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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 그 삶과 음악 ㅣ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가 시리즈 8
스티븐 존슨 지음, 이석호 옮김 / 포노(PHONO) / 2012년 12월
포노에서 출간하고 있는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가 시리즈 8권이 나왔네요. 포노는 지금은 없어진 클래식 음반 판매 사이트로 알고 있는데요, 무슨 연관이 있는걸까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검색해보니 포노에서 내는 책이 모두 클래식 음악에 대한 책이거든요. 아무튼 낭만, 그것도 후기 낭만 음악을 좋아하는 저인지라 이 시리즈의 말러 편을 먼저 봤었는데요, 제법 즐겁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바그너를 소개하는 이번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당연한 수순이겠죠? 바그너의 오페라는 반지 시리즈를 힘겹게 한번 본 것이 다입니다만 그의 서곡집은 자주 찾아듣게 됩니다. 특히 첼리비다케의 느리면서도 웅장한 해석의 음반은 애청반 중 하나이고요. 바그너의 음악이 주는 압도적인 감동에 비해서 그의 끔찍한(?) 인격은 큰 낙차를 보이곤 하는데요,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그의 삶에 대해 이 책을 통해 좀 더 자세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유별난 개성을 보이는 음악가들이야 워낙 많습니다만 바그너는 그 중에서도 독특한 삶을 산 음악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두 명의 아버지(?)로 인해 유년기부터 만만치 않게 시작한 그입니다만 그 야심과 허영심은 일찌감치 여기저기서 머리를 내미는군요. 사실 민폐형 캐릭터라 해도 전혀 무리없을 바그너는 특이하게도 가까운 인물에게 더욱 피해를 입히곤 하는데요, 사치를 일삼느라 매번 빚을 지고, 지인에게 애원하여 돈을 빌리거나 빼앗아 위기를 극복하고, 자책에 빠져 성실하게 작곡을 하는 듯 하다가 다시 사치의 늪에 빠지는 순환과정이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게다가 은혜도 몰라서 마이어베어처럼 어려울 때 도움을 주었던 스승을 평생에 걸쳐 씹어대기도 하고요. 유태인에 대한 편협한 사고 방식과 그로 인한 나치즘에의 영향은 워낙 잘 알려진 바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생전에 불가사의할만큼 주변인들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인데요, 평생 빚과 여자문제를 떠안고 살았으며 독재자라는 역사적인 평가를 받는 카이사르가 유래없이 매력적인 인물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것을 떠올리게도 됩니다. 천재성이라는 것은 주변의 사랑을 끌어당기는 능력도 포함하는 것일까 생각하게 되는군요.
재미는 있으나 한심하기 그지없는 인간성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삶을 살아간 바그너입니다만 바그너의 작품은 확실히 바그너라는 인물보다 위대하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자의 머릿글을 빌린 것입니다만 이 문장만큼 책을 읽은 후의 소감을 잘 요약하는 말이 없을 것 같습니다. 자신만의 철학과 가치를 음악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보편적인 호소력을 가진 매체로 부활시켜내는 것이야말로 천재라 불리는 인물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불완전한, 어떤 면에서는 저질스럽다고까지 할 삶을 살아갔음에도, 혹은 그렇게 살았기에,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다면적인 진리를 담아내는 작품을 낳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같은 저자의 작품임에도 말러 편보다 바그너 편이 재밌었던 것은 -바그너의 삶이 보다 역동적이었다는 점을 차지하고서라도- 번역자에 힘입은 바가 크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저자인 스티븐 존슨은 글에 개그를 많이 구사하는 편인데요, 이석호 님은 그것을 상당히 맛깔나게 살려내고 있습니다. 읽다가 간간히 빵 터져서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봐야할 정도였지요. 오페라라는 특성 때문인지 바그너의 작품세계에 대해 설명하는 부록의 양이 책의 3분의 1 정도를 차지하는 점도 눈길을 끄는데요, 작품에 대한 평과 의의에 대해 적절한 코멘트가 들어가 있어서 저로써는 상당히 흥미롭게 읽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2장의 시디도 책을 읽어가면서 듣기에 좋은 간식거리라는 인상을 받았고요. 음악가의 삶이 작품과 등호로 놓을 수는 없는 일이겠습니다만, 그의 삶의 노정에 대한 이해가 음악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즐겁게 읽은 후에 듣는 바그너의 음악이 조금 다르게 들리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