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의 시대 - 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알랭 드 보통 지음, 최민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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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가 카메라와 확대경을 의심에 찬 눈으로 들이대지 않는 곳이 있는데 그 곳은 뉴스 자신이다. 카메라와 확대경은 대신 보통이 들었다. 뉴스는 우리 자신의 실존적 문제에서 벗어나 맹한 눈으로 뉴스가 보여주고자 하는 방식대로 세상을 보게 만든다. 우리는 세상을 우리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의 눈을 통해 걸러서 본다.  뉴스가 전하는 온갖 외부의 혼란은 감각을 마비시켜 날조된 평온을 불러오게 할 지도 모른다. 넘쳐나는 끔찍한 범죄와 전쟁 같은 사건 사고는 그 사건의 배경에 있던 일상과 구체적 삶을 배재해 버림으로써 인간이라면 당연히 느껴야할 적절한 감동이나 흥미 슬픔 같은 것들을 느끼지 못하고 숱한 다른 사건들과 함께 내 삶의 주목받지 못할 배경이 되게 하는 것이다. 


알랭드 보통은 이 책을 통해 뉴스가 다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야기의 뼈대만으로는 어떠한 문학작품도 독자들을 감동시키지 않듯이 우리가 6하원칙이라 배워온 객관적이고 뼈대만 남은 사실의 홍수 속에 뉴스는 더이상 뉴스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소음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뉴스는 가치를 전달할 수 있는 편향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이 요지이다. 


플로베르의 눈에 신문은 사람을 심하게 오염시키는 것이어서... 문맹자와 무지렁이 프랑스인들만이 주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보았다


알랭 드 보통의 문장은 유려하고 감각적이며, 쉽게 공감하게 쓰여진다. 딱딱한 제목 뉴스의 시대에서도 자주 마음에 와닿고 공감되는 구절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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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막혀 죽겠거든, 철학하라 - 인생의 힘든 고비에서 나를 잡아준 책들 인문낙서 1
홍정 지음 / 인간사랑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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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떤 학문이라고 이름붙여진 범주의 지식을 만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이미 완전히 정립된 이론을 체계적으로 하나의 교과서에 때려 넣은 것을 그대로 주입적으로 학창시절에 만나는 방법과 인생을 통해 기회가 생기거나 필요에 의해 찾게 되는 방법이다. 철학을 만나는 방법은 주로 전자였다. 철학을 교과서적으로 만나는 방법은 우리가 이제껏 철학이 진저리쳐지는 추상 어휘와 그게 그거같은 정신적 활동을 각기 다른 용어와 학설과 학파라는 이름 하에 묶어두고, 그걸 전혀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고통스럽게 읽는 일이었다. 철학을 인생에서 만나는 방법은 어떤 인생의 전환점이나 자기 성찰의 목적이 필요한 시기에 위기를 다루는 방법을 찾는 과정이다. 거창하게 말하면 인생을 찾고 나를 찾는 방법이다.

 

저자는 아버지의 사고로 인한 죽음과 연이은 동생의 자살로 인한 충격으로 고통을 받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직장과 가정을 버리고 시골의 축사로 들어가 철학에 매달리면서 공부하고 깨달은 내용을 책으로 냈다. 시대와 사조 혹은 철학자로 묶이지 않고 물 흐르듯 하나의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 사상을 철학자와 철학자 사이를 유영하며 강의하듯 철학을 전달한다.

 

책의 형식은 이 앞전에 읽은 김탁환의 <읽어가겠다>와 비슷하다. 인상깊은 철학자의 저서를 자신의 생각과 함께 버무렸다. BC 시대를 살았던 세네카의 인생론과  몽테뉴의 수상록이 곳곳에 인용되면서 철학적 사고의 흐름이 이어진다. 부제를 붙인다면 홍정이 읽어주는 몽테뉴의 수상록 이라고 붙여도 무방할 듯이 거의 모든 철학자들의 사상 곳곳에 몽테뉴의 해석과 철학이 따라다닌다. 책의 전체로 볼 때 반은 여러 철학자들의 저서에서 인용한 인용문이고 반 정도는 그들의 철학 개념에 대한 해석이 에세이 혹은 강의록 형식의 글로 이루어져있다. 그 중에서도 몽테뉴의 수상록이 가장 많고, 세네카의 인생론이 두번째로 많다.

 

니체, 샤르트르, 쇼펜하우어, 몽테뉴 등의 고전 저서들은 생각만 해도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지지만, 오히려 그 철학자 개인들을 일생동안 지배했던 사상들이 집약된 직접적인 저서에서 선택된 문장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그것들을 해석하는 홍정 자신의 글이 오히려 더 어려웠다. 아마도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온전하게 이해한 부분은 1/10 혹은 1/5 정도나 될까. 얼마 전에 읽은 열린책방의 <철학한입 더>도 철학의 입문서도 마치 부페식당처럼 많은 철학자들의 사상을 개념적으로 풀어서 열거했지만, 그 때에도 어렵게 느껴져서 철학이란 놈이 워낙 나에게는 어렵구나 싶었는데, 이 책을 통해 직접적인 저서를 일부 엿보니,  철학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철학자 개인의 일생을 관통하는 사상을 몇줄로 요약한 교과서적 해석이 어려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점에서 곳곳에서 인용하한 문장들을 통해 원철학자의 사상을 홍정의 해설과 함께 원형 그대로 볼 수 있는 점이 가장 큰 소득이었다. 그 모든 책을 다 읽어볼 수도 없고, 아니 하나라도 제대로 읽어볼 수가 없는데 이런 기회로 조금조금씩 맛보기를 할 수 있다는 면에서 만족스러운 독서가 되었다. 

 

너무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그냥 일반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데는 조금 어려움을 겪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김탁환 작가는 <읽어가겠다>에서 평론가가 아니라 소설가이기 때문에 평론가들이 쓰는 평보다 훨씬 쉽게 작품들을 설명한다. 평론가들은 이론에 갇혀 본질을 제대로 못보는 것 같다고 느끼는 경우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움베르토 에코 같이 전방위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의 지식을 독자가 따라잡는데 헉헉거리기 마련이다. 작가 홍정 이 분도 한꺼번에 너무 많은 철학서를 읽으며 너무 많은 생각을 한 듯하다. 정작 본인은 숨막혀서 철학을 했다지만, 숨이 안막히는 일반 독자가 철학을 이 책으로 대하니 숨이 막혀올 듯하다.

 

에를 들어 자기 탐구의 부분이 그렇다. 전반부에서, 그리고 후반부에서 자기성찰 및 자기 탐구에 대한 시공을 넘나드는 전방위적으로 탐색은 이해라는 선을 넘어서면 철학이란 누에고치처럼 자기만의 집을 짓고 그 속으로 들어가서 자폐증처럼 자기만의 세계에 만족하라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또한 정확하게 저자의 의도를 파악할 수는 없는 과학에 대한 편협된 생각은 아마도 과학 철학에 대한 무지를 반영한 것이 아닌가 싶게 나의 인내력을 파괴시킨다.

 

과학은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적인 이성이 아니다. 자신을 망각하는 이성이다... 훌륭하게 사는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해 캐묻는 즉, 심문하는 삶이고.... 과학에서 앎의 세계를 유용성으로 파악한다. 그래서 자기와 세계를 분리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게 자기와 세계는 일치한다. 계몽주의 과학에 반기를 들면서 등장한 것이 쇼펜하우어의 의지이다. .... 이 때 세계와 나는 일체가 아니다. 과학적 이성이 원인이고 세계는 이 원인의 지배를 받아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기계론, 인과론, 결정론, 운명론이며 필욘이 지배한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스피노자는 소크라테스와 공명한다. (64쪽)

 

이렇게 전혀 무슨 뜻인지 숨막히게 하는 문장들은 독자를 배려하는 마음보다는 철학자로서 자신이 발견한 사고를 글자로 옮겨놓는 것에 더 치중한 듯한 모습으로 비친다. 많이 중략했지만 대략 위의 내용이 무슨 뜻인지를 어떤 독자가 제대로 이해할지 의문이다.

 

몇 달 사이에 읽는 책마다 몽테뉴가 자주 인용되고 언급되어서 궁금했었는데, 이 책에서 몽테뉴의 사상의 일부를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수상록은 각 파트별로 엄청나게 두꺼운 것 같고(인용된 페이지 중 900쪽 근처에 있는 것을 보면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저서를 남긴 것 같다) 그의 문장은 물론 저자가 좋은 부분만 골라서 인용했겠지만, 마치 요즘으로 치자면 알랭 드 보통의 책을 읽는 듯 매우 유려하면서도 공감이 많이 되고  쉽다. 이 책을 통한 몽테뉴와의 만남, 세네카, 니체, 쇼펜하우어, 소크라테스를 보다 훨씬 가까이서 인용문과 설명을 통해 구체적으로 만날 수 있었으며 철학이라는 놈이 나랑 친하기는 어려워도, 그렇게 으르렁 거리면서 적대적으로 굴 필요는 없는 놈이란 걸 알게 해줬다고나 할까. 철학아 가끔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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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브렌다 - 본성 대 양육 논쟁의 전환점이 된 일란성쌍둥이에 관한 기록
존 콜라핀토 지음, 이은선 옮김 / 알마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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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치료법을 발견했다며 불치병의 치료를 증명하던 사람들은 티브이가 꺼진 후 어떻게 되었을까. 불치병에서 살아 남았다고 증언했던 사람들이 조용히 죽은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시청자는 아무도 없고, 플라시보 효과로 반짝 기적같은 착각을 주었던 그 가짜 기적의 치료법은 증언한 모든 사람들이 모두 죽은 후에도 계속해서 기적의 치료법으로 남아있게 된다. 기적의 치료법으로 생명을 연장한 듯 보이던 환자들은 모두 죽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사기꾼은 끝까지 영웅이 되어 부를 누린다.


성이 숙명으로 결정된 절대불변의 생물학적 현상이 아니라는 증거가 고작 한 변태적 성도착증을 가진 심리학자의 조작이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시대의 성과학 패러다임이 되어버렸던 시기는 XX와 XY염색체의 차이를 모르던 고대도 중세도, 그렇다고 17세기도 18세기, 19세기도 아니었다. 1960년대 출생의 데이비드는 8개월일 때 필요없는 포경 수술을 받다가 의사의 실수로 페니스가 탔다. 일란성 쌍둥이 중 하나였던 아이는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 없이 30개월이 되기 전에 남은 성기의 흔적마저 지우는 트랜스젠더수술을 받고 여성으로 키워졌다. 그는 브렌다가 되었다. 이 책은 브렌다의 이야기이다. 활기차고 남성스러운 기운이 차고 넘치는 타고난 남성 아이에게 남근을 완전히 없애고, 치마입기와 여자 아이용 인형들을 쥐어주고 여자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 여자로 자연스럽게 성장한다는 존 홉킨스 병원의 성 전문가 존머니의 통제 아래, 이른 나이에 쌍둥이를 낳은 어린 부모들은 그들의 사랑하는 아들 데이비드를 브렌다로 만들었다.


이 책을 보기 전 이 사례를 다른 책에서 본 나는 고집스런 유태인 부모의 아동 학대적 결정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었다. 그렇지 않았다. 데이비드의 부모는 단지 덜 배웠을 뿐.. 어린 나이에 임신을 하자 책임을 먼저 떠올렸고 아이에게 일이 생기자 백방으로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만 모든 것을 헌신했고 그리고 아이와 함께 무너져내렸다. 여기서 부모가 잘못한 건 티브이 방송에 대한 근거없는 신뢰였다. 성전환수술로 아이의 성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을 맹목적으로 믿은 브랜다의 부모는 머니 박사의 말을 신의 말처럼 따랐다. 환경이 성을 결정한다는 그 이론은 아무리 그럴듯하게 생각하려해도 그럴듯하지 않다. 아이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사내아이와 여자아이의 태생적 차이점에 대해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다. 좀 활발한 남자아이를 키웠다면 배 속에서도 남녀 차이를 알 수 있다. 발길질과 힘찬 울음소리. 폭 안기기보다는 고집스레 몸을 뻗대고 기저귀갈기에 저항하는 팔다리가 얼마나 억세고 튼튼한지.


머니박사는 자신의 양성애적 정체성을 일반화하고.. 남성 성기에 대한 혐오감을 거세를 통한 성전환 수술 실험으로 확대.. 개개인에게  대재앙을 일으켰으면서 정작 본인은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학자로 자리매김하여 그 어떤 누구도 그의 이론을 의심하거나 도발할 수 없는 위치에 올랐다. 역겨웠다. 어린 아이가 자신의 성정체성과 그토록 힘겹게 싸우며 가족 모두가 잘못된 결정으로 인해 하나씩 우울증과 알콜 중독, 자살 충동으로 힘겹게 버티고 있을때, 머니 박사는 아이에게 성을 교육시킨다는 명분으로 포르노를 보이고 쌍동이 형제를 발가벗겨 성행위를 모방하는 동작을 취하게 했다. 지금이라면 엄연히 아동학대였을 일이 미국에서 1970년대에 연구라는 미명하에 버젓이 일어났던 일이다.  


참고로, 브렌다가 14살이 되어서야 신뢰할 수 있는 상담의를 만나 자신을 열고, 본인이 남성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래서 그가 그 숱한 시간동안 힘겹게 성적 정체성과 사투를 벌이는 동안 쌓아갔던 존머니 박사의 명예는 브렌다의 실험이 결국 실패로 끝났음을 알게 된 후에도, 그러니까, 아이가 다시 남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받고 자신의 원래 성을 되찾은 후에도 그 이론이 잘못되었음이 밝혀지지 않았고, 계속해서  그 끔찍한 아기들의 성전환수술과 성바꾸기 '의술'은 중단되지 않고 시행되었다. 아기였을 때 성기를 훼손당했거나 왜소성기를 가진 (중성) 아기들은  데이비드처럼 존 머니 박사의 이론에 빠져 본인들의 의사와 상관 없이 트랜스젠더 수술을 받고 강제 여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성심리학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의학이라는 이름으로 엄청난 실험들... 또 과학은, 우리가 믿는 것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조작을 은폐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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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0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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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유독, 시작 문장이 강렬하게 사로잡는 소설이 있다. 두고 두고 회자되는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의 <칼의 노래가 대표적이다. 그 때, 작가 김훈은 '꽃은'과 '꽃이'의 단어 하나, 모음 하나와 받침 하나 사이에서 서로 다른 우주를 찾았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보다는 그 다음 줄,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와 '나는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가 더욱 신비하다. 


인간의 기억이란 한낱 수없이 스쳐 지나간 더없이 많은 시간 중의 아주 미세한 조각 연기처럼 흩어져 없어질 약하디 약한 것이다. 영겁의 시간까지 들추지 않더라도, 시간이 흐름과 동시에 없어지고 말, 실루엣처럼 살짝 드러났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자신의 사라진 기억 대신 실존하는 현재를 만들어준 흥신소 사무실이 문을 닫고 사장이 은퇴를 하자, 기는 사라진 자신을 찾아 나선다. 수십년 전의 자신을 기억하는 폴 소나쉬체를 만나면서 그의 기억 되살리기 여정은 시작된다. 그가 찾아가는 것은 기억인지, 그의 상상력인지 독자로서는 알 수가 없다. 처음에 그는 자신이 몰락한 러시아 망명 귀족의 후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쓸쓸한 망명 귀족의 최후를 회상하였다. 그러나 그가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사진 속의 주인공은 자신의 친구였다. 그는 망명귀족 같은 멋진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이제 나는 ... 그 해의 전화번호부에 나와 있는 어떤 가문의 아들이 아니라, 그 자취를 찾아내기가 한없이 더 어려울 남아메리카 사람이었던 것이다. (p96)
나이가 들어가면서 느끼는 건데, 이상하리만치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이 불현듯 갑작스런 방법으로 바로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찾아오는 일들이 종종 있다. 아빠가 편찮으셔서 그런 것일까라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10여년전 할머니가 편찮으실 때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런데 그 때의 기억이라는 것이 손에 잡히지 않는 희미한 순간적인 것들이라, 말로 설명되지 않는다. 말로 설명하려고 언어가 되는 순간 기억이라는 불확실하지만 진실에 더 가까운 것에서 확실하지만 디테일이 가미된 어떤 허구에 더 가까운 것들로 왜곡되는 것을 느낀다. 어떤 장면 장면들 스치듯 지나가지만 의식과 무의식을 왔다갔다 하며 때로 자신과 자신이라고 생각되는 것 사이를 방황하는 것들 말이다.  
태어났을 적에 내가 얻은 그 이름을, 내 생애의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불렀던 그 이름을, 어떤 사람들에게 내 얼굴을 환기시켜주었던 그 이름을 스스로 되뇌어 보았다. 페드로(p101)

그후 사라져버린 사람들이 남긴 발소리의 메아리가 들릴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들이 지나간 뒤에도 무엇인가 계속 진동하고 있는 것이다. ... 나는 한 번도 그 페드로 맥케부아였던 적이 없었는지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파동들이 때로는 먼 곳에서 때로는 더 세게 나를 뚫고 지나갔었다. 그러다가 차츰 허공을 떠돌고 있던 그 모든 메아리들이 결정체를 이룬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였다. 130

책을 읽으면서, 내가 만일... 이라는 공상에 자주 빠졌다. 내가 만일 모든 기억을 잃고 갑자기 거리의 한 복판에서 아무 것도 없이 덩그마니 남겨졌다면 이라는 상상에서부터 시작해서.. 혹시 내가 알고 있는 나의 기억은 어떤 사실에 근거하고 있는 것들일까 하는 것까지... 언젠가 오랜만에 만난 동창이 나를 기억하는 방법이 기가 막혔다. 너~ 미스김 싫다고 교과서를 창 밖으로 다 던져버렸잖아 널 어떻게 잊겠니. 내가 기억하는 나는 조금 철없긴 했어도, 어른에게 찍 소리 저항 한 번 못해봤는데.. 그녀가 기억하는 내가 내가 아니라 그녀 자신일지, 아니면 내가 기억하는 내가 내가 아니라 남일지 아직까지 의문이다. 떠들다가 칠판에 이름이 적히거나 지각해서 벌스곤 했지만, 그렇게 불손한 짓을 하다니. 게다가 던져버린 책은 내 손으로 다시 주워서 올라왔어야 했을 것 아닌가. 3층이었는데.. 참으로 가지가지다. 

골목들과 대로들의 저 미궁속에서 어느날 드니즈 쿠드뢰즈와 나는 서로 만났던 것이다. 거대한 전기 당구대 위에서 때떄로 서로 마주쳐 부딪치기도 하는 수천수만 개의 작은 당구공들처럼 파리 시내에서 오가는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따라가는 저도정들 가운데서 서로 마주치는 도정들. 그런데 그것으로부터 이제는 아무것도, 심지어는 하나의 반딧불이 지나가면서 남기는 저 가느다란 빛의 줄무늬조차도 남은 것이 없는 것이었다. 156

그러나 소설은 그렇게 천진하게 옛이야기를 하며 웃을 수있는 종류의 이야기가 아니다. 전쟁은 일상을 삼켰고 불안과 망명과 도피와 같은 불안 속에 삶을 던져버렸고, 망명귀족이든 라틴 아메리카에서 온 이민자이든 속이고, 숨고, 쫓기고, 도망 속에 가둔다. 잃어버린 것은 기억 뿐만이 아니다. 흔적조차 없이 사라질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삼켜버린 전쟁은 포화가 없어도 이미 상실을 의미할 뿐이다. 

이 도시 안에서, 발걸음을 서둘러 걷고 있는 그 모든 그림자 같은 사람들 속에서 우리가 서로 길을 잃은 채 헤매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190

내가 그날 저녁에 지미 혹은 패드로, 스테른 혹은 맥케부아 중 어느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는지 지금은 기억하지 못한다. 191

찾은 기억은 온전히 나의 것일까. 잘못된 판단으로 눈덮인 알프스 숲 속에서 길을 잃고 사라져갔을 연인들. 그 기억이 역사의 전부라고 해도, 기억을 잃지 않았다면 무엇을 잃지 않았으며, 무엇을 남겨놓았을까. 어쩌면 그의 기억은 힘겨운 현실을 외면하고자 스스로 지워버린 것일까. 그리하여 기억이 없이 아무것도 아닌 채로 살아가는 일이 유일하게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조건이었던 건 아닐까.

우리는 점차로 눈에 띄지 않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누가 알겠는가? 우리는 어쩌면 마침내 증발해버릴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창유리를 뒤덮고 있는 저 수증기, 손으로 지울 수도 없을 만큼 끈질긴 저 증기에 불과한 존재가 될지도 몰랐다.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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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의 공식 - 우리의 관계, 미래, 사랑까지 수량화하는 알고리즘의 세계
루크 도멜 지음, 노승영 옮김 / 반니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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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리즘은 컴퓨터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말한다. 물론 컴퓨터는 인간이 만들었기 때문에 알고리즘은 인간이 컴퓨터에게 지시한 대로 문제를 해결한다.  애초에 컴퓨터가 만들어진 이유는 인간이 하기엔 단순하고 까다롭고 지루한 업무를 자동으로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무어의 법칙대로 저장용량이 커지고 성능이 발달한 오늘날 알고리즘은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되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일 뿐만 아니라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인간만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고유의 가치에까지 깊숙히 치고 들어와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튜링은 컴퓨터가 인간을 자신이 컴퓨터가 아닌 인간이라고 속일 수 있으면 컴퓨터에게 지능이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튜링테스트가 시작된지 64년 만에 유진이라는 기계가 인간을 속여 스스로 지능을 가진 컴퓨터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역사는 새로 씌여졌다. 이제 더이상이 튜링 대회는 없다. 더 이상 기계가 인간 심사위원에게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사람과 경쟁할 필요가 없다. 컴퓨터 체스 플레이어가 한 번 이긴 후로 이제 체스  챔피언은 인간이 아닌 기계라는 사실이 굳어진 것처럼, 미국의 유명 퀴즈 대회 제퍼디의 우승자가 인간을 한 번 누르자 이제 제퍼디의 우승자는 사람이 아닌 컴퓨터라는 사실이 굳어진 것처럼, 컴퓨터가 인간처럼 대화한다는 사실을  더는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십년전의 기술과 십년전의 안목으로 무인 자동차는 요원한 기술이었다. 인간이 가진 무한한 인지 기능과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순간적 판단 기능을 컴퓨터로 구현한다는 것은 무모할만큼 복잡한 것이었다. 이제 구글의 무인 자동차는 50만킬로미터 이상을 사고 없이 달렸다.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책을 읽다보면 비슷한 주제가 연결된 책을 비슷한 시기에 읽게 되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우연에 의한 자기 암시 효과일 것 같은데.  얼마전에 김중혁의 메이드인 공장을 읽고,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적인 공장견학기가 사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들로 가득 채워지는 공장이라기보다는 미래사회처럼 기계가 모든 것을 주도하고 공장 내 사람들은 그 기계의 속도에 맞춰 보조적인 일을 하거나 관리 차원에서 드문드문 서있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책 바로 전 읽은 니콜라스 카의 <유리감옥>는 이러한 디지털 시대의 자동화 기술이 인간 사회의 미치는 영향에 대해 사회적인 관점에서 기술한 책이다.  지금 읽은 <만물의 공식>은 디지털 시대를 움직이는 알고리즘 즉 만물의 공식이 어떻게 세상을 움직이며 바꾸어나가고 있는지를 매우 실제적인 사례를 제시하며 생동감있게 재현해낸다. 그런 면에서 지적이면서도 흥미로운 책으로, <유리감옥>에서 강조한 자동화 기술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탐색한다. <메이드인 공장>이 실제로 공장을 탐방해 보고 그 그 모습을 스케치했다면  <유리감옥>은 자동화된 공장의 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이고 철학적인 탐구가 이루어지고,  <만물의 공식>에서는 니콜라스 카가 <유리감옥>에서 제기하는 디지털시대의 매우 구체적인 사례들이 철학적 사고 위 매우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된다. <유리감옥>이 개념적이고 이론적인 결론은 향해서 사물과 현상을 분석적으로 대하는 것과 달리 만물의 공식에서는 어떤 주제를 선택하고 그 주제와 관련된 여러 분야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 주목하여 일일이 그 실례들을  철학적으로 도덕적으로 가치관의 변화와 관련지어 탐구한다. 


여기서 이야기 하는 것들은 주로 미국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지만 우리에게 알게 모르게 다가와서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린 알고리즘에 대한 것들이다.  예를 들어 범죄 예방 시스템에 기록된 알고리즘이 공항 검색대를 통과할때 오류로 선량한 이용자를 테러범으로 인식하는 일 같은 것들 말이다. 실제로 나 역시 알지 못하는 이유로 공항의 검색대에서 한참을 붙들려 있다가 다른 방으로 옮겨져서 영문도 모르는 채 세세한 질문 공세에 답하며 오랜 시달렸던 기억이 있는데 마약 밀매 사건에 연루된 사람을 찾기 위해 짜여진 알고리즘의 타겟이었는지 아니면 인상착의가 비슷한 테러범을 안면인식 카메라가 잡아낸 것인지 그냥 랜덤으로 지목한 묻지마 검문 같은 거였는지 당시로서나 지금으로서나 아무 단서도 없다. 다만 이제 다 끝났으니 가봐도 된다라는 말을 듣고 휴 한숨을 쉬고 나오던 순간 들었던 오싹함, 그 알지 못할 블랙박스가 인간에게는 아무 것도 가르쳐주지 않고 프로그램되어 있는 대로 처리하는 결과에 대해 어떤 피해자가 발생해도 그 누구도 책임지는 않는 살벌한 긴장감은 트라우마처럼 기억에 남았다.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미래의 범죄자를 완벽하게 예측하는 알고리즘을 이용해 잠재적 범죄자를 모두 잡아 가두는 방법으로 범죄율 제로라는 완벽한 사회에 도전한다. 위대한 과학 소설은 섬뜩하리만큼 우리의 현실이 미래를 향해 가는 방향과 닮아있다.


매사추세츠주의 한 운전자는 갑자기 운전 면허가 취소되어 오랫동안 곤혹을 치렀는데 이것은 살인에 연루된 다른 운전자를 찾는 과정에서 안면인식 알고리즘이 잘못 식별해낸 결과로 인해 차량등록국에서 자동으로 보낸 통보였고, 더 기가 막힌 것은 이러한 실수가 벌어졌을 때 혐의를 받는 것은 운전자 본인의 책임이라며 대중을 보호하는 유익이 소수가 부당한 혐의를 받는 불편함보다 중요하다는 차량등록국의 주장이다. 이러한 공리주의 원칙은 소수의 피해자를 대책없이 만든다. 매주 1500명 가량의 공항 여행객이 테러 범으로 오인되고 한 조종사는 한 해에 80 번이나 데이터 대조 오류로 구금되었다. 이것은 예산삭감으로 인력이 감축되면서 자동화된 시스템이 단순한 관리 도구에서 주요 의사결정권자로 탈바꿈하는 현상을  설명해주는 지극히 일부의 예이다.  니콜라스 카의 <유리감옥>에서 지적한 이러한 자동화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자본주의적 효율성을 빙자한 인간 말살이라는 주제와 맞닿아 있다.


우리는 알고리즘이 객관적이라고 생각해서 신뢰하지만 그 알고리즘을 만드는 것은 사실 인간이므로 온갖 편견과 관점이 알고리즘에 스며 들 수 있어요. 대디엘 시트런 본문 재인용 185


한 흑인 박사는 구글 검색창 결과 옆에 '체포된 적이 있나요'라는 광고문구를 보고 놀랐다. 흑인에게 흔한 이름을 체포 기록 광고와 연결함으로써 무심결에 인종주의적 편견을 드러낸 구글의 검색광고 알고리즘의 예이다.


만물의 공식이 적용되는 예는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생활 곳곳에 파고 들어 있다. 이미 빅데이터와 판단 알고리즘을 통한 온라인 맞춤형광고 및 맞춤형 뉴스는 생활의 일부가 되었고 의사와 변호사 등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던 전문가의 두뇌를 대신하여 더 많은 데이터로 더빠르게 전문가가 해내던 일들을 대신해가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하모니와 같은 차별적 매치메이커들은 파트너 선택의 바닷속에서 가장 자신의 이상형에 가까운 파트너를 물을 길어올리듯 끊임없이 건져올릴 수 있으며 이제 섹스와 사랑도 알고리즘과 나누는 시대로 향해가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한다. 기계는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 아직까지도 굳게 믿어지고 있는 예술영역에서도 가차없이 그 진가를 발휘한다. 영화, 회화, 미술평론, 문학평론,영화 분석, 자동작곡 등이 방대한 데이터베이스와 빠른 분석력을 토대로 정확하게 예술 속에 내재된 수량화가능한 특성들을 수집하여 고도로 정확하게 분석하고 창조한다.


이 모든 것의 이면에는 질적 분석을 수량적으로 계량하기 위한 단계를 프로그램 단계에서 인위적 콜렉션을 통해 이루어지고 취향의 표준화라는 오싹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근심이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문제가 해결되는 과정은 블랙박스 상태로 그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컴퓨터가 맺어준 파트너가 나의 어떤 면과 상대방의 어떤 면을 고려해서 맺어준 것인지 왜 어떤 사람은 매번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기가 힘든 건지.. 그런 것들을 결정하는 만물의 갱식 속에는 어떤 한 인간의 취향과 편견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고 앞으로 이런 기계 중심의 삶은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라는 사실이 더욱 근심을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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