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의 마법 - 네 번째 이야기 벽장 속의 도서관 5
피트 존슨 지음, 곽정아 엮음 / 가람어린이 / 201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뱀파이어라는 자신의 숙명을 고민하는 이들과 그런 이들을 계속 뱀파이어 일족으로 묶어두려는 사악한 뱀파이어들과의 전쟁은  우리를 즐겁게(?)  합니다. 재미있게 보다가도 주변에 그런 일이, 아마도 피를 찾아 헤매는 그런 이를 만나게 되면 이렇게 태평할 수는 없겠지 하는 상상만으로도 올라오던 땀이 쓱 사라지는 것이 책이나 영화에서만 만나는 무시무시한 종족들과의 만남은 늘 환영입니다. 아마 아이들도 마음이  비슷한지 오랫만에 만나는 마르크스를 아직도 기억하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뱀파이어 블로그", "뱀파이어 사냥꾼", "뱀파이어 전사" 에서   13살 생일을 앞두고 뭔가 달라지는 자기 몸의 변화가 반- 뱀파이어라는 자신 집안의 비밀이라는 사실에 놀라게 된 마르크스는  친구들에게 용케도 자신의 비밀을 감추고 일반적인 생활을 해나가려 합니다. 그러나 그런  마르크스의 마음도 몰라주고 인간을 정복하려는 뱀파이어들은 자꾸만 마르크스 집안 주위를 맴돌고 싸움을 걸게 됩니다. 그럴때 싸우게 되면 늘 탈룰라가 같이 하게 되는데요. 이번 "뱀파이어 의 마법"에서는 마르크스가 음모로 기억을 잃은 이야기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여기에 탈룰라를 "다른 사람이 꿈도 못 꾸는 힘"으로 유혹하는 사라졌던 뱀파이어 할머니 엘사의 등장, 그리고 뱀파이어와 마법이라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마르크스와 탈룰라의 이야기가 어디까지 진행되갈지 궁금함을 더하게 합니다. 밤에 누군가를 불러내는 울음소리, 그리고 공격하는 박쥐와 유령에서 뱀파이어로의 변신이라는 설정이 있음에도  무섭지 않게 느껴지는 건, 더 이상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고민하고 용기를 내는 마르크스와 탈룰라, 그리고 잠깐씩 등장하는 그레이시의 활약때문입니다.


마르크스,그레이시뿐 아니라 탈룰라 역시 비밀의 힘이 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앞으로 뱀파이어가  계속 나타나더라도 그들이 뱀파이어 공격을 막는 전사로서의 멋진 성장을 할것이라는 기대가 되기에 안심이 됩니다.  물론 중요한 순간에 힘을 잃거나 준비한대로  되가지 않는 그들의 이야기가 그렇기에  아슬아슬함을 더해줄것이고요.  마르크스가  14,15살 이렇게 나이가 들어가면서 또 다른 판타지 이야기가 탄생되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으로  다음편에서는 어떤 업그레이드 된 모습을 보여줄지 아이들만큼이나 저 역시 기대해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술품 잔혹사 - 도난과 추적, 회수, 그리고 끝내 사라진 그림들
샌디 네언 지음, 최규은 옮김 / 미래의창 / 2014년 6월
평점 :
품절


 영화나 추리소설을 보다보면 누군가의 그림이나 조각을 다른 것으로 바꿔놓거나 혹은 다른 장소에 숨겨놓은 걸 찾아내는 탐정들의 활약을 보게 됩니다. 그 때는 어차피 남의 일이려니,  임파서블한 미션을 하기 위해 미술관이나 그 미술품을 소유한 이의 집으로 들어서는 도둑님에게 "부디 성공을!!"이란 기도를 같이 해주곤 했는데, 실제 상황에서도 이런 일들이 자주 일어나는 일이고 그 미술품을 찾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중이라는 말에 괜히 뜨끔해지게 됩니다.


테이트 미술관에서 일하기도 하는 저자는 주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의 작품이 독일에서 전시준비를 하던 중에 사라진  이야기를 꺼내는데요. 시가 200만 파운드(약 400억원)라는  "그늘과 어둠 : 대홍수날 저녁"과 "빛과 색채 : 대홍수 후의 아침, 창세기를 쓰고 있는 모세"라는 이름의 이 두 작품을  찾기 위한 경찰과 미술관, 그리고 돈을 바라는 이들의 제보라는 이름의 전화로 언제, 어떻게, 그리고 괜찮은 상태로 작품이 돌어올건지의  줄다리기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예상보다 많은 제보가 있었음데도 거의 10년이란 세월이 지나서  찾게 되었는데, 어떤 작품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는 것들도 꽤 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영화에서 보듯이 깜깜한 밤 한 줄기 라이트 불빛에 의지해 아슬아슬하게 자신들이 원하는 작품을 가져가는 도둑도 있지만 아예 대놓고 총으로 사람들을 위협하고 가져가거나 아니면 경보가 울리던 말던 유리창을 깨고 사다리로 올라가 가져가는 경우도 있다하니, 낮에 많은 이들에게 개방하다보면 아무래도 나만 아는 장소에 숨겨놓은 그 무엇이나 암호로 둘러싸인 은행 금고를 턴다던지 하는 것보다   훔칠 계획을 세우기가 쉬운 건  사실인가 봅니다.  


아직까지 누가, 왜 가져갔는지 드러나지 않은 작품들도 많지만 돌아온 작품들은 또 자신들의 몸값을 불려오기도 한다고 합니다. 터너의 작품같은 경우도 1994년 도난당시 2400만 파운드였는데 2002년 회수 무렵에는 최소 3600만 파운드였다는 사실만 봐도 알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주목을 끌게되면서 그 그림이 있던 빈 자리가 더 빛을 발하게 되고 그 눈길이 쏟아지는만큼 금액도 올라간다는 거죠. 복사본이 도는 유명 그림을 볼 때면 이렇게 보면 되지, 꼭 먼 곳에 있는 소장가의 집이나 미술관까지 가야하나 싶었는데 복사본이 많아질수록 원본의 그림값도 올라가는 거라 하니, 그림보는 눈이 없는 나라서 오히려 다행이구나 싶어지기도 합니다. 그림보는 눈이 있었더라면  집에 꼭 모셔두고 보고 싶은게 생길 수도 있고  그러다보면 살 수 있는  그 엄청난 돈이 없는고로 마음이 아파 앓아누웠을지도 모르고 혹여 집에 모셔두게 되는 행운이 있더라도 우리 집을 기웃거리는 뤼팡같은 도둑들의 시선에 창문 한번 열고 살지 못했을테니까요.


 우리의 예상과 달리 돈만을 노리고 도둑질을 해가는 건 아니라고 합니다. 브라이트비저라는 이는 6년동안 232점을 훔쳤는데 그의 동기는 탐욕이라고 합니다.  환한 대낮에 관람 시간을 이용해, 침입 따위는 하지 않았다는 말과 함께 자신은 그 작품들의 노예일뿐이라는 변명을 했다는데요. 그의 변호사 역시 그를 가장 순수한 열정을 지닌 이라는 변호를 했다는데  그 이야기를 듣다보면   각 나라마다 전쟁이나 식민지라는 세월로 인해 잃어버린 후 지금도 딴 나라 박물관에 가 있는   여러 유물들이나 작품들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 당시는 가져갈 이유도 힘도 있고, 또 그 작품을 생각하는 순수한 열정도 있었겠지만 지금쯤은   박물관에서도 범인들에 대한 신경만 쓸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물건들에 대한 정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야하는 건 아닌지 말입니다.


 미술작품 중 시가 10만 달러 이상의 작품이나 제작한지 100년 이상 됐으며 5000달러 이상 나가는 작품의 절도는 연방법상으로 조사를 받게 만들어 놨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앞으로도 "가격을 매길수 없을 만한 작품"이란 작품은  어마어마한  가격 혹은 진짜  그 작품을 사랑하는 많은 이들에 의해 언제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는 운명을 지니고 있는데요.  아직 못 찾은 작품이 있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도 물론 크지만  앞으로도 이런 일들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거라는 게   진짜 '미술품 잔혹사' 가 아닌가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느리게 사는 것의 의미 - 지친 영혼을 위한 여유로운 삶
피에르 쌍소 지음, 강주헌 옮김 / 공명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요즘의 우리를 대표하는 건 빠름과 많음  아닐까 싶다. 모든 게 기준을 정해놓은 시합이라도 되는 듯   뭐든지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보다 빠르고  많아야 하고, 그것이  잘하는 것이고 좋은 것이라는 생각은 어느 새 남들보다 느린 건 잘못되고 나쁜 것이기에  버려야 할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인지 뉴스에서 늘상 등장하는  통계치는 그대로 따라가야 할 기준이 되어  내 나이대  월급은 보통 얼마라는데 나는 그 정도 받고 있는지,  휴가는 언제부터 언제까지라는 데 나도 그 때 잡아야 하는 건 아닌지, 그리고 올해 유행은 이것과 저것이라는데 나는 갖고 있는지에서 심지어는 평균 수명까지 그대로 따라야 하는 느낌으로   세상 기준에 따라 나를 남들과 묶어버렸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기준에 맞춰 열심히 따라가면서도 내 안의 뭔가가 사라지는 느낌을 받을때가 있다. '나만의 것', '나만의 시간'이라는 나의 특별함 대신에 들어온 우리의 것이 나를 힘들게 한다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 나를 찾아야할지 모르겠다는 이들을 위해 저자 피에르 쌍소는 한가로이 걸으며 나만의 시간을 가질 것, 기다림에 지치지 말 것, 다른 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 등 느리게 사는 법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그 중에서도 '듣기'에 나오는 타인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일정 시간의 '뜸들임'이라는 이야기가 마음에 많이 와닿았다.  예전에는 소수의 사람들이긴 했지만 나 자신에 대해, 그들에 대한 깊은 이야기로 우리들을 돌아볼 시간을 가지곤 했는데 지금은   전화, 편지,SNS등으로 많은 사람들을  한번에 자주 만나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도  순간 지나가는 이야기들이 많아  서로뿐 아니라 나를 돌아보는 시간도  가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게 얕은 관계만으로 지내다보니   빨라졌다는 핑계로 사라진  뜸들임이  내가 타인을 대할때뿐 아니라 내가 나를 대하는 데도 없어져가고  있어 금방 내가 나에게 지치고 힘들었던 건 아닌가 싶다.

 

우린  좋은 세상이고 누려야 한다고 하면서 정작 자신을 맘대로 하는 속도를 선택하는데는  주저할때가 많다. 이제 '느림'은 성격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라는 것을 알고 이제 천천히 나만의 방법으로 즐기는 걸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것들을   못보는 빠름보다는 헛된 계획에 힘을 쏟지 않고 나라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선택된 느림으로  나의 여유를 찾아가는 것이   행복을 찾는 제일 쉽고도 먼저 해야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 비포 유 미 비포 유 (살림)
조조 모예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은 어디에서 시작되는 걸까?

라는 궁금증은 아직도 풀리지 않는다. 매일 보는 데도 이성으로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디선가 한 번 만났을뿐인데 절대 지워지지 않는 사람이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그래서 사랑은 시작하는게 아니라 시작되는거라는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카페에서 일하는 걸 사랑하던 클라크는 하루 아침에 해고를 통고받고 절망에 빠지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워지고 있는 집안 살림에 그녀까지 짐을 더하게 된 것이다. 이런 저런 직장을 고를 상황이 아니던 그녀는 6개월이라는 기한을 정한 사지마비 환자 간병인을 맡게 되고 까칠한 환자 윌을 만나게 된다.  윌이 불편하면서도  형편때문에  그만둘 수도 없는 클라크는 6개월만 참기로 하면서 윌과 티격태격하게 되고 알게 모르게 정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간병이란 일이 그리고 윌이란 사람이 막연히 두렵기만 하던 그녀는 윌과  일상을 같이 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예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평범하다는 사람들의 힐끗거리는 시선이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얼마나 참기 힘든건지, 그리고 우리가 일상으로 다니는 공간이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이들에게 얼마나 불편한지를 알게 되면서 분노하게 되고,   사고전에 보통 사람들보다 활발하게 살았던 윌이 수시때때로 찾아오는 고통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아파하게 된다. 아마 클라크의 사랑은 이렇게 시작된건지도 모른다.  그러던 중  왜 자신에게 6개월이라는 시간이 주어졌는지를 알게 된 클라크는 윌의 계획을 막기위해 모든 일을 하기로 한다.

 

"클라크, 좀 삶을 살아봐요. 대체 발목 잡는 게 뭐가 있다고 이래요?"

클라크가 세상속으로 윌을 데리고 나갔다고 즐거워한 계획은 사실 그녀가 다른 세상의 즐거움을 느껴보길 원한 윌의 그녀만을 위한 선물이였다는 것으로 드러나면서  그들은 서로에 대한 마음을 알게되지만 그럼에도 윌의 계획은 바뀌지 않게 되고 클라크는 슬퍼하게 된다.

 

죽음이 다가오는 윌을 사랑하기때문에  예정된 아픔과 이별이란 슬픔외에도  이 이야기에는 선택에 관한 이야기도 들어있다. 막연히 생각하던 죽음이 곧이라는 느낌으로 사랑하는 이에게 다가오고 있다면 당신은 그를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선택말이다.  매일이 고통이지만 언젠가는 그렇지 않게 아침을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리며 그 날 그 날의 고통을 참아야 하는 건지  아니면 내 의지대로 할 수 없는 남은 날이라면 의미가 없기에  스스로 줄이겠다는 환자 본인의 의지를 따라야 하는 것인지 말이다. 윌은 자신의 삶이기에 선택했다는 말로 부모님, 그리고 클라크의 선택까지 몰아가지만 막상 실행은 어떤 쪽이 되었든 그들의 도움이 필요한지라   그들은 어느 쪽을 선택하게 될지, 나였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으로 복잡해지게 된다.

 

"그냥 잘 살아요.

그냥 살아요."

 윌의 애정어린 편지는,  클라크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선물이 되어 준다.  당신이 한 선택으로 삶의 방향은 조금씩 달라지고   알지 못하는 미래에 누구나  두려움을 가지게 되지만, 그것이 인생의 재미고 진짜 사는 거라는 걸  알려준  윌은   진짜 사랑이 뭔지도  알려준다.

 

사랑이 다가오는 횟수만큼 이별도 하게 된다. 하지만 흔해지고 빨라졌다는 말을 듣는  요즘  우리의 사랑은 사랑보다 이별의 횟수가 많을지도 모른다.  상대가 헤어지자고 하기전에 내가 먼저 이별을 말한다는 우리이기에 진짜 사랑의 기쁨과 아픔을 느끼기 전부터 어쩌면 이별을 당하기 싫다는  이유로  이별을 가슴에 품고 있어야 하니  말이다.  윌과 클라크는 끝을 보고 시작했어도 끝나지 않은 사랑으로  '사랑'은 시작되지만 사랑의 끝은 이별이 아니라  사랑하던 그대가  잘 살았음 하고 바라는 마음이라는 것으로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사랑, 그 찬란하지만 아픈 이름을 생각해보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침묵의 거리에서 2
오쿠다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민음사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한 아이의 죽음으로 학교가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이 아이의 죽음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 조사하게 된 경찰과 교사들은 그 아이가 왕따였다는 걸 알게되면서  죽음 역시 괴롭힘에 의한 것이 아닌지 조사하게 된다. 그 과정에 연루되어있다고 추려지는 아이들 부모들은 평상시와 같으면서도 달라보이는 아이들에 대한 불안을 감추지 못하게 된다.

 

 우리를   안타깝게 하는   '왕따' 사건이 아닐까 했는데  2편으로 가면서 체구가 작기때문이라는 본인이 어쩔수 없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한 것이 아닐까 했던 나구라가 원치 않는 아이들 사이에 끼어들어 분위기를 망치곤 했다는 걸 알게된다.  선배들이나 불량한 아이들에게 소위 "삥"뜯기는 걸 도와주는 친구들에게 고마워할 줄 모르고,  자신이 당한 걸 후배나 여자 아이들에게 똑같이 갚아주려는 면이 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평소 배운대로 약한 이들, 약한 친구를 도와주려는 마음을 보였던 아이들의 실망이 커지게 되고 결국 아이들은  십대란 시기가 가질수 있는, 착하지만 잔인하고 그 다음을 생각하지 않는, ' 한 명 몰아가기' 에  참여하게 된 과정이 하나 둘  드러나게 된 것이다.

 

피해자가 되버린 나구라의 부모와 가해자라고 지목된 아이들 부모 각자의 입장이 드러나면서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해지게된다. 아이들이 있는 부모라면 누구나 양쪽에 서게 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손이 귀한 집 아이였기에 너무 오냐 오냐했던 걸 이제와 후회하는 엄마와 아빠,  학교생활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걸 알게 되는 부모, 처음의 의도와는 다르게 나쁜다는 걸 알면서도  어느 새 동참해버린 자신에 대해 괴로워하는 아이들. 이들은 사건을 중심으로 제각각 자신의 아이,나만 생각하면서 어떻게 보면 이해가 가고 어떻게 보면 너무 지나치다 싶은 주장들을 하기 시작한다. 

 

한동안 아이들끼리의 왕따나 폭력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이 돌때가 있었다. 무조건 어느 한 쪽이 잘못이다 라고 할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아무래도 '시키는 쪽'이 강자고 '당한 쪽'이 약자이기에 무조건 약자편이 되어야한다는 생각이였지만 글쎄, 아무래도 당장만 보게되는 아이들에게  분명한  잘못을 인정 안하고 자기들의 눈에는 배신이라 할 수 있는  고자질이나 하고, 후배나 여자아이에게까지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나구라를 도와줄 마음은 분명  사라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런 일들이 생기게 된 건  어떤 사람이 되라는 말보다는 이건 되고 이건 안되고란 당장의 급급한 일들만 가르치려 들거나 '믿거니'하고  자신 아이들 매일의 일상에 눈돌리지 않는 부모에게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반성을 해보게 된다. 학교에서의 일이 대부분인 아이들에게 그 안에서의 어울림이 어떤 식으로 다가올 수 있는지를 사건안에 있는 아이들 각자의 모습을 보며 생각해보게 된다. 

 

'공중그네'나 '남쪽으로 튀어'에서 엉뚱 재기발랄한 이야기를, 그리고 '오 해피데이'에선 예상치못한 웃음을,'야구를 부탁해' 에선 딱 생각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낸 오쿠다 히데오,  '침묵의 거리에서'는  사건에 대한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보다는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를 어렵지 않게 써가고 있지만 읽어가며 분명해 보였던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 점점 헷갈리게 된다. 자기 아이만 보이는 부모에게 있을까. 아이들이  학교에 있는 시간만 책임을 지면 된다는 생각을 가진 선생님들께, 혹은 이 일이 어떤 일인지 알면서 쟤도 하니까, 쟨 그래도 싸니까 라는 생각으로 동조하는 아이들에게 있을까.


학생때 어쩌면 나도 이런 마음을 가지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과  지금 부모로서도 아이들에게 내 아이만이 제일 중요하다는 이기적인 모습으로 ' 친구들과  잘 지내라.'라는 말과는 달리 '너만 챙겨.'라는 무언의 이야기를 해주는 건 아닌지 ...  학생과 부모, 그것도 피해자와 가해자 양쪽에 서있는 나를 바라보게 한다.    내가 이 곳에 있었더라면 나는 어떻게 달랐으며 누구에게 어떤 말을 해줄수 있을지, 그리고 지금이라도 아이들이  달라지기를 바란다면 어떤 이야기를 해줘야 할지,,, 고민에 빠지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