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관상

 

 

 

 

 

 

 

계유정란의 이야기가 배경이지만 내 눈에 이 영화는 슬픈 아비 이야기였다.

김내경이나 문종이나 둘 다 애닯고 처연한 아비였다는 것만 눈에 들어온다.

어린 아들을 두고 차마 눈을 감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일국의 왕이나

세상 모든 이의 앞날을 예감하고 심지어 살인자까지 척척 찾아내는 관상쟁이가 제 아들 단명할건 알아보지 못했으니 이보다 더한 비극이 어디 있을까

김내경이 산골생활을 접고 서울로 상경한 것도 제 아들 잘 거두어 먹이고자 함이었고 과거를 버리고 과거길에 올라 말단 벼슬을 가진 아들 진형을 다시 만나서도 그저 아는 척 하지 않고 무탈하게 하고픈 일을 하면서 살기를 바랄 뿐이었을 것이다.

허나 왜 그 잘난 관상장이는 제아들 운명을 .. 아니 자신이 아들을 잃을 거라는 운명은 보지 못했을까 . 아무리 신기가 내린 관상장이라도 제 가족앞에서는 눈먼 장님이나 다름없다는 것..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는 이성도 마미될 때가 있다는 걸 보여준게 아닐까 싶었다.

영화에서 누구나 칭찬하는 연기력을 가진 김종서의 백윤식이나 수양대군의 이정재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무난하게 흐름을 이어가는 배우였을 뿐이다.

내내 나는 김내경이게 그리고 일찍 화면에서 사라진 문종에게 집중되었다.

쇠약한 아비는 한나라의 국왕이라는 것이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 내가 왕이 아니었다면 내 아들이 왕의 계승자만 아니라면 아무 일도 아닐 것들이 다만 왕이라는 , 혹은 왕이 되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목숨마저 위태롭고 눈을 감아도 감을 수 없는 상황이다.

아비는 아들을 살리려고 관상장이를 부르고 많은 증거들을 남기지만 아들은 그것을 믿지 못하고 혼자 전전긍긍하고 결국은 아들을 구하려는 충신들은 호히려  수양을 왕으로 만들어 놓는 꼴이 되고 만다.  (영화장면중 점을 그려넣는 장면에서 결국 그러했다. 저렇게 어리석은 자들이 한 사내를 기어이 왕으로 만들고 마는구나.. 어쩌면 저 점만 아니면 왕이 아니될지도 모를 것을...)

영화에서 김내경과 그의 처남은 어쩌면 부부관계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미가 저렇게 호들갑스럽고 수다스러우면 조금 동정이 가지 않고 눈쌀을 찌푸릴까 어미자리에 대신 처남 그러니까 외삼촌을 넣었던게 아닐까 싶게

그의 처남은 어미처럼 김내경의 아들 진형이를 위한다. 아비몰래 아들에게  원하는 길을 가게 일러주고 다시 만났을 때도 소소한 정을 주지 못해 안달이다. 그저 지금 눈에 보이는 내 아이의 안녕을 위해 오히려 큰 그림을 보지 못하는 눈먼 어미처럼 그렇게 아이를 품고 싶어 안달이다.

그래서 그 지극한 안달과 사랑이 지나쳐서 오히려 대의를 망치고 남편(매부)를 망치고 아이를 잃게된다. 그게 아니었음에도...

역사에는 만약이.. 없다지만 혹시 문종도 가능했다면 왕위를 동생에게 주어버렸다면.. 뭐 그게 가능하지 못했으니 그런 사단이 났겠지만 어쩌면 아들을 잃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이제 나이를 먹은 송강호는 아비 역활이 참 잘어울린다. 언제나 최선을 다하지만 한치 앞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아비 역활이 참 잘어울린다.

"효자동 이발사" 그 영화에서도 순박하고 착하지만 큰 흐름에 휘말려 아들을 잃어버리는 아비로 나왔고 이 작품 감독의 다른 영화" 우아한 세계"에서도 악의는 없지만 딸과 소통이 안되서 고립된 아조폭 아비로 나온다.

아비들은 그렇다 자식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어하고 사랑해주고 싶어하지만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고 소통하는 방법을 모른다. 아니 알지만 그걸 행하기엔 너무 어색하고 쑥스러워 모른 척 한다.

그래서 그 사랑이 엉뚱하게 오해되고 오해는 또다른 오해를 낳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면 모든 오명은 혼자 뒤집어 쓰고 견딘다.

우아한 세계에서 유학간 딸은 끝내 아비의 속을 모를것이고 화살에 맞고 죽어가는 진형도 어쩌면 그 아비가 왜 그랬는지 모든 걸 알지 못하고 눈을 감았을 것이다.

어린 단종도 유약한 아비 문종이 얼마나 자신을 위해 전전긍긍했었는지 알았을까...

지금 상황이 그래서인지.. 자꾸 영화에서는 어리석으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아비들이 보이고 있다.

 

 

2. 부에노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

 

 

솔직히 예고편이 너무 좋았던 영화다.

"언어의 정원'을 보러갔을 때 에고편이 너무 좋아서 이걸 꼭  봐야지 했는데.. 생각보다는 별로였다. 아니 별로라기 보다는 너무 늦게 나왔다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웠다.

이미 도시에서의 쓸쓸함, 고독 소외 이런건 왕가위가 다 써먹었고 이전에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데 여러명이서 전화로만 이야기를 나누고 속내는 털어놓지만 끝내 만나지는 않는 영화가 있었는데..

이미 모두 써버린 소재를 가지고 영화가 늦게 나왔다는 게 아쉬웠다.

그리고 두 사람이 만날거면 좀 더 일찍 만나지.. (아니 대면이 아니라 통신상의 만남을 보더라도) 너무 늦게 소통하고 스치고 지나는 장면이 짧아서 지루하기도 했다.

두 사람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삭막한지를 너무 오래 보여준다.

그럼에도 내가 전혀 몰랐던 부에노스의 거리풍경.. 어디나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 난개발의 상황 그리고 불법인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뚫어버린 창들과 벽의 광고들의 기발함은 맘에 든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그래서 깨닫는다. 뭔가 획기적인 기획이라는 것도 때가 있다는 것. 이미 남들이 하고 지나간 걸 꼭 다시 하고싶다면 뛰어난 스토리나 감각을 가지고 할것.

이건 영화와 상관없이 내가 내게 하는 충고이기도 하다.

 

3. 블루 재스민,

 

블루 재스민

 

 

우디알렌이 그동안 말랑말랑한 여행기만 보여주더니 여기서는 다시 날카로워졌다. 아주 심한 건 아니고 그래도 두고두고 생각해볼 것들을 던져준다.

나이먹고 다시 읽었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참 울림이 많았다..

블랑쉬도 이해가 되고 스텔라도 이해가 되면서 둘이 다른 존재가 아니라 어쩌면 한 사람의 내면에 들어있는 두가지 자아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현실을 외면하고 끊임없이 꿈꾸고 이상만 바라보고 허공에 떠 있던 블랑쉬나 현실적이고 소박하지만 더 이상 꿈꾸지 않는 스텔라가 모두 내 속에 있지 않나 싶었고 그러면서 내심 주목받는 블랑쉬보다 현실에 안주해야하는 그리고 스텐리를 견뎌야 하는 스텔라가 더 안타까웠다.

차라리 꿈꾸는 동안은 나는 행복하다  남이야 뭐라고 하던말던 나는 행복하다.

하지만 현실에 발을 딛는 순간 나는 나의 행복보다는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써야한다. 내가 가진 행복이나 이상은 일정수준 저당잡히고 현실에 발을 붙여야 하는 법이다.

그래서 나는 꿈꾸는 언니를 바라보는 스텔라가 많이 갈등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어쩌면 더 고통받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았다.

 

케이트 블란쳇은 정말 우아하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들이나 스타일은 너무나 부럽고 멋지고 상징적으로 들고 입었던 에르메스나 샤넬도 어쩌면 그렇게 맞춤처럼 딱 맞아 떨어지는지.. 눈이 즐거웠다. 게다가 그녀의 강박증 신경쇠약 현실 부적응등도 우아하기까지 하다.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기댄 면이 많지만 내가 상상했던 주인공들과는 조금 다른 면을 볼 수 있었다.

재스민은 유약하고 비 현실적이라서 라기보다는 그저 이기적이고 아직도 유아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었다. 어쩌면 내가 가지지 못할 것이라면 남도 가지게 할 수 없다는 이기심이 재스민을 바닥까지 치게 만들었다. 내가 하는 거짓말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 순간 감정이 충실했던 것만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 그렇게 현실감이 없고 순수하기만 해서 누구에게나 짐이 되고 말이 통하지 않게 되는 어리석고 미성숙한 인간이다. 아름답고 우아한 모습 뒤에 감추어진 미성숙함이 그녀를 꿈속에서 살게 하고 현실파악을 못하게 하는 이유기 되었다. 끝임없이 현실을 부정하는 것 똑바로 바라보지 않는 것이 결국은 스스로를 파멸하게 한다는 것이 나는 끔찍했다.

하지만 인형처럼 어떤 외부적인 요소만으로 무너지는 인간이 아니라 스스로 그 추락에 원인이 있다는 게 오히려 다행이다. 내것이 아니면 남도 가질 수 없다는 욕심에 남편을 고발하고 스스로도 무너진다. 어쩌면 고발 하는 순간까지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몰랐을 것이다. 너무나 뇌마저 순수한 그녀였으므로.

스텔라를 대신한 진저는 지극히 현실적인 여자였다.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범위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도 극악스럽지 않고 착하고 순수하다. 언니를 동경하면서 한때 언니를 흉내내려고 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선택지가 어디까지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여자이다. 그래서 큰 굴곡은 없을지라도 더 이상의 변화조차 없는 그래서 슬픈 여자 였다. 왠지 웃고 있고 끄덕이고 긍정하고 있는 그녀가 더 슬펐다. 그래도 그녀의 남자는 희곡속의 스탠리보다는 신사적이고 따뜻하긴 했지만 여전히  뭔가는 아쉬웠다. 그래도 할처럼 이기적이고 사기꾼이 아닐지라도 그가 걸친 옷들 그가 가진 배경들을 보면서 그저 이것이 저것보다 더 낫다고 선택하기에는 망설여지는 것.. 그래서 슬프고 아쉽고 그랬다.

나이를 먹고 때를 먹고 세상살이가 교과서대로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 이것과 저것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물론 도덕적 법적인 테두리를 지킨다는 건 언제나 맞는 말이지만 그 범위안에서 얼마만큼의 선택을 하고 어느 정도까지 눈감을 수 있는가의 문제는 여전히 딜레마이다.

재스민이 안쓰럽고 허황되다는 걸 분명하게 알면서도 그녀를 동경하는 마음이 있고 진저의 현실성을 높게 사면서도 그녀처럼 되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이 공존하는것

내게 있어 찰리정도면 나쁘지 않다는 것 그만하면 착하고 성실하다는 걸 알지만 사기꾼 할에게도 끌릴 수 밖에 없는 게 사람의 마음이 아닐까

그래서 영화 내내 누가 악당이고 누가 선한건지 구분할 수도 없고 구분할 필요도 없었다.

누구든 나일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슬프고 아름답고 답답하고 기묘한 영화였다.

역시 우디알렌이라는 말만 할 수밖에...

영화를 보고 나의 속물스러움을 들킨 기분도 들면서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마음도 들고 암튼 그랬다.

하지만 재스민이 누군가에게 혹은 아무에게나  의식없이 혼자 중얼거리고 대화하는 모습은 여전히 짠하고 저렇게만은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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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잘랐는데 왕자표 크레파스의 메인모델이 되버렸다.

앞머리를 자르지 않겠다고 했는데 깜빡한 미용사가 잘라버리는 통에 그만.. 몽실이 윌리윙카 혹은 왕자표 크레파스 머리가 되버렸다. 나이나 어리면 귀엽기라도 하지 마흔 중반의 아줌마로서는 대책이 서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왠만하면 약속을 만들지 않고 나가더라도 일찍 들어오며 저 멀리 누군가 아는 얼굴이 보이면 돌아간다. 얼른 머리가 자라길 바랄 뿐이다.

옛날 엄마들 처럼 보자기를 두르고 다녀야 하나싶다. (머리통이 커서 맞는 모자가 없다. ㅠㅠ)

이 머리를 하고 서울로 그것도 광화문 한복판으로 영화를 보려갔다.

제목도 다정하고 고풍스러운 "우리 선희"

갑자기 고등학교때 수학선생님을 짝사랑한 심한 곱슬머리 선희라는 동창이 생각났다. 어떻게 살고 있을까 당시 교복자율화였는데 선생님께 잘 보이려고 녹색 원피스를 입고 온 적이 있었는데  다른 친구가 시니컬하게 한마디 했었다. " 선생님 생맹이잖아. 니가 그렇게 입어도 우중충하니 회색으로 보일껄.." 갑자기 수학샘도 선희도 궁금하다.

각설하고

우리 선희 (Our Sunhi

 

참고로 광화문으 스폰지 하우스는 혼자 영화보기 정말 좋은 곳이다. 그곳은 누군가와 함께 오는 사람이 더 어색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함께 판매하는 커피맛도 괜찮다. 가격도 그리 사악하지 않다.

영화는 늘 그렇듯 홍상수 영화다.

 

1 늘 나오는 배우들 비슷한 성격과 정말 리얼한 일상들의 묘사탓일까

  보면서 지난 번에 내가 본 홍상수 영화의 제목이 기억나질 않고 제목이 기억나는 영화는 내용이 어쨌는지 기억나질 않았다. 뭐였더라 이 장면 이 주인공의 행동이 지난번과 비슷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각각의 영화가 뒤엉켜버려서 옥희의 영화인지 북촌 방향인지 해원이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문득 드는 생각 뒤엉켜도 별 상관없구나 이야기는 여전히 이어지고 주인공들의 성격도 여전하구나.. 비슷해서 식상하다는 느낌보다는 어짜피 일상이라는 것이 어제가 오늘같고 오늘이 내일같은 걸... 어제 본 놈이나 오늘 같이 술을 마시는 놈이나 찌질하고 한심하긴 마찬가지고  뭐 그런 정말 잔인한 현실감을 느낄 뿐이다.

 

2.카메라맨은 정말 할 일이 없겠다.  연극무대처럼 카메라는 그자리에 박혀있고 인물들이 들어왔다가 나갔다가 혹은 길게 길게 대화하고 연기한다. 저거 한번 실수하면 끝이겠구나 싶은 생각에 내가 엉뚱하게 긴장되었다.. 술도 마시면서 다들 참 능청스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배우라는 걸까 아니면 저게 저 사람의 본모습일까

 

3. 혼자 있을 때는 모든 인물들이 멀쩡하다.

   둘 이상이 되면 이상해진다. 거기에 술까지 들어가면 망가진다.

   도저히 맨정신으로 보일 수 없는 바닥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웃을 수만도 없고 냉소적일 수도 없다. 그게 나니까..

 

4. 정말 말들이 많다. 하지만 거의가 동의반복적이다. 내가 했던 말을 저놈이 또 자기것인양 딴놈에게 하고 딴놈은 제것인냥 내게 한다. 어라 어디서 듣던 말인데... 누가했지? 아하.. 내말이구나 뭐이런.. 그렇게 말의 잔치가 벌어지는데 전혀 소통이 되질 않는다. 우라질.

다들 제말만 하고 있다. 타인의 말에 귀이울이지도 않고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내가 꼬이면서도 계속 혼자 지껄인다. 서로 이해하건 상관없다. 열하루는 입도 못뗀 사람처럼 그래서 입속의 군내를 없애려는 듯이 말을 해댄다. 그래서 외로워보인다. 다들 소통하고 싶은데 그게 쉽지 않다. 마주앉아서 술을 마시지만 혼자 떠들고 자기랑만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아.. 슬프다.

 

5.결국 긴 시간 술을 마시고 떠들지만 상대방을 알지 못한다. 나를 보여주지도 못한다.

   술이 깨면 필름이 끊어지고 어젯밤이 생경해지는 것처럼 다음에 멀쩡하게 만나면 서로 서먹하고 묵묵해진다. 뭔가 상대에게 근사한 존재가 되고 싶은데 찌질하 놈만 아니면 다행이다.

 

5. 결국 선희를 만난 세 남자는 선희를 잘 알까? 내가 본 선희를 선희의전부라고 생각할 뿐이다.

선희는 그 세남자를 잘 알까? 그래도 선희가 영악하다면 그들을 잘 알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기 바랄 뿐이다. 뭐 타인에 대해 그렇게 잘 이해하는게 꼭 필요한건 아니다.

그래도 슬프다. 함께한 시간이 그렇게 의미없어져버린다는게..

 

6. 나와 남이 소통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것  그건 학교에서도 가르쳐주지 않는 것이다.

도데체 어디서 익혀야 한단말인가..

 

사족..

이제 이선균은 거의 홍상수의 남자가 되었나보다. 찌질하고 귀엽고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가 자기 옷처럼 잘 맞아 떨어진다.

김상중의 제 2의 문성근이 되려는 걸까? 하지만 문성근이 가진 지적이고 세련된 모습뒤의 야비함 보다는 귀엽고 어설퍼서  매력적이다.

정재영은 홍상수 영화에서는 첨이지만 잘 스며든다. 하지만 나는 이 남자의 " 아는 여자"에서의 연기가 가장 좋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중 하나이기도 하고.. 이나영과 묘하게 잘 어울렸다.

정유미는 이제 정말 내가 아는 여자같다. 똘똘하고 영리하지만 어딘가 똘끼가 충만하고 허당스러운... 정말 사랑스럽다.

여기서 유준상의 귀여운 찌질함을 못 봐 안타깝고..  김상경의 느물거리는 모습도 이제 보고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영화를 보니 낯술 생각이 간절하다. "언어의 정원"보다도 더...

영화를 보고 가까운 덕수궁이라도 갈까 싶었지만 힐끗 들여다 본 궁안은 아직도 초록일색이다.

조금 더 붉은 색 노란색이 많아지면 다시 한번 영화를 보고 궁으로 가야겠다. 혼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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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29, 2013 : 실시간

2 데이즈 인 뉴욕 (2

 

 

 

줄리델피가 많이 나이를 먹었다.

이전작이었던 비포 미드나잇에서도 뱃살과 늘어진 볼 주름을 감추지 않고 당당하게 나왔을때 참 당혹스러웠다. 그래도 여배우인데.. 그것도 프랑스 여배우인데.. 이래도 되나 싶은..

그런데 그게 참 좋았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며 주름지고 늘어나고 불어나는 게 정상이 아닐까

그의 외모는 많이 변해서 참 동질감을 많이 느끼게 되었지만 그의 팔팔한 정신과 세계관은 여전하다. 전작에 이어 여기서도 남편과 혹은 주위사람과 참 많이 싸운다.

싸운다는 것이 그저 소모적인 행위나 누군가를 미워하는 에너지를 마구마구 내품는 것이 아니라

나를 드러내고 표현하고 남을 받아들이려는 행위로 인식된다.

그녀는 비포... 시리즈에서도 참 많이 떠들고 싸웠다.

비포 미드나잇에서 나이든 부부가 자식 문제 등등으로 호텔에서 처절하게 싸우는 걸 보면서 아.. 부부마다의 문제나 갈등이 프랑스라고 우아하지는 않구나 싶었다.

그러면서도 부러웠던 건 싸움이 참 싸움답게 잘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누군가 문을 쾅 닫고 나가버리거나  못 들은 척 안 들리는 척 하지 않고 마주보고 듣고 말하고 또 듣고 말하고.. 그렇게 계속 싸울 수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적어도 피하거나 무시하는 건 아니니까

정말  잘 산 부부는 이렇게 싸울때도 서로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싸울 줄 아는 부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영화에서의 줄리 델피도 마찬가지다.

전형적인 프랑스 여자인 그녀는 감정기복도 심하고 조울증을 보이기도 하지만 유쾌하고 자신에게 솔직하다. 조금은 가벼워보이는 그녀의 남자친구도 그녀와 참 합이 잘 맞다.

프랑스에서 온 가족 문제로 두 사람이 언쟁하는 씬이 몇번 나온다.

레스토랑에서 동생이랑 치고박고 싸운 후 밖으로 나가 언쟁하는 씬이나 그  전시회가 망했다고 생각하고 거리를 헤메고 와서 둘이 투닥거리는 씬이 참 좋았다.

서로를 피하지 않고 비난하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이해하고 이해시키기 위한 싸움

그렇게 서로에게 열렬하게 퍼부으면서 자기 생각을 조율해나간다는 게 부러웠다.

 

싸우면 감정적이 되고 옛날 해묵은 감정까지 스멀스멀 올라와서 욱하게 되고 결국은 누구 하나는 그냥 회피하거나 무시하게 되는 싸움은 그냥 싸움이다.

끝이 없고 반성도 없고 감정만 남을 뿐이다.

그런 싸움만 이어지면 아이들 보기도 창피하고 결국은 왠만하면 안싸우려고 하지만 그건 화해나 이해가 아니라 그냥 회피이다. 아예 모른 척 속으로 온갖 저주를 퍼부으면서도 겉으로 아닌척 하는 것 웃으면서 상대의 커피잔에 침을 뱉는 행동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영화 내내 난 커플의 다툼이 부러웠다.

현명하게 누군가와 다투고 언쟁을 할 줄 아는 그녀가 부러웠다.

뱃살이 나오고 얼굴이처져도 여전히 나보다 아름답고 게다가 말싸움도 쌈박하게 잘하는 프랑스 여자... 그녀는 여전히 매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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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좋아하지 않은 내가 아이를 둘이나 낳은 이유는...

 

1. 무방비로 있다가 어쩔 수 없이

2. 그래도 하나보다는 둘이 있으면 둘이서 잘 놀지 않을까.. 그러면 난 좀 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생각..

3. 그래도 둘이면 남들이 뭐라고 하지는 않을거니까

  (왜 결혼을 안하냐. 왜 애는 안낳느냐.. 왜 하나만 낳느냐.. 하는  무한관심을 가장한 오지랍스러

   운 질문들의 회피용으로)

 

 

처음엔 어느정도 성공이었다.

남들이 인정하는 꽤 다정한 언니였고 사랑스러운 동생이었는데

한 두해 전부터 삐그덕거리기 시작이다.

언니때문에 못살겠다. 동생이 부끄럽다.

언니는 맨날 시키기만 하고 틱틱거리고 다정하지 않다.

동생이 언니를 무시하고 함부로 말하고 때리기까지 한다. 적어도 난 손은 대지 않는다.

.....등등등.. 등등등

 

한쪽을 잡고 이야기 해보면 구구절절  속상하겠구나 싶고 힘들겠구나 싶어서 다독이지만

둘을 다시 붙여놓으면 이건 개와 고양이 . 개와 원숭이 물과 기름

이런 부조화도 없다.

다정할때 조차 언제 돌변할 지 모르는 위태위태함을  드러내기 일쑤고

한명만 데리고 외출하면 나마저 마음이 평화롭다.

그래도 언니인데.. 동생인데 같이 갈까? 하면 둘 다 펄쩍 뛴다.절대 네버...

왜 이렇게 됐을까

 

가만히 나를 돌아보기도 했다.

내가 둘 사이를 이간질 시키는 뭔가를 했나?
아니면 내가 둘 에게 무한한 애정을 주지 못해 결핍 상태인가?

결국 나의 화려한 계획은 처절한 실패다. 지금은...

 

둘째가 툴툴대며 하는 말이 있다.

엄마는 나랑같은 둘째이고 B형인데도 날 너무 이해하지 못해

엄마는 좋은 언니가 있었지만 난 너무 이기적이고 쌀쌀한 언니가 있을 뿐이야. 엄마랑 달라

큰애는 내가 둘째라 자기를 이해못하는 거라고 하고..

 

아.. 고양이처럼 혼자 뭉기적대고 누구의 간섭도 다정함도 싫어하는 큰아이랑

누구랑이라도 다정하고 싶고 서로 비비고 싶은 강아지같은 둘째는 계속 평행선만 그을까

 

솔직히 나에게 있는 자유에 대한 갈망과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을    두 아이가

각각 한가지만 물려받아 가지고 있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이리 들으면 이 아이가 이해가고 저리 들으면 저 아이가 이해가 가니...

 

이거 나이들면 해결이 될까요?

두 아이의 하소연에 귀막고 싶을 따름이다 지금 이순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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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어정쩡" 이 딱이다.

어정쩡...

이렇지도 않고 그렇다고 저렇지도 못한 중간에 끼어서 뭐라고 정의내리기 참 애매한 존재.

내가 살아온 날들을 돌아봐도 그렇다.

이렇다 할만큼 똑 부러지게 뭔가를 한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냥 천사표처럼 허허거리면서 순진하게 살았던 것도 아니다. 그저 적당히 위악도 떨었고 적당히 비굴하게 착하척도 하면서 그렇게 살았는데 운이 좋았는지 별 어려움이 없이 지금까지 나이 먹었다.

내 아이들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가끔 내게 묻는다.

"엄마가 내 나이때 꿈이 뭐였어?"

"꿈?"
이 질문 큰 아이가 6살때부터 줄기차게 받아온 질문이다.

처음에는 이랬다

"엄마는 꿈이 뭐야? 지금부터 꿈을 꾸어야 뭐라도 되지 않겠어?"

처음 그 질문을 받았을 때 가슴에서 뭔가가 쿵하고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때는 마흔도 되지 않았는데 이미 모든게 지나갔다고 생각했던 시기라 그랬던거 같다.

지금 내가 무엇을 꿈꿀 수 있을까

하지만 그 질문을 했던 여섯살 짜리가 이미 열네살이 되어버린 지금 생각하면 그땐 뭐든 꿈꿀 수 있었던 때였구나 싶다.

속된 말로 지금이 내가 살아갈 가장 젊은 순간이라는 것

그걸 알지만 지금도 가끔 어릴적 꿈이 뭐였는지 지금이라도 돌아간다면 무얼 하고 싶은지 물어보면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답할 수 있는 건 없다. 그렇다고 깊이 고민을 해도 대답할 수 있는 게 없을 거같다.

슬프다.

결국 나란 사람은 그렇게 그때나 지금이나 "어정쩡" 이 가장 적당한 대답이다.

 

뭐가 되고 싶다는 당찬 꿈도 허황된 망상도 없었다.

어쩌면 일찍 철이 들었던 거 같기도 하다. 뭔가를 꿈꾼다고 다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이미 알았고 세상에는 내가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들보다는 얻을 수 없는게 더 많다는 것도 알았고 그리고 맘대로 살아도 되는 건 아니지만 그냥저냥 게을러도 살아가는데 지장없는 나름 여유있는 부모도 있었던 까닭이었다.

난 뭐가 되고 싶었을까

뭐랄까 그 무엇이라는 것이 직업이라면 나는 구체적으로 꿈꾼 직업들이 없는 건 아니다.

기자가 되고 싶었고 선생님도 되고 싶었고 작가도 되고 싶었다.

어쩌면 어떤 일을 하건 내 일에서 프로가 되고 싶었고 그 일이 글쓰기랑 관련이 있었으면 하기도 했다. 참.. 한때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그렇게 준비하다가 덜컥 은행에 입사하게 되면서 그냥 접었다.

그때 모든걸 거기에 걸었던 친구는 지금 그 길을 가고 있다. 크게 성공한건 아니지만 지금 후회하는지는 모르지만 자기의 꿈을 이루기는 했다.

그런데 나는 뭔가를 꿈꾸다가도 신포도를 앞둔 여우처럼 늘 변명을 했고 이유를 찾았고 조금은 쉬운길로 방향을 틀어갔다.

운이 좋았는지 그나마 재능이 있었는지 그 시작은 항상 잘풀렸지만 끝이 엉망이었다.

시작은 하되 끝을 본 건 하나도 없다.

젊은 천재가 가장 불행하다는 건 맞는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천재씩이나 되는 것도 아니지만 뭔가 초반 운이 잘 풀리는 만큼 그것을 지속하는 끈기나 독기가 부족했다.

늘 어정쩡 좋은 것도 아니고 싫은 것도 아니고 잘 하는 것도 아니고 잘 못하는 것도 아닌

모든 걸 알고는 있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이 내 상황이다.

 

세상을 나혼자 잘먹고 잘 산다는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면서 내 주위의 상황에 눈물을 흘리긷 하지만 돌아서면 나도 명품백을 매고 거리낌없이 백화점을 돌아다니고도 싶었다.

잘 나가는 브런치 카페에도 아는 척을 해야하고 소외받는 이웃에 대해서도 깊이있는 성찰을 보이고 싶었다. 두 가지가 상반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나는 뭐든 잘나고 싶었던 것일뿐 뭐하나 깊이있게 빠지지도 못했다.

여기가면 저기가 걸리고 저기 가면 여기가 그리웠다.

누군가가 나를 강하게 이끌어준다면 그대로 끌려가고 싶으면서도 막상 뭔가에 끌리는 순간엔 주저하고 간을 보고 의심하기가 끝이 없었다.

 

책을 읽는 이유도 그랬다.

뭔가 사회를 사람을 알고 싶었고 소통하고 싶었다. 내가 모르는 세상이 없었으면 하고 바랬다면 그건 욕심일 뿐일까

책모임에서 김중미의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읽으면서 누군가가 그랬다.

이 책을 나쁘다고하지는 않겠지만 이렇게 막막하고 마음아픈 이야기는 내 아이에게 권하고 싶지 않다고 .. 굳이 이런 이야기를 아이에게 읽히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때 순간 반발이 들었고 내생각은 그랬다.

내가 아이에게 이 책을 꼭 읽어야 한다고 권할 필요는 없지만 아이가 이 책을 궁금해하고 관심을 가진다면 나는 기꺼이 권하겠다. 아이에게 권하기는 할것이다. 그리고 읽느냐 마느냐는 아이가 결정할 일이지만 나는 아이에게 내가 모르는 세상을 보게 하는 기회를 뺏고 싶지 않다고..

내가 모르는 세상에 대한 책을 한두권 읽는다고 사람이 변하지는 않는다.

아니 모든 사람이 변하지는 않는다.

내가 모르는 일이라 이해를 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마음아파하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몇몇에게는 또다른 행동까지 이끌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건 사람에 따라 다른 거니까.. 그걸 마음아프니까 막막하고 기분이 좋지 않으니 막아야 한다는 건 아니라도 생각했다.

나역시 김중미를 읽고 김애란을 읽고 누군가가 동화로 쓴 용산이야기를 읽으면서 마음이 몹시 아팠다. 아팠고 미안했고 또 미안했다.

나도 이제는 기성세대가 되어버려서 그저 미안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내가 그런 것도 아니지만 내가 전혀 책임이 없는 것도 아닌.. 어쩌면 어정쩡했던 모래알같았던 내 일상의 무심함이 모여서 뭔가를 저질렀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미안했고 가만 있는 것도 힘들었다.

무언가를 행동할 수도없었고 하지도 못했으면서 그저 읽고 또 읽으면서 마음아파할 뿐이었다.

그런데..

어정쩡한 삶은 그게 전부였다. 부끄럽지만..아직도 읽고 있을 뿐이다. 나는..

아직도 나는 읽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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