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대한민국, 유시민을 말하다 - 함께사는 세상을 꿈꾸는 이 사람
박찬석 외 지음 / 미디어줌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처음부터 유시민은 불온했다. 지난 2003년 면바지와 캐주얼 재킷 차림으로 '신성한' 국회의 권위를 조롱하면서 등장한 이래로, 그는 끊임없이 정치권의 권위주의와 비정상적인 관행들과 위선을 상대로 발칙한 도발을 자행해왔다. ... 정치권이라는 집단의 암묵적인 규칙을 '어긴 자'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어길 혐의가 있는 자'이며, 그것이 그에 대한 집단따돌림의 근본적인 이유라고 생각한다 .   (이 책, 93쪽, <이광철 _ 인간과 역사에 대한 희망을 간직한 휴머니스트>에서)

유시민이 쓴 책에 관해 리뷰를 좀 쓴 편인데요. 이번 책도 '유시민'입니다. 그간의 책과 다른 점이 있다면 유시민이 쓴 책이 아니라 유시민에 관해 쓴 책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위해 글을 썼거나 기존에 유시민에 관해 쓴 누군가의 글이 이 책에 묶였습니다. 이 리뷰를 쓰면서 생각해 보니 앞으로 읽을 유시민의 책이 몇권 더 있군요. 모두 유시민의 책입니다. 유시민이 다작(多作)이었음을 새삼 실감합니다
 

>>> 박찬석 외, 2007 대한민국, 유시민을 말하다:함께 사는 세상을 꿈꾸는 이 사람, 미디어줌. 2007.   * 본문 268쪽, 총 271쪽.

술술 읽히는 책입니다. 게다가 유시민에 대해 관심이나 호감이 있다면 독서의 속도는 더 빨라집니다.
 
 
 
▩ 2007년 대한민국 유시민을 말하다(박찬석 외). 유시민이라는 사람을 읽을 수 있는 책. ▩
 
 
 
1. 이 책은?
 
이 책은 유시민에 '관한' 책입니다. 유시민의 친구들, 주변 지인들, 그에게 관심이 있는 기자들, ...이 쓴 글들이 묶여 있습니다. 유시민이 쓴 책이 직접적으로 유시민의 생각을 담고 있다면, 이 책은 유시민이 아닌 사람에 의해 간접적으로 그의 삶과 생각이 진술되고 있습니다.
 
책의 마지막 파트 4부(넷째마당)는 유시민이 쓴 글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역시 유시민의 삶과 생각을 알 수 있는 글이라는 점에서 책 전체의 흐름에서 벗어나지는 않습니다. 요컨대, 이 책은, 인간 유시민과 정치인 유시민을, 주변 사람들의 목격담과 진술을 통해 소개하는 책이라면 말이 될까요. (^^)
 
개인적으로 이 책은 유시민을 더 알게 되어 좋은 책이었습니다. 서울대 이준구 교수와 관련된 일화가 인상적입니다. 내용은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생략합니다. 그 외에도 유시민이 쓴 자신의 삶에서 겪은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이 회고담처럼 기억에 남습니다.
 
 
 
2. 유시민의 '개혁 의지'
 
필자는 유시민을 보수주의자라고 믿는다. 그렇더라도 그를 별 고민 없이 그냥 우리 식의 보수주의자라고 규정하지는 못한다. 그러기에는 그의 개혁 의지가 너무 강하며, 원칙에 대한 집착이 너무 완고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에게서는 '꿈도 없고, 두려움도 없는' 무념의 보행이 느껴진다. 이 지점에 그가 우리에게 주는 희망의 일단이 있다.   (75쪽, <심재억 _ 지금, 유시민의 과오를 말하자>에서)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유시민은 '보수주의자'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유시민은 다분히 '보수적'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심재억의 말처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수구꼴통이라 불러 마땅한) 그런 '보수주의'와는 다릅니다. 현 한국 사회에 대한 "그의 개혁 의지가 너무도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 책이 출간되 시점이나 2011년 현재나 큰 틀에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유시민은 현 시점에서 우리의 '희망'과 상당 부분 겹칩니다.
 
 
 
3. 유시민이 원하는 미래
 
나는 호주머니에 돈이 있는 동안에는 돈벌이를 안 한다. 그러나 건달은 아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미래가 하루빨리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쓴다. 내가 원하는 미래란 별것이 아니다. 열심히 노동하는 삶들이 천대받지 아니하고 사람답게 사는 사회, 자기 생각을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말하고 쓸 수 있는 사회, 평생을 눈물과 비탄 속에 살아가는 남북의 이산가족들이 그리운 혈육을 만날 수 있는 나라, 강대국에 매이지 않고 우리 운명을 우리 민족 스스로 결정하고 개척해나가는 나라, 이런 사회, 이런 나라가 바로 내가 간절히 바라는 미래인 것이다.   (205쪽, <유시민 _ 인간과 역사에 대한 희망을 갖기까지>(1989)에서)
 
 
유시민이 쓴 글의 일부입니다. 공감가는 대목입니다. 인용한 바와 같은 유시민의 소박한(!) 바람이 실현되기를 소망합니다. 그의 생각이 이 글을 쓸 때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변함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담담하게 적고 있어서 울림이 더 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가 원하는 미래상은 서민들에게 환영받겠지만 이 땅의 수구적 지배세력에게는 '빨갱이' 소리를 들을 것 같다는 겁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과거에 그렇게 '빨갱이' 소리를 듣는 주장들이 현실이 되어 우리의 현재가 조금씩 더 나아져왔다는 점이겠죠. 그런 점에서 다음과 같은 김정란의 말에 크게 공감합니다.
  
 
유시민이 주장하는 내용 중에 이른 바 '급진적'이며 분열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자유민주주의가 정착되어 있느 사회에서라면 지극히 상식적인 가치들을 구현하기 위한 정치적 내용을 주장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국가보안법 폐지가 급진적인가? 당의 의사 결정구조를 진정한 상향식으로 바꾸겠다는 것이 급진적인가?   (110쪽, <김정란 _ 유시민의 수난시대>(2005)에서)
 
 
   
4. 유시민의 낚시에서 그를 보다
 
"저는 붕어 몇 마리를 잡느냐보다 이렇게 낚시하는 것 자체가 너무 좋아요."
낚시꾼 유시민은 나의 말에 이렇게 대꾸했다. 그 강력한 말 펀치에 선배 낚시꾼인 나는 비틀거렸다.
... 그 즈음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프래랜서로서, 지식의 소매상으로서, 여기저기 글 쓰고 방송에 불려다니는 그로서는 낚시하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낚시꾼은 낚시 자체를 즐거워해야 한다.
(21쪽, <전영태 _ Let it be!>에서)
 
 
유시민의 책 「후불제 민주주의」에서도 유시민은 낚시를 이야기한 바 있죠. 그가 낚시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낚시에 조예가 깊단 느낌을 받습니다. 이 책에서 위에 인용한 부분을 읽을 때 그의 낚시에 관한 생각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참고로 저는 낚시에 문외한입니다). 낚시 자체에 관해 어떻다는 게 아니라 그가 낚시에 관해 갖고 있는 생각을 통해 '유시민이라는 사람'이 보여서 좋다는 뜻입니다.
 
이 책에는 이처럼 '유시민이라는 사람'에 관해 알 수 있는 부분들이 적지 않아서 이 책이 좋습니다. 물리적으로(?) 책의 제본 부분이 세로로 길게 깨져서 책을 볼 때마다 책의 소유주로서(^^); 가슴이 아프긴 합니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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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 당신들의 대한민국 세 번째 이야기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우리는 기로에 서 있다. 우리 자손들이 장차 유치원 시기부터 서로를 경쟁자로만 인식해 ‘무한 경쟁’에 몰입할 것인지 아니면 서로를 배려해주고 도와주는 정상적인 사람으로 살 것인지는 지금 우리들의 행동에 달려 있다. 오른쪽으로 치우쳐도 너무 치우친 우리 상황에서는, 비시장적 사회와 같은 궁극적인 이상은 고사하고 일반대중들이 어느 정도 받아들일 만한 복지 자본주의만이라도 성취하려면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계속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지배계층에게는 왼쪽으로부터의, 밑으로부터의 압력을 계속 넣어야 한다. 지금 우리 상황에서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과 ‘왼쪽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크게 봐서 동의어이다. (이 책, 15쪽, <프롤로그>에서)

또, 박노자입니다. 제가 박노자를 좋아하긴 하나 봅니다. 그의 책을 거의 다 구입해서 아껴가며 한권한권 읽어내고 있으니까요. '좋아함'은 그의 관점과 분석에 대한 동의에서 나오며, 그의 책을 읽는 것은 기본적으로 제 자신의 확인과 강화이고 때로는 제 생각에 있어서 외연의 확장입니다. 제가 미처 생각지 못한 문제를 그의 관점으로 분석하고 해석할 때 제 사고의 영역은 확장됩니다. '아껴가며 읽음'은 다 읽고 나면 더 읽을 그의 책이 없음에 허전해할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한번에 먹지 않고 천천히 먹는 심정과 비슷하다면 말이 될까요.
 

>>> 박노자,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당신들의 대한민국 세번째 이야기, 한겨레출판, 2009.   * 총 321쪽.

 
 
     ▩ 박노자,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왼쪽'에서 바라본 개혁, 민주주의, 탈민족. ▩
 
 
 
 
1. 이 책은?
 
이 책은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1권과 2권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책을 읽는 독자에게 내용과 형식에서 무리없이 연속물로 읽히며 책의 부제도 그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박노자는 한국사회를 특유의 객관적이고 근본적인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현안이 된 사건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음에도) 현안이 되지 못한 사건을 들여다 봅니다. 객관적이고 근본적인 해석이 되기 위해 외국의 사례를 살피기도 합니다.

박노자 고유의 매력이 앞선 1권과 2권에 비해 한층 더해진 것 3권 같습니다. 제목으로 말하는 바와 같이 '더 왼쪽'의 시각을 견지합니다. 그의 말대로 '더 왼쪽'은 '더 전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더 왼쪽'은 '더 근본적인 관점을 유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2. '개혁'을, 왼쪽에서 더 왼쪽에서 보자!
 
'개혁' 담론이라는 게 한국에서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물론, 제2, 제3의 노무현이 집권을 할 수야 있지만, 그 실적은 제1대 노무현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이 그 무슨 '개혁'을 들먹여도 '한국적 체제'─군사안보 국가, 부동산 과열, 토건 집중, 관료들에 대한 대자본의 지배, '명문대' 학벌 우대, '현대판 천민(비정규직)' 과중 착취 등등─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갈 것이다.   (55쪽, <자유주의적 온건 개혁의 미망>에서)
 
 
서울대 교수 조국의 말대로 개혁-진보 진영의 집권은 반드시 필요하고 진보집권을 이뤄내기 위해서 집권 후 플랜(개혁 청사진)을 좀더 정교하고 세밀하게 그리고 현실적으로 그려야 합니다. 그리고 현재 대한민국에서 수구-보수 진영의 집권에 비해 개혁-진보 진영의 집권이 만들어낼 사회상은 상당히 다를 거라 확신합니다. '진보집권'이 이뤄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박노자의 말대로 그것은 동시에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습니다. 절차적 민주주의를 복원하는 것과 복지예산을 조금 더 늘리는 것 이상의, '지배 시스템'을 손보는 일을 해낼지는 솔직히 의문이니까요. 정치적 무관심을 담아내는 '그 놈이 그 놈'이라는 말에는 백번 반대하지만, '왼쪽의 관점'에서 볼 때 '어차피 거기까지야'라는 말에는 천번 수긍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래와 같은 박노자의 지적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대중과 노무현의 자유주의적 정권은 '개혁'에 대한 그들의 약속을 지키고자 했다면 이 체제를 과감히 뜯어고침으로써 사회적 발전의 가능성을 열어주었어야 했다. 부자 과세를 유럽 수준으로 늘려야 했고, 부동산 투기를 전면적으로 근절해야 했고, 공공 지출을 크게 늘려 취약 계층과 중산층의 구매력을 증진시켜야 했으며, 궁극적으로 수출 의존율을 적어도 유럽의 산업 국가들 수준으로 끌어내려야 했다.  
(이 책, 15쪽, <프롤로그>에서)
 
 
   
3. '그들'만의 민주주의! '그들'만의 법치!
 
저들이 이야기하는 '민주주의'는 왜 새빨간 거짓말인가? 정상적인 부르주아 민주국가는 그 성격상 법치국가다. 현실적으로는 아무리 자본계급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해도 적어도 '법'이라는 공공영역의 경계선을 넘은 자본을 혼내줄 의무가 있는 것이고, '법'이 허용하는 피착취자의 권익을 가시적으로 보호해줄 의무가 있는 것이다. '뒤에서는 아무리 '자본'과 '국가'가 동심일체가 돼도, 노동자의 요구가 일단 '법'의 잣대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그 요구를 억지로라도 들어주어야 하는 것이 민주 법치국가가 아닌가?   (129쪽, <KTX 여승무원, 그리고 허울 좋은 '민주화'>에서)
 
 
노동자의 요구가 절차와 내용에서 법의 테두리 내에 있다면 그 요구를 들어주는 시늉이라도 하거나 억지로라도 들어주는 것이 '법치'이고 '민주주의'일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노동자'의 것인 한, 자신들의 털끝이라도 건드리는 것인 한, '법치'와 '민주주의'는 헌신짝이 됩니다. KTX 여승무원들의 투쟁에서 박노자는 '그들'만의 민주주의를 봅니다. 고상하게 말하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고 달리 표현하면 '껍데기 민주주의'일 뿐인 것이죠. 박노자의 지적을 빌어 의문이 고개를 듭니다. 과연 대한민국에서 법치와 민주주의는 언제라도 한번 자본을 혼내준 적이 있었던가. 언제라도 한번 곤봉과 군홧발을 노동자가 아닌 다른 대상에게 퍼부은 적이 있었던가.
 
 
 
4. 진보적 탈민족이란?
 
지금은 우리가 베트남, 중국, 인도 노동자들과 손을 잡고 삼성의 주인들을 상대로 투쟁할 시대지, 이건희 전 회장과 같은 부류를 '같은 민족'이라고 해서 좋게 봐줄 시대는 아니다. 즉 진보적 의미의 '탈민족'이 요청되는 시기인 것이다. ... 보수적 의미의 '탈민족'은 '민족'의 다양한 역사적 맥락 등을 일부 무시함으로써 결국 지배자들의 논리를 합리화하는 도구가 될 위험성이 있다...   (224쪽, <탈민족 담론의 문제점>에서)
 
 
민족 해방이 중요한 과제인 시기에 '민족'은 진보의 전유물입니다. 식민지배에 동참(?)하여 개인적인 부와 영광을 누리는 매국 세력의 반대편에서 탄압과 피해를 감수하고 민족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애국 운동 세력은 진보라 불러 마땅합니다.
 
자본이 다국적-초국적 지위를 누리면서 국가의 경계를 넘어 맹활약(?)하는 시대에 '민족'을 내세우고 '애국'이라는 미명하에 자국의 기업을 챙겨주자(?)는 주장은 본질적으로 '친자본'적입니다. 박노자의 말처럼, 외국 노동자들과 연대하여 '탈민족'이 요청되는 시점입니다.
 
  
5. 이런 '대학'에서 학문이 가능하겠는가!
 
'어용 교수'와 총장실 바로 옆방에서 진을 치고 버티는 안기부 요원들의 시대가 가고, 1년에 4천 5백만 원의 등록금을 내는 고려대 '글로벌 금융 경영전문대학원' 학생들이 삼성관과 LG-포스코관에서 영어로 수업을 받는 시대가 왔다. 국가의 적극적인 방조 아래 사립대학은 삼성 같은 '아비 재벌'들과 유착 관계에 있는 '새끼 재벌'로 변신했다. ... '노는 땅'을 상가 짓는 건설업체에 임대해 떼돈을 벌고, 주식투자에 적극 뛰어들고, 재벌의 기부 유치에 목숨을 걸고, 학벌주의적 사회구조에 힘을 얻고, 임용이나 승진 심사와 연구비 지원 등의 메커니즘을 동원하여 교수들을 원자화해 분리-통제하는 사립학교에서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학문이 가능하겠는가? 사회에 대한 쓴 소리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쉽게 나오겠는가?   (269-270쪽, <신자유주의 한국, 대학이라는 이름의 폐허>에서)
 
 
정치권력보다 더 영구적인 위세를 떨치는 경제권력, 대기업 재벌에 대학은 적극 유착합니다. 대학은 이제 권력의 시녀가 아니라 자본의 시녀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학은 상위 재벌이 되고 싶은 하위 재벌의 모습을 노정하기도 하고, 때론 어느 대학처럼 상위 재벌의 일부가 되기도 합니다. 기업-재벌-자본에 통제되거나 그 영향력 하에 놓인 사립대학에서 과연 학문다운 학문이 가능할까요. 친기업, 친자본의 다른 이름인 신자유주의에 대한 날선 비판이 과연 가능할까요. 대한민국의 대학은 여러 층위에서 점점 더 암울해져만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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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 사회 귀족의 나라에서 아웃사이더로 살기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12월
평점 :
절판


▩ 홍세화의 한국 사회 객관화하기. 한번 더 읽고 싶은 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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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 사회 귀족의 나라에서 아웃사이더로 살기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12월
평점 :
절판


 
나는 '불법파업'이라는 프랑스 말을 들어본 적도, 읽어본 적도 없다. 파업은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들의 최후 선택이고─그 어떤 노동자가 무조건 파업을 좋아하나?─ 노동3권의 하나인 단체행동권의 핵심으로서 당연히 보장되어 마땅한 것이다. 오히려 파업 사업장에 대체 인력을 투입하는 게 불법이다.    (209-210쪽, <'불법'파업과 철학의 빈곤>에서)


파업은 언제나 '불법'파업이라고 읊어대고, 단체행동만 해도 시민의 불편을 외쳐대는 수구꼴통언론의 힘은 막강하다고 봅니다. 신문과 티비를 보고 있노라면, 한국사회에서 '불법'이 아닌 파업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니까요. 전문 시위꾼이라는 말도 횡행하던데, 전문 파업꾼이라고도 떠벌리고 싶을 겁니다.

홍세화의 말대로, 그 어떤 노동자가 파업을 좋아할까요. 최악의 경우 구속과 유죄판결로 이어질 수 있음을 누구보다 본인들이 잘 알고 있을텐데 말입니다. 홍세화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파업은 노동자의 최후적 선택일 뿐입니다. 홍세화의 책을 읽고 있으면 지극히 상식적이어서 마음이 편합니다. 얼마나 사회가 비상식적이길래 상식이 돋보이고 빛을 발하는 거냔.
 

>>> 홍세화,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 사회귀족의 나라에서 아웃사이더로 산다는 것, 한겨레신문사, 2002.   * 총 301쪽.


꽤나 오래 마음의 빚^^; 같은 책이었습니다. 독서가 본 궤도(?)에 오르면서 당연히 꺼내들게 된 책이었습니다. 홍세화의 전작(前作),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창작과비평사)와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한겨레출판)를 뜨겁게^^ 읽은 터이기에 책에 대한 신뢰도는 상당히 높았습니다. 그리고 이같은 저자에 대한 신뢰도는 배신을 당하는 법이 거의 없지요. (인터넷을 뒤적이다 보니,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개정판까지 나왔군요. ^^)

 

   ▩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의 분노, 한국사회에서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

 

1. 이 책은?
 
이 책을 포함해서 홍세화의 책에서 드러나는,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그의 관점과 시각은, 수구꼴통의 논리에 찌든 한국사회에서 신선하다 못해 충격적이기까지 합니다. 타의로(!) 프랑스에서 오래 산 사람이어서인지, 서양 합리주의의 깔끔한 시선을 선사합니다. 그 시선으로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홍세화의 시도 가운데 하나인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입니다.

지극히 합리적인 눈으로 한국사회를 비판하지만, 그는 '악역을 맡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계화를 노래하고, 글로벌 경영을 구가하는 한국사회이지만 그 내부적인 상황은 그다지 '세계적'이랄 수 없는 환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홍세화가 이 환부를 드러내고 비판하는 것은 당연히 치료와 치유가 목적이라 봅니다. 그래서 그는 꿋꿋이 '악역'을 떠맡는 것입니다.

그렇게 '악역'을 맡은 홍세화의 한국사회에 대한 비평을 총 5부로 나누어 실은 것이 이 책입니다. 수구언론이 하는 짓거리를 까고 까발리고(1부와 2부), 노동자의 연대를 역설하고(3부와 4부), 우리 대한민국의 자라나는 아이들의 교육을 염려합니다(5부). 한 페이지 한 페이지, 한국인이면서 한국적이지 않은(!) 홍세화가 품고 있는 생각의 '결'과 한국사회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오롯이 드러나는 책입니다.

 
 
2. 노동자라는 인식과 자각의 필요성
 
... 노동자를 바라보는 프랑스 사회의 시각이다. 즉, 노동자들 모두가 스스로를 노동자라고─당연히─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 대부분의 한국 노동자들은 스스로 노동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스스로 노동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노동자 정치의식이 생겨날 리 없고 또 노동자 간의 연대감이 생겨날 리 없다. ... 프랑스 판사 조합의 연대 표명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196쪽, 197쪽, <체포대를 주목하는 이유>에서)

 
노동자라면, 자신이 사회-경제적 존재로서의 '노동자'라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한국사회에서 극우 집권 세력에 의해서 '근로자'라는 말로 대체된 슬픈 운명의 '노동자'라는 말은 노동자들에 의해 복권되어 마땅합니다. '노동자'라는 자각이 있어야, 강남 땅부자들을 위한 대통령 후보와 정당에 표를 던지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고, '노동자'라는 자각이 있어야, 다른 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감을 가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전에 작성한 저의 관련글이 있군요. http://befreepark.tistory.com/554 )
 
위의 인용으로 미루어, 홍세화가 그의 아내를 당당히 프랑스 사회의 이주노동자(!)라고 부르는 것(222-228쪽)은 예상 가능한 것이고,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물론, 홍세화 자신도 글쓰는 노동자임을 책의 곳곳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도 아무 거리낌 없이 스스로가 노동자임을 자각하고 자처하고 표방하고 ...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극우 기득권 세력이 불어넣은 허위의식이 가장 큰 장애물이긴 하겠습니다만. -.-a.
 
 
 
3. 노동자 파업에 연대감을!
 
2001년 11월 경찰 3만 명이 파리에서 시위를 벌였는데 국민 90%가 이를 지지했다. [조중동처럼] '경찰, 왜 이러나' 따위의 사설을 실은 신문도 없었고, 또 그런 글을 기고하는 지식인도 없었다. 어느 나라에서든 국민의 정치사회 의식은 지식인들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지하철 노동자들이 파업할 때 불편하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서울 시민들은 그렇게 부추기는 신문이나 지식인의 기고글은 자주 접한 반면 연대의 중요성을 주장한 글은 만나기 어려웠다.   * [   ]는 비프리박.   (217쪽, <'이기심이냐 연대냐'>에서)

 
노동자들이 파업을 할 때마다, 수구꼴통언론은 시민의 불편을 갖다 붙입니다. 노동자들의 단체행동으로 인해 시민들이 불편하다고 말이죠. 그래서 하면 안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겠지요. '불법'이란 말도 하고 싶을테구요. 파업을 포함해서 노동자들의 단체행동은 법으로 보장된 노동자들의 권리임은 온데간데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거대자본화한 언론과 방송에서는요.
 
시민들은 대부분 노동자들입니다. 다른 노동자의 단체행동과 파업으로 불편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왜 그러는지 그 이유를 좀 헤아려줬으면 합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겁니다. 그리고 그런 바탕 위에서라면 불편의 감내와 심정적 연대를 하는 일도 충분히 가능하겠지요. 수구꼴통 언론-방송의 논리를 답습하여 노동자 파업이라면 무조건 나쁘고 어쨌든 불법이라는 이야기는 이제 좀 그만 할 때도 되지 않았을까요.
 
 
 
4. "너 전라도 사람이지?"라는 말에 담긴 폭력성
 
이른바 '국민작가'라는 저 사람[이문열]이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고 '너 전라도 사람이지?'라고 윽박지를 수 있는 사회, 또 그것이 용인되는 사회‥‥‥.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다른가? 지리산의 이쪽 자락과 저쪽 자락이라는 것말고 종족이 다른가, 말이 다른가. 별다를 게 없는 것을 증폭시켜 다름을 강조하고 앵똘레랑스[불관용]로 무장한 사회, 또 그것이 용인되는 사회‥‥‥. 실제로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5.18 모습을 본 프랑스 사람들이 물었던 첫 질문이 "그 사람들은 소수 민족인가?"였다.   * [   ]는 비프리박.   (87쪽, <'너 전라도 사람이지?'에서)

 
이문열에 의해 가장 극명하게 던져진 "너 전라도 사람이지?"라는 질문은, 정말 이런 말 하는 사람은 어디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라는 의문을 갖게 합니다. 상대의 어떤 말에 뜬금없이 "너 전라도 사람이지?"라고 묻는 자의 뇌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요. 도대체 "전라도"가 어쨌길래? 도대체 "전라도"에 무슨 철천지 원수를 졌길래? 도대체 "전라도 사람"들이 무슨 잘못을 했길래?
 
사회적으로 권력에 대한 비판, 기득권 유지세력에 대한 질타를 하는 사람들에게 퍼부어지는 "너 전라도 사람이지?"라는 말은 이제 "좌빨이지?"로 업그레이드 된 것 같습니다. 광주에 투입한 공수부대의 만행에 온 몸으로 맞섰던 사람들을 폭도니 빨갱이니 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전라도 광주 사람이라는 이유로, 공수부대의 총칼 앞에 쓰러져야 했던 죄 밖에 없는 사람들을 폭도라고, 빨갱이라고 불렀으니,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사람들을 "좌빨"로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해야 할까요.
 
 
 
5. 상업주의에 찌든 언론과 방송에게 공적 가치는 요원한 꿈?
 
... 무엇을 '톱'[top]으로 할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오고갔지만 대세는 이미 모나코 공비[왕년에 유명한 비유였던 그레이스 켈리]의 죽음 쪽으로 결정되어 있었다. [8시 뉴스 앵커였던] 랑글루아는 이 결정에 완강히 반대했다. '모나코 공비의 죽음은 모나코 공가 이외에는 그 누구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반면에 팔랑지스트에 대한 테러는 수백만의 삶에 영향을 주는 대사건이다'라고 거듭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편집이 끝나고 뉴스가 시작되었다. 막상 랑글루아가 입을 연 첫 뉴스는 테러사건이었다. ... 랑글루아는 그날로 아나운서 생활을 끝냈다.   (133쪽, <기자와 '좁은 문'>에서)

 
홍세화가 전하는 랑글루아의 에피소드(?)에서 언론과 방송의 상업주의와 공적 가치에 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최소한 언론사 또는 방송사가 상업주의 유혹에 질질 끌려갈 때 그곳에 종사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명 연예인 누구와 누구가 결혼을 한다고 온갖 매체가 떠들어대고 도배를 할 때에도, 어디선가 탄압 받고 억압 당하고 억눌려 쓰러지는 사람들은 있을텐데 하는 생각을 합니다.
 
상업주의가 다 나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매체로서의 가치"는 내팽개친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럴 때 그 매체에 종사하는 기자들은, 앵커들은, 피디들은 뭘 하고 있을까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고요. 그런 의미에서 프랑스의 8시 뉴스 앵커 랑글루아의 용기는 참으로 신선했습니다. 더더군다나 수구꼴통 언론-방송이 판을 치는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으로서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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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신성가족 - 대한민국 사법 패밀리가 사는 법 희망제작소 프로젝트 우리시대 희망찾기 7
김두식 지음 / 창비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법원 직원 전체를 가족으로 본다면, 그 가족은 보통 가족이 아니라 매우 어려운 경쟁을 거쳐 선발된 일종의 '신성가족(神聖家族)'입니다. 신성가족은 맑스와 엥겔스의 첫번째 공동저작인 『신성가족, '비판적 비판주의'에 대한 비판:브루노 바우어와 그 일파를 논박한다』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 "비평가는 절대로 몸소 사회와 어울려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바우어 일파를 맑스는 신성가족이라고 부릅니다.  ... / 저는 법원이나 검찰에서 가족이라는 표현을 들을 때마다 바로 이 신성가족을 떠올립니다.   (146-147쪽, 제3장 <부담스러운 청탁, 무서운 평판>에서)
  

학교에서 회사에서 소속 구성원들을 '가족'이라고, '가족'같은 존재들이라고, 노래를 부릅니다. 김두식은 법원이나 검찰에서 자신들을 '가족'이란 말로 부르는 걸 듣고서 씁쓸한 마음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김두식은 그들에 대해, '가족'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로부터 구별되고 사회 속에 어울려서는 안될 '신성가족'이 연상되었나 봅니다. 제가 그 '가족'이란 말을 들었을 때 떠올린 '집단이기주의'와 맥락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봅니다. 
 

>>> 김두식, 불멸의 신성가족:대한민국 사법 패밀리가 사는 법, 창비(창작과비평사), 2009.   * 본문 326쪽. 총 342쪽.


다소 충격적으로 읽은 김두식의 「불멸의 신성가족」이었습니다. 뭐랄까 '설마 그렇진 않을 거야'라고 생각했던 것이 현실이라고(!) 강렬하게 활자화되었을 때의 충격과 놀라움이었습니다. 치부라면 치부일 수 있는 부분을 양지로 드러낸 시도라는 점에서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책에서 김두식이 밝히는 내용이 신선하다는 것이 아니라 김두식의 시도와 노력이 신선하다는 것입니다.
 
 

▩ 불멸의 신성가족, 법조계. 김두식이 말하는 대한민국 사법 패밀리가 사는 법. ▩
 
 
 
  
 
1. 이 책은?

이 책에서 김두식은 '양적 연구'가 아닌 '질적 연구'를 하겠다고 책의 서두(21-25쪽)에서 밝히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통계조사에 기초하여 각종 퍼센트를 근간으로 진행되는 연구가 '양적 연구'라면, 어떤 집단 구성원들과의 대화와 인터뷰를 기초로 하여 결론을 도출해 내는 연구는 '질적 연구'입니다. 희망제작소로부터 <우리시대 희망찾기> 프로젝트의 '사법' 분야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거절하지 못해^^ 시도하게 된 우리나라 사법분야에 대한 '질적 연구'라고 김두식은 밝히고 있습니다. (희망제작소는 박원순 변호사가 상임이사로 있는 민간 싱크탱크think-tank를 자임하는 단체. 340쪽 참고.)


 
2. 정보를 흘리는 떡찰, 받아적는 기자, 실종된 피의자 인권
 
말로는 "우리가 기소하는 내용만 보도해달라"고 하지만, 검찰 입장에서도 주변 여론을 봐가면서 수사를 해야 하고, 검찰에 우호적인 여론을 끌어내야 하기 때문에, 수사 진행상황을 "조금씩 흘려줄 수 밖에" 없습니다. 피의자가 "나쁜 놈이라는 스탠스(stance)"가 유지 되지 않으면 여론이 무고한 표적수사 또는 정치수사라는 쪽으로 흐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자들은 검사들이 그렇게 흘려주는 것을 "받아먹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피의자의] 인권을 고려해줄 여지는 없습니다.   * [   ]는 비프리박.   (290쪽, 제5장 <팔로역정, 법조인이 이겨애냐 하는 여덟가지 유혹>에서)

 
자살한 전직대통령 노무현이 떠올랐습니다. 떡찰은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하고 여론을 등에 업기 위해서 기자들에게 정보를 흘리고, 기자들은 '검찰측 주장'을 받아적고 언론과 방송은 그것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행태...! 언론과 방송은 편하니까(!) 확인도 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적지만, 그로 인해 피의자 인권은 실종됩니다. 전직대통령을 자살로 몰고 갈 정돕니다.

나중에 재판에서 그것이 뒤집혀 '검찰측 주장'과는 상반되는 판결이 나와도, 여론에 의해서 피의자에게 가해진 혐의는 벗겨지지 않습니다. 그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겠지요. 그리고 그것은 사회적 매장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피의자의 자살이라고 하는 비극을 낳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떡찰과 언론-방송은 과연 반성을 하기나 할까요. 또, 지금 자신들이 뭔 짓을 하는지 알기는 하는 걸까요.
 
 
 
3. 약자의 고통에 침묵하는 법, 약자의 항의에 약자를 처벌하나
 
이해영씨가 노동현장에서 느낀 문제들도 변상환 교수의 논리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변 교수는 "약자가 권리를 침해받고 있을 때는 침묵하던 법이, 견디다 못한 약자가 그걸 세상에 알리고 바로잡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순간, 뒤늦게 개입하여 약자만을 처벌한다"고 이야기합니다.   (81쪽, 제1장 <비싸고 맛없는 빵>에서)

 
법이라는 것이, 법조계라는 집단이, 사법부라는 권력기관이, 과연 누구의 편인가? 과연 누구의 편을 들어왔는가? 라는 생각을 하면 김두식의 인용과 지적은 정확한 것 그 이상이라는 생각입니다. 본문에서도 거론하고 있는 것처럼, 노동현장에서 구사대의 식칼에 옆구리를 난자 당할 때까지도 닥치고 있던 그 잘난 법은, 노동자의 저항과 항의에 노동자를 처벌합니다. 우리의 슬프디 슬픈 법현실, 사법현실입니다.

이런 맥락 속에서 '무조건 준법'을 외치는 것들의 주장이 과연 어떤 의미인지는 따져볼 필요도 없겠죠. 사회적 약자들은 닥치고 있거나 당하고만 있으란 이야기 밖에 더 되겠습니까. 법의 현실적 편파성과 당파성 그리고 '무조건 준법' 논리 뒤에 숨은 허구성과 약자억압의 논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4. 판검사로 쌓은 경력, 변호사로 돈의 날개를 단다
 
판검사로 일하면서 실력을 쌓고, 그 실력을 이용해서 변호사로 돈을 버는 것도 문제입니다. 결국 국민들의 세금이 변호사를 키우는 데 쓰이는 셈입니다. 원래는 변호사로 일하면서 실력을 쌓고 그 실력으로 판사가 되어 정의로운 재판을 하는 것이 상식에 부합합니다. 젊은 경력 법관들이 능력과 효율 면에서 탁월한 것은 사실이지만, 젊은 나이에 판결부터 시작하느라 기계적 효율성만 갖추게 되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171쪽, 제3장 <부담스러운 청탁, 무서운 평판>에서)

 
신0철을 떠올렸습니다. 2009년 6월 현재, 그는 아직도 굳건히(!) 대법원 판사로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사퇴를 요구합니다. 촛불집회 참가자들에 대한 재판을 맡은 판사들에게 불법적이고 비상식적인 '압력'을 가한 그에게 책임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가 사퇴를 했다고 한들, 변호사 사무실 개업을 하거나 대형 로펌에 이름을 올려놓고 변호사 활동을 한다면 그는 과연 어떻게 될까, 얼마나 많은 돈을 벌까, 하는 상상을 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신0철은 잘 나가는 변호사의 지위에 오를 거라는 데에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서글픈 법조계 현실이라는 것이지요. 대법원 판사까지 지낸 '전관' 변호사...! 얼마나 좋은 수식어입니까. '전관' 변호사를 찾는 우리의 법조 현실은 그렇게 돌아갑니다. 그런 현실 속에서 김두식의 위와 같은 지적은 크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5. 대한민국 사법개혁의 방향은 판검사 증원 쪽이 맞다
 
일단 모든 사람들이 법원, 검찰과 순조로운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 저는 판검사의 대폭 증원이 한가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의 사법개혁은 주로 변호사의 증원에 중점을 두어 진행되어 왔습니다. ... 시장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것이지요. ... 저도 기본적으로는 이 방향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시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시민들은 분쟁이 시장보다는 공적 수단에 의해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좋은 변호사를 싸게 선임하여 재판에서 이기는 것'보다는 '국가기관에 의해 공정한 재판'을 받는 쪽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310-311쪽, 제6장 <나가는 글:억지로 찾아본 희망>에서)

 
그야말로 김두식의 "억지로 찾아본 희망"입니다. 김두식은 '희망'이라 적지 않고 '억지로 찾아본 희망'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법조계 현실, 대한민국 사법 패밀리의 미래에 대해서 어두운 전망을 하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내놓은 '억지 희망'이긴 하지만 '판검사 대폭 증원'이라는 해결의 열쇠는 제가 생각하는 사법개혁과 통하는 바가 컸습니다.

변호사를 싸게(?) 고용할 수 있는 방안과 재판을 신속하고 공정하게 받을 수 있는 방안, 둘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하고 싶으냐고 한다면 저는 단연 후자가 옳다고 봅니다. 우리의 현실은 이런 저런 이익과 역학관계 속에서 사법개혁의 방향이 우리의 소망과는 다른 뱡향 즉 변호사 증원 쪽으로 흘러가고 있군요. 이것도 필요한 사법개혁의 한 부분이긴 하겠지만 판검사 증원이 더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해법이라는 생각을 하는 저로서는 김두식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억지' 해법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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