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이해하는 건 쉬워진다.

내 경험이 넓지 않아도 살아온 연륜이라는게 생기긴 하나보다.

작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 그것이 설령 내가 곡해하는 것이라 해도

알아 먹겠다.

 

다만... 문득 문득 떠오르는 구절이 내용이 누구의 무슨 작품인지 도저히 모르겠다,

연달아 단편들을 읽었는데 거기 나오는 단편적인 상황은 떠오르는데 무슨 작품인지 도통 모르겠다.

이제 예전 할머니 말씀이 이해된다.

 

무딘 니 두뇌를 믿지 말고 예리한 펜 끝을 믿어라.

 

그래서 나는 읽는 대로 메모하고 기록하기로 한다... ㅈ짧고 유치하게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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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아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내가 그 시간속에 함께 있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 몰랐던 것들이 한참  시간이 지난 후 알게 되는 것들이다.

어쩌면 시간이라는 것들에 푹 빠져서 깊이 깊이 숙성이 된 다음에야 맛이 드는 것처럼 그제사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다.  사람들은 그걸 후회라고도 한다. 깨달음이라고도 하고

 

그땐 내 마음도 몰랐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건지 미워하는 건지 아니면 애써 쿨한척 하는 오락가락하는 마음이었던 건지

누군가를 미워했다고 믿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 내가 미움 받을까 위악을 떤 것이었다고 나중에 알게 되기도 한다.

그땐 다 이해했다고 니 마음 내가 알고 니 아픔 내가 공감한다고 두 손 잡고 함께 울었고 술잔에 취해 주절주절 떠들었는데 돌아보면 내가 뒤통수 맞은 일이었따거나 내가 아주 오해하며 그 사물을 혹은 사람을 사건을  한단면만 바라보았구나 하는 가슴치는 한탄이 따르게 되는 경우도 있다.

 

세상에 정리되고 통제되는 숫자와 건조한 문장들로 그 모든 감정을 다 살릴 수 없다.

몇년에 태어나고 몇년에 죽고   언제 어느때 몇시에 사고가 발생하고 피해자가 몇명이고 피해액수가 얼마이고 그로 인한 손실이나 복구비가 얼마가 든다든가

누군가가  언제 태어나고 언제 취학통지서를 받고 입영문서를 받아 군대를 가고 몇년에 결혼을 하고 언제 사망했는가 하는 기록들은  마치 마른  곤들래 같아서.. 그걸 시간이라는 물속에 푹 담궈놓고 한참을 잊고 나서야 아차.. 내가 곤드레를 담궜었는데 기억하고 다시 양푼이로 달려가도 그 곤드레는 그저 뻣뻣함이 가실뿐 아직 먹을 수 있는 상태는 아닌 것처럼.. 겨우 뭔가 기록과 숫자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게 전부이고 끝이 아니다. 곤드레처럼

 

오랜시간 미지근한 물속에 담겼던 곤드레처럼 푹 물러진 이야기는 이제 그 향을 드러내고 본래 모습을 드러내긴 하지만 어딘가 원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얼마나 물에 담궜는가.. 말리는 과정에서 어떤 변화가 있는가에 따라 곤드레의 모양이 다르듯이 이야기도  그걸 들여다 보는 사람의 마음과 상황 그리고 시간적 공간적인 것에 제한을 받을 것이다.

누가 어느방향에서 들여다 보는가. 얼마만큼의 애정을 가지고 들여다 보는가 에 따라 다른 무늬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내가 발견하지 못한 뒷부분의 이야기는 여전히 끝없이 숨어있다. 태어나 처음 만진 코끼리의 다리가 전부라고 믿는 장님처럼 그 다리에 대해서만 뭉툭한 기둑같은 것 아래 있는 손바닥만한 발톱하나만 만져보고는 아... 여기 무언가가 숨어있다 이것이 본질이라고 외치는 어리석은 장님처럼 아마 내가 본것에만 집착해서 그게 전부라고 믿어버리고 의미를 부여하고 만족해한다.

허나.. 이야기는 아직 끝이 아니다.

 

그래서 더 오랜 시간이 흐르고 한번 더 끓여내고 밥과 함께 푹 익혀진 곤드래만 먹을 수 있다

그제사 아.. 곤드레가 이런 맛이구나 하고 아는 것처럼

이야기는 시간속에 더 푹 담겨서 고아졌다가 모든 것이 흐물흐물 형체도 없이 뭉개져서야 비로소 또 다른 면을 드러내고  나는 퍼즐을 맞추듯이 그때 이런 이런 상황이었음을 다시 깨달으면서 바보가 도통하듯이 아하! 하고 한탄한다,

 

그래도 그것이 모든 건 아니다,

 

 

 

 

 

 

 

단편을 읽는게 편했다

읽는 호흡이 짧아서 긴 글은 적응이 되질 않았다, 얼른 무언가 어설프도 끝이 났다는게 내겐 중요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오징어를 씹고 난 뒤처럼 뭔가 오래오래 남아서 조금 찝찝하기도 하고  혹은 더 오래 여운을 가진다는 착각도 하면서 내 나름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게 좋았던거 같다.

아무래도 장편은 작가의 의도가 그대로 드러나지만 단편은 독자가 읽고 판단함에 따라 여러가지의 결론이 나올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던거 같다.

그리고 단편은 읽었다고 만족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면 이게 저거같고 저건 또 저기 있는 무언가와 닮은 느낌이란 혼란만 늘었다,

나이를 먹었으니까 뭔가 기록해두지 않으면 기억속에서 뒤섞이는 현상인지 아니며 단편들이 가지는 공통점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 어떤 작가가 쓰든 단편들은 비슷해보였다

읽는 동안은 작가의 색채가 느껴지고 각각이 가지는 고유한 문장이라든가 쉼표들 혹은 묘사가 있지만 그 내용이 형식이 내 안으로 들어와서는 작가고유의 것들과 내것이 뒤섞인다,

내가 가졌던 경험들 내가 품었던 생각들이 작가의 그것들과 섞이고 반죽되고 삭혀지고 부풀어지면서 나이들면 비슷해지는 모양새처럼 그렇게 비슷비슷한 것들이 되어버렸다,

 

결국 남은 건 한 참 시간이 흐른 후 느끼는 되새김질이 주로 단편에 많구나 하는 생각이다,

그땐 미쳐 깨닫지 못했던 것들,, 너무 젊어서 너무 무지해서 혹은  사느라 바빠서 잊고 있던 것들이 잠자리에 누워 천정을 올려다보며 점점 말똥말똥해지는 정신으로 혹은 어떤 사고를 겪은 후 내 사고의 틀이 뒤바꾼 후 아니면 그저 시간이 흐르다 보니 그때의 일들이 문득 떠오르고 그때 그게 아니었구나 하고 무릎을 치거나 뒤늦게 후회되는 것 혹은 알아가는 것들이 단편속에 숨어있다,

 

장편은 나름의 긴 서사로 인해 고유의 생명을 오래오래 유지하게 되지만

단편은 그렇게 나와 뒤섞여서 또다른 이야기로 재 탄생되어버린다,

그게 단편의 매력인지 나의 무지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내게는 장편보다 뭔가 고민할 거리를 더 많이 던져주고 이리저리 꿰어맞추고 이야기를 굴리다보면 또다른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하는 것..

그것이 단편을 읽는 재미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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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박사는 누구인가?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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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저마다 이야기 속에 한가지씩 여백을 두고 그 여백을 채우려 다른 이야기들을 만들어내는 법인데. 그게 이 세상 모든 이야기들이 태어나는 자리인데 그때의 나는 그것을 미쳐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모부만 해도 그렇다. 내가 고모부에 대해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것은 아마 그 부분이 내겐 여백과도 같은 부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 같은 것.   p 85   밀수록 다시 가까워지는.

 

 

그래서 판결문 속 문장들을 모두 그런 식으로만 채웠던 것일까? 형용사 하나없이 시간대별로 주어와 목적어와 술어로만 나열한 그 문장들은 오로지 입증 가능한 사실들로만, 누군가가 술을 마시게 하고 또 누군가 그 술을 마시고 , 또 누군가 그 술때문에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는 결론들을 향해서만, 무정하게 내달리고 있었다. 나는 그 문장들이 답답했고 또 한편 불편했따. 내가 답답했던 이유는. 그 안에는 p가 그 즈음 겪었던 실연과 그로 인해 한글자도 쓰지 못하고 지낼 수 밖에 없었던 나날들과 치기와 분노와 우울의 기록들이 모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들은 모두 입증 불가능한 셰계이니까, 법의 이름아래 고려되지 않고 모두 배제된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엄연한 사실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답답했다. 내가 불편했던 이유는 나 역시 그 문장들과 똑같은 태도를 지난 몇개월동안 취했다는 사실을 그제야 똑똑히 정면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입증 불가능한 세꼐를 빤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침묵하는 쪽을 택하고 말았다. 누군가 죽었으니까 그 어떤 무게도 그것보다 더 무겁지 않다는 생각을 분명 하긴 했지만 좀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 누구에게도 비난받고 싶지 않았다. 눈에 부이지 않는 세게로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만큼의 용기가 내겐 없었던 것이었다. 어쨌던 죽은 박수희 역시 내 제자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까 그것만 입증 가능한 새계였으니까

                    p193  탄원의 문장

 

나는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짐작과 진실 사이엔 그리 큰 강물이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짐작이란 어쩌면 진실을 마주 보기 두려워서 그게 무서워서 바라보는 그림자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또한 갖게 되었다. 그러니 이 이야기의 운명 역시 어쩌면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저 모르는 척 다른 이야기를 하는 마음 들 강의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하는 짐작들. 나는 지금 그것을 하려고 하고 있다. 이제야 비로소 중요한 건 두루마리 휴지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p 263   화라지송침

 

 

어쩌면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참아내고 있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지금 참아내고 있는 그 무엇으로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증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독을 참아내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죄의식을 찿ㅁ아내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거절을 참아내는 사람과 망상을 참아내는 사람들 당연한 말이지만 그 사람들 모두가 같을 수는 없다. 거기에 더해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참아내기도 한다. 누가 어떤 괴물 같은 짓을 하더라도 그것을 참아내고 있는가 누가 그것을 견뎌내지 못하는가 그것이 우리의 현재를 말해주는 숨겨진 또 하나의 눈금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나나 아내나 우린 뚤 다 기종씨를 참아내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물론 나의 그것과 아내의 그것이 다를 수도 있ㄷ고 나의 짐작과 아내의 진실이 같을 순 없을지라도, 기종씨를 외면했다는 점에서 아내나 나는 같은 사람이었다. ..........................아내나 나나 우리는 서로가 서로르 ㄹ참아내는 선에서 그렇게 적당히 타혐하면서 지내는 사람들인지도 몰랐다. 그게 조금 쓸쓸하게 들릴지 몰라도 그게 또 우리였으니까.    p 323

 

 

고백하자면 살아오면서 조금 비겁하게 눈감고 모른 척 지나온 것들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뭐 대단한 정의나 도덕같은 게 아니더라도

내 옆에 있는 가까운 사람의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 보고 공감하려기 보다 귀찮고 무언가 복잡한 일에 얽매일까 두려워서 그저 건성건성 아는 척 하고 넘아가는 일들이 많았다.

아이에게도 나는 눈맞추며 이야기하기보다 한귀로 흘려들으면서 엄마는 다 알아.... 이해해.. 사랑해... 그렇게 앵무새처럼 되뇌인적도 적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제 몫의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고 그 제몫이라는 건 누가 도와주거나 해서 줄어드는 건 아니라는 이기적이고 냉소적인 생각이 속이 또아리를 틀고 있었던거 같기도 하다.

그냥 안듣고 말면 그만이니까

그러다 보니 무언가를 이해하는 것도 그저 겉핡기에 지나지 않은 적도 많았을 것이다.

누군가 아파하면 그래 그랬구나.... 하고 추임새를 넣으면서도 내 한쪽에서는 너만 그런거 아니거든.. 누구나 어려운 일을 겪는 법이거든.... 무게의 무겁고 가벼움이 문제가 아니라 그게 나한테 닥쳐진 상황이라는 건 누구에게도 똑같은 거거든.. 하는 얄미운 소리만 속으로 퍼부었다.

 

어쩌면 내가 그렇게 얄밉게 굴지 않고 이타적이고 누군가를 이해하고 공감하려고 노력하는 아주 천사표인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상대를 모두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내가 타인이 아닌 이상 그의 말을 행동을 고개 끄덕이며 진심으로 그럴 수 밖에 없겠구나 하고 생각했을까.. 설령 그랬다고 하더라도 그건 결국 내 입장에서 문제를 다시 분해하고 재조립해서 이해한 것은 아니었을까...

 

사실 즐거우려고,,, 키득거리려고 소설을 들었는데 한편 한편 읽으면서 마음이 무거웠다.

첫이야기 "행정동"은 그래도 나았다.

내가 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보이는 것 표면에 드러나는  이면에 많은 것들이 숨어있다는 것을 고개를 끄덕이면서공감했다.

 

"밀수록 가까워지는" 에서는 마음이 좀 그랬다. 그 삼촌의 마음이 무엇인자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화자인 조카만큼의 먹먹하고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한 사람을 모두 안다는 건 본인도 불가능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삼촌도 자기를 제데로 알았을까?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감정의 격정에 휘둘리면서 갈등했을 것이고 본문에 있는 문구처럼 삶의 공백은 스스로도 채우지 못한 빈칸으로 남겨질 때가 많은 법이니까.

 

"탄원의  문장" 에서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알고 있는 누군가는 그 사람이 맞는가? 나는 어쩌면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보고 나의 기호에 따라 상대를 판단하고 오해하고  엉뚱한 사랑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나의 정의감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기도 한다는 것... 나는 그 단편에서 최의 입장보다도 그 최가 울타리 뒤에서 들었던 노부부의 대화에서 그만 탁.. 무언가가 무너져 버렸다. 삶의 이면이라는 것 쉽게 남에게 보여지지 않는 그 세세한 빈 부분은 누가 감히 판단을 하고 정의를 내릴 수 있을까

 

"화라지송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보는 것 내가 견디는 것 내가 참아내는 것들.. 그것이 전부인 건 아니다.

마지막 화자의 상상인지 현실인지 과거의 모습에서 컥... 무언가 떨어져 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모든 책을 다 읽고 드는 생각은 죄책감이었다.

내가 의도를 했던 하지 않았던.. 혹은 내가 그저 제 3자로서의 입장일지라도 같은 인간으로 느끼게 되는 죄책감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누군가에게 미안한것들은 어쩌면 내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맥베드에서 나왔었나? 무지야 말로 가장 큰 죄가 아닐까 하는 것

작중 인물들은 상대를 배려하고 위해주려고 노력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오히려 상대에게 상처가 되거나 또다른 누군가를 소외시키는 일을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그저 어느 순간 눈을 감아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잊어버리면 그만이지만 이 찌질한 인물들은 어쩌지도 못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이다.

 

비겁하고 비굴한 나도 그랬다.

아이에게 혹은 친구에게 이웃에게

이게 아니고 저거라고 뭔가 무모하게 혹은 단호하게 내 주장을 내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남의 입장을 전적으로 이해하고 공감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어정쩡하니 맞장구만 치고 그래그래 니가 힘들었겠구나 하고 말하지만

돌아서면 찝찝해지는 기분

아.. 이게 아닌데.. 저 사람이 모든게 옳은 건 아니잖아.

그게 옳은 건 아닌데 왜 난 그 말을 못했을까...

하는 죄책감 혹은 후회로 똘똘 뭉쳐서 나만 괴롭힌다.

그리고 집에 웅크리고 앉아서 다시 그 일을 복기하면서 내가 어떤 지점에서 어떻게 행동했떠라면 어땠을까 하는... 하등 도움이 되지도 않고  무가치한 일에 매달리고 있다.

그렇게 모든 일을 되돌아보면서 느끼는 회한에서 비겁한 사람은 어떤 교훈도 얻지 못하고

또다른 죄책감을 얻어오는 일을 반복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주인공들이 남같지 않아서... 그래서 괴로웠다.

허허 거리고 웃거나 한숨쉬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니가 바로 이렇잖아.. 하고 확 내질러버릴까

전전긍긍하게 되었다.

 

십수년전 일을 새삼 여기에 다시 꺼내든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이 내 안에서 아직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해되지 않고 알 수 없는 일들을 잉해하기 위해선 우선 그것들에 대해서 차근차근 이야기 해야한다. 그것이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윤리이다. 

 

윤리라고 믿고 있는 한 나는 계속 후회되는 부분을 죄의식을 느끼는 부분을 복기할 것이다.

(하지만 무언가 결론을 내리거나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중요한 건 아닐것이다. 중요한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깊이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내겐 소소한 위안이 되기도 하니까..)

 

 

 

참고....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라는 책과 함께 나의 올해의 책에 들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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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광주는.. 대학엘 들어가서 음성적으로 틀어주던 그 충격적인 영상에서가 아니라

 임창정이 참 우스꽝스럽게 나와서 어이없이 휘말리고 안타까워하던 영화 스카우트 그리고 공선옥의 "라일락이 피면"에 수록된 짧은 단편에서였다

 

 

나에게 용산 참사는 그 근처에 살고 있던 그때의 기억이나 신문 혹은 다쿠멘터리 등이 아니라  동화책 " 동화없는 동화책"속의 작은 이야기에서 였다.

 

 

나에게 삼풍백화점은 그 당시 하던 일을 잊고 몰두하던 신문 뉴스 방송들이 아니었고 정이현의 오늘의 거짓말에 들어있는 단편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세계사에서 혹은 화면에서 보았던 홀로코스트도 결국 나는 모퍼고의 "모짜르트를 위한 질문"을 통해서였고

 

 

아마 지금 기억하지 못하는 여러가지 역사적인 사건들 사건 사고들을 기억하는 건 어쩌면 정확한 통계와 사실을 보여주는 뉴스가 아니라 전해들은 혹은 재구성되어 허구가 섞여진 이야기들을 통한 것이라 믿는다.

 

이야기의 힘은.. 사실은 아니지만 사실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눈으로 숫자로 기록된 객관적이고 차가운 사실이 아니라

오늘 내가 만난 사람 스쳐지난 거리 

나처럼 화내고 짜증내고 돌아서서 미안하고 머쓱했던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로 들려준다.

그래서 사망 00명 어쩌구 저쩌구가 아니라

누군가의 아버지 누군가의 친구 누군가의 누나가 되어 나와 다르지 않는 사람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뉴스를 통해 들은 사건은 그저 냉랭하게 머리속을 맴돌지만

이야기를 통한 사건들은 마음이 먹먹하고 눈가가 지끈거리는 감정으로 다가와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아있다.

이야기는 그런 것이다.

시시한 거짓말이거나 화려한 언변의 사기가 아니라

그렇게 우리에게 정말 사람이 그랬다고 사람이 그렇게 살아왔다고 그리고 죽었었다는 걸 깨닫게 해준다.

 

사람들은 뉴스가 세상을 보는 창이라고 하지만 내게는 이야기가 밖으로 향한 창이 되어주었다.

아무리 뉴스에서 크게 다루고 많은 정보를 준다지만  한 사건이 내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고 의미를 갖게 되는 건 항상 뒤늦게 이야기를 통해서였다.

내게 세상의 창은 이야기였다.

조금 늦게 정보를 접할 수 밖에 없지만 그래도 차가운 숫자와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그것이 사람의 일이라는 것 아픔이고 상처고 회한이고 혹은 희망이고 기쁨일 수 있는  나와 무관하지 않는 일이라는 걸 알게 해주는 건 이야기였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이야기의 힘을 믿는다.

아직도 이야기가 ..  소설이... 동화가 해야할 일이 많이 있다고 .. 지구에서 인간이 멸종되지 않는한 언어가 사라지지 않는한 이야기는 영원하리라 믿는다.

 

그 무엇보다도 이야기는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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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식 세탁소 - 정미경 소설집
정미경 지음 / 창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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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내가 나인 순간이 얼마나 될까 그런 순간이 오기는 하는 걸까 지금 내가 널 좋아한다는 것 네가 날 좋아한다는 것 무언가에 휘둘려 그것마저 놓쳐버린다면 지금의 우리에게 도데체 뭐가 남아 있을까.....

                                번지점프를 하다 중에서..

 

그저께 대대적으로 책정리를 했다.

집 근처에 알라딘 중고서점이 생기고 제일 활발하게 이용하는 사람은 바로 남편이다.

중고 서점에서 싸게 책을 구입.... 하는 게 아니라 그동안 끌고 다니던 책을 하나씩 둘씩 야금야금 파는 재미에 들려서 모든 책들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집에 뭔가를 두고 싶지 않고 콘도같은 집을 지향하는 나로서는 두손들고 반길 일이긴 하지만  사는 사람 생각은 안하고 낡고  이미 오래전에 나온 책을 무지 좋은 책이라고 꾸역꾸역 팔아야 한다고 우기는 남편을 말리는 건 힘들었다. 나에게 좋은 책이라는 것고 팔리는 책은 다른 거니까.

각설하고 책을 정리하다가 옛날 편지를 발견했다.

 

친애하는 **에게.. 라고 쓴 짧은 한장짜리 편지였는데

누가 썼는지 이름조차 없어서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내게 애정을 가지고 쓴 편지라는 것 (사실 애정이 없이는 손편지를 누구에게 쓰겠는가) 그리고 그 상대가 누구이든 상관없이 이미 15년 가까이 흐른 후 받아든 그 편지가 참 새삼스럽고 설레었다.

짐작컨대 결혼전 활동하던 동호회의 누군가가 내게 책을 보내면서 함께 보냈던 편지라고 짐작된다. 책을 보낸다는 글귀로 보아..

뭐랄까 감정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문장들로 이어진 자기 신변 이야기뿐인 짧은 메모같은 편지지만 그래도  행간에 보이는 배려랄까 애정이 느껴진다면 너무 오바스러울까

아주 늦게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한때 사귀었다기보다는 몇번 만났던 사람이었고 모임에서 몇번을 보다가 조금은 친해지다가 그냥 흐지부지 되고만 사람이었는데.. 그래서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던 사람이었는데

편지가 그때의 기억으로 나를 데리고 간다.

사실 별 연애감정도 아니었고 사이도 아닌데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싫어서 멀리 했던 기억도 있고 뭐랄까 세삼 그리울 것도 없는 상대지만 그때 내가 받은 편지를 다시 보는 건 또 다른 감정이었다.

아... 나도 한때 이런 적이 있었구나.

어쩌면 내가 누군가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가 아니라 내 스스로 나였고 거기에  대책없이 당당하고 자유로웠떤 나를  떠올리게 했다.

괜히 좋아서 딸에게도 보여줬지만 별 관심이 없다.

뭐 절절한 사랑표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지하게 건조한 내용이긴 하다

받은 사람만 보낸 사람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미묘한 감정의 결을 꺼집어 낼 수 있는 거니까 누군가가 공감하기는 어려운 지극히 개인적인물건이니까.

그래도 편지를 발견한 그 며칠 내내 기분이 좋았다.

까맣게 잊어버린 내 청춘을 느닷없이 발견한 기분

풋풋하다고 하기엔 모자라지마 그래도 뭔가 설레고 기묘한 감정의  되새김질도 좋았다.

 

그래서 기분좋게 정미경의 소설집을 읽어내려갔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팍.. 나를 닮은 감정의 결을 다시 느껴본다

어쩌면 비루하고 대책없는 청춘들의 허우적거리는 이야기지만 그래도 그 순간이 참 빛난다는 걸 그들은 알까? 내가 오롯이 나일 수 있는 순간을 찾아 다니는 그 청춘들이... 골뱅이 처럼 배배 꼬인 뒤끝을 가지고도 다음날이면 다시 헤헤 거릴 수 있는 그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건지

 

모든 작품을 읽고 책을 덮으면서는 조금 마음이 아리고 허무하고 하긴 했지만 여전히 한장의 에상치 못한 편지의 감흥은 지속되고 있었다.

 

결국 이 글은 리뷰가 아니라 책을 읽는 도중 어떤 편지를 발견해서 책은 뒷전이고 그 편지가 주는 감상에 취해서 홍해옿애거린다는 이야기일 뿐인 지극히 사적인 내용이 되겠다...

 

고로 같은 작품을 읽어도 그 순간의 상환이나 감정상태에 따라  지극한 비극도 희극이 될 수 있다는 위험을 알려주는 것...   아 챙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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