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있어서 책읽기는 현실도피의 의미가 컸다.

뭔가 현실에서 부딪치는 일들에 자신이 없어질때 누군가에게 뭐라고 맞받아치고 싶은데 말이 목구멍에서만 맴돌뿐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을때 세상을 향해 뭐라고 바락바락 대들고 싶은데 마땅히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할때. 그래서 나에 대한 오해가 쌓여가고 그게 내가 아닌데 엉뚱한 걸 두고 나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뭐라고 하지도 못할때 나는 책을 읽는다

책에서는 누구도 내게 뭐라고 하지 않는다.

특히 이야기는 언제나 내편이었다.

진실을 이야기하는 사실을 현실을 눈앞에 들이미는 책들도 있다.

그 책들을 읽고 지식이 쌓이고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지는 건 부인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 책들은 나의 약한 부분을 긁어대고 그래서 너는 어떻게 할건데.. 하고 자꾸 다그치고 있다. 이런 현실을 너눈 외면할래? 이제 뭔가 행동이 필요한거 알지? 이제 책장을 덮으면 무얼 할거니?

그렇게 나를 다그치는 진실이 아니라 그저 달콤하고 씁쓸하고 때로는 시고 떫은 이야기들은 나를 그저 덮어지고 안아주고 가만히 지켜본다.

그래서 나는 점점 이야기에 빠지고 그 속에 길이 있을거라고 굳게 믿으면서 이야기를 찾아 읽는다.

때로는 이야기들이 더 큰 진실을 말하기도 한다.

아무렇지도 않은듯 능청스럽게 멀리 에둘러가면서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그 중심은 아프고 쓰라린 경우도 있다. 어뗜 신문기사나 칼럼 르포보다 더 강하고 아프게 다가오는 이야기들도 있다. 내 주변의 진실들이 사실들이 이야기라는 껍데기를 쓰고 다가와서 어떤 선입견도 없는 내게 어떤 방어막도 치지 않은 내안으로 쑥 들어와서 소금을 뿌려대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이야기속에서 나와 닮은 누군가도 찾아내고 나를 위로해주는 누군가도 발견하고 내가 가만히 기대고 싶은 공간을 구절을 발견한다.그렇게 이야기는 내게 어떤 사람보다 위로가 되어준 적이 많았다.

막상 이야기를 덮고 현실로 나가면 변한건 하나도 없고 내가 해야할 일들은 쌓여만 가고 있지만 그래도 뭔가 할 수 있을거 같은 막연한 기대감같은 것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그럼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그렇게 하루하루를 벼텨가는 것도 이야기의 힘이었다.

책을 읽으며 대단한 성찰을 하고 성큼 성장하는 경우는 절대 없었지만 그래도 꼬물꼬물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힘은 얻을 수 있었고 그 비슷비슷하고 구질구질한 하루라도 차곡차곡 쌓여서 내가 되어가고 있었다,.

지어낸 이야기와 비교했을 때 진실이 우리에게 어떤 위안을 주던가요? 굴뚝 위에서 포효하는 곰처럼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밤. 진실이 도움이 되던가요? 침실 벽에 번개가 번쩍거리고 빗줄기가 그 긴 손가락으로 유리창을 두드릴 때는 또 어떤가요? 전혀 쓸모가 없지요 오싹한 두려움이 침대위에서 당신을 얼어붙게 만들 때 살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아아한 뼈다귀같은 진실이 당신을 구하러 달려올 거라고 기대하진 않겠지요 그럴 때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포동포동하게 살이 오른 이야기의 위안이지요 거짓말이 주는 아늑함과 포근함 말이예요. .......p 14

 

이 부분만으로도 이책은 충분했다.

우리를.. 아니 적어도 나를 위로하는 건 거짓말일지라도 이야기였으니까 그건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거니까.

 

 

내용이 진부하다고 해도 책 속에는 항상 나를 감동시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어쨌건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누군가에게 그것은 책으로 쓸만큼 심각한 내용이었을 것이다.

인간은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 그들의 목소리 그들의 웃음 숨결과 온기 살과 뼈도 함께 사라진다. 살아있는 그들의 기억도 거기에서 멈춘다. 슬프지만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소멸에는 예의가 있다. 그들이 남겨놓은 책 속에서 그들은 영원히 존재한다. 우리는 책을 통해 그들의 존재를 다시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의 유머 문체 기분까지도 그들은 책을 통해 독자를 화나게 할 수도 있고 행복하게 할 수도 있다. 위안을 줄 수도  있다. 당황하게 할 수도 있다.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다. 세상을 떠났지만 그렇게 많은 일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호박속 파리처럼 얼음 속에 묻힌 시신처럼 자연의 섭리에 따라 사라졌어야 마땅할 것들이 종이 위에 적힌 잉크의 기적으로 보존된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기적이다.  p 30

 

세상에는 쓸모없는 이야기는 없다.쓸데없는 소설나부랭이만 읽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정말 뭘 모르는 사람들이다. 소설같은 이야기라거나 그런 소설 쓰지 말라거나  소설쓰고 있네,, 하는 말들은 이야기를 무시해도 너무 무시하는 말들이다. 세상에 하찮은 이야기는 없다, 누군가에게는 절절한 바램이 있었을 것이고 심각한 무엇이었을 것을 아무 상관없는 타인이 뭐라고 폄하하는 건 안될 일이다. 그것이 비록 한때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하고 사라져버릴 신세라고 하더라고 이야기 그자체는 진실되고 심각하고 중요하다.

 

마가렛은 이야기속으로 숨어버린 인물이라면 비다 윈터는 이야기의 힘을 알고 있는 인물이다.

둘다 이야기를 좋아하고 그 힘을 알고 있었다.

비다는 유명하지 않은 마가렛의 저서를 통해 이야기의 힘을 알고 있는 마가렛을 알아보았고 그를 선택했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이야기를 그녀에게 남긴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자신의 진실을 이야기라는 것으로 그녀에게 남긴다. 그것이 진실인지 혹은 그녀가 만든 이야기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마지막 반전이 나오지만 그것이 진실의 힘인지 이야기의 힘인지도 알 수 없다. 진실이든 이야기이든 비다윈터는 그녀속에 있는 모든 걸 털어내고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제 3의 소녀로 누구에게도 눈에 띄지 않고 유령처럼 살았던 소녀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늘 그림자처럼 유령처럼 사람들 사이를 서성이며 들었던 것들 보았던 것들이 그녀의 속에 차곡차곡 이야기로 쌓여갔다. 그 많은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할 수 없던 그녀가 작가가 된건 당연한 일이었다. 끝없이 펼쳐나오는 그녀의 이야기는 그동안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진실 스스로도 마주보기 두려운 진실을 이야기로 풀어놓은 것이다.

그녀가 자신이 이야기하는 동안 차례대로 나오는 이야기를 하는 동안 어떤 질문도 받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그 이야기 사이에 진실이 얼굴을 내밀까 두려워했던것이 아니었을까 진실을 진실이 아닌것처럼 이야기로 풀어내야하는 것이 그녀의 마지막 과제였을것이다.

마가렛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이야기가  진실인지 헷갈려 한다. 누구에게나 진실인것처럼 이야기를 풀어냈던 그녀가 자신에게 과연 진실을 말하는 것인지.. 하지만 마가렛은 비다의 이야기를 마주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진실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진실을 알기가 두려워 무의식적으로 엄마를 멀리하고 미워했던 그녀가 자신의 진실을 마주할 용기를 비다를 통해 얻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렇게 비다는 매혹적인 이야기를 끊임없이 풀어놓고 마가렛은 그 이야기 속의 진실들을 하나씩 찾아낸다. 이야기가 진실이고 진실자체도 매혹적인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책속으로만 파고 들면서 현실을 두려워했던 마가렛도 이제 자기의 반쪽 영혼을 받아들이고 현실을 이해하고 엄마를 이해하게 될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아름답고 매혹적인 이야기의 힘을 믿을 것이고 그녀의 독서취향도 조금 더 넓어졌을 것이다.

 

 

우리 두사람은 한가지에 대해서만은 완전히 의견이 일치했다. 그것은 바로 한 번뿐인 인생에서 다 읽어내기에는 이 세상에 책이 너무 많기 때문에 어디에서건 선을 그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p 47

 

세상에 있는 모든 책들 내가 읽지 못한 모든 책들은 모두 유혹적이다.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무언가를 들려줄 준비를 마치고도 모른 척 시치미를 떼고 있다.

어떤 책을 선택해서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될지 어떤 진실을 알게 될지는 모두 내 선택에 달려있다.

 

 

 

여기 또 다른 이야기에 빠진 소녀가 있다. 이비읍

아빠없이 엄마랑 단둘이 대도시 변두리에 사는 소녀는 엄마의 흥얼거리는 노랫소리덕분에 삐삐를 알게 되고 그 영화가 원래는 이야기였고 책이었다는 걸 알게 되고 책으로 빠지고 린드그렌 선생님에게 빠지고 위로를 받는다.

어쩌면 이야기에 빠져서 위로받고 성장하는 가장 좋은 예가 되는  동화이기도 하다.

나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위로해주는 무언가가 꼭 사람일 필요는 없다는 것 그것이 사람이 아니었고 살아있어 마주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 위로의 대상이 되어준 이야기가 나의 세상을 다시 넓혀주는 건 정말  감동적이었다.

마가렛이 비고의 이야기에 빠져서 진실에 다가가고 세상을 넓혀가고 소통을 시작했듯이 비읍이도 린드그렌 선생님을 알게 되고 이야기를 모으고  이야기에 위로받으며 그러게 언니를 알게된다, 그리고 이미 가지고 있던 관게망(지혜와 엄마)마저 더 넓게 확장한다.

이야기는 그런게 아닐까

좋은 이야기만 그렇다고 하지만 어쩌면 내게 위로를 해주었기에 그게 좋은 이야기일 수도 있는 것이다. 무서운 이야기 아이들을 충동하게 하는 이야기들도 그 이야기의 존재이유가 있다는 걸 책에서는 잘 보여준다. 가출하는 이야기 아픈 이야기 무서운 현실을 보면서  내가 직접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간접경험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고 옳고 그름을 알게 하는 힘을 주는 건 어떤 도덕교과서보다도 이야기의 힘을 더 필요로 할테니까

 

오늘도 나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찾는다.

내가 위안을 받을 수 있고 잠시라도 현실을 잊을 수 있는 이야기 하지만  비록 바뀌지 않은 현실로 다시 돌아가더라도 힘을 얻을 수 있는 이야기들

이야기를 통해 조금 더 진실로 다가가려는 용기를 얻을 수 있고 세상을 바라보면서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재촉하지 않고 보여주는 이야기

그 이야기를 나는 아직도 몹시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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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해 그리고 올 초  참 많은 청소년 소설을 읽었다.

다른 장르에 비해 내용에 몰입하거나 읽어내는 속도감이 더 좋았다.

나도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아이를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고 신문이나 인터넷에 오르는 여러가지 청소년문제들 사고들을 구체적인 인물의 이야기로 보게 되면서 마음아프고 미안하고 짠하고 결심하고 그랬었다.

청소년 소설을 읽으면서 내 아이랑 함께 읽고 싶어서 권하기도 하고 아이가 원하는 책을 골라 함께 읽기도 했지만 의외로 아이는 나보다는 덤덤하게 내용을 읽고 넘기는 모양이었다.

원체 덤덤한 성격이니 좋았다고 호들갑떨지는 않고 그냥 괜찮아.. 정도면 다행이지만 내가 함께 읽고 뭔가를 말하려고 하면 그냥 듣는게 전부이고 좀처럼 자기 표현은 하지 않았다.

내가 뭐라고 뭐라고 이야기하면 .. 아하.. 그런 의미일 수도 있구나 .. 하는게 고작이라

이 녀석이 제대로 읽는 건지  너무 감정이 매말랐는지 불안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한편 어쩌면 아직 오지않은 여러가지를 미리 책을 통해 경험하면서 지레 겁을 먹거나 질린건 아닌지  혹은 어쩌면 현실의 수위는 이보다 더 쎄서 이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건지도 알 수 없었다.

아이에게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선생님이나 친구들 학교생활 학원생활 과제 시험 등등이 더 현실적으로 와닿아서 다른 무언가를 보고 감동할 여유가 없는건지도 모ㅇ르겠다.

 

결국 청소년 소설을 읽고 동동거리고 걱정하는 건 엄마들 몫이 아닌가 싶었다.

엄마들끼리 함께 책을 읽고 여러가지 문제들로 생각이 가지를 뻗어나가면서 세상에나 세상에나... 설마 이런 일까지... 하면서 걱정하고 모의하고 어떡해야하는가 하고 머리를 맞대는 동안 아이들은 그냥 그런 일처럼 무심하게 넘기는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청소년 문학이라는 건 그 또래 아이를 둔 부모에게 아이를 잘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딱 청소년을 위한것이 아니라 청소년을 이해하기 위해 그들과 함꼐 살아가기에 도움을 주는  다큰 자식을 위한 육아서의 또다른 이름이란 생각도 했다.

내가 청소년 소설을 읽고 푹 빠진 것도  아이가 내게는 말하지 않은 그들만의  세계를 훔쳐보고 알고 싶어서일것이다. 그래서 아이에게 함꼐 읽기를 원하면서도 사실은 나만 읽고 싶은 마음도 들었던거 같다. 엄마가 이런것도 안다는 걸 아이에게 들키고 싶지 않는 기분 같은 거

아이에게 직접 대화를 하려니 방법을 모르겠고 막막하고 아이가 대화를 거부해서 받을 상처가 두려워서 책을 읽고 있을 지도 모른다. 아직 아이와 소통하는 방법이 어렵고 힘들때 내가 상처받는 것도 싫을때 소셜을 읽으면서  난 이렇게 노력하고 있다고 세상에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위안하고 싶어서 읽는 것이다, 부끄럽지만

결국 소설은 소설일 뿐이고 내 아이는 또다른 현실이고 그 또래들 역시 그러하지만 아이에게 직접 다가가기에 소심하고 두려운 부모는 지금도 청소년 소설을 아이몰래 읽으면서 내 아이를 간접적으로 이해하려고 열심히 노력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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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겸손하게 행동할 것이다.

그때는 몰랐다.

나는 이미 다 알고 있는데 왜그렇게 어른들은 했던 말을 하고 또 또하는지

뻔한 말들, 하나마나한 말들, 지금 나한테 하나도 와닿지 않은 말들만 했는지 몰랐다.

이제 내가 나이를 먹고보니 내가 지금 내 아이에게 그런 말을 하고 있다.

나는 정말 절실하게 진심을 담아 아이가 알아주었으면 잊지말았으면 하는 마음에 말을 하지만

아이는 전혀 이해하지 않고 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게 다른 누가 아니라 몇년전 그때의 나였다.

내가 다시 내 아이의 나이가 된다면

나는 겸손하게 어른들의 말에 귀를 귀울일것이다.

이미 알고 있다 , 어른이라고 다 옳은 말만 하고 도움이 될만한 조언말을 하는 건 아니라는 걸

하지만 누군가가 내게 말을 하고 어떤 경험에서 나온 잔소를 되풀이해서 하더라도

그걸 일단은 들어볼 것이다.

어쩌면 내가 스쳐지나간 그 길한모퉁이 어딘가에 보석이 숨어있었을 경우도 있고 무심코 받아든  동전속에 귀한 무언가가 함께 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말이 무엇이든 나를 사랑하는 사람.. 나를 아는 사람이 해주는 말이라면 나름 진심이 있는 거라고 믿고 일단 경청할 것이다.

그랬더라면 지금 내가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물론 별 차이 없이 나이를 먹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의 말을 제대로 듣는것은 누군가를 알아가는 첫걸음이고 그렇게 누군가를 알고 이해하고 공감하는 건 결국 내 세계가 넓어진다는 걸 그땐 몰랐다.

내가 듣고 싶은 것. 그 순간 내게 필요한 것들만 듣는 것 그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그때가 후회스럽다.

어쩌면 내 아이도 아직 그걸 모를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내가 말하기가 서툴러서 아이가 원하는대로 잘 말하는것이 되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가 내게 해주는 조언은 그게 무엇이건 일단 귀기울여주는 겸손함이 필요하다

지금 내 나이에도 역시 그러하니 지금이라도 잘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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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왕국이 불편한 이유는 내가 딸을 둘 키운다는 사실때문만은 아닐것이다.

하지만 그것과 전혀 상관이 없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왕에게는 딸이 둘 있었다.

척 보기에도 큰딸은 단정하고 지혜롭고 자상하다.

작은 딸은 세상의 모든 막내가 그러하듯이 활발하고 호기심이 강하고 충동적인 면도 있다.

아이를 키워보면 안다.

내 속에서 나온 아이들이고 각각을 보면 둘다 나를 혹은 나의 배우자를 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정말 다르다.

큰 딸 앨사는 능력을 타고 났다. 만지는 것들을 얼음으로 만드는 능력

그건 동생에게 즐거운 눈놀이를 하게 만들 수도 있고 언제나 신나게 스케이트를 즐기게 할 수도 있지만 한편  손에 닿는 모든 것을 얼어붙게 만들기도한다.심지어 사랑하는 동생까지도

그 능력이 어떠한가는 일단 제쳐두고

왕에게는 능력을 가진 첫째와 평범한 둘째가 있었다.

왕과 왕비는 그 능력의 비범함과 무서움을 알고는 그 능력에 집중한다.

엘사를 누구와도 접촉시키지 않고 그 능력으로 누구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도록 주의 하면서 아이를 키운다. 하지마나 동생 안나는 그 이유를 모른다. 이미 지워진 기억으로 언니의 능력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그저 언니랑 놀지못하는 쓸쓸함과 외로움만 가지고 있다.

공부 잘하는 큰 아이가 있다. 언제나 일등이고 백점이다. 부모는 당연히 욕심을 낸다.

조금만 더 뒷바라지 하면 우리가 조금 더 노력을 하면 충분히 잘 될 수 있고 크게 성장할 수 있는 아이... 그 아이에게는 그 아이만의 특별한 교육과 훈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길로 매진한다. 아이도 성실하고 순종적이다. 자신의 능력을 잘 알고 부모말에 따른다. 훌륭한 커리큘럼 좋은 선생님 우수한 코스를 따라 아무런 저항없이 순순히 따른다.

아이의 빛나는 미래는 멀지 않았다.

그리고 또다른 아이가 있다. 평범하고 명랑하고 에너지가 넘친다. 그나이때 아이들처럼

아이는 늘 제 형제와 놀고 싶다. 눈싸람을 만들고 물장난을 하고 소꼽놀이를 하고 수다를 떨고 싶다. 하지만 엘리트코스에 들어선 언니는 시간이 없다. 늘 문  저 너머에서 무언가에 몰두한다.

언니가 그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으면 누구도 떠들거나 뛰어다닐 수 없다. 언니를 방해하면 안된다. 언니가 무얼하는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나와서 나와 놀아주기를 한없이 목을 빼고 기다린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다.

한 아이는 점점 자기에게 얹혀진 기대감이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도망치고 싶지만 이미 늦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계속하기엔 이제 두렵다. 나보다 나은 경쟁자가 보이기 시작했고 내 한계를 알것도 같고 무엇보다 그 모든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 그들이 나에게 실망하는 것이 가장 두렵다.

그래서 이젠 스스로 문을 열고 나갈 수가 없다. 이방에 숨어서 계속 나를 다그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한 아이는 외롭다. 혼자 뛰고 노래하고 놀지만 외롭다. 자유로운데 뭔가가 부족하다. 그냥 자유롭지 못한 잔소리를 듣는 누군가가 부럽다 어쩌면 그 잔소리는 사랑의 다른이름이고 관심의 또다른 얼굴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어쩌면 자유로운것이 아니라 버려진게 아닐까.. 아닐거라고 스스로 되내이지만 뭔가 나만의 것을 가지고 싶다.

그리고 왕과 왕비가 죽고 성문이 열린다.

이제 두 아이는 성인이 되었고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언제나 성문을 꼭꼭 닫고 살 수는 없는 것이다.

한 아이는 자신의 본모습이 들킬까 두렵다.

누구에게도 본래 얼굴을 보일 수 없어서 외롭고 무섭다.

한 아이는 누군가의 사랑을 갈구한다. 그게 누구이든 무엇이든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 있다면 나를 던질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찾았다.

세상이 두려운 한 아이는 누구도 믿지 못한다. 그래서 첫눈에 사랑에 빠진 제 형제를 경계하고 힐난하고 반대한다.

오로지 관심만을 원하던 한 아이는 제 형제의 거부가 너무나 충격이다. 나는 왜 사랑을 할수가 없는가 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거부하는가

그래서 사건이 터지고 자매는 헤어진다

 

큰 아이가 태어나고 나도 다른 부모처럼 기대가 컸다.

아이가 자라 무엇이 될까 나와 어떤 관계를 맺게 될까..

아이를 보면서 나는 새로운 꿈을 꾸고 있었다.

아이는 영리하고 순종적이었다. 나름 고집이 강했었는데 그래도 꺽을만큼이었고 내가 잘 콘트롤 할만큼의 호기심도 있었다.

자라면서 아기나라를 하고 한글을 배우고 수를 배우고 영어를 배우고

순간순간 삐끗거리는 순간이 있었지만 아이는 잘 따라오고 있었다.

다행히 책도 좋아하고 혼자서도 잘 읽었고 호기심도 많았고 또래에 비해 조숙한 편이었다.

이렇게만 가면 꽤 괜찮을거라고 나는 스스로 만족했다.

그리고 둘째가 있었다. 한창 큰애에게 관심을 가져야 할무렵에 태어난 둘째였다.

세살터울... 어쩌면 가장 쉬울 수도 있고 어려울 수도 있는 터울이었다.

막 세상에 호기심을 보이고 공부를 시작하는 아이에게 집중하려면 동생은 조금 성가셨다.

다행히 둘째는 잘 잤다. 혼자서도 잘 자고 깨서도 울지 않은 아이였다.

낮잠을 3시간씩 자는 둘때덕에 큰아이에게 집중하는 게 가능했다.

어느정도 나이가 되어 둘째도 큰아이처럼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자꾸 뒤로 쳐졌다.

조금 늦어도 괜찮아. 아직은 괜찮아.

학교에 들어간 큰 아이는 모범생이었다. 수줍고 소극적이긴 하지만 영리하고 따라가는데는 문제가 없었고 기대에 어긋나지도 않았다.

둘째는 조금 문제였다. 어느 순간 낯을 가리기 시작했고 낯선 환경에서 마구 소리를 지르고 제멋대로 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가족이외에 누구와 도 말을 하지 않았다. 말을 못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하고싶지 않다는게 강하게 느껴졌다.

수건없이는 스트레스가 심했고 외출시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기도 하고 고집스럽고 누가 뭐라고 하든 어디서든 고집을 피웠다. 어느순간 순한 큰 아이가 둘째를 부끄러워하기 시작했다

그 전부터 나도 그랬던거 같다. 힘든 아이

하지만 나는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했다.

큰아이때 하지 않던 아기학교를 다니고 문화센타를 다니고 아이 친구엄마와 어울리고  아이는 조금씩 나아졌다. 고집은 여전하지만 점차 사회성은 길러졌고 나름 매력이 있어 미움은 받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작은 아이가 편해지면서 나는 큰 아이와 함께하는 긴장감과 경쟁을 작은 아이앞에서 풀었다. 그냥 그 아이랑 있으면 늘어졌고 편해졌고 내버려뒀다. 나도 쉬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큰 아이가 전투라면 작은 아이는 휴식이었다. 남들보다 많이 늦었는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손끝조차 꼼짝 하기 싫었다. 어쩄든 되겠지 싶은 마음만 들었다.

 

큰 아이는 어느순간부터 평범해졌다. 나도 잘하고 싶지만 엄마의 기대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고 소리쳤다.

작은 아이는 엄마는 나에게 관심이 없다고 했다. 언니랑은 싸우든 언쟁을 하든 항상 말을 하고 상대를 하는데 나랑있으면 늘 피곤하고 가만있기만 한다고 했다.

틀린말이 아니라는 사실에 화가 났다. 하지만 그렇게 화를 내는 내게 더 화가 났다.

갑자기 내가 실패했다는 생각만 들때도 있었다.

다시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 아이는 초등때 반짝하는 전형적인 중학생이 되었고

작은 아이는 학습이 느리고 욕심과 하고싶은 건 가득한데 현실은 소심하고 부끄러운 고민을 가졌다. 나는 두 아이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다.

어느 순간  이렇게 아이들이 내 손을 떠나는 순간이 온다는 게 아니라 원래 내가 가진 능력이 아이에게 몰두하는 에너지나 능력이 없었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아이는 엄마의 관심이나 능력으로도 자란다.

하지만 가장 쉬우면서 중요한건 엄마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는 걸 나는 몰랐다.

어정쩡하니 아이에게 몰입하는 부모 흉내나 낼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의 삶을 살았어야 헸다.

그랬더라면 큰아이에 대한 기대감은 조금 가벼웠을 것이고 작은 아이에 대해서는 관심과 훈육이 들어갔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지나치게 몰두하고 누군가에게는 지나치게 방임해버린것

그것이 지난 10녀년간의 나의 불찰이다.

하지만... 정말 다행이도..

내 아이들은 아직 문제는 없다.

사회적 기대나 어떤 목표치에는 한없이 못미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은 착하고 바르고 평범한 아이다.

내가 조금 덜 기대하고 비범하기 바라는 욕심만 내려놓는다면

뭐 단점이야 있겠지만 그래도 꽤 괜찮은 아이들이다.

 

영화에서 왕과 왕비가 조금더 현명했다면  아니 여전히 나처럼 어리석었더라도 조금 더 살았다면 두 딸들이 그렇게 모진 고생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 형제를 오해하고 내 능력을 믿지 못하고 세상을 온통 얼려버리는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내가 내 아이들에게 바람이 있다면 (어쩌면 이것도 욕심이지만)

스스로를  부양할 수 있고

세상에 감사하지만 아닌것은 아니라고 말 할 수 있으며

둘이 사이 좋게 의지하며 세상을 헤쳐나가는 것이다.

 

요즘 세상엔 부모가 둘려쳐줄 수 있는 울타리가 많다. 내가 조금 더 돈이 많다면 능력이 있다면 지위가 있다면 내 자식들에게 물려줄 것이 많아진 이상한 세상이다.

하지만 내가 줄 수 있는 어떤 눈에 보이는 건 하나도 없다.

내 노년조차 불확실한 부모에게 태어난 내 아이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거라면

그건 어쩌면 행복했던 기억과 그래도 자랑스러운 부모의 모습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영화관을 나오면서 결심했다.

내 삶을 좀 더 치열하게 살아야겠다....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나말고 또 있을까?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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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입니까 반올림 24
김해원 외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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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아이들을 참아내고 아이는 어른들을 참아내고 아빠는 아내와 아이들의 갈등을 참아낸다

누구나 내가 참아낸다고 생각한다.

내가 자기들을 얼마나 참아내는 줄알아?

이렇게 평화롭게 하루하루를 넘기는 것이 내가 참아내기때문이라는 걸 저들은 알까?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모두 내가 참아내기때문이라고 한다.

참아내는 이유는 가족이기때문에

가족이니까 헤어질 수 없고 어쩔 수 없이 함께 가야 하고 살아야 하고 함께 밥을 먹어야 하니까

끊어낼 수 없으니 참을 수밖에.,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참을 수 밖에...

 

어느 순간 가족이 이렇게 되어버렸다.

누군가가 참지 않는 순간 헤체되어버리고 눈앞에서 사라질 것처럼 불안한것이 가족이 되어버렸나

 

소설은 네편의 이야기가 연작으로 이어진다.

핸드폰 광고를 위해 모인 네 사람이 자신들이 바라보는 가족이야기를 들려준다.

여고생입장에서 싱글 여성의 입장에서 중학생 소년의 입장에서 그리고 가장인 아버지의 입장에서

모두 특별하거나 문제가 있는 가족이 아니다,

평범하다,. 너무 평범하다.

이젠 사춘기 자식들과의 힘겨루기나 아이에게 자신의 꿈을 투영에서 모든 걸 바치는 부모 희생하는 가족 혹은 싱글가족  가족을 살려내느라 잊혀진 가장같은 건 너무 평범해져버렸다.

모두들 바쁘고 서로에게 알게 모르게 상처를 주고 어쩌다 보니 미안하다고 말할 시기를 놓쳐버렸고 그래도 내맘 알겠거니 하고 삼키고 넘어가고 이해한다고 믿지만 한구석에 상처를 갖게 되는 것

그게 가족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얽히고 으르렁거리고 물고 물리면서도 여전히 함께 굴러가는 것

그게 가족이다,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고 tv를 보고 낄낄거리지만 그 속을 모두 알 수 없는 사람

그래도 내가 믿을 수 밖에 없고 믿을 수 있는 사람

그게 가족이다.

 

내가 드라마도 연작을 몹시 좋아하는데 소설이 연작이라는 것도 맘에 든다.

언젠가 나도 이런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욕심도 생긴다.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할말이 더 없고 진부할 수 있지만 그래도 가족이라는 주제로 참신하게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어쩌면 청소년들보다는 그 부모들이 많이 봐야할 거 같다. 나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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