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사회 - 폭력은 인간과 사회를 어떻게 움직이는가?
볼프강 조프스키 지음, 이한우 옮김 / 푸른숲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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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적 전통이 길어서인가, 독일이나 프랑스의 인문서들은 시인 듯, 철학인 듯 알쏭달쏭한 언어를 구사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언어로 개념에 다가가려고 해도 미끄러져내릴 뿐임을 인지하면서 이들은 언어를 뛰어넘고자 언어를 사용하되 동시에 파괴해가면서 글을 쓴다. 이러한 글은 반복하여 읽고 읽어 작가 자신의 언어체계를 느껴가야 하기에 어려울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저자는 그나마 일상적인 언어를 구사해주는 편이다. 알아들을 수는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알아 들을 수 있다는 말이 이해하기 용이하다는 말과 동의어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지극히 단도직입적이고 단정적인 태도로 서술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간결하면서도 방향성을 읽어내기 어렵게 논지를 펼쳐가기 때문에 작가의 의도를 읽어내는 것이 쉽지 않다. 

이 책의 목차를 보아둔다면 다소 책의 이해에 도움이 되리라 본다.

<질서와 폭력>, <무기>, <폭력과 격정>, <폭력, 불안, 그리고 고통>, <고문>, <구경꾼>, <사형 집행>, <전투>, <사냥과 도주>, <학살>, <사물들의 파괴>, <문화와 폭력>의 12개 장이다.

이 책에서 사용된 작가의 인식 구조는 첫 장인 <질서와 폭력>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작가는 기본적으로 사회계약설에 대한 사회 형성을 긍정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 지친 인간들은 권력을 위임하여 사회를 구성한다. 그렇게 형성된 사회는 기피 대상이었을 폭력을 고도화하여 도리어 인간을 목조르게 되고, 질식의 위기에 처한 인간은 그 사회를 파괴함으로써 다시 야생의 상태로 돌아간다. 그리고 야생의 폭력을 피하기 위해 다시 사회를 구성하고... 이처럼 작가는 폭력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으로 규정짓는다. 그렇기에 폭력을 직시하여 그 속성을 이해해야만 한다고, 거기에는 어떠한 미화와 비하도 없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나머지 장들은 이러한 작가의 사고를 구체화하고 있을 뿐이다.  

작가는 고찰을 위해 도덕이나 윤리론의 안경보다는 미학의 안경을 쓰는 쪽을 택한 듯하다. 거기에 건조한 언어가 더해지다보니 자칫 작가가 폭력을 긍정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가 있을 수 있어 보인다. 하지만 책의 3분의 1정도만 읽어가도 작가에게 그러한 의도는 전혀 없음을 알 수 있다. 작가는 폭력에 일고의 아름다움도 없다고 단정짓는다. 폭력은 폭력일 따름이다. 혐오의 대상이며 피할 수 있다면 피해야 할 재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본성은 그러한 폭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이상 인간이 만들어낸 그 어떤 문명도 결국 폭력을 고도화하고 강화할 뿐이라고 결론짓게 된다. 

단정적으로 책에 대해 소개해보았지만 하나의 색으로 칠해낼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사실 작가 자신이 한가지 색을 지양하고 있다는 인상이 든다. 그리고 한번 읽어보았을 뿐인 내가 책을 충분히 소화했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더할 수 있는 말은 있을 듯하다. 즉, 이 책은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제시하기에 감정적으로는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잠시 감정의 문을 닫아두고 작가의 말에 집중해보면 하나하나의 고찰이 깊이있고 그만큼 설득력 있음을 알 수 있게 되리라는 점이다. 작가의 눈을 빌려 잠시만이라도 현실을 돌이켜본다면 폭력이 얼마나 근원적인 것인지에 대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과 사회에 대해 비관적인 것도 문제지만 낙천적인 것도 못지않게 문제가 된다. 어떠한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이든 이 책을 직접 읽게 된다면 세계를 보는 자신의 눈에 그늘은 없었는지, 혹은 눈부심은 없었는지 돌이켜볼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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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style 스타일 치즈 레시피
고희성 지음 / 영진.com(영진닷컴)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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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자연 치즈로 만들 수 있는 92가지 요리를 소개하고 있는 조리책이다. 저자가 남자라는 점도 신선하게 다가오는데, 취사병으로 군대를 다녀온 뒤 치즈에 '꽂혀' 그 후로 치즈 요리에 목을 메게 되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치즈를 참 좋아하지만 실제로 치즈를 먹게 되는 것은 피자, 스파게티, 혹은 와인 안주를 먹을 때 정도 뿐이었던 것 같다. 때문에 치즈로 92가지나 되는 요리를 만들 수 있다니 놀라운 생각이 앞섰다.

이 책은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에서는 치즈의 역사에 대한 간단한 소개, 치즈를 보관하는 법과 계량법 및 간단한 조리 요령을 소개하고 있다. 2장에서 6장까지는 주제별로 다양한 치즈 요리를 소개하고 있다. 각 요리별로 2쪽에 걸쳐 조리법을 소개하고 있는데, 왼쪽 장에는 완성된 요리의 사진을 실어두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조리법은 1쪽 정도이다. 이것으로도 알 수 있듯 대부분의 조리법이 상당히 간단하다. 간간히 고급스러운 조리를 필요로 하는 요리도 있지만 대부분 쉽게 도전해볼 마음이 들 정도이다. 사실 조리법보다는 신선한 치즈나 몇 개의 특이한 식재료를 구하는 쪽이 까다롭지 않을까 생각된다. 개인적으로는 치즈 주먹밥이라던가, 치즈 죽 등의 요리가 간단한 아침식사로 적당해서 눈에 띄었고, 조금 공은 들겠지만 다양하게 소개되어 있는 카나페 요리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실제로 만들어본 요리는 아직까지 4가지 정도지만 차차 시간을 들여 하나씩 도전해볼까 생각중이다.

중간 중간 소개되는 '치즈 팁' 역시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치즈에 대한 토막상식을 100자 정도로 담아냈는데, 지식도 되고 실제의 조리에도 도움이 될법한 내용들이다. 요리책의 꽃이라 할 음식 사진들이 매우 풍부하게 실려 있어 식욕과 도전욕을 동시에 자극하는 점도 매력적이다. 치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책을 읽게 되면 이런 요리도 있구나 감탄하면서 도전해보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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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히어로 미국을 말하다 - 슈퍼 히어로를 읽는 미국의 시선
마크 웨이드 외 지음, 하윤숙 옮김 / 잠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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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개인적으로 만화를 아주 좋아합니다. 남아수독오거서라고 하지만 저는 만화수독오거서 쯤 될 것 같군요. 자랑스럽다는 것은 아니고요(그렇다고 부끄럽다는 것도 아니지만요), 그렇게 읽은 만화의 대부분은 일본만화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워낙 우리나라 코믹스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일본만화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런 제가 미국의 코믹스를 접하게 된 것은 소위 할리우드 히어로 영화가 인기를 끌게 된 이후가 아니었나 합니다. 물론 수입 1세대라 할 수퍼맨, 배트맨도 열심히 보았지만 코믹스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기 때문에, 2세대인 스파이더맨, 엑스맨 등의 영화가 개봉된 이후부터 코믹스를 구해서 보기 시작했지요. 아무래도 일본 만화의 수혜를 받고 자라서인지 확실히 미국의 코믹스는 굉장히 색다른 느낌이더군요. 일단 그림체나 채색, 퀄러티는 차치하더라도 만화의 주제 범위가 매우 다릅니다. 일본 코믹스는 매우 넓은 범주의 주제를 다루고 있어 일괄적으로 말하기 어렵지만 미국 코믹스는 철저히 히어로물에 집중되어 있더군요. 간혹 비주얼노블 류의 변종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히어로물이라는 범주에 포섭된다고 봐도 무리는 없어 보입니다. 이러한 코믹스 히어로들은 대부분 매우 적극적이고 도전적이고 진취적이며 낙천적인 동시에 파괴적입니다. 매우 미국적이지요. 흔히 DC와 마블사를 양대산맥으로 하여 대비시키는 경우가 많지만 제가 보기에 어느 쪽이든 미국인의 성향을 동전의 양면처럼 비추어낼 뿐 지향점에서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저의 이런 인식은 현실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접할 수 있는 미국 코믹스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적극적으로 원서를 구해다가 읽어갈 정도의 마니아는 아니기 때문에 유행하는 소수의 코믹스만 접해본 것이 사실이니까요. 일본 만화에 질리기도 했던지라 미국 코믹스에 보다 깊이 빠져보고 싶은데 그럴만한 계기가 부족했다는 이야기도 되겠지요. 흥미를 유발할만한 동인이 없었달까요.. 

왜 이리 장황하게 개인적 이야기를 하느냐면 제가 이 책에 기대했던 바가 무엇인지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다. '슈퍼 히어로, 미국을 말하다' 이 제목을 접하는 순간 저는 이 책이 다양한 슈퍼 히어로를 소개하면서 동시에 그에 담긴 미국적 정서에 대해 흥미있게 성찰하는 책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후자는 어느 정도 긍정되지만 전자에 대해서는 실망해버렸기 때문에 '주관적'으로 좋은 평가를 못하겠다는 이야기지요^^; 이 책에서 다루는 히어로들은 슈퍼맨, 배트맨, 왓치맨, 엑스맨, 판타스틱 포, 헐크 등입니다. 눈치 채셨지만 모두 영화화된 히어로들입니다. 이 책에서 다루는 히어로들은 코믹스 속의 히어로가 아니라 영화 속의 히어로였던 것이지요. 그게 무슨 상관이냐 하실 수 있겠지만 코믹스를 본 사람의 입장에서는 영화 속의 히어로상이 코믹스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따라서 제 입장에서는 이 책의 분석에 대해 공감할 수 없는 면이 적지 않았다는 이야기지요. 제가 알지 못하는 히어로들이 다양하게 소개되었다면 히어로물에 낯선 분들께는 오히려 실망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요. 하지만 사실 이 책의 서술이 히어로물을 보지 않은 사람에게도 충분히 이해가 갈 정도의 선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이 크게 문제되지는 않을 듯 합니다. 그렇다면 미국적 정서에 대해서 충분히 드러내주는가 하면 이것도 다소 미흡한 면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히어로를 소재로 플라톤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혹은 신학을 풀어내고 있는데요, 물론 이들이 서양 철학의 원류임에는 틀림없으나 그 위에 충분히 미국적인 색깔을 칠해주지는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히어로라는 소재에 충분히 버무려내지 못하고 철학개론 시간에 배웠을 입문적 내용들을 소개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는 것이지요. 이래서야 굳이 히어로라는 소재를 사용한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사실 특수한-혹은 사람들이 특수할 것이라고 기대하는-소재를 사용한다면 주제의식도 다소간 특수해야 한다고 봅니다. 조금 난해하더라도 특화된 내용과 깊이를 담아내지 않으면 안될텐데 대중에의 접근성을 중시해서인지 이 책은 밋밋한 접근법을 택하는 선에서 그쳐버린 것이지요. 비슷한 경향을 가졌다고 할 '철학으로 매트릭스 읽기'라는 책의 전략과 비교해보았을 때 다소 아쉬웠던 부분이었습니다. 

이상은 제 '주관적'인 견해고요, 좀 더 '객관적'으로 보자면 이 책은 히어로물에 익숙치 않은 사람에게 히어로물을 보는 미국인의 시각을 무난하게 소개해내고 있습니다. 정확하게는 히어로물을 통해 미국을 읽어내는 책이라기 보다는 미국인의 입장으로 히어로물을 읽어내는 책이라고 해야할 것입니다. 철학적으로 인식론보다는 윤리론을 많이 다루어내고 있는데요, 다양한 작가들의 글을 모아 묶어냈기 때문에 재미나 논지전개의 수준에 있어서 다소 기복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전반부의 글보다는 후반부의 글들이 좀 더 흥미로웠는데요, 몇몇은 미국적 위트가 듬뿍 담겨 있어서 유쾌하게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보기에 괜찮은 책이지요. 

첨언하자면 불황이 계속됨에도 점점 더 다양한 책을 출간하는 출판계의 발전이 엿보여 반가웠고요, 다소 마이너하게 보이는 이와 같은 책을 번역하고 출판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텐데 공들여 책을 내준 출판사측의 노력이 기뻤습니다. 신생 출판사가 아닌가 생각되는데요, 발간 예정작들을 보니 다소간 도전적인 작품들로 보이더군요. 점점 더 성장하고 발전하기를 기원하며 차기작들을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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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충분한 우주론 - 고전이론에서 포스트 아인슈타인 이론까지 비주얼 사이언스 북 1
다케우치 가오루 지음, 김재호.이문숙 옮김 / 전나무숲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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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입견일 수도 있겠으나 개인적인 경험에서 볼 때, 일본에서 출간된 책들 중 가장 뛰어난 분야는 추리 미스테리 소설과 과학 교양서 분야가 아닌가 한다. 과학 교양서의 경우, 특수하게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내용의 책들보다 특히 대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내는 다이제스트적인 책들이 많이 보이고 그만큼 뛰어나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축소와 개량에 뛰어나다는 일본인의 기질을 반영하기라도 하는 것인가 싶은 생각도 해보게 되는데, 이 책 한 권으로 충분한 우주론은 그런 개인적인 인상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주는 책이다. 

이 책은 비주얼 사이언스 북 시리즈의 제1권이다. 책을 시리즈로 발간할 때 아무래도 가장 신경쓰게 되는 것이 1권일 터인데, 이 책은 그만한 값을 하고 있다고 보인다. 우선 저자 다케우치 가오루는 고에너지 물리학을 전공한 학자이자 가명으로 추리소설을 쓰기도 하는 작가라고 한다. 현대의 우주론이 결국 물리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볼 때 저자가 물리학 박사라는 점은 내용의 충실성을 신뢰할 수 있게 해주며, 거기에 추리작가로써의 필력과 유연한 사고가 더해져 다이제스트 북에 없어서는 안될 재미를 보장해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전개방식은 기초적인 우주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하여 아인슈타인 이후의 초끈이론으로 끝맺는 무난하지만 적절한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리고 호흡을 짧게 하여 하나의 소주제당 2~3쪽 정도의 분량을 할당하고, 분량의 상당부분은 시리즈 이름에 걸맞게 표나 그림, 사진 등에 할당하고 있다. 쉽게 서술한다고 해도 부분부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다양한 비주얼적 요소를 사용함으로써 보다 용이하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만약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꼭지가 있어도 분량이 적기 때문에 적당히 읽어두고 다음 꼭지로 넘어가는데 부담이 없다는 점도 훌륭하다. 물론 요약이 불가능한 부분을 요약한다던가, 도저히 쉽게 납득시킬 수 없는 부분은 적당히 넘어가고 있는 부분도 있어 우주론에 대한 배경지식이 많은 사람의 경우에는 아쉬움을 느낄 수도 있겠으나, 이 책의 대상 독자를 감안해본다면 거부감을 주지 않도록 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배경지식이 풍부한 사람이라도 전문가가 아니면 이 모든 내용을 알 수 있을까 싶을 만큼 풍부한 영역을 망라하고 있어, 우주론 전반에 대한 정리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도 훌륭한 선택이 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이 시리즈로 이 책에 이어 지구사, 양자론, 시간론 편이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몇권의 책을 보았지만 아직도 과학이라기보다 철학처럼 느껴지는 양자론이 어떻게 풀이되어 나올지, 양자론 편의 출간이 기대된다. 열심히 과학을 공부하고 있을 중고등학생 및 개인적으로 과학에 흥미가 많은 일반인들에게 추천할만한 책들이 계속 출간된다니 반가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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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이데올로기, 책을 학살하다 (양장)
레베카 크누스 지음, 강창래 옮김 / 알마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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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이데올로기, 책을 학살하다' 상당히 자극적인 제목이다. 책의 내용을 한줄로 요약하는 것이 제목이라고 한다면 이만큼 적절한 제목도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원제가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Libricde", 인종말살을 뜻하는 genocide나 문화말살을 뜻하는 ethnocide와 병렬시킬 수 있는 단어로써, 작가는 libricide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는 올라와있는 단어인 모양이지만 실제로는 거의 쓰이지 않는 이 단어를 작가는 '특히 20세기에 대규모로 저질러진, 정부가 승인한 책과 도서관 파괴를 가리키는 용어'라고 정의하고 있었다. 이처럼 작가는 책의 학살이 정치적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현상에 주목하고 그것이 가지는 의미를 전방위적으로 고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논문을 연상시키는 문투와 전개방식을 택하고 있으며, 전체를 구성하는 9개의 장 역시 논문의 구조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다. 우선 1~3장은 libricide에 대한 개관 및 도서관의 발달사와 그 기능에 대하여 살펴본다. 이 부분에서 이미 작가의 주제의식과 결론이 명백하게 제시된다. 전문적이고 이론적인 내용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그다지 재미있는 부분은 아니었고 따라서 수월히 읽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4~8장은 이런 주제를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역사적 예화를 들어주고 있기 때문에 좀 더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다. 인종주의와 민족주의의 대명사라 할 나치 독일와 발칸반도를 황폐화시킨 세르비아, 이란과 전쟁을 벌이고 쿠웨이트를 침략했던 이라크, 문화혁명의 이름 하에 피의 숙청을 행한 중국, 그리고 그러한 중국의 강대한 간섭하에 소멸의 위기에 놓은 티베트를 차례로 살펴보면서, 20세기의 libricide는 어떤 것이었는지를 정치, 사회, 문화 면에서 해부하다시피 파헤쳐낸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9장에서는 전체적인 내용을 요약하면서 libricide를 막기 위한 국제적인 노력을 강조하며 끝맺음을 짓는다.

이 책에서 특히 인상깊었던 것 중의 하나는 풍부한 역자의 주석이었다. 이 책은 느티나무도서관 장서개발전문위원인 강창래라는 분께서 번역하셨는데, 용어의 설명이나 역사적인 배경지식이 필요한 부분에서는 어김없이 주석이 달려 있었다. 책이 역자의 서문으로 시작하여 역자의 후기로 끝나고 있는데, 찬찬히 읽어보면 역자가 얼마나 공을 들여 번역을 했는가를 엿볼 수 있었다. 외국서적, 특히 전문적인 내용의 책일 경우, 적절하지 못한 번역은 안그래도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을 더욱 읽기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공들인 번역과 풍부한 주석이 더해져 어려운 책을 보다 편안한 책으로 만들어낸 듯하다. 

문득 언령(言靈)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주술적인 의미가 담긴 이 말은 한번 뱉어진 말이 얼마나 강력하게 사람을 구속할 수 있는가, 그리고 말이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사람을 해할 수 있는가를 깨달은 대중의 현명함을 드러내고 있다. 한번 뱉어지면 휘발되어 버리는 말이 그럴진대 그 말을 기록한 글은 어떠할 것인가, 또 그 글을 가지고 인간의 모든 감정과 지식과 의지를 쌓아낸 책은 또 어떠할 것인가.. 권력자라면 누구든 지식이 권력임을 알고 있기에 지식의 근본인 책을 지배하고 때때로 파괴하려는 노력은 역사가 계속되는 한 끊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책과 사람은 학살할 수 있을지언정 언령(言靈)보다 강력한 서령(書靈)은 죽지 않았다. 책을 학살하는 이들이 스러지고 난 후에도 결국 서령(書靈)만은 오롯이 남아있을 터..

이데올로기에 담아낸 어리석은 한줌 욕심을 버리고 책에 담겨진 인류의 의지에 대해 생각해보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담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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