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민음인입니다.


국내에서 유명한 프랑스 대표 정신과 전문의 이자 심리 치료사인 크리스토프 앙드레의 신간


『사람들 앞에 서면 나는 왜 작아질까』


서평단 이벤트를 진행하려고 합니다.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면 어쩌지?”



학교, 직장, 데이트에서


완벽해 보이느라 지친 당신을 위한 책!



발표 차례가 다가올 때, 빌려준 돈을 돌려받아야 할 때,

형편없는 서비스에 항의하고 싶을 때, 말도 못하고 심장 박동만 빨라지지는 않는가?

많은 이들이 ‘관계에 대한 불안’으로 남을 의식하고 눈치만 살핀다.

프랑스의 유명한 정신과 의사이자 20년간 불안 장애를 치료해 온 두 저자는 무

대 공포증부터 수줍음, 사회 공포증까지 우리를 괴롭히는 불안의 정체를

파헤치고, 당당하게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백만 프랑스인의 마음 주치의 크리스토프 앙드레가  

전하는 두려움 없이 관계 맺는 법!


“ 모두에게 잘 보이려 애쓰지 마라.”


“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진짜 나를 보여줘라.”



프랑스 대표 마음 주치의 크리스토프 앙드레의 신간 


『사람들 앞에 서면 나는 왜 작아질까』 서평단 모집 신청


서둘러주세요!



▶줄거리_ 


“당신 차례입니다.”

그의 차례가 다가오고 있었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게 느껴졌다. 손이 축축해져 반들거리는 회의 테이블 위로 땀자국이 생겼다. 주변 사람들이 그가 불안해하는 것을 알아챘을까? 그렇다, 방금 정면에 앉아 있던 사람이 그를 쳐다보다가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그는 지금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몇 분만 지나면 그의 차례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매우 선명했던 생각들이 지금은 불분명하고 복잡하게 얽혀 있다. 몸을 떨고 말을 더듬으며 발표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목이 메고 입이 점점 말라 왔다. 회의실에는 물이 준비돼 있지 않았다. 어쨌든 무언가를 잡으려 시도하면 그의 떨리는 손을 남들이 보게 될 것이다. 더욱이 그가 불편해 하는 것을 모두가 보았을 게 틀림없다. “내가 이런 상태가 되다니 어처구니없군. 아무리 그래 봤자 사람들이 날 잡아먹진 않을 거야. 난 그저 연말 보고만 하면 돼. 내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빌어먹을.” 그는 가슴이 답답했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기침했을 때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몇몇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태연한 척하려 애썼다. “당신 차례입니다. 뒤보아 씨” 하고 총책임자가 그에게 말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다리가 후들거리며 힘이 빠졌다. 뭔가 큰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대부분 이런 상황을 언젠가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 앞에서 발언하거나 중요한 사람을 만날 때, 사랑을 고백할 때, 더 흔하게는 누군가에게 돈을 달라고 요구하러 갈 때 누구나 불안을 느꼈을 것이다. 그 모든 불안 중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퍼져 있는 것은 아마도 우리 의 동류인 인간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1) 이 두려움은 우리가 다른 사람이나 그룹의 시선, 평가에 노출될 때 생겨난다. 그 형태는 다양하다. 그룹 앞에서 말하거나 손님들이 꽉 들어찬 카페 테라스 앞을 지나갈 때, 혹은 식당에서 주문한 요리를 바꾸기 위해 종업원을 부를 때와 같은 평범한 사회적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의사와 심리학자는 타인에 대한 이러한 두려움을 두고 ‘사회 불안’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때로 질환에 가까울 정도로 심각하거나 고통스러운 형태를 띠기도 한다. ‘사회 공포증 ’이 그런 경우다. 사회 공포증 환자는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상황에서 갑작스레 공포를 느낀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자신이 먹고 있을 때 남이 쳐다보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차라리 먹지 않는 쪽을 택한다. 정신과 의사들이 ‘회피성 인격장애’라고 부르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지 않을까 끊임없이 두려워한다. 이 때문에 회피하거나 몸을 도사리고 접촉을 피한다.



왜 우리는 남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그 출현에 책임 있는 기제들은 다양하고 흥미롭다. 유전 요인, 생물학적 과정, 교육 방식, 문화적 압력, 개인적인 삶의 조건 등 많은 요소가 사회 불안의 발생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관계나 상호 작용은 아직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므로 앞으로 더 상세히 알게 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당신은 사회적 두려움이라는 흥미로운 세계를 탐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사회 불안의 원인과 구조를 설명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할 것이다. 모든 개인이 타인과 잘 어울리고 잘 살도록 돕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책을 쓴 목적이다.


▶서평단 모집 상세내용_

★ 응모 방법 : 리뷰 페이지를 자신의 블로그에 스크랩 한 뒤 읽고 싶은 이유를
★ 간단하고 성실하게 댓글로 작성하여 스크랩 링크와 함께 남겨주면 응모 완료.
★ 응모 기간: 2014.03.06 ~2014.03.16 (11일간)
★ 추첨 인원: 20명
★ 서평단 발표: 2014.03.19(금) 오후
★ 서평 기간: 2014.03.21~2014.03.31 (11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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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복지가 옳은 이유는

인간이라서 존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가난해서  빈곤층이라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이유로 누구와 다름없이 존중받는다는 권리를 내세울 수 있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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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중학생이 학교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경찰이 사고 조사에 나서고 이 죽음이 사고인지 사건인지를 수사한다.

학생은 학교 체육관 근처 은행나무 아래에 있는 개울에 떨어져 그대로 즉사한 상태

왜 이 소년은 여기서 이렇게 죽었을까

체육관 지붕에는 발자국이 있었고 남학생들은 때때로 담력시험을 이유삼아 체육관 지붕에서 은행나무로 건너뛰기를 하곤했다는 진술이 나왔다.

죽은 아이는 이 지방 유지라고 할 수 있는 포목점의 외아들

작고 나약하고 약해보이는 아이.

시신의 죽음과는 상관없이 아이의 등에는 여럿에게 꼬집힌 흔적이 수없이 있다.

이른바 폭력  왕따문제

그리고 경찰들이 가장 꺼려하는 미성년자 사건이다.

경찰은 여타 미성년자 사건들이 미성년이라는 이유만으로 법망에서 잘 빠져나가고 아무런 죄도 받지 않는다는 걸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선수를 친다. 아직 사후 모의가 있기전에 아이들이 입을 맞추기 전에 아이를 조사하고 잡아들인다.

14세가 넘은 아이는 구치소로 14세가 되지 못한 아이는 아동보호소로...

그리고 가족들이 저항이 시작되고 학교는 전전긍긍한다.

아침에 멀쩡하게 등교한 아들. 안그래도 친한 친구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았을 가엾은 내 아이가 범인으로 몰리다니.. 이건 억울한 일이고 엄청난 오해이며 강압수사가 아니고 무어란 말인가

피의자 부모들은 무조건 내 아이를 감쌀 수 밖에 없다. 내 아이를 내가 지키지 않으면 누가 지킨단 말인가. 무슨 이유가 있음이 분명하다.. 내 아이가 내 아들이 그럴 리 없다.

학교도 전전긍긍이다. 가장 안전하고 무사할거라고 믿은 학교 테우리 안에서의 살인일지도 모르는 사건이 일어났고 학교 아이들이 범인으로 지목되어 잡혀갔다.

죽은 아이도 내 학교 학생이고 잡혀간 아이도 내 학교 학생이다.

누구를 편들자니 누군가가 저항하고 또다른 누군가를 감싸려니 누군가가 억울해한다.

언론도 가만있을 수 없다. 중학교학생간의 폭력 왕따문제는 이미 흔한 사회문제다.하지만 대상이 미성년인 사건은 언제나 신선하고 화끈한 이슈가 된다. 나름 정의로운 관점에서 공정한 관점에서 사건을 파해치고 취재한다고 하지만 누구나 나름의 기준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때로는 피해자가 항의하고 떄로는 가해자가 저항한다.

모두 자기 입장이 있다. 내가 가장 억울하고 소외받고 가장 아픈 사람이다.

 

소설은 중학생 나구라 유이치의 죽음에서 시작되지만 누가 그를 죽음으로 몰았는가 하는 문제에 집중하지 않는다. 물론 일단 큰 줄기가 학교에서 일어난 죽음 그리고 그 원인과 가담자들을 찾아내는 것이 큰 흐름이긴 하지만 작가는 여기저기 들쑤시며 이 사건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중학생은 잔인하다.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잔인한 시기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잔인함은 혼자 서는 과정에서 터지는 고름같은 것이다. 다들 더는 어른들에게 울면서 매달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들끼리 생존 게임을 시작한다.  p 70

 

아이에게 왕따는 나쁘다고 가르쳤다. 친구를 외롭게 하고 슬프게 하는 것 그건 나쁜 행동이다. 누군가를 무시하고 투명인간 취급하면서 뒤에서 욕하는 건 그 친구를 때리고 꼬집는 것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나쁜 거라고했다. 하지만 더 나쁜 건 누군가가 왕따를 당한다는 걸 알면서도 침묵하는 거라고 했다. 내가 아니니까... 나만 아니면 상관없으니까.. 눈을 감고 다행이라고 여기고 난 적어도 그 아이를 욕하거나 때리거나 무시하는 건 아니라고 위안하는 건 더 나쁘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왕따를 당하고 무시를 당하더라도 의연하라고 했다. 인생의 한부분 한순간 어찌보면 찰라같을 일이년 친구가 없다고 문제될건 없다고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 나쁜 친구 나를 따돌리는 친구 무시하는 친구에게 연연하지 말라고...

그런데.... 그게 잘못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을 읽고...

아이들에게는 친구가 없다는 건 물고기가 물이 없다는 것이고 남들이 다들  에쓰라고 할때 혼자 노우라고 하는 건 무장한 백만대군앞에 알몸으로 서있는 것이랑 같다는 걸 몰랐다.

어디든 무리에는 끼어야 하고 남들이 할때 함께 뜻을 모아야 하고 설령 나쁜 짓이라는 걸 인지하더라도 그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건 용기가 아니라 잘난 척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

어른은 어른들의 기준으로 아이들에게 정의를 말하고 용기를 말하고 순수를 이야기하지만 아이들은 안다. 그걸 소리높여 외치는 어른들도 그렇게 살지 않는다는 걸... 그렇게 살지 못하기도 하지만 살지 않는다는 것말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말간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하지만 돌아서서는 종주먹을 날리고 가운뎃손가락을 세울지도 모른다.

아이들 캠프이후 학년주임이 한말은 한마디로 헛소리고 넌센스다.

 

"선생님은 정말 슬프다. 왜 아무도 규칙을 어기는 걸 말리지 않았지? 왜 아무도 선생님에게 알려 주지 않았지? "

아무도 안 할 게 당연하잖아. 도모미는 마음속으로 비아냥 거렸다. 아마 다들 같은 생각일 것이다. 그러면 선생들은 자기가 중학생일때 어른들에게 고자질을 했다는 거야? 만일 그랬다면 정말 왕재수 아냐 아니 중학교 다닐 때 일은 벌 써 잊어버린 거냐고 신기할 따름이었다.

 

지역 유지라고 할 수 있는 포목점의 외동아들이 학교에서 죽었다. 작고 소심하고 나약해보이는 외모와 목소리를 가진 그 아이는 충분히 왕따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더구나 그의 핸드폰에서는 친구들에게 협박을 받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고 몸에도 폭력의 흔적을 가지고 있었다. 네명의 친구가 잡혀갔고 아이들은 순순히 상해에 대한 죄는 인정을 했지만 죽음은 자신들과 상관이 없다며 한결같이 입을 닫고 있다. 죽은 아이보다 등치가 큰 친구 더 활달한 친구 죽이 잘 맞았던 두명의 단짝 어디를 보나 충분히 피해자가 있고 가해자가 있는 사건처럼 보였다.

경찰은 자신의 명예를 걸고 강하게 밀어붙이고 부모들은 무조건 자신의 아이를 믿을 수밖에 없고 학교는 그 사이에서 우왕좌왕 정신이 없다.

초반 이야기는 언제 사실이 드러나는가를 따라 읽었다. 사건에만 이야기를 치중하다보니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너무 산만한 게 아닌가 싶어 짜증도 났다. 누가 죽였는가? 이것은 사고가 아니라사건인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

이미 어떠 일이 발생했고 그걸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주된 이야기였다. 제각각 자기 자리에서 조금도 비껴서지 않고 그대로 고집스럽게 서서 자기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자기에게 유리한대로 판단한다.

정의는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사실 도도하게 세상을 가로질러 흐르는 정의같은 건 이미 말라버린지 오래일지도.

내가 보는 관점에서 내가 편리한 것 내가 판단하는 각각 개인의 정의만 넘쳐난다.

학교의 입장 그중에 교장의 입장 담임의 입장, 피해자 가족의 입장 가해자 부모들의 입장 그리고 제3자라고 할 수 있는 언론의 입장 그리고 가장 공평하길 바라는 경찰의 입장까지 제각각의 위치에서 보면 너무나 당연한 정의가 조금만 비껴서서 타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보다 더 가혹 할 수 없다.

사실 규명을 위해 밀어붙인 아이들의 구속과 보호감호는 학교나 학부모의 입장에서는 폭력적이고 부당하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공정한 보도를 위해 고민하고 썼던 기사는 누구에게나 편파적이고 억울하다. 학교도  피해학생도 가해학생도 모두 우리학생이니 귀가 얇아질 수 밖에 없다.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가도 이렇게 피해자 에게 죄인처럼 질질 끌려가는 건 못마땅하다.

 

애초에 중학생이란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존재였다.
이지마는 중학교 교사가 된 뒤로 날마다 그것을 실감했다.
어째서인지 제 의사와는 상관없는 일도 저지른다.
아이들이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건 고립이다.
장단을 못 맞춘다거나, 따분하다는 말을 들을까 상식에서 벗어나고 만다.
연못에 뜬 수초처럼 뿌리 없이 불안정하다.
덤으로 집단의 분위기에 쉽게 잠식되고 휩쓸린다.
게임과 현실을 구분하게 가장 어려운 나이대인 까닭에 끔찍한 사건을 일으키는 일이 많다.

기껏해야 나구라 집안에 닥친 불행을 수군거리는 정도겠지 인간이란 원래 제주변에밖에 관심이 없는 법이니까..p 87

 

어린애라고 순박할 거라든가 솔직할 거라고 기대하면 안된다고 단단히 다짐을 했다. 어린애도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한다, p110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중학생들

수군거리는 사람들 혹은 나름의 결론을 내려버린 사람들

학생들을 믿을 수 없는 , 믿지 않겠따고 다짐하는 어른들

모두가 완벽한 악인도 완벽한 선인도 아닌 채 양면을 지니고 있다.

저마다의 정의를 품고 있으므로

 

사건이 조금은 찜찜하게 마무리가 되고나서 조금씩 아이들이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가도 지난 시간은 야금야금 감질나게 보여주기 시작했다.

죽은 나구라도 무조건 나약한 희생자는 아니었고 나구라를 괴롭혔다고 의심받는 아이들도 모두 나쁜 학생은 아니었다.

흔히 이야기하길.. 나대거나 튀거나 하지마라 그러다 왕따당한다.

쟤는 왕따당해도 싸지 않니? 재수없잖아. 지가 얼마나 잘났다고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나대니?

쟤 정말 웃기지 않냐? 우리 쟤 그냥 무시해버려

이제부터 아는 척 하지 말기. 아는 척 하면 배신자

시작은 항상 사소하다. 별일 아니다.

친구끼리 놀다보면 장난치다보면 그럴 수 있는 일이지. 뭘 그런걸 가지고 화를 내니? 문제를 확대해석하는 거아니야? 일 키워서 좋을 거 뭐가 있는데.. 다 까고 보면 너라고 별 수 있을 줄 알아?

..............................................

아이는 천사가 아니다. 이 세상이 천국이 아닌걸.. 어른들이 천사장도 아닌데 아이들이라고 마냥 천사일 수는 없다. 그들도 경쟁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열등감을 느끼고 누군가를 때리고 싶고 죽이고 싶다. 어른의 희노애락이 애들이라고 벼켜가진 않는다. 절대로

어쩌면 천진한 얼굴로 너무나 순수하게 누군가를 괴롭히고도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한 행동이 누군가에게 고통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보다는 지금 내 감정에 더 몰두해서 스스로 합리화하고 그것이 옳다고 믿어버리는 순진무구함이 어린 학생들의 무기일지도 모른다.제 머리만 덤불에 쑤셔박고 감쪽같이 숨었다고 믿어버리는 어리석은 뀡처럼 아이들도 아직은 어려서 어리석고 그래서 불안하고 무서운 존재이다.

 

책 뒷장에 쓰여진 무엇을 예상하건 그 이상의 반전이라는 게 드러나고 나서 조금 두려웠다.

그래서... 나구라는 왕따 당해 마땅하다는 건가?

 

여리고 나약한 친구에게 그럴면 안되는 짓은 4차원이고 주제파악 못하고 나대는 고자질장이에게도 그러면 안되는 짓인 것이다

나구라의 행동들이 드러나고 나머지 네명의 행동들 그리고 기타 눈에 드러나지 않았던 주변부 사람들이 하나둘씩 등장하면서 누구나 가해자이고 누구나 피해자일 수도 있다는 단순한 진실만 남았다. 내 입장에서 본 정의감 내 입장에서 본 용기 내 입장에서 본 선심이 누군가에게는 독이되고 창이 될 수 있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 진실앞에서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이한테 늘 말했다 참 좋고 된 어른처럼....

"왕따보다 나쁜 건 그걸 보고 침묵하는 거란다. 옳지 않은 걸 보고 가만있는 것 용기가 없는 것 그게 옳지 않다고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 그 모든 것이 더 심한 죄가 될 수 있단다.

하지만 안다. 어른들도 왕따가 두렵고 집단에서 도드라지는게 두렵고 누군가와 함께 한다면 폭력도 악행도 무뎌질 수 있는 존재라는 것

지금 조용한 이 거리에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불안하고 또 누군가는 무뎌져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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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를 키우는 철학자가 늑대와 함께 생활한 10여년간을 되돌아보며 쓴 책이다.

늑대를 키우며 느끼는 감정과 생각들을 철학자답게 철학적으로 풀어놓으면서 영장류중의 영장이라고 여겨지는 인간과 늑대를 비교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미개하고 야만적이고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야생의 늑대에게 존경할만한 점들을 조목조목 이야기해주고 인간이 얼마나 한계가 있는지도 보여준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이책을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서 추천을 받고 읽었다.

 

예전 어떤 인터넷 카페에서 본 글이 떠올랐다.

바닷가로 놀러갔는데 어떤 무지하고 생각없는 사람이 개를 데려와서 함께 해수욕을 하더라

사람이 노는 물에 어떻게 개를 함께 데리고 와서 함께 해수욕을 할 수 있느냐 는 글이었는데

그 댓글에는 놀랍게도 그 사람이 파렴치하다 너무나 공중도덕을 모른다. 어떻게 사람이 맨몸으로 들어가는 물에 동물이 감히... 뭐 그런 글이 많이 달렸다.

순간 갸우뚱했다.

바다가 사람만의 것일까? 물론 사람이 개발하고 가꾸고 사람이 편리하게 이용하게 한 점도 있겠지만 태초에 바다가 생겼을 적에는 이곳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곳이라고 정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공적인 수영장도 아니고 바다라면 개가 들어온다는게 뭐 대수란 말인가

설령 그 개가 떠돌이라서 너무 더럽고 비위생적이라 함께 도저히 즐길 수 없다는 것이라면 이해가 간다. 하지만 사람이 키우던 반려견이라면 그 사람들이 상식적인 사람들이라면 나름 씻고 닦고 하며 키우던 개가 아닐까 그런데 사람은 되고 개는 안된다?

나는 동물 애호가도 아니고 개도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그리고 내가 노는 바닷가에 개가 오면 조금 기분이 나쁘겠지만 그렇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그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고 하지는 않을것이다. 개도 바다에서 노는구나 하고 처다보긴 했을 것이다. 아 나는 개만도 수영을 못하구나 하고 자괴감을 느끼기도 했을 것이고 내옆으로는 안오길 내심 바라며 조금 떨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개가 못들어오는 바닷가라...

하긴 캠핑을 가도 물놀이하는 계곡에 개가 들어오면 기겁을 하거나 하는 경우도 있다.

감히 개가..

그때 문득 생각했었다 이 지구에서 언제부터 사람이 주인이엇던가?

누가 사람이 주인이라고 사람이 아닌 다른 생명체는 부수적이며 사람에게 맞추지 않으면 혹은 위협을 가하게 되면 가차없이 멸종되고 이용되는건가? 왜 세상의 모든 것이 사람이 되었나 하고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그때뿐이었다. 부끄럽지만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늑대를 키운다

그러니 늑대라니.. 늑대를 키운다는 건 더 터부시할 사람들이 많지 않겠는가.

게다가 야생의 늑대를 개처럼 키운다는 건 늑대의 권리를 박탈하고 몬능을 억제하는 비인간적인 처사가 아니냐는 말까지 듣게 된다. 하지만 이미 문명화된 현대에서 늑대의 야성을 제대로 발휘하고 보호받을 곳이 지금 어디 있을까 자연방목이라는 이름하에 아예 울타리밖으로 세상밖으로 쫒아 버리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지 않은가

저자는 거기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이야기하고 이해시킨다.

늑대 브레닌의 행복이라는 명제하에 그도 훈련을 받고 문명에 적응하며 사는 것 그리고 그의 행복을 공생하는 범위에서 최대한 지켜주기만 한다면 브레닌도 사람도 함께 행복할 수 있다.

 

다음은 본능적으로 토끼 사냥을 하는 브레닌을 묘사한 것인데 .. 사실 여기서 나는 보통의 인간보다도 더 숭고한 늑대를 보았다. 

 

..........브레닌의 인내심은 정말 놀라웠다 대부분의 시간을 땅에 엎드려 있었고 근육은 긴장시켜 앞으로 뛰쳐나갈 준비를 한 채 주둥이와 앞발은 토끼에게 향해 있었다. 토끼가 한눈을 파는 사이 몇 센티미터쯤 다가간 뒤 가만히 엎드려 다음 기회가 오길 기다렸다. 다음 단계로 진행되지 않는 한 얼마만큼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브레닌이 15분 동안 기다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녀석은 엄청난 단거리 가속력과 급습에 능한 자기 장점이 토끼가 순식간에 방향을 바꾸는 장점보다 더 크게 작용하도록 상황을 정비하려 했다. 다행스럽게도 토끼는 그보다 휠씬 앞서 브레닌이 접근하는 낌새를 알아차렸다. 토끼가 눈치 챈 것을 꺠닫는 순간 브레닌은 전광석화와 같이 토끼를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대부분은 빈 손으로 돌아왔다.

브레닌이 사냥을 할때 행복했다면 녀석에게 행복은 무엇이었을까? 사냥에는 긴장의 고통과 정신과 신체의 의도적 경직 공격하고 싶은 열망과 그렇게 하면 실패한다는 생각 사이에서 발생하는 필연적인 갈들이 존재한다. 가장 원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억제해아 하는 것이 사냥이다. 브레닌이 느꼈을 고통은 토끼를 항해 은밀하게 접근할 때 부분적으로나마 완화됐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멈추면 똑같은 과정이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이거시 행복이라면 행복은 황홀경이라기 보다 고통인 것이다. .......................................................

행복은 즐겁지만은 않다. 동시에 매우 불편하다. 이것은 내게도 브레닌에게도 마찬가지다. ...고생해보지 못한 사람은 좋은 일이 생겨도 그 가치를 모른다. 그러나 그 때문에 불편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행복 자체가 불편함을 끌어안고 있는 것이다. 이는 행복의 필요조건으로서 다른 방식으로는 행복을 말할 수 없다. 즐거움과 불편함이나 하나 되어야 완전한 행복이라 할 수 있다. 한쪽을 헐어내면 모두 허물어지는 구조물처럼 말이다.     p 214-216 

 

 

 

나는 길게 펼쳐진 잔디ㅣ밭에 앉아 브레닌이 토끼 뒤를 몰래 쫒는 모습을 보면서 나 역시 삶속에서 감정이 아니라 토끼를 쫒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삶에서 가장 좋은 순간 우리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은 순간은 즐거운 동시에 몹시도 즐겁지 않다. 행복은 감정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감정에 초점을 맞추면 요점을 놓칠 것이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러한 교훈을 얻었다. 때로는 삶에서 가장 불현한 순간이 가장 가치 있기도 하다. 가장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도 가장 가치 있는 순간이 될  수 있다. 이후 무수히 많은 불편한 순간들이 내 앞에 나타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삶이란 하루하루 일상이 반복되는 그 지루하고 변치않음에 가치가 있다. 행복하냐 불행하냐는 감정은 그 안에 포함되어있는 일부인 감정일 뿐이다. 하루를 살아내고 그 안에서 경험하고 판단하는 것 느끼는 감정 등등의 소소한 것을이 쌓여가면서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즐거움이든 괴로움이든 살아내는 일상이 가장 소중하고 가치있다. 그래서 하루하루를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위대하다.

어쩌면 나도 하루하루 행복한 걸 알지 못하고 지나가고 있는 중이다.

지금의 감정이 좋지 않고 즐겁지 않다는 이유로 지금의 곤란함과 귀찮음 불편의 가치를 모르고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가끔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면 세상에서 행복하지 않은 순간이 없고 소중하지 않은 순간은 없다.

언제나 새롭게 시작되는 하루 언제나 어제와 다름없는 평온한 일상이 행복이라는 걸 늑대가 혹은 사람보다 열등하다고 여겨지는  동물들이 사람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다른 동물과 비교해보면 인간은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하는데 엄청난 시간을 쓰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미래의 모습에 대해 어떤 비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장기간에 걸친 교육과 그에 따라 얻게 되는 경력에 열심인 이유이다. 우리는 투자한 교육에 비해 일을 해서 얻는 보람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알고 있다. 전문 교욱자인 나 자신만 해도 배움이 즐거움으로 가득한 것인양 연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공부와 경력쌓기에 열심이다. 어떤 특정한 것을 욕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욕망들은 당장 또는 가까운 미래에는 충족될 수 없지만 능력이 있고 운이 따르고 열심히 한다면 특정한 시간내에 실현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이 공부이든 직업과 관련이 있건 없건 비젼있는 미래를 확보하기 위해 현재의 행위들을 계획하고 실행해 나간다. 이 같은 욕망을 가지려면 미래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즉 미래를 미래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

우리가 죽을때  잃는 것은 우리 삶에 투자된 것들로 설명된다. 인간은 미래에 대한 특별한 개념을 지니고 있기에 원하는 미래상을 그리며 인내하고 갱신하고 전진하고자 현재의 삶에 다른 동물들보다 더 많이 투자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동물보다 죽을 때 더 많은 것을 잃는다. 인간에게 죽는 다는 것은 다른 동물보다 더 가혹하다. 반대로 말하자면 인간읫 ㅏㄻ은 다른 어떤 동물들의 삶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죽을 때 더 많은 것을 잃기 때문에 인간이 더 우우얼하다는 결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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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인간이 늑대보다는 더 큰 비극일 것이다. 여기서 저지르는 실수는 바로 그런 이유때문이 인간의 생명이 동물들의 생명보다 더 우월하다는 생각이다. 죽을 때 더 많이 잃는 다는 것은 우월성에 대한 징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저주받은 것이다. 왜나하면 이러한 의미의 죽음에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그 시간의 개념 속에는 삶의 의미를 쫒는 우리가 있다.

 

에니메이션 "늑대아이" 가 있었다.

반인반수인 늑대인간이 인간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두 아이를 남기고 죽음을 맞는다. 영화 전반부에 등장하는 그 늑대는 정말 멋있었다.

뭐랄까 인간중에도 그만큼 고귀하고 진실한 남자를 찾기가 쉽지는 않다.

어떤  속임수나  눈속임 없이 (하긴 늑대인데 인간으로 살아가는것이 속임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에 충실하게 살아간다. 희노애락을 순수하게 표현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마음껏 사랑하고 아이를 사랑한다.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인지 사냥을 하는 본능때문인지 한마리의 새를 잡으려다 죽게 되지만 그 죽음도  하천에 빠지는 죽음이지만 찌질하지 안고 당당하다.

그리고 두 아이 중 늑대의 본성을 따르는 아메도 아비를 닮았다.

인간이고 싶어하는 유키가 어쩔 수 없는 거짓 예의를 위한 속임을 이용하면서 괴로워하지만 아메는 늘 잔잔하게 자기의 본능에 충실하다.

그 에니메이션의 아빠 늑대나 아메가 브레닌과 닮았다는 다소 엉뚱한 생각도 했다.

아메가 제어미를 하여금 아이를 놓아주어야 하는 순간을 꺠닫고 마음을 비우는 걸 배우게 했다면 브레닌도 저자에게 인간의 한계 그리고 언제부터 인간이 인간으로 진화되었는가를 생각하게 하며 인간이 가지는 인간 시선의 여러가지 성품이나 본질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하게 한다.

그리고 우리는 순환하는 시간을 살아가는 늑대

기쁨과 괴로움이 공존하는 행복을 인지하고 그걸 즐기는 늑대

아무런 속임수도 어떤 수도 쓰지 않는 순수한 늑대의 모습을 보이며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지금 이순간을 즐기면서 여기에 몰입하는 것 그리고 내 마음에 솔직해져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어떤 대상을 순수하게 바라볼 수 잇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세상의 가장 약자까지 아우를 줄 아는 선이고 도덕이라는 것을 배운다.

 

세상의 어떤 멘토보다 한마리의 정직하고 순수한 동물이 사람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수도 있다는 것도

 

 

 

늑대 한마리가 있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람에게 길들여지고 야성이 아니라 문명에 익숙해지지만 그래도 행복했다고 믿는다.

브레닌이라는 멋진 이름을 가졌고 문명에서도 야성을 잃지 않고 살았고

아마도 행복했을 것이고 주인 (혹은 알파 수컷)을 좋아했고

행복이라는 것이 감정적인 긍정상태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어떤 계략도 속임수도 없이 순수하게 본능에 충실한 행동의 아름다움을 알려준 늑대

나도 그런 늑대 한마리를 가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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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단편들은 재미있다. 읽는 동안 딴 생각이 들지도 않고 거창하게 문장을 배배 꼬지도 않고 심리는 묘하게 늘어놓지도 않는다. 문장은 단순하고 때때로 킬킬거릴만큼 유머가 있고 정확하게 상황은 정확하게 표현된다.

미사여구나 장황설도 없다.

그래서 쉽게 읽히고 내용도 간결하게 들어오는 편이다.

하지만 불편하다.

말랑말랑한 이야기도 뒤가 계속 남아있고 어딘가 살벌하고 누군가 나를 주시하는 눈동자가 자꾸 따라오는 듯한  불안감을 야기하기도 한다. 일상에서 무심하게 넘겼던 상황들이 디테일하게 묘사되면서 그때 내가 느끼지 못했던 두려움이 세삼 느껴지면서 움찔 움찔하기도 한다.

나도 "이사"를 했고  누군가의 어두운 그림자를 부러워도 해봤고 그래서 혼자 화를 내고 뒷감당을 하기도 했었다(그림자를 판 사나이) 거지같고 모조리 없어졌으면 하는 가족에 대해 생각하기도 했지만 "오빠가 돌아왔다"는 가족만큼 막장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설레게 좋아하고 설레발을 쳤던 적은 있지만 그 대상은 "마코토'는 아니었고 아이스크림을 자주 먹어도 고객센타에 전화할 일은 없었다.

가족이 몰살되는 악몽같은 순간은 없었고 내가 아는 누군가가 살해되어 누군가를 의심하고 두려워한 기억도 다행히도 없다.

김영하의 단편들은 내가 경험했던것들 혹은 하지 않았던 것들이 혼합되어 이야기되고 있는데 그래서일까 모든 이야기들이 익숙함과 동시에 몹시도 낯설다.

 

늦은 시각 이제는 집에 돌아가야 하지 않나 하는 그 시간 어느 술자리에서 알고는 있지만 잘 알지는 못하는 조금은 어려운 그렇지만 무시해도 괜찮을 선배가 툭툭 뱉어 내면서 하는 말같았다.

"그런데 말이지.. 이런 일이 있었는데 혹시 알아?  " 혹은 " 이런 얘기 들어본 적 있어? 내 친구의 선배 사촌 이야긴데 말이야"

하면서 무심하게 꺼낸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끌려서 빠져드는.. 하지만 이야기에 빠지면서도 자꾸 시계를 힐끔거리고 어디쯤에서 끊고 일어나야 하는 건 아닐까  더 듣고 있으면 안될거같은 불안감도 들지만 이렇게 앉아서 끝까지 듣는다고 뭐 별일이 있겠어 싶기도 하고 왠지 더 있으면 안될거같기도 하고 뭐 그런 복잡한 마음이 드는데 이야기는 너무 재미있는... 뭐 그런 상황같은 이야기들이다.

누군가가 이런 일이 있었대 하면 얼마나 한심하면 그런 일을 겪냐? 사람이 너무 질질 끌려가도 안돼. 맺고 끊는 건 확실해야지  하고 목청을 올리다가도 막상 내가 당하면 순간 어어.. 하면서 그럴 수도 있지 않나 하고 스스로 위로하고 변명하고 혼자 아악... 소리치고 반항하는데 아무도 모르는 것. 그래서 결국 홀로 모든 뒷감당을 쓸쓸하게 하게 되는 일

김영하의 단편을 읽으면서 내내 기분이 그랬다.

 

예전에 친구들 혹은 아는 사람들과 술자리를 하면 누구나 꼭 한명쯤은 자기의 은밀한 고민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었다. 너무너무 힘들다. 내게 왜 이런 시련이... 하는 나만 가지고 있는 시련 같은 거.. 하지만 뒤집어보면 누구나 하나쯤은 가지고 있던 이야기.. 사실 별거 아닌 이야기

하지만 그런 고민이 알콜과 섞이면 꽤나 낭만적이 되고 그 고민을 짊어진 사람은 감수성이 풍부하고 뭔가 비련의 주인공같기도 해서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그런거 없는게 낫지 하는 조금은 쓸쓸한 자기위안이 되는 이야기들  " 그림자를 판 사나이"를 읽으면 그때의  생각이 났다.

나도 늘 그랬던 어디선가 본듯한 들은 듯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혼자 나는 어디가 모자라서 저런 경험이 없을까 하는 자책도 하고 .. 뭐 별것도 아닌걸 혼자 소설쓰네 하기도 했다. 내가 갖지 못한 그림자를 갈망하던 풋내기 시절이기도 하고 어쪄면 가장 편한 시기이기도 했었다.

 

누군가의 작은 위안에도 쉽게 무너지고 감사해하면서 그 다음에 이어지는 배신이나 이별을 애써 혼자 변명하고 마무리한다. "로봇"의 그녀처럼 

 

한편한편이 잘 만들어진 단편영화같기도 하고 이야기를 조금 더 다듬고 늘여서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도 그만일거같다는 느낌도 든다. 짧은 글속에 확 사람을 잡아끄는 이야기를 뿌려놓고 그걸 상대가 어어 하는 동안 맛깔나게 버무리고 마무리해서 어. 하면 이미 이야기 하나가 끝나있다.

누가 누구를 만나고 누가 누군가를 욕하고 헤어지고  질척거리고 비루하게 구는 모양새를 따라가 다 보면 그렇게 킬킬거리고 웃거나 얼굴을 찌푸리고 불안하고 불쾌하는 동안 이야기는 막바지가 되고 깔끔하게 끝나버렸다. 그래서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나 궁금하기도 하고 뒷이야기를 더 해도 될거같은 아쉬움이 남는  모양새는 드라마나 다름없다.

 

 

두권의 단편들을 읽고 든  아무 상관없는 생각

만약 내가 소설을 쓰게 된다면 .. 암튼 잘 쓰게 된다면

나는 김연수보다는 김영하처럼 쓰고 싶다.

아무렇지 않게 의뭉스럽게 툭툭 이야기를 내뱉지만 듣는 사람은 괜히 모른척 하며 귀를 기울이게 되고 자꾸 뒷이야기가 궁금해지는 것. 뭔가 찝찝하고 불안하고 불쾌하지만 그래서 그만 일고 싶지만 그래도 끝까지 놓지 않은 이야기 ..

그게 더 재미있고 통속적인 이야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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