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식이란 누군가가 차려줄 때는 그보다 정성가득한 존중은 없지만 내가 차려야 할때는 이 이상의 노동이 없다. 구입하고 다듬고 요리하고 뒷설거지까지 만들기는 손이 많이 가지만 먹는건 금방이다. 금방 식거나 금방 축 쳐져 물기가 흥건해지거나 말라버리기 일쑤다.

정확한 시점에 정확하게 내놔야 한다는 타이밍까지 신경써야 하는 음식이다.

한편 미리 만들어 놓은 밑반찬 어제 먹었던, 다시 데운 국이라면 쉽고 얼렁뚱땅 차려내고 크게 차이 나 보이지 않는 면도 있다

장장 열흘이라는 긴 연휴를 보내면서 상차리는 것에 대해 잠깐 생각했다.

열흘에 하루 세끼 그러니까 서른끼가 지나간 셈이다

물론 모든 걸 다 집에서 차려낸 건 아니고 사먹기도 하고 나가서 외식을 하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신경써야하는 차림에서 아무런 감정없이 무미건조하게 냉장고에서 식탁으로 이동만 하는 상차림까지 모든걸 하고 보니 온간 생각이 들었다.

먹는 일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참 중요한 요소이지만 그 먹는 일이 의외로 노동이라는 생각을 한다.

자식입에 들어가는 음식이 이쁘고 가족을 위해 요리하는 건 즐거움이라고 하는 건 그냥 앉아서 차려먹는 사람들의 상투적인 생각이 아닐까 싶다가도  나도 한 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서 자치는 줄 모르고 만들어 먹이고 그렇게 만들었는데 안먹고 투정하면 혼자 속상하고 내가 거부당한것 마냥 서럽고 억울했는데 그게 다 무슨 짓인가 싶다.

이래도 한끼 저래도 한끼...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 지금이 기복이 심한 나의 감정곡선의 가장 밑바닥인 시간이라서 더 그런지 모르겠다.

 

# 우리집은 종가집이라 4대 봉제사를 지냈다.

그러니까 4대 여덟분 일년에 명절 차례까지 하면 열번의 제사가 있는 셈이고 일년에 두달 빼고 매달 제사가 있는 셈이었다

우리 뒷동에  살던 내 친구는 어느 날 밤 우리집 베란다를 봤는데 거실에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 뒷모습이 웅성웅성한 걸 보고 깜짝 놀랐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 애가 본 그날 밤은 아마 제사가 있던 밤이었을 것이다.

명절이면 그실 한면을 길게 주욱 있다가 모자라 한 면은 꺽어진채 놓은 상까지 네 개의 상을 놓고 남자들은 절을 했다.

당연히 손끝하나 놀리지 않은 남자들은 혀끝은 예민하게 놀려댔다,

뭐가 빠졌구나 뭐가 잘 못 놓였다 뭐가 이상하다....  뭐는 너무 일찍 만들어서 다 말랐다...

손끝은 무딘데 혀끝은 예민하기 짝이 없었다.

사흘전부터 동동거린 엄마는 그 말에 죄인이 되고  입맛이 없다면서도 다들 한그릇 뚝딱 비우고 후식까지 찾는 통에 정작 내가 먹은 밥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거나 아에 그게 싫어서 가뿐하게 건너뛰기 일쑤다

명절의 그 의식이 지나면 잘 차려지고 잘 치른 건 당연한거고 부족하거나 모자란 것들은 언제나 말끝에 묻어났다.

꼴보기 싫었다

나이를 먹고 보니 어쩌면 그때 명절때 마다 찾아오는 어른들 말고 그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와 함께 온 아들이나 손자들은 오기 싫었을지도 모른다

명절때만 보는 친척집에 가서 차례상이 준비되는 동안 남의 방 한구석에서 기다려야 하고 낯선 어른들과 함께 밥상을 받아서 조금 주눅들어 먹어야 하고 어색하게 인사하고 지루한 이야기를 듣는중 마는둥하다가 어른들이 이만 가자 하는 순간 화색이 도는 그 남자들도 마냥 좋지만은 않았으리라 생각이 든다. 이제사 말이다

그렇지만 그때는 그렇게 매번 꾸역꾸역와서 밥 먹고 과일먹고 떡먹고 먹기만 하다가 말없이 돌아가는 남자들이 싫었다. 나이가 많건 적든 나보다 어리든 그냥 미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렇게 제사를 꼬박꼬박 형식을 갖춰 지낼 수 있다는 것이 나름 자부심이기도 했었다. 그때 나는 일을 꼭 해야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도와주면 칭찬받을 수 있는 입장이었고 이런 전통을 즐기면 되는 입장이었으니까

결혼하고  남편집은 돌아가신 시아버지 제사 달랑 한 상이었다.

그걸 보면서 쥐뿔도 잘하는게 없으면서 우스웠다.

겨우 차례상 하나쯤이야......

집집마다 다른 상차림이라는 걸 알면서도 은근히 내가 20년 넘게 보아온 것이 정석이라고 믿어서 조금만 달라도 이상하고 틀렸다고 생각했다.

상차림은 쉽고 별거아니라고 여기면서도 우리 집이 아닌 곳에 오래 있는 건 불편했다.

그렇게 일이 많지도 않고 누군가 눈치를 주는 것도 아니고 은근히 내맘대로 해도 별 말 없는 분위기지만 시집이라는 게 그런 거였다. 나혼자 맞지 않은 퍼즐판에 끼어있는것 마냥 어색하고 불편하고 엎고 싶었다. 어쩌면 내가 맞춰야 할 부분조차 내게 맞추길 바랬던 적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 음식을 차리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대학시절부터 자취를 했고 요리에 관심도 많았고 잘하지는 않아도 겁내는 경우가 없어서 망치든 잘하든 일단 하고 보는 스타일이라 음식을 한다는 것이 힘들지는 않았다

맛없으면 안먹으면 그만이고 하다보면 대충 꼴은 갖추었으니까 그냥 자만했다.

할 수 있지만 하기 싫은 거야 그래서 안하는 거지 못하는 건 아니야...

이게 30년동안 나를 지배한 요리에 대한 자만심이었다.

그런데 올해 긴 연휴를 겪으면서  이제 겨우 50도 되지 않아서 이제 안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 처음으로 우리 서행자 여사에게 존경심이 들었다.

40년 넘게 종가집 종부로 제사상과 차례상을 차려낸 엄마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자기 본가가 중요하고 남에게 보이는 것이 중요하고 장남으로 장손으로 책임감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아버지였기에 명절이나 제사가 대충 허투로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가 암으로 수술하던 딱 한 해를 제외하고 (제주가 아프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했다) 결혼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실때 까지 제사는 엄마의 가슴에 얹힌 돌이었을 것이다.

동서들이 와서 도와준다고는 하지만 그건 전날 와서 이미 그 주 내내 계획하고 장보고 몇번을 날라다 놓았던 재료를 다듬고 손질해서 차곡차곡 마련해놓은 걸 와서 지지거나 무치거나 하는게 전부였다. 그래도 어른들(이라 쓰고 남자들) 눈에는 내 눈앞에서 쭈그려 앉아서 하루 종일 전을 뒤집고  손 마를 새 없이 나물을 무치고 탕국을 끓이는 사람이 더 일하는 것 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그들이 돌아갈때  모두에게 공평하게 음식을 나누고 뒷 마무리를 하고 쓰레기를 정리하고 버리는 사람은 볼 수 없다. 그저 눈앞에 보이는 것이 전부다.

나 역시 결혼해서 일이 쉬워보이고 우스워보였던 건 미리 준비하고 다듬어 놓은 시어머니를 보지 않아서이고 내가 일을 했다고 하나 그때 역시 모든게 갖추어진 상황에서 자리잡고 앉아서 전을 뒤집은게 전부였기때문이었다.

해보지 않고 보기만 하는 건 대개는 쉽다.

누군가의 노래도 들을 때는 쉽고 단순한 노래였고 남이 하는 게임도 가만히 보기만 하면 나는 저것보다 적어도 배는 더 잘할 거 같고 올챙이 적 생각 못하고 자고 빈둥거리는 아이들도 그 시간에 왜 공부하지 않는지 한심하기 짝이 없는 법이다.  내가 딱 그랬다.

어느 순간 나이 먹고 모든 준비가 내 차지가 된 순간  밥상을 차리는 일은 (제상이든 차레상이든) 요리하고 차려내는 일은 그냥 껌이라는 거다.

선택하고 다듬고 준비하는 일이 태반이고 그 뒷처리가 남은 태반이다.

그 모든 보이지 않은 일을 40년간 한 서여사님께 세상 모든 존경을 다 바쳐도 모자란다는 걸 한참 나이 먹어 알았다.

그렇게 지긋지긋한 제사를 절대 내 아들에게는 물려주지 않겠다는 것이 서여사의 생각이셨다

4대 봉제사를 지내는 집안 장손은 절대 결혼할 수 없다, 그런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여자는 세상에 한명도 없다는 반 협박과 반 애원으로 아버지는 자기 손으로 제사를 줄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 우리 올케는 주문식단으로 제사상을 차린다.

맞벌이고 일이 바쁜 입장에서 제사때마다 명절때마다 일찍 와서 상을 차릴 수 없는 입장이다.

시대도 바뀌었고 그게 당연하다고 서여사도 받아들였다.

한편으로 이해는 가지만 한편으로 서운한 것이 그녀 마음이었다.

- 니 아버지가 어떤 정성으로 조상을 모시고 어른들을 대접했는데 니 아버지는 그 반도 받을 수가 없는거냐며  한탄하시지만 어쩌시겠는가?

내가 한만큼 나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고 계속 그렇게 자격이 이어지면 이놈의 제사는 끝이 없는 법이다. 누군가는 내가  획득한 내 자격을 그냥 자격으로 남겨두겠다고 선언하지 않으면 네버엔딩스토리가 된다.  물론 본인이 스스로 내 제사는 간소하게 하라고 하신건 아니지만 시대가 바뀌고 삶이 바뀌면서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 된다.

한편으로 그렇게 자격있게 아버지의 권위를 세운건 결국 서여사다.

우리 아버지지만 명절이나 제사때 한 건 새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입거나 그 전 주에 세탁소에서 잘 손질해온 한복을 입고  잘 차려놓은 제사상 앞에서 술을 따르고 축문을 읽고 절을 한 것 뿐이다. 만약 내가 한 정성을 내가 대접받아야 한다고 주장을 한다면 그건 죄송하지만 우리 아버지나 할아버지들이 아니고 할머니나 우리 엄마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도 서여사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종부니까 당연히 할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녀도 어쩔 수 없는 시어머니라 부엌에 들어가는 사위는 그르려니 하지만 부엌에 들어가는 아들은 안타깝고 애틋하다.

우리 올케는 사실 내 남동생보다 바쁘다.

자라면서 공부밖에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공부를 썩 잘했고 좋은 학교를 갔고 또 공부를 잘하고 공부밖에 잘 하는게 없어서 좋은 직장엘 갔고 좋은 직장이란 돈을 많이 주는 직장이고 돈을 많이 주는 직장이란 일을 많이 시키는 직장이다. 그 모든 조건에 맞게 올캐는 늘 바쁘다 뭐 물론 개인적으로 시간을 내려면 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낸 시간을 시가 제사에 쓰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서여사 입장에서는 며느리 입장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서운한 거고 같은 여자로서 내가 보기엔 그래도 날짜 잊지 않고  챙기고 주문한 음식이라도 자기집에서 공간을 내고 손님을 맞는(물론 그 옛날 양복입는 남자들이 웅성거리는 걸 보고 조폭?을 떠올린 내 친구의 착각을 가능케한 그런 규모는 아니지만)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크게 하든 적게 하든 주문을 하든 뒷처리는 남는 법이니까.

엄마 입장에서 그리고 시누 입장에서 그래도 며느리인데 조금이라도 정성을 보이면 좋지 않나 싶어 얄밉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지만 또 여자입장에서 보면 내가 주관하는 입장에서 이렇게 하겠다고 결정했는데 거기 제 3자가 토를 달 수도 없는 것이라고 수긍한다.

40년을 한결같이 종부로 살아온 우리 서여사님을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그녀의 은근한 질투와 아쉬움도 이해할 수 밖에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른 척 할 수 밖에 없다.

 

# 정말 이번 연휴는 드럽게 길었다.

쉬어도 쉬어도 끝이 없었고 아침에 눈뜨면 다들 나가서 보지 않아야 할 사람들이 하루 내내 집안을 뒹굴거리고 있었고 이 인간들은 먹고 돌아서면 배가 고프다는 아귀들이나 다름 없었고(미안하다. 내가 인격이 덜 되서...)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은 결국 이루지 못했다.

하루 세끼 차리는 일은 어렵다면 어렵고 쉽다면 쉬울 수 있다.

따끈한 밥과 두어가지 찬이어도 정성껏 차리는 것이 가능하고

십첩 반상을 아무런  영혼없이 사온 찬이나 미리 해둔 밑반찬으로도 차려낼 수 있다.

게다가 우리에겐 햇반도 있지 않은가!!!!!

 

 

 

 

 

 

 

 

 

 

 

 

 

 

 

 

 

연휴가 시작될 무렵 다시 읽었다.

한편 한편 여기저기 헤집어가면서도 다 읽었다.

늘 그렇듯 술이 당겼고 늘 그렇듯 집에 먹을만한 알콜은 없었다.

왜 모든 일들은 지나간 후에야 그 상황이 더 선명해지는 걸까?

시간이 지날 수로 선명하고 단순해지는 기억이고 상황이다.

그때 알았더라면 더 좋았을까 어쩌면 그 순간 몰랐고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었을까?

내가 누군가를 사랑했던 화려한 시간이었다는 것

내가 내 삶에 충실할 수 있는 의미있는 시간이었다는 것

그리고 어설프고 한순간의 헤프닝같은 일이지만 그 이전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꼭 한템포 뒤에 알아지는 것이다.

내가 밥상을 차리는 일이 이러했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좀 더 달라졌을까?

 

 

연휴 마지막날 오후 봄에 담근 매실을 걸렸다.

얼마가 나올지 몰라 2리터 생수병을 네개를 깨끗하게 씻고 말려뒀는데 겨우 두병 나왔다.

남은 매실로 담은 매실주는 ..... 예전 약초주를 담그고 남은 담금주로 해서인지 내겐 독했다.

그래도 그 매실주를 찔끔 찔끔 마시면서 연경을 생각하고 이모를 생각한다.

내 삶도 이렇게 취하거 깨거나  그렇게 반복하는동안 아하. 하고 무릎을 칠 일들이 계속될 것이다.

그래도 늦게라도 알게 되는게 다행 아닐까  스스로 위안한다.

스스로 위안하고 만족하는 건 내 특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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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여자들
록산 게이 지음, 김선형 옮김 / 사이행성 / 2017년 7월
평점 :
절판


더 이상 파고 들 곳없는 바닥으로 떨어진 여자들이 비상하는 방법.
잊지않는것 기억하는것 그리고 마주 보는것
바닥에서 모든 혐오를 뒤집어 쓴 것도 나이고,지금 떠오르는것도 나다.
다만 비슷한 이야기가 계속 반복된다.
그게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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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한 번 넘어진 모퉁이에서 다시 넘어지는 일이 빈번하다.

한 번 경험했다면 같은 실수를 다시 하지 않은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의 행동이겠지만

한 번 이상 모퉁이에서 넘어졌다면 이제 모퉁이만 보면 넘어질지 모른다고 긴장하고

그 긴장감이 다시 넘어지는 일로 이어질 수 있다.

아이가 매번 같은 모퉁이에서 넘어지고 있다.

다만 이젠 그 모퉁이를 주의해야 한다는 걸 안다는 것이 다행이랄까

다만 살아가면서 그 모퉁이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니까....

왜 그 모퉁이를 지나가냐고 다른 길은 생각하지 않냐고 아이를 탓하기도 했고

뭔가 다른 길을 모색하지 않거나 그 모퉁이를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다른이들과 비교하며 윽박질렀지만 그건 정말 소용없는 짓이다.

그저 그 모퉁이를 돌때 마다 긴장하지 말라고 하고

넘어져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미리 무릎 보호대라도 준비해주는 것밖에...

살면서 몇번의 모퉁이를 돌아야 할테고 늘 혼자 그 곳을 돌아야 할테고

그 모퉁이를 없앨 수도 없다.

아이가 크면 부모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지켜보는 것 뿐이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며 예쁜 표정을 유지하면서...

괜찮다고 하면 괜찮다고 같이 말해주고

괜찮지 않다고.. 괜찮고 싶지 않다고 하면 그래도 된다고 하고

모퉁이를 미워 어쩔 줄 몰라하면  함께 미워하고 욕하지만.. 그래도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말해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책을 읽을 뿐이다...

 

 

 

 

 

 

 

 

 

 

 

 

 

 

 

저자가 제각각 관심분야를 독립영화로 찍는 다른 동료들을 인터뷰해서 책을 엮었다

여성 장애인 성 소수자 이주노동자 군대문제 동물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영화를 제작했던 나름 분야에 대해 전문가이고 할 말이 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나는 그들 개개인의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었는데

책의 구성은 저자가 자기 생각을 풀어나가면서 인터뷰한 사람들의 말을 인용처럼 들어간다.

저자의 생각도 건강하고 좋지만  인터뷰를  했다면 그들의 생각들을 조금 더 깊이 듣고 싶었다.

                                                                                 

우리가 혐오를 반대하는 잉는 자명하다. 혐오는 인간의 존엄성을 사산조각내고 그 사람을 하찮게 여기도록 한다. 차별과 혐오는 바늘과 실이다. 누군가를 차별하면 그 대상을 혐오하는 것이 당연해진다. 차별당하는 사람을 봐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여긴다. 혐오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차별과 혐오는 악순환이다.

우리가 혐오에 짐식되지 않고 혐오와 싸워 이길 유일한 방법은 타자에 대한 공감뿐이다. 고감이란 내 주변에 항상 있지만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내가 혐오하는 사람들이 낯선 타자나 이방인이 아니라 실은 나의 다른 얼굴이라는 사실을 단지 아는 것이 아니라 개우치는 것이다. 공감할 수 있다면 소통할 수 있다. 소통하면 이해하게 된다. 이해하면 더는 혐오할 수 없다. 그런데 고감 없는 이해는 오만한 해석이 되기 쉽고 이해없는 공감은 극단으로 치우치기 쉽다. 그러므로 공감하려면 알려는 의지가 즉 상대방을 이해햐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머릿말에서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과 누군가를 혐오하는 일은 다르다.

사람이 세상 모두에게 인정받고 사랑받을 수 없는 것을 뒤집어 말하면 모두를 사랑하고 이해할 수 없다. 내 감정에서 내 정서에서 내 상식에서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건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기도 하지만 절대 변하지 않기도 한다.

그건 잘잘못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다,

 다만 내가 싫어하는 대상에 대해 공공연하게 떠들면서 누구든 그 대상을 미워하도록 만든다면 그건 혐오가 된다.

사실 나는 아직 불법 이주노동자가 두렵고 개인적 양심때무에 병역을 거부한다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힘들다.

모두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은 안다

여자가 다 성녀이거나 창녀가 아니듯이 이 땅의 모든 남자들이 한남이라고 손가락질 받을 사람이 아니듯 외노자라고 다 흉악범죄자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러나 내가 알고 인식하는 것과 내가 느끼는 것은 다르다

요즘 많이 언급되는 "청년경찰"에서의 차별과 혐오의 문제를 문제라고 머리는 생각하지만 나는 내가 대림동을 가거나 외노자와 어울리고 싶지는 않다. 그럴 기회도 많지 않겠지만 나는 마음 한 구석에서 그들이 무섭다

책에는 중국인들이 많아지면서 시끄러워지고  다툼이 일어나고 그 다툼이 그냥 주먹다짐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칼부림으로 이어진다면서 그렇게 사건이 일어나도 순식간에 피해자도 가해자고 그리고 뿌려진 핏자국도 사라진다고 했다. 그만큼 그들이 두려워하는 건 불법 체류자이기때문에 집혀가는 것이다. 그만큼 그들이 차별받아서 내면에 두려움이 있다고 말하지만...

나는 왜 하필 소소하다는 다툼조차 칼부림이 나야하는가에 방점을 찍는다

외노자에게 쉽게 "니네 나라로 가라"고 하거나 외국인 신부들의 주민증 발급을 거부하는 남편들의 이기심등을 들으면 참 인간으로 할짓이 아니다 라고 분노한다. 외국인이라고 피가 붉지 않은게 아니라는 말처럼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반응은 오원춘 사건이나 떠도는 장기밀매 이야기들이 더 가깝다. 그들로 인해 거리가 더러워지고 다니기 두려워지는 일이 우선이다. 이것조차 혐오라고 생각을 하면서 쉽게 그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군대문화는 이미 군대만의 문화가 아니다. 그건 학교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모두 통용된다.

군대 다녀온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군대 경험 혹은 군대에서 축구하는 이야기가 가장 지루하고 거부감드는 주제라는 것에 동의하고 세상의 질서가 군대처럼 억압적이고 상명하달이라는 것에도 거부감을 느낀다. 군대가 인간성을 말살할 수 있고 폭력적인 문화가 어쩔 수 없이 강하다것도 안다.그럼에도 나는 개인적 혹은 종교적인 이유로 병역의 의무를 거부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다. 누구도 자진해서 가고 싶지 않은 곳이 군대다. 연예인 누구누구가 해병대를 가고 어린 나이에 군대를 자원했다는 이야기가 미담처럼 나올 수 있는 것도 그만큼 가고 싶어하지 않은 것이 더 크다는 반증이 아닐까 . 할 수 있다면 누구나 거부하고 싶지만 병역의 의무라는 것때문에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가야하는 거라는 것때문에 누구나 참고 기왕이면 좋게 가고자 할 뿐이다.

누군가의 종교상의 이유가 그리고 폭력과 군대문화를 받아들일 수 없는 양심이 존중받아야 한다면 가고 싶지 않아도 갈 수 밖에 없는 어쩔 수 없음도 존중받아야 한다. 나도 가서 2년을 뺑이 돌았으니 너도 가야한다. 너만 빠지는 것은 불공평하지 않은가 하는 마음이 아니어도 누군가는 폭력에 무감해서 그 문화애 대한 예민함이 없어서 갈 수 밖에 없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나의 양심이 나의 의무와 충돌할 때 결국 병역대신 처벌을 받아 감옥에 가는 것을 택하는 것이 차라리 나은지 ,,, 사실 여자라서인지 잘 모르겠다. 이제 군인아저씨가 아니라 군대간 아들이라는 표현이 더 가까운 나이가 되면서 누군가는 가장 빝나는 시기에 혹은 내가 가장이 되어야 하는 그 사간에 그냥 오롷히 흘렬 버리도록 감내하는데 누군가는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거부할 수도 있다는 게 조금 이해가 가지만 이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든다.

 

나는 혐오가 어떤 것인지 잘 안다.

나보다 약한 대상에게 흘러갈 수 밖에 없는 것이 혐오다.

나를 힘들게 하는 대상이나 제도는 다른 것인데 그 적확한 대상에게는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가장 만만하고 쉬운 상대에게 그 화풀이를 한다. 죽어라 한놈만 패는 것처럼 그렇게 나보다 약하고 만만한 대상을 미워하고 증오한다.

내가 취업을 못하거나 모든 욕망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건 잘못된 경제의 흐름이거나 제도의 부재때문일텐데 그건 너무 어렵다. 다만 내 옆에 그저 남자 말이나 듣고 고분고분해야할 여자들이 직업을 가지고 나와 경쟁하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저희 나라에서 살지 왜 이 한국까지 기어와서 일하려는 외노자들이 나의 경쟁상대가 된다.  내가 가진건 신체 건강한 군필자라는 것  사내라는 것인데 이제 세상은 부드럽고 자상한 남자들을 원한다. 남자라는 존재가 더 이상 한가지로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와 다른 사람이 역겹고 성소수자의 취향은 변탵스럽고 병적인 것이 된다. 장애인은 그저 돌봐주어야 하고 복지예산을 가져가는 짐스러운 존재다.

그들이 내 앞길을 막는다.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나를 화나게 한다. 그래서 밉다

그래서 싫고 사라졌으면 내 앞에 납작 엎드렸으면 한다. 그런 마음이 나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고 좀 더 과격하게 드러내고 공격한다.

그 모든 약한 존재가 사라지면 나는 편할까?

외노자가 사라지고 모든 아들들이 군대를 가고 나면 내 마음은 조금 더 편해질까?

모르겠다.

 

혐오를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조금의 교양과 상식만 있다면 세상에 많은 혐오를 알 수 있거 거부감을  이해할 수 있다.

나는 교양있는 사람이니 남들의 시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조금 더 진보적이고 조금 더 꺠어있는 주장을 할 수 있지만 내 마음은 조금 불안하다. 그들이 공격할지 모른다는 불안과 함께 나누고 싶지 않다는 욕심과 알고 이해하지만 그건 나와 그들이 다른 바운더리에 있을때 이야기이지 나와 함께 같은 공간에서 무언가를 나누어야 하는 순간이랴면  비겁하게도 나도 자신은 없다.

그래서 자꾸 이런 책을 읽는다.

모두 안다고 생각하지만 이제는 진부해져버렸지만./ 그래도 읽어서 자꾸 내 마음을 다시 다독일 필요가 있다.

내 속의 미움이라는 감정이 언제 불쑥 혐오가 되어 튀어나올지 나도 불안하기 때문이다.

 

공동체 사회를 인간 이상으로 확장해서 동물권에 대해 이야기해 준 6장은 새로운 세상을 내게 보여주었다. 

 

 

 

 

 

 

 

 

 

 

 

 

 

 

 

 

 

누구나 다 아는 유괴사건이 있었다.

아이는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집을 나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의 비명소리 아이의 겁에 질린 표정이 찍힌 사진이 집으로 오지만 아이의 행방은 오리무중이고 범인도 알 수 없었다. 친구 아버지가 용의자로 몰렸지만 정황이 충분하지 않다.

49일 후 아이는 돌아왔다.

아이는 49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모두가 아이에게 그때의 일을 묻지만 아이는 그저 집을 나가기 전 토요일에 본 주말의 명화가 기억의 끝이고 중간의 49일은 통째로 사라졌다.

아이는 자기가 기억못하는 그 49일을 자기보다 더 잘 아는 주위사람들 아니 모든 사람이 더 두렵다.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말을 해야할지 이미 답을 정해놓고 다그치는 사람들이 무섭다. 아이네는 이민을 갔고 성인이 되어  모두가 이제는 기억하지 못하는 한국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 아이가 유괴된 49일간 사라진 또 한명의 아이가 있었다.

 

이야기는 기억에 대한 이야기다.

누구나 아는 사건안에 아무도 모르는 기억이 있다.

사람은 살기 위해서 내가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는 기억을 지워버린다. 단지 살기 위해서 나를 위해서 기억을 지운다. 없던 일처럼 만들어버린다.

어른이 된 두 소녀는 가장 아픈 그때의 기억이 없다.

그러나 그 기억은 예고도 없이 돌아온다.

그것도 완전한 형태가 아닌 퍼즐조각처럼 복잡하게 얽히고 조각난채로 내게 두서 없이 돌아온다.

소녀들은 용기를 내어 기억을 직면한다.

아파서 잊었던 기억을 아프지 않게 위해 다시 꺼집낸다.

살기 위해 잊었던 것을 이제 살려고 기억해내려고 한다.

직면하는 일은 언제나 두렵다.

그 깊은 망각속에 어떤 괴물이 어떤 모습으로 숨어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 망각이 내 것이지만 내 속에 숨은 깊은 우물이지만 나는 나의 우물을 들여다 보는것이 제일 무섭다. 그러나 봐야 한다. 내가 여기서 한 발자국 더 걸어가고  빛을 향해가기 위해서 봐야 하는 것이 그 우물이다.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우물속에는 괴물도 있지만 그 괴물은 생각만큼 흉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젠 작은 개구리가 되어 내가 충분히 마주할 수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기억하지 않은 나는 내가 아니다

군데군데 지워져 버린 모습은 나의 완전한 모습이 아니다.

나를 구성하는 건 뼈와 살과 피와 함께 나의 기억들이다.

누구도 이젠 나를 알아보지 못해도 나만은 나를 알고 있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나만 모른다면 나는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너무 힘든 고통은 잊고 싶다.

사라져서 아무도 아니 적어도 나만 몰랐으면 좋겠다.

너무 힘들다면 깊이 쑤셔 놓아도 괜찮다

다만 너무 늦지 않게 그렇게 방치하고 감춰둔 것을 다시 꺼내야 한다.

그건 괴롭고 무서운 것만 있는게 아니라 가장 여리고 보드라운 내가 함께 견디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나를 찾는 일이 기억하는 일이다.

단순하지만 몰입감있게 읽었다.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 <청춘시대2>의 등장인물 중, 데이트 폭력 피해자 예은이 있다.

전편에서 폭력을 경험하고 생존했고 심리치료를 받고 있고 학교를 휴학했다가 다시 복학했지만 여전히 불안하다. 밤길 남자. 혼자 다니는 것 누군가 나를 바라보는 것 모든게 두렵지만 무엇보다 그런 피해를 당한 내가 무언가를 잘못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나빴기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다.그건 타인이 쉽게 내뱉는 말일 때도 있고 나 스스로 끊임없이 되묻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피해자인데 내가 가장 상처입고 폭력을 당했고 살아남았는데 그는 멀쩡하게 죄값을 치르고 캐나다로 가버렸고 나는 여기서  두려움을 눌러가며 타인을 두려워하며 살아가야한다. 게다가 험한 뒷담화도 내몫이고 남들의 편견이나 의심도 오롯이 내가 감당해야한다

폭력자체도 두려운데 그 폭력에 젠더가 개입하고 남녀 관계가 얽히면서 문제는 이상하게 꼬여간다. 때린놈은 나쁜 놈 맞은 놈은 당한 놈이라는 칼로 딱 잘라버릴 정리가 되지 않는다.

도데체 어떻게 행실을 했길래.. 뭔가 이유가 있겠지 하는 의심부터 이제 남사스러워 어떻게 살래? 이제 걸레잖아. 하는 혐오까지 모조리 피해자의 몫이다.

폭력을 당해서 살아남아도 또다시 잔펀치들이 훅훅 들어온다. 그땐  배려라거나 관심이라거나 충고라는 이름을 달고 들어오지만 그것도 폭력이다.

드라마 흐름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은이 언제나 겁에 질려 있는 것은 아니다.  하메들과 웃고 똑 소리나고 얄미운 조언을 하기도 하고 괜찮아 보일 때도 많다. 이제 시간도 제법 흘렀고 잊을 만하지 않은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다시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 참 많이 애쓰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아닌척 괜찮은 척... 말은 그렇게 하지만 남들에게 폐끼치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 힘들었겠구나 싶었다.

 

강화길의 소설들을 읽으면 모든 인물들이 괜찮은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한다.

모두가 아프다. 과거 폭력의 경험이 있고 버림받은 기억이 있고 남들에게 뒤쳐졌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더이상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고 내 자식에게 그런 낭패감을 물려주고 싶지 않고 관계에서  소외받고 싶지 않다. 모두가 힘들고 아픈데 관찮은 척 한다.

아무렇지 않은 말간 얼굴고 남의 일인것처럼 그림자를 못 몬척 하고 애를 쓴다.

모두가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아프다고 악! 하고 소리지르며 주저앉는 순간 나는 더 이상 괜찮지 않고 남들보다 뒤떨어지고 문제가 있는 사람이 되어버릴테니까 절박하게 괜찮은 사람인양 미소짓는다.

그 미소가 슬프다.

사실 단편들을 모두 읽지 못했다.

처음 나온 <호수 - 다른 사람> 을 읽고 너무 힘들어서 그만 읽고 싶었다.

이후 몇편을 더 읽었지만 모두가 너무 힘든 인물들이었다.

괜찮다고 위로하기엔 그 위로가 어줍잖아질 것같이 모두가 제 고통속에서 아프다는 말도 못하고 웃고 있었다. 위로를 거부하는 얼굴들이다.

<호수- 다른 사람>의 주인공이 마지막에 해야할 일을 했다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순응이 아니라 차라리 폭력일지언정 세상을 향한 저항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픈 사람들이 아프다고 말하고 나를 치료하라고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세상이 정말 좋은 세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이건 강화길보다 더 강하다.

첫 단편부터 읽기가 너무 힘들었다.

이럴거야.... 이럴지도 몰라.... 이러지 말았으면..... 그것만 아니었으면..

하는 사건들이 쉴 틈도 주지 않고 훅훅 치고 들어왔다.

여자가 당할 수 있는 모든 폭력이 종합셋트처럼 펼쳐진다.

감금 강간 폭력  비하. 혐오. .....

그러나 록산 게이의 여자들은 그 모든 상처를 직면하고  다시 일어선다.

더 이상 일어날 수 없고 그대로 주저 앉아도 그만일 상황에서 모두가 다시 일어서고 현실을 마주한다. 모두가 약한 여자들이었지만 동시에 강한 여자들이다.

어려운 여자란... 어려운 일을 경험한 여자들이지만 어떤 폭력에도 쓰러뜨리기 어려운 여자들 강한 여자들이란 의미였을까?

마지막 단편은 저자의 경험이 아니었을까? <나쁜 페미니스트>에서도 봤던 에피였다.

그럼에도 다시 일어나 멋진 책을 써줘서 정말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약하고 쉽게 부서질수 있는 존재지만... 무언가 부서줬다고 그대로 주저 앉아 버리는 존재는 아니다. 괜찮아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괜찮은 사람이다.

내가 경험한 기억이 아름답든 추하든  그 모든 것이 나라는 것을 직면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누구를 미워할 수는 있지만 누군가를 따돌리는 혐오는 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나도 그런 사람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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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도란스 기획 총서 2
권김현영 엮음, 권김현영.루인.엄기호 외 지음 / 교양인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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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대목은 어려웠고 몇몇 대목은 흥미있었다.

 저자의 생각들을  아직은 모두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면 일방적인 시각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문득 했다.

 내가 리뷰를 쓰거나 평가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읽은 내 느낌.. 내가 받아들인 만큼 그리고 내가 밑줄 그은 문장들을 기록하려고 한다.

 서재는 넓고 좋은 리뷰는 많고 이 책에 대한 글들도 좋은 것들이 많다.

 이 글은 지극히 개인적인 끄적임이다.

 

 

한국남성들은 아비없는 자식과도 같다.

아비가 자식에게 몸으로 보여주며  따라하게 하는 역할모델을 하며 자식이 성장하는 법인데

어느 순간 한국 남성은 내가 따라야 할 롤 모델이 사라졌다.

일제와 함께 시작된 근대화에서는 이미 조국은 사라졌고 기존의 가치관은 땅에 떨어졌고

일본을 모방해서 살아남거나 그저 식민지하의 남성으로 열등하게 살아가거나 하는 방법밖엔 없다. 살아남기 위해 따라야 하는 관습은 우리것이 아니고 내게 익숙할 수 있는 방법은 여성의 것이거나 노예의 것뿐이다. 그렇게 혼란스럽게 스스로 자기가 어떤 모습을 해야하는지 급하게 결정하거나 주어진 대로 살아야 했다. 그리고 광복된 후 들어온 서양의 문화와 정치를 단계를 건너뛰며 받아들인다.

더 좋아보이고 더 힘이 있어 보이는 문화를 걸치지만 그것 역시 내것이 아니어서 비틀리고 어딘가 품이 어정쩡한 형태로 내 몸이 되었다.

남자다움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그리고 외환위기를 겪으며 고개숙인 남자라든가 어깨가 쳐진 가장 같은 표현이 등장한다.

경제적 위기로 모두가 절망에 빠진 그 때 누구보다 남자들이 더 힘들다는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가장의 외로움.....

얼마나 외롭고 고독하고 불안한 삶을 살아내지 않았으면 그런 변화가 천지개벽할 일처럼 여겨졌을까?  여성도 함께 겪여내야 하는 일에 남자들에게 더 동정이 떨어지고 호들갑스러웠다.

가장이니까 자를 수 없고 여자가 나가는게 모양새가 좋지 않은가 하는 말들이 오간 것도 그때였고, 여자들은 돌아갈 가정이 있다고 핑계를 댄 것도 그때였고 신문이나 문학이나 모든 것들이 남자를 위로하기바빴던 것도 그때였다.

세상은 늘 변한다.

내가 고작 반백년도 살지 못했는데 컴퓨터가 등장하고 핸드폰이 등장하더니 스마트 폰으로 바뀌고 인터넷으로 내가 모르는 세상이 없고 나를 지켜보는 눈들이 여기저기 생겨나며 더 이상 개인공간이란 존재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변하는 세상에 맞춰 변해야 하는 건 옳고 그름을 떠나 어쩔 수 없는데

남자들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줄 알았고 변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남자라면 의례 그래야 하는 것들을 놓고 싶지 않은데 세상은 자꾸 변하라고 하고 여성들은 변해가고 나의 영역은 점점 좁혀오고 이건 제대로 된 것이 아니라고 느끼는 걸까?

결국 남자다움 혹은 남성성에 집착하면 점점 세상이 좁아지는 것 뿐인데 그걸 바꾸려고하지도 않고 그저 유지하고 싶어한다.

 

 

이 책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는 젠더 연구로서 남성성을  분석하는 인식론과 방법론을 제안하는 것이다. 이 책의 필자들은 남성성과 관ㄹ녀한 신체 심리 문화는 실재가 아니라 규범이자 신화라고 본다. 또한 페미니즘이 여성을 여자다움에서 버어나도록 하여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게 하는 이론이라면 남성 역시 남자다움의 구속으로 부터 멋어날 수 있게 해주는 사상이며 그것이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는 데 동의한다. 이 책에서 우리는 기존의 남자다움의 규범을 해체하는 동시에 남성성에 대한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열고자 한다.

 

                        <들어가는 글>에서

 

 

식민지배를 경험한 한국 사회에서 낫어과 함꼐 살아가야 하는 여성들에게 식민지 남성성은 여성주의의 가장 큰 논쟁거리이자 이론과 실천의 어려움을 안긴다. 한국 남성들은 해방 후 친일 청산과 대미 사대주의 극복을 제일 과제로 삼앗지만 그 방법론을 둘러싸고 정치적 갈등을 빚게 된다. (중략) 남성 세력간의 투쟁과 세력 교체(정권교제) 자체가 한국 사회의 정치적 전선을 독점하면서 한국의 페미니즘은 독자적 정치학으로서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젠더는 모든 권력 관계의 모델이다. 특히 국제 정치학은 논리자체가 젠더 은유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흔히 강대국은 남성으로 약소국은 여성으로 재현된다. 한국의 오랜 오세 콤플렉스는 실제 침략당한 경험과 주변 강대국과의 관계에서 생성된 것이다. 한국남성은 '여성'으로 간주되거나 스스로 '여성'암을 자처했다. 자신은 영원한 식민지 피해자라는 것이다. 한 사회의 주된 남성 문화를 '식민지 남성성'으로 명명하기 위한 전제는 다음과 같다.

 

 1) 남성은 보편적 주체로서 자신을 국가나 민족과 동일시 한다.

2) 자신의 성별 정체성을 국내 여성과의 관계에서 구성하기보다는 외세와의 관계에서 파악한다. 이때 자신은 강대국에 비해서 약자이므로 '여성'으로 정체한다.

3) 하지만 자신은 '본질적'으로 남성이므로 강자에 저항하거나 강대국을 '이용해야하는 중대한 업무를 띠는데 이때 자기 옆의 여성들이 자신과 뜻을 함꼐 하지 않고 평등을 외치는 것은 반민족 반국가적 행위라고 생각한다.

4) 여성해방은 계급 해방이나 민족 해방 이후의 과제이다

5) 이때 여성의 역할은 강자와의 투쟁에 바쁜 자신을 대리하여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고 자신의 성적 욕구를 해결해주는 것이다. 즉 여성은 성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그것이 대의이다.

6) 동시에 자신이 지쳤을 때는 언제나 위로와 지지와 격려를 해주는 정치적 '동지'여야 한다.

7) 자원ㅇ 부족할 때는 자국 여성에게 적의 '성적 노리개'가 도어 먹을 것을 얻어오라고 강요한다. 이때 우울해하거나 (이상의 날개) 자존심이 상해 여자를 도리어 두둘겨 패거나 여성을 혐오한다.  환향녀(화냥년)라는 낙인을 찍어 공동체에서 매장한다.(안정효 은마는 오지 않는다) 혹은 중산층 여성에 대한 적대감으로 피해 여성을 진정한 민중으로 숭배하거김기덕 해안선) 나 분노로 인해 스스로 미친다(남정현 분지)

8) 손상된 자신과 아버지의 자존심을 되찾ㄱ위해 어머니와 누이에게 더 큰 희생을 요구하거나 이 영화를 아버지에게 바친다

9) 좌파 민족주의 진영은 가해국(일본)과의 투쟁에서' 우리에겐 위안부카드가 있다'며 외세 협박용으로 삼거나 우파 민족주의자들은 '군 위안부'문제에 대한 사과 대신 경제 협력이나 군사 원조를 받아낸다. 강대국에게 군사력이 협상할 수 있는 힘이라면 한국 남성에게 그 자원은 여성이다.

10) 자신의 이 모든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은 자기 성찰이나 강자에 대한 저항이지만 강자는 멀리 있거나 강대국 자체도 균질적 존재 (여성이나 흑인이 있다)가 아니므로 도리가 없다. 결국 술을 마신다. 무겨력 자기 연민 고뇌하는 자기도취상태에 있다.

 

                                            정희진 < 한국 남성 식민성과 여성주의 이론> 중

 

 

누구와 동일시할것인가 누구와 함꼐 무엇을 할것인가의 내용은 완전히 다시 쓰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평등의 기획이었던 근대는 차이들을 만들어내는 시공간으로 다시 이해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남자들 간의 차이를 드러낼 수 있는 움직임은 헤러웨이(Donna J. Haraway0 의 표현을 빌린다면 세계속에 차이를 낳으려는 노력이다. 잰도룰 꾾임없이 이분법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우리를 ㅍ평등하게 하지도 못했고 자유롭게 하지도 못했다. 더구나 그 결과 한국 남자들은 끊임없이 보편의 위치와 동일시할 수 없는 처지를 한탄하고 자신의 남성성을 확인하기 위해 외부 생식기의 기능에 집착하며, 자신들을 탈식민지화 하는 게 아니라 여성들을 식민화함으로써 정신 승리를 유지하고 있다. 이것을 정상적이고 보편적인 남성문화로 승인하는 순간 남자들간의 차이는 사라져버린다. 남자들 간의 차이가 드러날 수 있어야 만 다시 지배적 남성성을 획득하려는 불가능한 기획이 반복 수렴되는 무한 루프를 멈출 수 있다. 그래야만 식민지 남성성은 여성성이 아니라 남자들의 남성성 중 하나가 될 수 있고 이때 비로소 탈 식민지의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

 

                                        권김현영 < 근대 전환기의 한국의 남성성>

 

 

인간을 두가지 젠더로 인식하는 문화 장치이나 이를 자기 범주로 몸에 익히도록 하는 과정인 섹스-젠더 이분법 혹은 이원젠더체계는 언제나 근대 의료 기술과 인식론을 밑절미로 삼는다. (중략)

근대적 젠더는 늘 개인을 명료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한다. 분류하고 정의하여 한 개인을 교집합 없는 범주에 가두고 단 하나의 명료한 범주로 설명할 수 있도록 하며 한 개인의 몸을 둘 중 하나의 범주에 오차없이 부합하는 형태로 만든다. 하지만 개인을 명료하게 만드는 작업은 언제나 남성이냐 남성이 아니냐로 나뉘고 트랜스젠더퀴어나 인터섹스 혹은 다른 젠더 범주의개인은 남성 범주와 무관하게 된다. 남성 범주는 민족을 대표하는 동시에 그 민족 자체이기때문에 순수하다는 신화를 유지해야한다. 남성성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이를 이협하는 요소는 모두 비낭성 범주로 버려진다. 병역을 위한 신체검사는 바로 이 과정 남성의 몸과 그 몸에 당연히 부착해 있다고 여겨지는 남성성을 여과하는 과정이며 특정한 남성 신체에 남성성이 자연스럽게 발현된다는 신화를 영속하는 정책적 과정이다. 하지만 규법적 남성성은 트렌스젠더퀴어와 인터섹스없이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중략)

근대 의료 기술은 남성성을 통해 제지위의 변화를 꾀했고 남성성은 의료 기술을 통해 제 실체를 구축하고자 했다. 이렇게 구축된 실체는 불분명하다. 구체적인 것은 외부 성기 음경과 고환뿐이다. 이성애 관계에서 재생산을 할 수 있는 음경이 있어야 비로소 의료 규범적인 남성이다. 재생산할 수 있는 음경이 있다면 자신의 젠더 인식과 상관없이 남성이어야 한다. 이것은 의학에서 신생아를 남성으로 판별할 때 가장 중시하는 조건이다. 이 조건은 아이러니하다. 근대의 이상게서 남성성은 과학적 합리성과 이성을 대표한다. 비합리적이고 우발적인 사건은 언제나 비남성성에 속한다. 아울러 자연적인 것 생물학적 본능에 따른 것도 남성성의 성질은 아니라고 회자된다. 남성성은 과학적 이성이며 감정없는 판단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과학과 이성을 자신의 밑절미 삼은 의학과 의료 기술기획이 규정한 남성/성은 외부 성기와 재생산 능력에 근거하고 있다. 이것은 아이러니지만 아이러니가 아니다. 성폭력 가해 남성이나 성구매 남성이 가장 많이 하는 항변은 남성의 성욕은 생물학적 본능이라는 것이다. 이런 식의 항변은 성폭력 가해와 폭력을 정당한 것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이자 생물학 혹은 의학을 본질주의로 만들고 규범으로 만드는 과학적 실천이다. 즉 근대적 이성 과학적 합리성은 거의 언제나 남성 (혹은 지배규범) 의 욕망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실천 양식이다. 따라서 남성의 성욕은 생물학적 본능이라는 식의 언설은 의료 근대화가 기획하는 남성성의 핵심을 요약한다.

 

                                               루인 < 남성 신체의 근대적 발명> 중

 

 

 

 

새로운 인간 개념은 존재 자체를 사회적으로 존재할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으로 사유하고 사회적인 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민권을 다시 상상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산하는 노동과 재생산하는 노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노동이 생산이자 재생산이며 존재하는 모든 인간은 이미 그 생산과 재생산의 거대한  사회적 과정에 개입한다고 받아들여야 한다.그래서 시민권은 노동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여기 이자리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의 권리로 혁신 될 필요가 없다. 이는 우리들이 평등의 문제를 어떻게 다시 정치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가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이런 상황에서 앞에서 이야기한 두가지 다른 양상의 남성성이 출현했따. 이 둘은 국민국가의 주권적 존재인 남성의 위기에 전혀 다르게 대응하는 두가지 방식이다. 한쪽은 주권자로서 남성의 위기에 반응하여 자신을 피해자로 규정하고 자신들 역시 기득권자가 아니라 박탈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에게 남성이 더는 주권의 독점자일 수도 생계 부양자일 수도 없는 재편된 사회 구조 속에서 자신들의 다음이 무엇이어야 하며 그 무엇이 되기 위해서 자신의 우치를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에 대한 언어는 없다. 이들이 자신의 처지에 대해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지만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은 자기 연민의 언어이다.

그리고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남자들이 있다. 이들은 국민국가의 틀에 갇혀 특수성을 강조하는 모든 언어를 야만적이고 후진적인 것이라 공략하면서 낙후시킨다. 이들이 운명 담론을 을 즐겨 사용하는 이유이다. 흥미롭게도 피해자 남성들의 언어가 자기 연민적이라면 이들의 언어는 자기 확신적이다. 이들이 이렇게 자기 확신을 할 수 있는 것은 페미니즘이 사회적 약자의 언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보편적인 언어이기 때문이다. 즉 보편성에 대한 확신이다. 따라서 이들이 스스로 페미니스트라 말하는 것은 곧 자신을 보편성의 옹호자로 선언하는 것이다.

 

 

                                                        엄기호 < 보편성의 정치와 한국의 남성성> 중

 

 

 

우리는 남녀라는 성별 이분법뿐만 아니라 이성애와 동성애라는 이분법 부치와 펨이라는 이분법 생물학적 성별과 사회적 성별이 대립적으로 있다는 섹스와 젠더 이분법까지도 모두 넘어서야 한다. 이분법을 넘어선다는 것은 두 개보다 더 많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숫자는 애당초 중요하지 않다. 이분법을 깬다는 것은 대립된 한 쌍으로 이루어진 구조의 언정성에 대한 거부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항상 그렇게 명쾌하고 깔끔하게 분류될 필요가 없으며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질문은 다시 시작된다. 이른바 이성애자 남성은 누구인가? 이성애자 남성의 정의는 무엇인가 어떻게 구분하고 판별할 수 있는가? 어떻게 이성애자가 될 수 있었고 남성이 될 수 있었는가? 여성을 사랑하기에 이성애자가 된 것인가? 이성애자이기 때문에 여성에게 끌린 것인가? 이성애자 남성은 상대의 성별이 다르다는 것을 어떤 감각으로 판단하는가? 우리는 모두 같은 인간이면서 동시에 다른 성별을 지녔는가? (중략)

남성성과 이성애를 동일시 하는 이성애자 남성들은 레즈비언을 남성성이 과잉된 여성으로 게이를 남성성이 결여된 존재로 다룬다. 그러다면 과잉이나 결여가 아닌 적정량의 남성성이란 과연 얼마만큼일까? 왜 남성성은 이토록 쉽게 과잉되거나 결여될 수 있는가? 게이 커플의 사랑을 아름답게 그린 드라마를 보고 자신의 아들이 게이가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이성애자 부모들은 왜 그런 걱정에 사로잡힐까? 이성애는 자연의 질서이고 남성성은 타고나 ㄴ것이라 확신하면서도 왜 그토록 쉽게 허물어질까 두려워하는 걸까? 남성서과 이성애의 정상성에 대한 믿음은 그토록 강력하면서도 인정성에 대한 믿음은 왜 이토록 허약할까?

이 시대를 뒤덮은 동성애 혐오와 여성 혐오는 사실상 이성애자 남성들의 불안과 공포의 작동때문이다.

 

                           정채윤 < 이성애 제도와 여자의 남성성.>

 

 

트랜스 남성의 남성성은 일견 전형적인 한남이 되고 싶은 욕망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서두의 인용문에서 내가 처음 느꼈던 평범한 남성성은 일상에 만연해 있고 한남들이 과시하는 바로 그 남성성이다. 태어날 때 지정받은 성별이나 페니스 유무를 비롯해서 신체적 차이등 들킬 위험을 내재화하는 맥락상 조건은 분명 다르지만 마초스러운 너무나 마초스러운 트렌스남성은 한국 사회의 남성성과 구분짓는 게 무의미하다.

한국 사회에서 남성성의 규범을 완벽히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니 수행 불가능 그자체가 남성성의 특성이기도 하다. 언제나 지연되는 것 늘 실패하는 것 적절한 좌절을 추동력 삼아 사회적 남근이라는 성별 위계와 역할을 지속하는 것이 지배적 남성성을 구성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한국 ㅏ회에서 남성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모두 이러한 남성성을 구성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남성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모두 이러한 남성성의 속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각각의 남성 집단들이 바련하는 남성성이 그러하듯 트랜스 남성 역시 한남으로서 남성성이 지니는 수행 불가능성을 이행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트랜스남성에게 남성성이란 언제나 획득할 수 엇음으로써 얻어지는 역설적이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트랜스 남성의 트랜지션 과정은 그저 한남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트렌스 남성의 남자되기 욕망과 실천은 결국 이 사회 주류 남성의 문화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트렌스 남성은 지금껏 그래왔듯 자신들의 맥락과 입장에서 성별 규범을 충실히 수행하고 남성성을 발현하며 살아갈 것이다. 트렌스 남성성은 한남이 됨으로써 한국 남자의 남성성을 충실히 따라갈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과는 다른 방향으로 변화가 생겨날 수도 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이 그 다른 방향의 변화를 만들지도 모른다"트래느 남성이 되거 싶은 것은 한남인가?"

 

                                                    준우 <트랜스 남성은 어떻게 한국 남자가 되는가>

 

남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진다.

한국남성은 한국 남성으로 만들어진다.

남성의 성기를 가지고 국가에서 부여하는 주민번호 뒷자리를 홀수로 부여받는 순간 남자로 길러지고 만들어져간다.

내 의사나 성향 어떤 호르몬의 작용과는 상관없이 남자라는 틀에 들어간다.

남자답지 못하게.....

남자가  그러면 안되지....

남자가 이깐 일로....

남자라면 당연히....

어떻게 남자한테 감히...

남성은 권력이고  힘이고 세상의 기준이 된다.

세상은 남자와 남자가 아닌 나머지로 나뉜다.

그렇게 기준이 된 그들은 그 기준에 벗어나는걸 못견디고 두려워한다.

세상에는 똑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으며 모두가 다 다르다고 하는데 세상에는 모두가 같은 남자와 다른 나머지들이 있다.

모두 같아야 하는 남자들은 힘들것이다.

나도 내가 아닌 것을 그런 척 하는게 힘들다는 걸 알고 그건 꼬마들도 몸이 배배꼬이는 일이라는 걸 안다.

그냥 다른 수도 있고 다양할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는게 편하다,

세상이 변하니까 내가 변해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면 좋겠다.

변하하는 세상에 몸을 맡기고 조금씩 움직여가는게 편하지 않나? 모두가 행복해지는 일은 변해도 되고 달라도 되고 힘을 빼도 된다는 걸 아는 일이다.

페미니즘이 여성뿐 아니라 남성에게도 좋은 방향이라는 걸 이렇게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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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영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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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을 때는 이 점을 기억해 두는 게 좋을 거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서 있지는 않다는 것을...

 

 

그 전 달에 나는 그와 여섯 번쯤 대화를 나눴는데 실망스럽게도 그와는 별로 할 얘가기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덕분에 어떤 신비로운 거움일거라는 첫 인상은 점점 사라지고 이제는 그저 한동네의 호화로운 여관집 주인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처음 읽었을 때는 누구나처럼 개츠비와 데이지를 중심에 놓고 읽었다.

두 사람의 사랑이 과연 진실한 사랑일까?

통속적이고  들 떠 있는 분위기 그리고 그 속에서 불안한 사람들 과연 사람은 뭘까?

왜 개츠비가 위대하지?

왜 이것이 고전이 되었지? 그냥 통속적인 이야기인데? 하이틴 로맨스랑 다른게 뭐지?

 

이번에 다시 읽게 되면서 나는 다른 인물보다 화자인 닉 게러웨이에 주목했다.

그는 이 소설의 화자이다.

우리는 그가 보고 그가 느끼고 그가 판단하는 걸 볼 수 밖에 없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처럼 누군가 일인칭 화자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우리는 다른 판단을 할 수 없다.  독자는 화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판단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이 책을 닉의 시선을 통해 그에게 의지하며 알아간다.

 

닉은 상류층 인물이다. 개츠비보다는 데이지와 톰에 가까운 인물이다. 다만 책의 첫머리에 나오는 인묭문처럼 내가 가진 시선이 어떤 특수성에 있는 것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는 걸 늘 생각한다.

그러나 누구나 인식과 행동이 일치하진 않는다. 의식적으로 자기의 위치를 생각하고 타인을 바라보지만 알게 모르게 닉의 계급과 그가 가진 익숙한 문화가 튀어나와 그의 시선을 조절한다.

 

닉의 시선에는 늘 우월함이 있었다.

그는 시종일관 주인공들의 움직임에서 한 발 떨어져서 사람들을 관찰하는 입장을 취하고 어느 편에도 쉽게 서려고 하지 않았다. 일인칭이지만 자기의 이야기가 아니라 타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게 화자가 끼어들 만한 여지가 없을 수도 있지만  닉을 얄미울만치 두 세계 사이를 걸치고 있으며 빠져들지 않는다.그는 늘 세계의 바깥에 서 있고 셰게 안으로 발 하나를 걸쳐 놓을 뿐이다. 언제든 뺄 수 있고 언제든 선을 그을 수 있게

그는 이야기 밖에서 인물들을 바라보지만 모두에게 공정하지 않고 가끔 이야기 안으로 들어오기도 하지만 그때는 철저하게 자기의 입장이고 스스로를 변호할 뿐이다.

톰과 데이지와의 관계 그리고 개츠비와의 관계에서 나는 모든 걸 가진 사람이라는 위치에서 둘 을 내려다 본다.

속물적이고 즉흥적이 인물의 일탈들에도 냉소적이고  개츠비의 막무가내의 자아도취같은 로맨스에도 쉽게 공감하지는 않는다.

어떤 인물도 이해하지만 그 입장을 진심으로 공감하지 않는다.

사실 누군가 나와 다른 타인을 공감한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아비지의 조언이 어떤 의미였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누구나 제각각의 입장이 있다는 건 맞는 말이다. 나의 입장에서 타인을 판단하는 건 어쩌면 편견이고 오만일 수 있다.

 동시에 그 말은 많은 걸 가진 입장에서 너보다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대할 때 항상 주위해야한다는 우월감을 드러내기도 하는  문구가 될 수도 있다.

닉의 태도는 각자의 입장을  이해해보려는 태도와 함께 그럼에도 나는 그 지저분한 관계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는 몸사람도 느껴졌다.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통속적인 치정극을 닉과 함께 보고 있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닉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결핍을 가지고 있다. 그 결핍을 알지만 그 빈 곳을 채우기 위해 스스로 무언가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통해 그 결핍을 채우고 싶어 했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통해 상류층에 대한 갈증을 채우고 싶고 데이지는  로맨틱한 사랑도 꿈꾸지만 동시에 톰과의 생활이 주는 상류층의 달콤함을 더 갈망하고 톰은 머틀과의 불룬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어한다. 머틀 역시 톰을 통해 지긋지긋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한다.

닉 역시 이들의 일상을 우연히도 함께하고 엿보면서 아무일도 없고 지루한 일상에 재미를 더하고 자기가 좀 더 괜찮은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얻는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타인을 통해 얻을 수 있다.

내게 없는 걸 굳이 나를 쥐어 짜내며 구하려 하기보다 그것을 풍요하게 가지고 있는 누군가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다만 전적으로 타인이 그것을 충족시켜 줠거라고 믿거니 해서는 안된다.

인물들은 누구나 타인이 나를 채워주길 바란다.

내가  결핍된 것을 말하지 않아도 타인이 채워주기를.. 너무 바라기만 한다.

그러나 결핍된 사람이 또다른 결핍된 사람을 채워주긴 힘들다.

상처를 가진 사람은 오히려 상처를 가진 사람에게 끌린다.

사람은 누구나 익숙하고 편한 것에 끌리는 편이라 상처를 가진 사람은 또다시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상처를 있는 대상을 택한다. 동병상련이라는 것이 서로에게 좋은 위안이 되리라 믿지만 냉정하게도 내 상처조차 어쩌자 못한 사람은 타인의 상처를 보듬어 안아 줄 수 없다. 오히려 내 상터가 거 벌어지지 않은 것에 더 신경을 쓰느라 타인의 상처는 안중에도 없다.

그래서 내가 가진 상처는 그 상대로 인해 더 커지고 오히려 또다른 상처를 얻게 된다.

사실 없는 사람들끼리 보듬고 살거나

상처를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를 치유해주고 살아가면 좋겠지만

사람은 내가 가가진 것과 비슷한 사람에게 익숙하게 끌리면서 동시에 내가 가지지 못한 무언가를 채워주기를 바란다. 같은 대상에게 너무나 다른 걸 바라는 것이다.

 

자기부정에서 출발한 개츠비는  허영심이 많고 나약한 데이지를 안아 줄 수 없다.

데이지 역시 개츠비에게 색다른 매력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에게 어떤 안전기지가 되어줄 마음은 없어 보인다.

톰은 데이지가 상징하는 상류층의 세상을 버릴 생각은 없지만 머틀이 가진 육감적인 매혹을 떨쳐버릴 생각도 없다.

닉 역시 모두를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그저 자신에게만 관심있는 인물이다. 그들을 통해 그들을 이해햐려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보며 나는 그렇지 않아 다행이야.. 하며 안도하는 인물이다.

모두 이기적으로 타인을 통해 자기를 위안하고 적당히 무시하면서도 겉으로는  교양있는 척  행동한다.

모두가 위선적이고  탐욕스러운 사람들이다.

 

위대한 개츠비가 위대하다는 것이 그가 고결하고 정의로운 인물이라는 것보다.

그런 위선적이고 욕심스러움 속에서도 대책없이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무언가를 믿고 달려가는 무모하면서도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때문 아닐까

대책없이 무모하며 순수한 개츠비는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데이지를 향해 저돌적으로 달려들지만 결국 스스로  파멸한다. 결핍을 채우기위해 가졌던 것이 순수함에 대한 갈망이었지만 그가 소망했던 그 순수함은 거짓이고 찰라적인 것이고 허상이었을 뿐이다.

좀 서글픈 위대함이다.

 

누구나 자기의 입장에서 세상을 본다.

자기가 얼마를 가졌든 보잘것없는 위치든 제각각 자기 위치에서 보이는 시선을 가졌을 뿐이다.

개츠비의 집에서 건너 보이는 반짝이는 초록불빛은 그립고 갈망의 대상이었고

부캐넌의 집에서 건너보이는 집들은 그저 졸부들의 천박한 모습이다.

내가 보는 것이 사실 그 대상의 본 모습일 수 있다.

그러나 왜 그런 모양인지까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닉이 들려주는 개츠비의 살아온 모습과 개츠비의 아버지가 보여주는 자랑스러운 아들 개츠의 모습은 다르다. 각자의 시선에 각자의 정서를 필터로 보는 것이지만 두 가지 모습이 다 개츠비였을 것이다.

다만 닉은 닉의 입장에서 보고 판단하고 타인의 판단들은 유보하거나 무시한다.

아예노골적으로 무시하며  타인을 보려고 하지 않은 톰이나 데이지, 조던보다 모든 걸 다 보려고 한다는 중립적인 자세를 지니려하지만 정작 자기의 시각도 그리 넓지 않다는 걸 모르는 닉의 시선은 더 큰 편견이다.

 

닉도 신비한 이웃 개츠비에게 관심을 가진다. 어떤 인물인지 호기심을 갖고 경외감을 느낀 적도 있지만 금방 개츠비가 진실되지 않다는 것과 자신과 다른 부류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데이지에게 아직도 미련을 가졌고 그가 데이지에게 보여줄 수 있는 건 아름다운 셔츠로 상징되는 부의 과시이상 아무것도 없으며 결국 데이지는 자기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을거라는 것도 짐작한다. 개츠비는 그냥 그들 옆을 서성이다 쫒겨날 거란 걸 안다.

개츠비의 파티에 왔던 사람도 호기심으로 다가 왔다가 그냥 이용하고 즐기기만 했을 뿐이듯

닉 역시 마지막까지 개츠비를 지켰지만 나는 아직 그의 진심을 믿을 수 없다. 게츠비는 어쩌면 닉의 삶에 하나의 색다르고 의미있을 추억의 하나로 남을 뿐이다.

재즈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곧 다시 전쟁이 시작될 것이고 밀주를 마시며 떠뜰썩하게 파티를 즐기던 사람들은 또다른 삶이 시작될 것이다. 개츠비는 잊힐 것이고 톰과 데이지는 그냥 같은 패턴으로 살아갈 것이다.

삶의 한 시대가 지난다는 건 참 서글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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