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
장하석 지음 / 지식채널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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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과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진리'라는 게 정말로 있는 걸까?   영원히 변하지 않고 모든 이치를 다 설명해주는 어떤 과학적 진리라는 것이 있다고 믿고 찾는 것은 보지 않은 신의 존재를 믿는 종교와 어떻게 다를까? 현대과학은 랄릴레오, 코페르니쿠스, 뉴튼 심지어는 아인슈타인마저도 버렸다. 매번 구시대의 진실이 무너지고 새로운 시대의 진실이 혁명처럼 다가와 정상과학의 범주 내에서 발전하고 사그라졌지만 그 때마다 역사속의 우리는 그 당대의 과학을 진실로 믿었다.  기초와 토대라는 말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늘 그 기초와 토대를 튼튼히 해야 즉, 현재 파라다임이 믿고 따르는 정상 과학  내의 기본 지식들을 단단하게 이해하고 있어야만 다음 단계로의 발전이 이루어진다고 굳게 믿고 있지만, 그 기초와 토대라는 말은 집짓기에는 적당할 지 몰라도 과학적 은유에는 적당하지 않은 건 아닐까?



과학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배우는 것은 과학이 만들어져온 과정이 아니라 결과일 뿐이다. 물이 왜 H2O라는 분자식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필요성도 없는 줄 알았고 배우지도 않았다.  교육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왜를 배우지 않는 건 비단 우리나라 뿐만 아니다. 선진 외국에서도 물의 분자식이 H2O라고만 배운다. 그게 영원한 진리이고 그것만 알면 되지 그 전에 물이 무엇이었다는 것은 배우지 않는다.  그러니까 H2O 분자식 하나가 탄생되기까지 최초 화학이라는 분야를 선도했던 플로지스톤이라는 패러다임의 탄생과 그 저변에 깔려 있는 논리가 화학 혁명에 기여한 사실들. 그리고 그것의 초라한  몰락과 그 몰락을 이끈 야심찬 라봐지에의 산소 패러다임의 이론적 약점을 알 필요가 있다고? 그렇다. 라봐지에는 산소의 발견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야심차고 패권주의적 행보에 의해 무너진 그 이전의 화학, 플로지스톤 이론과 그 이론의 대가 프리스틀리가 발견한 산소와 산소를 얻는 방법은 우리가 모른다. 라봐지에는 플로지스톤의 발견에 밥숟가락 하나를 더 얹어 그 이론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이론을 가지고 그대로 남겨놓았어도 인류 과학의 역사에 기여했을 기존의 지식과 패러다임을 쓸어버렸다.  그리고 라봐지에의 이론 역시 수도 없는 헛점을 가지고 있다. 평범한 우리가 다만 모를 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라봐지에의 '산소의 발견과 화학적 역할'은 그러니까 승자에 의해 새로 쓰여진 역사와 다를 바 없다. 세계적인 과학철학자, 장하성은 이 책에서 '다 지나간 과학을 배워서 뭐하냐고 하겠지만 우리가 지금 신봉하는 과학도 다 나중에는 지나갈 과학(221)'이라고 말한다. 프리스틀리는 금속회(녹)를 유리병에 넣고 큰 렌즈로 햇빛을 모아 가열해서 금속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새로운 기체를 발견했고, 그 기체가 뭘 잘 태우는 성질이 있다는 것과, 쥐가 그 속에서 보통 공기보다 3배나 오래 산다는 것과 자기 자신이 호흡해본 결과 가볍고 상쾌한 느낌을 얻었고, 이 순수한 공기가 미래에는 사치품으로 팔릴 수도 있겠다고 예측했는데, 결국 그것이 라봐지에가 자신을 온갖 방법으로 공격하면서 다른 이름인 '산소'를 붙여 발표하여 유럽 화학회의 패권을 잡는 데 공헌한 기체가 되었다. 그렇다 우리가 위대하다고 알고 있는 라봐지에는 남(프리스틀리)의 발견을 가지고 발견자가 추종하는 이론을 뒤집고 이론을 박멸 대상으로 때려잡아 유럽 화학계의 주도권을 잡는 데 성공했다. 라봐지에의 이론은  금속에서 플로지스톤이 빠진다는 주장을 거꾸로 산소가 더해지는 것으로 재해석한 것 뿐이며, 모든 산에 산소가 들어있다는, 황당하고 엉뚱한 주장을 그대로 산소라는 이름에 담아버리는 아이러닉한 실수(자신은 실수인지도 모르고 죽었음)를 영원히 산소라는 이름 그 자체에 남긴 사람이다.  


그 후, 돌튼의 원자 이론과 아보가드로의 이원자 분자 가설, 그 이후 일어난 유기화학과 무기화학의 결별, 그리고 물리화학의 등장에 의한 화학 이론의 여러가지 버전과 같은 과학적 패러다임의 역사를 읽고 나니, 저자 장하석이 주장하는 바가 결국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과학책을 읽고자 했던 이유와 일치하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니까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부분이 태반인 과학책에 목말라 했던 이유를 저자가 알려준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과학자가 아닌 시민들은 과학이 말해주는 결과는 별로 알 필요가 없다. 그것은 전문가들에게 맡기면 된다. 라고. 물이 H2O라는 사실을 몰라도 일반인은 훌륭하게 자기 몫의 정신적 육체적 노동을 하며 일상을 아무 불편없이 살아갈 수 있다. 반면 과학자들이 어떤 연구과정과 어떤 사고 방식으로 어떠한 역사적 굴곡을 거쳐 그 결과, 우리가 교과서에서 정답으로 혹은 궁극적 진리로 배우는 해답들을 이끌어냈는지는 일반인이 알아야 된다고 말한다. 그것을 알아야 역사 속에서 현재의 위치를 가늠해볼 수 있고, 정책을 이끌어 낼 수 있고 생각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과학이 종교일 수 없고, 과학이 종교이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가열차게 기초가 어떻고 토대가 어떻고 하며 애써 외운 지식들의 탄생과 발전과 어떤 소멸 끝에서 이루어낸 것인지에 대한 철학적 사유와 과정을 알지 못하고 결과만 주입된다면 과학은 종교적 맹신과 다를 바가 없다. 과학의 발달 과정은 인류 역사가 겪어왔던 사회 제도적 변화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진리이자 토대라 믿었던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항상 헛점이 드러나고, 헛점들은 마지막 부조리가 스스로를 파멸시킬때까지 끝까지 버티고 버티다가 혁명적인 변화를 겪으며 변혁을 맞게 되는데, 그것은 토마스 쿤의 과학 혁명, 패러다임의 구조와 맥을 같이 한다. 


역사는 늘 승자에 의해 재미없고 유용하지도 않도록 다시 쓰여진다. 과학사에서 진리라고 믿는 것들은 현재의 승자인 현재의 패러다임과 그 속의 정상과학이지만, 과학사를 들여다보면 현재의 승자가 영원한 승자일 턱이 없다. 수천년동안 반복되어온 진리 찾기 게임이 오늘 내가 교육받고 믿는 것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해서, 그러니까 내가 지금 여기 존재한다고 해서  현재 지금 여기에 있는 과학이 진리이며, 진리 찾기 게임은 완전히 끝났다고 믿는 것은 맹신적 종교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반 정도 읽다 말았는데.. 중간에 이 책을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분명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읽은 내용을 이 책에서 설명하는데,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매우 쉽게 잘 설명하는 바람에, 토마스 쿤 자신이 쓴 글보다도 이 책을 통하여 토마스 쿤의 내용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혁명은 낡은 세력이 죽어야 완수된다. 새로운 과학적 진리의 승리는 반대파를 설득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반대파가 다 죽고 나면 새로운 것에 익숙해진 새 세대가 자라면서 이루어진다는 독일의 물리학자 플랭크의 인용(p124)이 생각난다.   우리는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패러다임 속에서 이루어낸 것들이 영원한 진리라고 믿을 수도 또  진리가 아니라고 믿을 수도 없다. 단지 그 사회 전체가 믿는 어떤 '진리'라는 것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렇게 살아남게 되었나를 역사적으로 인식하는 일이 필요한거다. 쿤의 과학혁명 이론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 하는 까닭은 그것이 과학을 불신하고 공격하는 무기로 이용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끝까지 기억해야 될 것은 과학의 이름으로 이용당하는 모든 것들을 나몰라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정도.


책에서 느낀 점 중 또다른  점 하나. 우리가 과학 서적을 읽을 때 주의해야 할 점은 스토리 위주의 짦막한 과학 상식을 경계해야 한다. 라봐지에 시대의 과학사를 통해, 우리가 단지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토막 상식들을 마치 지식인 것처럼 이용하는 것은 왜곡된 역사를 학습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거라는 교훈을 얻는다. 전체적 맥락에서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H2O 따위를 몰라도 된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것이, 우리가 따르는 것을 한 번쯤은 의심해볼 수 있는 생각은 가져볼 필요가 있다. 과학이란 어떤 가설로 시작해서, 꾸준하게 그 가설이 맞다는 가정하에 모든 것을 거기에 맞추어 때려넣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 가설이 조금 조금씩 틀리다가 언제 어느때고 그 자잘한 틈들이 점점 벌어저 아주 큰 구멍이 되면 둑이 무너지듯 그 토대와 가설과 믿음이 모두 무너질 지도 모를 일이다.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믿었던 시대가 지나고 지구가 태양을 도는 시대에 살았지만, 양자역학이니 끈이론이니 멀티 유니버스니 하는 세계로 나아가면 누가 누구를 돈다는 생각 마저도 우스운 이야기가 될 지 모른다.  


간단하게 리뷰를 쓸 수는 없는 책이다.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리고 그 많은 내용이 점점이 머리속에 흩어져 있는데 요약할 수는 없다. 책을 보면, 느끼는 게 있고, 배우는 게 있고, 깨닫는 게 있고 각기 조금씩 다른 정신적 차원의 만족을 주는데, 이 책은 매우 복합적으로 다양한 영역에 뇌를 걸쳐 자극한다.  과학 상식적으로도 배우는 게 많은데, 그 배움이 너무나도 쉬운 언어로 쓰여져 있을 때, 그 책을 쓴 사람이 <온도계의 철학> 같은,  찔러도 찔러도 피한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냉철하고 어려운 과학철학책을 쓴 사람의 책이라면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인간적인 감동까지 밀려온다. 장하성 이 분, 정말 너무 멋있다. 완전 광팬이 되었음. 아이들, 청소년, 어른 할 것 없이 이 책을 추천한다. 더 길게 못쓰는 게 아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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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2015-07-09 15: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결정적 오타가 있기에 알려 드립니다.
끝에서 두번째 줄, 저자 분 대신 그의 사촌 형님 이름을 적어 놓으셨네요. ^^
저도 장하석 교수를 좋아합니다. 그의 친형님도 좋아하고요.

CREBBP 2015-07-09 16:42   좋아요 0 | URL
앗 감사합니다. 처음에 몇번 헷갈리더니 점점 더 헷갈려져서 구분이 안되네요. ㅎ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패러독스 1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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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왜, 누가, 무엇을 위하여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해야 하는 걸까? 이 책은 진짜 우리가 제목을 읽고 바로 상상하듯 읽지 않은 책을 읽은 척 하는 방법을 기술적으로 나열한 걸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책을 펴내는 걸까. 책을 읽는 독자들은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세상의 책을 다 읽지 못한다. 다 읽기는 커녕 세상의 책이 백사장의 모래밭이라면 평생 책을 읽는다고 해도 모래 한줌을 손안에 쥔 것 뿐이다. 좀 읽는다 라고 하는 사람들도 특정 시대에 많이 읽히는 책들 혹은 자신의 레이더망에 포착된 관심 분야 내의 책들을 많이 읽을 뿐이다. 이 책에서 인용한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없는 남자>의 주인공이 계산한 바에 의하면 도서관에 있는 책을 다 읽으려면 1만년은 걸려야 된다.

 

저자는 책의 제목을 통해 우리 사회의 책 숭배 현상에 대해 날을 해학적으로 세운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터득한 '안읽은 책에 대해 말하는 방법'을 이용하여 읽은 지 꽤 한참(2~3달) 되어 무슨 내용인지 많이 잊어버린 현재 이 책에 대한 나의 상태를 분류해 본다면 '안읽은 책'에 해당된다. 그는 비독서의 범주를 전혀 안읽은 책 외에도 책을 대충 훑어본 것, 사람들이 책 얘기를 귀동냥한 경우, 그리고 책의 내용을 잊어버린 경우까지 포함하여 범위를 넓혔다.

 

피에르 바야르의 정의에 의하면, 많이 잊어버려 '읽지 않은'의 범주에 해당하는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목차를 보면 된다. 전체가 3부로 나뉘어 정리되어 있고, 이것들은 앞서 언급한 비독서의 방식들, 담론의 상황들, 대처요령 이렇게 세 가지이다. 

 

책을 전혀 읽지 않는다는 것은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한다는 개념처럼, 책의 세세한 부분을 읽게 되면, 세상의 모든 책,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지식과 세계관에 대한 총체적 시각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시간낭비라는 시각이다.  총체적 시각을 갖기 위하여 책들과 책들 사이의 소통과 연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국소적인 지식의 축적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진정한 교양의 완전성을 설득한다. 이런 저런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하나의 앙상불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각자의 요소를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 속에 놓음으로써,  전체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 것이 진정한 교양인으로서 가야할 길이라는 것이다.

 

비독서의 다른 범주로 망각의 독서에 대해 말한다. 읽었으나 잊어버린 책, 읽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책들이 과연 읽은 책이라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읽기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어쩔 수 없는 망각의 흐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또한 독서의 본질이라는 사실은 내게 동질감을 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것으로부터 책읽기에 대한 생각도 예리한 통찰을 제시한다. 우리가 책을 읽는 동안 잊어버리고, 책을 읽는 것과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상황에 따라 다시 손질된 불명확한 기억들에 대해 대화를 하는 것이라는 그의 주장에 점점 빠져든다. 점진적이고 체계적인 망각에 의해 그 내용은 들어올 때처럼 빠르게 하나씩 층발해 나가는 책이라는 것이 실제로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판단에 영향을 준 그 담론들과 상상력들 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모든 독서는 단지 일시적이고 덧없는 지식을 제공할 뿐, 책과 맺는 관계의 진실성은 책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 독서에서 뽑아낸 조각들, 서로 뒤얽혀 있거나 개인적 환상에 의해 다시 손질된 그 조각들을이 내면을 이루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비독서의 유형에 이어 2부에서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해야 하는 상황들을 적고있다. 그것들은 사교 생활에서, 선생 앞에서, 작가 앞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해야 하는 상황들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책을 별로 읽지 말라는 주장을 하는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황들의 예를 책에서 가져온다. 자 책을 보지 말고 책에 대해 얘기하는 방법을 책을 살펴 보며 얘기합시다 라고 하는 책을 써낸 것이다.

 

사교 생활을 할 때 결코 한 권의 책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가 우리 내부에 구축한 내면 도서관들, 정체성의 일부가 되어 온 생각들과 의사 교환을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므로 자기 얘기를 하면 된다.

 

선생 앞에서의 경우다. 서아프리카에 있는 티브족에게 세익스피어의 햄릿을 이야기해주는 로라 브래넌이라는 인류학자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 설명하는데, 무척 재미있다. 로라 브래넌이 티브족에게 햄릿의 스토리를 이야기해주자, 유령의 존재를 믿지 않는 티브족은 엉뚱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망자들이 걸어다닌다는 관념을 믿지 않은 채, 이구 동성으로 죽은 이를 통해 형성하는 이야기의 전개에 이의를 제기하고, 결국은 그들과 공통된 하나의 담론 대상을 구성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 여기서 피에르 바야르는 로라 브래넌이 티브족에게 이야기로 들려주는 책의 조각들이 부재 상태의 책을 대체한다고 보았다. 또한 티브족이 가진 내면의 책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것으로 본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사례를 통해 피에르 바야르는 우리가 읽었다고 생각하는 책은 사실은 다른 사람들의 책들과 무관한, 우리의 상상에 의해 다시 손질된 텍스트 조각들의 잡다한 축적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역설적이게도, 텍스트를 전혀 모른다는 점이 티브족으로 하여금 해석 가능한 하나로운 풍요로운 의미를 보다 직접적으로 열게 해준다는 것이다.

 

작가 앞에서의 경우다. 작가가 쓴 자신의 책과 출판사에서 손 본 책의 내용이 확연히 달라, 독자와 작가간의 소통 불가인 내용의 소설을 예로 들었다. 이 역시 책에서 가져온 내용이다. 여기서 제기하는 문제는 책을 정확하게 기억함에 있어서 과연 작가가 독자보다 더 나은가 라는 것이다.  몽테뉴의 경우의 예로 들었는데, 그는 일단 글을 쓴 뒤 글로부터 분리되고, 그 후에는 다른 사람들 못지 않게 그것들로부터 멀어지게 된다는 것인데, 나는 작가는 아니지만 이 점에 강력하게 공감한다. 내가 했던 말, 내가 글로 쓴 글이 아주 전혀 다른 사람이 쓴 것처럼 낯설게 보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것이 내가 블로그를 하는 이유이기도 한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오래 전에 글쓰기라는 개념도 없이 그냥 끼적 끼적 했던 글조차도 인터넷의 어딘가에 남아있는 것을 보면, 완전히 다른 사람의 내면 세계를 훔쳐보는 것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작가의 경우, 다른 작품을 구상하고 떠올리려면 그 작품과 완전히 분리되어 새로운 정신세계를 창조해야 하므로 일관성보다는 다면성이 더 필요한 직업이다. 그래서 어쩌면 그의 작품에 푹 빠져서 읽고 또 읽고 그것을 자기화한 독자보다도 자신이 쓴 글의 일부 혹은 전부를 더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꼐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얘기할 때도 책은 우리의 개인적 환상들에 의해 다시 손질된 조각들, 즉 작가들이 쓴 책들과는 다른 어떤 것일 수가 있다.

 

마지막으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첫째, 부끄러워하지 말것, 둘째 자신의 생각을 말할 것, 셋째, 책을 꾸며낼 것, 넷째 자기 얘기를 할 것.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는 것은 맥락의 중요성에 주목하라는 것이다.  책이란 영원히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어떤 유동적인 오브제이며 그 유동성은 책을 중심으로 짜이는 권력 관계 전체와 관련되어 있음을 상기하라고 하는데, 그것은 책 자체가 아니라 그 책에 대해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담론 게임을 염두에 두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평론가와 출판관계자, 속은 베스트셀러라 위상 속에서 그 책의  가치가 매겨지는 현실을 말한다.

 

책을 꾸며내는 것도 상황에 대처하는 하나의 방법인데, 웃기려고 써놓은 같으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탈독서가 우리 일상에 만연해있기 때문에 설사 꾸며낸 부분이 부정확함이 발각된다 하더라도 숱한 기억상의 오류들 가운데 어느 하나에 불과하며 속았다고 생각할 위험성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모든 독서에 수반되는 망각을 간과할 떄, 타자가 안다는 생각을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은 참으로 어이가 없다. 그러나 이어지는 다음 주장, 책들에 대한 담론에서 문제의 그 앎이란 불확실한 앎이며, 타자란 우리의 대화 상대들에게 투영된 우리 자신의 불안한 형상이다 라는 점은 다시금 독서 행위와 독서에 수반된 담론의 실체에 대해 결국 독서라는 것이 자아가 만들어내는 합작품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사실은 비독자나 독자 모두가 그들이 원해서건 그렇지 않건 이미 책들을 꾸며나가는 끊임없는 과정 속에 들어가 있으며, 그러므로 진짜 문제는 거기에서 어떻게 빠져나오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런 과정의 폭과 역동성을 증가시키느냐 하는 것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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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 - 불멸의 인생 멘토 공자, 내 안의 지혜를 깨우다
우간린 지음, 임대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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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예수, 붓다, 그리고 공자 이렇게 우리가 4대 성인이라 배운 성현들은 제자들과 떼로 떠돌아 다닌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성현들의 말씀은 주로 제자들의 붓을 통해 이천년, 이천오백년동안 시간과 공간을 무한 확장하며 민족과 나라에서 대륙으로, 세기에서 다음 세기 또 그 다음 세기로 퍼지며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 그들 중 일부는 직접 스스로가 신의 아들임을 밝히고, 나를 따르라 내가 빛이요 하늘이요 진리다 라는 종교적 메시지를 퍼뜨렸지만 순수하게 내면의 탐구를 위해 도시의 시장통 여기 저기를 돌아다니며 이사람 저사람 길을 막고 서서 산파술이라는 말고문 대화술로 삶의 진실을 깨우치도록 이끈 경우도 있다. 


 




 


공자는 기원전 500여년전의 인물로 역대 성인들 중에서도 가장 오래 전 인물이지만, 짧은 내 지식으로 판단컨대 현대인의 사회 생활에 필요한 처세를 가장 실용적으로 접근한 인물이다. 우리 조선의 600년 통치의 정신적 대들보가 되어 온 유교와 유학이 지난 한세기 동안, 무차별적인 서구 문물의 공세에 묻혀, 아무짝에도 필요없는 형식만을 남긴 채 서서히 붕괴했다면 그 파괴란 우리 조상이 선택적으로 강요했던 유학의 형식 뿐일 것이다. 겉치례와 허례. 그것은 없어져도 좋다. 설령 거기에 전통이라는 이름이 딱지 처럼 붙어 있더라도 말이다. 거기에 무임승차한 숱한 제약과 독버섯처럼 자라고 퍼져 생활과 문화를 장악했던 지배층의 위선이 여성차별과 신분제 강화의 수단으로 자연스레 이어지던 파렴치한 역사의 면모를 우리는 보았다. 다시는, 절대로 유교적 전통이 어떤 부류의 인간에게는 그것 자체로 굴레와 속박일 뿐인 그 회환의 과거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서서히 형식이 죽어간 그것은 이제 다시 부활하고 있다. 어느 종교든 어느 학문이든 인류 문명을 전 과정을 통해 그 숱한 변화와 파괴와 학살과 혁명을 뚫고 살아남은 것이라면  그것은 위대하다.  공자가 존중했던 삶의 형식은 역사의 어느 시점에 예의와 법도라는 낡은 생활 방식으로 한 나라 모든 인간의 생활 방식을 철저하게 구속하고 지배했지만  망국과 재건을 통해 들여온 서구의 합리적 방식의 삶이 정신까지 만족시킨 것은 아니다.  이 선택이 가져온 물질적 삶은 곤궁한 영혼이라는 부산물을 낳으면서 어쩌면 그 때 그 제약적인 생활보다도 더욱 피폐할 정신적 삶에 현대인은 나날이 지쳐가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여기 이 틈새로, 2500년간 이어온  죽지 않은 메시지들이 현대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생활에 맞추어 찍은 듯 부활하고 있다.  왜?. 물질은 종교가 될 수 없지만 가르침과 깨달음은 비록 학문과의 경계가 모호할 수 있을지언정, 그것 자체로 종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르침이 종교가 되는 법칙은 간단하다. 신뢰와 믿음의 댓가로 풍요로운 정신 활동을 가져다 주는 것, 그래서 따르고 믿어 진리가 되는 것. 그게 종교다.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너무나도 번잡한 크고 작은 수많은 선택의 순간순간들을 만난다. 어쩌면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선택이 없는 삶은 이미 삶이 아니라 죽음이다. 아무리 육체가 제한된 공간 제한된 사람들 속에 갇혀 있다고 해도 우리는 무수히 많은 의식적 무의식적 선택 앞에 직면하고 때로 두려워한다. 하물며 요즘 젊은이들은 결정장애의 한 형태인 햄릿증후군이라는 신조어적 질병을 만들어냈다. 성장 동력을 잃고 노쇠해진 탐욕스런 자본주의는 그러한 정신적 피폐 현상마저도 시장으로 보고 호시 탐탐 기회를 노린다. 결정을 대신해주고, 헬리콥터처럼 그들을 떠나지 않는 엄마를 대신할 의존형 인간을 위한 서비스 산업 만들어내기까지하니 말이다. 우리는 이미 물질적 최전방의 삶, 내 정신적 문제까지도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는 사회로 내몰려 있다.

 

만일 이 때 삶의 크고 작은  결정에 기준삼을 수 있는 정신적 대들보가 있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직면한 그 어떤 선택도 죄와 기도와 용서라는 번거로운 전략에 더 이상은 기댈 필요가 없다.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한 결과에 대한 장기적 전망을 꿰뚫을 수 있다면 정신적 삶은 실용적 선택과 만난다. 학문과 종교가 분리되지 않고 믿음이 행동이 되지만 종교적 예식을 버릴 때 우리는 최적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종교와 학문이 일치되는 접점이다. 인문학과 자기계발서가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런 책이다. 삶의 무수한 선택 앞에서 선택의 기준을 심어주는 책, 공자님 말씀에서 허례는 빼고 처세와 실용적 선택을 이끌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는 책이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의를 본질로 삼고 예로써 행하고 겸손함으로써 말하고 신의로써 이룬다. 그래야 군자다. 논어 위령공(278쪽)

 

맞는 말이다.  겸손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겸손하다는 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재주가 많고 덕이 많은데도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 겸손이다. 아무나 겸손해질 수 없다. 평범해 보이는 말 속에 설령 진리가 있다 한들 그것을 어떻게 알아차릴까.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사람은 진보하지만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찾는 사람은 퇴보한다. 이 얼마나 간단한 사실인가. 이 말을 체화시켜 내가 입을 열 때마다, 내가 행동을 할 때마다 자잘한 선택의 기준이 된다면 조금씩 나는 더 진보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에는 자공의 뛰어난 언변과 학식이 선생과 동료들에게 신뢰를 받지만 결국 그를 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되는 스토리가 소개되어 있다.  그 이유는, 출중한만큼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들의 단점을 지적하는 방법으로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멀어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가장 큰 장점은 동시에 가장 큰 단점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뛰어난 언변이 무기라면, 겸손하지 않는 한, 그 날카로운 언변의 칼끝이 향하는 곳은 결국 자기 자신임을 인식할 때 그의 사회 생활은 장기적으로 신뢰와 존중 속에서 더욱 성장할 수 있다는 교훈을 준다.




책을 읽으며 서양의 토론식 수업인 하크네스 테이블이 연상되었다. 공자는 말씀하신다. "배웠으되 생각하지 않으면 허황된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독선에 빠진다... 문제를 보고 근본을 생각하면 작은면을 보고도 전체를 꿰뚫을 수 있고 현상을 보고도 본질을 알아볼 수 있다(87쪽)"라고. 그러나 혼자서는 부단히 노력한다 해도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 생각에 미치는 데 한계가 있다. 공자는 A=B이다 라고 직접 가르치지 않는다. 질문하고 대답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에게 그 대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다시 질문하고. 중간 중간 부연 설명만 할뿐.  제자들의 깨달음은 토론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마음의 양식도 되지만 결국은 실용적인 처세에 도움이 된다.


이 책이 공자의 애제자였던 자공의 관점에서 이야기 형식으로 쓰여진 글이라 어느 정도의 허구도 가미되었겠지만 공자는 다른 성현들과는 달리 노나라를 비롯한 여러 나라 권력의 실세들과 교류하며 통치 철학을 결정하고 조언하였다. 권력자들의 경계와 권력싸움에 자주 밀려나 오나라 제나라 등을 떠돌며 거친 광야의 국경선에서 초조한 기다림을 견뎌야 했던 시련도 있었고, 기용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때로 자괴감에 빠졌을 수도 있었을 터이다. 그는 종교적 지도자가 아니라 삶의 지혜를 삶 속에서 배우고 가르치던 현실 속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인성과 도덕과 통찰력이 타고났으므로 그에게는 항상 어디를 가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있었다. 비록 그가 뜻을 품었던 현실 정치에서 배제되고 고립된 삶속에서 방황하는 날들이 있었지만, 그의 지혜는 국경을 넘나들며 제자들을 통해 퍼졌고, 세기를 넘고 넘어 현재 디지탈 시대 속 빠르게 변화하는 21세기 우리의 안방에서도 활자를 통해 만나게 되었다. 공자의 철학은 철저히 현실적이고 융통성이 있고 멀리 내다보기에, 생각과 배움이 허황과 독선에 머물지 않고 세상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복잡한 현대를 살아가며 갈팡질팡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는 길 잃은 마음 속 지평이 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책 자공의 입을 통해 재현된 공자와 그 제자들이 몰려 다니며 나눈 깊은 대화 속에서 발견하는 삶의 지혜들은 복잡한 현실 속에서 길을 잃고 번민할 때 믿고 의지하는 지평이 되어, 불안하게 흔들리는 크고 작은 선택의 순간 나를 다잡아주는 기준이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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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꽃이 모랑모랑 피어서 - 제2회 퍼플로맨스 대상 수상작
박소정 지음 / 다산책방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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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세의 대학생이 이런 스케일의 조선을 무대로 한 소설을 써냈다는 사실에 조금은 무력해진다. 이 나이 먹도록 뭘했나 그렇다고 되돌아가 다시 살 수도 없는 일이고. 상상력의 차원을 따지면야 젊고 신선한 감각에 기댈 수 있는 잇점이 분명 존재하지만 그 상상이 하나의 소설로서의 긴 호흡을 가진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는 이야기에 생명을 불어 넣는 디테일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디테일은 전적으로 상상에서만 나올 수는 없다. 한 번도 보지 않은 것 전혀 지식이 없는 곳에서 나올 수 있는 건 고작 감정의 정도 변화 뿐이므로 그걸로 긴 에세이는 쓸 수 있을 지언정 소설을 쓰기는 어렵다. 


조향사라는 직업이 실제로 조선에 존재했다는 기록은 없는 것 같다. 개항 이후에도 한국에 조향사가 생긴 지는 그리 오래된 것 같지 않다. 대형 화장품 회사 연구소의 한 부서 정도나 될까. 그런데 이 젊은 친구는 향을 매개로 향만드는 일을 추구하는 여자의 사랑을 창조해냈다. 문학만 공부했더라도 아직 장편 한 권을 마무리할 만한 소양을 갖추기 어려울 나이에 그 책을 끌고 가는 매개를 향으로 할 만큼의 향에 대한 지식을 쌓고 빈 곳은 상상력으로 메웠다는 사실이 참으로 기특하고 대견할 뿐 아니라 존경스럽다.


로맨스 소설을 읽을 나이가 아니라서 후루룩 만화책 읽듯 읽어버릴 요량으로 주말 차에 가지고 다니다가 어제 저녁 단숨에 읽었다. 퍼플 로맨스 소설상 공모작 대상이라기에 달달하고 닭살돋는 허황된 현실성 없는 사랑 얘기에 한 번 빠져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기대를 조금 엇나갔다. 대학생이 썼다고는 믿기지 않을만큼, 다소 평이하지만 잔잔하고 서정적이고 안정적인 문체, 감정의 절제, 전통 혹은 자연의 향과 약제에 대한 전문지식,역사 소설에 필요한 자잘한 디테일과 어휘들.. 아마도 심사 과정에서는 그런 것들이 높이 평가되지 않았나 싶다.


고전이지만 문체와 대화체는 완전하 현대어로 되어 있고 주인공의 사고 방식과 말과 행동도 당시 배경이 되는 사뢰에 만연되어 있던 유교적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 오래전에 이영애가 주인공을 맡았던 티브이 드라마 대장금의 장금이처럼 사랑을 내던지고 스스로 궁에 들어와 차근차근 조향사의 길을 걷는 독립적이고 당찬 여성이다. 신분이 높은 양반집 규수의 뺨을 때리기도 하고 대군에게 뜨거운 목욕물을 끼앉고 쫒아가 놀다가 도포까지 빼앗아가기도 한다. 이런 설정들은 우리가 그동안 티브이에서 보았던 유교적 관습과 너무 동떨어져 조금 황당해 보이기도 하지만 여자가 남자에게 먼저 꺼안고 입맞추고 집앞으로 찾으러 가 서성이는 모습은 사랑에 있어서는 수동적으로만 여성을 그려내던 기존 사극에서는 볼 수 없던 모습이라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런데 내가 나이가 먹어 순수한 마음이 사라져서 그런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녀의 남자 단과는 어릴 때부터 정혼한 사이이고 단은 그녀와 함께 살기 위해 그녀를 데려와 초가 삼간에 살림을 차리고 누이와 셋이서 살아가는데 함께 잠을 자지 않는 것 같다. 뽀뽀만 해도 부끄러워하며 피한다. 스무살이나 된 여자와 그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가 서로 사랑하고 한 방을 쓰고  부모도 없는데  둘이 잠자리를 같이 안한다?  헐~~~ 그럴리가.  그때 조선이라면 스무살이면 과년했고 그보다 남자가 나이가 많다면 상투를 틀지 않고서는 어디 나가 남자 대접도 받기 어려웠던 시대인데 둘이 왜 서로를 힘들어했는지 그 부분이 이해불가의 영역이다. 뭐 그렇다고 정혼까지 한 상태에서 그리 알콩달콩 서로를 보담고 아끼며 살면서도 소위 요즘말로 케미가 없어서라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다.


병자 호란에 청으로 끌려가 향을 더 잘 배우고  봉림대군과 친해지는 계기를 만들며 극적 진전이 계속되다가 끝에 가서는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한꺼번에 끌어들인다. 그동안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비밀들이 쏟아져 나오는 동시에. 로미오와 줄리엣적인 죽었다 살았다 죽은척 살은척 시체 바꿔치기 신공 단순한 사건으로 인한 오해 등 각종 진부한 방법의 미스테리적 사건들을 통해 사랑의 운명이 길을 찾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이야기에 너무 많은 욕심을 부리다보니 갑작스레 막장 코드로 정신없이 극을 몰아 막을 내리게 된 것 같은 아쉬움이 있었다. 그냥 아쉽게 끝난 사랑이었더라도 그 향을 간직하는 방법으로 잔잔한 톤으로 서정적 마무리를 했더라면 조금 더 격조 높은 소설이 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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