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아이가 욕을 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아이에게 욕을 하면 안된다고 가르친다.

내 아이는 욕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의 반 친구들은 욕을 쓴다.

아이가 친구들에게 말한다. 욕은 나쁜거야 쓰면 안돼

친구들이 말한다 웃기네 잘난척은...

그리고 아이를 따돌린다.

이때 내가 해야할 행동은.....

 

어짜피 아이들이 밖에서 겪는 세상은 내가 통제할 수 없고 내가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그리고 아이들사이의 문화도 인정해야한다.

함께 어울리기 위해 함께 공감하고 은밀하게 주고받는 동료의식같은 것도 필요하다.

그래서 아이에게 말한다.

"너무 튀지마... 그냥 남들이 욕할때는 나서지 말고 모른척 해. 너는 욕하지 말고..."

 

이게 정답일까

 

오늘 모인 엄마들사이에 나온 주제 중 하나

그리고 그렇지 너무 튀어도 안되지 요새는 걸핏하면 왕따가 되니까

그냥 밖에서는 어찌하든 안에서는 하지 말라고 하는 수밖에.. 다른 애들도 다 하는데...

 

중요한건 결국 내 아이가 왕따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고 물론 그것도 중요하다

그런데 뭔가 찜찜했다.

너무 튀면 안되니까 그냥 눈감아라..

사실 욕하는 정도는  어쩌면 가장 단순한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제각각 존재하고 그럴 때마다 튀지 말고 나서지 말고 모른 척 나만 안전하게 있기를 바라는 것 그것이 바른 정답일까..

 

친구에게 찍혀서 돌아온 아이에게 나는 무어라고 할까

"니가 틀린게 아니야. 욕하는 건 나쁜 것이고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는 건 당연해 하지만 친구들이 그렇게 반응해서 속상했겠구나.. 하지만 엄마는 니 행동이 자랑스럽다.  니가 잘 못하거나 잘난척하려고 한게 아니라는 걸 알아.. 친구들도 니 마음을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다 같이 욕을 안쓰면 얼마나 좋을까..."
그냥 그렇게 아이 마음을 받아주는 것 이상 할게 없기도 하다.. 유감스럽게도

하지만 아이는 저절로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잘못하는 건 아니지만 너무 튀거나 친구들과 다르게 행동하면 반감을 얻으리라는 것

그러니 행동이나 말을 조심할 필요는 있겠구나

엄마가 미리 나서서 그런 상처와 깨달음을 얻을 시간을 차단하지 말고 조금 놔둔다면 그렇게 알고 스스로 조금 비겁한 행동을 할 수도 있고 그러면서 양심에 가책을 느끼기도 하고 고민도 하면서 그렇게 자라는 기회를 얻게하는게 옳지 않나..... 조심스럽지만 그렇게 생각한다.

행여 문제가 부정적으로 확장되어 그런 일들이 쌓여서 나대는 아이 잘난척 하는 아이가 되어 왕따를 당하게 되는 경우도 있겠다만.. 그래도 나는 니가 옳다고 믿어준다는 부모가 있다면 그래도 그래도 견딜 힘은 가지지 않을까... 이것도 조심스럽다..

 

근데 모임에서 나는 이런 이야기도 하지 못했다.

그냥 나대지 않게 튀지 않게 그래서 왕따당하지 않게 모른척 하라고 해야겠단느 결론에 동조하는 것처럼 ... 가만 있었다

왜냐면 나도 조금 비겁한 편이니까...

 

학기초에 전학을 하면서 아이에게 이야기 했었다.

엄마 생각엔

왕따를 주동하는 친구도 물론 나쁘지만 정말 나쁜 건 그 앞에서 아무말도 하지않고 모른척하는 친구들이다라고.. 그런 나는 아무짓도 하지 않았으니 나쁜짓도 한게  아닌가 아닌거다

오히려 그런 다수의 침묵은 나쁜 짓에 동조하고 힘을 주는게 되고 고통받는 친구의 아픔위에 돌맹이 하나를 더 얹는 짓이 된다고

나서서 우리가 이렇게 하면 안된다고 할 수는 없더라도

아무렇지 않게 아픈 친구를 무심히 대해주고 말도 해주고 그러라고

뭔가 위로를 하고 편이 되주는 행동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 친구가 보기에 너도 한편이구나 하는 행동은 하지 말아라. 그리고 조금씩이라고 주위 편한 친구들에게는 그러면 안되는거 아니냐고 주장도 해보라고...

이것도 적극적이지도 않고 자기만족적인 행동인지 몰라도 적어도 아닌건 아니라고 할 수는 있어야 하지 않는가 말해주었다.

왕따라든가 피해를 받는 친구에게 가장 힘든건 누군가 나서서 나를 괴롭히는 그 대상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의지할 대상이 없다는 외로움이 아닐까 싶다.

한 놈 쎈 놈이 나를 괴롭히더라도 주위에서 아무렇지 않게 나를 대해주고 내가 기댈 수 있거나 적어도 이 야이들은 나를 미워하지 않는다는 믿음만 있어도 견디지 않을까

나를 괴롭히는 그 존재로 인한 절망에 마지막 한방울이 무심하고 무관심한 다수의 행동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 한방울이 그 친구를 무너지게 하는게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나는 쥐 템플턴에게 마음이 갔다. 지저분하고 교활한 쥐

자기의 이익을 위해 여기저기 붙고 돌아다니는 쥐

농장 동물돌도 모두 템플턴에 대해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건 어느정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템플턴도 윌버의 일에 샬롯의 부탁에 투덜댈지언정 거절하지 않고 자기 역활을 해낸다 그리고 동물들도 말로는 놀리고 뭐라고 하지만 아주 템플턴을 내치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우리와는 좀 다른 친구, 정의롭지 않고 밉상이긴 하지만 그도 "우리"중의 하나일 뿐이다. "우리"와 다른 "저쪽"이 아니었다.

거미인 샬롯이나 쥐인 템플턴도 어쩌면 농장동물들 입장에서는 우리와 다른 저들이고 충분히 함께 하지 않아도 몰아내도 상관없는 존재이겠지만 그러질 않는다.

말로는 항상 투덜거리고 욕을 해도 항상 우리중 하나였다.

그래서 템플턴도 맘대로 농장 여기저기를 드나들며 동물들일에 간섭하기도 하는 것이다.

아무리 교활하고 약삭빠른들 모두가 자기를 따돌리고 무시한다면 템플턴도 견디기 힘들지 않았을까

그냥 나랑 좀 다를 뿐이고 나랑 안맞을 뿐이지 그런 이유로 우리가 아니고 우리속에 끼워넣을 수 없는 투명인간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난 책을 읽으면서 윌버와 샬롯의 우정못지 않게 템플턴을 대하는 농장 동물들의 모습이 더 인상적이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아닌건 아니라는 걸 알지만 나설 수 없고 눈감고 모른 척 할 수 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아닌건 아니라는 걸 알기는 안다.

(물론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살다보면 부대끼다보면 어쩔 수 없이  쌓이는 내 속의 비겁함과  좋은게 좋다는 식의 두리뭉실한 누구를 위하는지 알 수 없는 정의들 그걸 느끼고 경험하고 갈등하며 산다.

어쩔 수 없이 느끼는 것이지만

그걸 미리 아이에게 가르쳐 주고 싶지는 않다.

많이 다치고 깨지고 상처 입을 지언정 아닌건 아니라고 말 할 수 있고 옳은 것과 그른것을 판단할 수 있고 적어도 나 혼자라도 남의 눈 의식않고 실천할 수 있는 용기 혹은 무심함을 내 아이가 가졌으면 좋겠다.

 

잘났어 누가 그걸 몰라? 그러다 큰 일나면 누가 책임져주나 ..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뭐 내 속에서도 이런 목소리가 불쑥 나오긴 하지만...

적어도 아이가 유치원에서 배웠던 질서, 정의, 사랑, 우정  그 단순하고 소박한 의미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당연한 걸 당연하게 행할줄  아는 사람이면 좋겠다.

적어도 내가  내 아이가 그렇게 하길 바라는 사람이  조금씩 늘어나면 세상은 그래도 조금 덜 걱정스럽지 않을까 싶다.

 

세상의 때가 많이 묻어서 비겁하고 용렬한 내가 감히 주장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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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롯의 거미줄 (양장본)
엘윈 브룩스 화이트 지음, 가스 윌리엄즈 그림, 김화곤 옮김 / 시공사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책을 다시 읽다보면 예전에 보지 못했던 것이 보이기도 하고 예전 내 생각이 아하.. 이랬었구나 하는 걸 느끼게 되기도 한다.

이 책도 그렇다

예전에 읽었을때는 줄곧 월버와 샤롯의 관계에만 집중해서 읽었다. 그리고 주변 동물들의 관계

 

그런데 지금 읽어보니 이야기 속의 펀도 이야기 전개와 함께 많이 자랐다.

 

사실 샬롯의 거미줄이라고 했을때 나는 샬롯이 거미가 아니라 월버를 구해준 소녀라고 생각했었다

거미와 돼지의 우정이라는 건 생각을 못했고 돼지를 구한 소녀와 돼지와의 우정이랄까

뭐 그런 걸 기대했었는데 첨 읽었을때는 펀의 비중이 작아서 어... 이게 뭐지 했던게 기억난다

사실 영화를 먼저 봐서 영화속에서 소녀가 자라는 걸 먼저 봐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영화를 봐셔 샬롯이 거미라는 걸 알고는 있었다... 흠...)

 

다시 읽은 책에서 참 다양한  인물들을 만난다.

뭐 모두가 사람이 아니라 동물들도 섞여 있응니 뭐라고 해야하나..

암튼 다들 다양하다

 

사실 월버는 특별하지도 겸손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은 돼지에 불과하다

그를 그렇게 대단하게 만든 건 샬롯이다.

누군가 나에게 와서 꽃이라고 불러준다면 내가 꽃이 되는 것 처럼

혹은 내 아이가 장래 되기를 꿈꾸는 그 이름으로 불러준다면 그렇게 될거라는 믿음처럼

누군가를 대할때 내가 가지는 생각 혹은 편견이라고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어쩌면 중요한 무언가라는 걸 생각케한다.

외롭고 소심한 웰버에게 샬롯은 먼저 친구가 되어주었고 그의 가치를 봐 주었고

어떤 댓가나 계기가 없이  도움을 주고 윌버를 가치있게 만들어준다.

사실 친구라는 것 나아가 사람과 관계를 맻는다는 것도 그런것이다.

어떤 계기가 중요한건 아니다.

물론 그런 것들이 둘 사이의 관계를 더 돈독하게 하기도 하겠지만 어찌되었건 둘이 친구가 되었고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믿음이 더 중요한게 아니었을까

어쩌면 샬롯도 모두가 징그러워하는 거미이다보니 외로웠는지 모른다. 누구하나 친구없이 혼자 거미줄을 치고 벌레를 잡는 행동이 슬펐을 수도 있다.

그래서 혼자 중얼거리며 외로워하는 윌버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지 모르고 그래서 친구가 되기로 했고 그래서 둘의 우정이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

뭐 그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더라도 뭔가 다른 것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와 친구가 된다는 것 그 자체가 놀랍고 가치있는 일이다.

첨에 윌버도 그랬다 벌레의 피를 먹는 샬롯이라.. 징그럽고 무섭다고 여겼지만  그건 어쩔 수없는 거미의 숙명이므로 받아들일 수 밖에

그것이 샬롯이 살아가는 방법이기도 하니까

 

누구나 저마다 다른 점이 있고 상대방의 어떤 면은 내가 납득하기도 힘들고 받아들일 수없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아주 잘못된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본능이거나 타고난 것이라면 그냥 그러려니 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너는 왜 나랑 다른가

왜 우리는 같아지지 않는가

몇날 며칠을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봐야 해결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맞추어서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 성장이라고도 하지만 그렇게 내 천성을 바꾸고 본능을 바꾸어서 사는 것이 행복하지 않을 경우도 있다.

그러니까

내 속에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는 마지막 마지노선 같은 것 ... 누구나 그건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

난 절대 고기를 못먹는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개를 좋아할 수 없고 무섭기만 하다든다

벌레가 정말 싫다던가.. 자전거는 죽어도 못탄다든가

뭐 그런 것들을 누군가를 사랑하고 좋아한다는 이유로 바꾸어야 한다는 건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거다.

사랑한다면서 그것도 못해 줘? 가 아니라 사랑하니까 그런것도 받아줘야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할까

 

윌버와 샬롯은 서로 그런 면을 인정하고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그리고 불가능한 것들을 첨부터 솔직하게 터놓고 시작한 관계이다.

그런 관계는 쥐 템플턴에게서도 볼 수 있다. 쥐니까 더럽고 욕심많고 비열하고 교활하다 하지만 그런 그도 언젠가 필요하고 서로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다는 것 있는 그대로의 템플턴을 받아들이고 또 다른 친구관계를 가지게 된다.

소위 말하는 "쿨하다"는 관계가 이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서로 상대가 나에게 어떻게 해주기를 기대하지 않고 상대를 위해 무엇을 할지를 생각하는 관계라는 것이 새롭게 보였다.

샬롯은 왜 윌버에게 그렇게 친절했을까

두번을 읽어도 그 정확한 의미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알 수는 있을거 같다.

왜 그  사람에게는 그래?

하고 누가 물어도 뭐라고 명확히 대답할 수 없지만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것 그렇게 해주고 싶은 것이 누구에게나 있지 않을까

 

어떤 의미로 윌버는 정말 복받은 돼지라는 생각도 든다

죽을 목숨을 펀이 구해주었고 그다음엔 동물친구들을 만나고 그리고 샬롯을 만나서 또 다시 목숨을 구하고 의미있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

윌버는 펀과 샬롯으로 인해 새로운 삶을 부여받은 의미있는 돼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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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런 문화는 없는 줄 알았다.

운동장 하늘에는 만국기가 휘날리고 운동장을 빙 둘러서 천막이 쳐지고  아이들은 와아. 함성을 울리며 달리고 뛰고 그리고 부모들은 옹기종기모여 함꼐 도시락을 먹고... 뭐 그런 운동회

나의 초등 6년은 그런 운동회의 연속이었는데 막상 내가 학부형이 되면서는 첫 경험이었다.

아이가 벌써 6학년인데 첨이다.

 

뭐 큰아이 2학년때 그런 운동회를 할뻔 했다.

주위 아파트에서 민원이 들어올 만큼 음악을 울리며 연습하고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는 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고..

그런데 그 운동회를 하루 이틀 앞드고 가족여행이 잡혀 있어 아이는 운동회에 참여하지 못했다.

만일 그때 아이가 그 운동회에 꼭 참여해야 한다고 우겼다면 아마 여행을 미루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는 너무나 쿨하게 운동회를 포기하고 여행을 가겠다고 했고

남녀학생 머릿수맞춰 짝을 지워놓은 선생님의 원망을 뒤로하며 운동회를 포기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교장이 바뀌어서인지

학부모가 참가하지 않는 아이들만의 운동회가 치러졌다.

그냥 하루 수업하지 않고 운동장에서 게임하고 달리기하는 것

그리고 급식먹고 간식먹고 돌아오는 것

그래서 나는 그 시절 내가 경험한 운동회를 학부모의 입장에서 한번도 해보지 못하고 끝날 줄 알았다. 그게 뭐 섭섭한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좋았다.

힘들게 도시락을 쌀 필요도 없고 뭔가 먹거리를 준비하고 아이를 응원하고 사람들과 부대끼고 하는 거 없이 쿨하게 아침에 시원한 물이랑 간신 몇가지만 챙기고 나면 끝.

그리고 아이가 돌아오면 여느 때와 같은 일상

뭐 그렇게 흘러갔다.

아이도 경험을 못하였으니 아쉬울 것도 없었고 부족함을 몰랐다.

 

그리고 전학..

6학년이 되어 첨응로 그런 고전적인 운동회를 경험한다.

물론 집에서 김밥을 싸고 닭을  튀기고 과일을 깍는 일은 없지만 반끼리  모여 함께 밥을 먹고 아이들을 응원하고....

아는 사람이 많고  엄마 참여가 있는 작은 아이반에서 주로 있었다

6학년 큰 빈이네는 아는 엄마도 없었고 잠깐 들렀을 때도 인원이 10명남짓이라 어색하기도 했다.

그렇게 작은 빈이네 엄마들이랑 밥 먹고 연습하고 참가하고 웃고 떠들다가 6학년이  공연이 되었다.

이제 다 크면 엄마들이 와서 사진을 ㅁ찍지도 않는다고 하지만 그래도 동생만 챙기면 서운할거 같아서 신경써서 구경했따.

사회를 맡은 이가 말한다.

"이제   초등생활이 얼마 남지 않은 6학년들 입니다. 열심히 응원해주세요.."

아... 그렇구나

이게 초등 마지막 운동회구나.

그리고 이런 고전적인 운동회의 처음이겠구나.

첫경험이 마지막이 되는 우리 큰 빈이

연습한대로 깃발춤이 멋있었고 무사히 끝났다.

1학년 꼬맹이들에 비해 키도 크고 몸동작도 크고 간혹 여기저기 시큰동하게 여기는 아이들 행동도 보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초등생들...

이런 것들이 이제 내년이면 중학생이다.

겨우 한 살 차이고 한학년차이지만  초등과 중등이 주는 말의 무게는 하늘과 땅차이다.

저 아이도 이제 어른이 되려고 하나보다

엄마 품을 떠나려고 하나보다..

코가 찡하고 맘이 뭉클하다.

어릴적 부터 유난히 키가 커서 늘  어리다는 생각을 못했다.

남들보다 목하나 더 큰 키때문에 늘 큰 애 취급 받았고 또 어울리게 의젓하고 혼자 알아서 잘 하는 녀석이라 당연하게만 생각했다.

키가 컸을 뿐이지 생각이 컸거나 더 성숙한건 아니었다.

그런데 초년병 엄마는 그것까지 몰랐다.

큰 키 만큼 큰 아이라고만 생각하고 엄마의 기준은 자꾸자꾸 높아가기만 했다.

받아쓰기나 수학문제 틀리는게 이상하다고만 여겼고

한번 이야기하면 이해하지 못하는게 화가 났고 짜증이 났었다.

남들보다 못하는게 도무지 마뜩치 않았고 키가 큰 만큼 다른 부분도 앞서야 하는 거 아닌가

잘하는 건 당연하고 못하는 건 콕콕 눈에 밟혔다.

그런 단점이 더 크게 보여서 맘에 들지 않았고 화가 났다.

아이에게 화가 나는게 아니라 내가 만든 내 기준에 나 혼자 안달복달하고 흥분했었다.

그런데 둘째를 학교에 보내면서..

아 3년전 그 아이도 이렇게 아기였구나 이렇게 서툴렀구나 ... 하고 처음 알았다.

그렇게 알았으면서도 이 엄마는 여전히 변한 건 없었다.

그땐 아기였어도 지금은 3년이 지났는데 좀 더 의젓하고 할일을 알아서 잘 해야하는 거 아닌가

공부도 좀 더 하고 .

작은 아이는 숙제만 해도 대견했고 시험지에 동그라미가 몇개 보이기만 해도 맘이 뿌듯했는데

큰아이는  빈둥거리는 꼴을 못보겠고 뭐라도 하고 있지 않으면 내 마음이 불안했다.

그렇게 내마음을 볶아치고 아이에게도 다그치고 나도 모르게 그 아이의 유년을 빼앗았던 아이가

이제 정말 그 유년기를 졸업하려고 한다.

 

아이랑 씨름하고 볶으면서 시간을 보낸다고 했는데

막상 아이는 혼자 크고 있었다.

혼자 저만큼 자랐고 혼자 세상을 배우고 상처받고 치유하고  그렇게 시간을 쌓아가고 있었나보다

늘 큰아이로만 여기면서 한해한해 자라는 걸 놓치고 있는 내가 바보였는지...

큰아이답게 늘 기대하면서도 애틋함은 컸지만 그걸 표현할 줄 몰랐으니 그건 나도 엄마노릇 겨우 13살이라 그랬다고 변명해본다.

아이를 키우면서 엄마도 함꼐 나이를 먹는다.

아이가 한살이면 엄마도 한살이고 아이가 초등하교 1학년이면 엄마도 초등학교 1학년이 된다.

아이가 철이 없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엄마도 함께 죄충우돌하고 후회하지만 늘 혼나는 건 아이몫이다.

왜 그렇게 야무지지 못하는지 왜그렇게 실수만 하는지.. 함꼐 한다는 걸 모르고, 내 눈엔 내 허물은 보이지 않는다. 항상  두눈이 나에게 향하지 않고 아이에게만 뻗어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둘째를 키우면 또 나아지느냐.... 그것도 아니다.

또 다시 반복이다. 이젠 한 술 더 떠서 좀 안다고 ,., 선무당이 되어서 아이를 잡는다.

 

전교생이 함께 서 있는데도 내 아이는 눈에 띈다.

키가 커서 그런것 만은 아닌거 같다.

그저 내 아이라 그렇다.

어디에 묻혀 있어도 내 아이가 틀리는 건 귀신같이 잡아내고 어딘가 이상하고 아파 보이는 것도 귀신같이 잡아낸다. 엄마노롯하면 는건 그것뿐이다.

 

이제 초등을 마치고 중학생이되면 무서운 사춘기가 기다린다.

이미 스타트는 끊었다.

어떻게 달려나갈지 어디로 달려나갈지 알 수 없다.

또 엄마도 함께 사춘기를 앓으며 치열하게 싸울것이다.

우짜든둥 아이를 이겨먹으려고 철없는 없마는 엉뚱한 최선을 다할 것이고

돌아서면 후회하고 머쓱해하는 걸 반복하게 될것이다.

아이는 그러면서 자랄것이라고 믿는다.

여태 혼자 잘 자란것 처럼 쑤욱 자라서 나를 놀라게 할테지...

 

아이의 처음아지 마지막 운동회...

여러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그러나...

 

집에 와서  피곤해하는 아이에게 놀지 말고 쉬지말고 학원가라고 등떠미는 엄마도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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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2-10-16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에 눈물이 왈칵하네요.

푸른희망 2012-10-17 18:45   좋아요 0 | URL
^^ 쑥스럽네요..
 

 

 

 

 

영화를 보면서 문뜩 "봄날은 간다"가 떠올랐다,

거기서 상우가 그랬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그 상우가 아직도 그렇게 순수하고 조금 찌질하게 남아있다면 이 영화를 보여주고 싶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단다."

 

한때 빛나던 것들도 다 낡을 수밖에 없고 지금은 초라하고 낡은 것들도 한때는 빛나던 때가 있었다. 그냥 그렇데 변해가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에 삶이 아닐까

언제나   환하고 새로운걸 찾아가고 싶고 그것이 더 탐나기도 하는 것도 삶이고 인간이기도 하다.

 

영화속 마고는 평범한 인물이다 결혼생활에 어려움이나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친구같고 가족같은 남편은 든든하게 옆에 있어주고 시가쪽 식구들과도 허물없이 지낼만큼 문제가 없다.

어쩌면 그렇게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 마고에게 문제가 될지도 모르겠다

뭔가 다이나믹하고 반짝거리는 것 두근거리는 무언가 설레임이 필요한데 남편과의 생활은 너무나 안정되어있다. 그건 남편의  묵직하고 한결같은 성격 그리고 미래의 유머까지도 준비하는 반듯하고 정돈됨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성격은 닭 하나를 가지고 요리책을 만드는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녀에게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설레임 그 남자가 다른 곳도 아니고 바로 이웃에 있다.

언제나 눈길 닿는 곳에 그가 있고 손을 내밀면 잡을 만한 곳에 그가 있다.

그러니 발랄한 마고로서는 미치고 팔딱 뛸 일이 아닐까

유부녀라는 이유로 아직 남편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마음을 다잡아보려고 하지만 그럴 수록 끌리는 마음은 어쩌지 못하고 남편의 한결같음조차 너무 지루하고 재미없다.

수영장 샤워실에서 나이든 여자들 젊은 여자들이 거리낌없이 나신을 드러내며 세상에 변하지 않은 것 없다는 말을 할때 참 숙연했다. 익숙한 몸들을 보면서 그렇게 늙고 쳐지고 살찐 몸들도 언젠가는 누군가를 설레게 했을 것이고 탄력있고 팽팽한 젊음이었다는 걸 말없이 보여준다.

시간이 그냥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익숙하버린 무심함이 그냥 무심함이 아님을 증명해준다.

한때 아이가 그랬다. 어제가 오늘같고 오늘이 내일같은 생활이 뭐가 좋으냐고 매일매일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야하고 뭔가 다이나믹하게 신나게 살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한때 나도 그랬단다.

하루하루가 비슷하게  반복되는 건 견딜 수 없다고

하지만 살아온 시간이 쌓이면서 그렇게 반복되는 일상의 고마움을 알게 된다.

다이나믹함이라는 것신나고 파란만장하다는 것이 늘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 그것이 오래되면 멀미만 날 뿐이라는 것 어쩌면 우리가 지금 지리멸렬하게 느끼는 익숙함이나 반복들이 한때는 빛나는 다이나믹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신나는 놀이기구도 때가 되면 조명이 꺼지고 내려야 하는 순간이 온다.

마냥 계속되는 두근거림 신남 흥분이란 건 없다.

(사람이 그렇게 살다간 심장병으로 죽을 수도 있다...)

결국 마고는 그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난다. 그리고 take the waltz가 흐르면서 새로운 격정적인 사랑이 어떻게 변하는지 말없이 보여준다. 그렇게 심장이 터질만큼 두근거린 사랑도 결국은 일상이 되고 지루해지고 무심해지는 것을

남편의 동생이 말했다.

"누구나 인생에 빈틈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모두가 그 틈을 메우려고 하진 않는다"

맞는 말이다.

조금 부족한대로 처지는 대로 맘에 안드는 대로 받아들이고 익숙해지고 그러면서 산다.

하지만 뒤집어보면 누군가는 또 다수와는 다르게 한사코 그 틈을 메우고 싶고 완벽해지고 싶어하기도 한다.

30년뒤의 약속을 하면서 그때 58세가 된다고 하는 걸 보면 아직 주인공들은 20대라는 뜻

그렇게 팔팔하고 피가 뜨거운 청춘일때는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뭔가 빈틈이 적을 때이고 한두개의 빈틈이라면 기어이 메우고 완성시키고 싶은 욕망이 더 클 수밖에 없겠다 싶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 빛나고 신나고 두근거리는 무언가를 찾아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것도뭐라고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그런 저돌성에 상처받는 누군가가 생긴다는 것이 문제이지만 그렇게 뛰어들어야만 풀리는 사람들은 뛰어들어야 한다. 아무리 붙들고 익숙함 무미건조함의 가치를 이야기해도 알 수 없다.

 

세상에 식지 않은  사랑이 없다고 하고 오히려 그렇게 사랑이 식어서 무덤덤해지면서 깊어지는 정이 더 의미있다 영화는 이야기하고 있다.

마지막 마고가 혼자 탄 놀이기구는 더 이상 다이나믹하지고 신나지도 않다 그냥 어지러울 뿐이다.

어느순간 그 떨림 설레임이 멀미처럼 느껴진다는 것이 서글프다.

 

봄날은 간다의  영악한 은수는 그걸 알았단다. 지금은 열병처럼 들떠서 서울과 강릉을  마치 집앞슈퍼가듯 달려가는 상우도 언젠가는 지루해지고 덤덤해질거라는 걸.. 그리고 은수도 마고처럼 그런것이 견디기 힘들었던것이 아닐까 왜냐면 이미 겪어봤으니까..

상우는 아직 열정이 식어서 덤덤해지고 무심해지는 걸 모르니까 아직도 저러는 거고

그 상우에게 아직도 어려서 다이나믹한 삶을 사랑을 찾는 모두에게 이 영화를 보여주고 싶다.

그리고 깨닫는 것은 각자의  몫

 

영화 중간에 마고와 이웃 남자가 바에서 말로서 섹스하는 장면이 나온다.

남자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반응하는 마고의 미묘한 표정

그리고 남자의 나즈막한 목소리

그 어떤 영화의 섹스씬보다 더 로멘틱하고 짜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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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미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일단 재미있다.

흡입력이 장난이 아니다.

위저드 베이커리도 그랬고 피그말리온 아이들도 그랬다.

작가가 낸 작품을 순서대로  잃지 않아 어떤 흐름으로 작가가 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또 굳이 그런걸 분석해가며 읽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일단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이 대단하다.

그리고 문체가 그냥 술술 넘어가는데 미묘하게 아름답다는 느낌을 준다.

 

가족의 붕쾨로 자살을 결심한 아비품에서 살아난 아기는 그때의 겸험때문인지

아가미를 가지게 되고 점차 물에 적응하면서 온몸이 아름다운 비늘을 새긴다.

그 소년의 이름이 곤이다.

그를 구해준 노인과 손자 강하와 함께 있는듯 없는 듯 살게 된 소년의 이야기

 

도데체 작가는 이런 이야기를 어디서 얻어낼까..

아가미를 가진 소년이라니..

사람도 아니고 물고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어라고 할 수도 애매한 소년의 이야기를 잃으면서

나는 곤 보다는강하에게 더 끌렸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세상에 날카롭게 날이 선 아이

뭐든 맘에 드는 것도 없고 예의도 없고 동물적이고 본능적이지만 그 본능적인 것이 곤을 버리지 않고 키워냈다.

곤을 볼때마다 느끼는 적의감은 어쩌면 곤을 통해 자신을 보게 되기 때문일거다.

누구의 사랑을 받지도 못하고 죽을 운명의 아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아이

누구도 알지 못하는 아이

그런 곤을 강하는 사실 많이 사랑했던거같다.

쉽게 사랑했다고 말하기조차 주저되지만 이건 사랑이라는 생각이 책장을 덮으면서 떠오른다

 

"물론 죽이고 싶지"

"그래도 살아있으면 좋겠으니까"

 

이 한마디가 " 널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가슴덜리고 안타깝게 느껴진건 순전히 개인적인 감정인지 모르겠으나 꼭꼭 감추어둔 감정의 봉인이 풀리는 한 순간이 아니었을까

강하에게 그리고 곤에게

내가 누군가를 사랑했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에게 사랑받았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 이후 둘은 만나지 못하고 영영 이별이지만 그 감정으로 둘이 살아갔던게 아니었을까 싶다.

이건 성장소설이 아니라 사랑이야기였구나

누군가를 자꾸 떠올리고 미워하고 걱정되고 그렇게 머릿속에 맴도는 것

그게 어쩌면 사랑인지 모르겠다,

 

작가의 나머지 작품도 읽어봐야겠다.

냉소적이면서 썩 친절하지도 않고 다정하지도 않은 이야기에서 아련한 사랑이 느껴지다니

작가가 대단한건지 내가 대단한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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