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이란 말의 용례를 보면 분명 그 크기를 가지고 있다.
사랑을 키워가는, 사랑을 나누면, 너무나 사랑하여, 커져가는 사랑, 큰사랑 작은사랑...
그런데 그를 사랑한다고 할때의 사랑은 어떤 크기일까?
과연 어느 정도 수준이 되어야만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까?
쬐끔 사랑하지만, 열정적으로 사랑, 한 목숨 다 바쳐 사랑, 사랑하기는 하는거야...
사랑한다 함으로서 이미 선은 넘어 간 것이다.
크기와 무관하게 사랑은 사랑인 것이다.
무지무지 사랑한다의 반대말은 조금만 사랑한다 가 아니고 사랑하지 않는다 이다.
사랑은 디지틀적이다
사랑하거나 혹은 말거나
그에게 얼마나 사랑하느냐고 물어 볼 수 없다
그에게 얼마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러나 사실은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종종 영어식 좋아한다의 비교급으로서 이해 하기도 한다.
겁나 좋아한다, 욜나 좋아한다, 짱 좋다, 조아가이빠이데스다(귀국한 애들이 전부 이 말을 쓴다. 대체 미국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사랑은 형이상학적 추상체다
절대 정의되지 않으며 가르칠 수 없으며 배워서 아는것이 아니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과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같은 것이라 절대 단정 할 수 없다
그리고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과 같아야만 하는가?
내가 그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그도 나를 사랑함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리고 반드시 있는 사랑에 대한 인식차가 과연 사랑의 계량적 차이라 할 수 있는가?
그가 날 사랑한다고 말한다고 해서,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게 사랑의 유무를 의미하는가?
그가 사랑을 증명한다고 해서 그게 사랑의 존재성 입증인가?
그렇지 않음을 다들 알고 있다.
알고 있으면서도 "날 사랑한다면 머머 해야 된다" 식의 클래식 포맷의 인질극을 벌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도 다들 알고 있다.
알기 때문에 그가 그렇게 되더라도 나는 그를 탓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를 사랑한다.
그는 나를 사랑한다.
그러나 사랑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서로의 행동에서 서로의 인식으로 전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