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우리 시대의 거울 -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소통의 징검다리
이경덕 지음 / 다른세상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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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릴적 즐겨듣던 옛날 이야기만큼 재밌는 것이 있을까? 내게 있어 어릴 적 이야기의 대표로 떠오는 것은 여러나라의 신화들이다. 그리스 신화는 물론이고 북유럽 신화, 이집트 신화, 인디언 신화, 인도 신화 등 각종 신화를 너무나도 재미있게 읽었더랬다. 세계창조의 이야기, 신의 이야기, 영웅의 이야기가 그 자체로 흥미진진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 인류가 축적한 지식의 편린이라도 엿보았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신화는 인류의 지식과 감정이 농축되어 있어 그 자체로도 맛있기 그지없지만, 그 이상 후세 사람들의 상상력을 끝임없이 자극하는 거대한 원천이 되어준다는 점에서 무한에 가까운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이리라..

이 책 [신화, 우리 시대의 거울]은 그리스, 북유럽, 남아메리카, 인도 등 각국의 10여편의 신화를 소재로 삼아 인간에 대해, 운명에 대해, 가치에 대해, 삶에 대해 생각해보는 책이다. 본래 KBS에서 [신화 오딧세이]라는 제목으로 10부작의 라디오 특집극을 방송했는데 그 방송의 내용을 정리하여 이번에 책으로 낸 것이라고 한다. 이런 컨셉의 책이 대부분 그렇듯 이 책 역시 대중성을 살려 넓은 주제를 접근하기 편하게 설명해간다는 점이 돋보인다.

서술방식을 살펴보자면 일단 동일한 주제로 접근가능한 신화(들)와 동화(들)를 비교하며 서술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에컨대 소통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길가메시 서사시라는 신화와 인어공주라는 동화를 요약하여 소개한다. 길가메시 서사시에는 길가메시와 엔키두가 등장한다. 두 인물은 탁월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만 각자 왜곡된 자아를 가지고 있어 사회에 이로운 인물들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두 명은 서로 만나게 되고 서로 소통을 통해 비로소 바람직한 자아상을 정립해가고 마침내 불세출의 영웅으로 성장하게 된다. 반면 인어공주는 눈에 보이는 매력적인 외형을 얻기 위하여 소통의 수단인 혀를 포기하는 선택을 한다. 그 결과 결국 인어공주는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버리게 된다. 비록 영혼은 구원을 받았다고 하지만, 만약 그녀가 소통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더라면 그토록 갈망하던 사랑도 성취할 수 있지 않았을지? 그리고 여기서 출발하여 소통부재라는 현대의 사회문제, 그리고 자살이라는 심각한 문제에 대해서도 화두를 던진다. 

다루고 있는 주제를 살펴보자면 '나는 누구인가?' 부터 시작하여 '어른 되기', '소통', '타자', '여성'를 거쳐 '삶과 죽음'의 문제까지 아우른다. 분량이 적은만큼 명쾌하고 간략하게 서술해가면서도 서사구조를 적절히 배치하여 독자가 흥미를 잃지 않도록 배려하는 점이 돋보인다. 철학적 문제로 고민하기 시작하는 청소년들에게 신화로 사고하기를 가르쳐줄 수 있는 책이라는 점에서, 특히 학생들에게 권하고 싶어지는 책이다. 다만 각각의 주제가 간단하고 명쾌하게 쓰인다는 점은 접근성을 높인다는 면에서는 장점이기도 하지만, 신화에 익숙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내용이 빈약하게 느껴진다는 점에서는 아쉬운 점이기도 하다. 개인적인 소감일지도 모르겠지만 좀 더 많은 주제를 다루어 분량이라도 늘려주었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생각해본다. 좋은 반응을 얻어 후속작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려나? 신화에 관심이 있는 독자에게라면 누구에게든 일독을 권할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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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장하준 지음, 김희정.안세민 옮김 / 부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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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마침내! 장하준 님의 신작이 나왔습니다.
전작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세계적인 호평을 보지 않더라도
개인적으로 아주 즐겁게 읽을 수 있었던 책이었습니다.
마치 세계의 법칙을 알고 있다는 양, 마치 자신은 단지 절대적인 진리의 대변인이라는 양
그렇게 오만한 경제학자들이 너무나 많은 세상에서
장하준 님의 이 책은 그러한 거짓을 시원하게 후려갈겨주는 책이었지요.
그런 장 교수가 3년만에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라는 책을 들고 돌아와주었네요.

책 뒤에 실린 평을 보면 이 책 역시 경제를 경제로만 보는 것을 경계하며
그 이면에 있는 정치적, 윤리적 가치를 주목하도록 돕기 위해 쓰여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다소 어려울 수 있어 접근성이 떨어지는 전작에 비해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눈높이를 맞춘 책이라는 점이 눈에 띄네요.

제목으로도 알 수 있듯 이 책은 "그들"이 말하는 23가지를 뒤집어가는 책입니다.
첫장의 소제목만 보아도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확연하지요.
"자유 시장이라는 것은 없다!"
자유 시장에 몸담고 있는 경제학자가 할 수 있는 말 중에서
이만큼 도전적인 말도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시장은 자유로워야 한다.
정부가 경제주체에게 개입하면 자원분배의 효율성을 떨어뜨리게 되고
투자와 혁신의 동기를 상실하게 만들 뿐이다.

하지만 이런 말은 하지 않지요.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절대적인 자유 시장이란 존재할 수 없다.
어떠한 시장이든 역사와 사회가 규정하는 규칙과 한계를 가지며
그것이 현재에는 너무나 당연시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게 되었을 따름이다.
결국 자유 시장이란 정치적으로 정의되어지는 것일 뿐이다.

사실 첫장만 보아도 저자의 의도는 90%이상 알 수 있다고 할만 합니다.

책의 소제목만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잘사는 나라에서는 하는 일에 비해 임금을 많이 받는다"
"자유 시장 정책으로 부자가 된 나라는 거의 없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가 아니다"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든다고 우리 모두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도 될 정도로 영리하지 못하다"
"금융 시장은 보다 덜 효율적일 필요가 있다"

얼핏 비상식적인 것처럼 보이는 주장들이지만
그의 설명을 차분히 따라가며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우리가 상식이라 생각하는 것들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들"의 가치관이 얼마나 공고하게 자리잡고 있는지,
혹은 우리가 얼마나 맹목적으로 "그들"의 가치를 내면화해왔는지 알게 되는 것이죠.

인간은 항상 자신이 처해있는 현실을 당연시하게 마련입니다.
그렇기에 항상 눈을 밝게 뜨고 고민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렁에 빠져 살기 십상이죠.
사회란 구성원 "모두"가 행복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잊고 살정도로
그 수렁은 깊고 공고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항상 눈을 뜨고 사는 것이 너무나 피곤한 일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눈을 밝히는데 여념이 없는 이와 만나는 것은 큰 행운일 것입니다.
장 교수님과의 만남도 그러한 행운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네요.
다음 책 역시 그러한 눈밝은 이와의 만남이 되리라 기대해도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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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즐거워지는 사진찍기 일상이 즐거워지는 시리즈 1
최정호 지음 / 홀로그램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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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가지는 매력은 무엇일까? 앨범 속의 사진을 볼 때마다 느끼게 되는 복잡한 감정이 그 중 하나일 것이다. 흘러가는 시간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들, 아무리 아름다운 순간도 아무리 힘든 순간도 지나가고 나면 돌이킬 방법은 없다. 그저 우리 기억 속에서 일그러진 흔적으로 남지만 그나마 시간이 지나면 바래져 희미해져가고 말이다. 그런 추억이 한순간이나마 고정되어 남아주는 것이 사진이니 그런 사진에 끌리지 않을 수 있을지? 하지만 사진으로 남은 추억도 사실은 현실과는 어긋나기 마련. 그런 어긋남이 또 마음을 기쁘게 하곤 하는 것 같다. 추억이라는 것은 미화되는 것이 또 맛이 아닌가? 아름다운 사진으로 과거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 많은 이들이 바라는 바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근래 사진의 매력에 빠져들어 여기저기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지만 남겨둘만큼 맘에 드는 사진은 얼마 없어서 아쉽다. 그러다보니 다른 고수분들의 작품에 눈이 가는데 이 책 '일상이 즐거워지는 사진찍기' 역시 그런 고수분이 내신 책이다. 네이버후드 포토부문에서 2년연속 상을 받은 모카라는 분이 저자이신데, 경력이 그리 길지 않음에도 좋은 평가를 받는 '감각'있는 분이시다. 표지의 사진만봐도 마치 영화 속 한 장면같이 담아내지 않았는가?

사실 이와 유사한 책이 많지만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편안한 접근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한장한장마다 각 소재별로 사진을 찍는 요령을 담아낸, 꼭지를 모은 형식의 책이기 때문이다. 오른쪽 페이지에는 마치 에세이처럼 사진의 기술을 간략하게 담아내고 오른쪽 페이지에는 그러한 기술이 활용된 저자의 사진이 실려있다. 그 덕에 어디부터 펴서 읽어도 마치 사진첩을 보듯 사진을 즐길 수 있으며, 또 다양한 주제의 풍부한 정보를 부담없이 전달받을 수 있다. 사실 처음 책을 읽으면서는 전자에 무게중심이 실렸던 것이 사실이다. 책의 성격상 특이한 소재보다는 설명에 적합한, 무난한 소재를 대상으로 한 사진이 대부분임에도 그 아름다움이 눈길을 놓아주지 않았다. 특히 후반부의 정물 사진은 '환상적이다'라는 말밖에는 설명할 말이 없다. 그저 사진을 즐기기에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책이라고 생각된다.

사진을 찍을 때 사진을 찍는 사람이 주목해야할 부분을 설명하는데 주력하는 책이니만큼 사진에 대해 기본적인 것은 알고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쓰여진 책이라 생각된다. 부록으로 기술적인 부분이 첨가되어 있기는 하지만 말그대로 첨가 수준이기 때문에 입문자보다는 초보자에게 도움이 될 듯 하다. 시각적으로도, 정보적으로도 참고가 될만한 부분이 많은 책이니만큼 사진을 시작하는 분들이라면 한번 보시기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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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독 동물농장 - 아주 쉽게 읽을 수 있는 신개념 영한대역 십독 시리즈 2
조지 오웰 지음, 박세창 옮김 / 표담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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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담에서 만든 두번째 십독 시리즈는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을 택했다. 전작은 한국인이 제일 좋아하는 동화일 어린왕자를 대상으로 삼았는데, 기본적인 난이도나 분량 면에서 이번 작은 좀 더 영어실력이 뛰어난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다고 하겠다. 그렇다곤 해도 단어와 문장 구조 설명이 들어가있기 때문에 고교수준의 영어실력이 있다면 읽어나가는데 무리는 없어 보인다. 물론 읽어나가는 속도는 차이가 나겠지만 말이다.

동일한 컨셉인만큼 동물농장 편도 어린왕자 편과 같은 구성을 택하고 있다. 책의 앞부분에는 우선 이 책을 읽어가는데 유용한 정보를 제공한다. 원서를 읽는 것이 영어공부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특히 원서로 영어를 공부할 때 반복이 얼마나 중요한지 - 이 책의 표현을 빌리자만 열 번 읽는 것 말이다 - 영어를 조금이라도 공부해본 사람이라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처음 일독의 벽이 너무 높기 때문에 원서로 공부하기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그 일독의 벽을 낮추어주는 것이 이 책의 근본적인 목적임을 알리고 있다. 그리고 읽는 순서와 요령을 추가로 덧붙혀두었다.

본편으로 들어가보면 일단 본문의 한 단락이 소개된다. 아래쪽에 소개된 단락을 한두문장 정도로 끊어가며 열거하는데, 읽기 단위로 줄바꿈하여 구조가 눈에 띄게 만든다. 전치사를 고의로 작은 글씨로 적어두어 의미단위가 더 부각되도록 만든 것도 참신하다. 이어 문장 오른쪽에 직독직해의 방식으로 해석을 싣는다. 형용사구나 부사구는 괄호와 파란색으로 구분하여 읽는 편의를 더한다. 아래쪽에는 문장에서 쓰인 단어와 숙어를 해설해두었는데, 불규칙동사의 과거형, 분사형을 실어준다던가 간단한 문법을 설명해주는 꼼꼼함을 잊지 않는다.

부록 시디에는 원어민이 읽어준 MP3 파일과 PDF로 제작된 본문이 담겨있다. 가장 유용한 것은 단어에 대한 보충설명이 실린 PDF 파일이다. 개인적으로 이북에 이 파일을 복사해서 책 옆에 두고, 필요할 때마다 참조해가면서 공부했는데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MP3로 들으면서 입으로는 중얼거리고 눈으로는 책을 보는 삼위일체 학습을 하기에 굉장히 편리한 구조로 되어있다. 가장 적절하다고 알려진 독해방법을 적용한 책이니만큼 신뢰도가 높은 반면 평범하게 보일지도-다른 말로 지루하게 보일지도-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떤 방법을 쓰던 학습의욕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원서를 읽는 것이 쉽지는 않다. 분명한 것은 이 책의 꼼꼼함이 그런 어려움을 한결 덜어주고 있다는 점이다. 지나치게 욕심을 내지 않고 적은 분량을 매일 꾸준히 보아가면 생각보다 빨리 마지막 장에 도착해있으리라는 점은 보증할 수 있을 듯하다. 서양의 대표적 고전 한편을 원서로 읽어냈다는 뿌듯함은 덤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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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 사람들 펭귄클래식 96
제임스 조이스 지음, 한일동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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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을 여는 것으로 꼽히는 작가들이 몇 있지만 그 중에서 '제임스 조이스'라는 이름이 빠지는 일은 없다. '의식의 흐름'이라는 기법을 창시하기도 한 그의 대표작 '율리시즈'는 하지만 분량 면에서도, 난해함 면에서도 독자를 넉다운시키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도전해본 적이 있었지만 미칠듯한 주석과 어떠한 가치를 담고 있는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는 내용에 질려 결국 중간에 책을 덮고 만 아픈 기억이 있다. 그래서 이 책, '더블린 사람들'을 접하게 되면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더블린 3부작이라고 불리우는 '더블린 사람들' '젊은 예술가의 초상' '율리시스'의 첫 작품이니만큼 무게감도 적지 않으리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펭귄클래식에서 출간된 '더블린 사람들'은 테렌스 브라운의 서문으로 시작된다. 서문이라는 제목이 붙어있지만 실제로는 작품에 대한 총괄적 분석에 가깝다. 보통 이러한 분석은 책의 뒷편에 달리기 마련인데 펭귄클래식에서는 독자의 긴장을 덜고 배경지식을 주어 본문을 접하기 편하도록 하기 위하여 이런 식의 배치를 택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아무튼 서문에 따르면 그의 나이 25세때 완성된 이 작품은 33세가 되어서가 출판이 되었는데, 이는 출판사 측에서 작품의 내용이 부적절하다(?)고 판단하여 출간을 거부했기 때문이라 한다. 이 책이 출간될 즈음에는 이미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통해 명성을 얻고 있었던 그이기에 오히려 '더블린 사람들'은 그의 습작 정도로 취급받게 되었으며, 특히 단편소설에 대한 독자의 선호도가 떨어져가던 즈음이었던지라 이 작품의 가치를 인정받는데는 이후로도 적잖은 시일이 걸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정말로 짧은 15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실적인 묘사방식과 더불어 각 작품의 짧은 분량 탓에 책은 상당히 건조하게 느껴진다. 본래 조이스는 그의 작품을 철저히 자신의 체험에 기반하여 써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이 작품은 당대 아일랜드에 현미경을 들이대고 감정없이 묘사해낸 듯한 인상을 준다. 마치 정밀하게 그려진 풍속화를 보는 듯 하다고 할까? 그래서 조이스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이는 이 안에서 사회적인 메시지를 읽어내기 쉽지 않다. 그래서일까, 내게 가장 인상적으로 느껴진 것은 사회적 주제보다 품 속 등장인물을 그려내는 능력이었다. 간결한 문장을 구사하는만큼, 인물 묘사 역시 몇 줄의 짧은 문장으로 이루어질 뿐인데 그 효율성이 놀라울 정도다. '은총'의 한 부분이다.

[그는 더없이 생각이 깊고 영향력도 잇엇으며 머리도 좋았다. 천성이 민첩한 데다가 치안재판소에서 여러 사건들을 오랫동안 다루어오면서 특히 날카로워진 인간에 대한 통찰력은 철학 전반에 대한 지식을 겸비함으로써 다소 부드러워졌다. 그는 또한 박식했다. 친구들은 그의 말이라면 누구나 존중했고 그의 얼굴이 셰익스피어를 빼닯았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몇 개의 문장만으로 탁월하게 캐릭터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적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각 작품은 풍부한 내용을 담은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색한 부분이 없는 깔끔한 번역도 이러한 묘미를 살리는데 기여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을테고 말이다.

가장 길고 가장 감동적인 작품은 마지막에 실린 '죽은 사람들'이다. 전반적으로 건조하게 읽히는 작품들 속에서 이 작품은 유독 촉촉하게 읽힌다. 연말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을 그려내며 이 작품은 인물간의 감정선을 아름답게 교차시킨다. 그리고 가브리엘과 그의 아내가 과거와 현재를 얽어가며 상념에 잠기는 장면은 마치 꿈을 꾸는 듯하다. 메마른 현실묘사에 갈증을 느낄 독자에게 주는 선물인 것일까?

책장을 덮으면서도 이 책을 충분히 '읽어냈다'는 느낌이 없다. 무언가 더 읽어내야 한다는 느낌은 이 책의 역사적 무게 때문에 생겨난 강박일까, 아니면 내가 느낀 진정한 감상일까... 어느 쪽이 정답일지 시간을 두고 다시 한번 읽어본 후에 결론을 지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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