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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니치 코드
엔리케 호벤 지음, 유혜경 옮김 / 해냄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보이니치 코드". 낯선 이름이다. 팩션 소설이라니 틀림없이 역사적 유물이 아닐까 추정해보지만 너무나도 낯선 이름. 소설을 읽을 때는 일부러 배경지식을 만들고 보지는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왔지만, 호기심이 못이겨 결국 인터넷을 검색해보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너무나도 쉽게 사본을 찾아내어 읽어볼 수 있었다. PDF 파일로 만들어져 공개되어 있었던 것이다! 대략 200쪽에 걸쳐 다양한 식물과 천문도, 인물상이 담겨져 있으며, 그 여백에는 처음보는 문자가 빽빽히 기입되어 있었다. 무리도 아닌 것이 이 문자는 지금까지 아무도 해석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심지어 문자 체계이기는 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장난인지조차 구별하기 어려워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을 정도라는 것. "해석이 불가능한 소재를 가지고 어떻게 팩션을 쓴거지?"하는 생각과 함께 두툼한 양장본의 두께는 이 책이 쉽지만은 않겠구나 예측을 하게 해주었다.
소개가 될 정도로만 줄거리를 이야기하자면 이 책의 화자는 예수회에 소속해있는 엑토르 신부이다.('엑토르'는 영어식으로 '헥토르'와 같은 이름이 아닌가 한다. 소설의 전개상 그런 언급이 있었기 때문인데, 하필 아킬레스의 손에 죽임을 당한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를 주인공의 이름으로 삼은 것도 의미심장하다.) 일반적인 신부의 이미지와 달리 인터넷에 능하고 호기심도 많은 그는 보이니치 코드에 홀려 인터넷상의 동료들과 힘을 합쳐 해석에 몰두해왔다. 그러던 어느날, 누군가가 보이니치 문자로 씌인 협박의 글귀를 그가 재직하는 교회의 벽에 적어둔다. 곧이어 인터넷 동호회에서 함께 해석작업을 해왔던 후아나가 협박을 받고 있다며 엑토르를 찾아오고, 엑토르는 이러한 협박이 보이니치 코드의 해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추정한다. 결국 그는 후아나, 그리고 또 다른 동호회 동료인 천문학자 존과 더불어 공동 조사 작업에 나서게 되는데...
요즘 팩션 소설이 붐을 이뤄 엄청나게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듯하다. 그 소설들을 읽어가다보면 나름대로 2부류로 나눌 수 있지 않는가 생각된다. 하나는 움베르토 에코의 작품처럼 자신의 철학이나 주제를 전달하여 지적 충족감을 느끼게 만드는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댄 브라운의 작품처럼 역사적 사실들의 미스테리적 측면을 극화하여 소설적 재미를 주는 부류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 책은 후자에 속하지 않는가 한다. 두툼한 이 책의 상당부분은 보이니치 코드와 관련된 역사적 배경과 인물에 대한 설명에 할당되어 있다. 대부분의 독자가 '보이니치 코드'라는 이름조차 낯설 것임을 감안해보면 당연하다면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작가는 보이니치 코드가 탄생한 시대의 학문적 풍토와 역사적 분위기를 설명하는 것을 소설의 목적 중 하나로 삼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그 결과 스토리의 진행이 빠르지 않고 설명이 많다 보니, 다빈치 코드적인 스릴과 속도감을 기대한 이들에겐 다소 실망스러울지도 모르겠다. 더하여 마지막 결말 부분이 애매하기 때문에 명쾌한 결말을 선호하는 이들에게는 더 그러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한장한장 느긋하게 읽어나가다 보면 이 책이 안겨주는 지적 충족감이 적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개인적으로 물리학과 역사에 관심이 있어 작가의 세세한 설명이 재미있게 다가오기도 했지만, 누구라도 이 책의 꼼꼼한 설명과 풍부한 삽화를 읽다보면 보이니치 코드의 탄생과 얽혀진 역사적 사실들이 흥미롭게 다가옴을 깨닫게 되리라 생각한다. 더하여 곳곳에서 엿보이는 유머감각과 경쾌한 캐릭터들이 주는 재미도 쏠쏠하다.
작가는 교묘하게 현실과 가상을 결합시켜, 읽다 보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창작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현실과 모순되는 범위까지 상상력을 뻗어가는 것은 철저하게 자제하고 있기도 하다. 소재가 해석불능인 보이니치 코드인 바에야 작가의 이런 태도로는 애매한 결말이 나올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예 상상력으로 뒤덮버려서 소설적 재미를 주었어도 괜찮지 않았을까?'하는 욕심도 생기기는 한다. 한편으로 '다빈치 코드'의 파급력이 워낙 컸기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이 책에서도 비슷한 구성을 원했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만약 그러한 구성을 택했다면 책을 덮은 후에 느끼게 되는 지적 충족감은 줄어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두툼한 책을 천천히 읽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색다른 느낌의 팩션을 찾는 사람이라면, 팩션을 읽어가며 스릴감보다 지적 쾌감을 크게 느끼는 사람에게라면 읽어볼만한 괜찮은 소설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