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아이 (백색인), 신들의 아이 (황색인)
엔도 슈사쿠 지음, 이평춘 옮김 / 어문학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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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사쿠라는 이름, 들어는 보았으나 작품세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있었으나 이 책(혹은 그의 작품 세계 전체?)의 특징을 규정짓는 것은 2년간의 프랑스 유학과 귀국이 아닌가 한다. 유학 후 '신의 세계'를 경험한 '신들의 세계'의 자식인 자신에 대해 쓴 소설이 '아덴까지'라는 작품인데 이 소설을 쓰고 6개월 후에 이 책에 실린 '백색인'을, 그로부터 6개월 후에 '황색인'을 썼다고 한다. 연도는 1955년, 나이는 대략 35세 정도였을 그... 태생적으로 카톨릭 인이었던 그에게도 시대의 특이성과 문명의 이질성은 폭풍처럼 다가왔던 것일까? 이 소설은 그가 느낀 '이물감'을 거침없이 담아낸다. 

제목도 그렇고 책의 구성도 그렇고 작가의 경력으로 봐도 그렇고, 두 편의 소설이 서로 마주보고 대치하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어설프게나마 들어본 적이 있는 일신교와 다신교가 가지는 철학적 차이를 떠올려보기도 했고 말이다. 무엇보다 상당히 경건하고 차분한 분위기의 소설이 아닐까 기대했었다. 그러나 왠걸? 이러한 기대들은 하나같이 어긋나버리고 말았다.  

이 소설은 싸늘하게 몰아치는 겨울바람처럼 매섭고 격렬하다. 인물들은 모두 어딘가 일그러져 있으며 스스로의 욕망과 죄책감에 휩쓸린 채로 살아간다. 백색인의 '나'는 자신의 이지러짐을 세계에 관통시키려 드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자신과 쌍둥이처럼 닮았으면서도 그 사실을 부정하며 신이라는 이름의 세계로 자신의 이지러짐을 채우려하는 신부 자크는 용납할 수 없는 존재였다. 카인이 아벨을 망가뜨리듯, 그는 자크의 유일한 욕망인 마리 테레즈를 이용하여 자크를 파멸시키고 죽음으로 몰아간다. '나'는 자크를 죽임으로써 세계의 무의미를 증명해냈지만 결국 황폐하고 무감동할 뿐... 황색인은 세 인물의 고백이 어우러지지만 가장 중심에 있는 인물은 '듀랑 신부'이다. 선교사로 일본에 와서 오랜 세월 신부로 봉사해왔던 그는 기미코라는 여인과의 만나 '타락'한 뒤, 죽지도, 살지도 않은 상태로 삶을 살아간다. 죄책감에 빠진 이들이 그렇듯 그는 스스로를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던져놓고, 마침내 '브로우 신부'를 파멸시킴으로써 자신의 '신'을 버린다. 신이 없기에 황색인은 평온하고 무감할 수 있다고, 그들을 닮는 것이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구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황색인의 경우, 듀랑 신부의 입을 빌어 신이 지배하는 세계와 신들이 지배하는 세계를 대조시키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이런 점이 그다지 중요하게 부각되지는 않는다. 듀랑 신부는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 신과 신들의 세계를 충돌시켰을 뿐이다. 하물며 백색인에서의 '나'는 무신론자이고, 대적자 자크 신부의 신앙 역시 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비롯된 전형적인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이들에게 신이 있다면 그건 오히려 '운명'이라는 세계의 무자비함이다. 자크 신부나 브로우 신부는 그것을 숙명이라 읽어냈을 뿐이고, 백색인 '나'나 기미코는 그렇게 보지 않았을 뿐... 차라리 전쟁이라는 욕망의 향연장에서 지치고 패배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을 인간상들의 모습, 어쩌면 이 글을 쓸 때 엔도가 느꼈을 무력감이 그 모습에 비추어 보일 따름이다.  

결국 이 한 쌍의 소설은 거울을 마주본 듯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신과 신들은 구원을 주지 않는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장난처럼 운명에 휩쓸려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지푸라기라도 움켜잡지 않으면 버티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렇기에 신의 끄트머리라도 붙들려고 하는 듀랑 신부든, 무의미를 입에 달고 다니는 백색인의 '나', 황색인의 '치바'든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 책은 답하는 이야기라기보다는 질문하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아직 젊은 시절, 전쟁의 상처가 남아있던 시절에 씌여졌던 작품이어서일까? 두껍지 않은 이 책 안에 작가는 평생에 걸쳐 고민해야할 화두를 던져둔 것이 아닐지... 생을 살아가며 작가가 나름의 답을 찾는지는 다른 작품들을 읽어봐야 알 일이리라. 그 답을 들어보고 싶기도, 듣지 않고 싶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며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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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든파티 (반양장) 펭귄클래식 79
캐서린 맨스필드 지음, 한은경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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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린 맨스필드.. 나에게는 낯설면서도 왠지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름이었다. 서문을 읽다 깨닫게 되었지만 예전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그녀의 이름을 접했었더랬다. 한없이 예민하고 그만큼 파괴적이었던 울프와 쌍둥이처럼 보이는 캐서린 맨스필드.. 펭귄 클래식의 이 책은 25쪽이나 되는 분량을 할당하여 로나 세이지의 서문을 싣고 있는데 저자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던 내게는 상당히 좋은 준비운동이 되었다. (서문 자체가 유려하고 아름다워 읽는 맛이 있었다는 점이 더 좋았고..) 뉴질랜드 출신의 그녀는 런던 유학 후 고향에서 유리되어, 아니 정확하게는 스스로 유리됨을 택하여 남은 생을 이방인처럼 살았다고 한다. 그러한 삶의 모습은 그녀의 책에 다양한 모습으로 반영되었는데, 마지막 책인 이 책 역시 이방인의 차갑지만 예리한 눈이 잘 반영되어 있는 듯하다.
 

모더니즘 작가이며 울프와 유사한 면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이해보다는 느끼기 위주로 읽어가야겠구나 생각했다. 지적 성향이 강한 소설일수록 이해하며 읽으려 하면 힘들어지는 경험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책장을 덮고 난 지금 내 머릿속보다는 내 가슴에 남은 흔적이 더 많은 것 같다. 이 책에서 보여지는 작가의 섬세함.. 이러한 섬세함과 차가움은 스스로를 상처입히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섬세한 사람은 오래 살지 못하는 법이라서인지, 그녀 역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하지만... 다만 의외랄까, 예측했던 것만큼 풍자적이고 냉소적이라는 느낌은 아니다. 분명 곳곳에 비웃음을 흘리고 있지만 그 비웃음 끝에는 인간의 다면성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이해하려는 의지가 더 크게 드러난다. '죽은 대령의 딸들'을 읽을 즈음에는 어린 시절 나를 혼란에 빠뜨렸던 안톤 체호프의 '귀여운 여인'이 떠오르기도 했다. 귀여운 여인 역시 책 머릿말에서 풍자적인 내용이라는 설명을 미리 보았음에도 조금도 풍자적인 느낌을 받지 못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 풍자적인 느낌을 받았지만 그보다 더 크게 인간에 대한 작가의 사랑과 연민이 느껴졌다고 해야할까... 아무리 서로를 상처입히고 맹목적으로 자신만 바라보며 살아간다고 해도, 그러한 불완전함이 없다면 인간은 사랑받을 가치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서로를,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모습은 증오스럽지만 또 한편으로는 한없이 사랑스럽기도 하니까 말이다.
 

캐서린 맨스필드.. 모더니즘 작가이자 현대적 여성이었던 그녀는 죽음을 앞두고 병세가 약화되자 마지막에는 도사가 운영하던 비현실적인 공동체에 합류하여 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녀 역시 그녀가 혐오하면서 사랑했던 한명의 인간임을 인정하며 생을 마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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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다락방 - <마음 가는 대로> 두 번째 이야기
수산나 타마로 지음, 최정화 옮김 / 밀리언하우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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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속에서 만나는 책에는 추억이 담기기 마련입니다. 중학교 때던가요, 고등학교 때였던가요, 라디오를 듣던 중 광고로 '마음 가는 대로'라는 책의 소개를 듣게 되었지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실제로 책을 읽어보게 되었고요. 호수에 던져진 작은 돌이 잔잔하지만 확실하게 파문을 일으키듯 그 책 역시 사춘기 시절의 제 가슴을 울렸더랬죠. 그리고 지금, 15년의 세월을 뛰어넘어서 이 책 '엄마의 다락방'과 마주하게 되었군요. 자신이 좋아했던 이야기의 뒷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터, 아마도 많은 독자들이 후속작을 바라는 뜻을 작가에게 표현했던가 봅니다. 작가는 마릿말에서 본래 속편을 쓸 생각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많은 독자가 뒷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을 표현해오자 언젠가부터 마음이 바뀌기 시작했고, 마침내 이 책 '엄마의 다락방'을 쓰게 되었다고 하네요.  

전작이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올가 할머니가 사이가 좋지 못한 손녀에게 보내는 편지였다면, 이번 편은 그 손녀가 그 편지를 읽기 전까지 가족들과의 인연의 끈을 따라가며 삶의 의미를 찾아보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후속편이지만 프리퀄이 되겠군요. 전작과 다름없이 서정적이면서도 담담하게 흘러가는 이 이야기는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인생에서 마주치게 되는 의문들, 가끔씩 떠올라 우리를 괴롭게 만드는 삶의 의미에 대한 고민들을 담담하게 살펴볼 따름입니다. 그렇게 누구나 마주칠 수밖에 없는 평범한 생의 의문을 던져 주었기에 이 책이 더 호소력을 가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간략히 줄거리를 살펴보자면, 부모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이 계기가 되어 할머니와 사이가 좋지 못했던 손녀 마르타는 그런 할머니가 치매로 자신을 잃어버리고 세상을 떠나게 되자 삶의 의미에 회의를 품게 됩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다락방에서 어머니가 남긴 일기와 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너무나도 순진무구했기에 미혼모가 되어 자신을 낳고 자살로 짧은 생을 마친 어머니... 그리고 그 끈을 따라간 끝에 만나게 된 아버지는 지적이지만 위선적인 비겁한 대학 교수였지요. 부모에 대한 실망과 슬픔과 연민의 혼란 속에서 마르타는 이스라엘에 사는 작은 할아버지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습니다. 그 여정 끝에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 마르타는 할머니의 집으로 돌아오고, 마침내 할머니가 남긴 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작가가 단순하게 순진한 어머니를 비웃고 위선적인 아버지를 징벌하려 했다면 감동이 오히려 적었을 것입니다. 할머니와 작은 할아버지의 삶에 더 아름답다고 말하면서도, 마르타의 부모 역시 시대와 상황 속에서 나름의 길을 걸어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삶에 정답은 없다, 하지만 보다 아름다운 삶은 분명히 있는 법이다" 이렇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속삭여주는 것입니다. 분량이 너무 적은 탓에 피상적인 부분도 적지 않았다는 점, 만남과 만남이 결론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느슨하다는 점이 조금 아쉽기도 했습니다만..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 잠시 멈추어서서 작가가 조용한 목소리로 던지는 질문들을 들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누구나 대답할 수 있는, 하지만 정답은 없는 질문들을 말이죠. 그것이 인생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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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참모실록 - 시대의 표준을 제시한 8인의 킹메이커
박기현 지음, 권태균 사진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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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킹메이커'를 집필하신 박기현 님이 새 역사 교양서를 들고 나오셨다. 제목은 '조선참모실록'! 머릿말을 보면 이 책을 전작의 후속편으로 간주해도 될 듯 하다. 

P.4 '조선 왕조를 500년간이나 지속할 수 있게 한 국가경영의 주체는 누구일까? ... 군주가 주체이긴 하지만 ... 몇몇을 제외하면 똑똑하고 리더십이 뛰어나 국가경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고 볼 수 있는 왕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 사실상 국정을 운영하고 견인해간 주체는 참모들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이 책은 이처럼 국정을 운영하고 견인해간 조선시대의 대표적 참모 8명의 삶을 살펴보고 있다. 맹사성, 이황, 이항복, 박규수 등 낯익은 이름도 있고 이준경, 이원익, 김육, 최석정 등 상대적으로 낯선 이름도 있다. 저자는 각 인물에 대해 핵심이 될만한 질문을 던지고 그들의 삶과 정치 인생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그 질문에 답을 하고자 한다. 에컨대 맹사성은 충신불사이군이라는 유교의 대명제를 저버리고 새 왕조에 출사했다. 그 배경에는 어떤 고민이 있었으며 어떤 결단이 있었을까? 저자는 부모의 권유와 가문의 부흥이라는, 유교적 가치인 효에 기반한 대의명분이 있었기에 그가 출사를 결정할 수 있었다고 본다. 다만 이러한 명분이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평생을 은인자중하며 온유하고 겸양한 인물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구성과 더불어 풍부한 사진 자료를 첨부하고 있기 때문에 술술 페이지가 넘어가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아쉬운 점도 없지 않다. 사료가 충분치 않아서인지, 인물에 대한 해석이 평이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론 이 책에서 소개한 인물들이 조선시대의 대표적 관료인만큼 철저할 정도로 성리학적 가치관에 따라 살아간 이들이다 보니 해석의 여지가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말하자면 골수 모범생들이라 다소 심심하게(?) 살아갔다고나 할까... 그렇다곤 해도 책의 제목이나 머릿말에서 현대인에게 성공한 리더십의 모습을 그려내겠다는 작가의 의지를 읽었던 내게, 본문은 지나치게 사실의 나열에만 치중했다는 인상이 강했다. 특히 인물의 비범성을 드러내는 야사를 많이 인용한 것은 흥미를 돋구고 인물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였겠지만, 결과적으로 약간 과했다고 보인다. 비범성을 타고났다, 혹은 열심히 노력해서 비범해졌다는 동어반복적인 해석은 성공적인 리더십을 그려내는데 도움이 되지 않으니 말이다. 물론 이 부분도 상당 부분 조선시대 사료의 한계 탓일 테지만... 

약간의 아쉬움은 있지만, 역사에 대해 흥미가 없는 사람일지라도 재미있게 읽어낼 수 있는 책으로 보인다. 물론 조선사회에 배경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덕일 님의 책들을 아주 좋아하는데 박기현 님 역시 대중 역사 저술가로 조만간 그만큼의 무게감을 가지게 되시기를 기대해본다. 과연 어떤 차기작을 들고 나오실지?? 이번에는 조선의 반역자들은 어떨까? 또다른 색깔의 책을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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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이네 살구나무 - 교과서에 나오는 동시조와 현대 동시조 모음집
김용희 엮음, 장민정 그림 / 리잼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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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조 모음집이라니, 뭘까?' 처음 제목을 보고 든 생각이다. 동시+시조=동시조가 아닐까 생각하면서도, 과연 시조와 동시가 어울리나 싶어 의심스런 마음도 들었다. 아무래도 시조 하면 정형성이 강하고 고전적이며 지적인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자유분방하고 감상적인 동시의 정서를 담아내기에 적합한 형식은 아니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묘하게 낯설지 않은 제목이 신기했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제목인데? 책장을 들춰 우선 '분이네 살구나무'라는 시부터 찾아보았다.  

동네서/젤 작은 집/분이네 오막살이//동네서/젤 큰 나무/분이네 살구나무//밤 사이/활짝 펴 올라/대궐보다 덩그렇다. 

떠올랐다! 학창 시절에 교과서로 배웠던 시였다! 그것도 꽤 좋아했던 시였던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까맣게 잊고 있었을까? 어떻게 이 시가 동시조라는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을까? 순식간에 과거의 기억이 바로 옆자리에 다가앉았다. 과거의 추억만큼 강한 것은 없는 법, 순식간에 마음의 방어벽을 열어제치고 한편 한편 시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어린시절 동화책에서 보던 친근한 그림들과 함께 간결한 시들이 하나하나 엮여나간다. 이병기, 이은상, 박재삼, 정완영 등 친밀한 시인들의 작품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평시조 형태보다는 연시조나 엇시조의 형태를 취한 것들이 다수인지라 시조라는 인상은 생각보다 약했다. 다만 간결함이라는 특징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데다 운율이 강하다보니 낭송하기에 좋았고, 그러다보니 어느 틈엔가 외워지는 시들도 있었다. 동시조란게 이렇게 익숙하게 다가오는 시였구나.. 최근 하이쿠의 매력에 빠져 하이쿠 선집을 보고 있었지만 우리 시조도 못지않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던 거였다. 다만 하이쿠가 일본 국민에 의해 끊임없이 아름답게 갈고 닦여나가고 있는데 비해, 시조는 우리에게서 잊혀져가고 있었을 따름이리라.. 

나이가 든다고 글의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겠느냐만 예민한 어린 시절 친근한 글이 평생에 걸쳐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동시조집을 많은 아이들이 보고 마음 한켠에 그 아름다움을 기억해주었으면 싶다. 그런 아이들이라면 더 아름다운 동시조를 만들어낼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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