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셋 파크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상처에는 가해적 상처가 있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원치 않은 상대 혹은 상태에 저항하다가 누군가를 돌이킬 수 없는 파멸에 이르게 하였다면 그에 대한 죄책감과 책임감으로 나 역시 피해를 입는다. 내가 의도했건 안했건 가해자가 되었을 때, 몹쓸만큼 엄청난 가해자가 되었을 때 그 누구에게도 온정을 바랄 수 없다는 없다는 사실은 어쩌면 세상의 유일한 정의일 지도 모른다. 이 때 스스로를 구원하는 방법은 스스로를  벌주는 것이다. 이 방법 밖에 없다. 


가해의 행동을 뼈저리게 후회하는 동안 가해자는 자기 피부 아래쪽 깊숙히 궤양이 생기도록 스스로를 향해 깊은 상처를 판다. 그 깊은 우물 속엔 자신 밖에 없다. 그 우물 속을 빠져 나올 구원도 스스로가 스스로에게서 찾아야 한다. 


스스로 벌주기가 스스로를 파멸시켜 모든 가학적 행위가 피학적 행위와 같아졌다는 생각은 사랑이 다가왔을 때 나타난다. 그칠 것 같지 않던 빗속, 어둔 구름을 뚫고 한줄기 빛처럼 홀현히 나타난 사랑 그것은 유일한 구세주다. 그러나 이승에서의 구원은 영속성이 없다. 개별적인 인간은 그 인간을 규정짓는 망할 정체성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인간이 자기가 지닌 개별적인 특성, 성격 때문에 마지막 구원을 남겨두고 다시 또 유사한 행동을 되풀이하는 것은 인간의 개별성을 규정한다. 


인간은 결국 변하지 않는다는 걸까. 아니다. 구원받을 수 없다는 뜻일까.  아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만. 같은 동굴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번엔 선셋 파크의 주인없는 집을 무단으로 점거해서 살아가는 동료들이다. 함께 공유했던 건 빈곤 밖에 없는 줄 알았던 그들. 그들에 대한 정의감이 그를 다시 망가뜨렸지만, 이제 그는 혼자가 아닐 터이다. 그의 곁엔 가족이 있을 터이고, 사랑하는 사람이 그를 기다릴 터이다.


중요한 건 이거다. 가해자에게 공감한다는 것은... 가해자에게 깊이 깊이 공감하고, 흐느낌 같은 감정들이 들숨 날숨을 통해 폐를 통과하며 그 감정에 함께 머문다는 것은.. 나 역시 이 세상의 어떤 관계들 속에서 인식하고 있지 않던 어떤 작은 사건, 작은 상황들 속에서 가해자라는 것이다. 힘든 친구에게 따뜻하게 마음쓰지 못하는 것들, 아픈 부모님에게 자주 전화하지 않는 것들.. 수없이 많은 순간들 속에서 수없이 많은 가해의 행동을 한다는 걸 인식하면서 조금씩 자신의 피부 밑을 파내어 상처를 만들고 우물을 판다는 뜻일 터이다. 


우리도 어쩌면 선셋파크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주인 없이 스러져 가는 낡은 집에 내 빈곤한 정신과 궁색한 물건들을 채워 넣고, 공허한 하루가 더 공허한 내일이 되지 않기 위해 달그락 거리며 살아가는 곳. 그림자를 피해 작은 희망의 햇살조각 안에 앉아 있는 곳, 언제 경찰이 들이닥쳐 그동안 채워놓은 것들을 삶에서 밀쳐버릴 지 모를 그 허름한 선셋 파크의 주인없는 집에 무단 침입하여 함께 머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구간을 사느라 정신없이 뒤지던 번잡했던 11월이 지나고 이제 마음을 비우니 슬슬 신간이 궁금해진다. 

향후 1년은 과학서적을 열심히 읽을테다.


정가제 시행 이전 동아시아에서 나온 책들도 많이 사 놨는데.. 또 동아시아다. 양질의 책을 만드는 동아시아 감사~

320쪽 그리 두껍지는 않지만 컬러 사진도 있고.. 적당한 가격이다. 

"뇌의 작동 원리와 인간 사회의 작동 원리를 과학적으로 명쾌하게 풀어내 이해를 도우면서 철학과 문학, 역사, 신화의 사례를 자유자재로 넘나들어 이해를 돕는다. "는 출판사 설명.









또 동아시아다. 인터스텔라에 나오는 우주 과학 지식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설명, 

영화에서는 웜홀을 아주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다른 이론들은 이제 책으로 공부할 차례. 안그래도 하나하나 찾아보느라 이 책 저 책 뒤지고 있었는데 정말 반가운 책이다. 책을 읽고, 영화 한 번 더 때리면 우주의 0.00000001% 정도는 이해할까? 꿈도 야무지지.












뮤지컬은 너무 비싸서 잘 못보는 편인데, 이 책 흥미롭다. 뮤지컬 무대의 기술들이 플라잉 테크놀로지, 스테이지 테크놀로지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최근의 기술들이 어떻게 예술 무대에 접목되고 있는가에 대한 예술과 기술의 통섭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무대장치에 관심있는 사람도 뮤지컬에 관심있는 사람도 양쪽을 동시에 이해하는 게 필요하니까..








한 때, 컴퓨터 분야에서 뉴럴 네트웍과 인공지능은 차세대를 거머쥘 주인공이었다. 나에겐 지금 '인공지능'이라는 용어는 발전된 기술의 진부한 표현처럼 느껴진다. 저자 <유신>은 런던대 교수인데, 첫번째 저서이다. 목차를 살펴보니 앞부분은 조금 고리타분하게 느껴지는 인공지능의 역사부분부터 시작되는데, 뒤쪽으로 갈수록 흥미로운 용어가 눈에 띈다. 인공지능을 돕는 원시스프. 멋지다. 발생의 시초에 인공지능의 기술을 비유하다니. 








젠장할. 통찰의 시대를 읽고 싶어 눈독들이고 있는 동안 신간이 또 나왔네 그려. 나의 존경하는 올리버색스님 왈 " 신경과학이 믿기 어려운 발전을 이룬 지난 반세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 호흡으로 탁월하게 서술한다."  










얼마전 반니에서 만물의 공식을 아주아주 재미있게 읽었는데, 저자도 한 번 본 저자에게 마음이 끌리듯이, 작은 출판사에서 펴낸 책 중 하나라도 마음에 들면 다른 책들도 신뢰하게 된다. 원자들에게도 시적 언어가 붙는다. 이 목차를 보라. 1장 생명의 불꽃, 산소 

2장 원소들의 조상, 수소
3장 생존의 마스터 키, 철
4장 생물과 무생물 사이를 이어주는 회전문, 탄소
5장 흙의 눈물, 나트륨
6장 양면성을 가진 생명의 원소, 질소 
7장 오래된 유산, 칼슘
8장 지구 성장의 한계를 가름하는, 인

9장 아름다운 순환



탐욕에는 관심이 없지만, 디스토피아에는 관심이 있는데, 이런 제목이 과학 카테고리에 있을 때엔 뭔가 새로운 내용이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목차를 보니 그리 새로운 내용은 아닌 인류학의 일부 중 동물학대와 육식동물의 취급에 관련된 내용이 주가 되는 것 같다. 제레미 러프킨의 육식의 종말 류의 책일까? 









잠 하면 사이비 종교같은 꿈해몽 책이 생각나기도 하고 또다른 종류의 꿈해몽가 프로이트가 생각나기도 한다. 우리는 하루의 주어진 인생의 1/3은 잠으로 시간을 보낸다. 이렇게 중요한 시간, 잠에 대한 지식은 턱없이 부족하다. 

"잠에 얽힌 역사, 문화, 심리, 과학, 진화생물학, 인지과학, 신경학, 정신의학, 수면의학을 파헤쳐 알게 된 신비로운 잠의 면모와 기이하고 흥미로운 사례를 다채롭게 엮어서 들려준다."는 책 흥미롭다. 다음주부터 읽어야지. 








음하하하하하하 읽고 있는 중. 

이 책 너무나 만족스럽다. 일단 과학책인데도 쉽고, 심지어 재미있기까지 하다. 전작 <온도계의 철학>을 반정도 읽다가 1년전부터 더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는 내게 이 책은 진정 선물이다. 웬지 막 힐링이 되는 듯하다. 일단 읽어보시길 1/3 정도 읽었음









구달 온니는 웬 책을 그리 많이 내는지.. 얼마전에는 위키피디어랑 이런 저런 내용들을 베껴서 냈다는 추문에 휩싸여 공개사과문까지 발표했던데. 국내에서는 2011년에 출간된 사진집이라고 한다. 











10월것도 못훑어봤지만 일단 여기까지...


















댓글(5)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qualia 2014-12-08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guiness 님, 책/작가 정보가 정말 감칠맛 나고 쏠쏠하네요.^^

그런데, 제인 구달(Jane Goodall) ‘언냐’ 추문 사실이에요?
아니 저렇게 예쁘신 언냐께서 베끼기라뇨 @.@
이거 넘 실망이네요ㅠㅠ
아니었음 좋겠는데...

CREBBP 2014-12-08 15:32   좋아요 0 | URL
저도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인터넷으로 본 내용이라... 찾아 확인해보고 다시 올께요

CREBBP 2014-12-08 15:48   좋아요 0 | URL
경향신문 원문보기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www&artid=201303201229521&code=970100

책이름은 <희망의 씨앗 : 식물의 세계로부터 얻는 지혜와 경이>인데 출판되기 전에 들통이 난 모양이고,
통으로 베낀 건 아니고 군데군데 몇문장들이 그런가봐요. 우리나라에선 자주 있는 일인 것 같긴 하지만.. 미국이고 존경과 찬사를 한몸에 받고 있는 분이기에 더욱 냉정한 잣대로 평가되는 모양입니다. 제인 구달 표절 이라고 구글에 치면 수도 없이 많이 나와요.

qualia 2014-12-08 16:55   좋아요 0 | URL
아이구, 남부러울 것 없는 구달 언냐가
우째 그런 일을 !!! ㅠㅠㅠㅠㅠㅠ
넘 안타깝네요.

추측이지만
미국 유명인사들 책 집필 형태로 볼 때
대필 작가가 그런 ‘짜깁기 실수’를 한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도 좀 들고요.

암튼 자세한 자초지종, 그 내역은 함 파악해봐야겠어요.
guiness 님 덕분에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고
다시 한번 자기관리 돌아보는 계기도 됐네요.
따끔한/따끈한 소식 정말 감사드려요.^^

CREBBP 2014-12-08 17:34   좋아요 0 | URL
희망의 씨앗, 그 책이 이번에 신간으로 나왔더군요. 더 최근 책인데 위 포스트에서 뺐는데 그게 표절인지는 포스트 작성동안은 몰랐기 때문에 표절 때문에 뺀 건 아닌데, 알고보니 그거네요. 구달언니의 전공이랑 약간 다른 내용이라 그냥 크게 좋은 책일 거라는 생각이 안들었고 제목이 좀 맘에 안들어서 뺐..
 
몰락하는 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8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박인원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을 읽다보면 그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빠져 내 자신을 잃고 동화되어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설이 대표적이다. 나도 모르게 거기 등장하는 망나니들과 비슷한 정신연령이 되고, 그들의 생각을 바로 내 생각과 동치시키면서 그들처럼 현실의 굴레 바깥쪽 테두리에서 보다 더 우월한 정신적 세계를 공유한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예를 들어 소설 속에서 바흐를 연주하는 글랜 굴드는 바흐만을 대가의 음악으로 여기는 대목을 읽으며 마치 내가 바흐 매니아였던 것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물론 바흐에 대한 몇가지 흐린 기억이 있긴 하다.


어릴 때 피아노를 조금 배워본 경험이 있는 독자라면, 갑자기 바흐를 맞딱뜨렸을 때의 당혹감을 기억할 것이다. 왼손과 오른손이 교차적으로 멜로디를 주고받는 부분부터가 절망의 시작이다. 우둔한 왼손가락이 오른손이 만들어내던 멜로디를 어떻게 따라할 수 있나. 반대로 리드하던 오른손이 어떻게 왼손이 하던 하찮은 반주에 머무를 수 있나. 리듬이 어떤 일정한 박자의 틀에 갇혀있지 않고 엇박자의 기묘한 조화를 만들어내야 해서 음표를 읽기가 어렵다고 느낀 것도 나만의 경험이 아니었길 바란다. 어쩌면 피아노를 그만둔 건 바흐 때문일지도 모른다.... 는 개뿔 소질도 없고, 연습도 안해서 진도도 안나가고, 감성도 메마르고, 음악에 대한 이해력도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단지 믿을거라곤 손가락이 길어서 피아노 잘 치게 생겼다고 주워들은 말 한마디 뿐.. 유령처럼 생각없이 피아노 가방만 들고 왔다갔다만 하다가, 때가 돼서 그만둔거다. 

 

그래도 남은 게 있어서 추억이 있다. 고등학교 때 어떤 샤프하게 생긴 남자애가 피아노 잘 치는 애들도 많은데 하필 내게 반주를 부탁했다. 평소 으르렁거렸던 것 같은데, 암튼 연습도 해야 하고 하기 싫어 튕기다가 마지못해 해주곤 서로 여기가 틀리니 저기가 틀리니 티격 태격 하던 날들이 갑자기 생각나니 말이다. 어쨌거나 바흐는 어렵다는 인식 말고는 없었는데, 또 젊은 청춘의 어느 날 어떤 놈한테 바흐의 아마도 어떤 플룻 협주곡이었던 것 같은데 테입을 선물받았다. 바흐를 선물한 놈은 바흐의 변주곡처럼 단순해 보이면서도 어렵고 복잡하면서도 어떤 절제의 미덕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바흐는 뭔가 고상하고 있어보이고 절제된 음악이면서 좋아한다고 하면 모짜르트나 베토벤을 좋아하는 사람보다 어쩐지 좀 수준높은 인상을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내 의식 속에서 쌋텄을 터이다. 그 후 또다른 작은 기억 하나가 역시 그 싹에 물을 주었을 거다. 영국에서 아기를 키우며 살 때다. 품을 빠져나가 쏜살같이 무릎으로 기어 달리는 아기가 정원의 민들레 꽃을 뜯어먹는 걸 쫓아다닐 때, 이웃집에서 매일 오전 흘러나왔던 피아노 소리가 바흐였다. 그 분은 남편이 못살게 굴어서 어쩔 수 없이 영국의 어떤 유명한 피아니스트에게 피아노를 사사받던 사람이었다.  바흐를 들으면 바흐의 다른 음악도 그게 바흐라는 걸 안다. 아는 척 했더니 나도 바흐를 좋아해요 라고 했다. 나도 바흐를 좋아해요. 그 말을 적고 나니 그녀가 했던 그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 연약하고 예술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전형적인 피아니스트와 달리 늘 따뜻하고 푸근한 이웃집 아줌마였었는데 나도 바흐를 좋아해요. 그 말 속에서 줄곳 아닌척 했던 예술가의 내면을 세계를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아기를 다루는 데 힘겨워하던 내게 단비같았다. 정원의 아기를 번쩍 들어 매일 집으로 데려가 놀아주고 안아주고 기저귀도 갈아주고, 그러다가 커피도 주고 점심 밥도 주었으며, 설겆이도 못하게 했다. 


글렌은 사실상 <골트베르크 변주곡>과 <푸가의 기법>만 연주했다. 브람스라든가 모차르트, 쉔베르크나 베베른처럼 다른 작품을 연주할 때도 말이다. 


글랜은 쇼팽 따위는 절대 연주하지 않았다. 그런 초청은 거액의 사례금을 준다 해도 거절했다. 41


이 소설 속의 망나니같은 천재들은 모짜르트와 베토벤은 경멸하고 바흐만을 좋아했다. 나도 모짜르트와 베토벤을 경멸하는 건 아니고 좋아하지만, 소설 속 글랜굴드, 화자, 베르트하이므 이 세 사람의 대화와 생각에 이상한 동질감을 느끼면서 아니 없는 동질감을 만들어내면서 그들과 한통속이 되어 마치 그들 만큼이나 바흐를 잘 알고 있는 것같은 착각에 빠져본다.

 

비단 바흐 뿐만 아니다. 그들은 시골을 싫어하는데, 나 역시 시골을 그닥 엄청 좋아했던 적이 없었지만 그래도 시골의 한적한 풍경을 증오하지는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들과 점점 한통속이 되어간다. 게다가 번역자님의 독특한 'OO하지'체는 입에 착착 감긴다.  


원한다면 완전히 익명으로 살아갈 수도 있는 도시에 비해 시골에서는 지금도 앞으로도 이 세상의 풀리지 않는 문제들을 훨씬 더 매몰찬 방식으로 접하게 되지. 시골에서는 끔찍하고 불쾌한 일들이 정면으로 들이닥치고 . 중략. 우리를 틀림없이 파멸시킬거야.138


나는 사실 자연이 싫어. 라고 그는 늘 말했다. 나는 글렌의 그 말을 내 것으로 만들어 지금까지도 되뇌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되뇌겠거니 생각했다. 글렌은 자연은 내게 적대적이야. 라고 말했다.81


김중혁을 좋아하는 딱 한 가지 이유를 대라면 아마도 그의 소설집 1F1B에서 했던 말, '나는 이 속된 도시가 좋다. 앞으로도 이 도시에서 살아갈 것이다' 라는 글이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내게로 스며와 고인 내 마음 속 우물을 들여다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도시와 시골에 대해 막연히 갖고 있는 생각을 대변하고 평범하고 보잘것 없는 것의 추구에 대한 내 목마른 목을 축여주었다. 


그런데 베른하르트는 전작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틈틈히 기회가 닿을 때마다 시골증오론과 함께 자신의 조국 오스트리아 증오론 펼친다. 조국 증오론 역시 나른한 바이러스처럼 나를 덮는다. 나치즘의 유령이 청산되지 않은 조국 오스트리아에서 권력의 본질을 바라보는 것과 21세기 대한민국, 300명의 아이들을 한 명도 못구하고 깊은 바닷속에 수장시킨 대한민국에서 살아남는 것 중 무엇이 더 증오스러운가. 내가 발딛고 서 있는 그 땅을 증오하고 나의 역사와 나의 조국을 경멸하는 것. 그것들은 사실 나 자신을 향해 침을 뱉는 것과 같은 그런 행위들이기에 자학의 비감과 통쾌함이 동시에 살아난다. 비난의 화살은 결국엔 나를 향해 돌아오지 않는가. 바흐를 선물한 복잡한 남자는 바흐를 지우고 이제 목가적 삶을 원한다. 속된 나는 이미 바흐에 대한 환상과 함께 덜렁 혼자 남겨진 느낌이다. 나는 훗날 속된 도시에서 혼자 남겨져 고독한 실존의 무게를 노후와 함께 짊어지게 될까, 증오하는 시골을 따라 저벅저벅 바흐를 선물했던 남자를 따라 그의 그림자 밑으로 들어가게 될까. 어쨌든 바흐를 잊은 시대에 바흐의 기억을 떠올리는 건 스스로 피아노가 되어 죽은 글랜굴드만큼이나 비극적이다. 

 

아포리즘에 대한 증오 역시 내게 반갑게 걸어 왔다. 짧은 글이 어떤 철학적 명제를 주는 것 같지만, 문자중독과 난독을 동시에 가진 나는 말로 설명된 것, 친절한 것, 공감할 수 있지만 풍부한 예시와 내용이 있는 것을 좋아한다. 때때로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겠는 문장을 가지고 씨름을 하거나 포기하고 넘어가는 일은 자학에 가깝다. 그러나 가슴에 꽂히는 것 같은 날카로운 한 마디 말은 위대한 철학을 완성한 사람의 전체를 축약시켰을 때에나 의미있을 것이다. 광고 카피같은 한 문장들이 삶을 지탱할 철학이 될 수는 없다. 언제나처럼 자신이 하는 일을 멸시하는 베르트하이머는 스스로 문장을 만들고 철학을 하면서 아포리즘을 구사하는 사람이라고 자조한다.


나는 아포리즘 따위나 쓴다구... 그건 정신적 호흡이 짧은 저급 예술이야. 특히 프랑스에 살았던 어떤 이들이 생계를 위해 만들어낸 예술, 말하자면 야근하는 간호사들이나 읽을 법한 가짜 철학, 달력 명언에 지나지 않는 시시한 철학이라 부를 수도 있겠지. 나중에 의료기관의 대기실마다 붙어있는 명언으로만 남아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읽을 수 있겠지. 부정적인 평가를 받든 긍정적인 평가를 받든 아포리스트로 불리는 작자는 다 역겨워.


그렇게 말하면서도 베르트하이머는 자신은 아포리즘을 못 끊겠다고, 그동안 써놓은 것만도 수백만 개에 달하는데, 괴테나 리히텐베르크같은 사람들이 쓴 것처럼 자신이 쓴 것들도 병실이나 사제관의 벽에 도배되어 있는 꼴은 못보겠다며 글랜의 천재성 때문에 피아노를 버린 자신은 결국은 철학자가 될 운명은 아닌지라 철학자 지망생이 되고 말았노라고 자학하고 한탄했다. 


이 남자들, 글랜굴드 때문에 피아노를 포기했다고 하는 베르트하이머와 '나'는 스스로를 철저히 증오하고, 자신을 밟아 깔아 뭉갬으로써 삶의 동력을 얻는 사람들이다. 피아노를 포기한 두 사람 중 베르트하이머는 정신과학으로, '나'는 철학으로 업을 바꾸고, 값비싼 최고급 피아노를 피아노 연습으로 점철된 긴 시간동안의 연습 기간만큼 아무렇게나 버리고 나서 그저 글랜을 숭배하는 일로, 글랜의 천재성에 기인한 기이함마저도 감탄하고, 글랜굴드의 죽음마저 미화시킨다. 그는 피아노 앞에서 이미 20대에 완성된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완성하다가, 스스로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되었다. (소설 속에서, 실제로는 아님) 


  자기가 살아야 하는 건 순전히 가족의 잘못이라고 끊임없이 책망했으며 가족이 자신을 이처럼 끔찍한 실존이라는 기계 속으로 던져 넣고 완전히 망가진 모습으로 다시 기계에서 나오기를 바란다는 거였다. 저항은 소용없어. 라고 그는 내게 말했다. 어머니가 아이를 실존 기계 속으로 던져넣으면 아버지가 아이를 부지런히 토막내는 그 기계를 평생 가동시켜 온 것이라 했다.(p45)

소원이라는 건 우리가 온 힘을 다해 집중 할 때에는 이루어질 수 있는 건데 말이야, 난 그럴 수 있는 기회조차 못 받았다고, 라고 그는 말했다. 자기는 어릴 적부터 자살을 하고 싶었지만 거기에 온 힘을 집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거다. 자기는 애당초 모든 것이 모든 이들이 혐오스기만 한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48


서사가 없는 소설, 소설이면서 '산문의 언덕 너머로 조금이라도 이야기가 끼어들 기미가 보이면 곧바로 쏘아 죽인다'며 스스로를 이야기 파괴자로 불렀던 토마스 베른하르트.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에 이어 그의 작품을 접하니 특유의 과장된 표현과 반복적 서술이  친근해져서 곳곳에서 웃음이 나왔다. 


이야기 파괴자의 소설에서 생각이 아닌 실제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찾으려면 숨바꼭질 놀이를 해야한다. 소설의 실제 얘기는 화자인 내가 여관에 들어가면서 시작해서, 자고 나와 자살한 친구 베르트하이머가 살던 트라히의 사냥 별장에서 주인공 별장 관리인을 만나 그가 행했던 마지막 기이하고 광기어린 행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끝난다. 생각이 아닌 걸 찾아내려면 문장 속에서 숨은 그림 찾기 놀이를 해야 한다. 책을 시작해서 끝내는 동안 내내 '나'는 생각한다. 여관을 들어가면서 조촐했던 장례식과 결혼해서 자신을 떠난 여동생의 대한 비열한 방식의 복수로서 스위스의 치처스까지 가서 그 집 부근에서 목을 매 자살한 베르트하이머를 생각하고,  여관의 냄새나는 낡은 방안에 앉아 네 번이나 편지를 써서 그를 불렀지만 끝까지 그를 외면했던 스스로를 생각하며 변명하고, 더러운 주방 유리문을 바라보면서 글랜굴드의 천재성에 대해 생각하고, 먼지쌓인 객실 안에서 글렌굴드와의 학창 시절을 생각하고, 여관주인과 베르트하이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기이한 방식으로 여동생을 구속하며 사랑했던 베르트하이머를 떠올리고 그렇게 그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물이 흐르듯, 파도가 치듯 하나의 주제에서 자연스럽게 다른 주제로 이어졌다가 또 그 파도를 타고 다시 되돌아와서 앞에서 했던 이야기들을 반복한다. 


 우리는 늘 아는 것이 하나도 없고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출발하잖아, 라던 그의 말이 생각났다. 무엇인가에 접근하려는 순간 우리는 각 분야마다 주어진 어마어마한 자료에 빠져 질식하고 말지, 라던 그의 말이 생각났다. 그걸 알면서도 우리는 정신적 문제에 거듭 다가가고 불가능한 일, 즉 정신적 산물을 만들려고 시도하지, 이 얼마나 정신나간 짓이야.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태어날때부터 오해 속에서 헤매고 살아 있는 동안에도 그런 오해해서 못 벗어나잖아, 발버둥을 쳐도 소용없어, 하지만 이런 건 누구나 하는 관찰이지, 그의 말을 생각했다. 누구나 쉴 새 없이 말을 하면서 오해를 사잖아, 최소한 이런 점에서만큼은 모두가 서로를 이해한다고 할 수 있지, 나는 그의 말이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를 오해의 세상에 낳은 것도 오해이며 세상이 오해로 짜여 있어야만 우리는 오해의 세상을 견딜 수 있고 다시 세상을 떠나는 것도 큰 오해 때문이지. 죽음보다 더 큰 오해는 없으니까 70


조국을 버리고 마드리드에서 20년간 살고 있던 화자는 빈에 방문했다가 학창시절 호로비츠 밑에서 함께 수학했고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글랜 굴드와 친구였던 또다른 친구 베르트하이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스위스의 쿠어의 장례식을 방문한다. 그의 생각은 그들이 처음 음악학교인 모짜르테움에서 만났을 때, 그들 자신도 최고의 연주자이던 그 때 천재인 글렌굴드의 골트베르그 변주곡을 한 번 듣고는 결코 그를 이길 수 없다는 좌절감을 이기지 못하고 둘 다 음악을 포기하고 비싼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던져버리고는 다른 삶을 살아갔던 두 사람, 즉 자신과 베르트하이머의 삶에 대한 성찰이자 생전에 그를 외면했던 죄책감을 상쇄시키려는 시도다.  목숨과도 같았던 값비싼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어떤 교사의 딸에게 줘버리고는 철학자가 되어 마드리드에 정착해서 글렘굴드론을 집필하던 그는 그가 자신을 찾아와달라던 편지를 네번이나 무시하다가 결국 갈 수 없다는 거절의 편지를 보낸 것이 그와의 마지막 교신이었다. 


한 때는 피아노에 모든 것을 걸었던 두 청년. 최고의 피아노 연주자가 되기 위하여 그 칙칙한 시간들을 견뎌내고 이제 찰츠부르크의 어디에서도 알아주는 음악가가 되었을 때 맞닥뜨린 글랜 굴드의 <골트베르크 변주곡>의 한 소절. 그리고 결코 그를 이길 수 없다는 자괴감이 어떻게 두 사람의 인생을 바꾸었는지에, 오로지 음악적 완성에 대한 갈망이 어떻게 빠르게 절망으로 바뀔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소설은 집중한다. 그들이 음악을 포기하는 데 일조를 했을 수많은 다른 자잘한 이유들에 대해서는 언급도 없다. 화자의 족적은 하루 동안 겨우 몇 밀로미터 반경 내로 제한되고, 그 짧은 동안의 일들 속에 베르트하이머와 얽힌 기억과 자신의 생각이 뒤섞여 있기 때문에, '내'가 지금 현재 어디쯤에서 무얼 하며 이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게임을 하듯 잘 따져보아야 알 수 있다. 


우리는 이것저것 다 해보다가 중단 하기를 반복하고 수십년의 세월을 순식간에 쓰레기 더미에 내다 버린다 17

  잘츠부르크에서 호로비츠 수업을 들을 때처럼 글랜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몇년도 아니고 10년을 말이다. 중략.  글랜은 베르트하이머를 친애하는 몰락자라는 말로 맞이했다. 19


따지고 보면 나는 피아노 대가가 되고 싶지도 않았고 모짜르테움이나 그곳과 관련된 것은, 세상이 정말 지루해서 죽을 지경이었고 또 일찍부터 삶에 넌더리가 나 있던 나 자신을 구제하기위한 핑계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58

몰락의 시작은 글랜굴드였지만, '나'는 어찌되었건 세상을 향한 증오를 동력으로 '글랜굴드론'이라는 책을 몇년 째 집필하면서 철학가로서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정신과학으로 전공을 바꾼 베르트하이머는 글랜굴드와의 조우를 계기로 마치 의도한 것같은 완벽한 몰락의 길을 걷는다. 현실이 비루하면 견뎌야 하고, 견딤 속에서 소망을 버리면 마치 편안한 안식을 찾는 것 같은 착각을 할 수 잇는 것처럼, 하루하루 몰락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는 삶 또한 그렇게 끔찍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멋져보이기까지 한다. 어쩌면 태초에 불을 다루기 시작하면서 인간이란 그런 자기 파멸적인 욕망을 함께 부여받은 건 아닌가.


인생의 비참함과 막다른 상태가 묘사되고 무의미함이나 쓸모없음이 묘사되는, 모든게 파멸로 치닫고 죽음으로 막을 내리는 책들, 그래서 베르트하이머는 도스토예프스키와 도스토예프스키의 계승자들을 가장 사랑했고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러시아 문학은 무조건 사랑했으며, 기분을 저조하게 만드는 프랑스 철학자들도 사랑했다. 그중에서도 의학 서적을 가장 즐기고 탐독한 베르트하이머는 종합병원이나나 병원 양로원이나 영안실을 자주 찾아갔다. 종합병원이나이나 병원 양노원이나 영안실을 무서워 했으면서도 그곳을 부지런히 드나 들었다.6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글쓰기를 말하다 - 폴오스터와의 대화
폴 오스터 지음, 제임스 M. 허치슨 엮음, 심혜경 옮김 / 인간사랑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강렬한 포스의 폴 오스터의 사진이 검은색 바탕의 표지를 거의 다 차지하고 있다. 눈빛이 조금은 부담스럽다. 폴 오스터는 현존하는 영미 작가중 우라나라에서도 전집이 세트로 나와 있을 정도로 가장 사랑받는 작가 중 하나이다. 그의 초기 작품이 추리소설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어 장르소설로 이해되기도 하는데 작가 자신은 이러한 평가를 자신의 소설에 대한 몰이해로 본다. 추리소설로 알고 읽는다면 실망할 것이라는 얘기도 덧붙인다.

폴 오스터가 각종 매체와 인터뷰한 내용을 모아 책으로 엮은 것이다. 각 글마다 각기 다른 인터뷰어가 오스터와 대화했고, 인터뷰어들의 직업도 평론가와 학자 기자 등 다양하다.  인터뷰 주제 기획 매체의 관심사와 책이 출간된 시기를 기점으로 제각각이다. 한 작품에 대한 이야기만을 한 것도 있고 그의 전반적인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내용도 있고, 영화 제작 관련한 인터뷰도 있다.   전체적으로 일관된 내용이 있다면 그것은 오스터의 글쓰기 방법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작품에 대해 얘기를 하거나 혹은 다른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더라도 결국은 소설가의 영원한 테마는 왜 쓰는가일 것이고 독자의 관심사는 어떻게 이야기가 잉태되는가 일 것이다.

오스터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위대한 소설가는 타고 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오스터는 순수문학을 하는 작가이고 스토리텔링을 소설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생각한다. 에밀 졸라의 경우 소설의 모든 구조와 스토리를 쓰기 전에 모두 결정하고 밑그림을 그린 후에야 글을 시작하는데 비해 오스터식의 글쓰기는 제목과 첫문장에 따라 영감이 이끄는 대로 글쓰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일찍이 미켈란젤로가 자신은 석상을 조각하는 것이 아니라, 석상이 속에서 꺼내달라는 아우성을 들으며 끌과 망치로 그들을  끄집어내는 것이라고 했는데, 오스터의 경우, 그의 머리 속에서 이야기들이 꺼집어 내어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듯하다. 미켈란젤로가 그 숱한 돌덩이 중 하나의 돌을 발견하듯때로 10년을 묵어서 혹은 그 이상의 숙성 기간을 통해 오랫동안 머리속에서 떠돌다가 어느 순간, 어떤 사건이 계기가 되어 소설로 나올 준비가 되어 있는 이야기들이 머리 속에서 엄선된 단어와 거듭 수정되고 또 수정된 문장을 통해 소설이 되는 것이다. 거의 모든 인터뷰에서 자신의 이야기의 탄생 과정을 한결같이 일관되게 털어놓고 있다. 그리하여 하나의 문장은 다음 문장을 부르고, 그 다음 문장을 부르고, 뭉처진 실타래에서 실이 풀려 나오듯 그렇게 머리속의 이야기가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것이다. 만일 모든 것을 계산해서 짜 맞추고 결말까지 모두 정해진 다음에 그 틀 위에 문장만을 채워나간다면 골방에 틀어박혀 모험 없는 글쓰기를 하는 자신이 얼마나 따분할 것이냐는 거다. 

일상 속 아주 작은 사건들이 계기가 되어 소설로 탄생한다. 탐정회사로  잘못 알고 걸려온 전화 두 통이 장편소설의 단서가 되고, 어릴 때 이모부가 남기고 간 산더미같은 책 더미 역시 소설의 재료가 된다. 폴 오스터는 같은 것을 추구하지 않는 것.  매번 새로운 형식을 탐구하는 것이 소설가의 직무라고 생각한다. 한번 쓴 소재 한번 시도했던 형식과 내용들을 버리고 새로운 것들을 창조하기 위해 고통스런 날들을 골방에 틀어박혀 홀로 글자들과 싸운다.

오스터가 원고를 쓰는 방식은 그가 아무리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라 하더라도,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에는 믿어지지 않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아직도 손글씨로 원고를 쓰고 최종본을 수동 타자기로 타이핑한다는 것이다. 펜으로 모눈 종이에 글씨를 쓰고 다시 읽고 고치고 몇겹씩 겹치다보면 읽을 수도 없는 상태가 된다. 그러면 그것을 다시 새 종이에 베껴쓰고 수정을 반복한다. 그렇게 서너번 새종이에 쓰고 나서 최종 원고본을 타이핑 하고 나면 그 타이핑한 원고를 다시 또 수정하고 또 수정해서 너덜거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타이핑 원고 단계 역시 두세개 정도 지나야 최종 출판사에 보낼 수 있는 원고가 완성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루에 고작 두 단락 정도를 쓴다고 한다. 간혹 책을 읽다 보면 자랑스레 몇달만에 집필을 끝냈다고 후기 같은 곳에 적는 저자들이 있는데 하나의 출판물이 불멸의 대작이기를 처음부터 포기하는, 예술가로서 부끄러운 고백인 줄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한장짜리 블로그 리뷰 쓰는데도 몇시간 걸리는데 책을 소설을 장난으로 쓰나. 

그는 컴퓨터가 없다. 인터넷도 하지 않고 이메일 계정도 없다. 이게 대체 언제적 인터뷰인가 의심스러워서 몇번이고 확인했지만 2005년과 2008년도 등 비교적 멀지 않은 과거에 실린 인터뷰 몇 편에 실린 동일한 내용이다.  불가능해 보이는, 전적인 아날로그 라이프이다. 인터넷도 없이 혼자 방에 틀어박혀서 하루종일 손글씨로 글씨로 소설을 한줄 한줄 써 내려가는 길. 그것이 그러는 소설가로서의 책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터넷이 없는 세상, 세상과 단절된 그 좁은 세계에서 그는 넓고 넓은 자신만의 소우주를 살아간다. 그래도 고독은 고독이고 외로움은 혼자만이 감당해야 할 몫일 것이다. 소설이, 자신의 소설의 주인공이 물리적으로 밖으로 살아 나와 적막 속에서 그에게 말을 걸고 몸을 만지지는 않을 것 아닌가.  그것이 얼마나 힘겨운 작업인지 알기 때문인지 그는 글쓰기를 꿈꾸는 젊은이에게 글쓰기를 직업으로 추천하지는 않는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겨운 노동이나 그 가치를 인정받아 받는다 하더라도 생활고를 계속 벗어나기 힘들며 충분히 먹고살 정도의 돈을 벌지 못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이 그에게도 인생의 역경과 반전을 경험했다. 물론 정신적인 역경도 있을 수 있겠지만 현대 사회에서 가장 큰 어려움이란 아마도 경제적인 궁핍일 것이다. 시집 몇 권을 출판하고 출판사를 구하지 못해 지인의 출판사에서 어렵게 에세이 한 권을 써내 그것으로 인정받은 후에도 그는 경제적으로 곤궁한 생활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글쓰기를 포기하고 생업에 매달려야 할 위기에서 그를 구해준 건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아버지는 그에게 얼마간의 유산을 남겼고 그는 생업을 위해 작가의 길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에게는 아버지의 슬픈 죽음과 끝갈때 까지 치닫던 자신의 경제적 궁핍이라는 두 우연의 만남이 그로 하여금 글쓰기를 계속할 수 있게 해준 운명같은 것이였다.  아버지가 남기고 간 돈은 가족과 자신을 수렁에서 건져 먹고 자고 입혀 주었으며 그에게 소설 쓸 시간을 벌어 주었다. 아버지가 그 때 죽지 않았다면, 오스틴이 거칠고 매정한 생업의 길 속에서 번민하는 동안, 길가의 돌에서 조각상이 되어 나오기를 꿈꾸는 미켈란젤로의 돌처럼 그의 머리속 이야기들은 끝내 빛을 보지 못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훌륭한 소설가 들 중에는 시인이 많다. 그 역시 시로 글쓰기를 시작했다. 시인들의 맑은 정신과  단어와 문장으로 한줄 한줄 시를 만들어가는 그 치밀함이 소설가의 위대한 상상력과 결합할 때 독자들은 매력적인 스토리와 유려한 문장의 조화로운 소설을 만나게 된다. 시를 쓴 후에는 산문을 썼다. 초기에는 희극도 썼고, 나중에는 영화 대본도 썼으며 직접 영화를 감독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의 본업은 소설이고, 자신은 자신이 해야 할 일, 아직도 머리 속에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작품들을 쓰기 위해 소설가로 돌아가고 골방으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원래는 폴 오스터의 작품을 몇개라도 읽고 이 책을 읽으려고 했는데 조금씩 읽다보니 인터뷰 형식이라 표지의 부담스러움과는 달리 술술 잘 읽혀서 그냥 다 읽어버렸다. 이 가을 폴 오스터에 꽂혔다면 작품을 선택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고 이미 그의 작품을 하나라도 읽었다면 그의 작품 세계 특히 작품 하나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아주 상세한 작가의 설명이 소설 못지 않은 재미를 줄 책이다. 표지가 좀 산뜻하게 바뀌었으면 하는 작은 바램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바바라 오코너 지음, 신선해 옮김 / 놀(다산북스)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의 첫장을 넘겼을 때 생각난 것은, 2년쯤 전에 SBS에 방송한 한 다큐프로그램이었다. 2009년 사상 유례없는 대침체를 겪은 미국인들이 집에서 쫓겨나고, 살 곳이 없어 차 속에서 돌아다니면서 살아가는 가족의 모습을 방영했다. 바바로 오코너의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에서 조지나의 가족에게 일어난 일도 같다.  생계를 책임지던 아버지의 가출로 월세를 못내 쫓겨나고 갈 곳이 없어진 조지나의 가족은 작은 차에 필수품들을 싣고 다니면서 여기저기 패스트푸드점의 화장실에서 씻고, 차에서 먹고, 차에서 잔다. 한 군데에 계속 주차를 해두면 쫓겨날까봐 이곳 저곳을 돌아다녀야 한다. 목욕도 못하고 옷도 제대로 빨아입지 못하고 머리는 떡이 되어 냄새를 풍기며 학교에 가야 하는 여자 아이, 학교에서 내준 과제 제출물에는 햄버거 소스가 묻어있고, 책도 없는 차에서 쪼그려서 작성한 과제물은 엉망이다. 친한 친구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무슨 일인지를 캐묻지만 사정을 알게 되자 멀리하고 다른 아이랑 어울린다. 아이들끼리하는 TV 이야기에는 끼어들 수가 없다. 아이는 집이 필요하다. 갑작스레 두 아이의 생계와 집 보증금을 마련해야 하는 열심히 일을 하지만 언제 집을 구할 수 있을 지 알 수 없다. 


언제나 사람이 살 수 있도록 지어진 집에서 살 수 있을까. 조지나는 궁리한다. 갑자기 위기에 처했을 때 13살쯤 된 꼬마 아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울거나 화내거나 우울해하거나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삐뚤어지거나 어쨌든 전과 같을 수는 없다. 급작스레 변환 환경에는 아이든 어른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적응해야 한다. 조지나는 이 모든 행위를 조금씩 하지만 과감하게 해결 방법을 떠올린다.  낮에 본 광고 전단지 '저를 보셨나요? 제 이름은 미스티에요. 사례금 500불'. 아이는 생각한다. 사례금 500불, 사례금 500불만 있으면 보증금을 치르고 목욕을 하고 깨끗한 옷을 입고 침대에서 잘 수 있는 것이다. 개를 훔치자. 그리고 사례금 500불이 붙은 전단지가 마을 곳곳에 걸리기를 기다리자. 그러면 500불을 받고 개를 넘겨주는 거다.


12월 31일쯤 개봉하는 영화에는 김혜자, 최민수, 이천희, 강혜정이 나온다고 한다. 러닝맨에서도 이들이 출연한다. 강혜정은 아이들 엄마 역으로 잘 어울리는 배역이다.   무키아저씨는 아이들과 강아지를 숨겨놓기 위해 들락거리던 폐가에서 만난 홈리스 같은 인물인데 홈리스라는 초월한 듯 이미지와 아이들의 비밀을 모두 알고도 스스로 현명하게 행동하도록 조언을 해주는 바람같은 인물로 최민수는 최고의 배역이다. 이천수와 가 맡을 만한 역이 책에는 없다. 김혜자는 개주인일 듯하지만, 책에서와 달리 부자집 마나님으로 나우는 것 같다. 만일 마나님이 부자라면 개의 행보가 달라질 듯한데 그러면 결말도 달라질 듯하다. 성장 소설이라 한번에 읽히고, 점점 아이의 감정에 이입되다가 끝에 가서는 그만 울어버릴 것 같은 잔잔한 감동으로 맺는다. 누구라도 갑작스레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 어떤 식으로라도 살기 위해 버텨야 한다. 그 버티는 과정이 삶을 개선하고자 하는 당차고 적극적인 한 아이에게는 정서적으로는 더욱 더 감당하기 힘든 상황으로 이끈다. 이런 류의 드라마가 감동을 이끄는 힘은 백마탄 왕자나 망또 휘날리는 영웅 슈퍼맨이 가져다 주는 억지 반전이 아니라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에 귀기울이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