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서재 - 나만의 도서관을 향한 인문학 프로젝트
정여울 지음 / 천년의상상 / 201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한겨례에서 드문드문 글을 읽으면서 참 잘 쓰는구나 생각했다.

내 기준에서 잘 쓴다는 건  아주 훌륭하다는 게 아니라

내가 생각을 하면서도 글로 말로 표현할 길이 없는 것들을 참 정리해서 잘 쓴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전의 책 "문학멘토링"을 읽으면서 소설을 많이 읽어야 겠다고 생각하고 읽었었다.

내가 보기에 잘 쓴 책은 그 책을 통해 다를 독서에 대한 욕구를 일으키는 것

그리고 생각이 계속 확장되어 나갈 수 있는 것

그리고 최종적으로 머리속에 든 생각이 몸으로 손으로 실천될 수 있다면 정말 좋은 거라는 것이다.

아직 세번째 단계느 아니지만

이 책은 충분히 두번째 단계까지 나를 확장시켜준다.

 

맘이 잘 맞는 친구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그래그래 니말이 내말이야..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어 주는 힘이 있다.

읽으면서 맞아 그랬지 하는 공감이 들고 알지 못하는 작가의 여린 속내가 보이는 것도 같고 그것조차 낯설지 않아서 좋았다.

나중에 딸도 함께 읽고 책읽기의 폭을 넓혔으면 하고 바랄만큼 좋았다.

다만..

이제 그녀의 책을 몇권 읽고 나니 걸리는 건 문체다.

여성적이고 섬세하다는 건 좋은 점이기도 하지만 자주자주 자신없어보이는 문체가 보인다.

....이랄까.......이 아닐런지... 뭐 이런 얼버무리는 말투같은 것이다.

어쩌면 내가 쓰는 글에서도 많이 보이는 대목이라 더 걸렸는지 모르겠다.( 봐라. 이런거)

문학이라는 것이 인문학이라는 것이 수학처럼 정답이 딱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누구의 눈에 보이는가 , 어느 방향에서 보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긴 하지만

그런 문장의 마무리가 너무 자주 눈에 띄여서 걸렸다.

좀 더 확신있게 마무리해도 좋을텐데...

누가 뭐라고 할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럼에도

겸손하게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어하고 이해하고 싶어하는 작가가 참 예쁘고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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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다는 것도 어렵지만 읽는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좋은 독자가 된다는 건 좋은 작가가 되는 것 만큼이나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뼈를 깍고 피를 말려가며 쓰는 작가만큼이나 독자도 책일기가 쉽지 않다.

일단 읽는다는 건 글을 알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는 하다

한글을 뗀 아이가 눈에 보이는 간판을 모조리 읽어치우듯이 글자를 읽지 않으면 불안하고 초조한 증상을 가진 지독한 중증 독자들도 많다.

뭐든 읽어야 한다는 첫 단계를 지나면 그것을 몸에 잘 축적해두어야 한다.

어떤 글귀가 나의 마음을 울렸는지

어느 부분에서 나는 정보를 얻고 지식을 얻었는지도 차곡차곡 정리해서 쌓아둔다.

글을 읽으면서 정보를 나누고 지식이 확장되고 배움이 시작된다.

글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분노하고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만큼 좋아죽겠다는 경험도 한다.

 

하지만 쉽게 읽히는 글이 있고 그저 글자만 눈에 들어오는 글도 있다.

모든 작가의 수준이 다른 것처럼 모든 독자의 수준도 다르다.

하지만 모든 글이 나름의 이야기를 가지면 또 달라진다.

이야기는 누구나 쉽게 공감하고 몰입한다.

재미있는 이야기 일수록 마찬가지다.

당의정처럼 쓴 약을 달콤한 무언가로 둘러싼 것

그것은 이야기를 통해전달되는 작가의 생각이다.

 

사회적인 분노를 이끌어 내는 글들

누구나 관심을 가져야 할만한 이슈들

곰곰히 생각하고 느끼고 곱씹어야 할 정서적 아름다움등등

그 어떤 것도 이야기를 가지고 나오면 읽는 순간 마음이 스르르 풀리면서 무장해제가 된다.

그래그래

줄거리를 따라가고 인물을 따라가다보면

아하.. 하는 순간이 나온다.

설령 책장을 덮을때까지 전혀 몰랐다가 어느 밤 요의때문에 눈을 뜬 순간

밥을 먹고 숭늉을 마시는 순간.  버스를 타고 멍하니 창밖을 보는 순간

아하.

하는 깨달음이 .. 그때 그 이야기가 이런 울림을 가졌구나 하는 깨달음의 시간이 온다

꼭 온다.

 

그래서 이야기는 힘이 쎄다.

아무리 주장하고 소리질러도 귓등으로 스쳐 지날 많은 것이

이야기라는 옷을 입고는 쉽게 마음속에 들어온다.

 

소설은 이야기는 동화는 시시한 글이 아니다.

심심풀이 땅콩도 아니고 소일거리도 아니다.

어쩌면 그렇게 심심해서  그냥 시간이 남아서 보던 한권의 이야기속에

내가 몰랐던 것  내가 무심히 지나쳤던 것들이 들어있다.

그래서 글을 쓰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필요한 까닭이다.

조근조근 들려주지만 재미따라 가다보면 아하. 하는 순간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그 순간 이후의 행동은 독자들 각자의 몴이다.

행동하던 담아두든 누군가에게 전하든 혹은 잊어버리든

하지만 그 울림이 꽤 오래 가기는 할것이다.

 

누군가를 위로하고 누군가를 깨우치는 것들이

무심한 재미처럼 다가오게 하는 것

그래서

이야기는 참 힘이 세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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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남의 이야기를 참 좋아한다.

사실 겉으로는 무심한 척 남의 일에 관심없어하지만 사실 너무너무 남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남들이 하는 뒷담화를 듣는 것도 좋고 나랑 하등 관계없는 사람의 이야기 심지어 버스에서 옆에 누군가 하는 이야기에도 귀가 쫑긋해지는 사람이 나다.

무슨 이야기든 주워듣고 담아놓고 또 주워담는 걸 좋아하는 게 나다.

하지만 맹세코 남의 뒷담화나 남의 이야기를 하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난 말하기는 젬병이고 듣기만 발달한 모양이다.

내가 말하는 건 귀찮아서 싫어죽겠지만 누군가하는 이야기는 너무너무 재미있다.

약간의 욕설이 섞이고 비속어가 섞이면서 흥분되어 침이 마구마추 튀어나오는 이야기는 더 더욱 재미있다.

그래서 내가 소설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한때 소설은 유치한 한가한 사람만 보는 부류라고 생각하곤 했다.

난 절대 소설은 사서 읽지 않아

소설은 별로 보지 않아..

하는 사람들 앞에서 괜시리 기가 죽어서 나도 아닌척 하고 우아떠고 있었지만

나는 아직도 여전히 소설이 좋다.

누군가의 이야기 내가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를 엿듣는 즐거움..

어쩌면 조금 변태적인 취미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알아간다는게 참 좋았다.

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이나 잠들기 전 상상을 한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됐을까

들켰을까? 본인한테 가서 말을 했을까?

낮에 읽은 소설 한대목을 가지고 오만가지 망상을 펼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들었던 혹은 엿들었던 이야기가 끝도 없이 가지를 치면서 나를 잠못들게 한다.

나도 안다

이런 망상이 살아가는게 하나도 도움이 안된다는 것

그렇다고 내가 소설가가 되거나 작가가 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한때 그런 꿈을 꾼적도 있었고 재능이 있다고 착각한 적도 있었고 지금도 미련이 남았지만

이상하게 남의 이야기를 들을 때 느끼는 야릇한 흥분이랄까 묘한 짜릿함은

텅빈 노트나  노트북의 푸른 화면앞에서는 막막한 절망으로 변한다.

혼자 듣고 혼자 마구마구 뻣어나가는 망상은 너무너무 재미있는데 그리고 너무 쉽게 뒷 이야기가 이어지고 뻣어나가는데

막상 빈 종이 앞에서는 앞이 깜깜하고 아는 이야기가 글로 되어 나오면 그게 아니다.

그 짜릿하고 재미진 이야기는 다 어디가고

딱딱한 문체랑 어디서 많이 본듯한 연결들만 남아있다.

 

가끔 생각한다

나는 전생에  소리꾼이나 이야기꾼을 따라다니던 어떤 집 종년이 아니었을까

손끝은 굼떠서 늘 사고만 치면서 다행히 좋은 주인을 만나 별탈없이 살면서

틈만 나면 남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참견하고 재미진 이야기를 따라다니다가 제 할일도 못하고 앞가림도 못하는 조금 칠칠맞고 그래도 그럭저럭 살아가는 종년이 아닐까

막상 많이 듣고 좋아하면서도 그걸 남에게 풀어내지는 못하고 속에서만 끙끙대고 파도치고 있는 한심한 어린 아이.. 그게 나였을거 같다..

 

올해는 소설을.. 남의 이야기를 많이 읽자고 결심하고 왠만하면 소설 위주로 읽고 있는데

왜 내가 진작 이런 계획을 세우지 않았나 싶을 만큼 재미있다.

괜히 남의 눈치 보면서 소설은 별로.... 하는 허식을 떨지 않고

문학이든 통속이든 로맨스든 뭐든 닥치는대로 읽고 있는게 즐겁고 행복하다.

세상에는 나쁜 이야기나 소설은 없다.

어떤 삼류라도 나름의 진정성은 있었다.

삼류 소설을 쓰는 작가도 문학성 대단한 대 문호만큼이나 절절하고  뼈를 깍아가며 쓴다고 본다.

모든 글들은 다 소중하고 귀하다

누군가의 험담도 푸념도 내겐 너무 귀하고 재미있고 가치있다.

여러가지 사정으로 재정이 빡빡하지만 지금도 계속 장바구니에 남의 이야기들을 담으면서 혼자 좋아 죽겠다..

아.. 돈벼락이 떨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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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는 책읽는 모임에서 올해이 주제는 동화읽기였다.

작가를 선정하고 그 작가의 작품을 읽고 발표하는 것

사실 아이들 그림책을 읽어주고 동화읽는 단계에서 빠져버린 나는 (왜냐면 그 수준이면 혼자 책을 읽으니까 난 내가 읽고 싶은 걸 읽으면 된다고 생각했던 이기적인 어미였다...)

아무 생각없이 몇몇 작품이 좋았던 기억으로 택한 작가가 이금이였다.

이금이 작가의 작품이 많다는 걸 알았지만 이렇게 많다는 생각은 못했다.

결국 동화는 제외하고 청소년물만 읽어보기로 했다.

내가 이 작가를 첨 알게 된것도 청소년문학에서였기때문에

 

 

 

나의 짧은 독서이력지만 나름 성장소설을 많이 읽었다고 자부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남의 아이는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남의 집을 훔쳐볼 일은 없으므로 가장 쉬운 방법은 책을 읽는거였다.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자라는지. 아이는 어떻게 변해가고 부모는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

그리고 누군가 자라는걸 보면서 나 자신이 자란다고 느낄만큼 대리만족을 주는 분야이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성장소설은 대부분이 여학생의 이야기였다.

물론 소설로 넘어가서 내가 애정하는 '나의 아름다운 정원'혹은  내가 닮고싶은 엄마가 나오는 "소년을 위로해줘"의 경우는 소년이 나오지만

청소년 도서라는 주제를 가지고 나오는 성장기 소년은 완득이가 유일하지 않았나 싶었다.

허나 완득이 자체가 매우 독특한 캐릭터라보니

조금 평범하고 일반적인 소년들의 성장기는 이 책이 처음이 아닐까

물론 지오도 석주도 절대 평범하지만은 않다.

왠지 일본만화를 연상시키는 표지를 보면서 괜히 설레기도 했다.

두 소년이 아니 소년과 청년사이에서 어정쩡하게 마주선 두 남자가 들려줄 이야기가 많이 기대되었나보다.

이야기는 두 아이의 이야기가 교대로 서술된다.

두 아이가 만난건 지방의 기숙 고등학교 입학후 지오가 자퇴를 하기까지 짧다면 짧은 기간인 1년 남짓한 시간이고 두 아이의 전혀 다른 기질과 성격으로  서로 부딪치거나 친해질 기회도 없었다.

다만 우연처럼 기숙사에 오래 남았던 어느 주말  함께 자전거 여행을 하고 함께 어떤 과수원에 머물면서 소녀를 만나고 추억을 만든게 전부다.

그 과정을 통해서 둘이 급격히 친해지거나 속내를 보이는 것도 아니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서 한놈은 공부에 매달리고 한놈은 계속 밖으로 맴돌면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날 석주의 짧은 메일 한통이 지오를  추풍령행 기차에 오르게 하고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한다.

어디서나  볼 수 있을 지도 모르는 가정사를 가진 아이들이다.

평범하고 겉보기엔 누군가는 부러워했을 가족을 가진 아이들이지만 나름의 아픔과 고민이 있는 아이들이었다.

작은 일에  세상이 무너질 듯 고민하는 건 여학생이든 남학생이든 상관이 없다.

사실 그런 하늘이 무너지는 고민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또 그길을 묵묵히 가다가 후회하고 화를 내고 견디고 그리고 성장한다는 이야기

나의 인생에서가장 빛나는 순간은 언제인가?

어쩌면 나는 영영 그 순간을 깨닫지 못하고 지날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른 후에 아하.. 그때 나는 정말 빛났었구나 하고 깨닫기도 하고 아직은 그 순간이 오지 않았다고 고집스럽게 믿고 살기도 한다.

어떤 시련이 와도 그건 나의 선택에 대한 결과물이라는 것

그리고 어떤 삶을 살았던 누구의 강제가 있었던 결국 최종 결정을 내리는 나이고 나의 선택이 나의 삶을 만들어 간다는 걸 두 아이가 아파하고 깨져가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의 선택에서 부모는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지 작가는 보여준다. 그냥 아이의 선택을 믿고 기다려주라고.. 깨어지고 부서져도 아이는 다시 일어날 거라고

그리고 그 선택이 비루하더라도 후회하지 말라고. 나름 빛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가 아니겠는가

선택과 그에 따른 후회들로 이루어진것이 삶이 아닐까  그래서 살아갈 만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어린 청년들이 내게 들려준다.

 

 

 

 

작가가  인터넷에 연재했던 소설이란다. 그리고 표지를 그린건 작가의 딸이라고..

딸과 함께 뭔가를 만들어 냈다는게 부럽다.

어쩌면 단순한 스토리이지만 나는 그 속에서 그나이또래 여자아이들의 은밀하고 무서운 속성을 발견한다.

대단한 문제아라서... 큰 사건이라서 세상이 들썩이는 건 아니다.

친구에 대한 질투심  어이없는  상황에 대한 분노 그리고 이기심이 아이들 사이에 어떻게 존재하는지 정말 큰 사건없이 보여준다.

사실 봄이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다.

(하지만 나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세상이 공평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이쁘고 잘난 것들이 모두 가지는 건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다수가 방관자가 되고 공범이 되어서 한 아이를 바보로 만들어 가는 것

난 아무짓도 않했고 빌미는 그 아이가 제공했고 그 아이의 말은 다 거짓말이고 믿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잘못한게 없다고 믿는 아이들

그래서 떠나버린 아이...

크게 소리치지않지만 왕따나 소외같은 사회문제가 어쩌면 학교를 졸업한다고 해서 모두 끝이 아닐는 것 늘 우리 삶속에 현재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도 한다.

 

 

 

첨 읽었을때는 아이들의 성폭력에 대해 촛점을 맞추어 읽었다.

그런 비극이 일어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하나..

아이들에게 일어난 일이 아이 잘못이 아니라는 것 죄의식을 덜어줘야하고 너는 언제나 영원히 소중하고 사랑받는 존재라는 걸 인지시켜야 한다는 것

같은 상황을 겪고도 어떻게 대처했는가에 따라 확연히 달라진 두 유진을 보면서 엄마로서 어떻게 대처할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했다.

지금 다시 읽으면서 단지 성폭력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사람이 가장 상처받는 관계는 가장 가까운 관계이다.

가장 기대를 많이하고 사랑하고 위로받아야 할 가족이라는 관계가 아이들에게 혹은 어른에게도 가장 큰 상처가 된다. 그건 그 만큼 가족에게 기대를 많이하고 많이 요구하기때문일것이다.

가장 사랑하고 믿어야할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큰 유진과 작은 유진은 유치원때 똑같은 일을 당했다.

부모는 모두 경악하고 놀랐고 분노했다.

하지만 아이에게 대한  대처는 달랐다.

아이를 위로하고 사랑하고 배려했던 큰 유진은 그 일이 끔찍하긴 했지만 마주보지 못할 일은 아니었지만 쉬쉬하고 덮어직 감추기에 급급했던 작은 유진은 그 사건을 기억에서 지워버렸고 마주보고 견딜 과정을 가지지 못해 큰 상처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그 상처를 마주하게 된 지금 현재 어떻게 해야할건가를 묻고 있다.

이 책은 나쁜 경험을 한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가장 가까운 관계맺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가장 가까워야 하고 힘들때 위로가 되어야 할 관계는 당연히 가족이다.

뭐든 감싸 안아주고 받아주고 위로해주는 것  그리고 해결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가족이라고

하지만 가족이라고.. 어른이라고 모든것이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아직 내 속에 자라지 않은 아이를 가진 작은 유진 부모같은 경우는 아직 나조차 여물지 못한 상태에서 누군가를 감싸안고 다독일 여유가 없었다.

어쩌면 아이들이 배워야 할것은 사랑받고 위로받는 방법일지모른다.

사랑받고 위로받아본 아이는 누군가에게 배풀 수 있다.

사랑과 위로속에서 키운 힘이 나를 얼마나 강하게 하는지를 경험하면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나를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스스로를 사랑하는 사람은 포기하지 않고 남에게 배려할 수도 있으니까

저자가 하고픈 말은 나쁜 경험에 대한 대처가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나를 포기하지 않는 강한 믿음을 보여주는게 아니었을까 싶다.

 

 

 

 

 

 

 

 

 

 

 

내가 작가의 책중에 가장 좋아하는 책이다.

엄마와 딸의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주된 관심이기도 하고  작가의 말에서 처럼 이 책에서 작가는 모든 걸 다썼다고 할 만하다 싶은 작품이다. (개인적이지만..)

너무나 일상적인 딸과 엄마의 여행

그들의 공통점과 차이점들

지금은 서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 그리고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알아지는 것들의 슬픔이 느끼진다.

고비사막에서 함께 본 신기루

엄마는 거기서 내 삶이 어쩌면 허망한 것들만 쫓았던 신기루가 아닐까 황망해하고

딸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존재한다는 것에 매력을 느끼며 위안을 얻는다.

같은 것을 바라보면서도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

하지만 어쩌면 시간이 흐르기전에 혹은 흐른후에는 같은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여행에서 돌아온 다인모녀는 어쩌면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형인의 문제도 아직 그대로고 다인은 여전히 오빠에게 치인 둘째이고 엄마는 아이들때문에 동동거릴테고.. 하지만 신기루에 대한 기억은 문득문득 나지 않을까

신기루처럼 지나버린 시간에 대해서.. 그리고 그 위안에 대해서

 

 

 

 

 

인물들 중에 가장 마음이 쓰이는 이가 소희였다.

달밭마을에서도 소희는 눈에 띄지 않았다.

온몸으로 반항하고 감정을 드러내는 미르나 입을 닫아버리고는 조용히 저항하는 바우와 달리

소희는 그저 받아들이고 순응하고 성숙하다.

속으로만 쌓아가는 아이가  언제 터뜨릴지 모르는 폭탄을 가진 아이처럼 불안했다.

그렇게 속으로 누르고 담기만 하고 드러낼 줄 모르는 소희는 결국 모든걸 토해낸다.

자기의 방을 가지고 거기에 맞는 아이가 되고나 노력하면서 또 담기만 하고 누르기만 하다가 드디어 터진다.

다행이다.

결핍과 불안으로 자라지 못했던 소희 속의 어린아이가 이제 성장을 시작한다.

 

 

 

어 ㅌ

 

 

작가가 쓴 첫 고등학생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짧은 연작소설들이다.

그간 보여준 주인공에 대한 따뜻한 결말대신 현실적인 결말들을 보여준다.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일들이라 뭐라고 결론내기가 어려웠는지 모르겠다.

학교를 떠난 아이   학교밖에서 서성이는 아이

넓은 세상을 나가도 따라다니는 편견이 아이들에게도 고대로 연결되다는 것

실수가 실패가 계속 족쇄처럼 따라다녀 어쩔 줄 몰라하는 아이

내꿈이 희망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게 되는 아이

아직도 여전한 문제고 해결이 힘든 아이들의 이야기다

가장 아픈 이야기였다.

 

 

 

 

 

ㅏㅈ

 

중학교 아이들의 이야기

사실 아이돌을 꿈꾸는 이야기는 표피에 지나지 않고 각자 상처를 가진 아이들이 자신의 상처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타인의 상처도 들여다 봐주면서  성장하게된다.

마주보기 겁나는 것들이 참 많다.

그러나 용기를 내서 정면으로 바라보면 별거 아니라고 느끼게 되는 것도 참 많다.

정면으로 바라볼 줄 아는 것 그것도 참 중요하다.

 

 

 

 

 

 

6학년 소년의 첫사랑 이야기

동재와 연아의 서툴고 수줍은 첫사랑

이웃집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시간을 뛰어넘는 오래된 사랑

재혼한 아버지의 조심스러운 사랑과 어머니의 새 연인등 여러가지 사랑이 교차되어 보여준다

사랑이란 언제든 최선을 다해야한다는 것'설령 실패로 끝나더라도 모두를 걸었던 그 사랑은 성장의 거름이 된다는 걸 보여준다.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기억은 절대 손해가 아니라고 작가는 말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이 저자의 책을 읽으면서 자꾸 박완서님이 떠오른다.

다르다면 다른 작가이지만 둘 다 사람을 위로하고 다독이는데는 최고가 아닐까 싶었다.

뭔가 대단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자분자분 들려줄 뿐이다.

대단한 반전이나 위트도 없지만 읽다보면 계속 책장이 넘어가고 그래그래 고개가 끄덕여 지는 것

잔소리같고 수다같으면서도 읽으면서 멈출 수 없고 책장을 덮으면 내가 위로받았다는 느낌이 든다

많이 썼지만 같은 주제가 없다.

그리고 작중 인물를 따뜻하게 바라본다. 내 자식처럼 품어주고 끝까지 행복하게 되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아 계속 글을 쓰고 있다.

 

작품속의 주인공들은 소통이 힘들다.

나를 들여다 보는 것도 서툴고 남과의 관계도 서툴다.

그래서 아프고 힘들지만 그래서 성장하게 된다.

주인공만 그런게 아니라 주변 어른도 마찬가지다.

문제에 부딪쳤을 때 도망가고 싶고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 하는 건 아이나 어른이나 마찬가지다.

처음 대하는 문제에서 답을 구하기 어려워 회피하게 되는 것처럼

피하고 숨고 만다.

사실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하는 것 타인과 관계를 맻어가는 것은 어른도 어려운 문제다.

작은 유진 엄마도 사건이후 딸과의 관게맺음을 놓쳐버렸고 그 파장이 유진에게 미친다.

벼랑의 주인공들도 그렇다.

신기루의 모녀는 서로가 닮았다는 걸 부정하면서 서로를 거부한다.

하늘 말나리야의 아이들은 심통이 나서 혹은 어떻게 해야할지를 몰라서 관계를 맺지 못하거나

소희처럼 그냥 속으로 누르고 누르기만 할 뿐이다.

사내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지오도 석주도 삶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하는지 몰랐다.

작가는 주인공들에게 그래도 괜찮다고 한다.

몰라서 서성대고 그러다가 엉뚱하게 일을 벌이더라도 괜찮다고 . 그렇게 실수하고 넘어지면서 배우는 거라고 이야기해준다.

하지만 주인공들 자라면서 작가도 해결책이 궁해진 모양이다.

아니 문제가 점점 커지고 다양해지면서 일반적인 상식적인 기준의 해결이 감당하지 못한다.

사회문제이기도 하니까 작가 혼자의 힘으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또 다른 해결책을 기다린다 해결은 아니더라도 다독여주고 위로해주는 손길을 기다린다.

다 괜찮다고 다 지나간다고 등을 토닥여 주는 손길이 또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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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노트...

 

 

어떤 추리기법 혹은 반전에 대한 놀라움 보다는

작가가 치밀하게 묘사한 학교 폭력 왕따의 상황. 그 속에서 피해자가 느끼는 생생한 두려움과 절망 그리고 점점 낮아지는 자존감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 책이다.

사실 크다란 트릭이나 마지막의 반전은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모든 절망노트의 이야기가 숀의 창작물이라는 사실은 중요치 않다.

그 창작물속에 가득한 한 아이의 분노와 절망이 더 크게 다가온다.

 

학교 폭력 그리고 왕따문제는 더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제 학교를 벗어나서 사회에서도 직장에서도 왕따는 암암리에 존재하고 있다.

대놓고 미워하고 폭력은 쓰는 것은 이제 더 이상 학교폭력이 아니다.

당사자들도 점점 진화한다.

드러나는 폭력 따돌림은 하지 않는다.

내가 가해자라는 걸 드러니지도 않고 저쪽이 피해자라는 인상도 심지 않는다.

우리는 친구이고 우리는 아직 어려서 도에 지나치는 장난을 하기도 하고 가끔은 위험하고 험한 짓도 하지만 그건 친하기때문이다. 친구끼리 못할게 뭐가 있으랴

혹은

우리는 너를 미워하지도 싫어하지 않아. 그냥 안놀 뿐이야

모두와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건 너도 알고 나도 알잖아

서로 맞는 사람끼리 더 친하게 지내는 거고 불편하면 함께 할 수 없는 일이야

다만 그래서 우린 너랑 어울리지 않아.

굳이 친하지도 않는데 미소짓고 인사하고 하는 거 좀 우습지 않니?

그렇게 지지리 궁상떨지말고 쿨하게 대할 수 없니

넌 그냥 유령이고 투명인간일 뿐이지...

 

딱 꼬집어서 뭐라고 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

누가 욕을 하거나 때리거나 한 것도 아닌데 마음이 너무 아파서 숨을 쉴 수가 없다.

차라리 혼자 무인도에 떨어져 있는 상황이면 편하다

사람에게 둘러싸여 하하호호 행복하고 즐거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나는 혼자라는 사실은 치떨리게 무섭고 슬프다

스스로 무기력해지는 것 그리고 누구에게도 호소할 수 없는 것이 슬프다.

 

"교사가 가장 맹목적이야"

언제나 개방되어있다 언제나 상담가능하다 언제나 말해라 무슨 일이든

하지만 툭까놓고 말해서 그들은 덮어버리는 걸 가장 좋아한다.

큰 말썽은 없었으면 좋겠고 저희까리 알아서 화해하고 잘 지내면 좋겠고

겉보기에 멀쩡하고 친해보이면 보이는 걸 믿고 싶고

우리반에는 아무일이 없다 아무문제가 없다고 혼자 주문을 외우고 믿다보면

저절로 그렇다고 보인다.

혹은 정의감으로 해결하려는 일들이 오히려 누군가에게 더 큰 상처가 되고 더 큰 왕따나 폭력의 빌미가 되기도 한다.

교실밖을 걷도는 아이를 교실로..

우리에 갇힌 맹수는 그 스트레스를 우리안 누군가에게 풀어야 한다.

치기어린 정의감은 또다른 희생을 낳는다.

그러면 결국 우리는 숀의 부모처럼 나설수 밖에 없을까

누구도 모르게 뒤에서 그렇게 찔러버리는 것..

사실 지금 공공연하게 여기서 도는 이야기도 그렇다.

잘못 건드리면 오히려 내가 뒤집어쓸 수 있는 문제이다

미리미리 증거를 잡고 정황을 모아서 나가야한다.

그리고 강하게 나가야한다.

이것이 왕따나 학교폭력에 대처하는 방법이라고들 한다.

 

어떤 전문가도 말했다.

내 아이가 왕따를 당하거나 학교폭력의 피해자인경우

가해아이에게 내 아이와 잘 지내라거나 부탁하지 말라고

넌 친구도 아니야 이제 더이상 내 아이에게 접근하지마

니가 어떤 호의를 가지고 접근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후 너의 모든 행동은 내 아이에데한 공격이라고 생각하겠다.

친하게도 지내지마라

니네 엄마에게 말해도 좋다. 절대 내 아이 가까이 가지마라

 

화해가 아니라 경고가 약이되는 세상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쩌면 무심하고 무자격의 부모가 아이에게는 가장 크고 쓴 독이 된다는 것.

아주 사소한것이 뜨끔해지고 무서운 것이 되기도 한다.

 

십자가..

 

 

 

왕따 혹은 학교폭력 이후의 이야기다.

읽는 이에게 감동을 강요하지 않고 담담하게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왕따를 당하던 소년이 죽었다.

그 소년의 유서에 절친으로 그리고 미안했던 친구로 거명되었던 두 학생

그리고 죽은 아들을 처음 발견한 아버지

형을 잃고 거의 형의 부모로만 살아가던 부모를 둔 학생의 동생 이야기다.

왕따를 주동하는 사람은 누가 보던 나쁜 놈이다.

죽도록 죄값을 치르고  처절하게 반성해야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옆에서 아무말 없이 모른 척 했던 사람들은?

아이를 잃은 부모는 어떻게 해야할까

여기 한가지 더 우리 교실에는 폭력도 왕따도 없다고 굳게 믿었던 교사의 입장도 궁금하다.

 

말에는 두가지가 있다고 가르쳐 준 사람은 혼다씨였다.

나이프의 말

십자가의 말

.................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뿐 마음석으로는 이미 알고 있을 거야. 나이프의 말은 가슴에 박히지

당연히 굉장히 아파. 쉽게 일어나지 못하거나 그대로 치명상이 되는 일도 있어 하지만...

나이프의 말에서 가장 아플때는 찔린 순간이야

십자가의 말은 평생 등에 져야하는 말이지 그 말을 드에 진 채 계속 ㅓㄹ어가야 해 아무리 무거워도 내려놓을 수 없고 발길을 멈출 수도 없어. 걷고 있는 한 즉 살아 있는 한 계ㅗㄱ 그 말ㅇ르 등에 지고 있어야 하는 거야.

75p

 

아무짓도 하지 않았던 아이와 어른은 등에 십자가를 지고 살아간다.

어쩌면 이 책의 미덕은 거기에 있다.

사실 왕따가 생기고 누군가 죽어버린 후

우리는 쉽게 그 일을 주동했던 누군가에게 돌팔매질을 하고 나쁜 놈이라는 이름을 씌우고 그에게 모든 것을 다 걸어버린다.

우리는 그저 몰랐다고 마음아프다고 미안하다고.. 혹은 그 누군가가 아니었다면 우리에게 돌아왔을지 모를 죽음이나 죄값은 누군가가 대신 해주어서 다행이라는 은밀함을 숨긴채

그리고 남겨진 아이들이 트라우마를 가지지 않게 혹은 누군가 또 다른 희생자가 가해자가 생기지 않을 방법들을 연구한다.

그리고 이미 저질러진 일에 대해서는 쉽게 잊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게 쉽게 잊혀질 일일까

어떤 잘못이 생기면 잘잘못을 가려야 하고 철저하게 사과를 하고 부담을 안아야 한다.

아이의 앞날을 위해 트라우마를 없애기 위해 누군가를 그릇되게 보호하고 무시하고 넘어가서는 안된다.

이 책은 어쩌면 일본이라는 사회가 이미 왕따나 폭력에 익숙해져서 나온 결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반 아이들이 모두 강제적으로 죽은 아이의 장례식장을 찾아가도록 하고

그 곳에서 피해 아버지가 원하는 (혹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방법으로 아이들을 벌한다.

가해자는 영정앞에 오지도 못하게 내쫒아버리고 모른 척 한 댓가로 살아남은 아이의 멱살을 잡고

가해자의 이름이 언론에 그대로 드러나고 사회적인 지탄을 받게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가해자의 인권을 빙자해서 이름을 지우거나 얼굴을 가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이 뼈저리게 반성하지도 않고 모른 척 얼굴을 돌린 모든 이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냥 내가 아니니 다행이고...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고 그것뿐이다.

 

누군가 그렇게 떠나고 남은 사람들이 모두 주인공처럼 십자가를 등에 지고 걸어가진 않는다.

왜 하필 나일까

우리가 죽은 슌스케를 제물로 바친것처럼 나 역시 그 녀석때문에 살아남은 제물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하면서도 쉽게 그걸 등에서 내려놓지는 않는다.

 

왕따는 어린아이같은 짓이 아니다. 사람이 죽을 정도의 문제를 어린아이의 유치한 잘못으로 끝내버리면 안된다.

왕따 문제를 무 겁게 말하는 평론가나 앵커가 있으면 "왕따는 교육의 황폐화나 마음속의 어둠처럼 그렇게 거창한게 아니야"라고 반박하고 싶었는데 반대로 가볍게 다루어도 화가 치밀었다. 이것은 어른이 되어 내린 결론이다.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를. 그로인한 생채기를 한참을 들여다 봐야한다.

쉽게 사회문제로 치부하거나 어린아이들 이야기로 넘기기전에 그 속을 찬찬히 들여다 보면 많은 이야기가 들어있다.

상처받은 사람. 두려운 사람.. 죄의식을 지니면서 안도하는 사람. 만만한 누군가를 건드리면서 화를 터뜨리는 사람. 소외받은 사람

누구든 이야기를 가지고 있고 나름의 무게를 가지고 있는 문제다.

나만 아니면 괜찮은게 아니라

누구라도 아니어야 할 문제다.

왕따는..

 

 

앞의 이야기는 피해받은 아이의 마음을 들여다 보는 이야기라면

두번째 이야기는 불의앞에서 눈을 감았던 사람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처음의 소설은 흥미있게 문제를 파고 나갔고

다음 이야기는 담담한 후일담을 적고 있다.

 

개인적으로 십자가가 더 와닫는 이유는

왕따문제에서 간과하기 쉬운 주변인의  그 이후의 이야기를 점이었고

어떤 감동도 극적인 상황도 없이 책을 계속 잃게 한 힘에 있었다.

더 이상 이야기속의  혹은 뉴스 속의 일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얼마전 큰아이 반모임에서 누군가 이야기했다.

아이들끼리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데 선생님이 일을 너무 크게 보시는 거 같아

아이들끼리 이렇게 저렇게 얼키다가 그렇게 풀어지는 경우도 많은데 말이야.

 

그런데 아이들 끼리의 문제야.

장난이야. 그냥 커가는 과정이지.

이런 사소한 무심함속에서 오늘도 누군가가 만신창이가 되고 누군가는 죽음을 생각할 거라는 거다.

누군가는 천지처럼  슈스케처럼 혼자 죽음을 준비하고

누군가는 유군이나 사유처럼 혹은 만지처럼 상처만 짊어질 수도 있다.

남의 일이 아니다.

왕따문제는 동서양을 막론하게 계속되는 모양이다.

친한 친구의 끈질긴 장난질이나 어느날 갑자기 무시는 소녀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일인듯..

사실 그건 나이먹어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이건 정말 섬뜩했다.

사건이 섬뜩한게 아니라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의 말이나 행동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

사고는 일어났고 죽은 사람은 죽었지만

산 사람은 어쨌든 살아야한다.

어쩌면 살아간다는 치욕스럽고  추잡한 연속앞에서 누구나 이렇게 되지 않을까

살아남은 내 아이를 지켜야 하는 입장에서는 변명을 안할 수 없다.

결국 이런 괴물같은 부모아래 괴물같은 아이가 나온다고하면 너무 지나칠까

읽는 내내 내 얼굴이 화끈거리고 부끄러웠다.

내 아이가 왕따 피해자라면 이런 짐승만도 못한 부목 어디있겠냐 싶고

내 아이가 주동자거나 가해자라면 나라고 이렇게 후안무치하지 않을 자신이 없ㄷ.

그리고 이건 더 이상 일본만의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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