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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숨은 왕 - 문제적 인물 송익필로 읽는 당쟁의 역사
이한우 지음 / 해냄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조선의 숨은 왕'..
'숨은'이라는 말이 눈길을 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 진실이 아닌 경우가 너무나 많은지라 '숨은'이라는 말은 진실을 담고 있는 것처럼 들리곤 한다.
더구나 대한민국에 사는 후손들에게 '조선'이라는 나라는 양극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우리의 뿌리임에도 자랑스럽게만 기억할 수 없는 슬픈 나라..
그런 조선의 모습을 만들어가는데 숨은 왕의 역할을 했다고 일컬어지는 이는 누구인가?
'송익필'..
숨은 왕답게 널리 알려져있는 인물은 아닌 듯하다. 당쟁의 뿌리가 형성되던 시기에 살아간 그는 어떤 인물일지 궁금해진다.

거듭된 사화로 혼란스러웠던 중종대에 태어난 그는 선조 대 임진왜란 직전까지 가장 큰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던 인물이다. 방계였던 선조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면서 왕권이 약화되는 조짐을 보이던 무렵, 동인과 서인이 정권다툼을 치열히 벌이던 시기에 그는 서인의 거두였던 정철과 이이 등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판세를 이끌어갔다.
그의 삶은 '다이나믹하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릴법한 것이었다. 그의 조모는 노비 출신이었기에 그는 말하자면 면천되어 양반이 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스스로의 출신을 의식해서였을까? 그의 아버지는 고변을 통해 사화의 피바람을 불러들여 외가를 몰락시킨 끝에 출세길을 밟은 인물이었다. 같은 서인이었으며 개인적으로도 절친이었던 성혼이나 이이조차도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혐오감을 드러내곤 했다. 그처럼 불리한 배경으로 인해 사실상 정계에 나설 수 없었던 송익필은 막후에서 정철 등의 두뇌로써 활약하며 서인과 동인간의 힘겨루기를 조종하는 쪽을 선택했던 것이다.
권력다툼에서 도덕적 문제를 논하는 것은 수단적인 의미만 있을 뿐이다. 그 역시 교묘히 정여립의 난을 유발하여 동인을 쳐내는 기회로 삼았던 것을 비롯,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하는' 길을 택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따. 정철이 당쟁 과정에서 피바람을 불러일으킨 인물로 잘 알려져있지만 실상 그를 조종한 것은 송익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처럼 대활약을 하던 그였지만 동인의 반격과 아버지의 원죄가 어우러져 말년에 이르러서는 환천을 당하고 귀양을 떠나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 그가 당쟁의 역사에서 숨은 왕이라 불릴 수 있다면 그것은 당대에 거두어낸 승리 때문이 아니라 그의 문하에서 서인의 거두들이 줄줄이 탄생하였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그의 직계제자가 송시열의 스승뻘인 김장생이라면 알만하지 않을지..

역사를 보다보면 인물의 선악을 논하고 그 가치를 재는 부질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인물의 행동 하나하나를 개별적으로 논하는 것일 뿐.. 송익필 역시 위인이다, 간웅이다라는 한마디 인물로 평가될 수 있는 인물은 아니다. 정치에 있어서는 마키아벨리나 한명회를 연상시키는 처세를 보여주었지만, 유학자로써는 '직(直)'을 논하여 이이에 버금가는 거인의 면모를 보인다.
상반되는 듯한 사상과 행동이 모순되면서도 균형을 이루어가며 생을 이끌어가는 것이 사람이 아닌지..
권력의 균형이라고 하든, 왕권과 신권의 조화라고 하든, 당쟁이라는 현상이 조선을 좀먹어간 가장 큰 독소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뿌리에 송익필이라는 인물이 위치한다. 그럼에도 그를 비판하기 어려운 것은 결국 그를 만들어낸 것이 성리학적 세계관과 권력욕이라는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리라..
인간이 '과거'와 '미래'에 사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한계적 존재라는 것이 답답할 따름이다.

기본적으로는 송익필의 평전이라 하겠지만 실제는 선조대의 당쟁의 양상을 총체적으로 그려내는데 무게중심을 둔 책이다. 특히 부분부분 소설적인 구성을 채용하여 생동감을 더해주는 점이 눈에 띈다. 그러한 구조 덕에 역사 속에서 일면적인 모습으로만 다가오는 이이, 정철, 성혼, 선조가 이해할 수 있는 한명의 인간으로, 다면적인 층을 가진 인간으로 그려진 점이 좋았다고 보인다.
한편 당쟁을 중심에 놓다보니 인물 묘사가 정치가로써의 면모에 치우치는 것이 불가피하다. 그러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서였을까? 그들이 남긴 시와 상소문 등을 다수 인용하여 독자로 하여금 각 인물의 다른 면을 엿볼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다만 많은 인물이 등장하다 보니 안그래도 기억하기 버거운 판인데 굳이 자와 호까지 섞어가며 사용한 것은 아쉽게 느껴진다. 사실성을 위해서였다면 익숙해질 때까지만이라도 괄호를 이용하여 이름을 병기해주었어야 하지 않았을지..
또 선조의 즉위당시 상황에서 시작하여 이야기를 전개하다가 중간 부분에서 다시 송익필의 탄생시기로 돌아가는 전개구조는 독자의 혼란을 가중시킨다는 생각이 든다. 당쟁의 시작점을 강하게 인지시키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싶지만, 득보다는 실이 많은 구조라고 생각된다.
조선사를 잘 모르는 이가 읽어나가기에는 발부리에 걸리는 것들이 적지 않은 책이지만, 조선을 돌이켜보려면 빠질 수 없는 당쟁사를 널리 알려지지 않은 역사 속 인물과 버무려낸 저자의 솜씨가 맛깔난 책이기도 하다. 역사에 관심있는 인물이라면 충분히 좋아할만한 책이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