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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ㅣ 난중일기
이순신 지음, 이은상 옮김 / 지식공작소 / 2014년 8월
평점 :
드디어 읽었다.
절망의 시대에 달콤한 영국 낭만주의 시들을 외우면서 수용소 같던 대학생활을 보내던 그는 어느날 노산 이은상 선생이 번역한, 앞 뒷장이 다 뜯긴채 걸레가 돼서 굴러다니던 난중일기를 도서관에서 읽는다. 이순신이 절망의 시대에서 헛된 희망을 꿈이라 말하지 않고 절망 자체로 받아들이며 통과해가는 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갖게 된다. 그렇게 난중일기를 마음에 품고 숙성시켜 37년 만에 탄생한 것이 칼의 노래였다고 한다. - 2013.11.11 리뷰 닿지 않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를 - 바다의 기별 중에서
고 노무현 대통령이 추천했던 <칼의 노래>가, 김훈을 알게 했고, 좋아하게 했고, <바다의 기별>을 불렀다. 거기서 <칼의 노래> 탄생 배경을 알게 되었고, 노산 이은상 선생이 번역했다는 이순신 공의 <난중일기>를 알게 됐다. 좋아하는 사람들이 읽은 책을 통해 통해 통해 끝까지 간 곳이 난중일기다. <칼의 노래>를 고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 당시 읽었으니 그 때부터 난중일기를 읽게 되기까지 거의 10년이 걸린 셈이다.
현재 난중일기의 번역본은 노승석의 증보 교감 난중일기가 7월에 재출간되었고, 이은상의 역주해본(1968, 현암사)를 새롭게 펴낸 이 책, 그리고 동서문화사에서 낸 고정일의 난중일기가 있다. 청소년판과 어린이판, 축약판, 만화 등 난중일기 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책만 수십권이다. 이 책이 다른 책들과 다른 점 중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가로쓰기라는 점이다. 이순신공의 원문의 구성을 그대로 따라 비록 한문을 한글로 옮긴 번역본이기는 하지만, 친필 초고와 같은 호흡, 같은 분위기로 책을 읽을 수 있다.
세로쓰기와 더불어 공백이 넉넉하고 글자체도 고풍스럽고, 호흡과 리듬에 맞추어 줄바꿈이 되어 있다. 이 때문에 책의 두께가 894쪽이나 되지만, 제본상태가 좋아 내구성이 있고, 오래 들고 다니며 읽어도 튼튼했다. 내용을 떠나, 편집에서만 보더라도 줄바꿈에서부터 글자체, 재생지의 사용 등 모든 면에서 아주 세심하게 충무공의 정신을 반영한 훌륭한 책이다.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다보면 보면 간결한 문체에서 느껴지는 비장함이 그 어떤 절절한 문체보다 깊이 마음을 파고 들었었는데 그것이 난중일기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간결하고 사실을 조금도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기록한 이순신의 문체는 그대로 아주 천천히 끝을 향해 가면서 마음에 닿는다.
처음엔 단순히 누가 들어왔고, 누가 나갔고, 누구를 무슨 일로 누구를 처벌했고 교서에 숙배하는 등의 공무에 대한 기록만이 나열된 것처럼 느껴져서 다소 난감했다. 그러나 스킵할 수는 없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빠짐없이 행하는 '망궐례를 드렸다'와 '맑음, 동헌에 나가 공무보았다' 일상의 반복에 대한 기록 한 글자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나라를 구한, 민족을 구한 그분의 생 중 왜의 침략 7년 동안 전장에서의 기록, 전장에서의 삶이지 안은가. 뿐만 아니라, 작가적 상상력이 개입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기록이라, 당시 사회 풍속과 제도 등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다른 역사책과는 비교할 수 없는 책이다.
영화 <명량>에서 불태우고 도망간 배설에 대한 후손들의 명예훼손 고소 소식을 듣고, 배설에 관한 부분을 유심히 읽었는데, 불만 안냈을 뿐 인간성이나 비겁함이 영화와 딱히 틀리지도 않은 것 같다.
원균이 포구에 있는 수사 배설과 교대하려고 여기 이르렀기로 교서에 숙배하게 하였더니 불평하는 기색이 많으므로 두 번 세 번 타일러 억지로 행하게 하였다 하니 너무도 무식한 것이 우스웠다. 1594.2.22(음)
노량에 이르니 거제 원 안위와 영등포 조계종 등 여남은 인이 와서 통곡하고 피해 나온 군사와 백성들도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는데 경상수사(배설)는 도망가고 보이지 아니했다. 우후 이의득이 보러 왔기에 패하던 정황을 물었다. 모든 사람이 울며 말하기를 [대장 원균이 적을 보자 먼저 뭍으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그같이 뭍으로 달아나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718쪽(정유년 1597.7.28(음), 백의 종군 후 일기)
8.17 수사 배설은 탈 배도 보내지 않았다. (삼도수군절도사 이후)
8.18 회령포에 갔는데, 수사 배설이 뱃멀미를 핑계대기 때문에 보지 않았다.
8.19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는데 배설은 받들어 숙배하지 아니했다. 그 건방진 태도가 말할 수 없었기에 그 영리를 곤장때렸다.
8.26 적선 여덟 척이 뜻밖에 들어오니 여러 배들이 겁을 집어먹고 달아나려 하고 경상 수사(배설)도 달아나려고 했다.
8.29 늦게 배설은 적이 장차 많이 올 것을 염려해서 도망하려고도 했으나 관하의 여러 장수들이 찾기도 하고 또 나도 그 속내를 잘 알지만 드러나지 않은 것을 먼저 발표하는 것은 장수로서 하는 방법이 아니므로 참고 있을 즈음 배설이 제 종을 시켜 소지를 냈는데 병세가 위중하여 조리를 하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육지로 올라가서 조리하라고 처결해 주었더니 배설은 우수영에서 육지로 올라갔다.
9.2 배설이 도망갔다.
영화에서 불나는 장면 역시 순전히 상상력에만 의존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일기를 읽다보니 알게 됐다. 당시 겨울이면 바짝 마른 목재 건물과 각종 화기 취급에 따른 부주의로 자주 불이 났던 것 같다. 바로 영화의 그 시기 즉, 명량 해전 직전에 불이 난 것은 아니었지만, 겨울이면 불이 자주 나서, 간혹 배도 태우고 집도 태우고, 군량과 무기고들을 태워 이순신 공을 비통하게 하였다.
일기에는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전쟁에 대한 아주 상세한 묘사와 전략적 내용은 많지 않다. 위키백과에 첫 전투로 기록되어 있는 옥포 해전(5.7)은 없고, 5.29 사천해전에 대한 기록은 이렇다.
우수사(전라 우수사 이억기)가 오지 않으므로 혼자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새벽에 떠나 곧장 노량에 이르러 미리 만날 약속한 곳에서 경상 우수사(원균)와 만났다. 왜적이 있는 곳을 물으니 적은 지금 사천 선창에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바로 거기 가보니 왜인들은 벌써 상륙해서 산 위에 진을 치고 배는 그 산 밑에 벌여 놓았는데, 하언하는 태세가 아주 튼튼했다. 나는 모든 장수들을 독전하며, 일제히 달려들어 화살을 빗발치듯 퍼붓고 각종 총통을 바람 우뢰같이 쏘아 보내니 적들은 두려워 물러나는데 화살에 맞은 자가 몇 백 명인지 알 수 없고 왜적의 머리도 많이 베었다. 군관 나대용이 탄환에 맞았으며 나도 왼편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아 등으로 뚫고 나갔으나 중상에는 이르지 않았다. 활군과 격군 중 탄환 맞은 사람들 또한 많았다. 적선 열세 척을 불태우고 물러 나왔다.(임진년 2.29)
명량 해전의 비장함 역시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해전을 치르기 전에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으고 약속하되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모두 오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일망정 용서치 않겠다"고 엄격히 약속하였다. (9.15)
9.16
맑음. 이른 아침에 특별 정찰 부대가 보고하기를 '적선이 수효를 알 수 없도록 많이 명량으로 해서 곧장 우리가 진치고 있는 곳을 향해 들어온다'고 하였다. 곧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려 바다로 나가니 적선 백삼십여 척이 우리 배를 에워쌌다. 여러 장수들은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대적하는 것이라 스스로 낙심하고 모두 회피할 꾀만 내는데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벌써 두 마장 밖에 나가 있었다. 나는 노를 바삐 저어 앞으로 돌진하며 지자, 현자 등 각종 총통을 마구 쏘니 탄환은 폭풍우같이 쏟아지고 군관들이 배 위에 총총히 들어서서 화살을 빗발처럼 쏘니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나왔다 물러갔다 하였다. 그러나 여러 겹으로 둘러싸여서 형세가 어찌될 지 알 수 없어 온 배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돌아다보며 얼굴빛이 질렸다. 나는 조용히 타이르되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치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을 동하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라' 하고 여러 장수의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자 해도 적들이 더 대어들 것이라 나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할 형편이 되었다. 호각을 불어 중군에게 군령을 내리는 기를 세우라고 하고 또 초요기를 세웠더니 총군장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츰 내 배 가까이 왔으며 거제 현령 안위의 배가 그보다 먼저 왔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친히 안위를 불러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하니 안위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했다. 또 김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할 것이로되 적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한다'하였다. 그래서 두 배가 적진을 향해 앞서 나가자...
도망가려 하는 장군들을 불러 세워 어르고 달래, 전투를 계속해야 했는 공의 심정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그 때 우리 배는 겨우 13척, 적군은 130여척이었다. 명량해전은 난중일기 중 전투 장면을 가장 상세하게 기술한 해전이었다. 개미떼처럼 새카맣게 달려드는 적선과 적들의 기세에 공포와 두려움을 이길 수 없었던 장군들을 호령하던 공의 모습이.. 달빛 고요한데 비단결같은 바다가 멀리로 보이는 수루에 홀로 앉아 불타버린 조선 군함들과, 전사한 아들 면과, 옥에서 풀려난 아들을 만나러 순천 먼 길에서 오시다 돌아가신 어머님과 풍전등화와도 같은 조국의 미래를 생각하며 잠못이루던 그 이순신 공이 부하들을 호령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에게 달려들던 모습에 오랫동안 숙연해졌다.
이순신의 심성을 읽을 수 있는 대목도 많았다. 그는 공무에 있어서는 엄한 무관으로, 일기에는 탈영병의 목을 베는 기록이 많았고, 공무 처리가 늦거나 실수가 있을 때에도 곤장으로 엄하게 다스려, 수군의 질서를 유지하면서도, 기회가 닿는 대로 병사들을 술과 떡으로 위로하였다. 거의 매일 활을 쏘았으며, 달빛에 앉아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며 노모에 대한 애환을 새벽닭이 울 때까지 홀로 지새는 밤이 많았다. 백의 종군하면서도, 임금에 대한 원망 한 마디도 없었으며, 백성의 삶과 나라의 안위만을 걱정하였다.
영주에 이르니 좌우의 산꽃과 들가의 봄풀이 그림 같았다. 옛날에 영주가 있다더니 역시 이 같은 경치던가.(임진년, 1.20)
칼의 노래 첫문장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를 연상시키는 구절이다. 그러나 정작 섬들이 버려졌을 때는 이순신 공이 옥에 갇히고, 원균이 조선 수군이 칠전량에서 크게 패하여 민중들은 희망을 버렸을 때였다. 그래도, 잊지 않고 봄이 되자 그 섬에 꽃들이 피었다. 이순신이 가는 곳에 승리가 있었고, 정의가 있었고, 착하게 사는 사람에게는 안전이 보장되었었다. 그가 옥에 갇히자 백성들은 절망의 한 가운데 놓이고 섬은 버려졌다. 그렇게 가신 님들이 그립다. 동시대에 살았던, 칼의 노래를 좋아했던 그 분도 그립고, 같은 하늘 아래 다른 시간에 살았던 칼의 노래의 주인공, 전란 중 하루 하루를 이렇게 생생하게 재현할 수 있도록 한자 한자 써내려간 이순신 공도 아득하게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