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미가 급한 탓일 수도 있다.

아니면 내가 뭐든 결정해야한다는 꼰대기질이 있어서일 수도 있다.

아이에게 늘 이렇게 묻는다.

"이거라 저거 중에 뭐할거야?"

"이렇게 할거야? 아니면 저렇게 할거야?"

그래놓고 아이가 내켜하지 않으며 몸을 배배 꼬면 또 한 번 더 질문이 들어간다/

"엄마는 물어봤다. 니가 선택해야지."

아이는 마저못해 선택한다. " 이거 (혹은 저거)"

"니가 결정한거야.'

분명 아이에게 결정권을 줬고 최후의 선택은 아이가 한 거지만  아이는 뭔가 마뜩치 않고 속은 기분이고 분하고 억울한 마음이 든다. 이건 아닌거 같은데

그리고 나중에 이런 질문에 부딪친다

"니가 선택한거잖아. 내가 분명히 물어봤지? 니가 정하라고"

그리고 모든 책임은 아이에게... 어른인 나는 아이에게 결정권을 줬고 그 결정에 대한 책임을 느낄 수 있도록 교육하고 이끈 참된 어른이 될까?

 

동의를 했느냐 아니냐는 문제는 간단치 않다.

세상에 모든 질문에서 세상의 모든 결정앞에서 백프로 나의 의견과 나의 입장과 나의 감정과 나의 이성으로 결정할 수 있는 상황은 얼마나 될까?

반백인 나도 나의 지난 인생을 돌이켜보면 나의 결정이 정말 나의 결정이었을까 싶은 순간들 투성인것을....

사회적인 인식에 밀려서 이런게 정상이라는 사회적인 잣대에 밀려서

그래도 지식인인데 싶어서 내 본능과 상관없는 선택도 있고

남의 눈을 의식해서 어쩔 수 없이 골랐던 적도 있고

좋은 게 좋은 거지.. 다들 괜찮다는게 괜찮은 거 아니겠어? 라는 마음으로 한 결정도 있고

눈을 부라라진 않아도 무언의 압박과 내일 점심 도시락 반찬 걱정으로 내 용돈 삭감의 공포로 한 결정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하는데 이 정도는 괜찮은 거 아닐까? 내가 너무 까탈스럽고 이기적인 건 아닐까 하는 갈팡질팡하는 마음에  이런게 사랑이라는 압박에 내린 결정들 등등등

전날은 호쾌하게 내린 결정에 대해 다음날 마음을 바꾸는 것이 옳지 않다는 알 수 없는 자기 검열에 걸린 적도 있고 ....

동의는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다.

삶의 순간순간 내가 결정해야하고 상대와 의견을 맞춰야 하는 일에서 모든 것이 나의 졀정권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

점심 메뉴마저 그냥 남들 먹는대로 하는 마음으로 결정하는 게 많은데

여러가지 권력문제가 걸리고 사회적 입장 문제나 통념들이 뒤섞이면 내가 내 결정을 믿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동의는 중요한 문제다.

성적동의 역시 그렇다.

강간신화가 아직도 존재하고 그래서 강간문화라는 것이 그냥 장난처럼 암묵적인 풍조처럼 아직도 존재하는 지금  이다. 내가 강간을 당했음을 내가 입증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내가 전혀 동의하지 않았음을 보이는 증거로 들이밀지 않으면 쉽지 않은게 아직도 현실이다.

 

성적 동의는 나와 상대방의 신체적 자율권을 존중하는 것이다. 타인에게 마땅히 보여야 하는 신중함과 배려를 바탕으로 상대방을 대하고 내가 그런 것처럼 성 관계를 맺을 의사가 상대방에게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나의 신체 자율권을 행사하고 싶다면 당연히 타인의 신체적 자율권을 존중해주어야 한다.

모든 관계가 그렇지만 성관계 역시 상호 교류이기 때문이다.

 

섹스는 온몸으로 겪는 일이다. 동의 협상이란 이 가능성의 공간을 탐색하는 것이다. 나의 상대방이 각각 성적으로 즐거움을 느끼는 것들 중에서 공통괸 부분을 찾아야 한다. 때로는 공통된 부분이 없을 수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고 서로의 성적관심사를 공유할 수 없을 수도 있다. 나를 좋아하지만 지금 당장 내가 하려는 것을 상대는 하기 싫을 수도 있다. 동의는 그렇다. 내가 상대와 함께 즐길 수 있는가? 즐거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가 이런 것들을 맞춰가는 과정이다. 섹스든 다른 관계든 타인과 맺는 사이에서 한 쪽 일방만 즐거우면 그건 즐거움이 아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혹은 서로 호감을 가진 사람이 함꼐 즐겁고 함께 좋은 경험을 나눠야 한다. 그렇다면 동의는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나의 즐거움만큼 상대의 즐거움도 존중하는 마음 그것이 동의의 시작이다.

 

경계는 내가 괜찮은 것과 괜찮지 않은 것들 사이에 놓인 선이다. 성적 상황 뿐 아니라 여타 사회적인 상황, 타인과의 일상적인 관계에도 관련이 있다. 실명을 공개하고 싶지 않은 마음. 소규모 그룹은 편하지만 불특정 다수의 모임은 불편한 마음 어떤 음식을 싫어하는 것 포옹보다는 악수가 더 좋은 것 개인이 자기 삶에 설정해놓은 사적인 경계들이다.

사실 내 경계를 아는 일은 무척 까다롭고 어렵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사실 그건 어려운 일이다. 남들이 좋아하는 것이라 나도 좋아하는 줄 알았고 마땅히 해온 것들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불편하고 불쾌하지만 그걸 내색하면 예민하고 이상하게 보일까 말하지 못하는 것 그런 부분이 누구나 있지 않을까? 남이 어떻게 볼까 내가 이상한가? 문제가 있나 하는 마음에 내 경계를 타인에게 관습에 맞추는 일들....

경계를 알아간다는 건 시간이 걸리는 묹이지만 그건 알아야 한다. 혼자 정할 때도 있지만 자신의 경계에 대해 타인과 이야기해야만 개인의 자율권 행사와 사회적 규약 존중 사이의 갈등을 조정할 수 있고 서로의 경계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공간이 생긴다.

무례해 보일까봐 밀어붙이고 경계로 들어오는 것들을 허용한다면 ... 나의 불편함이 너의 무례함이 아니라 나의 까탈스러움이라고 하는 것들도 있다. 결과가 두려워서 그냥 용납하는 경우

그건 나의 신체적 자율권을 포기하는 일이고 상대의 신체적 자율권을 무시하는 일이다.

 

우리가 아는 섹스는 섹슈얼리티는 참 단순하다.

서로 좋아하고 손을 잡고 안고 스킨쉽을 나누고 키스하고 그리고 성기결합으로 이어지는 직선적인 과정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 사이에 다른 무엇이 끼어들 틈이 없고 단지 모든 단계는 성기결합을 (이성애자 남녀사이의)위한 전제조건일 뿐이다. 그렇게 이해되는 섹스에서 동의가 끼어들 곳은 단 하나 성기를 결합하느냐 마느냐 그것 뿐이다. 이런 이성애적인 담론과 함께 남자는 동물이고 흥분을 하면 참을 수가 없는 존재라는 남성성욕담론은 남성의 강간을 이해하고 어쩔 수 없다고 관대해질 핑계가 된다. 그렇다면 여성은? 남성보다 성관계에 소극적이고 안정적인 애정관계에서만 끌리는 요조숙녀라는 틀은 모든 섹스의 결정은 여자가 가진 것처럼 보여진다. 흥분앞에 제정신이 아닌 남성을 잘 구슬러서 안정적인 애정으로 관계를 해야하는 의무와 책임은 여성에게 있다고 본다. 그러니 그런 관계 이외의 모든 섹스는 음탕한 여자라는 낙인으로 이어진다.

흔히 비유되는 성녀와 탕녀의  두가지 뿐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자유연애가 등장하고 남성과 다르지 않은 성적 결정권을 가지는 적극적이고 현대적인 여성이라는 담론에서 모든 관계에서의 책임은 신여성인 그녀들에게 돌린다. 소극적이면 구태의연한 것이고  적극적이라면 신여성이라고 치켜세우면서도 뒤돌아서서는 성녀와 탕녀의 담론을 들이댄다

 

성적 결정권이라는 것 이것이 자율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관계에는 권력이 존재하고 권력은 다각적이고 다차원적이다. 명백히 자율적인 개인의 선택이란 쉽게 가려지지 않는다.

 

이 책은 성적 동의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결국 동의란 성적인 문제 이외의 부분으로까지 확장되어야 하는 문제다. 우리의 일상 전반에 침실 바깥의 상호관계에 진정한 동의 문화는 필요하다. 동의는 친구, 가족 동료 모르는 사람과의 소통에서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아이에게 동의를 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이는 어리고 도움이 필요하고 아직 세상의 결정을 내리기엔 미숙한 존재이기 때문에 먼저 살고 많이 알고 많이 경험한 나읙 결정이 절대적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게 옳다고 얄량한 나의 권력을 휘둘렀다.

그리곤 주관대로 쥐어준 선택을 들먹이며 책임으로 옭가묶었다.

동의를 경험하지 못했고 동의를 배우지 못했다면 아이는 자라서 또다시 누군가에게 동의를 앗아갈 것이다. 그렇게 자랐으므로..

내가 편안한 경계에 대해서도 알지 못할 것이고 누군가 내 영역을 침입해도 예의라거나 사회 문화라는 이름으로 용납하고 참고 견딜 것이고 폭력으로 이어지더라도 그런 상황까지 몰고간 나의 탓으로 모든것을 돌릴 수도 있다. 그리고는 어디선가 폭발하고 누군가에게 그렇게 폭력을 가할 지도...

 

가장 기본이지만  늘 잊고 사는 것

편하고 쉽고 당연한 것이라고 믿고 그냥 밀어붙이는 관계는 위험하다.

간혹 느끼지만 당연한것이 가장 위험한 것이다.

동의에 대해 오래 생각해본다.

 

책은 처음에 많은 기대를 갖게 했다. 쉬운 말로 동의를 설명하고 쉽게 풀어가서 좋았는데

사실 그게 전부라 아쉽기도 하다.

다만 동의란 무엇보다 중요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걸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음은 확실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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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교실에 들어오다 - 학교 안 혐오 현상의 실태와 대책
이혜정 외 지음 / 살림터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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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지금 어떤 시민을 길러내는가?

학교는 모든 구성원에게 안전한 학습의 공간인가?

학교는 한 사람의 학생도 차별없이 안전하게 교육받을 수 있도록 누구도 포기하지 않는가?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권리와 창구가 존재하는가?

 

학교의 지배적 패러다임은 여전히 학업성취 대학입시 교육의 성과와 능력주의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소수자의 문제는 여전히 소주의 문제이며 주요 핵심이 아닌 논외거리일 뿐이다.

 

 

학급에서는 학업성취나 온라인 게임에서의 능력 좋은 성취를 얻지 못하는 것 모두가 혐오의 대상이 된다, 무엇인가를 잘 못하는 것이 혐오의 잉가 되는 학급 문화는 일의 과정보다 결과를 중요시 여기는 문화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다만 무능력이 곧 혐오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인기가 많은 남학생은 성적과 상관없이 학급내 상호작용에서 우위를 점한다. 학교의 공식적인 질서와 학생들간의 비공식적인 질서가 서로 복잡하게 얽히면서 누군가는 어떤 특성 때문에 혐오의 대상이 되지만 누군가는 그렇게 되지 않기도 한다. 따라서 혐오의 대상이 누구인가 보는 것은 그 집단의 특성이 아니라 학교와 학급의 질서에 주목하는 논의로 연결되어야 한다.

 

학생들사이의 엄마혐오의 의미를 담은 다양한 욕설이 만들어지고 유포되는 것은 그것이 인신공격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혐오의 표현을 담은 욕설이 얼마나 나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몰라서 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나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쓰는 것이다.

학교내의 혐오가 친한 사이에서 장난이라는 명분 하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보니 학생들은 강도가 세고 공격적인 혐오표현을 듣고도 문제제기를 하기 쉽지 않다. 장난스러운 분위기로 모두가 웃고 넘기는 상황에서 정색하는 것은 쉽지 않다. 더욱 심각한 것은 혐오표현이 친구들과의 대화에 끼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엄연히 혐오 표현의 한 방식임이도 불구하고 '장난'이라며 가볍게 치부되고 혐오 현상에 대한 문제제기가 또 다른 놀림거리가 되는 문화는 학생들 자신이 혐오 현상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스스로 살필 수 있는 기회를 구조적으로 차단하고 이에 대해 적절히 대응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학생들은 자신이 들은 혐오 표현을 그냥 마음에 담아두거나 자신이 못 생긴 것을 인정하기도 한다. 심지어 자신이 혐오를 당하는 상황에서도 같이 도오하여 웃기도 한다. 이러한 문화는 학생들이 혐오를 당하거나 혐오상황을 목격하고도 이를 회피 무시 동조하는 것과 무관하지않으며 학교안 혐오 현상이 계속해서 유지 재생산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혐오상황에 정식으로 문제제기를 한다면 오히려 더 힘든 일이 생길까봐 두려워 하는 마음이 혐오 상황을 무시 또는 회피하게 만든다.

 

학업성취 중심의 학교문화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 쉽지 않고 능력이 부족하고 노력하지 않는 존재에 대해 혐오를 낳을 가능성이 높다. 학생들이 이런 혐오현상을 반복하여 경험하게 되면 혐오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이다. 학생들은 다른 학생들과 다르게 행동하는 것을 지양하고 다수의 학생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행동과 말을 선택하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정상이라는 것은 원래 그러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인정하고 유포하는 임의적인 것이다.

 

학생들은 의도적으로 차별적 사고를 한 뒤 혐오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혐오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약자를 마음껏 혐오하는 사고를 가지게 된다.

 

 

학교안이 혐오는 약자를 향한다는 것은 맞지만 그 약자라는 존재가 다양하다. 그것이 성별일 수도 있고 학업능력의 차이일 수도 있고 다문화, 다양한 형태의 가족, 신체적조건 경제적인 조건등등 다양하게 존재한다. 그리고 그 상황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고 교묘해지는 혐오가 있고 폭력이 존재한다. 같은 성별 내에서의 미묘한 심리적인 갈등과 왕따도 혐오라고 할 수 있을까

넓게 본다면 학교내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폭력들이 혐오에서 시작될 수도 있다. 다만 그 폭력들의 형태를  규정하는 것이 쉽지 않고 혐오라는 것이 또래 문화처럼 놀이처럼 이어진다는데 참 어렵다.

 

한 학교를 정해서 학생들을 관찰하고 면담해서 연구결과를 내놓았지만 사실 여기 등장하는 '너른중학교'정도면 참 양호한 환경이다. 그리고 남녀사이의 혐오상황을 중심으로 연구되었다. 모든 학생들 환경이 비슷하고 학업성취가 높은 지역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이 세상의 모든 학교가 너른 중학교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연구 대상이 된 학생들을 선생님들에 의해 선발되었다면 그리고 외향적으로 스스로를 잘 드러내는 아이들 위주로 연구가 진행되었다면 학교 전체에 분포된 혐오나 폭력이 모두 드러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많은 한계가 있지만 학교내 혐오에 대해 한번 생각하고 정리할 수 있는 계기는 된다

 

결국 서로가 연대하고 지지하며 견뎌내고 혐오를 맞설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혐오 감수성이 높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

무엇보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가르치는 교육이 아니라 어쩌면 학교의 한 축을 이루는 교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과 감수성 향상이 더 우선한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만든 환경에서 성장한다.

어른들의 훈육을 듣고 어른들이 만든 사회통념을 익히고 만들어 놓은 창을 통해 세상을 본다.

다른 창을 만들고 다양한 상황을 공감하고 존중하는 사회. 어쩌면 학생들을 향한 교육이나 처벌보다는 어른들이 변해야 하는 것이 더 우선이다.

 

많이 부족하지만 생각할 거리는 많은 책이다.

왠지 어떤 결론을 내려놓고 과정을 몰아간듯한 느낌도 들지만 한번 생각해볼 거리도 많다.

이렇게 학교내의 혐오에 대해 연구할 수 있게 학교를 공개했다는 것도 참 대단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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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화를 내고 말았습니다 - 일상 속, 화내는 것도 지친 당신을 위한 분노 감정을 관리하는 연습
공진수 지음 / 대림북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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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조절에 대해 쉽게 이해하고 적요할 수 있는 도서. 다만 가정폭력이나 데이트 폭력 학교 폭력등의 문제를 분노라는 감정만으로 풀어나가다 보니 도식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관계에서의 폭력은 감정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권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문장이 좀더 깔끔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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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들 - 장강명 연작소설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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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말해야 할까

정말 우리가 싸워야할 대상은 어디에도 없다.

뚱하고 하는 일 없는 아르바이트생 혜미를 잘라야 하는 건 중간간부의 몫이다.

위에 눈치를 보고 불쌍하고 가난한 알바생의 눈치도 봐야 한다.

누구 하나 똑 부러지게 그녀에게 지시하지 않는다. 그냥 슬쩍 뉘앙스만 뿌릴 뿐이다.

가운데서 전전긍긍하는 그녀는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다.

그냥 그가 선 위치에서 보이는대로 그리고 자기하나 방어하려는 작은 의도하나로 선하게 생각하려는 마음을 자꾸 모질게 먹을 뿐이다.

혜미는 그냥 법대로 자기 권리를 물어보고 요구했을 뿐인데 그걸 지키지 않거나 모르쇠로 일관하는 건 분명 거대한 조직이고 책임자들인데 그들은 전혀 알지 못하고 그냥 중간간부인 그녀만 혼자 죄책감을 느꼈다가 배신감을 느꼈다가 점점 마모되어간다.

 

모두가 좋은 사람이고 제대로 일하고 싶을 뿐이다.

정해진 매뉴얼대로 정해진 규칙대로

당일 배송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당일 배송이 되어야 하고 고장나지 않은 기기는 고장난게 아니라고 꼭 말을 해야 하고 고객을 납득 시켜야 한다. 고객조차 민망하고 부담스러운 배웅은 그대로 행해져야 한다. 그걸 규칙이랍시고 만든 사람들은 데체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을까? 현장을 전혀 알지 못하면서 현장을 관리하고 좌지우지 하는 사람들은 매뉴얼을 만들고 인건비 절감을 위해 만능멀티플레이어가 되어야 하는 현장 사람들은 일도 하고 고객도 맞고 매뉴얼도 따라야 한다. 다들 선하다. 화가 나고 억울하지만 내가 화를 내며 감정을 터뜨려야 할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그래서 쉽게 화를 낼 수도 없다.

어디선가 입장이 바뀌면 내가 무의미한 매뉴얼을 읋어가며 누군가의 분통을 터뜨릴 것이고 그리고 그 사람이 터져버린다면 그 감정 찌꺼기를 고스란히 내가 뒤집어써야 한다. 우리는 어디서든 그 상대의 입장이 될 수 있다. 매뉴얼이란 규칙이란 그걸 지키는 사람은 전혀 참여할 수 없다. 다만 부리는 사람 마음이다.

 

 

같은 동네에 서로 마주보고 서 있는 빵집들은 제살깍아먹기에 여념없다. 뻔히 아는 사실이지만 누구도 먼저 멈출 수 없다. 먼저 멈추는 쪽이 지는 것이고 지는 건 죽는 것이다.

함께 공생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작은 내 이익과 손실계산이 늘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아니 떠나 보낼 수 없다. 여차하면 작은 손실에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우리 동네에는 빵집이 몇 개가 있을까 세어봤다. 다들 장사는 잘 되는지.... 그래도 그들은 지금도 웃으며 고객을 맞이 하고 있다. 어두운 바다 오징어잡이 배처럼 불을 밝히고

 

 

경력직은 경력을 가진 사람들을 뽑으려고 하는데 아무도 뽑아주지 않으면 경력을 가질 수도 없다. 그래서 뭐든 해보려고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시도하고 경험하면 닳고 닳아서 신선한 맛이 없다고 또다시 탈락시킨다.

어떤 일이든 쉽게 되는 건 하나도 없다. 그런데 누군가는 너무 쉽게 가지기도 한다.

공감없는 이해는 잔인하고 이해없는 공감은 공허하다.

 

마음을 주고 공감하다보면 아무것도 내 손에 남는게 없는 허탈감이 들고 하나하나 따지고 들자면 내가 왜 이렇게 삭막해지나 싶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등을 두드리며 괜찮아 괜찮아 하는 말은 공염불과 다르지 않고 뭐든 잘잘못을 따지고 하나하나 짚어 나가는 그 똑똑함에 섬뜩하게 살의를 느낀다.

뭐든 마음에 드는 게 없다.

쉽게 판단할 수 없고 쉽게 마음을 나눌 수도 없다. 그리고 삶은 점점 사람을 소외시킨다.

산업이 이제 노동으로 이루어지는 부분보다 사람을 배제하고 기계화되고 조직화되어 사람도 작은 부품이고 하나의 과정으로 대상화되어버린다.

나는 사람인데 너도 사람인데

서로 잘 살아보려고 하는 일인데

아니 그냥 평범하게 행복해지고 싶을 뿐인데

너무 사는게 힘들고 두렵다.

 

기사의 글은 그저 머리를 스치고 지워지지만 이렇게 이야기로 만들어진 글을 마음에 박힌다.

내가 이해를 했든 경험을 했든 이건 타인의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이야기는 힘을 가진다.

좋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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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가능하다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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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이 있은 후 나는 예전과 같지 않다라는 말을 쉽게 한다.

예전과 같지 않을 경험들은 쉽게 오지 않는다.

그건 삶이 흔들리는 커다란 충격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사소한 어떤 만남이거나 깨달음이거나 스치듯 지나갔던 경험일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시간이전으로 되돌아 갈 수 없다.

이 책의 인물들은 그런 순간을 겪는다.

대단한 사건은 아니다.

그냥 스쳐지날 순간들에서 문득 든 생각들이 그렇게 통찰을 준다.

어쩌면 그들은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그냥 그렇게 순간 느끼고 말아도 그만인 일일테니까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내가 선택하는 것들의 연속이기도 하지만 어떤 방향으로 나를 끌어당길지는 알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니까

 

삶의 진정한 비극은 우리 자신의 상처 때문에 타인의 상처를 들여다볼 눈을 가리고 자신의 상처에 매몰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이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우리의 고통을 이해해주기를 바라면서도 정작 스스로는 타인의 고통을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가까운 가족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가까운 사이에서 주고받은 상처들은 더욱 사람을 단단하게 닫게 만든다. 믿었던 만큼 내 편이라고 내가 다 안다고 생각했던 만큼 나의 기대와 다른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받은 충격은 대단하다.

어머니가 어느 순간 가족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택하고 떠나버렸던 순간의 공포 그건 나이를 먹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그 나이가 되고 내가 그런 삶을 살아가면서 어쩌면 그건 그럴 수도 있다고 인정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런 인정을 해버리는 자신을 말리고도 싶다. 내가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는 건 그 가까운 타인- 엄마가 준 상실과 빈 자리때문이라는 것이 너무 선명하기 때문이다. (미시시피 메리)

오랫동안 믿어왔고 의심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또 다른 실체를 알게 된 순간의 충격은 그 존재를 부정하고 싶어지며 내가 봤던 것 믿었던 것들이 무엇인지 혼란스럽기만 하다.(눈의 빛에 눈멀다)

서로 다른 길을 갔던 형제들이 한자리에 모여 과거를 기억하는 때 서로의 기억이 다르고 서로의 기억이 모여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 느끼는 전율같은 것. 그것은 기쁨일 수도 있고 슬픔일 수도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제는 이해가 되는 타인에게 연민을 느끼게 되는 자기 스스로의 말랑말랑해진 감정선에 감동할지도 모른다. (동생)

전쟁의 경험으로 순수에 대한 회의를 느끼며 동시에 그것을 갈망하는 남자는 낯설지만 따뜻하고 안전하다고 믿는 민박집에서 예상치 못한 위로를 받기도 한다, (엄지치기 이론)

어려운 시절을 견디고 성장한 남매는 이제 안정되었다. 오빠는 부유한 사업가로 일에서 가정에서 성공했고 동생은 안정된 민박집을 운영하며 타인에게 위로를 주고 있다. 지금은 안정된 그 남매가 가난한 시절 쓰레기통을 뒤지며 음식을 구걸하는 기억을 간직하고 지금의 부유함이 주는 죄책감과 미안함을 지니고 있는 한 그들은 타인에 대한 마음을 가진 따뜻한 사람일 수 있다. (도티의 민박집/ 선물)

내가 평생 믿어왔던 것 그것이 하늘의 계시였다고 믿었던 어떤 신념. 그 창을 통해 세상을 보았던 어떤 믿음이 어느 순간 깨질 때가 있다. 그렇다면 그동안 살아온 나의 삶은 어떻게 될까? 부정해야만 할까? 하지만 현명한 아내는 그걸 굳이 깨어야 할까라고 반문한다.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일은 순간이지만 그걸 다시 되돌리는 것은 어쩌면 나의 마음일지 모르겠다. (계시)

아무도 내색하지 않아서 그렇지 누구나 깊은 곳에 상처를 숨기고 살고 있을지 모른다. 나만 그런것도 아닌데 다들 입을 닫고 있으니 알 수 없고 내 상처에 침잠할 수밖에. 나의 이웃들도 나와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되면 그들에게도 고통과 상처가 깊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것만으로 살아갈 일이 괜찮아질 수도 있겠다. 그건 누군가보다 비교우위를 갖는 속물적 마음일 수도 있지만 모두가 다르지 않다는 엉뚱한 연대감일 수도 있겠다 (풍차)

    

당신은 누구의 이야기가 가장 인상적이었나요? 왜 그랬을까요?

당신 속의 상처는 어떤 건가요? 

하나를 고르기는 참 쉽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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