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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 사냥꾼 - 유쾌한 과일주의자의 달콤한 지식여행
아담 리스 골너 지음, 김선영 옮김 / 살림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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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에 푹 빠진 사람이 지구상의 모든 과일을 추적하고자 했다. 과일 자체에 관한 정보들, 과일과 관련된 역사적 이야기들, 과일에 관해 누군가 했던 이야기들을 닥치는대로 수집했다. 그 이야기를 책으로 출간했다. 과일에 관한 자신이 알고 있는 온갖 이야기를 적으려고 한 듯 하다. 그런데, 그것이 독자에게 어떻게 읽힐지는 저자에게 별 관심이 없는 문제였던 것 같다.


아담 리스 골너, 과일 사냥꾼:유쾌한 과일주의자의 달콤한 지식여행, 김선영(옮김), 살림출판사, 2010.   * 본문 404쪽. 총 423쪽.
(원저) Adam Leith Gollner, The Fruit Hunters, 2008.


 
오랜만에 책을 읽다가 도중에 덮어버렸다. 2010년 8월 12일(목), 13일(금), 양일간 읽었다. 아니, 읽으려고 노력했다. 더 읽는 것은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고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읽고) 있지만, 그 이야기는 소쿠리를 빠져나가는 물이 되어 머리 속에 남는 게 거의 없다. 왜 그럴까. 예를 들어 보자.

학교 운동장에 같은 학교 학생들이 있다. 굉장히 큰 학교라서 학생수는 수십만명에 달한다. 크게 보면 모두 인간이라고 분류할 수 있지만 하나하나 특징을 따지자면 수십만가지의 개성을 가진 사람들인 것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와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A라는 사람은 이러이러한 특징이 있고, B라는 사람은 이러저러한 개성이 있다. ..." 그렇게 수십만명에 관해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과연 수십만명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후, 한 사람 한 사람 마다의 특징과 개성을 모두 기억할 수 있을까.

'학생'이란 말을 '과일'로 바꿔 놓으면 「과일 사냥꾼」이 책이 된다. 우리말로 번역된 것이 약 400쪽이다. 거기에서 나열되는 과일들의 종류와 이름은 그야말로 헤아릴 수 없을만큼이다. 그 많은 과일들에 관한 이야기는 과일별로 전개되지 않는다. 어떤 테마를 정해 테마별로 거기에 맞는 과일들을 끌어다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렇게 등장하는 이야기의 연결은 뚝뚝 끊어져 있다. 그리고 이렇게 한번 등장한 과일이 저기서 저렇게 또 등장하는 일이 너무 잦다. 책을 읽는 독자는 정신이 없다.

책은 왜 읽는가. 책이란 건 뭔가. (저자가 정한 주제야 있겠지만) 갈피를 잡을 수 없이 단편적인 사실들을 끝없이 나열한다면 그게 과연 책일까. 그런 식의 나열이라면 백과사전이 낫지 않을까. 그나마 알파벳 순으로라도 정리가 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책을 읽고 있노라면 저자가 조사도 많이 했고 알고 있는 것도 많다는 생각을 하기는 한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책이란 게 저자의 지식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었나. 이 책은 과일에 관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긴 하지만 너무 많은 이야기를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늘어놓아서 독자에게 남는 것은 없다. 시간 들여 읽는 독자의 머리나 가슴에 남는 게 없다면 그 책은 왜 읽어야 할까. 


책은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구성도 중요하다.
같은 재료로 요리를 해도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따라
음식의 맛이 극과 극으로 갈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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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의미 있는 사물들
셰리 터클 엮음, 정나리아.이은경 옮김 / 예담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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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인생에서 의미있는 물건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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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의미 있는 사물들
셰리 터클 엮음, 정나리아.이은경 옮김 / 예담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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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수첩은 외부의 정보 [저장 신체] 기관, 다시 말하면 세포 대신 종이로 이루어진 내 뇌의 일부였다. 수첩이 가까이 있다는 걸 알면 한결 마음이 놓였다.

(이 책, 173-174쪽, 미셸 루빈카(Michelle Hlubinka), <수첩>에서)


사람마다 각별히 의미있는 물건이 한둘은 있게 마련이지요. 저는 뭐가 의미있는 사물들인가, 생각해보니, 위에 적은 미셸 루빈카처럼 수첩 혹은 메모장을 내 인생의 의미있는 사물 가운데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외에도 각별한 물건들이, 곰곰히 생각해 보니, 초큼 되는군요. 생각할수록 가짓수가 늘어나는? ^^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저는 셰리 터클이 누군지 몰랐습니다. 물론, 꼭 알고 있어야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 읽고 난 후에도 생각은 비슷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내 인생의 의미있는 사물들에 관해 쓰고, 그걸 누군가 책으로 엮었다는 정도의 느낌입니다. 독자는 그 글들 가운데 공감 가는 꼭지들을 더러 발견하게 됩니다. 더러. ^^

 



34명의 학자, 연구자가 내 인생의 의미있는 사물들이란 테마로 쓴 글을 엮은 책.
좀더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글들이 많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1. 이 책은? 책에 관한 전체적인 소감.

이 책은 셰리 터클(MIT 교수, 과학사회학)이 쓴 책은 아니고 셰리 터클이 여러 사람이 쓴 글을 엮은 책입니다. 누군가 일종의 기획을 한 것 같고, 수십명의 학자 또는 연구자들이 내 인생의 의미있는 사물이란 한가지 테마로 쓴 글을 모았습니다. 지구상에 살고 있는 누군가에게 각별히 의미있는 사물들은 어떤 게 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글쓴이들은 그 사물과 관련된 자신의 에피소드와 생각을 적고 있습니다.

이 책엔 그런 사물이 34가지 등장합니다. 34명이 글을 썼단 이야기지요. 중복되는 필자가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를 못 느껴서요. ^^; 그리고 이 책은 셰리 터클 그녀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앞뒤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엮은이의 에피소드를 적은 것은 아니고요. 사물에 관한 일반론 쯤 되는 글을 적고 있습니다. 다소 추상적이거나 철학적이거나 인식론적으로 느껴집니다. 읽기 좀 지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에는 셰리 터클이 매 꼭지마다 초입에, 그 글과 관련이 있을 법한^^ 누군가의 글을 삽입해 놓았습니다. 이에 대해 유의미한 시도라고 찬사를 늘어놓고 있지만 솔직히 저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다른 책에서도 어떤 인용문을 매 꼭지마다 싣는, 비슷한 시도는 얼마든지 있으며, 이 책의 경우 그 인용문이 읽어내기 힘든 글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책의 표지에서 적고 있는대로 34인의 34개 사물에 관한 글이 실려 있지만, 책의 표지에서 말하는 것처럼 "34인의 세계적 석학"이라고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어 보이는 필자들입니다. 표지의 광고 카피가 좀 오버하고 있단 느낌을 지우기 힘듭니다. 필자들은 상당수가 셰리 터클과 같은 학교에 몸담고 있는 교수이거나 연구자들입니다.

글의 내용은 독자가 좇아가기 어려운 구석이 적지 않습니다. 필자들이 적고 있는 일화나 사물에 관한 서술에 공감하는 일이 드뭅니다. 어떤 글은 본인은 알 수 있는 글이기는 한 것 같은데 독자는 내용을 파악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글들마다 편차가 커서 글 하나하나마다 적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적응이 좀 되어갈 무렵 다른 필자의 다른 글이 나타납니다.
 


그래도 독자로서 공감이 가는 구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책의 두 곳에서 공감가는 대목을 만났습니다. 인상적이었던 두 부분을 인용합니다.



2. 만화(책)을 좋아하는 어른!

내게 만화책이란 집으로 돌아가는 연휴에 엄마가 만들어준 남부식 야채 요리처럼 위로를 주는 대상이었다. (80쪽)

어른이 되어도 만화책은 끊임없이 일상의 문을 두드린다. (81쪽)

성인이 되어서 ... 만화 독자라는 사실을 세상에 떳떳이 밝히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82쪽)

어른이 되어도 만화책을 끊지 못하는 남자를 성장이 멈춘 별난 종족으로 보는 사람들의 편견은 불편할 정도로 심하기만 하다. (83쪽)

삶의 어느 순간부터인가, 성인으로서 권리와 자유를 누린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배우기 위해 만화책을 펼치게 되었다. (88쪽)

(헨리 젠킨스(Henry Jenkins), <불사조 슈퍼히어로>에서)


저는 만화책을 보는 것에서 위로를 찾지는 않습니다. 이 점은 헨리 젠킨스와 다릅니다. 하지만 그 외의 인용문들은 제 생각과 비슷합니다. 바로 얼마전 7월 초순-하순에도 지하철 출퇴근 독서로 만화책 <테니스의 왕자> 전권 읽기를 했다죠. 만화책은 저에게도 일상의 문을 두드립니다. 하지만 어른이 만화책을 본다는 점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 그렇다고 내가 만화책을 안 읽거나 하는 일은 없겠죠. 앞으로도 쭈욱 느낌이 올 때마다 내키는 만화책을 보는 일은 변함이 없을 겁니다. 그건 헨리의 말대로 성인으로서 누릴 권리와 자유의 일부라고 봅니다.


3. 시계, 성인의 시간으로 진입하는 매개!
 

어린 아이들은 낮잠, 밥 먹기, 해질 녘, 매일 즐겨보는 애니메이션의 익숙한 노래 정도로 구분되는 획일적인 흐름 속에서 시간의 경과를 경험한다. 아이들의 일정을 정하는 건 다른 사람들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시계 보는 법을 배우고 나면, 스스로 시간을 관리해야 할 책임을 안게 된다.
나는 네 살 때 가족여행을 가서 태엽을 감는 미키 마우스 시계를 선물 받고 성인의 시간 속으로 입문했다.

(173-174쪽, 미셸 루빈카(Michelle Hlubinka), <수첩>에서)

미키 마우스 시계라는 대목에서 댄 브라운의 소설에 나오는 랭던 교수가 떠올랐습니다. <천사와 악마> <다빈치 코드> <로스트 심벌>에서 랭던 교수는 미키 마우스 시계를 찬 사람으로 나옵니다. ^^ 묘한 것은, 랭던 교수의 경우 미키 마우스 시계로 인해 '어른이 되지 못한 어른'으로 인식되는 면이 있는 반면, 이 책의 미셸 루빈카는 미키 마우스 시계로 인해 네살 때 성인의 시간으로 입문한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랭던에게는 '미키 마우스'가 부각되었던 것이겠고, 미셸에게는 '시계'라는 시간관리 장치가 중요했던 것이겠죠. 미셸이 적은 어린 시절의 시간 개념에 크게 공감합니다.   

 

p.s. 
2010년 7월 23일(금)부터 7월 26일(월)까지 읽었습니다. 이 책은 출퇴근 지하철에서 저를 책 속으로 유인하지 못한 면이 있습니다. 저는 늘 그렇듯이 책을 읽고 있지만, 책을 읽는 저를 자꾸 졸음 속으로 밀어넣는 느낌이었습니다. 몸의 피로를 부르는 무더위 탓도 있겠지만, 책 속의 글이 갖는 흡인력 부족 때문인 듯 합니다. 4일 내내 연속해서 졸음이 몰려올 수는 없거든요. 게다가 이 책에 뒤이어 읽고 있는 김훈의 <남한산성>은 참 잘 빨려들고 있음을 감안하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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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귀신 - 조선시대 여인의 한과 복수 키워드 한국문화 6
최기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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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고소설에 나타난 귀신, 처녀귀신, 자살에 관한 분석보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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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귀신 - 조선시대 여인의 한과 복수 키워드 한국문화 6
최기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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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이 만일 자기 삶의 장르를 정할 수 있다면 비극을 택할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죽은 뒤에야 목소리를 부여받은 자, 말하지 못해 억울한 피해자다. 그들은 산 자를 위협하러 온 사신(死神)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을 믿을 수 없어 현실로 찾아온 상담 신청자다.

(29쪽, <또다른 나>에서)

여름철에는 납량특집, 귀신 이야기가 제격입니다. '처녀귀신'이라는 제목은 호기심을 유발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총각귀신'이나 '유부남귀신'도 아니고 '처녀귀신'이라 더더욱. ^^ 

 
처녀귀신만을 다루고 있지 않은 최기숙의 처녀귀신 표지.  
돋을새김한 귀신 鬼자가 예사롭지 않다.   

 

1. 이 책은? 저자는?

이 책은 우리 고소설에 나타난 '처녀귀신'을 논합니다. 이 책이 아우르는 바는, 제목처럼 '처녀귀신'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남녀를 총괄한 일반론으로서의 '귀신' 이야기라 해도 손색이 없으며, '귀신'의 존재 조건으로서의 '자살'에 관한 분석도 자주 나옵니다. 물론, '여자귀신' '처녀귀신'이 고소설에 유달리 자주 등장하는 이유를 파고듭니다.

저자 최기숙은 "고전 텍스트를 현대 문화와 소통시키기 위해 고전의 현대적 번역과 비평작업을 지속하고 있다"고 책표지 날개에 씌어 있습니다. 눈에 띄는 저서로는 <문밖을 나서니 갈 곳이 없구나:거지에서 기생까지, 조선시대 마이너리티의 초상>이란 책이 있군요. 

이 책은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기획한 '키워드 한국문화'의 여섯번째 시도이자 결과물이네요. 지속되면 좋을 유의미한 시도인 것 같습니다. 책 말미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습니다.

'키워드 한국문화'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재발견하는 작업이다. ... 한 장의 그림 또는 하나의 역사적 장면을 키워드로 삼아, 구체적인 대상을 통해 한국을 찾자는 것이다.

(책 말미의 <'키워드 한국문화'를 펴내며>에서)

 

2. 의문! 여자 귀신, 처녀 귀신, 왜?

여자 귀신들이 그토록 수많은 생명을 해치면서까지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현실에 전할 '말'이었다. (67쪽)

[귀신으로 나타난] 여인이 원했던 것은 오명을 벗는 일이었다. 여인에게는 사건을 '사회적'으로 해결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70쪽)

(<구천을 떠도는 여자 귀신, 생사의 경계에 선 난민>에서)

"조선시대 여성은 자신의 성적 욕구를 표현하기 쉽지 않았다. 감정에 솔직했던 여성은 오히려 심한 수치와 모욕을 안고 자살했다"(154쪽)와 같은 지적에서 보듯, 조선시대 여성이 자살할 이유나 맥락은 많았으며, 여성이 목숨을 잃는 것이 꼭 자살에만 국한되지는 않겠지요. 게다가 자살이라 하더라도 그 뒤에 도사리고 있는 타살적인 상황도 적지 않았을 거구요.

이런저런 맥락과 상황을 포함하여, 죽은 사람이 귀신이 되어 나타나는 것은, 현실에 전할 말이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저자의 해석에 십분 동의합니다. 이미 죽었지만 이승에 남겨진 오명을 벗기고 싶은 거겠죠. 조금 유머러스한 의미확장이 되지만, 귀신을 만나게 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왜 생사의 경계에서 떠도는지 이유를 물어보는 게 좋겠습니다. ^^
 
 
 
3. 탁견! 귀신 이야기에 관한 멋진 생각들

[이야기 속에서] 사람들은 귀신이라도 나타나 폐단을 바로 잡기를 원했다. 결국 귀신이 문제를 해결했다는 말은, 바꾸어 말해 현실에서는 그 해결이 불가능했다는 뜻이다. (56쪽)

특정 직업이나 조건, 성별군에서 유독 사회 부적응이 많이 발생하고 급기야 자살로 이어진다면, 이는 개인의 탓으로만 볼 수 없다. (97쪽)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귀신 이야기로] 형성된 공포는 당대 사회의 건강성을 반영하는 지표가 된다. 귀신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사회가 소외시키고 배제시킨 대상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발설하는 증표가 되기 때문이다. (176쪽)

책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저자 최기숙의 멋진 해석들이 적지 않습니다. 귀신에 관한, 자살에 관한, 그리고 귀신이야기에 관한 사회적-역사적 접근이 갖는 힘이자, 이 책이 갖는 또다른 매력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너무 맞는 이야기라 "아. 그렇네?"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왜, 나는 이런 생각을 못했던 거지?"라는 자괴감마저^^ 들게 하는 탁견들, 책을 읽는다는 게, 이런 생각들을 만나는 재미와 의미를 찾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4. 으응? 고개를 끄덕이기 힘들었던 몇몇 대목들

남자 귀신에게서는 불행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다. 사대부 남성 스스로 불행한 최후를 상상하기조차 싫어했기 때문일까. ... 판타지라는 상상의 공간에서조차 사대부의 몰락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41쪽)

남자 귀신은 죽어서도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주인으로서의 역할을 끊임없이 행사하며 현실을 간섭하고 지배했다. (46쪽)

이야기 속의 남자 귀신은 가장으로서의 의무에 충실했을 뿐더러, 살아서 누렸던 권위와 헤택을 이어가고자 했다. 사후 세계에서까지 가부장제를 완벽하게 재현한 것이다. (50쪽)

(<죽어서도 존경받는 남자 귀신, 현실을 통제하는 파수꾼>에서)

책을 읽어나가면서 전체적으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으응?"하는 의문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기 힘들었던 대목들도 더러 있었습니다. 어차피 역사속 남성 위주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 위에 인용한 바와 같은 지적을 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요.

한편, 책 전체에 걸쳐서 견지되고 있는 듯한 여성주의적 시각이 좀 뜬금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도, 제가 여성주의적 시각에 동의하지 못해서가 아니라(그것에 대해선 충분히 동의합니다), 그것이 조선시대 같은 역사속 남성 위주 가부장제 사회를 향하고 있어서입니다. 가부장제가 옳다는 것도 아니고 여성주의적 시각이 틀렸다는 것도 아닙니다. 역사속 가부장제 사회에 대한 여성주의적 접근법이 공허하거나 무의미하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5. 분석! 그저 혀를 내두르게 되는 파고들기

고소설에는 주인공들이 자살 충동을 느끼거나 실제로 자살을 기도하는 이야기가 전한다. 줄거리가 정리된 고소설 865편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자살 일화가 나오는 작품은 그중 112편으로 전체의 13퍼센트를 차지한다. 자살 기도자는 모두 147명으로, 한 사람이 여러 번 자살 기도를 하는 경우도 있기 대문에 횟수로 따지면 총 156회의 자살이 발생한다. 이 중에 여성 자살을 다룬 작품은 103편이다. 자살을 시도한 여성 인물은 모두 128명이고 총 횟수는 141회다. 남성 인물의 자살을 다룬 것은 총 16편이며 자살자 수는 19명이고 횟수도 같다. 자살 시도는 하지 않고 자살 충동만 표현한 작품은 4편이다.

(102쪽, <자살한 여자, 귀신이 되다>에서)

보통의 경우 분석의 엄두가 나지 않을, 거의 천 편의 고소설을 분석했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것을 자살의 성별과 횟수를 변수로 파고들어 결과를 내놓는다는 것이 혀를 내두를만 합니다. 한 사람이 자살을 여러 차례 시도한 경우를 계산하는 대목에선 그야말로 "이 사람이 진짜~"라는 생각을 했다죠. 이어지는 123쪽 125쪽에서 이에 버금가는 자료와 통게를 내놓고 있다죠.

고소설에 등장한 자살, 귀신, 처녀귀신, ... 등등의 이야기에 관심이나 호기심이 동하는 분이라면 일독을 권하고 싶어진 것은 바로 이런 대목들 때문입니다. 

 

6. 리뷰의 요약 (긴 글 읽기 힘들어하는 분들을 위한! ^^) 

- 우리 고소설에 나타난 '처녀귀신'에 관한 연구.
- 이 책이 아우르는 바는, 제목처럼 '처녀귀신'에만 국한되지 않음.
- 남녀를 총괄한 뭇 '귀신'에 관한 저자의 생각을 적고 있음.
- '귀신'의 존재 조건으로서의 '자살'에 관한 서술과 분석도 자주 등장.
- 물론, '여자귀신' '처녀귀신'이 고소설에 유달리 자주 등장하는 이유도 깊이 파고듦. ^^ 

 

p.s. 

2010년 7월 15일(목)부터 7월 17일(토)까지, 3일간 읽었습니다. 책 두께도 두껍지 않고 판형도 작은 편이어서 오래 걸려 읽을 책은 아닙니다. 물론, 내용도 어렵다거나 할 정도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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