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 남성, 여성 그리고 강간의 역사
수전 브라운밀러 지음, 박소영 옮김 / 오월의봄 / 201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런건 성폭력이 아니라 불륜이지. 서로 좋아서 하다가 뭔가 틀어진게 분명하다니까"

" 미투가 변질되고 있어  아무나 미투라고 엄한 사람 잡는거 아니야"

"쫌만 조심하면 되는거 아니야? 한번은 그렇다치더라도 당하는 걸 뻔히 알면서 또 같은 곳엘 가는 이유가 뭐야 그것도 배웠다는 사람이 뭔가 있는게 분명해"

"부끄러운 줄 모르고 뭘 그렇게 나대는 건지... 그런 일이 있었으면 창피해서라도 입을 닫고 있어야지"

"남자들은 그걸 못참는다니까.. 원래 그런걸 알아서 조심해야지"

"여자들 중에도 출세를 위해 몸부터 들이미는 경우가 있다니까요. 먼저 그렇게 덤비면 누가 가만있겠어?"

 

남의 말은 참 쉽다.

내 일이 아니라면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고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예전 아이가 어릴 적  길가에서 무심하게 나를 보고 달려오던 아이앞으로 자전거가 휙하니 지나갔다. 부딪치진 않았지만 순간 휘청 아이가 넘어졌다.

맞은 편에서 그 장면을 고스란히 보고 있던 나는..그걸 보면서도 움직일 수 없었다.

얼른 달려가 아이를 잡아 안아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았지만 두 다리는 내것이 아닌것 처럼 무거웠다.

냐중에 들은 남편이 책망했다.

"엄마라면 그 순간 번개같이 나서야 하는거 아니야? 그걸보고만있어"

난 엄마가 아닌 걸까? 모성이 부족한 걸까? 내 몸부터 생각한건가? 온갖 생각이 머리속에서 맴돌았고 아이가 다치지 않아서 큰 일이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그렇게 내 운을 다 썼더라도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에 와서 처음으로 지하철을 타고 등교를 하던 어느날

지하철을 타다보면 가장 끝자리가 가장 편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한쪽이라도 기대서 갈 수 있다는 것과 양쪽으로 타인이 앉지 않는다는것만으로도 끝자리가 좋았다.

어느날 끝자리에 앉은 승객이 내리고 냉큼 그 쪽으로 자리를 옮긴 날

끝자리 난간 사이로 뭔가 이상한게 보였다.

자리 바로 옆 그러니까 문옆으로서 어떤 사람이 서있다는 건 알았는데

딱 난간 사이로 보이는 이상하고 길쭉한것.

첨엔 엄지손가락인줄 알았다. 왠 손가락이 이렇게 길지?

무심코 유심히 오래 바라보았다. 정말 뭔지 몰랐다. 처음엔

위치상 뭔가 움직임도 이상하다싶은 순간 그게 뭔지 알았다.

순간 너무 무서웠다. 그렇게 사람이 많은 지하철에서 당당하게 그렇게 성기를 내밀고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몰랐다.

반도 가지 않은 지하철에서 내렸던 게 기억난다.

그리고 유난히 끝자리를 좋아하는 아이들이랑 지하철을 탈때 마다 혼자 전전긍긍이다.

어쩌면 내 앞에  남자만 서있어도 불안한게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남자는 원래 그런 걸 못참아.

생물학적으로 그래

문제가 생기면 늘 조심해라 하지 말아라라는 말들만 돌아다닌다.

치한을 만나지 않는 방법 피하는 방법

밤늦게 다니지 말고 택시를 탈때 누군가에게 전화해서 알리고 번호를 기억하고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말고 쉽게 웃으면 먼저 꼬리쳤다고 하고 뚱하고 있으면 재수없다고 한다. 얼굴을 그대로 지워버리고 싶을 때가 많다

밤길에 마주오는 남자는 잚은 학생이어도 무섭고 늙은노인이어도 무섭다

독서실에서 늦게 오는 아이를 마중가면서 아이가 아들이 아닌게 억울했다

아이가 등교할 때 교복을 단정하게 입으면 행여 미친놈 만날까두렵고

체육복을 입고나서면 단정치 못하다고 지적받을까걱정이다

 

이 책에서 말한다

강간이란 미친놈이 성충동을 참지못해 저지르는 충동적인 행동이아니다.남성이 자기가 충분한 힘을 가지고있고 그것을 드러내고 싶고 누군가를  당연히 여성을 제압하고 싶어 저지르는 폭력이라고 ..그건 미친 짓도생물학적인 한계도 아니다.

이성적이고  생각할 수 있고 유머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온순하고 다정한  그런 평범한 우리 이웃의짓이다.  물론 그 짓을 저지르는 순간은 그런 평범한 인간은 아닐것이다.

원시시대부터 시작된 당연히 할 수있는 그럴수 있는 행위로 인식된 폭력이다

행여  강간이 문제가 되어도 그건 재수 없이 걸린 일이다 누구나 다 하는데 왜 나만그러냐고 화를 내도 당연하고 우겨도 당연하다.

 

 

 

1. 강간의 대중심리

 

 남성은강간을 할 수 있는 신체구조를 여성은 강간에 취약한 신체구조를지녔다는사실이 양성의 생리 자체를 구성하는기본 토대가된다

남성이 자신의 성기를 두려움을 일으키는 무기로쓸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일은 불의 사용과 돌도끼의 발명과 함께 선사시대에 이루어진 가장 중요한 발견으로 꼽아야만 한다. 강간은 선사시대부터 지금까지결정적인 기능을 수행해왔다.모든 남성들이 모든여성을 공포에 사로잡힌 상태로 묶어두려고 의식적으로 협박하는과정이 바로 강간이다.

 

2. 태초에 법이 있었다.

 

여성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기껏해야 한가지 뿐이었다.다른 여성들에게 도움을 청하다고 해도 그들은 남성 공격자보다몸집이 작고 약하기 일쑤였다. 결정적으로 여성조력자는 징벌적 보복을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신체수단을 갖지 못했으며 제한된범위에서 방어 행위르 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포식자 남성 중 일부가 여성을 선택해 보ㅎ자로 행동하는 경우가 있었다. 위험한 거래는 그렇게 성사되었을 것이다. 일부일처제나모성애 사랑에이끌리는 본능이 아니라 언제든 강간당할 수 있다는 공포야 말로 여성이 남성에게종속되도록 만든 최초의 원인이며 역사적으로 여성이 어떻게 의존적 존재가 되었고 보호를 댓가로 한 짝짖기에 의해 가축화되었는지 설명해주는 가장 중요한 열쇠이다

 

3. 전쟁과 강간

 

여성을 소유하는 거싱 남성으로서 성공을 보증하는징표였듯여성을 보호하는 일 역시 오랫동안 남성으로서 자부심을 보증하는 징표였다.그런데 점령군이 ㅓㄹ이는 강간은 패배한 쪽 남성의 힘과 소유건에 대한 환상을 모조리 파괴한다 강간을 통해 여성의 몸은 상징적인 전쟁터가 되며 승리자가 개선식을 벌이는 광장이 된다. 여성의 몸에 가하는 행위가 남자들끼리 주고받는 메시지가 되는데 한쪽에게는 승리의 산증인이고 다른 쪽에게는 패배와 상실의 산증거인 것이다.

 

전쟁중에 강간이 벌어지는 동안 남편이나 아버지가 지켜보게 되는 경우가 꽤 흔하다. 그냥 근처에 있었기 때문일 경우도 있지만 지켜보게끔 고의적으로 강요당하는 경우가 더 많다.강간하는 자의 관점에서 강간이 여성의 몸을 공격하는 일인 동시에 그 남편이나 아버지를 공격하는 행위이기때문이다. ......... 평화시처럼 전시에도 강간당한 여성의 남편은 비난받을 책임을 주로 아내가 지게 만든다. 그렇지 않아도 허상일 뿐인 부인에 대한 남편의 소유권이 침해당했다며 소유물에게 책임을 돌리고 비난하는 것이다

 

선악은 승패와 별개지만 1945년에는 정의로운 쪽이 승자가 되었다. 심판대 앞에 끌려나온 패자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궁극의 악이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의 홀로코스트 기록을 살펴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지옥의 심연을 직접 들여다본 듯한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뉘른베르크와 도쿄에서 심판관 역할을 맡은 이들은 승자로서 그 전쟁에서 빠져나왔다. 책임이 부과된 쪽은 반대편이었다. 연합군의 잔혹 행위를 드러내고 심판하기 위해 소집된 국제 재판은 없었으며 '적'인 여성으로부터는 어떤 전쟁 범죄 증언도 수집되지 않았고 우리편이 연합군의 유죄를 입증하는 일급비밀 문서가 인정사정없이 백일하에 드러난 적도 전혀 없었다.  강간을 연구하는 관점에서 보자면 증거가 불공정하게 편향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4. 폭동, 포그롬 혁명

 

인종주의적이거나 정치적인 함의를 띤 봉기, 폭동, 혁명과 소규모 분쟁은 남성이 강간 욕망을 배출할 기회를 제공해주는데 그치지않고 강간  실행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제공한다. 이 와중에 각각의 강간 사례는 선전선동에 이용할만한 가치가 있을 때만 증언의 형태로 보존되는데 ㅣ해자 여성이나 믿을만한 목격자의 증언부터 신문 기사 명백히 편파적인 동기로 제작된 선동 팸플릿까지 그 형태가 다양하다.

역사가들은 그렇게 보존된  대개의 강간 기록을 중요하지 않거나 신빙성이 떨어지는 기록으로 간주하며 무시하는 태도를 취한다. 간혹 내용에 생생함을 더하거나 강렬한 인상을 주기위해 강간이야기를 약간 다루는 역사책도 있지만 어쩌다 일어난 고립된 사건 이상으로는 다루지 않는다.

폭동이나 혁명 와중에 발생하는 집단강간을 국내에서 매일 발생하는 강간사건과 같은 종류의 범죄로 보는 시도는 아예 없었는데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강간이 최근까지도 일탈 행위정도로 여겨졌던 것이다. 반면 역사적 강간은 일상이 아니라 전시 잔혹 행위가 만들어 낸 지옥의 영역에속하는 사건으로 분류되었고 차라리 과장된 허구라고 여기고 싶어질 정도로 불편하고 충격적인 일이라 사후에는 실제로 그런 사건이 있었는지 자체를 의심받았다. 게다가 우리도 알다시피 여성의 경험은 언제나 의심받고 무시당하는 현실도 이런 경향에 한몫을 더한다.강간사건이 의혹의 영역으로 강등되어 역사에서 배제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언제나 다른 정치적 동기를 가지고 강간 사건을 폭로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항상 존재했고 이들이 강간 사건의 진실여부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전망에 따라 사건을 판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껏드러나지 않았던 여성의 역사의 진짜 모습을 보려면 강간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수집해 그것들이 서로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살펴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정부관료나 콩고 지지파들은 강간이란 식민지 반란을 비롯해 남자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날 때면 늘상 수반되기 마련인 부작용이라면서 강간사태를 용인하고 이에 대한 대응을 뒤로 미뤘다. 이런 태도는  외교관과장군 군인 전쟁을 사랑하는 특파원들이 쓴 기사의 영향으로 전쟁을 바라보는 표준 관점으로 굳어버린 전쟁은 어짜피 지옥 이라는 관점을 반영하는 예일뿐이다. 한편 전쟁의 피해를 입은 쪽은 선전선동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강간 기록을 수집한다. 이 경우는 벨기에 피해를 입은 쪽이었고 벨기에는 콩고를 떠나는 식민주의자들이 독립할 준비가 아직 안 된 사랑하는 나라로 부터 무고하게 상처를 입었다는 식으로 선전선동하려고 하였다.

이런 두 관점 사이에서 휘둘리지 않으려면 강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잊지 말아야 한다. 강간이란 국적이나 인종을 가리지 않고 모든 여성을 대상으로 삼는 남성의 적대 행위이다. 그러나 그렇듯 전쟁 후 기념 과정에서도 근육을 과시하며 자리를 차지하고 않ㅈ아 남자답게 취해보는 난장판이 벌어지곤 하는데 이때 적국 국민이 아닌 여성도 강간을 당한다. 자기 방어수단을 갖고 있지 않은 손쉽고도 준비된 표적인 여성이 혐오스러운 압제자의 상징으로 서택되어 강간당하는 것이다.

콩고의 사례에서 강간은 복수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으며 그런 정당화를 가능케한 것은 여성을 남성의 재산으로 보는 뿌리깊은 사고방식이었다.

 

6. 통계로 본 강간범; 신화에서 과학으로

 

사이코 강간범이 분명히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는 사이코 살인범이 존재하는 것과 비슷하게 예외적인 존재이지 결코 강간범의 전형은 아니다. 미국의 전형적인 강제 강간범은 여자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로 작정한 공격적이고 적대적인 젊은이일 뿐이다.

 

미국의 경찰 사건 기록부에 기재된 가간범이란 따분하고 평범한 존재들이다. 막상 알고 보면 강간법의 범죄방식에는 마법도 신비도 로빈후드 같은 신출귀몰도 없다. 강간이란 폿내기들이 자기 사촌이나 아는 형과 몰려다니다가 저지르는 따분하고 멍청하며 못난 행동이지 멋지고 재치 있으며 부도덕하면서 영웅적이고  성적매력이 넘치는 한량이나 정상적인 성욕 발산수단을 빼앗긴 소심한 영혼 통제할 수 없는 성욕에 사로잡힌 초인이 저지르는일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경솔하고 예측가능하며 둔감하고 폭력 충동에 휘둘리는 이 어린 남성들의 어깨에는 일종의 역사적 임무가 짊어져있다. 바로 여성에 대한 남성의지배를 힘으로 영구화한다는임무이다.

 

8. 권력과 성폭력

 

여성이 강간에 관해 남긴 이야기는 곧 권위가 부여된 자리를 접한 남성들이 저질러 온 권위 남용의 구술사나 다름없다. 일종의 성적 치료를은밀하게 적용하는 치료사 환자가 제지하지 못하리라 여기고 평범한검진을 당혹스러운 신체접근으로돌변시키는의사나 치과의사 스타가 되고자 하는 신인의 야심을 먹이 삼는프로듀서,자신이 힘을 가진 학문의 장에서 학생의 이해관계를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비틀어 악용하는 교수등등 이런경우 가해자가 육체적 힘을 사용하기는커녕 협박조차 하지 않고도 성적목적을 이루곤 한다. 남자들은 이런 사례를 유혹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권위를 가진 인물이제안한 성관계는합의에 의한 관계 혹은 등등한 관계라고 보기 매우 어렵다.

강압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그중에는 경제적 정서적강압도 포합되며 사건 발생시 피해자로 하여금 저항하기두려워하게 만들 뿐 아

니라 사건 후에도 피해자가 다른 이들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게 만든다는 특징이있다. 권위있는 인물이 저지르는 강간은 권위를 존중하도록 훈련받아온 피해자를 혼란스럽게만들수 있으며 그 때문에 그녀는 자신이 공모자라고 여기기도 한다. 권위있는인물은 그가 옳다는 분위기를 후광처럼 내뿜고 있어서 그 행동에 도전하기쉽지 않다 이런구도에서는 피해자가 오히려 잘못된 사람이 되어버리는데 과연 피해자에게 이것 이외에 다른 위치가 가능하긴 한가

 

가족간에 발생하는 아동 성 학대를 은페하고 그 실제 발생률과 함의를 있는 그대로 평가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성스럽지 못한  침묵은 도데체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이런 침묵 역시 강간에 대한 남성의 태도를 역사적으로 형성하고 결정해 온 성적 사유재산에 관한 가부장제 철학에 근원을 두고 있다. 여성이 남성의 가장 원형적인 육체적 재산이라면 아이들은 남성이 통째로 소유한 부속재산이었고 지금도 그렇기 때문이다 주의깊은 독자라면 이 지점에서 태초에 법이 있었다. 라는 제목의이 책 전반부 장을 떠올렸을 것이다 함부라비 법전에서 다른 남자의 딸의 처녀성을 훔친 남자는 합법적으로 살해될 수 있지만 자기 딸을 알게 된 남자는 단지 도시 밖으로 추방될 뿐이다. 상호합의를 함시하는 근친상간이라는 잘못된 명칭으로불리는 이행위는심리학자나 인류학자들이 우리에게 믿으라고 지세하는 만큼 보편적이거나 확고한 금기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근친 상간금기 아니 아버지 강간 금기는 그보다 휠씬 더강력하고아마도 더오래된 금기에 밀린다 아버지의절대적인 독재에는 그어떤 오부의개입도 없으리라는 금기지나치게과장된 주장일까? 20세기 초 워싱턴 주 대법원은 아버지에게강간당한 룰루롤러라는소녀가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을 기각했는데 가정내 관계의 조화로운 보존에 사회도 이해관계르 갖기에 법은 이런 이해관계에 기반을 둔 자식과 부모간의 소송을 금지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모든 성인 특히 남자 성인은 한 아이에게 권위를 가진 존재이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을 어떤 자비로움을 지닌 인물처럼 가정된다. 그러나 불운한 피해자에게는 그 자비로움이 분명히 존재하지 않았다

 

9. 강간 영웅 신화

 

우리와 동떨어진 원시 부족에 대한 민속학적 연구는 강간이 남자다움을 표현하는 수단이면서 여성을 재산으로 간주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신호이다.여성이 선을 지키도록 사회적으로 통제하는 기제로 이용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은 시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사정은 전혀 다르지 않다 현실 세계에서는 조금 다를지 몰라도문화를 정의하고 지배하는 남성들의 공적 사적 환상을 들여다 보면 아직도 전혀 다를 게 없다.

집단 폭력의 방식으로 여성에게적용되는 남성연대는 최근 새롭게 나타난 현상이 아니며 특정 민족의 전통에만 존재하는 현상도 역사적으로 전시 상황이나 하층계급폭도에게만 한정되는 현상도 아니다.

 

13세기 몽고 대정복을 이끌었던 칭기스칸은 그의 지위에 걸맞게 진지한 어조로 자신의 성스러운 임무를 설명했다

"남자의 인생에서 최고의 업적은 적을 무찔러 내 앞에 끌어낸 후 그들이 가진 것을 모두 빼앗는 것이다. 그들을 사랑했던 이들이 흐느끼는  소리를 들으며 그의 무릎사이에 있던 말을 빼앗고 그의 여자 중 가장 탐나는 이를 품에 넣는 것이다." 이만큼 영웅적 강간을 뚜렷하게 정의한 언급은 없을 것이다.

 

 

10. 여성이 강간을 원한다고?

 

"그녀가  원했다'고 말하는 것은 강간범이 자신이 져야할 비난의 짐을 피해자에게 떠넘기는 고전적인 수법이다. 여성이 남성을 유혹하고 허락하지 않으면서 달아오르게 만들어서 강간을 유도한다거나 부주의한 행동으로 강간을 촉발한다는 믿음이 만연한 현실이다. 남성들에게는 편리하게도 이런 현실이 자기가 저지른 행동의 실체를 가리는 연막이 되어준다. 하지만 같은 현실이 여성에게는 자기불신을 뿌리깊게 체화하게 만든다. 그 때문에 많은 어쩌면 대부분읙 ㅏㅇ간 피해자는 자신을 해친 저 끔찍한 행위를 촉발한 것이 대체 무엇인지 자신의 행동인지 태도인지 옷차림인지 알아내려 애쓰고 고통스러워하게 된다.

 

우리가 삐당한 눈으로 살펴봐야 할 마지막 격언인"어짜피 강간당할 상황이라면 긴장을 풀고 즐기는 편이 낫다" 는 강간이시체적 폭력이라는 점을 고의적으로 가볍게 취급하고 피해자가 당하는 모욕이 별일 아닌 양 깍아내리며 저항할 의욕을 꺽는다. 당신이 협조하거나 스스로 판단과 느낌을 중지시킨다면 원치 않는 성적 접촉도 즐길 수 있다는  이 농담조의 충고는 다음의 두 가지 명제에 근거한다. 1) 여성은 남성을 이길 수 없다  2) 모든 여성은 강간당하기를 원한다

여성이 강간당하기를 원한다고? 우리가 굴욕과 멸시 신체의 온전성을 침해하는 폭력을 갈망한다고? 우리가 남의 손아귀에 붙잡혀 끌려가 강간당하고 피폐해지기를 원하는 심리적 욕구를 갖고 있다고? 페미니스트가 이런 터무니 없는 문제를 가지고 씨름해야만 하는가? 슬프게도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다"이다

 

히치콕은 무언가 알고 있다. 그의 주연 여배우들은 보통들 말하는 '예민함' 이아니라 취약성 그 자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상처받기 쉽거나 상처를 지닌 느낌을 어떤 식으로든 보여주었다.나는 히치콕이 그 자신뿐 아니라 대부분의 감독에게 적용되는 진실을 이야기했다고 본다. 헐리우드꿈 공장의 대가들은 자신의 성적 환상에 들어맞는 여주인공을 선택해왔고 그들의 환상은 곧 우리 여성들의 현실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 되어버렸다.

 

강간범들이 자신과 같은 계급이나 종족의 상태를 선호해서 그런 피해자를 고르는 것이 아니다. 강간은 기회가 생기면 저지르는 범죄이고 기회는 익숙한 환경에서 가장 자주 생기기에 같은 계급이나 종족의 상대가 피해자가 된다. 중범죄및 청소년 범죄가 자주 일어나는 지역에 사는 도시 하층계급 여성들이 그 어떤 계급보다 가장 많이 강간 위험에 노출된다 결국 통계에서 알수 있듯이 성폭행 위험에 가장 크게 노출된 여성집단은  흑인, 10대, 도시의 하층계급 소녀들이 된다. 이들이 폭행이나 협박에 기대 강간을 저지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성향의 집단과 가까이 살기 때문이다.

 

11. 강간 말하기

 

강간은 주로 남성이 여성에게 저지르는 범죄라는 속성을 갖고 정신분석이 대표적으로 보여주듯 강간이란  원초적장면을 고의로  왜곡한 결과일 뿐이라는 관념이 있다. 이때문에 남성의 법은 남성의 걱정거리를 해결해주는 일을 우선시했다 합의하에 성관계를 한 여성이 복수심이나 원한에 불타 강간이라고 주장할까봐 걱정이 된 나머지 여성의 선서나 말 증언에 의존하지 않고 범죄사실을 객관적이고 확실하게 규명할 벙버을 찬고자 했다. 그리하여 품성과 완력 두려움 동의 의지 저항처럼 서로 엃혀 있는 상대적이고 질적인 개념들을 측정하려고 애써왔다.

 

"강간은 고발하기는 쉽지만 입증하기는 어렵고 피고측에서 변호하기는 더욱 힘들다. 피고가 아무리 결백할지라도"

여성이 강간을 고발하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자기가 강간당했다고 신고한 사람들은 이내 입증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오히려 피고측으로 말할 것 같으면 피고의 결백여부와 무관하게 강간사건의 피고를 변호하는 일보다 쉬운 일은 없다.

 

12. 여성은 반격한다.

 

여성 입장에서는 강간을 매우 간단하게 정의할 수 있다.

누군가가 자신의 몸에 강제로 성적으로 침입하는 일이자 사적이고 개인적인 내부 공간을 동의없이 침입당하는 일이다. 다시 일이며 한 사람의 정서적 신체적 이성적 온전함을 고의로 침해하는 행위이다. 적대적으로 여성을 비하하는 이 폭력 행위를 사람들은 강간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남성의 강간 개념은 여성의 몸이 실제로 겪은 성폭력의 행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초기 법은 강간을 아버지가 소유한 딸의 처녀성을 훔치는 범죄 즉 아직 결혼시장에 내놓지 않은 상품의 가치를 훼손한 범죄로 정의했다. 그러나 법이 발전하면서 강간을 인식하는 방식 역시 변했지만여전히 고대 남성의 재산개념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강간은 비이성적이고 충동적이며 통제할 수 없는 욕정에 의한 범죄가 아니다. 정복자가 되고싶은 남성이 여성에게 두려움을 주고 협박하려는 의도로 계획한 비하 및 점령행위 즉 의도적으로 여성을 적대하는 폭력행위이다. 이것이 바로 강간의 실체이다.

우리 문화속에는 그런 폭력적인 태도를 장려하고 선전선동하는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한다 문화에 내재한 그런 요소들은 남성들 특히 잠재적 강간 예비군을 형성하며 쉽게 외부의영향을 받는 남성 청소년들이 폭력행위를 저지르도록 심리적으로 부추기고 그들에게 이데올로기를 제공하면서도 그런 행위가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기는 커녕 처벌 받을 수 있는 범죄라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게 한다  강간범을 유혹에 성공한 남자로 보는 것부터 가지가 원할때 원하는것을 거침없이 취하는 남자로 보는 방식까지 남자다움에 대한 그릇된 관념을 조장하는 강간 영웅신화가 어린 소년에게 주입된다. 남자가 된다는 것은 여자의 몸을 살 권리를 포함한 어떤 비밀스러운 통과의례와 특권에 접근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소년이 눈치채는 바로 그 순간부터 강간신화가 주입되는 것이다.

 

 

책을 읽고

그렇게 많은 강간의 기록이 남았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 남은 기록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게 슬펐다.

언제나 여성의 말은 중요하지않고  무시할 수 있는것으로 치부되어 그저   흘려버려도 그만이라

기록할 가치가 없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여성의 목소리는 기록으로 남기지 못하고  남겨졌다고 하더라도 역사로 기록되지 못한다 자신의 권리와 존엄을 주장하는 여자들은  그저 잊히는 것뿐아니라 마녀로 미친 여자로 거리에서 비명횡사한 재수없는 여자로  후대에 경고하기 위해 겁박하기 이해 기록될 뿐이다.

전쟁으로 폭동으로 혼란으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여성의 몸을 거치고그 위에서 발생한다

신화에서 당연시 되는강간들

문학작품에서 스크린에서얼핏 보여지는강간의 환상들이 그런 폭력을 더욱 아무렇지도않게

예술이라고 하고 그저 생각없이소비된다.

 

페미니즘이 여자와 남자가 싸우자는 것이아니라고  모두가 함께 더불어 잘 살아가는세상을 만드는데 일조하는 사상이라고 하지만

일단 한 번은 붙어서 처절하게 싸워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모든  아픔과폭력을 덮고 함께 가자고 말하기 전에

우리가 받은 억압과 폭력을 먼저 말하고 사과를 받는 과정이필요한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새롭게 더불어  살아가려면 우선 사죄와 반성이 우선 아닌가 ..뭐든....

 

상세한 사건들의 기록을 모두 읽지는 못했다.

굳이 다 읽지 않아도 그 고통을 알 수 있고 아프다.

아픔을 누르고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두께운 책이 어느새 막바지에 이른다

강간은 일어나선 안되는 폭력이다

몸이 아프고 다치는 것때문에 폭력이 아니라 한 인간의 존엄이 말살되고 개인의 인격이무시당하고 자기의 신체를 자기가 결정할 수 없게 만들어 치욕으로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죄책감에빠뜨리는 폭력이다. 신체적일 뿐 아니라 정서적 폭력이다

일어나선 안되지만 피해서도 안되는 일이다

누군가는 사실을 말해야 하고 알려야 하고 함께 노력해야 하는 일이다

일어나선 안된다고

그래서 강간의 역사를 기록하고 기억하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모두가 노력해야할 차례이다

 

중간에 덮고 싶은 적이 많았지만 다 읽기를 잘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도란스 기획 총서 3
권김현영 외 지음, 권김현영 엮음 / 교양인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첫 글을 읽고 갸우뚱해서 다시 읽었다.

피해자 중심주의와 2차가해라는 말에 대

 

해 거리를 두고 생각한다.

나는 '피해자 중심'이라는 의미를 '피해자 우선 제일'이라고 생각했다. '2차 가해'라는 말은 누구도 피해사실에 대해 다른 토를 달지 말라고 강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남의 말에 쉽게 이러쿵 저러쿵 하는거 아니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것이 잘못이었을까

잘못은 아니다.

여태 살아오면서 약하고 힘없고 당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것 아니 그들이 말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쉽게 내쳐지고 존재하지 않는양 여겨지고 행여 들어보더라도 나중에... 나중에 합시다.. 우선은 다른 더 크고 급하고 중대한 사안들 우선... 이라고 밀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내가 하는 말을 우선 듣고 내가 하는 말을 믿어주고 내 말에 공감해주는 일은 정말 갑격스럽다. 내가 당하고 쪼그라들고 아픈 내 말이 우선이라는 건 감격을 넘어 어리둥절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당연하지 성폭력이라는 것이 어떤 증거를 내밀기도 어렵고 당사자들의 상황과 당시의 맥락에서 들여다 봐야 하는 문제가 수두룩하다보니 보는 입장에 따라 제각각의 의견들이 충돌하고 목소리가 큰놈들 사회적 당위성에 보호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이기는  싸움이다. 피해자가 자신의 경험과 사건을 말할 때 일목요연하게 일관성 있게 이성적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누구도 쉽게 믿지 않는다.

꽃뱀이 되는 것도 쉽고 뭔가 노리는게 있어서 몸으로 덤볐다는 말도 너무 많고 좋아서 해놓고 뭔가 틀어지니까 들고나오는 복수아니냐는 말도 참 쉽게 납득이 되는 세상이다.

물론 개중에 그런 사악한 사람이 절대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뒤집어 보면 꽃뱀이 되어가면서 쌍년이 되고 걸레같이 가벼운 년이 되어가면서 사실을 말해야하는 현실을 보지 못한다. 성공하려면 몸으로 거래를 할 수도 있는게 꼭 여자들이만의 문제일까? 몸을 주면 니가 원하는 걸 줄게라고 제안한 놈도 있을 거고 행여 먼저 제안한 어떤 여자에게 그거  정정당당하지 않소 하고 끊어내지 않고 좋다고 냉큼 받아먹은 놈도 있을거고... 결국 그렇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도 있었는데.... 결국 남은 건 꽃뱀과 쌍년과 걸레다.

 

폭력을 가해자와 피해자의 문제로 나누고 피해자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진정한 문제 해결이 아니다.... 라는 것이 이 책의 근본 태도라고 생각한다. 개개의 가해, 피해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사회제도의 문제이고 인식의 문제이고 아직도 기울어진 정의가 반듯하다고 믿는 사팔뜨기들의 문제다.

 

그렇게 망신 줬으면 됐잖아.

고소 했고 처벌 받았으면 된거 아니야?

물론  원하는 만큼 형이 나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재판까지 가고 알려질대로 알려진것으로 됐잖아

그것도 미투로 봐야돼?

좋아서 한거 아니었어? 제정신으로 모텔을 가고 오피스텔을 가?

한번 당했으면 두번은 가지 말아야지  무슨 음모가 있는거 아니야?

심년도 더 전에 있던 일을 지금 말해서 어쩌자는 거지?

순수한 미투가 있고 물타기 하는 미투가 있어

미투가 변질되고 있는 중이야

 

오가는 말들이 그건 아니잖아 라고 버럭해버릴 문제가 아니다.

여기저기 문제가 터지고 드러나는 일은 결국 지나야 할 과정이고 겪어야할 현실이지만

그 모든 사정사정에 자를 들이대고 조건들을 붙이는 건 누가 기준을 만들었을까?

 

결국 문제는 성폭력 문제를 바라보는 지배규범을 바꾸기 위한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내고 인식의 틀을 바구어 나가는 것인데  법이 바뀌고 규범이 바뀌어도 그것이 사회전체에서 통용되는 상식으로 인식의 틀로 자리 잡지 않으면 기본 규범들을 좀처럼 제자리에서 내려올 수가 없다 바뀔 수가 없다.

피해자의 말을 듣고 가해자를 처벌하더라도 그것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인식의 문제라는 생각이 없다면 누군가의 재수없는 일이 되거나 나와 상관없는 흥미거리 추잡한 스캔들이 되어버린다.

피해자 가해자만 관련된 '협의의 당사자성'을 극복하지 못하면 성폭력은 다시 개인의 문제이자 고통과 불행의 문제가 될 뿐이다. 성폭력을 둘러싼 투쟁은 '누가 봐도 상식적으로 그런 행동르 하면 안 되지 않나' 라는 새로운 상식을 만들어가는 싸움이어야 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여성주의자들은 피해자 주관적인 느낌은 가해자 중심사회에서 판단을 할 때 중요한 참조 사항이자 증거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피해자의 주관적인 느낌이 유일한 판단기준이어서는 안된다. 피해자는 당연히 자신의 경험을 주관적으로 해석할 권리가 있지만 그 경험을 공론의 영역으로 가져올 때는 정당한 의무를 지게 된다. 패미니즘은 그 정당화 과정에서 해적 투쟁에 연대하는 언어이지 무조건 편들어주는 언어는 아니다.

냉정하게 들리지만 생각해 볼 문제다.

 

오히려 우리는 무엇이 성폭력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야한다. 우리의 주장은 언제나 맥락에 의존적이며 상황적이다. 이때 상황애 대한 상이한 해석을 허용하고 그 해석이 얼마나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성찰적인지 그러면서도 설명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자 했는지(사실이 아니라 정의로서) 판단기준이 될 수 있다

 

기준이 없는 문제는 늘 사회적 당위성이 힘을 갖는다. 힘이 있는 사람 여론을 만들 수 있는 사람 상식이라는 기준을 만들고 거기 한점 차별이 없는 사람들의 시선이 늘 통용된다.

섹스는 욕망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추구하는 일이고

강간 피해에 있어 모든 여성들은 신경증이 생길만큼 보편적이고 광범위한 일이지만 남자들 사이에서의 행위는 그렇게 크지 않다 그들에게는 한순간의 재미이고 경쟁이고 힘을 보여주는 순간의 놀이로 치부된다. 그렇게 한가지 사항에 대한 인식이 이렇게 차이가 날 경우 결국 폭력의 문제도 단순화되고 한쪽이 일방적으로 예민하고 까탈스럽고 욕심을 내며 억지를 부린다는 것이 통용된다.

피해가 있다면 가해도 있다.

아무도 아무짓을 하지 않았는데 아프고 소외받고 상처받고 죽음을 당하지는 않는다.

누군가에게 그정도의 일이 누군가에게는 이만큼의 일이 된다.

계속 드러나는 미투과정에서 이건 그들의 개인적인 문제다. 이제 충분하지 않았는가 피로감을 느낀다. 개인적으로 고소하는 것으로 처리하지 왜자꾸 크게 떠들고 모두에게 원치않은 과잉정보를 제공하는가...  이미 변질되었고 이용당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떠들지 않았더라면 관용으로 넘어가거나 있을 수 있는 일 좋은게 좋은 일  사회생활을 하면 겪을 수 있는 일 누구는  조용히 넘어가는데 꼭 뭣도 아닌 것들이 떠들고 문제를 만든다는 생각들....

그리고 몸을 사리며 팬스를 쳐야겠다고 단세포적으로 나오는 반응들까지 .

결국 문제들을 드러나지만 누구도 이것이 나의 문제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의 문제이고 사적인 문제이고 알아서 할일이라는 것

 

 

이런 통념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두번째 글 < 문단내 성폭력 연대를 다시 생각한다> 였다.

누가 가해자인가? 누가 나쁜 놈인가 누가 더 나쁜가 누가 더 당했나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무엇'이 폭력인가를 질문해야했다고 말한다. 2차 가해에 대해 발언할 때도 무엇이 성폭력 피해를 의심하게 하고 성폭력 고발을 어렵게 하는지를 질문해야 했다고  말한다.

너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가 라는 말로  순수에 조금의 티끌이라도 묻으면 끌어내야하고 의심해야하고 조작이 아닌가 생각하는 일들이 빈번했따.

이것이 왜 폭력이고 아파하는 일인지 생각하기보다 누구야 누구? 이쪽에 더 관심이 쏠린다.

한바탕 욕을 하고 법적으로 처벌을 받고 나면 끝!!이 되고 처벌이 끝난 자리에 또다른 가해자가 들어오고 또 처벌을 하고 또 누군가는 다시 '개인적인'문제로 피해를 호소하고 누군가는 '개인적인 판단 착오'로 욕을 얻어 먹는다. 구조와 문화가 바뀌지 않으면 모든 일은 돌림노래처럼 계속된다.

용서라는 말은 용인이라는 말을 내포하고 있다는 문장이 그래서 아프다.

 

정채윤의 글 < 소수자는 피해자인가>는 그 피해 가해 대상을 여성-남성의 문제를 확장해서 다양한 성적소수자들에게로 확대된다.

웃자고 하는 농담이 폭력이 되는 이야기에서 시작되는 글은 쉽게 들어온다.

여기는 앞에서 언급된 일반 통념들이 더 확장이 된다.

 

동성애자가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이웃으로 가족으로 친구와 동료로 존재한다는것, 이 세상은 이성애자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은 일급비밀이다. 존재하지도 않은 동질감으로 사회 공동의 규범과 성 역할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비밀은 늘 위태위태하다. 즉 커밍아웃은 벽장에서 나와  내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어떤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벽장을 열고 나와도 우리는 여전히 벽장속에 있다. 그런데도 이성애자들은 동성애자를 자신의 세상 밖에 사는 존재로 상상하며 세상을 자신들만의 것으로 지켰다. 동성애자들은 상상의 세계로 쫓겨나지 않기 위해 현실에서 오히려 투명인간이 되어야 했다.

 

아웃팅 방지 캠페인은 '커밍아웃할 권리와 우웃팅당하지 않을 권리는 성적소수자의기본권'이라고도 주장하지만 이런 권리란 성립 불가능하고 쟁취 불가능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커밍 아웃을 할 권리가 있는게 아니라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있고 스스로 밝혔든 우연히 또는 강제적으로 밝혀졌든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말이 꼬이는 것 같지만 내가 차별받지 않고 권리를 가지겠다면 누구에게도 내가 소수자라는 것을 밝히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아웃팅 당할 일도 없고 그로 인한 범죄도 생기지 않는다

아웃팅은 범죄라는 것은 희안한 슬로건이다.

누군가가 타인의 정체성을 강제로 밝히는 것은 폭력의 한가지이긴 하지만 그래서 드러난 정체성이 사회에 잘 스며들고 누구나 무심하게 인정해버리는 것이라면 2차 문제는 생각할 이유가 없다. 결국 범죄로 폭력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이 사회의 통념이 범죄를 양산한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이어지는 루인의 <피해자 유발론과 제이 트렌스젠더 패닉방어> 에서 패닉방어라는 용어를 처음 보았고 결국 성적 소수자라는 것을 미리 밝히지 않아서 내가 충격을 받아서 제정신이 아니어서 이렇게 사람을 폭행하고 죽일 수 밖에 없다는 말... 이게 말인지 막걸린지 모르겠다.

성적 소수자라는 것 표면적인 성과 성기가 일치하지 않은 것을 알아버린 충격으로 제정신이 아니었고 그래서 배신당했고 그래서 죽였다?????

좀 심한 말이지만 그렇게 충격으로 사람을 죽여야 한다면 그 당사자가 존재할 필요가 없는게 아닐까? 그런 쿠크다스도 못되는 멘탈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나?

결국 모든 것은 남탓이고 나는 사회적 통념을 잘 지키고 믿는 성실한 시민이며 건강하고 건전한 인간이라는 걸 타인의 죽음과 피해앞에서만 증명한다.

 

그리고 역시 마지막 정희진의 <피해자 정체성의 정치와 페미니즘>에서 모든 주제를 아우르고 정리된다.

피해자는 그 자체로 진실이 아니고 투쟁으로 획득되는 개념이며 이 과정이 바로 페미니즘이다

누가 사회적 약자이고 무엇이 피해인지 이문제에 대한 복잡한 논쟁이 먼저 되어야 한다. 가해자이 패해의식 피해자의 죄의식이 우리사회에는 여전히 흔하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가장 급진적이고 선진적인 정치일 수밖에 없다. 페미니즘은 비정치적으로 간주되어 왔거나 비가시화되었던 피해를 드러내고 가해와 피해를 둘러싼 갈등 곧 사회 정의의 중요한 의제를 제기한다.

 

단순히 피해자를 돕고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이 페미니즘은 아니다

그건 법치주의라면 당연한 일이고 모든 사회, 국가의 당연한 의무이다 이걸 위해 피해자가 인생을 걸어야 하고 불신과 치욕을 견여야 하는 사회란 희망이 없는 지옥이다. 페미니즘의 관심사는 피해 가해라는 위치가 주어지는 방식자체에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말이 칼이 될 때 - 혐오표현은 무엇이고 왜 문제인가?
홍성수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혐오표현이란  소수자에  대한 편견 또는 차별을 확산시키거나 조장하는 행위 또는 어떤 개인 집단에 대해 그들이 소수자로서의 속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멸시 모욕 위협하거나 그들에 대한 차별 적의 폭력을 선동하는 표현 정도로 그 개념을 정의해 볼 수 있다.

 

혐오표현의 유형

차별적 괴롭힘 ....>> 편견 조장.....>>  모욕 ...>> 증오 선동

 

 

말한마디로 천냥빚을 갚는다지만 말 한마디에 칼날이 번득이기도 한다.

무심코 던진 말일 수도 있고 심사숙고해서 어렵게 꺼낸 말일 수도 있는 입에서 나오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말들은 그저 말이 아니다

내가 가진 생각과 입장과 시각을 모두 아우르는 결과물이다

생각없이 말한다고 하지만 그 생각없음이 아예 존재하지 않은 생각이 아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속에 젖어 있는 선입관과 아무런 의심없이 받아들인 세상의 상식과 당위들이 뒤엉켜서 나의 가치관이 형성되고 그것이 알게 모르게 내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 그것이 말로 글로 나올 수 밖에 없다.

아니 어쩌면 한 번 더 생각하고 의심하고 질문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저 당연하게만 받아들여 내 뱉은 말이니 생각없이 나온 말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그런 말들이 누군가에게 꽂혀 칼이 되고 독이 독이 된다.

칼에 맞은 상처나 독에 찔린 상처는 깊은 통증과 흔적을 남기고 한 번 아팠던 사람은

다음에 비슷한 말에 다시 경기를 일으키고 몸을 움츠리며 불안에 떤다.

칼이 아픈지 독이 얼마나 지독한지는 경험해 본 사람이 가장 잘 아는 법이니까

 

모든 이들은 평등한 인간이고 인간성의 존엄을 가지며 모든 이들은 정의에 관한 기초적인 권한을 가지며 모든 이들은 폭력, 배제, 모욕, 종속의 가장 지독한 형태로부터 보호받을 자격이 있음에 확신하는 것이 정의의 가장 중요한 기초인데 혐오표현은 이 기초를 붕괴시키는 것이다.

혐오표현이 공존의 조건을 파괴한다면 이것은 헌법적 가치인 인간존엄 평등 차별로 부터 자유로울 권리 연대성 등을 훼손하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표현이 이러한 가치들을 파괴한다면 표현의자유가 우선시될 수 없다.

 

누군가를 어떤 가치관을 싫어할 수 있다.

그리고 싫다고 당당하게 내 의견을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모이게 되고 많아지면 내가 가진 생각은 당연한 상식이 되고  힘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말로 인해 상처입을 타인이 있다는 건 잊게 된다

아니 타인을 인식하지만 그가 그런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음 역시 당연하게 생각해버린다.

그리고 말들이 모이면서 행동이 되고 규칙이 되고 울타리가 되거나 분노가 되기도 한다.

하나의 생각이 말로 형태를 갖게 되고  모이게 되면서  움직임을 만들고 흐름을 만들어내면서 그 이면에 누군가  아파할 수 있다는 것은 잊어버린다. 아니 그게 당연하게 된다.

 

혐오표현이 잠재적 가해자들 사이에서 확산성이 있다는 점도 혐오표현의 해악을 가중시킨다. 명예 훼손이나 모욕은 특별히 전염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혐오표현은 다르다. 역사적 뿌리를 가지고 있는 혐오감정과 차별적 편견이 권력욕이나 경제적 궁핍 사회불만등과 결합되어 문제의 원인을 소수자에게 전가하고 희생양을 만들기도 하고 혐오 이데올로기가 후대에 전승되어 사회에 뿌리박히고 혐오조직의 결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저자는 혐오표현이 가지는 제한성과 배타성에 대해 이야기 하고 그것이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그런 혐오표현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제도적으로 법을 만들고 강제성을 띄어서 제한하는 방법이 있지만 그럴 경우 개인의 표현의 자유와 부딪칠 수 있다. 누구나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자유말이다.

누군가가 어떤 상황이 싫다고 말하는 건 나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하나 따지고 재갈을 물리는 것이 제도화 되어버리면 누구도 말할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사회가 평등하지 않고 누군가 어떤 집단은 정서적으로 사회적으로 차별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경험했다면 그들에게 던져지는 어떤 부정적인 말 한마디는 그저 한마디의 말이 아니다.

그건 공포일 수 있고 불안 나아가 생명까지 위태로운 무시무시한 상황일 수 있다.

사회에서 배제되고 있다고 느끼고 스스로 투명인간처럼  취급당했던 어떤 소수자에게 나는 너희들에게 동의하지 않아. 라는 말은 그저 그 사람의 개인적인 의견일뿐 아니라 하나의 폭력으로 다가올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 무심한 말들이 어느 순간 하나하나 개별적인 언어라 아니라 뭉쳐진 덩어리가 되어 어디서 나를 후려칠 수 있는 어마어마한 공포로 다가오고 있다.

내가 아직 혐오표현을 경험하지 않았고 왠만한 말에 상처받은 경험이 없다면

사회가 살만한 곳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그만큼 운이 좋고 소수자가 아닌 편에 있는 경우라고 생각을 해야한다. 사회는 여기저기 기울기가 다른 곳이다.

저자는 제도적인 장치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우선 사회적인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회에서 혐오표현에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자꾸자꾸 말하고 표현함으로써 오히려 혐오표현이 자리잡지 못하는 방향으로 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걷잡을 수 없이 혐오표현들이 다양해지고 여기저기서 에상치 못하게 부 딪치고 충격을 주는 혐오표현들이 그렇게 정화될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처럼 서로서로에게 겨눠지는 수많은 혐오들이 어떻게 다양하게 생겨났는지를 다시 돌아보게 되고 과연 개개인의 생각과 표현의 자유와 약자를 향한 (본인은 정당하다고 당당하게 믿는)혐오발언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무작정 금지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고 결국은 사람 사이에서 생긴 갈등을 사랆들이 스스로 풀어야 하지 않나 하는 조금은 말랑말랑한 제안을 하지만.. 역시 생각해 볼 일이다

누군가를 향해 비난을 하고 혐오를 드러내는 일이 세상에 어떤 도움이 될까

아니 나아가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혐오하고 없어지기를 바라고 그래서 물리적인 행동을 옮기는 일이

나에게도 과연 득이 되는 일일까

그래서 사라진 누군가 약자 혹은 혐오대상이 언젠가는 내가 되지는 않을까

해결책 보다는 생각이 더 복잡해지는 책읽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상한 정상가족 - 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를 그리며
김희경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프롤로그

 

지금까지 우리 사히는 공공의 역할까지 가족에게 떠넘기고 극심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은 것은 ‘가족 총력전’이 되다시피했다. 가족 안에서 가장 약한 존재인 아이들의 자율성은 간단히 무시됐으며 가족주의의 극단이라 할 마음가짐 즉 아이를 소유물로 바라보고 토에하는 행동은 여전하다. 가족 바깥의 사람들에 대한 배척은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화됐다. 그러는 동안 국가는 제 할 일을 하지 않고 저만치 물러나 각 가족의 ‘각자도생’만 부추겼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 채택 10주년 기념 엘레노어 루즈벨트의 연설중에

“보편적 인권은 어디에서 시작할까요? 작은 곳 그리고 아주 rkRKdns 곳에서부터입니다. 아주 가깝고 아주 작아서 그 곳은 어떤 세계지도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곳은 각각의 사람들의 세계입니다. ...(중략) ... 작은 곳에서부터 인권을 지키려는 모두의 노력이 없다면 보다 큰 세계에서의 발전도 헛될 것입니다.

 

가족안에서 가장 약한 사람의 아주 작은 권리조차 보장되지 않는다면 더 큰 세계에서 발전하려는 노력도 헛된 일이 될 것이다. 아동 인권의 관점에서 가족과 공공성을 생각해보려는 이 책의 시도가 우리 주변의 작은 곳에서부터 변화를 만들려는 흐름에 함께 할 수 있다면 더 바랄것이 없겠다

 

1. 가족은 정말 울타리인가

내것인 너를 위한 친밀한 폭력. 체벌

 

인류학자 김현경은 <사람. 장소.환대>에서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체벌은 갖가지 이유로 행해질 수 있고 거기에 따라 붙는 훈계도 그만큼 다양하다. 하지만 표면상의 다양성을 넘어서 체벌은 언제나 단 하나의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전달한다. 바로 체벌이 언제라도 반복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너의 몸은 온전한 너의 것이 아니며 나는 언제든 너에게 손댈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체벌에 동의한다는 것은 이 가르침을 t n용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러게 해서 모욕의 역설을 이해하게 된다. 모욕은 타인의 인격을 부정할 뿐 아니라 그러한 부정에 대해서 부정당하는 사람의 동의를 강요한다. 모욕당하는 자가 모요에 동의하는 순간 모욕은 더 이상 모욕이 아니다. 그것은 의례의 일부이며 질서의 일부가 된다. 결국 모욕은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는 폭력이다.’

 

나는 언제든 너의 몸에 손댈수 있다는 가르침, 과거 여성에 대한 폭력도 같은 메시지를 깔고 있었다. 체벌을 비롯한 친밀한 관계에 있는 타인에 대한 반복적 폭력은 모두 같은 메시지를 보낸다. 나느 sdjs제든 당신을 통제할 수 있다는 권위주의적 메시지 당신의 존재할 권리를 결정하는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때리는 사람인 나라는 주장.그렇게 힘으로 상대를 침묵시키고 상대의 목소리를 부정하고 때리는 사람의 목소리르 상대안에 심으려는 시도다.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폭력과 사랑을 연관짓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사랑하면 신체적으로 우월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힘으로 억눌러도 괜찮다고 가르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사랑하고 돌보는 관계에서도 더 힘이 세거나 권력을 가진 사람은 문제해결방법으로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체벌은 아이들에게 ‘네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사람을 때려도 괜찮다’ '공격적이어도 괜찮다‘고 가르친다.

데이트 폭력 체벌 등 친밀한 관계에서 사랑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폭력은 맞는 사람에게 알게 모르게 ‘내가 맞을 짓을 했다’고 믿도록 강요한다. 맞는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에 맞았다고 스스로를 낮추고 자신을 부정해야 한다.

 

아이를 대하는 태도가 그 사회를 말해준다.

 

성인간의 관계에서 상대에게 의도적으로 해를 끼치는 행위는 이유가 무엇이든 형사적 처벌을 받게 된다 그러나 ‘보호와 교양 목적의 징계’라는 말로 상대에게 이도적인 해를 끼쳐도 돈다고 법이 허용하는 유일한 대상이 아이들이다. 아이도 한 개인으로서 자율적인 존재이고 어른처럼 생명과 신체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한다면 이를 법의 언어로 반영하지 모할 이유가 없다.

 

 

과보호 방임. 자식을 소유물로 생각할 때 생기는 일

 

‘일가족 동반자살’이라는 불가능성에 대하여

동반자살이라는 용어를 쓰지 말아야 할 이유

# 동반자살이라는 표현은 명백한 살인과 아동 인권침해를 온정의 대상으로 만들고 부모가 자기 뜻대로 자녀의 죽음을 결정할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을 퍼뜨립니다

# 동반자삭이라는 표현은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라는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비극으로 잘못 인식하도록 만듭니다 부모에 의한 자녀 살해가 지속되는 이유는 부모가 자녀를 소유물로 생각 할 뿐 아니라 이웃과 사회에 대한 불신이 뿌리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사회가 고민해야할 일은 안전망이 제대로 갖춰지고 작동하고 있는가를 점검하는 일입니다.

 

우리 사회엔 가족을 운명공동체로 보고 부모는 자녀에 대해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는 강박이 지나치게 뿌리 깊다. 부모는 항상 모든 것을 바쳐 자녀를 위해 희생하고 뒷바라지 해야하고 만약 그렇지 못하면 부모 자격도 없다는 식의 강박관념 말이다. 자신과 자녀의자아를 분리하지 못하고 내 아이들의인생이 따로 있다고 바라보는 인식이 희박하기 때문에 자신의 생을 끝낼 때 자식의 생명을 거두는 것이 끝까지 책임을 지는 부모의 태도라고 생각해버리기 십상이다. 이를 ‘가족동반자살’이라는 온정적 표현으로 부르고 ‘오주하면...’이라고 관용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여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한국의 가족은 압축적 근대화가 낳은 온갖 부작용의 해결사 역할을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오랜기간동안 복지를 가족이 해결해왔다. 정부가 압축적 근대화 과정 내내 유지한 기본 기조는‘ 선 성장 후 분배’ 정책이었고 그 결과 복지와 교육 의료 부양등 거의 모든 사회문제를 가족에게 떠념겼다.

사회는 급격히 변화하는데 사회적 안전망이 없는 상황에서 살아남으려면 가족이 똘똘 뭉쳐야 한다. 집단주의의 약화를 불러오기 마련인 근대화 과정에서 거꾸로 직곅족 중심의 배타적인 가족주의는 더 강력해졌다.

 

친권은 권리가 아니다.

<유엔아동권리협약>에는 더 이상 집이 안전한 곳에 되지 못할 경우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아이는 원래 태어난 가정에서 친부모와 함RP 자랄 수 있는 권리를 치우선적으로 보호해야 한다. 그러나 친부모가 되레 아이에게 해로울 때 붐와 아이를 분리하는 것이 아이의 안전과 삶의 질을 위해 더 낫다고 판단한할 경우 국가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제도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국가의 아동보호제도이다. 하지만 한국의 아동보호 제도는 지나치게 강력한 친권에 부딪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컨대 부모에게 학대를 당해 긴급보호조치로 집을 떠나 시설에서 살게 된 아이의 경우 구각에서 수급자로 지정 받아 의복비 식비등 필요한 비용을 지원받을 수 있다. 문제는 수급비를 받기 위한 통장을 개설해야 하는데 미성년자인 아이의 명의로 통장을 만들려면 친권자인 부모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아이를 학대해 결국 격리를 당하기까지 이른 부모가 통장 개설에 순순히 동의할 리가 없다. 동의하지 않거나 동의를 전제로 돈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계좌를 만든뒤 아이명의 계좌에서 마음대로 돈을 인출해가기도 하는데 친권자이므로 그를 막을 방법이 없다

친권은 자녀를 보호하고 교양할 권리이자 의무이다.

 

2. 한국에서 ‘비정상’가족으로 산다는 것

왜 미혼모만 있고 미혼부는 없을까

 

임신단계에서 미혼 임산부에게 미혼모가 받을 수 있는 지원 관련 정책등으ㅢ 정보를 제공하고 비밀을 보장해주며 상담하는 콜센타같은 지원이 절실한데 아직까지는 그런 제도가 없다.

일자리를 얻지 못한 저소득 미혼모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어떨까? 정부는 아이(만 13세 미만)를 홀로 키우는 저소득 미혼모에게 월 12만원(엄마가 청소년일 경우 17만원)의 양육비를 준다. 만약 미혼보가 직접 키우기를 포기하고 아이를 다른 양육시스템으로 보낸다고 해보자 입양을 보낼 경우 입양가정은 입양 수수로 270만원을 지원받고 매달 15만원(14세 미만 )의 양육수당과 20만원의 심리치료비 100%의료지원을 받는다. 또는 위탁가정이나 시설에 보낸다고 해보자. 2015년 보건복지부의 <대한 양육제도 양육비실태조사연구>에 따르면 위탁 가정은 월 66만7000원 공동 생활가정은 128만원 양육 시설은 166만원의 지원금을 정부로부터 받는다.

시설의 경우 종사자 인건비 일부가 포함되므로 단순 동등비교는 할 수 없지만 어떤 경우든 미혼모가 아이를 버리는 것 보다 직접 키울 때 정부의 지원이 가장 적은 것은 사실이다. 만약 미혼모가 기초수급자가 된다면 이 혜택도 사라진다. 생계 급여와 아동양육비는 중복해서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미혼모를 위한 제도적 지원을 강조하는 이유는 핏줄때문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친엄마의 양육이 더 좋고 입양이 더 좋고를 떠나서 여성이 출산과 양육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회구성원들처럼 미혼모에게도 자신과 아이에게 가장 좋은 방법을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열려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자면 마룬인 다양한 가족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차별없이 다양한 가족이 공존할 수 있도록 결혼을 둘러싼 법재도 개선 여성의 양육권과 이의 인권등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더 활성화되어야 한다.

 

입양.. 정상가족으로 수출되는 아가들

 

국내입양을 활성화하고 해외 입양을 그만두겠다고 했다가 뒤집는 상황이 거듭되던 무한루프이면의 일관된 흐름은 미혼모가 아이의 양육을 포기하게끔 만드는 상황이 고착되어버렸다는 것이다 1070년대에 미혼모의 자녀가 입양의 주류를 차지하기 시작하고 1980년대 입양이 산업화하면서 미혼모가 아이를 포기할 수 밖에 없는 구조가 정착되었다. 미혼모는 부도덕한 여성으로 이미지화 되면서 평범한 어머니일 수 있는 기회에서 배제되었다

이 바탕에는 ‘결혼한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결합만이 가족이며 이 틀을 벗어나면 해외든 국내든 입양을 통해서 아이에게‘제대로 된 가족을 찾아주는 게 더 좋다느 sdlstlr 즉 강력한 정상가족이데올로기가 깔려있다. 사회규범을 일탈한 미혼모의 아이를 입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자녀의 부재를 채우고 보내는 입장에서는 부모의 부재를 채움으로써 정상가족의 원칙을 완성하려는 의도에서 한치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한국에서 피부색이 다른 가족이 산다는 것의 의미 ... 이주가정의 아이들의 차별문제

 

3. 누가 정상가족과 비정상가족을 규정하나

 

한국에서 가족은 왜 이렇게 중요해졌을까

사실 핵가족은 근대의발명품이 아니다. 흔히들 생각하는 것과 달리 한국의 전근대 사회에서도 확대가족 대가족은 드문 현상이었고 부부 중심의 핵가족이 보편적이었다고 한다. 수명이 짧아 3대 이상이 공존하는게 드문일이었고 확대가족 유지에 필요한 경제력을 갖추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줄곧 핵가족 제제였는데도 핵가족을 이상화했다가 10년도 지나지 않아 비판하는 담론이 출몰했던 이유는 뭘까

이는 구각의 통치 이데올로기와 관련이 있다는 분석이다.

경제발전 과정에서 노동력 특히 값싼 저임금 노동력이 필요했던 국가는 핵가족을 찬양하면서 농촌 자녀의 도시 이주를 장려하고 여성의 노동시장 유입 산아제한등을 골라로 한 가족계획을 장려했다. 그러다가 산업화의 진전으로 농촌의 공동화 및 노령화가 문제가 되고 노인 부양의 필요가 제기되자 이번에는 핵가족을 비판하고 전통적 가족 부양의 윤리를 찬양했던 것이다. 상반된 두 사례의 공통점은 국가가 아무런 사회적 비용도 지불하지 않고 노인 부양의 문제를 비롯한 사회무네 원일을 핵가족에서 찾았다는 점이다. 바람직한 가족상을 내세우며 국가가 가족을 이용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사회정책이 가족단위로 설계되는 방식이 지속되면 가족을 형성치 못한 개인, 가족에게 충실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 개인에게는 사회가 또다시 불이익을 가하는 셈이 된다.

또한 소득보장 교육 돌봄의 양과 질등이 가족에게 의존적일 경우 계층에 따라 받을 수 있는 서비스의 질이 달라지므로 양극화가 심화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양질의 교육과 돌봄 서비스가 충분치 않은 상황ㅇ서 가족에게 주어진 자유선택이란 곧 개별 경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양극화된 가족 삶의 최대 피해자는 아이들이다. 사교육 과잉 현상이 보여주듯 중산층은 계층의 하락을 하지않으려는 몸부림으로 나서고 저소득층은 방임상태로 인한 돌봄 공백상태에 빠지고 이 스트레스 해소 대상은 아이들이 된다.

 

개인 아닌 가족단위로 사다리에 오르는 사회

 

왜 가족주의는 회사 학교 사회로까지 퍼졌나

가게등에서의 호칭 어머님 이모님

가족같은 분위기 가족같은 회사

우리는 00 가족입니다.

가족을 강조하는 것과 동시에 내 가족 내 부류와 다른 타인은 배척하고 금을 그어버린다.

임대주택단지의 울타리 혐오시설의 거부

 

4. 가족이 그렇게 문제라면

부모체벌 금지법은 사회를 어떻게 바꿀까

 

한국은 왜 가족안에서의 개별성 가족 밖에서의 다양성이 존중받지 못하는가?

-가족의 생활을 지원하는 공공의 역할부재 때문이다

사회적 안전망 없이 사적인 안전망이 가족에게 모든 보호를 떠넘기고 당장의 생존이 목표인 가족이 구성원의 개별성을 고려할 여유가 없다.

-치열한 경쟁과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가족단위로 경쟁에 뛰어들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자기 집단만 중요시 하는 가족주의가 사회로 확대되면서 배타적인 태도가 굳어졌고 타인과 사회에 대한 신뢰가 사라졌다.

 

스웨덴의 부모체벌 금지법이 있다

 

가족내에서 양육을 할 때 폭력을 사용하는 행위를 국가가 금지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가족의 탈 사생활화를 요구하는 조치라고 할 수 있다. 가족내에서 이러지느 sgoddnl들이 전부 사행활은 아니게 된 것이다,

가족이 사생활영역으로 닫힌 공간 관계가 되어버리면 가족은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공간과 관계인 동시에 가장 위험한 공간과 관계가 될 수도 있다. 폭력은 일상안아세 가정안에서 이루어진다.

부모 체벌금지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체벌을 금지하는 법의 목적은 단순하다. 병백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가장 선명한 메시지를 내보내는 것 폭력과 비폭력 사이에서 아주 단순하고 선명한 줄을 긋는 것이다. 어른의 책무는 아이에게 폭력이나 협박 위협에 기대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음을 가르치는 것이며 정부의 책무는 비폭력적으로 아이를 키우는 게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러려면 체벌을 금지하는 법과 함께 부모가 필요로 하는 지원을 저우가 제공하고 정부와 사회가 합심하여 부모가 아이들에게 좋은 역할 모델이 될만한 시간과 에너지를 갖기 위해 필요한 환경을 체게적으로 조성해야한다.

 

삶은 개인적으로 해결은 집단적으로

스웨덴식 사랑 이론

이 이론은 진정한 인간관계는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고 불평등한 권력관계에 놓이지 않은 개인사이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자율적익 평등한 개개인 사이에서만 사랑과 우정같은 인간적 교류가 이루어진다. 심지어 부모와 자녀관계에서도 서로 의존적이고 귤욕을 강요하는 권력관계가 존재하는 한 진정한 사랑은 불가능하다고 바라본다. 국가는 이런 굴욕감에서 개인을 해방시킬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함께 살기 가족의 짐을 사회로

아이의 권리인정과 부모의 보호가 평화롭게 공존할 때는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는 아이의 권리와 부모의 권리가 상충하고 부모가 아이의 안녕을 심각하게 침해할 때 선을 긋는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다. <유엔 아동권리협약>은 이 책임이 국가 공적 권력에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공적 권력이 개입할 때의 기준은 아동 최선의 이익의 원칙이다. 즉 지금 아이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고려하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아이에 대해 법적 책임을 지닌 사람이 아이에게 필요한 보호와 배려의 의무를 지킬 숭 lT도록 국가는 모든 입법적 행정적 조치를 취하라고 주문한다.

즉 아이 개인과 부몬 국가의 관계에서 국가는 가족의 외부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국가는 아이의 인권이 심각하게 침해받는 상항이 되었을 때는 그 관계에 아주 사적인 부모 자녀 관게에 개입할 당사자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해서는 안될 짓을 정하는 게 먼저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상상해보는 공감의 감수성을 높이려는 노력은 물론 필요하지만 이를 개인의 도덕적 과제 감성의 영역으로 남겨두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폭을 넓히려는 교육이 공교육에 제도적으로 포함되어야 하고 ,<차별금지법> <이주아동 권리보장 기본법>등 이 제정되어야 한다. 그게 우리를 같이 살아가게 해주는 공감의 제도화이다. 역지사지하고 공감하는 능력보다 사적 관계에서는 예의 공적관계에선 정책과 제도가 우리의 공존을 가능하게 해주는 더 인간적인 장치이다.

  ***************************************************

 

아이가 슬퍼지는 게 싫어서 보지 않으려다 중간부터 보게된 드라마가 <마더> 였다.

아픈 아이를 보듬는 건 결국 모성이라고 진부하고 일방적인 타령을 보게 될까봐 기겁했었다 그러나 중간부터 본 드라마는 드라마의 완성도 때문인지 개인적이지만 보편적인 관심때문인지 계속 보게 만든다.

결국 가정폭력은 모두에게 상처를 남기고 또다른 폭력으로 대물림 된다.

기억에서 봉인해버린 폭력과 버림받았다근 상처 그래서 어떤 사랑앞에서도 외롭고 불안했을 수진은 자기와 비슷한 혜나에게 감정 이입이 되는 건 당연하다.

혜나는 또다른 존재이면서 동시에 수진의 내면아이였으니까

폭력의 피해자이고 버림받은 아이를 이젠 수진이 손을 잡아준다.

그건 혜나에 대한 공감이며 동시에 아직도 8살에 머물러 자라지 못한 수진에 대한 돌봄이다. 스스로 직면하지 않으면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동안 피하기만 하고 상처에 허우적거리기만 했던 수진은 이제 혜나를 통해 혜나를 윤복으로 키우면서 스스로와 마주할 용기를 얻는다.

아직 어려서 스스로를 바라볼 용기가 남은 윤복은 그 용기를 수진에게 나눠준다.

수진의 마음을 공감하고 자기 때문에 수진이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지는 걸 보지 못해 스스로 물러나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둘은 서로의 내면 아이가 되고 미래의 어른이 되어준다.

그리고 또다른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되는 설악이 있다.

아마 보여지지 않았지만 가족 불화가 있었고 불안한 엄마가 있었고 아직 생존을 위해 어른에게 기대야 하는 어린 설악은 착한 아이가 되어야 했다.

울지 않고 떠들지 않고 깨끗한 아이가 되는 것

그래야 엄마가 떠나지 않고 나에게 착한 엄마로 남아줄거라는 막연하고 가느다란 희망을 붙들려고 하지만 그건 처참하게 깨져버렸다. 자살 중에 가장 지독한 모습을 보인다는 목 매다는 방법으로 죽은 엄마를 설악이 가장 먼저 발견한다.

내가 죽었어야 했는데...

아이들은 작은 다툼과 불화에서 스스로 책망하고 자기에게서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

내가 착한 아이였다면 내가 조금만 똑똑했다면 내가 없었더라면...

모든 폭력의 피해자가 폭력을 쓰는괴물이 되는 건 아니다.

설악의 상황은 공감가능하고 이해가능하지만 그렇게 되어버린건 설악의 책임이 크다.

세상의 모든 엄마를 괴롭히는 아이들을 다 죽일 수는 없으니까

어쩌면 죽은 설악의 엄마도 순간순간 설악 때문에 웃고 설악 때문에 살아야겠다고 마음 먹었을 찰라도 있었을 텐데... 설악은 그 찰라의 순간을 경험하지 못했다. 아니 더 큰 고통으로 지워버렸을 것이다.

여기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은 두 여자가 있다.

너무 어려서 아이를 낳아 예뻐하지만 키울수 없던 엄마는 잘대해주는 남자를 만나지만 결국 폭력앞에 굴복하고 아이를 버리고 살인자가 되고

또 다른 어린 엄마는 아이가 이쁘지 않아서 울기만 해서 남자가 떠났다고 믿으며 모든 원망을 아이에게 투사한다. 예쁠때도 물론 있고 의지도 되지만 어린 엄마의 삶은 쉽지 않다

누구든 손을 내밀고 웃어만 준다면 그대로 기대버리고 싶을만큼 아슬아슬하고 아프다.

그래서 엉뚱한 선택을 하고 이기적인 마음을 품는다.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

결국 사회적 문제의 근원은 가족이다.

어떤 가족을 경험하는가는 살아가는 나머지를 모두 좌우한다.

경험과 기억은 누가 가져갈 수도 바꿀 수도 없는 오롯한 내것이다.

그것이 나를 만들고 나를 살게 하고 내가 선택하게 한다.

그렇다면 가족은 무조건 절대 선이어야 하고 모든 윤리의 기준이되어야 하나?

오로지 가족만...

그건 가족에게 너무 가혹하다.

l그런 안전망 하나 없이 사회에 던져지면 결국 자영이 되고 수진의 엄마가 되고 설악이 된다.

모든 게 가족 탓이고 가족 때문일 수는 없다

엄마의 양육이 아이를 결정하고 아이의 삶을 바꾸지 못한다.

엄마는 때로 강한 용기를 내기도 하지만 그 역시 어딘가 기대고 싶은 아이이가도 하다.

엄마에게 아빠에게 그리고 아이에게 힘을 줄 안전망이 필요하다

감성적인 공감 이해 이입이 아니라 예의있게 신중하고 정중하게 그 순간 순간 필요한 것을 내밀 수 있는 제도와 관심이 필요하다.

가족은 깨질 수 있다. 깨져도 된다.

가정폭력 특례법이 결국은 가족을 유지하기 위한 특수목적이라는게 참 유감이다.

누군가 모르는 낯선이에게 가한 폭행은 형사처벌이 가능하지만

친밀한 가족관계의 폭행은 상담과 조언과 충고로 다시 억지로 봉합된다.

가족끼리 그러면 안된다. 가정을 지켜야지..

이미 깨지고 상처만 남은 가정을 지키라니 그런 개뼈다귀같은 소리가 있나

가해자가 다리뻣고 익숙한 공간에서 쳐 자는 동안

피해자는 혼자 모든 악조건을 감수하고 몸을 뉘일 안전처를 찾아 해맨다.

늘 친밀한 관계에서는 그리고 대부분의 관계에서 가장 약한 존재가 가장 고통 받는다.

     

결혼제도에 속하지 않고 아이를 낳읗 수도 있다

그것이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을 일일 수도 있겠지만 자기 결정권을 가지고 스스로 선택한 일이라면 그럴 수 있다.

혼자 아이를 키우는 일이 힘들 수 있다. 아이를 키우는 일에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고 독박육아라는 말도 과장이 아니다.

엄마의 모성의 위대함이 스스로 아이를 양육할 수는 없다.

돈이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하고 제도적 뒷바침이 필요하다.

가정내 갈등이 생길 수 있다.

사람이 악해서일 수도 있고 상황에 몰리다 보면 살기위해서 일 수도 있고 잘못된 양육으로 잘못된 도식이 성립되어 생길 수도 있다

가족일은 사적인 일이니 알아새 처리하라는 말은 너무 무책임하다.

누군가 죽거나 만신창이가 되어야 관심을 가진다는 건 너무 잔인하다.

남편이 아내를 때릴 수도 있지 부모가 자식을 때릴 수도 있지

가족끼리 그럴 수도 있지

다른 사람은 다 안그런데 참 유별나게 굴기는...

그런 말이 주는 2차 피해는 지금 말하지 않기로 한다.'

혼자 아이를 낳아 키우고  혹은 아이에게 최선이 내가 키우는 것보다 입양이나 시설에 보내는 것이 옳다고 선택할 수도 있고 가족간에 갈등이나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받쳐줄 시스템은 너무나 없다.

자연스럽게 태어나면 위대한 모성이 키우고 아비가 되면 처자식 책임지고 먹여살리는 건 당연한거고 도덕적으로 일탈까지 사회가 다 받아줄 수는 없고 가족의 문제에 간섭하는 건 아니라고 접잖은 척 뒤로 빠져야 하고... 이건 그저 사회 안전망을 가지지못한 변명에 지나지 않더라

어떤 체게적인 뒷받침이 있었다면

자영은 조금더 긍정적으로 혜나를 돌봤을 수 있고

잘못된 선택으로 매를 맏던 수진의 생모는 사회의 도움으로 전과대신 다른 자립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어린 설악도 괴물이 되지 않을 수도 있고

이진이 자기 가족만 아은 이기적인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사회 안전망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못한다.

결국 가장 기초적인 교육과 양육은 가정에서 책임질 수 밖에 없고 가족이 그만큼 중요한 사회적 단위이지만 세상이 달라지고 다양해지는 만큼 문제도 제각각 벌어지는 현대 사회에서 가족의 뒤를 버텨주는 울타리가 될 사회적 제도는 무엇보다 절실하다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의 말을 경청하고 공감하는 일은 필요하다. 아니 중요하다. 그러나 그게 그저 그렇게 끝맺음이 된다면 그렇게 반복될뿐이다

그건 결국 문제를 개개인에게 맡겨버리는 무책임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바뀌지않는다

그래서 이 책 말미에 저자가 말한 개개인이 가져야할 예의와 사회적인 정책과 제도가 더 절실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로 쓴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 세상에서 가장 쉬운 임승수의 마르크스 자본론 강의 원숭이도 이해하는 시리즈
임승수 지음 / 시대의창 / 201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고 싶지만 쉽게 다가갈 수 없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원숭이도 이해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글을 읽고 기본적인 해독이 가능하다면 누구나 이해하기 쉽다. 다만 수식이 조금 헷갈리거나 이해했지만 다음장에서 다시 새롭게 보일 가능성은 있지만

그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자본론>이란 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와 또 다른 의미이다.

어떤 체제든 자본의 움직임이 방해받아서는 안되며 자본이 모든 것의 중심이고 사회를 움직이는 기본 값이라는 속성은 어떤 체제에서도 바뀌지 않는다.  체제 위에 자본이 있다

신 자유주의라는 이름 세계화라는 이름은 자본이 자기 증식을 위해 좀 더 넓은 무대를 원하는 욕망 과 다르지 않다.

인간이 함께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자 하는 욕구를 무시하고

각자 도생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경쟁으로 몰고 가는 것은 결국 자본의 논리였다.

성적대로 힘을 가진대로 돈을 가진 만큼을 기준으로 줄을 세우는 사회 그래서 무한경쟁으로 사람들을 몰아가면서 모든 패배와 절망은 모조리 개인의 몫이 된다.

일하지 않은 자는 먹지도 말라는 말은

가지지 못한 자는 게으른 자이고 이루지 못한 자는 미련한 자이며 얻어내지 못한 자는 무능한 자일 뿐이라고 가르친다.

자본의 힘은 정치에도 교육에서  사회전반적인 질서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마지막 보루라고 믿는 법에도 존재한다. 힘이 기준이 된다.

 

지금 다시 옛 원시 공동체로 돌아가자고 할 수는 없다.

지금 여기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여기는 곳에서 다시 시작할 수 밖에 없다.

자본주의가 왜 제국주의의 형태로 나타나는지

세계가 함께 머리를 모아 세계를 위해 만들었다는 대부분의 기구들이  결국은 강자의 논리가 되고 마는지..그 모든 뒤에는 실제는 없으면서 모두를 지배하고 추앙받는 자본이 있다.

둥구권이 무너지고 자유주의가 성장하면서 이제는 지나간 논리라고 치부했던 자본론이 다시 신자유주의 시대의 우리에게 묻고 있다

지금 당신은 행복하고 만족하는지???

 

이런 책이 왜 교과서로 쓰이지 않을까?

뭐 완벽한 책은 아니지만 한번쯤은 읽어봐야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