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내성적인 성향은 그에게 받은 것이었다.

그도 무척이나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무난한 사회생활을 했고 모임에서 장도 몇년을 해왔고 늘 모임에서 대화를 주도하고 주로 말하는 사람이었고 술자리도 즐겼지만 그는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술을 좋아하고 친구가 많고 모임이 많고 목소리도 무척이나 컸고 관심받기를 좋아했지만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모임에서 떠들썩한 시간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오거나 쉬는 날이 되면 늘 무표정하고 뚱했던 표정이나 말없이 책상앞에 오래오래 앉아 있는 모습이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내성적인 사람이 받는 오해는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잘난척 한다. 오만하다. 제멋대로다.다른 사람들을 무시한다.

하지만 그가 혼자만의 방으로 들어가서 누구와도 마주하지 않은 시간을 갖는것은 누군가를 무시하거나 오만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지쳤고 피곤했던 거였다. 떠들썩한 시간들을 가진만큼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고 어떤 사람의 목소리보다는 그저 적막한 고요속으로 숨어들어 숨을 쉴 여유를 찾아야 했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공개된 자리에서 너무 떠들어댄건 아니었는지 어떤 실수가 있었던 건 아니었는지를 곰곰히 되짚어가며 복기하는 시간들 그리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후회하고 침묵의 가치를 다시 꺠닫는 시간들이었다.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고 조금 편한 가족들의 질문이나 말에 대꾸하지 않은 것은 잘나서가 아니었고 지쳤고 부끄럽고 또 수줍어서였던 거였다.

하지만 그건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모름지기 사람이란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다정하며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하고 적절한 맞장구를 쳐야한다. 그리고 잘 어울리고 잘 웃고 말을 재미앴게 해야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과 정반대점에 있던 그는 긴 가방끈과 높은 학력만큼이나 오만한 것이었고 잘나서 주위의 모두를 무시하는 행동으로 보였다.

그가 보는 어려워보이는 책들도 그런 주위 사람들의 판단을 보충해주는 증거였다.

그는 외로웠을 것이다.

어쩌면 오만하고 잘난척 한다는 오해뒤에 숨어버리는 것이  원치않은 수다나 과장된 적극성보다는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젊어서는 사회생활을 왕성하게 할때는 원치않은 행돋들도 필요했지만 나이가 들고 이제 사회의 뒤안으로 물러난 시점에서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오해를 받더라도 내 마음이 편한 곳을 선택하고 행동했을 것이다.

그래서 외로웠고 고독했겠지만 변명하지 않았다.

어쩌면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가장이었던 사람이 사나이였던 사람이 외롭다고 하는 것은 사실 내가 레이스가 있는 팬티를 입는다고 고백하는 것만큼 생뚱하고 수치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를 가장 많이 닮아있던 나도 그땐 그를 잘 알지 못했다.

무뚝뚝하고 별 대꾸없고 자기만의 공간에서 자기만의 질서에 숨어드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불편했고 피하고 싶었고 가능한 짧은 시간만 마주하고 싶었다.

그때도 그가 외로웠을거라는 걸 짐작했지만 애써 모른 척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불편하니까

내성적인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를 위로하는 것도 아닌것같다,

어쩌면 내가 혼자 있는 것이 편한만큼 상대도 그럴것이라고 짐작했을 것이고 그래서 내편한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했던 것이었을 것이다.

나는 젊었고 여유가 있었고 언제든 사람속으로 들어갈 기회가 많았으므로 그때 나의 외로움이나 고독은 심각한 것이 아니었고 그저 치기어린 낭만주의였을 테지만 그의 나이먹은 외로움은 그 색채도 다르고 냄새도 다를 것을 알지 못했다.

그가 가고 그의 빈 책상을 바라보면서 그가 수줍은 사내였다는 걸 알아버렸다.

잘나서가 아니라 사람사이에 끼어드는 일이 두렵고 어색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젊어서 잘 했던 개방적이고 외향적인 것들이 어쩌면 살아가기 위해서 가정을 책임지기 위해서 짊어졌던 무게였다는 것,. 그래서 그 의무에서 벗어났을 때  내성적인 그의 본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것 그리고 본능에 반한 오랜 시간의 갈등끝에 자신에게 깊이 빠져버린 내성적인 행동이 결국 다시 상황에 따라 외향적이어야 하는 상황에도 머뭇거리게 했던 거였다는 걸 몰랐다.

비슷한 사람이 비슷한 사람을 알아보지만 오히려 비슷하다는 걸 아는 순간 그대로 모른 척 스쳐지나가는 잔인한 짓을 저지르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내성적이어서  공개된 공간에서 말하고 웃고 에너지를 쏟은 만큼 나만의 방에서 충분한 시간을 가질 시간이 필요한 건 맞다. 혼자 있는 시간이 어색하지 않고 혼자 먹는 밥 혼자 마시는 커피 혼자 보는 영화가 편하다는 것도 맞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내 어깨를 두드려주고 손을 내밀어 잡아주는 것도 좋아한다. 사람은 혼자가 편하다고 영원히 혼자 있을 수는 없는 일이므로...

그걸 아는 내가 그가 혼자가 편한 수줍은 사람이어도 누군가가  무언가를 요구하고 조르면 마저못하는 척 방에서 나올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알아주지 못했다. 아니 모른 척했다.'

 

책을 읽으며 내내 그를 생각했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그의 행동들이 하나하나 책속에 있었고 그 이유가 세심하게 서술되어 있었다.

그건 그의 모습이고 그리고 나의 모습이었다.

내가 받는 오해들이 그때 그가 받은 오해들이었고 내가 무시하는 것이 그가 무시했던 것이었다.

책의 글귀에서 내 모습을 보면서 위안을 받으면서 그가 그때 이 책을 읽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을 한다.

고개를 끄덕이며 스스로를 위로했을까

 

 

책을 읽으며 그가 그립다. 그리고 미안하다.

다음주 월요일은 그의 첫 기일이다.. 이 책이 그래서 내게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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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8 1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지금+여기 3
오찬호 지음 / 개마고원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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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이십대들에게 개인의 고통은 그보다 더한 고통을 이겨낸 누군가를 본받으면서 마땅히 참아야 할 것이 되어버렸다. 흥미로운 건 앞선 장에 등장한 이심대들은 한편으론 취업을 못하고 있는 자신들의 고통을 알아달라고 호소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 요구에 반대한다는 점이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일이  또 어디 있는가.  p92

 

 

 

고통에 대한 공감력이 떨어지면 필여적으로 툭정 대상에 대한 기존의 편견이 더 강화된다. 기실 "공감"이란 단지 함께 느낀다는 점에서 중요한 게 아니라 이를 시작으로 한 개인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의 오류를 발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권장된다. 그래서 타인의 상황을 깊고 넓게 이해할수록 당연히 타인을 섣불리 이렇다 저렇다 재단할 수 없는 이유를 발견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바로 이렇게 되는 걸 일컬어 '공감대가 넓다'고 하지 않는가

..............

이 경우 공감이란 '가난한 사람은 왜 맨날 저렇게만 살지?'라는 편견을 깨기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가난하 사람들의 생활습관을 문제삼아 '저렇게 사니 저모양이지'라는 식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저렇게 사는 건 가난이 제공한 결과이지, 한 개인의 가난을 만들어낸  원인이 결코 아니다. 좋은 데 뭇살고 좋은 움식 못먹으며 힘들게 살다보니 사람이 구질구질해지는 거지 그 반대가 아니다. p 94

 

아무리 아름다운 문장으로 치장된 그래서 읽기에 한없이 편안하게 씌였다 할지라도 그것이 자기게발서라면어떤 책이든 패자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는 내용이 넘쳐난다. 그 사람이 취업하지 못한건 이 때문이다. 그런 태도로 어떻게 승진할 수 있느냐 저렇게 사니 살을 못빼지.... 하는 식으로 실패의 원인을 구구절절하게 하지만 근시안적으로만 제시한다. 그만큼 패자에 대한 편견들을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다. 앞으로 확인하게 될 이십대들의 일상은 바로 이런 편견이 내재된 결과이다. 이는 가난한 것도 우울한 것도 다 자기잘못인데 왜 그걸 사회가 관심을 가져야 하냐는 식의 반문과도 직결된다.

 

 

패자에 대한 편견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이 클수록 비교적 안전한 '기존의 길'에 대한 선호 역시 커진다. 더 나아가선 그 길만이 가장 안전하다고 믿고 다른 길을 거들떠 보지도 않게 된다. 그리하여 '몇가지 길만이 당연한 길이 되고 그 외의길을 걷는다는 건 다 쓸데없는 짓이 되고 만다. 이런 생각이 ㄱ'그 외의 길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을 만들어내는 건 시간문제다. 다름에 대한 거부감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

 이는 자신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사회질서'에 어긋난 일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때로 강의시간에 이십대들이 사회적약자에 대한 연대의식이 부족하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면 '정치적으로 편향된 수업을 한다'는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기도 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모든 것의 책임은 개인에게 있다' ' 열심히만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등의 논의를 비판해본다는 생각을 잘 하지 못했다. 그래서 경쟁 시장질서 나아가 자본주의라는 체제를 조금이라도 비판하게 되면 일반적인 논쟁에서 더 예민하게 반응하며 비아냥거리기 일쑤다. 마치 금기의 말을 들었다는 듯이. p98

 

 

사실 대학서열화문제의 가장 큰 이유는 사람의 잣대를 학습역량(수능점수0만으로 줄을 세워 판단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능력을 판단하는 데 학습 역량은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다. 다른 역량들도 수없이 많다. 하지만 수능점수처럼 단번에 드러나거나 쉽게 확인되기 어렵다는 특징을 갖고 있을 뿐이다.

과거의 이십대들은 이러한 편견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고 그래서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흔들면서 사회 전체적으로는 어떤 균형을 맞춰주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이십대들은 과거의 이십대들이 삼십대가 넘어가면서 천천히 형성하던 생각들을 어차피 사회에 진출할것 이상 빨리 알아두면 좋은 가르침 정도로 자주 접하게 된다. 사회적 선행학습이랄까. 자기 계발서는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자기 계발서의 상당수가 성공한 직장인들의 입을 통해 미리알아두면 좋을 사회상식 달리 말하면 사회적 고정관념들을 전달하기에 바쁘다. 사회는 어쩔 수 없다. 사회는 무지막지하다. 그런 현실을 인정하고 미리미리 준비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기성새대의 오래묵은 편견은 그대로 전승되고 고착된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하자면

예전 대학졸업무렵 그간 연락이 없던 고등학교때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때 난 서울의 대학을 다니고 있었고 그 친구는 지방국립대를 다녔었다.

그땐 '지잡대"라는 개념이 없었고 나름 공부 잘하던 여학생은 아주 성적이 좋지 않은 이상 지방국립대로 몰리던 시절이기도 했다. 꼭 여학생만이 아니고 대부분이 연고대 이상 안될바에는 학비도 싼 지방 국립대로 가는 거였다.

그 친구도 아마 그렇게 부산대를 갔고 나름 공부를 잘 한 모양이었다.

그친구가 연락이 온 이유는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을 우리학교로 오고싶다는 거였다. 그래서 교수들이나 시험에 대한 정보를 부탁한다는 거였었다.

그때 난 진학은 안하고 취직을 하기로 결정했고 거의 취직이 되어가고 있던 입장이었다.

친한 친구들이 많이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고 있었기때문에 정보를 알아보는건 어렵지 않았지만 조금 귀찮기도 했다. 고등학교때는 친했지만 대학오면서 거의 연락이 없던 친구였기에 어색하고 귀찮았다.

그래서 대충 얘기했었는데 그때 그 친구의 말이 참 인상적이었다.

사실 우리전공이 우리학교가 대단한 건 아니었지만 나름 대학레벨이 있는 거일뿐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친구는 자기가 대학 4년동안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리고 그곳 교수들에게 얼마나 인정받고 있는지를 늘어놓았고 그래도 대학원은 큰 물에서 놀고 싶어서 우리학교로 진학하고 싶어한다고 했다. 왠만하면 자기 실력으로 붙겠지만 그래도 조금의 정보가 필요하다고 했던거 같다.

난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잘났으면 혼자 알아보면 되지. 아니 그 대학에 남아서 계속 공부해서 박사까지 하고 자리를 잡던지....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 그 친구는 떨어졌다. 그 다음학기에 다시 도전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우리 학교에는 오지 않았던 거 같다.

그 당시 함께 대학원 시험을 봐야헸던 과친구를 통해 그 고등학교 동창 이야기를 들었다.

부산대 나와서 너무 잘난체 하더라

여기를 무시하면서 왜 오려고 하는 건지..

지방대에서 여기오기가 쉬운줄 아나.. 떨어지는 건 당연하지

우리가 들어갈 티오도 부족한데 타교생 그것도 지방에서 온 학생을 어떻게 받아주나...

그냥 들었다

한편으로 그래도 친구인데 여기 서울내기들이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닌가 하는 반발심도 없진 않았지만 나도 내 과친구들의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 여길......

그때도 지잡대 라는  명사화가 되지 않았을 뿐이지 차별은 존재했다.

그건 차이가 아니었고 차별이었을 것이다.

나의 우월감도 차별이었고 기를 쓰고 자기를 피알하던 그 동창도 차별때문이었을 것이다.

책을 읽으며 그 친구가 생각났다.

억척스럽던 친구이니 뭐가 되도 되어 하고 있을 거란 생각도 든다

미안하다.. 도움도 못되고 나도 나쁜 마음만 가지고 있어서...

 

 

내가 읽는 자기게발서가 진정한 자기계발서가 되는 순간은 나도 그렇게 열심히 노력해서 뭐라도 되어있는 순간에 완성된다.

그렇지 않고 그저 그 책에서 씌여진대로 뭐든 열심히 준비하고 자기를 개발하는 과정속에서는 그 책은 아무것도 아니다. 자연훼손이고 종이낭비일 뿐이다.

그럼에도 누구도 그 자기계발서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지 못한 자기를 탓하고 자기 노력을 탓하고 책은 점점 신격화된다. 언젠가 완성될 나의 성공을 위해 그 책이 말하는 대로 우리는 따라가기에 급급하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이게 아닌게 아닐까 하는 불손한 생각은 급하게 머리속에서 지워야한다.

 

누군가가 노력했구나 정말 열심히 해냈구나 하고 인정하는 지점은 결국 그 사람의 결과물이다.

특목고를 가고 대학을 가고 취직을 하고 정규직이 되고 좋은 아파트를 가지고 높은 연봉을 받고 수치로 내밀 수 있는 무언가를 쥐고 있는 순간 그 사람은 정말 노력한 사람이 되고 어려움을 이겨낸 인간승리자가 된다.

이 책에서 말하는 것들이 단지 이십대의 문제만이 아니다.

우리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그들에게 스며들었던 것이고 이젠 두렵게도 십대들고 그 현실을 냉정하게 알고 있다.

그래서 결과를 쥘 수 없다면 차라리 노력도 하지 않겠다는 더 무시운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 측면에서 이십대는 보편적 가해자이자 피해자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가해자 역할응ㄹ 할 때 이들은 마치 정의의 이름으로 학살을 서슴치 않았던 십자군 원정대처럼 동년배들의 어떤 집단을 멸시한다(그러니까 자신보다 수능점수가 낮은 학교) 그래서 논랄 정도의 비논리적인 하지만 확신에 찬 학력차별을 과거에 비해 휠씬 노골적인 수위에서 공격적으로 전개하는 이들이 바로 오늘날 이십대들이다. ...................

이들은 동년배의 공격성이 가차없다는 걸 알기에 일단 자신이 멸시적 대상이 될 가능성을 먼저 차단하는데 익숙하다. 수능 시험을 망쳤다는 자기방어는 그렇게 탄생하는 것이다. 십자군 원정대가 칼을 들고 돌진하고 있으면 일단 피하는 것이 상책 아니겠는가 그게 정당한지 아닌지는 나중에 따질 문제다. 살아남기 위해 냉혹해져야 하는 현실 그 슬픈 현실을 모르진 않지만 이렇게 초라하고 치졸하게 변한 청춘이라니.. 무엇보다 더 슬픈건 이들이 바로 스무살 청춘이란 점이다. p 127

 

 

 책에서 저자와 대학생의 대화가 나온다. 그때 대학생들이 자기보다 서열이 낮은 대학에 대해 갗는 여러가지 편견들이 있다. 사소한 행동들 대화들 그 모든것이 대학생이 보기에 수준이 낮고 도덕성이 떨어지고 결국 그 모든 것은 서열이 낮은 대학에 다닐 수 밖에 없는 수능점수가 낮았던 조금 떨어지는 사람들의 특징처럼 표현한다. 이 모든 것이 자기가 가진 편견과 차별이라는 필터로 보고 있다는 걸 알지 못한 채로...

이 역시 이십대의 문제는 아니다.

나역시 그렇다.

자녀들 학원에 본낼때 그 학원 선생의 학력을 알아본다. 어느 대학 이상은 되어야 하고 어느 대학 이하는 어느정도 금액이상은 줄 수 없고...

어떤 학교가 명문인 이유는 그 학교 교사들이 다들 서울대 출신이라는 점이라는 것

외고를 다니고 좋은 대학을 다니는 학생은 다시 보이고 좀 더 과장하면 뒤에서 후광도 보인다는 우스개소리들

기왕이면 좋은 학교 나온 부모의 자녀랑 우리아이가 친하면 좋겠다는 허영심 그래서 교묘하게 물어보는 출신학교에 대한 질문 들들들...

어른들도 기성새대로 그들과 다르지 않게 그런 필터를 끼고 세상을 보고 서열화 한다.

일등부터 이백등까지.. 그리고 그이하는 정말 기타등등...

다만 저자는 모든 편견과 차별로 힘든 상황에 있고 불안한미래를 가진 그들이 함께 연대하지 않고 기성세대의 고정관념을 그대로 통용하고 더 확대 재셍산해낸다는 걸 경악하고 우려한다.

어쩌면 당연하다

사회가 모두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규정짓는데.. 그리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도태되는 현실이 바로 코앞인데 그들만 정의롭고 연대하고 함께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더 악착같이 매달릴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어쨌든 '저 친구보다 내가 더 나은 존재'임을 증명해야 하는 (자기 개발서가 강죠하는 바로 그것!!) 사회에서 이들은 타인과 작은 구별점 하나도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상대를 깍아 내리려는 강한 동기는 여기에서 나온다. p148

 

 

사회적 차별이 강한 나라일수록 명품에 대한 집착이 과도하게 나타난다. 값비싼 명품가방을 들고 다니면 최소한 경제적 부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오는 무시는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편에 맞지 않아도 과도한 소비를 통해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문화가 생겨나게 된다. 자신이 부족하다는 걸 그대로 보여줄 경우 온갖 편견에 가득 찬 시선이 날아올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야구 잠바를 입지 못하는 저 친구들도 자신들의 학교 이름을 대놓고 드러냈을 때 어떤 취급을 받을 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저 충청도 소재 대학의 학생들이 자신보다 수능 배치표에서 낮은 대학의 학생들을 향해 '우리 함께 이 더러운 학력주의의 세상을 이겨내자"고 손을 내밀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 학력위계주의의 구조는 구성원의 적극적인 참여 없이는 유지되지도 확대 재생산 되지도 않을 것이다. 누군가를 멸시했다고 멸시를 받지 않으리란 법도 없듯이 자신이 멸시를 당했다고 누군가를 멸시하지 않을 이유도 또 없다.  p 164

 

 

초등교실에서의 왕따는 조금 촌스럽게 드러난다., 누군가가 눈에 띄고 재수없고 잘난척하면 왕따 대상이 된다고 한다. 튀지말고 가능한한 묻혀서 지내라... 고 부모들은 말한다.

한번 왕따를 당한 친구가 다시 학년이 바뀌고 입장이 바뀌어 왕따를 시킬 수도 있다.

이런 현상은 중학교까지 지속된다. 가장 이드가 활발한 시기라 누구도 건드릴 수 없고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그 질풍노도의 시기에는 순수해서 잔인한 초등시절과는 또다른 양상을 띈다.

알면서 모른 척 할 수도 있고 자존심을 죽이고 살기도 하며 견딘다.

그리고 고등시절은 앞에 닥친 수험생활로 조금 잠잠해지기도 한다고 한다. 성적의 압박이 더 크기도 하고 이젠 조금 유치해지기도 하고..

그리고 대학을 가면 이젠 촘촘하게 줄지어진 서열로 왕따가 생기는지 몰랐다.

어쨌든 같은 캠퍼스면 다 같은 입장이 아닌가 하고 순진하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촘촘한 배열은 단시 수능철 입시철에만 반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부터 평생을 따라다니는 주홍글씨가 된다는 걸 지금 알았다.

학창시절 왕따는 누군가에게 하소연 하거나 도움을 청할 수 있고  선과 악이 구분된다는 점에서 참 순진한 거였다.

사회가 묵인하고 모두가 알고 있는 계급에서 학벌이 주는 의미는 어디 가서 하소연 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내가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이고 내가 노력하지 않은 것이라는 나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눈길말고는 내가 얻을 것이 없다.

그냥 묵묵히 그 순서를 지키고   절대 추월하지도 않는 복종만이 남아있는 셈이다.

 

............우리가 흔히 정당한 대가라고 생각하는 것이 상당부분 자기 것이 아닌 요소에 영향을 받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개인의 능력과 의지는 그 사람 개인의 것이라고 흔히 생각하지만 샌델이 말하듯  결코 그렇지 않다. 첫째로 태어난 것이 성공에 큰 영향을 주는가 하면 더 좋은 집안에 태어나거나 좋은 집안에 태어나는 것은 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물론 아버지를 잘 만난 것은 죄가 아니다. 다만 그 덕에 공부를 더 잘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능력주의만 강조하면 그 덕이 없었던 사람은 도데체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p 211

 

지금 기말고사기간이다. 아이에게 시험공부 열심히 하라고 닥달한다.

이제 중학생이고 곧 고등학생이되는데도 아무 생각도 없어보이는 아이가 불안하다. 남들처럼 친구 아들 딸처럼 자기가 특목고를 외고를 가고 싶어하는 욕심도 없고 그냥 일반고로 가겠다고 하고 하고 싶은 공부도 모르겠고 나중에 뭐가 되고 싶은지 알 수 없다고 우는 아이를 보면 안쓰럽기보다는 답답했다. 그러다 세월호가 터졌고 그저 살아있고 건강한게 감사해서 며칠을 두고 보다가 다시 시험을 앞두고 말은 못하고 혼자 끙끙거리고 있는 중이다.

작은 아이가 어버이날 편지를 줬다.. 이런저런 글귀끝에 한마디가 있었다.

"절대 엄마 아빠보다 먼저 죽어 슬프게 하지 않을게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이 아이에게 우리가 무얼 해야하는지 .. 막막하다.

살아있는것이 행복이게는 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죽지 못해 살아가고 경쟁으로 말라가고  어쨌든 최선을 다했는데도 결과가 좋지 않아 앞날을 막히는 일따위는 없어야 하지 않은가.

못해도 되고 다시 해도 되고 조금 적게 벌고 먹고 살아도 내가 좋을 수 있는 세상은 과연 오기는 할까

세상이 엉망이고 그래서 젊은이들에 힘들다고는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의모순되고 부끄러운 생각들이 그들에게도 깊이 스며 있을지는 몰랐다.

나중에 우리 아이도 패배감에 젖어 살지 모른다.

지금 내겐 아이에게 물려준 금전적인 자산도 없고 휼륭한 정신정 모토도 없다.

그저 이 세상에서 엄마나 아빠보다 조금은 더 현명하기를  대책없이 바랄 뿐이다.

책을 덮고 막막하고 눈물이 난다. (이건 절대 음주후에 오는 습관때문은 아니다)

몇년후 내 아이가 느끼고 겪게될 패배감이 이 책에 고스란히 있다.

 

세상이 좋아져서

내가 실패하고 좌절하는 것이 모두 내가 덜 노력했고 내 책임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되면 좋겠다.

그리고 엉덩이 툭툭 털고 일어나 또 해보지 뭐.... 하는 그런 세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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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 민음인 입니다.

민음인 신간 <축제 여행자> 서평단을 모집합니다.

 


"지금, 즐거운가요?"


지구촌 구석구석 축제의 마당에 뛰어들다!

『축제 여행자』





브라질 리우 카니발, 독일 옥토버페스트, 일본 삿포로 눈꽃 축제 등 세계 3대 축제를 비롯해 모든 뮤지션이 꼭 한 번 공연하고 싶어 하는 영국의 글래스턴베리 페스티벌, 모두가 빨강이 되는 토마토 축제 라 토마티나 등 지구촌 구석구석의 특별한 축제를 찾아다닌 30대 여자의 여행기를 기록한 색깔 있는 포토 에세이입니다.


이 책은 여행지에서 만난 아름다운 풍경과 멋진 만남, 설렘과 낭만만을 다루지 않습니다. 저자는 여행의 쓴맛 단맛, 설렘과 아쉬움, 축제의 역동적인 현장과 파하고 난 후 남는 추억과 소소한 이야깃거리들을 책 속에 소담스레 담아냅니다.





“모든 여행자는 각자의 추억을 만들며 여행하고, 또 다른 사람들의 추억이 깃든 곳에서 자기만의 추억을 만든다. 같은 곳을 여행해도 각자의 추억은 모두 다르다. 마치 지하철 환승역처럼 우린 서로의 길이 겹치는 곳에 있지만 어디서든 서로 다른 추억을 품고 떠난다.” - 책 속에서



▶ 추천사


“작지만 당찬 배우, 주어진 것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

축제와 한지혜는 참 잘도 어울린다.

그가 밟았던 길을 따라가면 우리도 그처럼 활짝 웃을 수 있을 것이다.”

- 송승환(공연 제작자)



“최고의 장소에 가면 뭐하겠습니까.

그곳에서 즐길 줄 모르면 소파에 누워 티브이 보는 것과 다름없겠지요.

즐거움은 즐길 줄 아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 아닐까요.


진정 즐길 줄 아는 한지혜 작가가 이 책으로

축제 구석구석의 즐거움을 전해 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 정성화(뮤지컬 배우)



▶ 『축제 여행자』 서평단 모집 상세내용


하나, 해당 페이지를 자신의 블로그에 스크랩 한 뒤 읽고 싶은 이유를

간단하고 성실하게 댓글로 작성하여 스크랩 링크와 함께 남겨주면 응모가 완료됩니다.


둘, 응모 기간은 2014년 06월 24일(화)~2014년 06월 30일(월) 6일간 입니다.


셋, 총 추첨 인원은 10명입니다.


넷, 당첨자 발표일은 2014년 07월 2일 (수) 오후 입니다.


다섯, 서평기간은 2014.07.07(월)~07.14(월) 7일간입니다. 

        

마지막, 당첨자 분들은  서평을 작성 한 후 『축제 여행자』 서평단 발표 페이지에

온라인 서점 블로그와 개인블로그에 남기신 서평 링크를 댓글로 달아주시면 됩니다.

 

 

- 서평단 지원자가 모집 인원에 미달할 시,

출판사의 의도에 따라 일부 인원만 선정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해당 기간 안에 작성하지 않을 시에 다음 서평 모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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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와 헤리엇은 그 시대에서도 정숙하고 건전한 연인이었다.

방탕하고 자유로운 연애시대에 자신들의 신념을 고수하고 결혼을 하고  이상적이고 안정된 가정을 가지기를 소망했다.

커다랗고 방이 많은 집에서 방마다 가득한 아이들을 갖고 집에는 햇살이 가득하고 웃음이 끊어지지 않고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에는 집안 가득 사람이 넘쳐서 행복한 기운이 끊어지지 않은 집

두 사람은 그런 가정을 꿈꾸었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하나 둘 셋 넷을 낳았다.

그 동안 아무탈 없이 그들이 꿈꾸는대로 살아갔다.

큰 집과 많은 가족을 부양하기엔 아직 젊은 부부들은 부자인 데이비드의 아버지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혼자 사는 헤리엇의 어머니에게 양육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사실 완전하고 행복한 가정에 대한 꿈을 꾸었지만 그걸 독립적인 힘으로 부양할 능력은 없다는 것이 이들의 첫번째 문제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중요치 않게 생각했고 그 자랑스러운 가정을 집을 가졌다는 것을 누리기에 바빴다.

그러나 다섯째 아이가 생겼다.

그 아이는 태어나기 전부터 헤리엇을 힘들게 했고 무언가 이질적인 물체가 자신과 접속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임신 내내 이물감과 불안감에 시달렸다.

그리고 열달을 채우지 않고 다섯번째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는 전에도 앞으로도 볼 수 없을 만큼 끔찍하고 이질적인 괴물이었다.

그런데 사실 다섯번째 벤이 무엇이 어떻게 이상하고 두려운지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힘이 쎄고 작지만 단단하고 무언가에 집중하고 어딘가 원시적이고 본능적인 벤

화목한 가족은 벤 하나의 등장으로 공포스러워지고 어색해지고 두려워진다.

다른 아이들은 벤을 슬슬 피하게 되고  친척들은 핑계를 대고 이들의 집을 방문하지 않는다.

아이때문에 가정이 위태로워지자 데이비드는 아이를 요양원에 보내기로 결정한다.

요양원이지만 살아 이별이고 절대 다시 볼 수 없음을 모두는 안다.

벤이 떠나고 가정에는 평화가 찾아왔고 가족은 다시 옛생활로 돌아간다.

하지만 헤리엇은 자꾸 벤이 떠오르고 그 아이를 그렇게 둔다는 것이 걸린다.

결국 빗길을 달려 벤을 만나러간 헤리엇은 벤을 데리고 돌아온다.

그대로 둔다는 건 아이의 죽음을 방치하는 것이고 내 손을 더럽히지않아도 아이를 없앨 수 있는 기회라는 걸 알면서도 아이를 데리고 온다.

헤리엇이 엄마라서 아이를 데리고 왔을까? 두려움도 이길 수 있는 모성때문에?

하지만 헤리엇에게는 벤뿐 아니라 나머지 네명의 아이가 또 있다.

벤을 데리고 가자면 벤은 죽지 않겠지만 다른 아이들은 공포감에 다시 싸이게 되고 가족은 행복히지지 않을것이다. 하지만 나머지의 행복을 생각하게되면 벤이 죽어야한다.

그 사이에서 헤리엇은 다른 생각없이 벤을 선택한다.

그리고 예상대로 가정은 망가진다.

다시 친척들의 방문은 끊어지고 아이들은 자라면서 집을 떠나버리고 남편은 일에 파묻힌다.

헤리엇과 벤만이 집에 남았다. 아니 막내 폴이 아직있긴하다.

폴은 벤으로 인해 엄마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 그래서 조금 불안하고 예민한 아이다.

행복하고 보여지는 가정을 원한 헤리엇에게 벤은 무엇이었을까

그 아이를 데리고 가면 헤리엇이 꿈꾸던 완벽한 가정은 무너진다. 그럼에도 헤리엇은 벤을 데리고 가지만.... 어쩌면 보여지는 것에 매달리는 헤리엇으로서는 벤으르 데려가는 것도 하나의 보여지는 무언가가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헤리엇의 불안대로 가족은 해체되고 서서히 무너진다.

여전히 헤리엇은 벤이 사랑스럽지도 않고 미안하지도 않고 그저 길들이고 다루어야 할 존재일 뿐이다.

겁을 주고 협박을 하면서 관리하고 관찰하고 통제해야할 대상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 벤은 언제나 불길한 예감을 뿌리고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지만 무언가를 하는 것은 없다. 간혹 위협적인 행동을 보이기는 하지만 이야기가 끝날때 까지 누군가를 정말 해한 적은 없다. 그저 이질적이어서 두려울 뿐이었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존재가 나타났다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두려울 수 있다는 걸 책은 충분히 보여준다. 뭐라고 묘사하는 건 아닌데도 분위기상 꼭 벤이 지금 무언가를 저지를거 같은 예감을 가지게 한다. 내가 벤을 모른다는 것 도무지 내 상식과 내가 사는 세상의 질서와는 전혀 다른 벤이라는 것이 두려울 뿐이다.

헤리엇도 데이비드도  다른 가족도 그렇다.

데이비드는 그리고 다른 형제는 그냥 벤을 무시하고 외면하고 만다.

사람들이 그렇다. 두려움을 마주하면 일단 가능한한 고개를 돌리고 무시한다. 그래서 넘어갈 수 있다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피할 수 있을 때까지는 피하자.는 생각

그러나 헤리엇은 벤을 안을 수도 없고 외면할 수도 없다.

통제하고 위협하면서도 돌보고 누군가가 벤에 대해 자기와 같은 감정을 가지길.. 누군가 자기를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의사도 교사도 벤이 보통 아이와는 다르지만 비정상은 아니라고 한다. 그건 헤리엇에게 전혀 도움이 되는 말이 아니다.

벤은 이상하고 기묘한것이 맞고 그 벤을 포기하지 않은 헤리엇을 동정하고 위로해야하는데

가족들과 친척은 헤리엇을 마녀처럼 대하고  타인들은 헤리엇을 모성이 없는 어미로 대할 뿐이다.

낯선 존재를 이해한다는 건 정말 쉬운 것이 아닌데.. 헤리엇은 혼자 궁지로 몰리고 위로받지 못한다. 낯선 존재.. 그것이 내 뱃속에서 나온 아이라도 두렵고 낯선 누군가는 꺼려진다.

그 사이 벤은 자란다. 존을 만나고 데릭을 만나며 자신을 바꾸지 않고 본능에 충실하면서 어떤 무리를 만들어간다. 그리고 나중에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헤리엇은 끊임없이 불안하게 벤을 관찰하지만 벤에게 동화되거나 이해하거나 교감할 수는 없었다. 그게 헤리엇의 비극이다.

남편이나 다른 자녀가 헤리엇에게 거리를 두는 것만큼 헤리엇도 벤에게 거리감을 둔다.

피할 수없지만 마주할 수도 없는 딜레마속에 헤리엇은 빠져있다.

이미 헤리엇과 데이비드가 꿈꾸던  가정은 사라졌다.

그런대도 헤리엇이 잡고 있던 건 무엇이었을까

 

 

예전에 열심히 본 드라마가 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외딴 곳에 위치한 명문 고등학교가 있다. 겨울방학이 되어 모두 집으로 돌아간 뒤  기숙사에 남은 아이들과 갑자기 내린 눈사태로 조난을 당해 이 학교로 피해온 정신과 의사와의 이야기다.

외딴곳 어디와도 연락이 되지않는 학교에서 아이들 사이의 갈등도 있고 외부에서 온 의사도 수상한 조금은 으시시한 드라마였는데 그 드라마에서 끊임없이 제기하는 문제가 그럿이다.

악인은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

그 드라마에서는 악인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라 기억되는데...

지금 책을 다 읽고 드는 생각은 악은  누군가의 편견이나 무지로 인해 탄생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거다. 벤은 태아부터 헤리엇이나 다른 가족들에게 이질적이었고 태어나서 보여지는 모습에서는 경악이었고 그래서 악이라고 규정되었다. 왜냐하면 벤은 데이비드와 헤리엇의 다른 네아이와 다르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고 그들 가족이  그 커다란 집에 모이는 다른 누구와도 다른 존재라는 것이 유일한 이유이다.

악으로 태어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첫대면에서 벤을 무어라 규정지어버리는 그 가족들에 의해 벤의 정체성이 결정되어지는 것이다.

벤은 헤리엇이나 데이비드가 꿈꾼 가족에는 어울리지 않은 존재였으므로 그리고 그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한 존재이므로 악이고 괴물이 되는 것이다.

방이 많은 따뜻한 집안 넓은 식탁에서의 가족끼리의 소통 웃음과 행복 북적이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발소리들을 깨어버리는 존재로 벤을 규정하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이해하지 못하게 될때 괴물은 자란다.

괴물은 태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알 수 없는 힘이나 원리에 의해 악이나 괴물은 태어나기도 하겠지만

그 악을 키우고 발전시키는 것은 결국은 사람들 사이의 편견과 편가르기가 아닐까

그 명문고의 머리좋은 아이들도 스스로의 울타리에서는 벗어나질 못했다. 내 생각이 너무나 명확하고 틀린 곳이 없다보니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것이 불편하고 서툴러서 서로를 의심하고 무시하며 악을 키웠던 것다. 그리고 그들만큼 똑똑한 정신과 의사의 교묘한 술수에도 쉽게 넘어갔기도 하고..

행복이나 이상적인 가정에 집착했던 헤리엇이 만든 것이 결국 벤이 아니었을까

벤이 무엇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막연한 공포의 대상으로만 여겨질지 정말 무언가 확실한 악행을 저지를지도..

그저 모르는 우리는 무엇이 일어나기도 전에 겁을 집어먹고 나와 다른 존재를 타자와 하고 울타리 밖으로 밀어낼 뿐이다.

 

나와 다른 누군가를 알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것에서 관심이 나오고 관심을 가지면 애정이 생긴다 그리고 이해되면서 그는 나와 다른 것이 아니고 나와 함께가 되는 것이다.

다른 여럿이 모여 우리가 되는 것처럼 나와 다른 누군가를 바라보고 관심갖는 것에서 우리가 시작된다.

하지만 나와 다르다는 것만 보고 그대로 고개를 돌리면 그곳에는 언제나 두려운 타인이 있을 뿐이다.

(헤리엇은 바라보지만 그냥 보는 것뿐이다.벤을... 왜 다르지? 저 다른 것이 어떻게 될까.. 그 생각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다른 가족은 그냥  고민조차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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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입장이 되어보기전에  알 수 없는 일들이 많다.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 보면 새롭게 보이는 일들도 많을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말이지만 실천이 힘들다.

사람은 때로 알고 있지만 행하지 않은 일들이 많다.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거나 현실은 이론과 다르다거나.. 혹은 맞지만 눈치껏 세상을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타인의 입장을 무시하거나 애써 모른 척한다.

 

세상에는 지는 걸 뻔히 아는 싸움이 있다. 진다는 걸 알지만 그만 둘 수 없는 싸움이 있고 끝을 알지만 시작해야하는 일들이 있다. 누군가는 멍청하다고 하거나 바보같다고 할지 모르지만  지금 내딛는 작은 발걸음이 시작이 되리라  믿어야 할때가 있다.

누군가 이 발걸음을 보고 길을 따라 올거라고 믿는것

세상에는 보이지 않아도 가야할 길이 있다.

 

부모로서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먹이고 입히고 편하게 쉴 수있게 하는 일 말고는 더이상은 없다는 생각을 들 때가 있다. 아이를 바른 길로 인도하고 배우게 하고 키워내는 것은 나 개인의 역량 밖이라는 생각이 종종 들 때가 있다. 부모가 된다는 것도 시험을 통해 자격을 줘야하는게 아닐까 싶을 만큼 막막하고 힘들때가 있다.

하지만 결국 이 책에서 아버지가 보여주는 것 그것에 답이다.

남매의 아버지는 아이들의 질문에 정성껏 대답한다. 하지만 그 이상 아이들을 통제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행동할 뿐이다.

아이는 어른의 등을 보고 배우고 결국 열마디 말보다는 한번의 발걸음이 아이를 가르친다.

알지만 잊고있었고 쉽지 않아 모른 척 했을 뿐이다.

 

내 아이가 이 책을 읽으면 좋겠다.

첫 부분의 가계도 비슷하게 나오는 부분과 비슷비슷한 사람들의  이름이 혼란스럽기는 하겠지만 그 부분을 참고 넘기면 이야기는 쉽게 전달되고 몰입된다.

그리고 스카웃의 시선으로 보여지는 상황들이라 이해가 쉽기도 하다.

아이의 시선이라는 것이 편한 이유는  모든 것이 사실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라는데 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고 내가 알고 있는 수준에서 설명되어지는 이야기들은 솔직하고 편안하게 다가온다. 눙치거나 돌려 말하지 않고 있는그대로의 진실을 보여준다.

편견을 갖지 마라.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

그리고 세상에 내가 무시해서 좋을 인간이란 없다.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은 노래하는 앵무새를 죽이는 것은 나쁜 일이다. 그가 사람의 말을 한다고 기분나빠 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그렇게 나와 소통가능함이 다행이지 않은가...

 

정의에 대해   우리가 살아가는 것에 대해 어떤 책보다 좋은 책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미국적인 배경에서 씌여진 지극히 미국적인 사건의 이야기지만 지금 현실에서도 보편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나는 구판 (한겨레에서 나온)을 가지고 있는데... 번역이 너무 엉망이다.

새로 나온 책은 어떤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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