하지만, 예를들면, 그런 배우가 현명한 것 같고요. 그게 아니라면 그 유명세를 얼만큼 힘들게 치러야 하며, 또 세상에서 자기 보다 잘난 사람이 있다는 걸 유명배우가 어떻게 알겠어요. 그래서 어떤 '잘나가는'배우가 그런 걸 이미 알고있다는 듯 태연히 말을 하면 얼마나 기특해보이는지 모르겠어요. 포커페이스. 그 속이 어떤지와는 관련없이..

이 책이 편지글이었어요? 예전에 박범신 작가는 이 사회에 흑백 말고 회색지대를 허용하는 시선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자기 주장을 뚜렷이 해서 남에게 휩쓸리지 말라고 하는데 어느 장단에 춤을 추란거냐,하면서 저 좀 방방 뛰었거든요. 그런데 두 가지가 결국 같은 말이었더라고요. 그러고 저는 한동안 침묵..

고독해질래요. 주말 잘 보내세요, 꾸벅.

맥거핀 2012-10-27 23:23   좋아요 0 | URL
그런데 확실히 자신을 쪼개다보면 가끔 어리둥절해지기는 하거든요. 어디가, 어떤 부분에서의 내가 진짜 내 모습이지 하면서요. (왜 광고 중에 그런 거 있었죠. 직장에서의 친절한 모습과 집에서의 화내는 모습을 보여주며, 집에서도 친절하세요..하는 거. 저는 그걸 보면서 집에서마저도 저렇게 회사처럼 생글거려야하나..싶어서 뭔가 좀 아득해졌거든요.) 하기는 몇 명 안되는 회사에서의 모습을 만들어가는 것도 피곤한데, 온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미지를 잘 만들어서 보여줘야 하는 배우들은 얼마나 피곤하겠어요.

맞는 말이죠. 요즘에는 회색지대를 보여주는 게 도리어 꽤나 용감한 선택의 취급을 받는 시대가 되었어요. 요즘에는 대부분 흑백을 극명하게 보여주기를 원하죠. (그러니까 말씀하신게 결국은 같은 말이죠.)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는데..그러면 곧 넌 우리편이 아니야, 이런 취급을 받으니까. (근데 가끔 궁금하기는 해요. 양비론, 양시론은 거의 항상 쓰레기 취급을 받는데, 그런데, 진짜 둘 다 옳거나, 둘 다 틀릴 때는 어떻게 해야하죠?)

그래요. 주말만이라도 고독하게 보내야죠.

Shining 2012-10-27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랑 뷔페를 갔는데 옆 테이블 여자애 둘이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각자 핸드폰만 보면서 밥을 먹는 걸 본 적 있어요. 결코 가격이 싼 곳도 아니었는데 대체 왜 왔을까 궁금하더군요. 같은 집에 살면서도 실컷 대화(수다와 토론과 진지함이 섞인..)만 하다 왔는데 말이죠. 저흰 둘 다 스마트폰도 없고_- SNS도 게임도 하지 않는 것도 있지만요. 요새는 그게 일반적인 것 같더군요. 사랑에 풍덩 빠진 연애 초창기 남녀도 서로 손 잡고 눈만 바라보지는 않는 것 같습디다(말투가 왜 이래;).

각자 다른 장소, 다른 사람 앞에서 다른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건 그러니까 적절히 쪼개져있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만. 한편으론 현대인들은 참 외로움에 약하구나, 연약한 존재군, 싶습니다.

사람의 고독이란 필요선,이라고 여깁니다. 법정 스님말씀처럼 고독과 고립은 다른거니까요, 뭣보다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니까요.

맥거핀 2012-10-27 23:35   좋아요 0 | URL
요즘에는 그런 게 흔한 풍경이죠. 가끔 오후 시간에 패스트푸드점 같은 데를 가면 잔뜩 앉아있는 중고생들이 각자 열심히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더라구요. (예전처럼 수다를 하느라 정신없거나 하는 것은 훨씬 덜하죠. 물론 중고생들만 꼭 그런 것 같지도 않구요. 점심시간 회사구내식당은 또 어떻구요.)

근데 뭐 그런 휴대폰 중독자(?)만 뭐라 할 수 없는게 생각해보면 바우만의 말대로 대부분 현대인들은 뭐 한가지에 빠져있기는 하거든요. 동시에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하는 것은 흔한 일이구요.(저도 지금 알라딘 서재를 둘러보며, TV로 축구를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안하면 못 버티는 거죠. 물론 저도 그렇구요. 근데 문제는 점점 그런게 자기만으로 그치지 않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술 권하는 사회라고 했지만, 이제는 중독을 권하는 사회랄까. 조용히 고독을 즐기는 것을 요새는 주위에서 거의 가만 놔두지를 않아요. 가만히 있는 것을 죄악시하는 이상한 문화가 만들어지고 있죠.

암튼 제정신을 가지고 사는 게 점점 어려워지는 이상한 사회가 되고 있어요.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무엇이 제정신인지 점점 알수가 없어진다는 거죠.

아..근데 정말 보기드문 자매군요.(이번에 개봉한다는 모 영화가 살짝 연상이..)

Shining 2012-10-28 00:05   좋아요 0 | URL
수다 떠는 건 그거대로 비생산적일 때도 많고 시끄럽다고 생각했는데 요새는 같이 앉아서 핸드폰만 보는 아이들(또는 어른들)보면 왠지 씁쓸하더군요. 나이 든걸까요?

하긴, 주변에서 보면 대화를 하다보면 무슨 말이든 우선 검색하고 보더군요_- 전 검색을 못 하니 혼자 울그락불그락하며 기억해냅니다;;(지난번에 허우 샤오시엔이 갑자기 생각이 안 나서 머리카락이 다섯 개는 뽑혔어요) 고민도 하고 떠올리기도 해야는데, 말만 막히면 바로 네이버를 두드리는 친구 모습에 혀를 끌끌 차는 노인네스러운 모습을...

그렇군요. 제정신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사이가 좋아 보여서? 둘 다 비문명인이라?-_ㅠ 어느 쪽의 보기드뭄입니까ㅋ

덧) 젖은 밤에 듣는 유재하의 음악은, 최고군요. 언제든 그는 최고지만요.

맥거핀 2012-10-29 17:44   좋아요 0 | URL
댓글을 읽다가 보니 얼굴이 붉었다, 파래졌다가, 머리를 쥐어뜯다가 하는 모습을 상상해버렸습니다.ㅎ 그런 것과 꼭 관계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요즘에는 암튼 살짝이라도 잘못말하면 엄청 공격이 들어오더군요. 그래서 블로그에 글 하나 쓸때도 별 사소한 사항이라도 검색을 하게되요.(문제는 그러고도 늘 틀린다는 겁니다만...) 근데 사실 뭐 이게 무슨 외교협정문도 아니고, 몇 개 틀리면 어떻다고...

...원래 나이든 걸까요?라고 물어보는 게 나이들었다는 증거입니다.ㅋ

저도 요새 옛날 음악을 듣게 됩니다만, 그 중에 특히 들국화를 열심히 듣고 있어요. 물론 유재하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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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
하비 리벤스테인 지음, 김지향 옮김 / 지식트리(조선북스)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음식, 식품과 관련된 몇 가지 상식들이 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것들. 요구르트는 장에 좋은, 심지어는 수명을 늘리는 데에도 도움이 되는 식품이다, 가공식품에 들어간 첨가물들은 유해하며, 그러므로 적절한 규제가 필요하다(규제에 언급되지 않은 첨가물은 안전하다),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유기농으로 재배된 채소는 그렇지 않은 채소보다 좋다, 비타민은 우리 몸에 꼭 필요하며, 비타민이 많이 함유된 식품을 섭취해야 한다, 지방이나 콜레스테롤, 포화지방, 트랜스지방 등은 우리 몸에 유해하며, 따라서 섭취를 극도로 제한하여야 한다 등등. 이 책 <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는 이러한 식품에 대한 상식들이 어떻게 형성이 되어 왔는지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추적하고자 하며, 그 중의 상당수는 '어느 정도' 만들어진 상식일 수도 있음을 밝히는 책이다. '어느 정도'를 강조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주장은 곧 만만치 않은 벽들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구르트가 장에 별 도움이 안 된다는 말인가(어제 밤에 요구르트를 먹고 폭풍적으로 변비를 해결한 난 뭐지?), 비타민을 먹을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비타민을 까드시고 갑자기 왕성한 식욕을 보이며 늘 점심에 밥 두공기를 해치우는 우리 회사 김과장님은 뭐지?), 유기농으로 재배된 채소와 일반 채소는 별로 다를 것이 없다는 건가(유기농 마니아로 유기농 채소가 암을 낫게 해주었다는 옆 503호 아줌마는 그럼 뭐지?) 등등.

 

물론 오해는 마시라.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위의 상식들은 모두 과장된 것이며, 그것은 모두 거짓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 하비 리벤스테인은 역사학자로서 이러한 주장들이 처음 어떤 식으로 생겨났고, 무엇으로 인해 강화되거나 버려졌으며, 현재는 어떤 위치에 와 있는지 여러 사례와 일화들을 통해 추적해 나가고 있다. 즉 이 주장들의 상당수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며, 앞으로 어떤 식으로든 새로운 연구결과들이 발표될 여지가 있다. 예를 들어 지방과 콜레스테롤의 경우만 하더라도, 처음 주목을 받았던 것은 포화지방과 콜레스테롤이었지만, 콜레스테롤의 경우 고밀도 지단백(HDL) 콜레스테롤과 저밀도 지단백(LDL) 콜레스테롤을 구분하여 봐야한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고, 또 포화지방보다는 최근 트랜스지방의 존재가 새롭게 알려지면서 건강을 해치는 주범의 지위를 트랜스지방이 새롭게 물려받게 되었다. 즉 이 책에서 실질적으로 보고자 하는 것은 어떠한 주장이 거짓인가, 사실인가, 어떠한 식품이 몸에 좋고 나쁜가가 아니라, 식품에 관련한 어떠한 주장이 받아들여지고, 그것이 일종의 상식으로 굳어지기까지 개입되는 것들이 무엇인지, 그것에 거대자본들과 학자들과 여러 이해관계자들은 어떤식으로 결합하게 되는지, 그래서 결국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소비자의 주머니를 열게 하는지에 대한 경과들이다.

 

그 경과들에는 우리가 보다 예상하기 쉬운 것과 보다 복잡한 메커니즘으로 이루어진 것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메치니코프의 장에 대한 혁신적인 주장과 불가리아 목동들이 주로 마시던 요구르트에서 그 해법을 찾는 과정이 대형 식품회사들에게 어떠한 환호성을 올리게 해주었는지를 보는 것이 보다 쉬운 예라면, 식품에 대한 특정의 첨가물을 규제하는 것이 식품 회사들과 어떤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인지 그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보다 복잡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식품에 대한 특정(화학)첨가물을 규제하는 것은 식품회사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을 것 같지만, 실제로 식품회사들은 이러한 첨가물에 대한 규제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을 꾀했고, 실제로 이런 첨가물에 대한 규제는 특정회사의 제품이 유리해질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였다. 예를 들어 케첩 생산에 있어서 벤조산나트륨에 대한 규제는 벤조산나트륨 없이도 케첩의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하인즈와 같은 업체에게는 득이 되었지만, 아직 그러한 기술력을 갖추지 못한 경쟁업체들에게는 독으로 작용했고, 동시에 첨가물이 들어간 경우라고 해도, 기준치를 적용함으로서 기준치 이내에서 첨가물을 사용한 제품은 마치 정부의 공인을 얻은 것과 같은 효과를 가지도록 해주었다. 또한 식품회사와 같은 거대자본만이 이러한 이해 메커니즘에서 이득을 보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AHA(미국 심장 협회)의 경우 자신들의 영향력을 높이고, 조직의 세를 키우기 위한 방편의 일환으로 심장병에 대해 위협이 되는 식이지방의 위험성에 대해 관심을 높이는 방법을 택했고, 이는 식이 지방, 식이 콜레스테롤에 대한 과도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도록 했다. (이것이 콜레스테롤의 비중이 낮다고 광고하는 수많은 식품들의 판매에 득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사실 이러한 것들의 대부분은 현재진행형이다. 과연 포화지방이 몸에 좋지 않은 것인가, 혹은 트랜스지방이 그야말로 모든 성인병의 적인가, 비타민의 효과가 실제로 미미한 것인가 등등의 식품의 안전성, 유해성에 대한 논쟁의 측면에서도 그러하지만, 보다 넓게는 이러한 공포를 이용한 마케팅, 혹은 이와 관련하여 파생되는 여러 사회적인 문제에서도 그렇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도 예외가 아닌데, 예를 들어 요즘 방송에서 새로운 금맥으로 각광받고 있는 소비자고발 류의 프로그램들에서도 그렇다. 특히 종편 등에서 요즘 킬러 콘텐츠로 급부상하고 있는 것이 이러한 음식점 고발, 소비자 고발 류의 프로그램들인데,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소비자에게 보다 정확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목적하에 음식점들, 혹은 특정 식품들의 점검에 나선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특정의 제품들, 특정의 음식들을 잘못된 먹거리로 소개하기도 하고, 이에 더 나아가 특정 식당, 특정 제품들을 거의 반홍보하기도 한다(예를 들어 '착한 식당'이라고 이름을 달아주며 말이다. 이 식당들은 이 프로그램이야말로 '착해서' 미칠 지경일 것이다). 물론 이는 저자가 논했듯이 최근의 현상만은 아니다. 계속 새로운 이슈들은 출현하고 있으며, 우리는 새로운 이슈가 출현할 때마다 특정 식품을 먹지 않거나, 혹은 광적으로 먹는다. 그 누구도 자신의 건강이 망가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음식의 경우에 있어서 이러한 공포 마케팅이 잘 먹혀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누구나 자신의 건강을 도외시할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 외에도, 아마 두 가지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는 저자의 논의대로 음식의 생산과 유통 과정이 점차 거대화되고 산업화되면서 그 음식을 섭취하게 되는 사람들과 이 과정들이 분리되는 것에 이유가 있을 것이다. 즉 먹을 거리를 자신의 주위에서 찾아야만 했던 과거, 혹은 자신이 재배한 작물들만 섭취해야 했던 과거에 비해, 현재는 수많은 음식들이 만들어진 완제품의 형태로 소비자에게 배달되고, 거의 모든 소비자들은 그 제품이 어떤 식으로 재배되고, 유통되고, 무엇이 첨가되고, 무엇이 제거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간에 가지고 있지 않던 식품에 대한 공포가 새롭게 고개를 들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음식의 맛이나, 혹은 단지 배를 채우기 위한 목적으로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을 유지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식사를 한다는 개념이 점차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즉 요즘 사람들은 그저 배를 채울 것이 있음을 감사했던 과거와 달리 먹을 것이 건강에 심각하게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며, 건강을 유지시키기 위한 여러가지 조건으로 음식을 대한다. 즉 맛있고 싼 음식보다는 몸에 좋은 음식, 일일 권장량, 칼로리 따위가 더 큰 문제가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건강에 대한 판단 권한은 아직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즉 건강에 대한 담론, 몸에 좋은 음식을 판정하는 기준은 아직도 소위 '전문가'들의 손에 놓여져 있고 앞으로도 그들 손에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의학적 발견이니 성분의 분석이니 하는 것은 일반인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고, 그러한 담론의 개발과 유통은 항상 ('내'가 아닌) 전문가의 손에 놓여져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사, 영양학 전문가들의 한마디가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여담으로 한 마디 더 하자면, 이것은 다른 상당수의 분야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교육학 같은 분야를 보면, 여러 교육 분야에서 새로운 개념들을 어떤 식으로 팔아먹는가를 보면 이 책과 거의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특히 아동교육 분야에서 이러한 산업은 번창하고 있는데, 감성지능(EQ), 다중지능, 몰입, 피아제, 몬테소리의 뭐니 하는 것은 그 효용과 별개로 여전히 잘 팔리는 상품이다.)

 

그러므로 사실 맥이 빠지는 것은 이 마지막이다. 우리는 이런 이유들을 사실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콜레스테롤의 어떠한 부분이 정말 유해한지를 밝혀내고, 비타민이 실제로 우리 몸에 큰 효과를 미치는지 스스로 밝혀낼 수 있으면야 좋겠지만, 그건 우리 몫이 아니다. 집앞에 커다란 밭을 만들어 거기에서 나오는 음식들만 섭취하는 것은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더구나, 그 밭을 어떤 식으로 경작할 것인가의 문제 역시 여러 '전문가'들의 조언을 참고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거기서 어떤 영양소가 파괴될지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마지막에 내놓고 있는 조언, 즉 식품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 발표될 때 '누가 이익을 얻을지' 곰곰이 생각해 보라,라든가, 혹은 다양한 음식을 먹되 과식하지는 말고, 과일과 채소를 많이 섭취하라, 모든 음식은 '적당히' 먹어라 등의 이야기를 보면 '이러한 당연한 얘기 할려고 지금까지 이 긴 얘기하셨쎄요?'라고 묻고 싶지만, 뭐 어쩔 수 없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찌 되었건 우리는 무엇인가를, 그것도 뒤에 식품첨가물의 목록이 잔뜩 나와있는 가공식품 같은 것을 조금이라도 먹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만, 두 배 더 비싼 유기농 식품 코너를 기웃거리거나, 비타민 정제 같은 것은 안 살 것 같기도 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생각해보면 비타민 정제를 먹으며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오줌줄기의 색깔 외에는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재미있게 읽었다. 어떤 신화의 기원에서부터 그것의 발전 과정을 역사적으로 추적해 나가는 방식은 흥미로웠고, 그것의 쇠퇴를 보는 과정도 꽤나 재미있었다. 또한 그것은 현재의 어떤 음식이나 건강 문제를 둘러싼 신화들이 어떻게 만들어져 가고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생명 연장의 꿈을 꾸었고, 140세까지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71세에 사망함으로써 그 자신이 몸소 반증을 보여준 메치니코프 박사에게는 명복을 빌어 드릴 뿐이다. (광고 속 사진은 거의 100세 넘은 산신령처럼 보였는데...)

 

 

덧.

아..하나 덧붙이자면, 저자의 문제인지, 번역의 문제인지, 편집의 문제인지 모르겠으나, 이 책에서 'O157균'을 '0157균'이라고 표기하고 있어서 자꾸 걸렸다. 여기서의 O(알파벳 오)는 균체항원(O항원)을 말한다(고 백과사전에서 말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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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10-22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변비폭풍해결이랑 비타민까드시고 밥두그릇과장님 읽다가 뒷걸음질친 끝에 머그잔 커피 쏟을 뻔(!) 했어요. 홀랑 차버렸어요-_- 저기까지 날아갔는데, 쏟았으면 맥거핀님 욕하면서 치웠을 거예요ㅎㅎㅎ

음식은 어쨌거나 좋아하는 걸 좋은 마음으로 먹으면 큰병은 안걸리는 거라고 믿고 싶은데, 저는 술담배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경험반 생각반. 근데 그것보다 더 안 좋은 게 스트레스.. 저는 오히려 많은 부분에서 둔한 편이라 그냥 맘편히 살아요. 적당한 게 좋은 거죠, 적당한 게.

오늘 저녁 메뉴는 뭡니까?(이런 리뷰에 이런 댓글..이라 미안합니다..)

맥거핀 2012-10-23 14:04   좋아요 0 | URL
어제 저녁 뭘 먹었더라...나물 잔뜩 들어간 비빔밥을 먹었습니다. 채소가 몸에 좋으니까 먹자 그런건 아니고, 마땅히 땡기는게 없어서..말씀드렸듯이 저는 애기입맛이라 나물류는 별로 좋아하지를 않아요.

요즘에 보면 먹는 것의 문제가 정말 자주 화제의 중심에 오르는 것 같아요. 방송에서도 먹는 것 관련한 것을 정말 많이 하구요. 근데 그런게 너무 많다보니 요새는 뭐 어떻다 그래도 대강 그러려니 합니다. (좀 다른 얘기지만 가끔 그런 맛집 관련한 프로그램 보면서 밥을 먹고 있으면 이게 바로 현대판 자린고비구나..이런 생각이 들어요.) 아무튼 늘 사실 없어서 못먹죠. 있으면 대체로 따지지 않고 잘 먹습니다.^^

Shining 2012-10-22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문! 맥거핀님은 책 내용을 쓰실 때, 이해하고 기억하고 쓰시는겁니까? 설마설마..
페이지 기억해뒀다 옮기는거 맞죠? 제발제발..

마치 책내용을 몽땅 기억했다가 이런 내용도 있었지, 싶은 이 여유로운 글쓰기는 뭐죠_- (이런 리뷰에 애먼 시비..라 죄송합니다..)

맥거핀 2012-10-23 14:12   좋아요 0 | URL
어제 저녁에 뭐 먹었는지도 가물거리는데, 그럴리가요. 뭐 대체로 그렇듯이 자기가 듣고 싶은 얘기는 더 기억이 잘 나는 것 같아요. 소설이나 영화는 이야기의 흐름을 기억하기 때문에 디테일을 살리는데 별 문제가 없지만, 이런 책은 사실 뭐 기억이 토막토막 나죠. 별로 아니다 싶은 부분은 기억에서 자체적으로 소거합니다. (뭐 그러니 리뷰를 쓸 때는 책을 참고할 밖에요.)^^

뭐 근데 Shining님도 그러겠지만, 뭔가를 쓸 때는 책을 덮고 다시 책을 안 편 상태에서 휘리릭 나오는 리뷰가 훨씬 더 좋은 리뷰가 되는 것 같아요. 그게 뭐였더라..하면서 기억을 짜내는(그래서 결국 다시 책을 찾아보는) 리뷰는 대체로 엉망이죠.

감은빛 2012-10-24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만 보았다면 절대 관심갖지 않았을텐데,
맥거핀님의 글을 보니 관심이 갑니다.
다만 맥거핀님이 언급하셨듯이,
굳이 읽지 않아도 될 책이다 싶은 생각도 드네요.
게다가 출판사가 왠지 맘에 들지 않아서요.

맥거핀 2012-10-25 21:14   좋아요 0 | URL
아마 저도 서평단 도서가 아니었으면 읽지 않았을 겁니다. (출판사도 저도 좀 그렇고요. 저도 무의식적으로 몇 개 피하는 출판사가 있죠.^^;)

마지막 결론이 좀 맥빠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중간에 꽤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들이 많아요. 현재 우리나라의 식품, 음식에 대한 담론들은 어떤 식으로 형성되고 있나를 생각해보면 재미있기도 하구요. (예를 들어, 주로 공격받는 식품들의 상당수에 대기업 제품들은 종종 제외되기도 하구요. 식품, 의학 등의 분야에서 종편 방송 같은 것을 보면 예능 같기도 하고, 홍보 같기도 하고, 교양 같기도 한 모호한 프로그램을 방송하고 있죠. 그런 의미에서도 이 책의 출판사는 좀 난센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