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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세트 - 전3권 ㅣ 샘깊은 오늘고전 15
유성룡 원작, 김기택 지음, 이부록 그림 / 알마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결국 한 민족이 가장 굴욕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전쟁에서 패한 후일 것입니다. 전략적이든 뭐든 쉽사리 전쟁을 입에 올리는 사람은 '인간에 대한 존경'부터 배워야할 사람이겠지요. 우리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장면을 꼽자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이 빠지지 않을 텐데요, 임진왜란의 모습을 담은 가장 유명한 사료는 '난중일기'가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난중일기는 일기라는 특성과 이순신 개인의 성향 때문에 전쟁의 전체적인 모습을 읽어내기는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때문에 유성룡이 남긴 '징비록'에 눈이 가게 되는군요. 권력의 중심에서 임진왜란의 양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볼 수 있었던 인물이 유성룡이고 그가 은퇴 후에 회한을 담아 쓴 책이 '징비록'이니까요.
사실 이 책에서 가장 눈길이 간 것은 편저자가 김기택 시인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김기택의 시를 읽어본 적이 있는 분이라면 이 시인이 일상의 것을 얼마나 다르게 포착해서 그려낼 수 있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아무리 편저라 하더라도 거기에 김기택 시인의 손길이 닿아 있다면 무언가 다르지 않을까 기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까지 시인의 색이 느껴지진 않았던 것이 사실인데요, 아마도 이 책의 대상 연령대가 청소년 이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오히려 갈수록 인상적이었던 것은 책에 실린 삽화들이었습니다. 전통적인 기법으로 그려내면서도 '모던하다'는 인상이 앞서는 찡한 삽화들은 책의 성격과 잘 맞어떨어져서, '이부록'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화가를 기억하게 만듭니다. 개인적으로는 분량상 3권의 분책은 그닥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만, 역시 대상 연령대를 고려해볼 때 당연한 선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인 아쉬움을 잊을만큼 전체적인 디자인도 깔끔하고 고급스럽기도 하고 말이죠.
책의 겉보기에 대한 이야기가 길었네요. 내용으로 들어가자면 신기할만큼 '징비록'의 내용은 익숙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일화들조차도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었던 것들이었습니다. 징비록을 사료로 삼은 2차 저작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반증이 아닐까 추론해보게 되는군요. 왜란 직전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두 사신들의 전혀 다른 평가는 당시 당쟁으로 인해 판단력을 상실해가고 있던 정치가들의 모습을 비판하는 예로 자주 언급되는데요, 이 책이 바로 그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곧이어 왜란이 시작되고 신립의 패배로 정점을 찍는 조선군의 무기력한 연패의 모습, 마침내 도성을 버리고 피난을 하는 선조의 모습이 그려지지요. 사실 선조의 피난 이야기를 들으면 언제나 데칼코마니처럼 떠올리게 되는 것이 한국전쟁 당시의 이승만의 피난일 것입니다. 김기택 님의 부연글에서도 빠지지 않고 언급이 되고 있는 부분인데요, '징비'라는 이름이 '지난 허물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뉘우치고 삼간다'라는 뜻임을 생각해보면 아이러니도 이만저만 아이러니가 아닐 것입니다. 사실 수성하여 백성과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이 거시적으로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무기력한 모습을 보일지라도 중추가 살아남아 있는 것과 그조차 사라지는 것의 차이는 작지 않으니까요. 그렇다곤 해도 그런 상황을 막기는커녕 예측조차 못했던, 아니 오히려 초래했던 어리석은 행태와 전후에도 스스로의 책임을 눈감아버린 뻔뻔함은 답답할 따름입니다.
이후, 명나라의 개입과 의병의 적극적인 저항, 그리고 이순신으로 대변되는 관군의 반격이 차례로 그려집니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욱 자세하게 이순신의 활약상이 묘사되어 있는데요, 특히 전장의 지도를 다수 포함하여 전투의 양상을 세부적으로 그려낸 점이 의외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징비록이 이순신의 죽음으로 실질적인 마무리가 지어진 것은 임진왜란에 대한 유성룡의 판단을 드러낸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만년에 이 책을 쓰면서 선조와 광해군의 권력 갈등과 신료들의 보신 행태를 지켜보는 유성룡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만년의 그의 모습을 그려보노라면 안쓰러움이 느껴지기도 하네요.
역사의 중요성이야 두말할나위 없겠습니다만 특히 위기와 극복의 장면만큼은 아이들에게 반드시 알려주어야할 부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인지 이번 '징비록'은 상당히 좋은 인상으로 기억에 남습니다. 간결한 내용 역시 적절한 선택을 거쳐 적합한 분량과 관점으로 정리되어 있고요. 알마에서 펴내는 고전 시리즈가 상당히 훌륭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사실 나름 역사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한 저도 이 시리즈를 보다 보면 모르는 내용이 태반이라 부끄러울 판이네요. 그런 와중에 아이들에게 교육 운운 하는 것도 염치없는 일이겠습니다만, 분명 아이들의 눈을 밝히는 좋은 지침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정보가 충분하면 우자도 현명한 판단을 내린다는 말은 역사 교육에도 틀림없이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