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쓴 후성유전학 - 21세기를 바꿀 새로운 유전학을 만나다
리처드 C. 프랜시스 지음, 김명남 옮김 / 시공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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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학의 이름으로 우리는 존재의 시작에 대해 의문을 가져볼 수 있다. 나의 시작은 어디부터일까. 수정하는 순간 최초의 접합체, 그 아무것도 없는 단순하고 투명하고 균질의 상태에 이미 나란 존재적 잠재성이 스탬프처럼 찍혀져서, 앞으로 존재하게 될 나의 모든 것이 "정해져"있는 걸까. 리처드 도킨스는 그의 독보적인 저서 <이기적 유전자>를 통해 모든 생물은 유전자를 보호하기 위해 특수한 생존 양식을 진화시켜 왔다는 주장을 거침없이 펼쳤다. 태초 원시 수프 속 작은 물방울 속에 농축되어 있던 유기물이 태양으로부터 에너지를 받아 결합하여 더 큰 분자가 되어 수프 속을 표류하다 어느 시점에 유전자의 초기 형태인 자기 복제자로서의 분자를 탄생시킨 우연이 오늘날의 모든 생명체의 시작이었음을, 그리고 그 유전자에 우리의 감각, 우리의 능력, 우리의 성격, 우리의 외모, 우리의 자아, 우리 중 하나가 '내'가 되는 정체성을 만드는 그 모든 정보가 프로그래밍 되어 있음을 완벽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무기력한 운명론자가 되어야 할까?

 

리처드 C. 프랜시스가 쓴 <쉽게 쓴 후성유전학>에서는 이런 의문들에 대해 긍정적인 답을 옹호한다. 논란의 시작은 전성설과 후성설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여 개 종류의 줄기세포로 분화할 수 있는 가장 처음의 그 하나에 이미 인간의 모든 것이 잠재되어 있다고 보는 것은 전성설(preformationism)이다. 유전자는 그 이론을 지지하기에 과학적이고, 논리적이다. 그러니까 전성설에서 보는 '드러난 나'는 발생의 결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것이 조금 이전까지의 유전학이 정설로 받아들인 패러다임이었다. 전성설은 유전자가 지시를 내리고 세포가 그 지시를 따른다는 관점을 공통점으로 하여 연구의 흐름에 따라 "청사진", "조리법", "프로그램"으로서의 유전자에 비유되어 왔다. 반면, 후성설(epigenesis)은 발생을 통하여 내가 존재하게 된다고 보는 학설이다. 발생은 창조적인 과정이라는 것이 후성설의 기본입장이다. 접합체 속의 유전자들이나 다른 생화학 분자들이 생명의 고유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그것들이 이미 형성된 나로서 기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전성설과 후성설 사이 논쟁의 중심에 있던 독일의 과학자 한스 드리슈는 성게의 수정 직후 첫 세포 분열 과정의 초기 분화 단계에 개입해 분열된 세포들을 분리하여 각각 분화된 세포들이 완전한 성게 유생으로 자라는 것을 확인했다. 이것은 이른 배아 단계에서 각 세포가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발생을 조절함으로써 온전한 배아로 자란다는 결론을 이끌었다. 그리고 그는 발생의 더 나중 단계에서, 세포 환경이 유전자 조절에 관여한다는 상호 인과관계를 발견했다. 그의 연구가 심화할수록 그는 점점 더 발생의 복잡성에 압도되어 모든 자연주의적 설명을 버리고 결국 철학자의 길을 걸었다. 후성학의 발견이라는 생물학적 연구 환경이 그의 인생의 궤도를 180도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러한 사실, 이러한 과학자들 역시 나에게도 사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세포의 운명은 다능성 단계를 지난 후에도 배아에서의 위치, 이웃 세포들과의 화학적 상호작용에 크게 좌우된다. 후성설의 가장 큰 난제는 어떻게 단순하고 균일해 보이는 상태로부터 훨씬 더 복잡하고 질서정연한 상태가 탄생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후성유전학이 이를 설명한다.


책의 도입부에서는 네덜란드의 나치 점령군이 퇴각하며 내린 봉쇄조치로 인해 생긴 약 8개월간의 기근 동안 태어난 아기들의 몸무게와 그의 자식, 그리고 손자 세대에까지 이어지는 길고 긴 관찰을 통해 태아 때의 장기적 기근이 높은 우울증, 비만율, 정신분열증, 반사회적 성격장애, 당뇨 등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후성유전학의 바탕 위에 소개한다.

 

이어서 저자 리처드 C. 프랜시스는 스테로이드 복용으로 악명을 떨친 미국의 메이저리그 야구선수 칸세코의 사례를 통해 만성적인 스테로이드 복용이 어떻게 후성유전학적으로 몸의 기능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설명한다. 스트레스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의 작용을 설명하고, 포유류의 양육방식과 스트레스 반응을 관찰함으로써,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같은 질환들이 대를 이어 후세에까지 영향을 주는 사실을 주지한다. 
테스토스테론 주입이 몸속의 자연적 테스토스테론 생산을 중단시키면서 우울과 성욕감퇴를 겪고, 테스토스테론 대사의 부산물 중에 발생하는 에스트로겐 호르몬 수치가 올라가면 고환이 쪼그라들고 발기부전을 겪는다는 것이다.

 

인체의 생리적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 진화된 스트레스 반응은 생식에서 면역까지 거의 모든 생리적 체계들과 관련되어 있다. 세포핵 수용체와 결합함으로써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미치는 스트레스 호르몬 코르티솔이 태아의 폐 발달을 촉진하기 위해 처방된 경우, 높은 코르티솔 수치를 경험한 태아는 자라서 스트레스 축이 평생 과다 반응성을 보여 심장질환과 당뇨를 포함한 여러 질병의 발생률이 평균보다 높고 수명이 짧았을 뿐만 아니라 정신장애를 겪을 가능성도 높았다는 연구 결과를 제시한다. 이것은 홀로코스트 때문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었던 부모의 자식들에게 PTSD와 우울증의 발병률이 높게 나타났던 연구, 기니피그의 부적절한 모성 행동이 세대를 통해 자식 기니피그의 코르티솔 수용체의 유전자 반응성에 영구적 영향을 남기는 연구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쉽게 썼다고는 하나 비전공자로서 전문적인 생리 메커니즘을 모두 따라가기에는 벅찬 감이 없지 않다. 그렇지만, 후성유전학을 납득시키기 위해 복잡한 생리 작용의 기초를 꼼꼼히 기술한 저자의 성실성과 전문 독자가 아닌 일반 독자도 쉽게 이해하도록 다양한 사례들을 각 챕터의 도입부에 소개하고 이론과 사례의 적절한 연결을 통해 이해를 돕는 저자의 서술 방식을 높게 평가한다.

 

뭔가를 더 알아간다는 건, 더 알아야 할 것들과 더 생각해야 할 것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후성유전학은 정도의 문제이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발생 과정의 어디부터를 인간으로 볼 것인가는 발생과정에서 연속적으로 달라지는 인간성의 정도를 파악하는 문제이며, 이것은 사회적이고 정서적이고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면에서 합의로 결정될 문제이다. 그러므로 "유전자+알파=나"의 문제는 더 읽어야 하고 알아야 하고 더 경험해야 하고 더 살아야 하는 철학의 문제로 귀결된다. 철학자가 된 유전학자 한스 드리슈의 끝없는 탐구정신의 흐름이 책의 귀퉁이를 통해 느껴진다. 가장 과학적인 것이 가장 철학적인 것이다.

 

후성유전적 조절의 성격을 감안할 때, 메틸화는 발생 초기에 일어날수록 효과가 더욱 두드러지고 광범위하다. 그러나 메틸화를 비롯한 모든 후성유전적 과정들은 출생 이후에도 진행된다. 사실상 평생 진행된다. 과학자들은 일란성 쌍둥이의 스트레스 반응이 서로 다른 것도 후성유전적 변화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데, 그런 변화 중 일부는 출생 후 한참이 지나서야 벌어진다. (84쪽)
만능성 배아줄기세포가 신경 줄기세포와 같은 다능성 신체 줄기세포로 전환하는 과정은 후성유전적 과정이다. (196쪽)
우리가 세포의 위치를 이리저리 바꾸면 세포의 운명은 그에 따라 바뀐다. (199쪽)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른바 종교적 전성설을 믿는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정자와 난자가 만났을 때 인간의 영혼이 탄생한다고 믿는다. 세속적 전성설도 마찬가지라, 접합체를 인간으로 인정하고는, 인간에게 따르는 모든 윤리적 고려를 접합체에도 적용한다고 본다… 배아는 어느 시점부터 인간이 될까?… 후성설은 다만, 인간의 발생은 인간이 형성되는 과정이지 애초부터 존재했던 잠재된 인간이 드러난 인간으로 나타나는 과정은 아니라고 말해줄 뿐이다… 발생 과정에서 연속적으로 달라지는 인간성의 정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가 다 함께 사회적으로 결정할 문제다. (204,2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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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배울 수도 있었을 수학과 과학에 대해 새로운 책들이 눈에 띄면 지나간 청춘이, 내가 좀 모자란가 싶었던 학창시절이 억울하다. 과학과 수학은 생각에서 꼬리를 물고 원리를 이해해갈 때 배운다는 것의 즐거움을 알 수가 있는 건데, 아직도 입시를 위해 많은 것을 우걱우걱 집어 넣고 있는 학생들에게 유감을 표하며.












과학의 발전은 전쟁의 역사와 맥을 같이 했다. 결국 누가 주도권을 쥐는가는 위대한 영혼이 멋진 문화가 결정한 것이 아니라 무기가 결정한 것. 고대부터 기초 물리학이 전쟁을 가능하게 했다.


"물리학 원리에 바탕을 두고 개발된 것이 비단 현대적인 무기만은 아니다. 비록 아주 초보적인 물리학을 알았을 뿐이지만 이집트, 아시리아, 그리스, 로마 같은 초기 문명 사람들도 무기를 고안하는 데 물리학을 이용했다. 역사 속 어느 시대에도 물리학은 무기를 개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서문_물리학이 전쟁과 무슨 상관인데?〉 중에서"







1953년, 27세 청년 H.M.은 뇌 수술을 받는다. 유년기에 시작된 간질발작이 일상생활을 위협할 정도로 극심해지자 신경외과의사 윌리엄 스코빌이 뇌 조직 일부를 제거하는 수술을 제안한 것이다. 지금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지만, 간질 환자의 뇌 절제 수술은 1950년대 초까지 폭넓게 행해졌고 때로 효과적이었다. H.M.에게는 기존의 방법보다 더 제한적으로 뇌를 절제하는 측두엽절제술이 적용되었다. 하지만 담당 의사 스코빌도 인정한바 “솔직히 실험적인 수술”이었다. 이 수술로 H.M.의 뇌에서 좌우반구를 연결하는 부위에 있는 해마가 거의 대부분 제거되었다. 수술 후 회복 경과는 좋았고 간질발작도 없어졌지만 곧 누구도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드러났다. 
지능, 감각, 운동을 비롯한 다른 모든 뇌 기능이 정상인데도 H.M.은 더이상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낼 수가 없었다. 어제 만난 사람, 점심 때 먹은 음식, 방금 나눈 대화, 새로 겪은 모든 것이 그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었다. 그 무엇도 30초 이상 머리에 담아둘 수 없게 된 H.M.은 2008년 82세로 사망할 때까지 ‘영원한 현재’만을 살아야 했다. - 출판사 소개글



존부룩만의 엣지 재단에서 유명 석학들의 글을 모은 책. 베스트오브엣지 시리즈의 세번째 책.

세계 최고의 석학들이 단일 주제에 대한 강연, 글 모음











통섭의 전도사 최재천 박사는 생명 현상과 인문학적 통섭의 개념을 이 책에서 잘 연결했을 듯 싶다. 저자 이름만 보고 읽어도 반쯤은 실패하지 않는 이름.












옥스포드에서 신경학 박사를 딴 하나 로스가 글을 쓰고, 그래픽 저널리즘과 과학 그림을 전문으로 하는 일러스트레이터이면서 신경과학 박사 학위를 받은 마테오 파리넬라가 그린 일러스트레이션으로 된 책. 가장 탐나는 책.. 정재승님이 감수










 찰스 다윈의 그 책. 새로나온 완역판. 양장본. 한길그레이트북스 시리즈 133으로 나왔다.

 역자의 이력을 보면, 생물학 박사에, 대학에서 출강하다가 미국에 가서 다시 컴퓨터를 전공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최소한 오역은 없을 듯하다.

 

 








지난 달에 이종필 교수의 인터스텔라 라는 책이 나왔는데, 해외서적 <인터스텔라의 과학>이라는 책도 나왔다. 저자 킵손은 세계적인 이론물리학자인데, 인터스텔라의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이 머리말을 썼다. 

 목차를 보면, 2 우리 우주, 간략하게,3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들,4 휜 시간과 공간, 기조력,5 블랙홀,II 가르강튀아,6 가르강튀아의 해부학

7 중력 새총 효과,8 가르강튀아의 모습,9 원반과 제트,10 진화의 주춧돌은 우연이야,III 지구에 닥친 재앙,11 병충해,12 산소 고갈,13 다른 별로 가는 여행,IV 웜홀,14 웜홀,15 「인터스텔라」에 나오는 웜홀의 모습,16 웜홀 발견 : 중력파,,V 가르강튀아 주변 탐사,17 밀러 행성,18 가르강튀아의 진동,19 만 행성,20 인듀어런스 호,,VI 극한의 물리학,21 4차원과 5차원,22 벌크에서 사는 존재들,23 중력을 국한하기,24 중력이상,25 브랜드 교수의 방정식,26 특이점과 양자중력,VII 클라이맥스,27 화산 분화구의 테두리,28 가르강튀아 속으로,29 테서랙트,30 과거로 메시지를 전하기,31 인류의 지구 탈출

등 흥미진진하다. 두 책 모두 재미있을 듯하다. 


뒤늦게 이런 책도 나왔다. 















겨울 캠핑을 즐기는 남편을 위해 구입













정인경 저자의 보스포루스 과학사를 너무 재미있게 읽었기에 이 책도 기대된다. 쉽고 재미있게 쓰면서도 설명이 귀찮은 부분을 얼버무리지 않는 재주가 있으신 분이다. 













 자연과 인간 역사에서의 확률론이라는 부제.

우연을 수학적 확률로 사유하는 것 같은데, 흥미롭게 잘 썼으면 재밌을 듯.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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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주식회사
사이먼 리치 지음, 이윤진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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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여기 서로에게 관심이 있는 청춘 남녀가 있다. 그들은 각자 서로와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올린다. 상대에게 아무리 헌신하고 구애해도 소용이 없을 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느님에게 SOS를 치는 것이라면 모를까 둘은 관심을 표현하기 위해서라면 그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요행에나 맡기듯 하느님에게 기도를 한다. 잘 되게 해달라고.


하느님과 천사들은 고민한다. 잘 되는 걸 무엇으로 기준삼을지. 잘되는 게 뭘까. 키스하는 것? 속된 천사와 하느님은 혀를 사용하느냐 아니냐를 따지지만 어쨌든 키스까지 간다면 그 둘은 이루어졌다고 치기로 한다. 얼마전 읽은 장하성의 온도계의 철학을 보면 애초 기준이 없는 단지 느낌으로만 알 수 있는 온도라는 측정을 위해 부딪혔던 수 많은 시도롸 타협들이 있던데 애정을 재거나 두 사람의 친근함 혹은 이성친구로서의 가까운 정도를 재기 위한 방법은 영원히 존재하지 않게 될까. 청춘남녀가 이성친구로 서로 가까워졌다는 걸 알 수 있는 척도로 키스를 기준한다는 발상은 그리 낯설지도 억지스럽지도 않지만,두 사람의 찌질한 자신감 결여와 비사회적인 성격 등을 고려할 때 우리가 그들이 키스했다고 해서 저들의 사랑이 이루어졌다고 안심할 수는 없다. 우리가 연애할 때야 손을 잡기 시작한다거나 키스를 한다거나 혹은 말로 널 사랑해 라고 말한다거나 그런 애매모호함으로도 서로에게 배타적 연인으로서의 기능을 기대할 수 있었지만 요즘 청춘들은 내가 듣기에 정확히 시작선을 말로 긋고 시작하는 듯하다. 물론 잠을 자거나 한다면야 웬만하면 서로에게 헌신하기로 한 사이라는 암무직적 동의가 있다고 봐야겠지만 썸을 타네 마네 어장관리를 하네 어쩌네 하는 숱한 개념들 위로 우리 사귐 하는 확실한 동의가 필요한 시대이니 어쩌면 키스로 그것을 정한다는 발상 자체가 시대를 제대로 읽지 못한 대기업 구태의연한 경영에 머무르는 천국주식회사의 단면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겠다.



책을 읽고 나니 어디선가 비슷한 소재의 영화를 본 듯했는데 다른 분이 쓴 리뷰를 보니 그게 부르스 올마이티였다. 하느님이 휴가를 간다며 짐 캐리에게 기도를 처리하거나 하는 하느님의 일을 맡기면서 벌어지는 해프닝들을 코믹 버전의 영화로 엮은 내용이었는데, 요구도 많은 인간을 제어하는 신의 입장에서 선택의 고충을 소재로 한 점에서 비슷한 류라고 할 수 있겠다. 부르스 올마이티에서는 하느님이 혼자서 분주하게 지구상 곳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일일히 손수 돌보아야 했지만 이 소설에서는 천국위에 주식회사를 세우고 하느님른 그 회사의 최고경영자 자리에 앉아 혼자하던 일을 직원들에게 맡긴다. 신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종교적 현상은 모두 이 천국주식회사의 각 부서에서 담당하고, CEO인 하느님은 인간들이 벌이는 프로 스포츠 경기나 조작할 뿐 별로 인간사에 애정도 관심도 없다.


소설의 주인공 크레이그는 하느님의 주식회사에서 일하는 천사로 뚱보에다가 일중독에 빠진 기적부의 직원이다. 기적부의 전직원은 중력과 같은 자연 법칙에 어긋나지 않아야 하는 규칙을 지키면서 인간에게 뜻밖의 기적을 선사하는 일을 맡았다. 그런데 말이 기적이지 기적부 직원들조차 기적을 만들어내는 일은 쉽지 않다. 유도한 대로 사건이 일어날 수 있도록 모든 상황을 고려해서 우연을 정교하게 디자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직원들이 잡담을 하면서 시간을 때우고 있는 사이 크레이그는 아주 자잘한 기적들을 일어나게 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의 최근 성과는 가령 이런 것들이다. 더위에 지친 소년 소년에게 차가운 물벼락을 선사하기 위해 거리의 소화전을 설짝 터뜨린다. 궁핍한 한 인간의 낡은 자켓 주머니에 뭉칫돈을 발견하게 한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의 이름을 기억해낼 수 있도록 암시적 힌트를 곳곳에 나타나게 한다 등등.


두 인간을 정확히 같은 시간에 정확히 같은 장소로 모이게 만들기 위해서는 수백 가지의 변수를 조정해야 했다. 그건 창의성, 정확한 타이밍, 구역질 나올 정도의 방대한 조사량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세부 사항 중 어느 하나라도 망치면, 모든 게 헛수고가 됐다. -p184-




한편 기적부보다 하급 부서인 기도수취부에서는 계약직 사원인 일라이자가 하느님께 올리는 기도들을 선별하는 작업을 한다. 그녀 또한 남다른 사명감으로 기도를 7단계 분류체계를 고안해 내고 중복된 기도들을 함께 묶고 주요 기도들을 선별해서 올리는 등 열심히 일한 댓가로 기적부 정직원으로 승진하고 크레이그와 함께 일하게 된다. 자신이 이제껏 해왔던 기도 분류 작업이 사실상 하느님 앞에서는 쓰레기가 되어버린다는 실상을 알데 된 일라이자는 당돌하게도 사실을 따지러 하느님을 만나러갔다가 일을 오히려 그르친다. 전지즌능하지도 못하고 눈앞의 이익만 쫓던 CEO는 가뜩이나 골치아픈 지구를 폭파해버리고 천국주식회사를 정리해버리겠다는 것이다. 그들은 폭파 직전의 지구를 구하기 위해 기도부에서 올라온 기도 중 한 건을 한 달 내로 이루게 해야 하는 미션을 수행한다. 그들이 고른 기도는 서로 좋아하는 모태솔로 남녀 둘을 이루게 해주는 것이다.


이것이 위에서 얘기한 샘과 로라가 두 천사들에게 지구를 구하기 위한 미션 대상으로 포착하게 된 전말이다. 서로 좋아하는데 왜 천사의 힘이 필요할까. 서로 좋아하더라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상대방에게 말 한마디 걸기도 어려운 멍청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끌리는 상대에게 작업을 거는 대신 하루 종일 집무실에 앉아 골프채나 휘둘러대는 무능하고 한심한 하느님에게 기도로 도움을 청한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들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는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이건 상상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다.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서로를 만나게 해줘도 서로에게 자연스레 다가가서 연인이 될 수 있도록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타고난 루저에 내세울 것 없는 외모와 변변찮은 직업 등 모든 것들이 서로에게 스스로를 방어하게 만드는 것이다.


두 천사가 서로 끌리는 두 인간을 맺어주는 미션이 시작되면서 두 인간은 천사들에 의해 관찰자의 시점으로 서술된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와 같은 전개를 기대했지만 두 주인공이 준수한 외모와 개성 만점인 캐릭터의 조합이라는 공식에서 한참 비껴가 있다. 우리는 로맨특 코미디들 역시 허상이라는 걸 안다. 찌질하기도 하고 멍청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들은 스스로의 매력을 상대에게 어필하는데 성공한다는 허상을 관객과 독자들에게 심어준다. 그러나 다양한 인간군상들의 모습에서는 조금도 무엇이 기대되지 않아 보이는 사람들일지라도 서로에게 끌리는 이유가 있고 그 끌림이 당치 않다는 자괴감에 빠질만큼 내게 처한 현실과 나란 인간이 가진 것이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삶이 고단하고 찌질하지만 그래도 하루하루가 돌아오며 절망 속에서도 희망 한 자락을 꿈꿀 수 있기에 인간인건지도 모른다.


SNL 작가라는 저자의 경력이 말해주듯 가벼운 코믹 풍자극의 느낌이 강한 이 소설. 쉽고 빠르게 읽힌다. 가볍기에 신을 믿는 독자들도 별 저항없이 웃으며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우연을 코딩하는 묘사가 흘미로웠고 인간과 다름없는 모습의 천사와 하느님에 대한 세부 묘사도 재미있었다. 그러나 애초 천국을 주식회사라로 묘사했다는 설정에서 개연성이라고 해야 하나 설득력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것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누굴 위한 기업인지, 기업이라면 고객은 누구이고 이윤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천국주식회사를 정리하고 레스토랑을 경영하겠다는 데 고객은 누가 되고 또 경쟁상대는 누구인지 하는 체계적 배경을 단단히 납득하게끔 만들어내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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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 때문에, 컴 앞에 앉게될 기회가 없을 듯해 미리 쓴다. 

1.붉은 밤의 도시들
 
비트 제너레이션의 리더, 신들린 천재성 이라고 수식되는 윌리엄 버로스의 최고 걸작이라고 함.
유토피아 소설, 풍자 작가, 기발함, 독창적, 충격적 매혹적 뭐 이런 저런 단어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2. 환상의 빛
나도 빨간 책방의 애청자이긴 하지만,가끔은 이동진과 김중혁의 출판가에 대한 입김이 너무 세어지고 있는 건 아닌가 살짝 우려가 된다. 두 사람이 방송한 내용의 책은 나오자마자 최고 관심도서이고, 이동진과 김혜리가 언급한 것만으로도 독자들의 움직임에 어떤 방향을 제시하는 건 아닌가 싶다. 어쨌든 관심 증폭.





















 3. 청춘시절
노벨상 수상작가라, 얼마전 <어두운 상점들의 도시>를 읽었는데,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견고한 구조를 갖춘 역작'이라는 작품은 패트릭 모디아노의 다른 면모를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1983년에 영화화되기도 했다고 하니 스토리 자체만으로도 읽을만 할 듯






















4.도시의 시간
 현재 젊은 작가의 신선한 책. 일단 읽어보자.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으로 2009년에 등단. 



























 5.정복자들
<인간의 조건>, <왕도>와 함께 말로 3부작을 이루는 앙드레 말로의 대표작. 1928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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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5-01-04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트랙백 주소를 넣느라고 모바일에서 고쳤더니 상품이 보이지 않네요.
 
왜 나는 기회에 집중하는가 - 결단의 승부사, 손정의가 인생에 도전하는 법
미키 타케노부 지음, 김윤수 옮김 / 다산북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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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개발서의 어떤 내용도 그 역이 성립된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라

미루면?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면서 오늘 하는 일은 무엇일까? 그 시간에 우리는 무언가 다른 것을 한다. 그렇다면 오늘 할 일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건 오늘 해야 하는 일, 발 등에 떨어진 일, 오늘 하기로 계획한 일, 오늘 해야 내일이 편안한 일 등등이다. 그걸 미루는 이유는? 몸이 아파서, 잠을 더 자고 싶어서, 노느라고, 하기 싫어서, 다른 할 일이 있어서, 다른 더 중요한 일이 있어서 등등이 있을 것이다. 몸이 아프면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안하는 게 상책이다. 미루자. 잠을 더 자고 싶다면? 엊그제 읽은 책에 의하면 잠은 푹 자야 한다. 잠을 안자면 정신이 제대로 동작하지 않기 때문에 일을 하더라도 제대로 생산성있는 일을 하지 못하고 망쳐버리기 쉽상이다. 노느라고? 놀 땐 놀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면 논다는 건 무얼까? 성인들이 놀 수 있는 놀이는 사실 그렇게 '노는' 것도 아니다. 사람을 만나서 수다를 떨거나, 쇼핑을 하거나, 먹거나, 마시거나(주로 마시는 것), 간혹 컴퓨터 게임이나 TV보기, 내 경우는 책보기까지가 노는 일이다. 할 일을 두고 놀면 마음이 편치 않다. 그건 하지 말자. 다른 할일이라면 다른 더 중요한 일이거나 다른 더 급한일일 것이다. 급한일만 하다보면 중요한 일은 못한다. 중요한 일만 하다보면 좋아하는 일은 못한다. 좋아하는 일과 중요한 일이 다른 사람들은 평생 좋아하는 일을 하지 못하고 살 지 모르겠다. 그러므로, 할 일을 미룰 때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손정의 라는 분은, 재일동포3세로 국적은 일본이고 일본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현재 소프트뱅크 대표이사겸 CEO이다. 항간에는 애플의 아이폰이 사실은 손정의의 아이디어였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그의 IT 업계에 세계적인 영향력과 파워는 대단한데, 현재 일본에서 두번째  최고의 부자이고 세계적으로도 손에 꼽는 부자다. 이 책은 손정의의 인생에 대해 혹은 손정의의 가치관과 철학에 대해 손정의가 직접 쓴 책이 아니다. 그의 밑에서 일한  미키 타케노부라는 사람이 그의 행동과 그의 말을 지켜보며 성공한 사람의 본보기로 '기회에 목마른 당신이 반드시 알아야 할 인생법칙'이라고 정리한 자기계발서라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손정의에 대해 잘 모르고, 관심도 없는 사람이 손정의의 행동과 철학을 읽을 이유는 단 한가지, 그의 성공의 이면에는 실패자 로 간주되는 평범한 사람들과 다른 어떠한 점들이 있었을까를 성찰하는 것이다. '더러운 조센징'이라는 따돌림과 비난을 받으며 자란 손정의의 어린 시절동안과 성인일때조차도 그의 아버지에게는 그가 매우 특별한 사람이고 세상에 둘도 없는 천재였다. 여기서 우리는 부모에게 특별함과 비범함을 인정받는 것, 외부에서 받은 상처를 극복하고 자신감을 회복하고 강하게 자신이 믿는 바대로 나아갈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첫걸음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위기에 처하면 성공 요소를 찾아 집중 투자하라. 새로운 사람, 과거의 자신과 만나며 한번쯤은 되돌아 보라, 목표를 정한 다음 필요한 걸 배워라. 누구라도 상관없으니 롤 모델을 정하고 따라 하라 .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은 어려우니 대기업에 취직해라, 오늘 가능한 일은 오늘 끝내라, 성공 확률이 낮을 수록 기회다.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며 끝까지 해내서 신뢰를 얻는다. 작은 성공이 커다란 신뢰가 되므로 먼저 성과를 보여라. 모든 일에 전력투구하라 등이 그가 전하는 메시지들이다. 


손정의가 사업을 선택할 때 적용하는 기준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플랫폼이 되는 사업

2. 넘버원이 가능한 사업

3. 이미 성공이 증명된 사업.

플랫폼이 되는 사업은 모든 다른 사업의 기반이 되는 사업으로서, 구매자와 판매자를 이어주는 야후-유통, 인터넷 브로드밴드 서비스인 야후-BB 등이고 넘버원이 가능한 사업은 특정 분야에서 압도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일로서 창업주로서의 자신의 능력도 뛰어나고 회사도 체력을 갖추고 있어야 함을 말한다. 즉, 이런 요소는 일반적으로 창업을 하려는 개인에게 큰 도움이 안되는 기준이다. 3번 항목은 이미 증명된 사업이란 것은 비즈니스 모델이 확립된 사업을 인수함으로써 실패할 가능성을 줄여주는 방식이다. 결국 대기업의 생존방식이기도 해서 씁쓸하지만, 애플의 아이폰 독점 계약과 보다폰 인수, 스프린트 인수 야후 합작 설립 등, 소프트뱅크의 생존방식은 무에서 유를 이끌어내는 창의력을 바탕으로 하기보다는 수많은 실패를 감당할 수 있는 막대한 자금력과 핵심 기업을 인수하기 위해 무모해보일만큼 경쟁사보다 훨씬 높은 가격으로 입찰할 수 있는 과감한 투자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을 기업가들에게 알려준다. 


손정의의 철학 중, 창업자금에 대한 생각이 저성장의 우리 현실에 얼마나 맞을지 모르겠지만, 흥미롭다. 그는 돈을 '사람들 사이를 돌고 도는 것'이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비지니스 플랜만 확실하다면 어디에서든 확실하게 대출받을 수 있으므로 창업자금을 마련하겠다고 죽어라 돈을 모으는 건 미련한 일이라는 것이다. 확실한 비즈니스 플랜으로 엔젤투자자와 같은 부유층을 만나 그 돈으로 창업하라는 충고, 새겨들을 필요가 있겠다. 


그의 철학 중 흥미로운 것이 또 있다. 생각에 잠기면 안된다는 것이다. 손정의가 직원들에게 자주 하는 말 중 "10초만 생각하면 뭐든지 알 수 있다. 10초를 생각해도 모르는 문제는 더 이상 생각해도 소용없다"는 말은 사업과 경영에 있어 기회를 포착하는 일, 속도를 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암시하지만, 신중한 결정도 필요하지 않을까. 


절대 하면 안되는 일이 있다. 부분부분을 완벽하게 작업하는 것이다. 부분은 아무래도 부분에 불과할 뿐이다. 아무리 완벽한 내용이라 해도 전체적으로 어울리지 않으면 나중에 삭제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부분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몇 배 더 많은 시간을 업무에 소모하게 된다. 대강이나마 전체적인 방향을 잡고 필요한 자료를 검색하는 게 현명하다. (p139)


내게 필요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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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쥐 2014-12-19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의 달인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

CREBBP 2014-12-19 22:26   좋아요 0 | URL
이짝에선 나대지 않고 조용히 사는데, 그래도 뭔가 붙었네요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