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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작된 시간
사쿠 다쓰키 지음, 이수미 옮김 / 몽실북스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저자 사쿠 다쓰키는 원래 소설가가 꿈이었는데 소설을 위해 '형사 소송법'관련 글을 읽다 흥미를 느껴 법조계에 몸을 담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소설을 읽는데 정말 법, 재판, 취조 등의 묘사가 너무 리얼하였다.
이야기는 엄청난 부자인 와타나베 쓰네조의 외동딸 미카가 납치되면서 시작된다. 와타나베 쓰네조는 사실 엄청 가난하였으나 토건 사업, 금융업 등을 하며 엄청난 재산을 불린다. 남의 눈에 눈물을 많이 흘리게 한, 피도 눈물도 없는 와타나베 쓰네조. 그의 와이프 미키코는 그보다 거의 20살이나 어리며, 18살에 미카를 낳고 안주인이지만 시종 노릇을 하며 숨죽여 지낸다. 그러던 중, 미카가 늦는다 싶더니 한 통의 전화가 온다. 귀에 익은 목소리,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는 미카의 목숨 값으로 1억 엔을 요구한다. 미카 구출작전을 진행 중, 1억 엔을 차량 밖으로 던지라는 범인의 말에 경찰들은 말을 안 듣고, 미카는 결국 죽은 채 발견된다.
이 책은 1, 2부로 나누어진다. 1부에서는 미카를 죽인 범인을 찾는 과정에서 어설프게 걸려든 고바야시 쇼지가 경찰 조서를 받으며 졸지에 살인죄를 지어 사형이란 선고를 받는 과정을 그려낸다. 그리고 2부에서 가와이 국선 변호사로 인해 쇼지의 무죄를 논리적으로 서술이 되며 조금의 희망이 보인다.
이 책을 읽으며 정말 소름이 끼쳤던 것은 경찰 조서를 받으며 죄 없는 사람도 죄를 지은 범인으로 몰리는 과정이 숨 막히게 리얼했고 나 역시 그 상황에 처했다면 과연 난 그 상황을 나에게 유리하게 만들 수 있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과연 쇼지가 어리바리해서 당했을까? 누구나 그 상황에 있으면 그렇게 되려나? 나는 어땠을까? 란 생각을 하며 읽으니 소름이 쫘악 끼쳤다. 나 역시 법 쪽으로 전혀 아는 바가 없는데 이 책을 읽으며 새로운 법적 용어를 많이 접하게 되었다. 심지어 몽실카페의 깜짝 퀴즈 중, 1심이 언제 했냐는 질문에, 1심과 1 공판의 차이의 용어 개념을 찾아보며 공부를 했다. 옷에는 지문이 묻지 않는다는 걸 평범한 사람이 어찌 알겠으며, 어디까지 경찰에서 나에게 답하기를 요구할 수 있는지도 잘 모른다. 빠져나올 구멍이 안 보이면 정말 그 상황이 미치고 펄쩍 뛸 일이 아닌가. 아무도 내 편은 없고, 법 쪽으로 아는 것도 없고, 뭔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고 하면, 내가 만약 쇼지였다면 그보다 더 현명하게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 더불어 내 편이라고 온 비윤리적인 오카무라 변호사가 나를 변호하는 것이면?
힘없고 빽도 없고 무식하면 이렇게 될 수도 있겠구나란 생각에 법이 과연 누구를 보호하는 것인지 안타깝다는 생각뿐이다.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개인의 이해관계 때문에 한 인간의 인생을 저렇게 처참하게 밟을 수도 있겠구나란 생각을 하며 1부를 읽는 내내 속이 부글부글 거렸다.
2부에서는 의리 있고 정의로운 가와이 도모아키 변호사의 등장으로 쇼지의 무죄라는 논리가 세워지며 경찰에서 잘못한 점들을 논리적으로 비판하는 장면이 너무 멋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모아키 변호사의 무죄 주장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2부를 읽으며 느꼈던 통쾌함이란 이 책의 매력이라 할 수 있다.
와타나베 쓰네조는 딸의 죽음이 돈을 요구하기 전인지 후인지에만 집착하고,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심증은 있으나 세상에 드러내기엔 너무 슬프고 무섭기에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미키코, 어떻게 해서든 미카의 죽음이 범인이 돈을 요구하기 전의 시간에 죽었다고 조작을 해야 하는 모리타 현경본부장, 잘못인 줄 알지만 개인과 조직의 이해관계로 인해 진실을 묵인하는 나이토 교수, 오키타 경위 및 많은 사람들을 보며,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도 나이토 교수처럼, 오키타 경위처럼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겠지... 란 씁쓸한 생각도 든다.
여느 범죄 추리소설보다 더 현실적인 추리소설을 만난 것 같다. 읽는 내내 분통이 터졌지만 일말의 희망이 보이는 엔딩이었고, 이 소설을 읽으니 법에 관한 기본 교양서적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 세상에 가와이 도모아키 변호사와 같은 정의롭고 의로운 사람들이 많이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