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작가인 당신 사츠오는 아내가 여행을 떠나기 직전까지 머리를 자르게 했다.

어쩌면 아내가 원한 일일 수도 있다.

어중간하게 길어 보기 좋지 않은 남편의 머리가 걸려 잘라줘야 겠다고 마음먹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은 거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내가 해준다는데 뭐 괜찮으니까 먼제 나서지 않았나 그렇게 스스로 위안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런 과정조차 없이 단순하게 당연하게 여겼을 것이다.

머리를 자르는 동안 늘 그랬듯 아내에게 무뚝둑하게 서운한 소리를 한다.

그리고 아내가 급하게 집을 나섰다.

그리고 순간 다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순간 시간이 정지해버린 것같은 그 찰라동안 당신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뒷정리를 부탁해"라는 아내의 말이 그저 이발 이후의 뒷정리 정도였을까?

어쩌면 그땐 아차 싶었던 마음이 후에 두고두고 생각나며 당신을 괴롭힐지도 모른다.

그때 아내는 어떤 마음이었고 무엇을 보았을까?

 

친구와 여행을 갔고 아내를 존중한다는 마음에 당연히 전화연락 따위는 하지 않았고

습관처럼 (아마 그랬을거다) 애인을 불렀고 부부 침실에서 섹스를 한다.

어떤 죄책감도 끼어들지 않는다.

그리고 부재중으로 돌려놓은 전화에서 경찰의 전화통화를 듣는다.

아내가 죽었다.

시신을 확인하고 유류품을 받아오고 아내를 화장하고 장례를 치르면서 당신은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 담담하게 어디에나 있는 카메라를 의식하면서 어떻게 보여야 할지를 잘 아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갑작스런 사고에 화를 내는 조문객들에게도 덤덤했고 함꼐 여행을 갔던 아내의 친구의 남편 요이치를 만났을 때도 덤덤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지냈다. 죄책감에 찾아오는 애인에게 다시 욕구를 느낄만큼 정말 아무일도 없다는 듯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정말 그랬을까

그랬다면 뜬금없이 걸려온 요치오의 전화에 대응하지 않았을텐데.

그리고 불쑥 요치오의 아이들을 돌보겠다고 제안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당신의 매니저가 물어봤지만 당신도 왜 느닷없이 요치오의 아이들을 돌보겠다고 했는지 알지 못했다.

 엄마가 없는 빈자리가 큰 아이들

엄마가 없어도 화물차를 몰아야 하는 아빠는 여전히 바쁠 수 밖에 없고

그로 인해 아이들의 일상이 희생되고 뒤엉키고 포기되어야 하는 것을 보고 느낀 배려였을까

한번도 접하지 못한 아이들과의 생활이 어긋나고 삐거덕거리면서도 잘 적응되어갔다.

아이들은  당신 사츠오에게 적응하고 당신은 아이들에게 적응하고 그렇게 바쁘고 웃고 힘든 일상을 지내면서 당신은 당신 감정을 그렇게 눌렀다.

슬픔 상실 죄책감따위는 원래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그렇게 저 아래로 눌러버리고 바쁘고 즐겁고 하루하루가 다르지 않은 일상을 지냈다.

 

"내가 잊으면 누가 기억하나요?" 라고 되묻는 요치오의 울음앞에서 순간 멈칫 하지만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 기억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지나간 일  돌이킬 수 없는 일은 그렇게 흘려버리는 것이 순리라고 생가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보살핌이 필요하고 나는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 당신을 지탱하게 했지만 오히려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는 일이었다는 것을 당신은 몰랐을 때였으니까

매일매일을 울면서 저장된 아내의 메세지를 듣던 요치오는 의외로 건강하게 일상으로 돌아온다.

순간 울컥 눈물이 나지만 애써 감추지도 않는다.

그렇게 과학관 여선생님을 만나고 세상과 연결되어 가는데

당신은 여전히 제자리였다.

방송국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아내를 애도하는 작가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건 진심이 아니다.

당신은 속이는 것이 아니라 몰랐던 것이다.

남들을 속이고 좋은 모습만 보여주는 기만이 아니었고 그저 어떻게 애도하고 어떻게 슬퍼해야하는지 몰라서 당신앞에 놓은 시간을 무엇으로든 채워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게 뭐든 채워놓지 않으면 그대로 바람이 빠지고 쪼그라들어버릴 것만 같았을테니까

요시오 가족에게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고 아이들이 호감을 표시하면서 당신은 당신의 자리를 잃은 것같았다. 질투를 하고 결국 자신의 죄책감을 고백한다.

"사고가 나던 날 애인을 불러 침실에서 섹스를 했었다고."

 

"잠든 아이의 숨소리가 낯설었던"당신은 아무렇게나 그러나 바쁘고 의미있다고 믿으며 채워졌던 일상이 비워지면서 "삶은 타인이다"라는 발견에 도달한다. 그리고 처음 울기 시작했다.

목놓아 울지 않고 꾸역꾸역 눈물만 흘리는 모습이 당신 다웠다.

 

삶이 갑작스럽게 당신앞에서 문을 닫아버렸을 때

늘 함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상대가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없어져버렸을때

갑작스러운 충격은 사람의 감정을 굳게 만들어버린다.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리고 무엇을 해야할지 알 수가 없고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울어야 하는 것인지  견뎌야 하는 것인지  그저 모든 것을 놓아야 하는 것인지 그래도 살아온 리듬을 유지해야하는 것인지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요치오처럼 모든 것을 놓는 순간을 경험하기도 하고 당신처럼 모든 것을 다름없이 끌고 갈 수도 있다. 누가 더 낫다고는 못하겠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넘어갈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들은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을 맞았다면 애도를 겪어야 한다

오래오래 울거나  미치도록 원망하거나그리워하거나 미안해하거나 화를 내거나 애도를 겪지 않으면 앞으로 다음으로 나갈 수 없다. 그저 눌러놓은 감정으로 외면해버리면  늘 제자리에서 돌고 있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지만 웃을 수도 있다. 배가 고플 수도 있고 무언가가 아름답다고 느끼고 내가 잘  살고 있다고 대견해할 수도 있고 누군가를 도와주는 뿌듯함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순간순간 불쑥 튀어나오는 먹먹함도 그럴 수 있다고 받아들여야 한다.

당신이 그 감정을 받아들이기로 한 순간 외롭다고 느꼈나 보다.

결국 삶은 타인이었다는 당신의 문장이 슬프고 아름다웠다.

 

왜 당신의 책 제목이 (영화의 제목이) 아주 긴 변명이었을까

단순히 길다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끝나지 않을 변명이라는 말

결국 살아간다는 건 계속되는 변명이 아닐까...유치하게 생각해본다.

내가 그땐 그래서 그랬고 어쩔 수 없었고 늘 생기는 결과에 입장을 변명하고  상실 이후에도 살아가야 하는 일들이 자꾸 변명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상실을 경험해도 사람들은 살아간다.

요치오의 남매는 엄마가 없어도 훌쩍 자랐고

당신도 아내가 없어도 이제 머리를 자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책을 쓸 수도 있었다.

왜 그래야만 하는지 사실은 그런게 아니라고 변명하지 않아도 괜찮다.

아니 변명해도 괜찮다

당신의 변명을 납득하고 받아줄 테니까...누구나 변명을 하고 있는 중이니까...

 

뜬금없이 마지막 당신이 아내의 이발 도구를 만져보고 정리하는 장면이 슬프고 좋았다

아내가 살아있을 때는 아마 당신은 도구따위엔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아내는 헤어디자이너라는 사실만 인지할 뿐 어떤 도구를 쓰고 어떤 마음으로 머리를 만지며 그 도구들이 아내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생각하지 않았고 생가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여행 떠나기 직전에도 당신의 머리를 잘라주던 아내의 모습처럼 그저 아내는 당신이 생각하고 의미하는 존재로만 여겼을 것이다.

당신이 도구들을 만지고 정리하며 아내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다른 아내의 모습을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많이 늦었지만 안하는 것보다 괜찮다.

 

당신의 애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쩌면 한 번 울고 이후의 일들을 기록해서 엮어내고 그리고 아내의 물건을을 정리하고

당신의 애도가 시작될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왜 그랬냐면.... 하며 긴 변명을 늘어놓더라도 그걸 다 받아들일 수 있을것이다.

 

영화 초반 내내 당신이 너무너무 미웠는데  당신의 행동들이 가식이고 찌질하다고 욕했었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그럴 수 있겠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나 자신을 본다.

그래 그럴 수 있겠다.

그리고 나도 나의 긴 변명을 주절주절 늘어놔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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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칼이 될 때 - 혐오표현은 무엇이고 왜 문제인가?
홍성수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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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표현이란  소수자에  대한 편견 또는 차별을 확산시키거나 조장하는 행위 또는 어떤 개인 집단에 대해 그들이 소수자로서의 속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멸시 모욕 위협하거나 그들에 대한 차별 적의 폭력을 선동하는 표현 정도로 그 개념을 정의해 볼 수 있다.

 

혐오표현의 유형

차별적 괴롭힘 ....>> 편견 조장.....>>  모욕 ...>> 증오 선동

 

 

말한마디로 천냥빚을 갚는다지만 말 한마디에 칼날이 번득이기도 한다.

무심코 던진 말일 수도 있고 심사숙고해서 어렵게 꺼낸 말일 수도 있는 입에서 나오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말들은 그저 말이 아니다

내가 가진 생각과 입장과 시각을 모두 아우르는 결과물이다

생각없이 말한다고 하지만 그 생각없음이 아예 존재하지 않은 생각이 아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속에 젖어 있는 선입관과 아무런 의심없이 받아들인 세상의 상식과 당위들이 뒤엉켜서 나의 가치관이 형성되고 그것이 알게 모르게 내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 그것이 말로 글로 나올 수 밖에 없다.

아니 어쩌면 한 번 더 생각하고 의심하고 질문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저 당연하게만 받아들여 내 뱉은 말이니 생각없이 나온 말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그런 말들이 누군가에게 꽂혀 칼이 되고 독이 독이 된다.

칼에 맞은 상처나 독에 찔린 상처는 깊은 통증과 흔적을 남기고 한 번 아팠던 사람은

다음에 비슷한 말에 다시 경기를 일으키고 몸을 움츠리며 불안에 떤다.

칼이 아픈지 독이 얼마나 지독한지는 경험해 본 사람이 가장 잘 아는 법이니까

 

모든 이들은 평등한 인간이고 인간성의 존엄을 가지며 모든 이들은 정의에 관한 기초적인 권한을 가지며 모든 이들은 폭력, 배제, 모욕, 종속의 가장 지독한 형태로부터 보호받을 자격이 있음에 확신하는 것이 정의의 가장 중요한 기초인데 혐오표현은 이 기초를 붕괴시키는 것이다.

혐오표현이 공존의 조건을 파괴한다면 이것은 헌법적 가치인 인간존엄 평등 차별로 부터 자유로울 권리 연대성 등을 훼손하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표현이 이러한 가치들을 파괴한다면 표현의자유가 우선시될 수 없다.

 

누군가를 어떤 가치관을 싫어할 수 있다.

그리고 싫다고 당당하게 내 의견을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모이게 되고 많아지면 내가 가진 생각은 당연한 상식이 되고  힘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말로 인해 상처입을 타인이 있다는 건 잊게 된다

아니 타인을 인식하지만 그가 그런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음 역시 당연하게 생각해버린다.

그리고 말들이 모이면서 행동이 되고 규칙이 되고 울타리가 되거나 분노가 되기도 한다.

하나의 생각이 말로 형태를 갖게 되고  모이게 되면서  움직임을 만들고 흐름을 만들어내면서 그 이면에 누군가  아파할 수 있다는 것은 잊어버린다. 아니 그게 당연하게 된다.

 

혐오표현이 잠재적 가해자들 사이에서 확산성이 있다는 점도 혐오표현의 해악을 가중시킨다. 명예 훼손이나 모욕은 특별히 전염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혐오표현은 다르다. 역사적 뿌리를 가지고 있는 혐오감정과 차별적 편견이 권력욕이나 경제적 궁핍 사회불만등과 결합되어 문제의 원인을 소수자에게 전가하고 희생양을 만들기도 하고 혐오 이데올로기가 후대에 전승되어 사회에 뿌리박히고 혐오조직의 결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저자는 혐오표현이 가지는 제한성과 배타성에 대해 이야기 하고 그것이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그런 혐오표현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제도적으로 법을 만들고 강제성을 띄어서 제한하는 방법이 있지만 그럴 경우 개인의 표현의 자유와 부딪칠 수 있다. 누구나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자유말이다.

누군가가 어떤 상황이 싫다고 말하는 건 나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하나 따지고 재갈을 물리는 것이 제도화 되어버리면 누구도 말할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사회가 평등하지 않고 누군가 어떤 집단은 정서적으로 사회적으로 차별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경험했다면 그들에게 던져지는 어떤 부정적인 말 한마디는 그저 한마디의 말이 아니다.

그건 공포일 수 있고 불안 나아가 생명까지 위태로운 무시무시한 상황일 수 있다.

사회에서 배제되고 있다고 느끼고 스스로 투명인간처럼  취급당했던 어떤 소수자에게 나는 너희들에게 동의하지 않아. 라는 말은 그저 그 사람의 개인적인 의견일뿐 아니라 하나의 폭력으로 다가올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 무심한 말들이 어느 순간 하나하나 개별적인 언어라 아니라 뭉쳐진 덩어리가 되어 어디서 나를 후려칠 수 있는 어마어마한 공포로 다가오고 있다.

내가 아직 혐오표현을 경험하지 않았고 왠만한 말에 상처받은 경험이 없다면

사회가 살만한 곳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그만큼 운이 좋고 소수자가 아닌 편에 있는 경우라고 생각을 해야한다. 사회는 여기저기 기울기가 다른 곳이다.

저자는 제도적인 장치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우선 사회적인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회에서 혐오표현에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자꾸자꾸 말하고 표현함으로써 오히려 혐오표현이 자리잡지 못하는 방향으로 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걷잡을 수 없이 혐오표현들이 다양해지고 여기저기서 에상치 못하게 부 딪치고 충격을 주는 혐오표현들이 그렇게 정화될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처럼 서로서로에게 겨눠지는 수많은 혐오들이 어떻게 다양하게 생겨났는지를 다시 돌아보게 되고 과연 개개인의 생각과 표현의 자유와 약자를 향한 (본인은 정당하다고 당당하게 믿는)혐오발언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무작정 금지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고 결국은 사람 사이에서 생긴 갈등을 사랆들이 스스로 풀어야 하지 않나 하는 조금은 말랑말랑한 제안을 하지만.. 역시 생각해 볼 일이다

누군가를 향해 비난을 하고 혐오를 드러내는 일이 세상에 어떤 도움이 될까

아니 나아가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혐오하고 없어지기를 바라고 그래서 물리적인 행동을 옮기는 일이

나에게도 과연 득이 되는 일일까

그래서 사라진 누군가 약자 혹은 혐오대상이 언젠가는 내가 되지는 않을까

해결책 보다는 생각이 더 복잡해지는 책읽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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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등 뒤에서는 좋은 향기가 난다
오사 게렌발 지음, 강희진 옮김 / 우리나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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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에서 늦게 오는 아이를 마중갔다가 걸어오는 밤길

이런 저런 이야기끝에는 꼭 서운했던 일들이 튀어나온다.

동생이랑 말다툼하면 동생편만 드는 것

별 거 아닌걸로 화를 냈던 일

단 한번 먹기 싫어서 안먹겠다는데 그걸로 짜증을 내서 서운했다는 것

소소하고 시시하지만 혼자 쌓아놓기엔 억울하고 속상한 것들

아이 말을 듣다 보면 별 것도 아닌 걸가지고 그러냐고 퉁박을 주게 되고

나도 그러고 컸다는 찌질한 꼰대같은 변명만 하게 된다

그러던 중 아이가 불쑥 말했다

"엄마도 서운한게 있으면 지금 할머니한테 말해. 돌아가시고나면 말도 못할텐데.."

그럴까?

한때  상담을 공부하면서 그리고 너무너무 우울할때 나를 들여다 보니 지금 내문제가 다 자랄때 양육문제고 그때의 애착관계의 문제라고 생각되서 억울하고 화가 나서 뭐라고 퍼붓고 싶다는 욕구를 마구마구 느낀 적이 있었다.

지금이라도 이걸 표현하지 않으면 억울할거 같고

왜 나만 내버려두고 왜 혼자 잘 할거라고 제멋대로 믿었냐고 따지고 싶었고

종가집이라는 거 다 이해해도 어떻게 그렇게 남동생이랑 알게 모르게 차별 했냐고 하고 싶었으나..

나도 아이를 키우고 동동거리고 이런저런 서운한 말을 듣고 보니

그때 우리 부모는 정말 젊었구나. 지금 이렇게 나이먹어 늙은 부모하는 나도 지혜가 없고 아량이 없어서 어린 것들과 기싸움 하고 하나라도 더 이겨먹으려고 하는데

그 파릇파릇 젊었던 우리 부모도 당연히 그랬겠구나

뭐 따지고 보면 내가 내 자식에게 잘하려고 하는 것이 아이들에겐 부담이고  불안이고 서운함인데 어쩌면 그때 당신들에게 그런 말과 행동과 선택이 최선이었던건 아닐까..

가난한 집 장남과 철없이 종부이 되어버려 다른 무게가 많았던 그 분들에게 자녀 양육이라는 거에 모든 걸 쏟아 부을 여력이 남지 않았을 수도 있고

그리고 지금 너무 늙어버린 부모에게 그렇게 조목조목 따지고 들어봤자....

기억할리 없고 기억한다고 한들 아름답게 편집된 그 기억속에 나만 결국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가며 키워놨더니  뒤통수만 친다고 더 억울해하며 방방 뛰시다 안그래도 혈압도 높으신데 쓰러지기라도 하면..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매사 생각만 많고 행동으로 옮기기엔 게으른 성정도 한몫했고

뭐 나도 무던하기만 한 사람은 아닌지라 한번씩 성질나면 팍팍 쏘아주기도 했으니 그것역시 지금 엄마가 된 입장에서 자녀가 그러는게 나름 상처라면 상천데... 서로 쎔쎔이구나 싶기도 했다.

 

 

 

만화속 주인공 제니는 나중에 제대로 된 상담사에게 "정서적 방치'로 인한 트라우마라는 진단을 받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이름붙일 수 있는 병명을 가짐으로서 제니는 조금 치유받았을 것이다.

내내 스스로 느꼈던 불안과 죄책감 수치감에 모든게 내 잘못이라고만 생각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못했고 누군가에게 수용되지도 못했던 제니는 비로소 자기 상황과 상처에 이름을 갖게 되면서 치유가 시작되었다.

 

어쩌면 아이들에게 (어른도 마찬가지지만) 감정을 억제하라고 통제하는 것은 가장 큰 폭력이고 겁박이 된다.

슬플 때 울 수 없고  즐거워서 재잘재잘 떠들어댈 수 없고 누군가에게 위로받지 못하고 공감받지 못하는 것은 큰 고통이다.

본능적으로 튀어나오는 감정을 조정하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억누르는 걸 먼저 익혀야 하는 건 슬프다.

제니 부모 역시 어쩌면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된다고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누구에게 드러내지 못하고 그렇게 되는 걸 부끄럽게 여겨야 하는 상황에서 정서적 문제를 가지게 되고 결국 내가 가지지  못하고 수용받지 못한 정서는 누군가에게 나눠줄 수도 없다.

억누르는 것 감추는 것이 최선이라고 배운 부모로서는 그것이 최선의 양육이었을 것이다.

물리적 폭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경제적 결핍도 없었고 어쩌면 남들 보기엔 조용하고 평화로운 수준있는 가족이라고 보였을 제니 가족이 속으로 그렇게 조용하게 무너지고 균열되는 지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모든 가정이 자신의 가정과 같을 거라고 믿었던 제니는 우는 친구를 안아주고 달래주고 이야기를들어주는 친구 엄마에게 이질감을 느끼고 두려워진다 울면 안되는데 울면 모두가 피해버리거나 싫어하는 짓인데 그걸 태연하게하는 친구의 행동도 이해할 수 없는데 그 친구의 엄마는그런 어리광을 피우는 친구를 안아주고 달래주고이해하다니...

혼란스러운 제니는 세상이 두려워졌을 것이다

문제를 드러내면 등을 돌리는 가족들

칭찬과 관심에 인색한부모

표현하기도 전에 누르는 것을 배우고  어쩌지 못하는 감정에 드러내고 폭발시키고 나면 남는건 개운함이아니라 수치심과 죄책감이다 내가 엄마를 울게 했고 내가 아빠를 등돌리게만들었다는 마음만 남는다타인이라면 쉽게 등돌리고 다른 사람을 찾았을  수 있지만 가족이니까 계속 함께 보고 연결되고 영향을 끼칠 수 밖에 없었기에 그렇게 조용히 무너지고 망가지는게 안타깝다.    누구에게도 사랑을 배우지 못한 제니는 조금만 관심을 보이는 사람에게 매달리고 사랑을 구걸한다 스스로 소중하고 가치있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다

엄마가 되고 아이를  사랑하지만 내 아이를 사랑하는 것조차 죄책감이 든다.

내 속에는 사랑받지 못한 작은 아이가 아직도 관심과 사랑에 목말라하는데 내가 이렇게 내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 괜찮을까?

불안과 갈등속에서 제니는 스스로 일어서기로 하고 자신 속의 자라지 못한 어린 제니를 마주한다 괜찮다고. 니가 잘못한게 아니라고 . 너는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어린 제니를 인지하고 마주하며 안아주면서 제니는 다시 성장한다.

결국 나를 돌아봐야 하는 건 나 자신뿐이라는게 슬프기도 하다.

이미 늙었고 변하지 않은 부모에게 소리쳐도 닿지 않는다. 상처는 아직도 여기 가득한데 그때 그곳에서 나를 돌봐주고 사랑해주어야 했을 대상이 나를 봐주지 않는다면 나라도 나를 마주하고 안아줄 수 밖에 없다.슬프지만 해야할 일...

 

 

가끔 아이들이 내가 어쩌지 못하는 고민들을 말하거나 나는 관심이 없는 일로 흥분해서 방방거리며 이야기할때  게다가 그런 순간이 내가 지쳤거나 뭔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상황까지 겹쳐진다면 나도  사실 ... 나 좀 내버려두고.. 입을 좀 다물었으면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땐 아닌 척 해도 기가 막히게 티가 나는지 상대는 금방 알아차린다.

지금 내말 듣기 싫어? 내가 귀찮아?

그제사 아니라고 손사래치지만 이미 정서에 작은 기스가 나고 ...한편으론 미안하지만 한편으로는 알면 조금 봐주면안될까싶기도 하고. 아 나도 정서적 방임을 하고 있었구나.... 아차 싶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사랑하는 건 중요한 일이다.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을 베풀수 있다는 말은 반박하고 싶지만 할 수없는 진리다.

내 안의 그릇이 가득 차야 누군가에게 댓가없이 나눠줄 수 있다.

상대가 아이라면  나 혼자 이만큼 주었으니 되었다. 하는 만족감은 경계할 일이다.

 

우리애는 참 순해요 참 착해요. 혼자 알아서 잘 해요

이 말이 단지 칭찬일 수는 없다는 인식

혼자 알아서 잘 하는 아이가 얼마나 외로운지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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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희와 나 - 2017 제17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이기호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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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과 공감이라는 말은  어쩌면... 가장 많이 오해받는 말인지 모르겠다.

누군가 타인을 타인의 입장에서 들여다보고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수도 있다.

사람은 쉽게 자기의 위치를 바꾸지 못한다.

내가 내 위치에서 조금 움직여 타인의 위치로 다가가려고 하지만 완벽하게 타인과 포개어질 수 없다.

이기호가 말한 것처럼 누군가를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누군가의 상처를 바라보는 입장만 취하면서 그저 그것이 공감일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타인의 상처를 공감한다는 건

가장 어려운 일이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나머지 단편들 속에서도 우리는 타인의 입장을 절대 공감하지 못한다.

그저 내 자리에 그대로 서서 상대를 바라보고 이해하려고 하지만 내가 가진 가치관과 편견을 바탕에 두고 이해할 뿐이다.

부부 형제등 가장 가까웠다고 믿는 가족사이에서도 마찬가지고

친구사이에서도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일이고

사회 역시 개인을 전혀 자기 위치를 바꾸지 않고 바라볼 뿐이며 개인은 사회에 어떤 기대감도 없다

그렇게 바라보며  안타깝고 부끄럽고 두렵지만 자기 위치는 늘 그대로 고정적이다.

이해와 공감은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

 결국 8편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것을 알아낼 뿐이다.

그래서 슬펐고 눈물이 났다.

무언가 굉장히 부끄럽고 초라하고 안타깝지만.. 나 역시 누군가에게 닿지 못했고 누군가 나에게 닿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이기호의 단편은 툭툭 가볍게 잽을 날린다고만 여기다가 그 가벼운 잽들이 모여서 골병들게 되는 이야기이고

권여선의 단편은 너무 아프고 두려워서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을 기어이 눈앞에 들이대고 있으며

김애란의 단편에 나오는 주인공의 정서는 어쩌면 살면서 문득 등골이 서늘해지는 그 순간을 포착하고 있었으며

편해영의 단편은 피식거리다가 결국 얼굴이 벌개지는 부끄러움을 드러낸다

취향탓인지 이야기들은 들쑥날쑥하고 의외로 호감이 가는 작가가 생겼고 의외로 앞으로 작품이 실망될거같은 작가도 있다. 아주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이야기는 직접 읽어볼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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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는 것과 내 입을 통해 내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다르다

그리고 내가 알고 말할 수 있는 것을 행하는 것 즉 삶으로 연결시키는 것 역시 다른 일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많이 듣고 많이 읽어서 아는 건 제법 모였다.

 

성인식에 대한 두차례 강연을 들으면서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성폭력이란 적극적인 동의 표시가 있지 않은 한 관계는 모두 폭력적이 된다는 것도 안다.

자발적 동의에 의한 합의가 있어야 하고 동의에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가능하며 그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하고 그 동의가 협박이나 공포 혹은 속임수의 영향을 받지 않는 온전한 판단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거부하지않았다는 것 머뭇거렸다는 것 그리고 제발로 모텔을 따라가고 방으로 들어갔다는 것이

술이 떡이 되도록 마셨다는 것과 스킨쉽을 허용했다는 것이 섹스를 해도 된다는 동의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왜 따라갔대? 왜 그렇게 마셨대? 왜 나오지 않았대?

제발로 들어갔고 제 카드로 지불했으면 이미 동의된 관계가 아니야?

리고 말하는 것 그것 역시 폭력적이라는 것을 안다.

 

그런데 그렇게 알고 있는 일을 누군가에게 주장하고 말하기는 쉽지 않았다.

무조건 우기는 사람들 이미 통용되고 있는 세상의 질서를 무기로 당위성을 내세우는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이건 미투고 저건 미투가 아니라고 침을 튀어가며 열변을 토하고 선을 긋고 꼬리표를 붙이는 사람들이 우습고 한심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지워버릴 수 없다. 그들이 맞다고 주장하고 그들 편에 서는 건 쉬운 일이니까

그래서 늘 배워야 하고 생각해야하고 의심해야 한다,

그게 쉽게 지치고 남의 옷을 걸친 것처럼 불편하지만 그럼에도 자꾸 생각하고 공부하는 게 필요한 모양이다.

 

두권의 책 내용이 사실 새로운 건 아니다.

<페미니스트 모먼트>는 페미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이들이 어떻게 페미니스트가 되었나 어떤 과정을 거치며 변화하고 의심하고 회의하면서 단단해지고 있는지를 각각의 저자 입장에서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자꾸 의심하고 질문하고 대답을 생각하는 과정을 거치기도 했고

가족사에서 여성의 문제가 민족적 문제와 부딪치는 갈등을 겪기도 하고

레즈비언으로서의 정체성과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 사이에서 고민하거나

고딕체 페미니즘의 단단하고 견고함을 거쳐 이제 말랑해지고 수용하는 페미니즘으로 가기도 하면서 모두 고민하고 질문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제 완성된 페미니스트라고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그저 이전 보다 덜 흔들리고 편안해졌을 뿐이라고... 그리고 지금도 역시과정이라고 말한다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 묻는다면 당당하게 대답을 하지 못할것이다.

다만 이 책을 통해 내가 얻은 지혜는 한채윤이  것처럼 <페미니스트가 아니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당당하게 말하지는 못하더라도 아니라고는 하고 싶지 않다

적어도 내 딸들은 나와 다른 환경에서 살게 하고 싶고

지금은 고민하고 생각하고 저항해야 전달되는 상식들이 그저 당연하게 통용되고 모두가 젠더의식에 예민하고 고민하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는 것..

 

<처음부터 그런 건 없습니다>는 우리가 쉽게 접하는, 당위에 대해 의심하고 질문하고 있다.

여자로 태어난다면 누구나 접하는 보통의 경험 성적인 불쾌감(폭력 추행 희롱을 포함한)

그건 하나의 폭력으로 여겨져야 함에도 누구나 겪고 있어서 예민하고 까칠하게 굴지말아야 하고 무던하게 삭혀야 하는 일들 부터   퍽하면 들리는 "여자들도 군대를 가라"는 퉁박이나 가정사니까 연인관계니까 개인적인 문제라고 치부되는 친밀한 관계의 폭력문제 그리고 나아가 젠더문제들을 어쩌면 시시콜콜하지만 그래서 더 절실하게 와 닿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멍들고 부서지고 피흘리는 것만이 폭력이 아니고 누군가의 말과 존재에 주눅들고 불안하게 서성이며 그 모든 불안의 책임을 지려고 드는 강박조차 폭력의 증거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순수하고 완벽한 피해자만을 구제하려는 지독한 이중성에 대한 말들은 예전 내가 처음 여성학을 알았던 20년도 훨씬 전과 다를게 없다는게  허망하기도 했다.

 

두번의 강의의 마지막에 강사가 질문을 했다

"혹시 이해되지 않은 부분이 있나요?"

천만에... 너무 이해되고 공감되고 수긍한다.

다만.. 내가 이렇게 이해하고 알고 있는 것을 누구에게든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될 뿐이다. 내가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페미니스트 엄마가 되고 페미니스트 아줌마가 되고 페미니스트 할머니가 되어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 지금 그렇게 살고 있나.. 자꾸 돌아본다

페미니스트가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하긴 쉽지 않다.저마다 가지고 있는 정의가 조금씩은 다를 수 있고 그게 당연하다

누구나 답을 가지고 있지만 누구의 답만이 정답은 아니다.

책의 말미에 쓰인 말처럼 누구나 자기의 속도로 그렇게 페미니즘으로 향하면 되는 일이다.

 

책을 통해 폭력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폭력은 직접 모욕을 주고  물리력을 행사하는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함께 장단을 맞춰주고

그저 바라보며 키득거리고

그리고 혀를 차면서 불쾌하다는 듯이 나는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침묵하는 사람까지

모두가 함께 만들어내는 것이 폭력이다. 폭력을 시작하는 사람은 하나겠지만

그 폭력을 완성하는 것은 모두이다.

침묵이 폭력을 완성하기도 한다.

생각하고 의심하고 그리고 용기내어 말하고 한걸음 나아가는 것

그건 어디서나 필요하다.

 

누군가 니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이 뭐냐고 한다면

 내가 너보다 더 대우받아야 겟다.

내가 너만큼은 대우받아야겠다. 가 아니라

너와 내가 함께 하고 서로 존중하자는 것이 페미니즘이라고 말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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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3-21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경적 여성으로 살아 본 1년>이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페미니즘은 여성이 사람이라고 보는 급진적인 관점이다.” (323쪽)

저는 이 책을 쓴 저자가 말하는 페미니즘의 의미에 공감했습니다. 사람은 존중받을 수 있는 존재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