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입장이 되어보기전에  알 수 없는 일들이 많다.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 보면 새롭게 보이는 일들도 많을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말이지만 실천이 힘들다.

사람은 때로 알고 있지만 행하지 않은 일들이 많다.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거나 현실은 이론과 다르다거나.. 혹은 맞지만 눈치껏 세상을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타인의 입장을 무시하거나 애써 모른 척한다.

 

세상에는 지는 걸 뻔히 아는 싸움이 있다. 진다는 걸 알지만 그만 둘 수 없는 싸움이 있고 끝을 알지만 시작해야하는 일들이 있다. 누군가는 멍청하다고 하거나 바보같다고 할지 모르지만  지금 내딛는 작은 발걸음이 시작이 되리라  믿어야 할때가 있다.

누군가 이 발걸음을 보고 길을 따라 올거라고 믿는것

세상에는 보이지 않아도 가야할 길이 있다.

 

부모로서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먹이고 입히고 편하게 쉴 수있게 하는 일 말고는 더이상은 없다는 생각을 들 때가 있다. 아이를 바른 길로 인도하고 배우게 하고 키워내는 것은 나 개인의 역량 밖이라는 생각이 종종 들 때가 있다. 부모가 된다는 것도 시험을 통해 자격을 줘야하는게 아닐까 싶을 만큼 막막하고 힘들때가 있다.

하지만 결국 이 책에서 아버지가 보여주는 것 그것에 답이다.

남매의 아버지는 아이들의 질문에 정성껏 대답한다. 하지만 그 이상 아이들을 통제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행동할 뿐이다.

아이는 어른의 등을 보고 배우고 결국 열마디 말보다는 한번의 발걸음이 아이를 가르친다.

알지만 잊고있었고 쉽지 않아 모른 척 했을 뿐이다.

 

내 아이가 이 책을 읽으면 좋겠다.

첫 부분의 가계도 비슷하게 나오는 부분과 비슷비슷한 사람들의  이름이 혼란스럽기는 하겠지만 그 부분을 참고 넘기면 이야기는 쉽게 전달되고 몰입된다.

그리고 스카웃의 시선으로 보여지는 상황들이라 이해가 쉽기도 하다.

아이의 시선이라는 것이 편한 이유는  모든 것이 사실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라는데 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고 내가 알고 있는 수준에서 설명되어지는 이야기들은 솔직하고 편안하게 다가온다. 눙치거나 돌려 말하지 않고 있는그대로의 진실을 보여준다.

편견을 갖지 마라.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

그리고 세상에 내가 무시해서 좋을 인간이란 없다.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은 노래하는 앵무새를 죽이는 것은 나쁜 일이다. 그가 사람의 말을 한다고 기분나빠 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그렇게 나와 소통가능함이 다행이지 않은가...

 

정의에 대해   우리가 살아가는 것에 대해 어떤 책보다 좋은 책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미국적인 배경에서 씌여진 지극히 미국적인 사건의 이야기지만 지금 현실에서도 보편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나는 구판 (한겨레에서 나온)을 가지고 있는데... 번역이 너무 엉망이다.

새로 나온 책은 어떤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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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편의 이야기가 모두 아동학대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아버지에게 매를 맞고 밥을 먹지 못해 학교 급식에 매달리고 늘 늦게까지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소년을 바라보며 용기는 내는 초년생 선생님 이야기

어린 시절 학대받은 기억으로 자기 딸을 다시 학대하고 구타하는 젊은 엄마 이야기

어린 시절 학대와 차별을 하던 엄마가 이제 늙어 치매에 걸려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되자 용서할 수도 없고 미워할 수도 없어 혼자 괴로워하는 독신 여성

친구 아들이 구타당하고 학대받는다는 걸 짐작하면서 직접 해결책을 찾아주지는 못하지만 모른 척 따뜻하게 받아주고 품어주는 아버지

장애가 있는 아이를 데리고 혼자 사는 고단한 엄마와 그 엄마와 만난 오랜시간동안 아픔을 꽁꽁 숨기고 내색하지 않아 이제 모든 기억이 뒤죽박죽되어버린 할머니의 우정까지

이야기는 담담하게 상처받은 아이들과  그 아이들이 성장한 상처받은 어른들을 보여준다.

 

사람은 칭찬을 먹고 사는 동물일 것이다.

태어나 자라면서 듣게 되는 칭찬과 만족감이 스스로를 존중하게 하고 어려움을 이겨내며 살아가는 힘이 된다.

어린 시절부터 훈련되고 습관이 된 두려움이나 패배감은 그 인생을 점점 고단하게 하고 망가뜨린다.

모든 이야기가 다 감동적이지만 개인적으로 세번째 이야기와 마지막 이야기가 좋았다.

어릴적 학대하고 괴롭히고 차별하던 어머니를 떠나 독립해서 잘 살던 여자 주인공은 늙어 치매에 걸려 모든 걸 잊어버린 어머니와 이틀간 함께 생활해야만 했다.

난 아직 아무것도 잊지 못하고 상처받고 힘든데 어머니는 치매라는 이유로 모든 걸 잊고 딴사람이 되어버렸다. 내 앞에서 어린 시절로 돌아가 내겐 주지도 않았던 자기의 유년기 추억을 이야기하고 자기 엄마에 대한 좋은 기억을 되풀이해서 이야기하는 엄마가 주인공은 정말 밉다.

게다가 계속 먹을 것만 찾고 아무데서나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엄마.. 그 이틀은 지옥이었다.

엄마를 다시 동생에게 데려다 주러 가는 길에 주인공은 꿈꾼다.

엄마를 버리고싶다.

몇번을 망설이다가 전차안에서 한번 시도를 하지만 천진한 엄마의 모습에 그만 다시 전차에 오란다. 안좋은 기억만 남았다고 생각하는 옛동네 엣집 근처에서 주인공은 그때는 미처 보지 못한 풍경들을 기억해낸다.

죽을뻔한 나를 구해준 어린 동생  사춘기의 방황을 바로 잡아줬던 고등학교때의 선생님  가난하지만 자기집에 볼러 저녁을 먹였던 이웃 아줌마. 내가 쫒겨나 밖에서 떨고 있을 때  무심하게 한구석에서 함께 지켜줬던 주정뱅이 아저씨.. 그리고 그 기억속엔 찰라의 엄마의 미소도 있었다.

그랬구나..

주인공은 만족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위안을 얻는다.

나는 그때 혼자는 아니었다고

그리고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엄마의 과거를 기억하면서 엄마의 그때 마음을 조금은 알 수 있게 되었다고 ..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 ... 아직은 엄마를 좋아할 수는 없지만 미워하지 않을 수는 있게 될 것이다.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다만 누군가를 미워하느라 내 삶이 피폐해질 수는 없다

주인공은 그걸 알게 된다.

공감하지 않아도 이제 엄마와 나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게 되었고 더 이상 엄마에게 끌려다니지 않고 스스로 설 수 있게 되었다.

마흔이 된 이제야 비로소..

 

마지막 이야기는 전쟁을 겪고 온갖 풍파를 겪은 80대 할머니가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준다.

한동네에서 오래살았지만 너무 오래 살아 이제 더이상 아는 얼굴이 없고 대화상대가 없는 할머니는 늘 혼자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해본 것이 까마득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할머니로 보일 뿐이지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 할머니에게 늘 만날 때마다 인사해주는 소년이 있다. 안녕하세요 안녕히 가세요.

그 인사는 할머니의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시간이 많은 할머니는 엣기억을 떠올린다.

결혼했다가 돌아온 일. 공습으로 집이 불타 살던 곳을 떠나 이곳으로 온 일 여학교 시절 공장에서 일했던 기억 그때의 캬라멜 냄새. 그 많은 캬라멜과 쵸콜렛은 과연 누가 먹었을까?

왜 그때 하나를 쓸쩍 가져 오지  않았을까. 동생이 그렇게 빨리 죽을 줄 알았다면 하나를 가져와 동생에게 줄것을.... 그리고 여공이라는 이유로 공습때 늦게 대피해서  죽은 여공들

너무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뒤죽박죽이고 그게 맞는 기억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때를 떠올리면 알면서 모른 척한 일. 너무 고지식하고 순종적이어서 후회할만한 일들  표현하지 못한 감정들이 화석이 되어서 마음에 단단하게 박혀있다는 걸 느낀다.

그때 그러지 말것을..

그때 조금 더 생각해보고 누군가에게 말을 해볼걸,,

할머니의 그 아쉬움은  말하지 않았던 것들 표현하거나 행동하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규범을 잘 지키는 모범 학생이고 시민이었던 할머니는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었던 행동을 꾹꾹  눌러놓고 살아왔고 이제 그로인해 자기가 무얼 하고 싶은지 어떤 사람인지조차 가물가물해진다.

그 할머니가 늘 인사하는 규범적인 소년을 만나고 그 소년의 문제를 알게되고 그 가족의 불행을 알게되는 건 어쩌면 할머니의 삶을 다시 되돌리는 의미이기도 할것이다.

그때 표현하지 않고 말하지 않았던 것들..

넌 나쁜게 아니야 좋은 딸이고 좋은 누나였어

그때 공습때 우리가 먼저 대피해서 미안해. 우리가 너희에게 피해를 준거같아.

그리고 달콤한 캬라멜 한개쯤은..

그때의 후회를 젊은 아이 엄마는 하지 말라고 할머니는 마지막으로 두 모녀에게 위로를 하고 따뜻하게 품어준다.

그래서 그 마지막이 눈물나게 아름답다.

이미 지난 일이 아니라 지금이라도 되돌릴 수 있는 일이라고 .. 지금이라도 아이를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너는 착한 아이라고 말해주라고 할머니는 전하기때문이다.

 

얼마전 친정에 다녀왔다.

이젠 늙었고 아버지마저 안계신 엄마는 많이 힘들고 작아졌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해줄 수 있다고 믿었던 엄마가 약해진건 참 마음이 아팠지만..

이제 조금 떨어져서 보면 나도 엄마도 서로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엄마의 마구 내뱉는 말들이 너무 싫었던 거 같고

엄마는 나의 꾹 다문 입이 너무 거슬렸던거 같았다.

다 잘되라고 하는 말이라는 걸 이제 그나이가 된 나는 이해가 가는데 그때의 어린 나는 그게 너무 싫었고 짜증났고 무식해보이기도 했고

앙 입을 다물고 문을 쾅 닫고 방으로 들어가는 딸을 보면서 그때 입을 닫고 책속으로 숨어버리고 단답형 이상의 대화를 하지 않는 딸이 엄마도 참 야속했을 거다.

너무 가까워서 너무 사랑해서 상처를 주기도 하고 너무 기대가 커서 좋다.. 착하다는 기준을 높이 세워버린다.

너는 너고 나는 나라는 분리가 되지 않은 가족이라  그게 사랑이라 믿어서 내 말이 무조건 약일거라고, 쓴 약일거라고 생각했지 그 약이 가진 부작용도 있다는 건 몰랐다.

이제 와서 따지고 그때 서러웠노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아직도 내 속의 어린 아이는 엄마에게 속상하고 서운한게 많이 남아있지만 그만큼 엄마 속에서도 있을거니까 서로 퉁치자고.. 혼자만 계산기를 두들기며 착한 척 하고 왔다.

 

세상 모든 아이는 착한 아이다.

그리고 이 말은 나이가 먹어서도 참 위로가 되는 말이다.

넌 착한 아이야.

니 잘못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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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는 물리적 신체적인 접촉도 있고 눈빛 무언의 몸짓 사람들의 고정된 사고방식 타인에대한 오해등도 있다. 어떤 관습이나 오래 묵은 상식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봉도 폭력이 될 수 있고 나 아니면 상관없다는 방임과 무관심도 폭력이다.

세상 어떤 것도 폭력이 될 수 있다.

이 영화에서는 다양한 폭력이 나온다.

 

외딴 바닷가 마을 엄마가 도망가고 의붓아버지와 할머니와 함께 사는 도희는 모든 폭력에 노출되어있다. 술만 마시면 두들겨 패는 아버지와 할머니만이 아니라 그런 사정을 눈감아주는 마을 사람들 그러다보니 무시해도 그만이라고 믿어버리고 함부로 대하는 학교 친구들 모두가 폭력이다.

그 마을에 개인적인 사정으로 좌천된 파출소장 영남이 내려온다.

이곳에서는 타인인 영남의 눈에는 도희에게 가하는 다른 모든 사람의 행동이 비정상적이고 그런 오랜 관습과 행동에 익숙해져버린 도희조차  정상이 아니다.

영남의 도희의 상처를 처음으로 들여봐 준 사람이다.

하지만 영남역시 자신의 상처와 아픔이 너무 커서 밤마다 소주를 마시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을만큼 피폐한 상태이다.

그러나 직업윤리인지 개인적인 상식과 가치관에서인지는 몰라도 영남은 도희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맞서고 마을에 관습처럼 무심해진 폭력에 맞서면서 점점 외로워진다.

영화에는 다양한 폭력이 나온다

도희가 당하는 물리적인 폭력

나와 다르고 약한 존재라고 해서 함부로 대해도 그만이라는 암묵적인 폭력(이주 노동자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태도)

다르고 이질적인 존재에 대한 배타적이고 편견 가득한 태도들( 영남의 취향에 대한 마을 사람들 경찰동기들의 태도들)

그리고 편하고 익숙하다는 이유로 도덕적 법률적인 사소한 위반이나 타인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마을 사람들의 오래된 구습까지 영화  구석구석 너무 폭력적이어서 충격적인 장면이 없음에도 보는 내내 너무너무 아프다.

영화는 내내 보여지는 것만으로 전체를 판단하고 타인을  평가하는 모든 종류의 폭력을 보여준다.

그렇게 폭력이 오래 노출되고 익숙해지고 그 익숙함은 점차 별거 아닌것이 되고 별거 아닌것은 무시해도 상관이 없는 것이 되면서 남이 당하는 건 나만 아니면 그만이고 내가 당하는 건 무언가 내게 잘못이 있을거라는 죄책감과 무기력으로 되풀이된다.

도희는 폭력이 익숙해져서 너무나 무감하고 당연하다.

도희가 말한다. 아무리 맞아도 춤한번 추고 나면 다 잊을 수 있다고...

그건 극복이 아니고 그냥 덮어두는 것일뿐이고 아무런 비판없이 받아들이는 것일뿐이다.

그렇게 피해에 익숙해진 도희는 자기도 모르게 점점 괴물이 되어간다.

자기는 나쁜 아이니까 맞아야 한다는 자학적인 행동이나 마지막의 반전은 그런 도희를 잘 보여준다. 살기위해서 괴물로 변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걸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고 도움을 받고 지지를 받을 경험이 없었던 도희는 스스로 괴물이 되면서 자기를 방어하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하려한다.

폭력이 얼마나 나쁘고 잔인한지 도희는 온몸으로 모든 행동에서 보여준다.

 

영남은 자신도 혼자 서기 힘들만큼 피폐해졌다.

자기 잘못은 아닌데 대다수와는 다른 정체성으로 불이익을 받고 손가락질을 받는다.

그렇다고 자신의 다름을 당당하게 드러낼 수없는 폐쇄적이고 고지식한 사회에서  본능과 이성사이에서 힘들다. 밤마다 소주를 벌컥거리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고 점점 그녀가 둘러싼 껍질을 두껴워지기만 한다.

하지만 내 고통에 흔들리는 영남은 내가 힘들고 아직 미성숙한 상태에서도 도희에게 손을 내민다. 처음에는 아는척 단단한 척 손을 내밀었지만 도희와 함께 할수록 그리고 그녀가 찾아와 흔들릴때도 도희에게 내민 손을 잡아준다.

성숙하고 바르게 서있을 힘이 없는 상태에서도 누군가에게 의지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부족한 내 도움을 바라는 상대를 보면서 나도 강해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영남이 참 아픔답다.

 

살기위해 괴물이 되는 건 도희만이 아니다.

불법체류자가 되어  아픈 어머니에게 가고 싶어하는 외국인 노동자도 스스로를 위해 순간 괴물이 된다. 살기위해서 내 속에 있던 눌러놓았던 괴물을 꺼내야 하는 순간은 얼마나 또 비참할까... 괴물을 꺼집어 내어 순간을 넘기지만 그 괴물이 다시 사라지고 원래의 나로 돌아오는 순간은 비참하고 부끄럽다.

그래서 철창에 갇힌 노동자의 눈빛이 슬프다.

스스로 괴물처럼 영악하게 굴어  영남을 구해낸  도희도 너무 슬프고 부끄러울 것이다.

내가 괴물이 되었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한게 없다는 것

자꾸 아니라고 하고싶지만 살기위해서 괴물이  또 될 수도 잆다는 생각과 그러다 영영 괴물이 되어 나로 돌아오지 못하면 어쩌나하는 갈등으로 괴물은 무서우면서 슬픈 존재가 된다.

영남도 괴물이 되었었던 도희를 떠나려고 한다.

하지만 순간 깨닫는다.

내가 지금 그 아이와 눈을 맞추고 그 괴믈을 바라봐 주지 않는다면 아이는 그리고 나는 괴물에서 다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직 완전하지 못하고 서툴고 불안하지만 둘은 함께한다.

영화에서는 보여준다

누군가는 살기위해 괴물이 된다는 것,, 그리고 사람들은 그 괴물을 두려워하고 마주 보지 않는다는 것

내가 피하고 방임하면서 괴물들은 지금도 어디선가 슬프게 발톱을 세우고 있을 거라는 것...

그러다 내가 괴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것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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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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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시로 이사를 온지 3년째다.

이제 많이 익숙해졌다싶은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순간순간 낯설고 어색한 경우가 남아있다.

처음 이곳으로 왔을 때는 정말 추웠다.

20년전 대학입학을 위해 서울로 올라온 그때도  서울의 첫 인상은 춥다는 거였다,

내가 자란 남쪽에서는 눈은 귀한 것이었고 신학기가 시작한 3월이면 아직 겨울이 남아있어 쌀쌀한 날씨가 지속되긴 하지만 그래도 봄은 봄이었다. 두터운 겨울옷은 벗어도 상관없었고 조금 하늘거리게 입으며 발을 동동 구르고 다녀도 견딜만 했다.

서울에 올라와 처음 맞는 3월,... 아직 학교도 낯설고 살고 있는 동네도 낯선 그때 3월의 하늘에서는 눈이 내렸다.

지금이야 5월에도 눈이 내린다고 호들갑을 떠는  변화무쌍한 날씨가 되었지만 .. 그때 모든 것이 낯선 상황에서 3월의 눈은 울고싶을 만큼 적응이 어려웠따.

왜냐하면 내 생일이 3월이었고 난 그때까지 3월 내 생일이 되면 날씨도 풀리고 웅크리고 걷지 않아도 된다는 경험으로 기억된 습관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3월 내 생일이 지난  어느날 눈이 내릴 수도 있다는 첫경험은 좋은 것이 아니었다.

여기 서울은 예상치 못한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는 곳이라는 두려움이 생겼고 3월이 되었다고 따뜻해지지 않을 거라는 냉냉한 경험을 가졌다,

하지만 20년이 지나면서 그렇게 낯설었던 서울이 익숙해지고 언제부턴가는 집에서 돌아오는 열차안에서 63빌딩이 보이고 한강철교를 건너는 순간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리고 또다시 그 익숙한 공간을 떠나 신도시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은 정말 추웠다. 서울의 북쪽이라고 그러하다는 이유도 있고 내가 이곳으로 이주한 이유가 거의 서울에서 쫒겨났다는  감상을  벗어날 수 없다는 이유도  한몫했을 것이다.

서울이어도 폐쇄적이고 작은 동네에서 10년을 넘게 살다가 이상온 이곳은 어디 숨을 곳도 없이 사방이 뻥뻥 뚤린 개방형이었다. 신도시를 관통하는 대로가 있고 그 넓은 중앙로를 따라 건물이 아파트가 서 있고 이 곳의 자랑인 넓은 공원 그리고 아파트 사이사이 조성된 공원길들 그건 시원시원하고  어디든 통하는  편리성을 갖고 있지만 내게는 너무 크고 너무 무섭고 너무 뚫여있었다.

나는 사실 어디든 내가 알지 못하는 곳 나를 알지 못하는 곳으로 숨고 싶은 마음이었었다.

신도시는 그저 크고 어디든 통하고 추운 곳이었다.

 

이 신도시에는 작가들이 참 많이 살고 있었다. 그 전엔 몰랐는데 의외로 구석구석 작가들이 있고 그들의 글에서 신도시..어쩌고 하고 나오면 자동적으로 여기 어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은희경 작가의 전작 태연한 인생에서도 주인공이 어쩌면 이곳 어딘가의 오피스텔에서 살고 있었고 이곳 어딘가의 카페에서 타인을 만나고 술집에서 사건이 일어났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이전 이곳에 와서 읽었던 "소년을 위로해줘"의 그 소년도 이곳 어딘가 몇단지의 아파트에 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번 소설집에서 신도시 이야기가 참 많이 나왔다.

첫번째 작품을 읽으면서 내가 처음 만난 서울을 생각했고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작품들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삶의 토양을 바꾼 우리 아이들을 생각했다.

이번 작품에 유난히도 눈에 띄는 말 "신도시 아이들"이라는 말에서 자꾸 턱턱 멈추면서 나는 우리 아이들을 생각했다. 전혀 자기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부모들의 결정으로 익숙한 곳에서 떠나야 하고 낯선 곳에서 다시 뿌리를 내려야 하는 아이들이 걸렸다.

예전 나는 적어도 자의적으로 주소지를 옮겼고 낯선 곳에서 정착하고 뿌리를 내렸지만 내 아이들의 지금의 이주는 그때와는 다르다. 그때 나만 생각하면서 춥다고 황량하고 숨을 곳이 없다고 느꼈던 이곳 신도시에서 우리 아이들이 보았던 건 무엇이었을까. 그때 난 그것까지는 생각못했다.

단지 어미된 입장으로 새 학교에 잘 적응할지 친구들은 잘 사귈지만 걱정했다. 이미 모든 그룹이 결정되고  또래문화가 형성된 상태인 6학년이던 큰 아이걱정과 막 사춘기가 시작되고 조금 이기적으로 편을 가르는 나이가 되는 3학년 작은 아이의 걱정은 했었는데 그것이 토양을 아주 바꿔버린 환경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학교에 잘 적응하고 무리가 없으면 다른건 그만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리고 일단 눈에 보이는 것으로 아이들은 잘 적응했고 그 사이 갈등이라고 해봐야 보편적인 그또래의 문화로 인한 것들이었다고 단정지었다.

가끔 아이는 이곳과 예전의 친구들을 비교하기도 하고  그리워하기도 했지만 한때라고만 생각했다그리고 시간에 따라 나도 익숙해진것처럼 아이들도 익숙해졌으리라 생각했고 작년에 유난하게 사춘기를 겪는 작은 아이의 문제도 그저 아이들의 문제라고만 생각했다.

서울의 아이들 신도시의 아이들 조금 더 외곽의 아이들 그렇게 구분짓는 일이 뭔가 자만심에서 나오는 선입견인것 같아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아이들은 어떻게 다른지 뭐가 다른지 이야기를 했지만 그건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했고 이곳 신도시의 엄마들이 이곳과 좀 더 외곽의 이야기를 비교하며 할때는 나혼자 코웃음을 쳤다. 그래봐야 이곳과 서울도 비교의 대상인걸 왜 모를까..

하지만 그곳에서 떨어져 나온 내가 뭐라고 비판할 수도 언급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나름 자격지심도 있었고 어디나 아이들 키우며 사는 모습은 다 비슷할거라고만 생각했다.

어디나 몇퍼센트의 좋은 사람과 몇퍼센트의 싫은 사람이 있고 나랑 맞지 않은 사람도 있고 튀는 사람도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다만 이곳은 유난히 솔직하고 개방적이어서 조금은 거칠어 보일 수도 있고 뭔가 모르게 서로서로 무리에 끼어서 우리라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에 기를 쓰는 것은 느껴졌다. 거리를 다니면서 혼자 다니는 젊은 엄마는 거의 보질 못했다. 장을 보거나 극장을 가거나 공원을 걷거나 늘 두셋이었고 무리지어다니는구나 하는 것만 보았을 뿐이다.

아이들이 성향이 강하고 직선적이라는 걸 느꼈어도 그게 그때보다는 조금 더 나이를 먹은 아이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했고 그때의 학교보다 규모가 작다보니 조금 더 친밀하고 잘알고 있고 그 속에 끼어든 새로운 전학생이 그래서 조금 더 외로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만 했다.

어쩌면 아이들은 제 어미가 혼자 흔들리고 우울한걸 알고서 스스로 뿌리내리기로  노력했을것이다.큰 세상속에 뿌리내는 것이 아니라 서울에서 신도시로 이화분에서 저화분으로 옮겨온 아이들은 그 화분의 가장자리를 탐색하고 내가 차지할 수 있는 공간을 가늠하고 튀지않게 살아남기위해 뿌리를 뻗어가며 자제해가며 그렇게 살아내고 있었던 거같다.

<스페인도둑>의 완이나 <T아일랜드의 여름잔디>의 소년들처럼 말이다.

낯선 곳에서 쿨함이라는 철갑을 두르고 어떤 경우에도 상처받지 않을만큼의 간격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소년들은 슬프다.울거나 떼쓰지 않고  담담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살아가는데는 보이지 않은 많은 힘이 필요하다. 오리처럼 발은 동동거리면서도  물위의 몸집은 아무런 동요가 없을 것. 그건 그 나이의 또래가 견디기엔 많이 무거운 삶이다.

작가의 표현처럼 신도시 아이들인 소년들은 그렇게 어디든 적응을 하고 어디서든 잘 어울려 살아가지만 그 이면은 단단하게 닫고 경계하는 피곤함이 묻어있다.

이곳에서 3년간 내 아이도 그런 과정을 거쳤을까

겉으로 절대 예전 그곳을 그리워하지 않고 이곳에 잘 어울리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래도 속으로는 조금 슬프고 아파서  어쩔줄 몰라하는 아이가 살지 않았을까

운다고 떼쓴다고 바뀌는 건 없다는 걸 이미 알아버린 아이들은 마음을 둘 데가 없을 것이다.

어쨋거나 낯선 곳에서 뿌리를 내려야하는 것말고는 할 수 있는 것 해야할 것이 없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아이는 불평이 없었고 잘 지내는 듯 보였다. 친구도 금방 사귀었고 옛친구들과도 연락을 하고 가끔은 만나러 가기도 했다. 어리니까... 변화에 익숙해지나 보다 싶었다.

다행이라고만 생각했다. 고민해야할 것들 풀어야 할 문제들이 쌓여있는 데에 아이들까지 문제로 더 얺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여기저기서 터지기 시작한다.

낯선 땅에 내려진 뿌리는 처음엔 긴장하고 조심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맞춰간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흙에 대한 부작용이 나타나는 걸까 아니면 이동이라는 것이 없더라도 생기는 그 시기의 혼란이나 성장통같은 걸까?

힘들다고 그때가 그립다고 돌아가고 싶다는 아이에게 해줄 말은 없다.

그저 견디라고 견디다보면 익숙해질거라고... 입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러길 바라면서 그저 대꾸없이 들어줄 뿐이다.

이 시간도 다 지나가리라....

그리고 지금은 다시 고요하다. 다 지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는 쿨해지는 법을 배우고 거리를 두는 법을 배우고 타인과 의자를 좁혀앉는 법을 배운다.

20여년전 낯선 도시의 첫인상을 춥다... 라고 각인 시켰던 어미는   제 자식들의 낯선 도시에 대한 첫인상이 어떠했는지 묻지 않는다. 묻기가 두려울 수도 있고 굳이 묻지 않아도 되기때문이기도하다

첫인상은 그저 자신만의 것이고 자신이 견뎌야 하는 온도일뿐이다.

 

아무 생각없이 들었던 소설집이 너무 슬프다.

이야기속에 너무나 익숙한 인물들이 보이고 내가 마주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있고 하지만 사랑해줘야할 사람들이 있다.

남의 말을 하듯... 혼자 중얼거리듯  누구도 듣지 않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나는 듣지 않는 듯 짐짓 딴청하는 듯.. 무겁게 책장을 넘겼다.

그래도 다들  잘 살아내고 있어 다행이다.

그것이 행이든 불행이든.. 그렇게 견디고 삶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 축복이다.

 

이건.. 리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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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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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뱅골 출신의 부모가 미국 서아일랜드로 이민을 가게 되어 그 곳에서 성장하게 된 작가가 이 책을 쓴  줌파 라히리이다.

어떤 평에서는 과대평과되어진 현대작가중 하나라고 혹평을 받기도 한다지만. 내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작가는 자기가 가장 잘 알고 잘 쓸 수 있는  소재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내가 겪었던 일들 기억하는 이미지들 그리고 내 속에 오래 박혀 있어 이제는 그만 그것을 뽑아서 눈앞에 마주하고  싶은 상처들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건 그 작가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 가장 뱉어버리고 싶은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 작가 줌파 라히리도 그가 가장 잘 아는 것 그녀 속에 가장 깊이 박힌 이야기를 책으로 엮었다

이 책이 그녀의 첫 작품이었다.

미국에 건너온 인도 이민자의 자녀라는 입장은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일이다.

인도계 이민자로서 가지는 감정 입장 그리고 은밀한 두려움이나 외로움 혹은 이질감은 그녀가 가장 많이 겪었고 알고 있는 일이기에 가장 쓰고 싶고 쓰기 쉬웠던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이야기는 주로 이민온 인도계 미국인의 이야기거나 인도내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로 구성되었다.

<진짜 경비원>의 경우는 인도의 이야기였고 나머지는 인도 이민자 들의 이야기들이다.

인도라는 이색적이고 신비로운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낯선 땅에서의 이질감과 이로움 그리고 막연하면서 동시에 손에 질감을 느낄 수 있는 구체적인 두려움이 그녀의 글에서 잘 묻어난다. 어쩌면 이질적이면서 동시에 어딘가에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보편성을 그녀가 잘 표현하고 있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아홉가지 이야기중에 <섹시>와 <질병 통역사> 그리고 맨 앞에 있었던 <일시적인 문제>였다

 <섹시>는 유부남을 만나는 미렌다가 직장동료  락스미가 사촌형부의 외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데서 시작한다. 남의 이야기같지 않은 락스미 형부의 바람은 곧 닥치는 미렌다의 일이기도 했고 그 끝또한 이미 정해져 있는 일이었다. 사이언스센타에서 들려준 그 남자의 섹시하다는 말은  락스미 사촌언니의 아들이 들려주는 모르는 사람을 좋아하는 일로 대치되는 순간 미렌다의 현실은  선명하게 드러난다. 내게 의미있고 잊지못할 한마디가 그걸 뱉은 사람에게는 기억조차 남지 않은  사소함이었고 아름답던 사이언스 센타의  마파리움은 이제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순간 어긋나고 스쳐버린 말들이 두 사람의 관계를 정해버리고 현실을 일깨운다. 그래도 락스미의 사촌언니가 살아가듯이 미렌다도 담담하게 살아갈 것이다.

 

<질병 통역사>에서는 인도에서 관광가이드를 하면서 동시에 질병 통역사라는 독특한 직업을 가진 카파시 씨가 인도계 미국 이민자인  디스 부부를 만나 가이드를 하면서 생겨나는 에피소드다.

카파시씨는 사소한 몇가지 일들고 디스 부인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녀와 이어질 인연을 상상하지만  디스 부인의 상상할 수 없는 고백에 충격을 받고 현실로 돌아온다.

어쩌면 인생은 한순간 꾸는 꿈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 짧은 에피소드에서 잔인하게 보여준다.

내가 바라보는 그곳과 상대가 바라보는 이곳이 어긋나는 그 지점에서도 삶은 계속 될 수 밖에 없고 우리는 누구도 그 어긋남으로 상처받지만 결국은 서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고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라는 걸.... 잔인하면서도 담담하게 보여준다.

 

<일시적인 문제>는 어쩌면 주인공이 인도계 미국인이라는 사실 외엔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이다.

한때 사랑했던 부부가 아이를 사산하고 난 후 서로 어긋나고 피하기만 하면서 삭막해져 가는 과정이 담담하게 그려진다. 서로 매말라 가고 있다는 걸 알지만 누구하나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이 없고 서로 교묘하게 시선을 피하며 살아가는 어느때  전기공사로 인한 짧은 정전이 일주일간 이어진다. 어두운 저녁 함께 식사를 하면서 서로의 비밀을 하나씩 고백하고 그러면서 남자는 어쩌면  이 어둠이 우리 둘의 관계를 다시 이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지만.. 정전이 끝나는 순간 두 사람의 관계도 그렇게 끝을 맺는다.

누군가를 기대를 갖게한 어떤 현상이 누군가에게는 이제 모든 걸 정리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엇갈리는 시선. 비껴나기만 하는 타이밍으로 사람들은 외로워진다. 하지만 그들은 그 엇갈림을 굳이 맞추려 들지 않는다. 상대방의 시선에서 비껴난 바로 그 곳에서 혼자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나는 지금 제자리에 있긴 한걸까

그리고 받아들인다. (센 아주머니의 집의 센 아주머니는 아직도 생각중이시지만)

꼭 상대의 시선에 들어가려고 애쓰지 않고 누군가의 시간을 맞추지 않아도 되는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에서 다시 스스로 뿌리를 내려보려고 조심스럽게 더듬고있는 중이다.

 

런치박스

 

 

며칠전 인도 영화를 봤다. :런치박스"

주인공 남자가 말했다

"잘못된 기차가 목적지에 데려다 줄 수도 있어요"

뭐라고 딱 꼬집어 말 할 수 없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줌파 라히리의 이 소설집을 생각했다.

일라의 도시락은 남편에게 닿지 못했다. 그녀의 정성과 노력은 엉뚱한 남자에게 갔고 남편은 브로컬리면 주구장창 먹고 있지만 별 말이 없었다. 이미 둘은 조금씩 어긋나고 있었지만  맞추려고 하질 않았다.

도시락 배달이 잘못되어진 걸 안 일라는 멈추질 않는다. 대신 편지를 쓴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맛있게 다 먹어주어서 감사하다고 ...

그리고 그 도시락을 받는 사잔과 편지를 주고받게 된다.

엇갈린 대상은 또다른 인연을 만들지만 그들역시 어긋난다. 둘이 만나기로 한 카페에서 둘은 만나질 못한다. 서성거리고 멈칫하는 순간 둘의 시간도 어긋난다.

어긋난 장소  시간에서 가끔은 용기를 낸다.

함께 떠나자는 말. 나도 함꼐 가도 될까요?

일라와 사잔이 어떻게 될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잘못된 기차에 과감하게 올라탔는지.. 과연 그 기차가 목적지로 잘 데려다 주었는지 관객들은 알지 못한 채 영화는 끝난다. 그동안 수많은 발리우드 영화들이 보여준 춤과 노래도 없이 이영화는 그저 담담하게 사람과 사람사이의 어긋난 관계 조금은 비틀어진 관계를 보여준다.

일라의 엄마와 누워있는 아버지. 일라 윗층에 사는 이모라는 여자와 그의 천정의 쿨러만 바라보는 남편  집에서는 말이 없이 텔레비젼만 보는 남편 그리고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고 관계하지 않는 사잔.. 

그 누구도 힘들다고 하지 않고 이게 아니라고도 하지 않지만 서서히 균열이 생기고 조금씩 사이가 벌어지면서 사람들은 외로워지고 있다. 서서히 빠지는 공기나 서서히 데워지는 프라이펜 위에서는 고통을 느낄 수 없다. 조금씩 조금씩 불편함에 익숙해지고 균열에 맞춰지면서 사람들인 이미 쩍 갈라지고 죽음이 다가오고  난 뒤에 자기를 돌아보고고 화들짝 놀란다. 하지만 그뿐이다.

일라도 사잔도 누구도 선뜻 나설 수 없다.

삶이란 어쩌면 내가 선택하는 것보다 내가 선택당해야 하는 일들이 더 많은 법이고 인간은 언제나 수동적이며 그 사이의 어긋남정도는 쉽게 무시하고 익숙해지며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엇갈림 속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대단한 변화나  다이나믹한 사건으로 폭발되지 않는다.

삶은 어긋나고 조금 기울어졌다고 해서 끝으로 치닫지 않는다는 것이  좋은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어긋난 끝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삶을 선택하는 것도 가능할테니까말이다.

무어라 표현할 수 없지만  나랑 이질적인 것들인데도 위로가 될 때가 있다.

 

나는 막막하고 답답할때 책을 펴거나 어두운 극장속으로 숨어버린다.

지금 내가 느끼는 뭔가 잘못된게 아닌가 하는 느낌.

내 삶이 어디서부턴가 어긋났고 나는 그걸 모른 척했고 순간의 안락을 위해 눈을 감았더니 지금 어마무시한  현실에 처했는데.. 이건 내 잘못만은 아니라고 누군가에게 소리치고 화를 내고 위로받고 싶었다.

어디서 부터 다시 시작하면 잘 꿰어 맞출 수 있을지도 몰라서  악마가 나타나 시간을 되돌려 주겠다고  거래를 걸어와도 어디로 되돌릴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이를 낳기전? 혹은 결혼전? 아니면 아주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는 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서 또다른 어긋남이 없으란 법도 없고 내가 똑같은 선택을 똑같은 후회를 하지 않을거란 보장도 없다는 막막함이 자꾸 나를 둘러싼다.

 

그때 아무 생각없이 편 그녀의 책이... 그리고 제목도 확인하지 않고 들어간 극장에서 마주한 어떤 늙수구레한 아저씨가 내게 말을 건넨다.

너만 그런건 아니야

 

나랑 비슷한 처지도 아니고 상황도 아니지만 어딘가 미묘하게 일그러지도 있다고 느끼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에게 실망하고 있을 무렵.. 그래도 괜찮다고 아무 상관없다고..

잘못 탄 버스도  그 자체로 목적지가 있다고 이야기 해준다.

이렇게 작은 위로도 가끔은 필요하다.

 저지대를 주문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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