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파괴 - 기존 시장을 뒤엎고 고객을 유혹하는 혁신 전략
제임스 매퀴비 지음, 김상현 옮김, 손재권 감수 / 문예출판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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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큰 기업이 혁신이 어려운 이유는 조직의 우두 머리들이 혁신을 인지하기에는 너무 많은 제약이 되는 개인적 경험과 규칙 몸에 배어 있는 관료적 사고 방식 때문일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컴퓨터와 인터넷에 노출된 디지털 원주민 첫 세대들은 이미 20세가 넘었고, 언제 어느 곳에서든 접속 가능한 유비쿼터스 스마트폰 원주민들도 학교를 들어갔다. 이들이 만들어가는 새로운 문화와 소비는 그들을 매개로 하여 점차 던져진 돌이 물에  생기는 동심원처럼 둥근 파동을 따라 또래 집단을 넘고 공간을 넘어 멀리 멀리 퍼진다. 새로운 세대들이 만드는 변화는 때로 상상도 못해본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 생활과 일상 곳곳에 스며들어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사고와 행동마저도 바꾸어 놓지만 그 빠른 변화들 틈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한 생존 경쟁의 위기에 빠진 기업의 혁신이라는 주제 앞에서는 대책없이 속수 무책인 경우가 많다. 


중국에 밀려 다 스러져 가는 것처럼 보이는 미국에 아직 희망이 남아 있다면 그것 중 하나는 아마도 디지털 플랫폼일 것이다. 우선 플랫폼이라는 말을 풀이하기에 앞서 잠시 삼천포에 빠져보면, IT나 최근 기술 동향에 관련된 책이나 기사에서 유독 무분별한 전문용어를 남용하는 경우가 많다. 일반인들을 상대로 하는 뉴스와 신문 잡지 기사도 일반인들에게는 어리둥절한 용어들을 그토록 특권인양 많이 사용하는데 하물며 IT 관련 책들은 오죽할까만 플랫폼이라는 말은 사실 기반 이라고 번역하기에는 한참 부족한 광범위한 의미들을 담고 있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에서는 대개 윈도우나 안드로이드 같은 운영체제라는 뜻도 가지지만 실제로는 매우 광범위하게 그러니까 우리가 기차역에서 남녀가 눈물로 헤어지는 그 플랫폼과 어느정도 통하는 기술의 플랫폼으로서 많이 쓰인다. 어떤 열차 회사에서 공공 기차역을 만들고 플랫폼을 자사의 비싼 KTX 승객들만 이용하도록 할 수도 있지만, 완전히 개방하여 그동네를 지나가는 모든 화물열차와 다른 회사의 완행 열차들의 승객들도 이용할 수 있도록 공공장소로서 개방할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으므로 열차 회사들끼리는 치열하게 경쟁하고, 또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게 되므로 역 주변의 상권도 커지고 플랫폼이 가졌다는 사실만으로도 무한한 발전과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전자의 경우 비싸게 돈을 받고 일부 승객들만 이용할 수는 있지만 경쟁이 없는 곳에는 언제나 쇠락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플랫폼이란 그런 것이다. 


디지털 플랫폼은 기업과 고객을 연결시켜주는 무형의 기반으로 디지털 파괴라고 이름지어진 혁신을 가능하게 해준다. 우리 휴대폰에 기본으로 탑재된 안드로이드와 페이스북 플랫폼, 유튜브 등이 우리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플랫폼으로서 동작한다. 그런데 이러한 디지털 플랫폼은 대부분 공짜이거나, 거의 공짜이고, 앞으로도 이러한 플랫폼의 개방송은 더욱 빠르게 산업의 흐름을 바꾸어놓을 전망이다. 거대 기업들이 플랫폼을 개방하는 이유는 디지털 파괴자를 더욱 많이 끌어들여 플랫폼의 범위와 영향력을 배가시키기 때문이다.  이 점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휴대폰을 팔아온 삼성이 잘 하지 못하는 점이고 앞으로도 삼성의 미래가 방금 전의 해(year) 처럼 그리 밝지만은 않다는 점을 알려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도, 애플도 깨닫고 실천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내부에서도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매체에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마이크로소프트는 닌텐도의 위(Wii)와 비슷한 게임기를 만들어 마우스나 조이스틱 같은 거 없이 직접 몸으로 테니스를 치는 흉내를 내거나 말 안장에 앉아 말을 모는 것처럼 몸으로 게임을 하는 엑스박스360용 모션 인식 카메라인 키넥트를 팔기 시작했는데, 일주일도 채 안돼 그 모션 인식 장치와 연동해서 각종 게임을 일반 개발자들이 공짜로 가져다가 개발할 수 있는 도구인 오픈 소스 키넥트 드라이버라는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일이 생기자,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이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고리타분한 변호사들과 임원들이 성급하게 기자회견을 하고 으르렁 거렸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자 이를 홀라당 뒤집어 언제든 누구라도 키넥트와 연동하는 게임 개발을 위해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을 거라고 발표하는 일이 있었다. 


대개 디지털 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책들은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이끌어가고 있는 신기술동향에 관련된 책들이 많다. 그런데 신기술이라는 것은 혁신적인 사업과 연관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혁신 경영에 관련된 서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약간의 공통분모는 있지만 내가 기대했던 것은 와이어드 편집장인 크리스 앤더슨이 쓰는 <메이커스><롱테일 경제학> 류나 <빅데이터가 만드는 세상> 같이 새로운 기술들이 선도하고 바뀌어 가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이 책은 비슷하지만 한끝 차이로 경영서에 더 가깝다. 그러니까 어떤 마인드로 누구를 타겟으로 삼았냐를 문제삼는다면 이 책은 삼성과 같은 대기업의 임원들과 정책 결정권자들의 시선으로 읽을 때 더욱 흥미를 불러 일으키는 책이다. 


여기서 말하는 디지털 파괴란 파괴적 혁신을 가르킨다. 간단히 말하면 공짜 수단을 이용하고 거의 아무런 투자 없이 즉각적인 제공하는 피드백을 활용하여 적은 자본으로 시작할 수 있는 사업 기회가 많아짐에 따라 세계는 이미 무한 경쟁에 돌입했으며, 어떤 면에서 보면 능력있는 개인에게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있기도 하지만 관료적 체계의 거대 기업들에게는 언제 어떻게 추락할 지 모르는 아찔한 위협이 도사리고 있음을 강조하고, 따라서 대기업은 변화를 수용하고 새로운 디지털 원주민들이 만들어 내는 세대들 소비의 바람을 잘 포착해서 변혁을 통해 살아남아야 한다는 취지로 쓰여진 책이다. 


국내 대표적 인터넷 서점들도 대조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SNS와 연동하거나 pinterest와 같은 개념을 적극 받아들여 새로운 세대들의 순간적 소통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계속 변화하고 있는 서점이 있고, 아직도 구태의연한 방법으로 출판사 직원의 추천수 조작을 통한 노출을 눈감고 느린 속도로 변화를 수용하고 있는 서점이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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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증, 당신도 치료될 수 있다 - 수면제 없이 좋은 잠을 자는 방법 '인지행동치료'라면
신홍범 지음 / 소라주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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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캐쉬백>이라는 영화가 있다. 2006년 쯤 봤는데, 갑자기 생각났다. 애인한테 차인 이후로 잠을 잘 수 없는 남자는 슈퍼마켓의 야간 시프트로 일한다. 잠잘 수 없어 남겨진 시간을 슈퍼마켓의 매장에서 돈으로 바꾼다고 해서 캐쉬백이다. 모든 사람이 다 잠든 그 시간, 잠자라고 있는 어둠의 시간 동안 깨어있어야 하는 야간 매장. 그 속에서 남자는 시간을 얼린다. 정지시킨 시간 속에서 여자의 전라를 상상하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린다. 매혹적인 영화였는데, 허접스런 차림으로 나온 여자 주인공이 처음에는 별볼일 없어보였는데, 남자가 그 여자를 알아가는 과정, 사랑을 하게 되는 과정속에서 관객인 나도 여자가 점점 예뻐보이는 경험을 했다. 잠못이르는 시간동안에 쌓아가는 사랑. 얼마나 달콤한가. 그러나 현실은 영화가 아니다. 진화가 만들어놓은 질서에 반항하는 일은 언제나 댓가가 필요하다. 남들 잘 때 안잤을 때, 못잤을 때의 댓가는 혼자밖에는 알지 못하는 것이어서 고독하다. 


이 책은 잠못드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병적으로 잠못자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Part1에 그 예가 나와있다. 100쪽에 달하는 잠못들지 못하는 사람들의 상담 내용이다. 여러가지 이유로 잠못드는 사람들이 의사에게 호소하는 내용이 그대로 실렸다. 불면증은 원인도 다양하다. 심지어 불면증이 아닌데도 불면증이라고 우기는 병도 있는데, 그것도 엄연히 수면장애의 일종으로 치료가 필요하단다. 어떤 글은 어이없고, 어떤 글은 넋두리에 가깝다. 잠을 못자는 이유를 설명하는데, 사는 얘기 남편 얘기까지 다 나온다. 젊었을 때 바람피고 돈도 안갖다줘서 힘들게했던 남편이 '어느 때부터 남편이 여자 때문에 더 이상 속 썩이는 일이 없어 한편으론 서글픈 마음도 덜더라'는 얘기 '이 양반도 이제 늙었구나 싶어서' 또, 이런 저런 사는 얘기까지 모조리 실었다. 웃기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했다. 잠을 자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걱정이 많다는 것과도 같은 말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였을까.


심각한 불면증은 아니지만, 나 역시 쉽게 잠드는 편은 아니라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까 해서 읽어보니, 모든 증상, 모든 습관 딱딱 들어맞는다. 만일 당신이 점쟁이나 철학관을 운영한다면, 예를 들어, 잠을 못잔다 라고 한다면 이렇게 말하면 쪽집개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 밥맛이 없죠. 자려고 생각하면 더 잠이 안오죠? 평소 근육이 여기저기 아프죠? 머리가 아프죠? 평소 피로감, 어지럼증이 있죠? 기억력이 떨어지죠? 손발이 차죠? 이게 다 수면 부족이 원인으로 생기거나 직간접으로 영향을 받는 증상들이다. 


섬유근육통증후군은 만성불면증에 동반되는 질환 중 하나다. 불면증이 있는 사람은 평소에도 몸에 힘이들어가 있다. 어제 밤에 이 책을 읽으면서 보니, 누워서도 발가락에도 어깨에도 허리에도 잔뜩 힘을 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심한 사람이 그렇다고 한다. 근육이 수축되어 있으면 피가 통하지 않고 노폐물이 쌓이고 근육에 탈이난다. 두통도 마찬가지인데, 긴장성 두통은 뒷목 위 두피 아래 근육의 긴장으로 생기고 어깨 근육과도 모두 연결되어 있어서 두통과 연결된다. 턱이나 목 주위의 통증도 모두 수축과 관계있다. 


잠이 부족하면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은 상식이지만, 이것이 우울증과도 관계있는 이유는 수면이 부족했을 때 기분좋은 경험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 반면, 기분 나쁜 경험은 별 차이 없이 기억한다는 연구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꿈꾸는 수면인 렘수면동안 감정을 정화시키는 작업을 하는데, 이런 일을 하지 못해서 우울증이 발생한다고 한다. 노인들에게는 수면부족이 알츠하이머와도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불면증과 관련된 스트레스가 코티졸을 만들어내고 이것이 뇌세포 중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를 파괴한다. 특히 알츠하이머는 베타-아밀로이드라는 독성물질이 뇌 속에 쌓이면서 뇌세포가 파괴되어 기능을 잃어가는 병인데, 잠을 충분히 자면 베타-아밀로이드가 제거되는 속도가 더 빠를 뿐만 아니라, 베타-아밀로이드가 축적되는 것 자체가 수면의 질을 떨어뜨리고 이로 인해 수면 각성을 조절하는 뇌중추의 역할이 떨어지는 물고 무는 사태가 발생한다고 한다. 


이 책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약물의 사용을 자제하라는 것과 인지행동치료를 통해서 불면증을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어떤 종류의 약이든, 한약이든 민간요법이든 수면제 효과가 있는 항히스타민제나 감기약이든 수면제 의존은 수면제 중독을 부른다. 수면에는 1단계, 2단계, 3단계 수면이 있는데, 수면제로는 가장 깊고 질이 좋은 3단계 수면을 취하기 어렵고 2단계에 머물기 때문에 그냥 잠처럼 생긴 가짜잠을 자는 것이라고 한다. 수면제는 아니지만 외국에서는 건강보조식품으로 나와있는 멜라토닌 정제 이야기는 귀가 솔깃했다. 보통 청소년들은 멜라토닌 분비 시간대가 늦어 올빼미같이 못자고 아침에 못일어나는 경향이 있는데, 청소년기를 석기시대에 보낸 나도 멜라토닌 분비가 늦게 이루어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건강보조식품 승인이 안나서, 의사한테 가서 처방전받으면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이걸 먹으면 수면 시간에 관여하는 멜라토닌 분비가 일시적으로 인위적으로 많아져서 잠자는 시간을 끌어당길 수 있다고 한다. 수면제는 특히 수면무호흡증이 있는 사람들에게 치명적이라고 한다. 수면제 복용시 뇌의 호흡중추도 억제되기 때문에, 호흡하려는 노력을 못하게 되고, 이로 인해 혈압도 높아지고 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수면제 대신 불면증의 치료로 가장 효과를 보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인지행동치료로, 기본적으로는 내원해서 잠을 자면서 수면검사를 통해 정확한 진단과 의사와 병원의 지시에 따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겠지만, 이 책에서도 몇가지 기본적인 사항들이 소개되어 있다. 잠을 자기 위해서는 


1. 시계를 멀리한다. 수시로 시간을 확인하며 잠을 못자는 사실에 연연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2. 커피와 같은 카페인의 섭취를 줄인다. 각성물질은 체내에 10~12시간까지 걸리기 때문에, 낮에 마신 커피가 체내에 남아 수면을 방해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3. 침실은 어둡고 조용하게 습도는 50%, 온도는 22도 정도로 낮게 유지.

4. 베개의 높이는 6~8m,  똑바로 누워서 수면

5. 침상에서 책을 읽거나 TV같은 걸 보지 말고, 침대는 잠을 자는 곳이라는 인식을 뇌에게 각인시킨다. 15분 이상 잠이 안오면 밖으로 나오고, 딴일을 보다가 잠이오면 들어가서 누워있고, 다시 또 15분 이상 잠이 안오면 다시 밖으로 나오는 방법으로 침상과 생활을 분리한다. 스마트폰도 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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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뇌 인류 성공의 비밀
매튜 D. 리버먼 지음, 최호영 옮김 / 시공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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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껏해야 내가 읽은 행동 심리학과 인지 과학 관련 서적은 이것 저것 모든 쟝르를 다 합쳐도 열 손가락으로 싫컷 꼽고도 남을 갯수인데. 유독 이 분야는 읽는 책마다 중복되는 내용이 있다. 고릿적에 읽은 설득의 심리학을 비롯한 자기계발 서적에서 시작해 기초 인문서까지 광범위하게 가져다 쓰는 흔하디 흔한 행동 심리 실험들 말이다. 이 책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없다. 마쉬멜로 테스트, 눈동자 감시 테스트, 동전 던지기 테스트 등 흥미롭지만 또 당연하기도 한 결과를 보여준 잘 알려진 고전적 행동 심리 실험들에 관해 언급하지 않으면 맥락이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그러나. 소스가 한정되었다는 말이 시사하는 바는 그만큼 알려진 게 없다는 소리 아닐까. 사람의 마음을 알기 위해 이런 저런 실험 방법이 고안되었는데, 어떤 건 우리의 직관과 맞아떨어지고 어떤 건 뜻밖의 결과를 내기도 한다. 결과가 어찌되었건 수십년전, 떄로는 100여년전부터 실험한 내용들이 계속해서 변주되어 실험되고, 그 변주를 설명하기 위해 모든 새 책들이 처음부터 중복적으로 다시 설명하고 해야 하는 그런 것들이 늘어나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 마음과 우리 행동을 뇌과학과 연결시키려는 시도가 너무나도 보잘것 없다는 말이 아닐까.


이런 질문을 먼저 해보자. 친구는 왜 필요할까. 밥을 먹여주지도 옷을 입혀주지도 않지만(이건 예외, 만날 때마다 옷이나 장갑 같은 걸 사주는 친구가 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사회적 관계를 형성한다. 목적없는 관계, 단지 이해하고, 대화하고, 공감하는 정신적 만족을 주기 위해 친구를 만드는 일이 인류 진화에 꼭 필요한 일이었나. 자기계발서들의 책 제목을 살펴보다 보면, 마치 저축을 하듯 사람들과의 친분을 쌓고 유지시키는 일이 개인의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책들도 있고 보면, 학창시절 쓸모있는 친구를 두면 잘 정리된 필기노트를 빌릴 수도 있고 직장생활중엔 업무적 이해 관계 때문에 우호적인 사회적 관계를 맺는 것이 대체로 유리하기는 하다. 이렇게 필요할 때 이용할 수 있도록 되도록 넓고 가식적인 관계를 형성 유지하는 것이 현대인의 덕목이 되기도 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그런 종류의 친분이라 하더라도 약간의 틈새를 타고, 공감과 이해의 교환이 이루어지면서 좋든 싫든 인간적 관계를 이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런 조작적 인간관계의 바깥에 누구에게나 이해관계에서 벗어난, 아무 쓸모없어 보이는 관계의 범주에 속하는 '친구'들이 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그 무엇에도 도움이 안된다면 왜 어떻게 그런 것들을 계속 유지하도록 진화되어 왔을까. 


특히 네게, 친구를 정의할 때, 친구란 뭘 받기보다는 뭘 주고싶으면 그 사람이 대체로 친구다. 어째서일까. 진화학적 설명은 집단 협업과 잘 조정된 협력 체계는 인류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좋다. 협업, 그러나 그런 이기적 이유는 앞서 말한 이기적 이유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게 전부라면, 오늘날의 댓가가 필요 없는 '친구'는 우연의 산물일까. 우리의 뇌는 사회적 유대관계에 대한 위협이나 손상을 경험할 때 신체적 고통에 반응할 때와 비슷하게 반응한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거부당했을 때 고통을 경험한다. 책애 나온 뇌과학적 설명은 이렇다. 많은 걸 설명하지만 사회적 관계와 관련된 뇌과학적 접근 중 가장 직접적인 내용이다. 


배측전대상피질은 고통이 '괴롭다'는 것에 관여한다. 체감각피질은 몸의 어느 곳이 얼만큼 고통스러운지를 감각한다. 치료 목적으로 배측전대상피질 절제술을 받은 우울증/만성통증 환자는 정확히 어느 곳이 얼만큼 통증이 있는지는 알지만(왜, 체감각피질에서 그것을 감각하니까), 그것이 성가시지도 괴롭지도 않다. 아프다는 감각은 느끼지만 그게 괴롭지 않다는 게 말이나 되나.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반대의 케이스가 있다. 체감각피질을 일부러 절제할 수는 없지만 뇌졸증 환자들 중에서 그 부분이 손상된 환자들을 관찰할 수 있다. 이들은 불행하게도 자극이 있는 부위가 어디인지 얼만큼 어떤 느낌으로 고통스러운지 모르지만, 물리적 고통이 수반될 때 느끼는 그 불쾌함을 고스란히 갖는다. 이렇게 고통에 대해 반응하는 두 부분의 뇌 배측전대상피질은 사회적 고통에 대해서도 똑같이 활성화되었다. 즉, 신체적고통, 정신적고립 완전히 다른 두 종류의 경험에 대해 배측전대상피질의 활동이 활발해 졌다. 반대의 경우 VLPP(우반구 복외측 전전두피질)은 고통과 고립을 동시에 억제한다. 어쨌든 신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립은 똑같은 뇌 작용을 한다. 여기까지가 이 책의 주장이다. 그럴까. 정말 그럴까. 고립을 느낄 때 아픈 마음과 꼬집혔을 때 아픈 마음이 똑같을까. 감기 같은 거에 걸려 많이 아플 때 생기는 우울감이 정신적 고립과 같은 걸까.


이 책은 사회적 관계에 대한 뇌의 작용을 설명하기 위해 인간 본성의 여러가지 측면과 심리학적 성취들을 환기시킨다. 그러기 위해 첫번째로 다루는 부분은 심리화 체계이다. 심리화 체계는 배내측전전두피질(DMPFC)와 측두두정접합(TP)의 부분이고, 심리화 작업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 부분은 매일 접하는 많은 정보를 걸러내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정보를 선별하는데 관여하는데, 의식적 노력이 수반되어야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생명이 없는 도형들이 움직이는 동영상을 의인화시킬 때 주로 활성화되는 곳이 이곳이다. 


거울뉴런체계는 측전두/측두정 부위의 영역으로 '땅콩을 집는 것'과 '땅콩집는 행동을 단순히 보는 것'을 똑같이 반영하는 뇌영역들로, 행동과 지각이 서로 다른 영역에서 처리되는 것이라 믿었던 기존의 학설을 뒤집는 곳이다. 경두개자극(TMS)는 뇌의 일정 부분의 영역을 사실상 잠시 멈추게 하는 기법으로, 이 방법으로 거울뉴런체계를 비활성화시켰을때, 피험자들은 다른 사람을 모방하는 데 더 많은 실수를 저질렀으며, 모방을 통해 새로운 행동을 학습할 때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믿어진다.그래서, 거울뉴런체계에 대한 저자의 결론은 뭐냐하면, 첫번째로 모방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 두번째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때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자기인식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자기를 보는 것과 자기를 아는 것. 자기 관찰과 자기 인식 사이에는 구분이 있는데, 몇몇 동물도 거울을 통한 자기 신체의 인식에는 성공한다. 그러나 자신의 정신적 자아를 성찰하는 능력은 인간만이 가졌다. 몸과 마음을 따로 보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현대에는 과학적으로 틀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우리뇌는 몸과 마음을 분리해서 세계를 바라본다는 점을 설명한다. 신경계에는 자신의 마음에 대해 생각하는 체계와 신체를 인식하는 체계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얼마나 알까. 추상적 질문이지만 이 질문을 구체적으로 실험한 예가 흥미롭다. 여러 버전의 담배 광고를 본 피험자들은 자기들이 가장 효과적일 거라고 응답한 광고에 대해 실은 자신의 뇌도 거기에 동의했는지 알지 못한다. 내측전전두피질이라는 곳이 가장 활성화게 일어난 때에 본 광고가 실제로는 광고의 효과가 가장 크게 일어났다. 이 내측전전두피질은 주위사람들의 가치와 신념이 동화되는 작용이 일어나기도 하는 곳이다. 


뇌 우반구 복외측전전두피질은 여러종류의 자제력을 발휘할 때 일관되게 활성화된다. 자기의식이란 한편으로는 우리의 충동적 자기와 그 충동적 자아를 다른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할지에 대한 우리의 상상 사이에 이루어지는 대화(조지 허버트미드와 찰스 쿨리. 재인용 p347)다. 사회가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을 상기함으로써 그에 맞게 우리 자신을 통제하게 되는 고도의 사회적 과정이다. 실험에 의하면, 거울로 자신을 볼 때 사람들은 부정 행위에 대한 충동을  억제했고 자신의 얼굴 사진을 볼 때 가장 일관되게 활성화되는 부위는 우반구 복위측 전전두피질이며, 이것이 설명하는 것은 스스로를 본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머릿속에 떠올리고 자기 억제와 사회적 규범에 대한 사회적 규범에 대한 순응행동에 관여하는 뇌 부위를 활성화한다는 것이다. 


느낌을 말로 표현하거나 단순히 명명할 수만 있어도 감정은 쉽게 조절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세상을 이해하면 세상을 설명할 수 있으면, 세상과 화해되는 것이다. 자신을 설명할 수 있다면 자신의 감정을 명명할 수 있다면 자신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거미 공포증이 있는 환자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거미에 노출한 뒤 정서를 말하는 방법으로 치료했을 경우 효과가 가장 높은 사례를 보여준다. 이것은 암묵적 자기 통제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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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 아시아 문학선 10
쿠쉬완트 싱 지음, 황보석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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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추니, 어지자지 모두 남자와 여자 두 특성을 모두 가진 인간을 말하는 듯하다. 어디서 들어본 듯 한 단어이기도 하지만, 제대로 뜻을 알게 된 건 이 책에서다. 이렇게 입에 찰싹 달라붙는, 번역가능한 한국어가 있다는 건  우리나라에도 그런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많이 있엇다는 소리일거다.  잘은 모르지만, 남성의 성기와 여성의 성기 모두를 가지고 있거나 둘 다 없거나고, 수염도 나다 말고, 가슴도 나오다 말고, 허리와 엉덩이의 모양도 짤록 볼록한, 남녀 모든 특성을 가진 사람. 이런 사람에 대한 실제 생각보다 꽤 많다는 사실을 얼마 전 <이상한 나라의 브렌다>를 통해 알았는데, 현대에 와서야 유전자 검사를 해보면 정확히 타고난 유전적 성을 알 수 있겠지만 성기의 모양이 워낙 변형적으로 생겨서 겉으로는 구분이 어렵다고 한다. 


이 소설의 화자가 주기적으로 만나고 인연을 맺고 살아가는 여자도 바그마티라고 불리우는 남녀추니이다. 인도에 남녀추니들은 가족에게서도 버려지고, 집단을 형성하면서 윤락과 같은 행위를 하면서 먹고 살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여성쪽에 가까우면 여자 창녀를, 남자 쪽에 가까우면 여자들의 남편이자 기둥서방같은 역할을 하면서 돈을 뜯어내며 먹고 사는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화자의 시선에서 본 바그마티, 참 독특하다. 남자를 주인님 주인님하면서 부르며 존중하는 것 같지만, 이 남자에게 무슨 헌신적이거나 정신적 애착을 크게 갖고 있는 않아서 여기 저기 다니면서 계속 윤락행위를 하다가 아무때나 자기가 원하면 방문하고, 이런 저런 요구를 하고 섹스의 댓가로 돈을 받아가면서도, 남자에게 여자가 있는 걸 알면 질투도 하고 그런다. 그렇다고 해서 남자가 무슨 동성애적인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여자 저 여자 치마만 두르면 섹스할 궁리나 하는 호색한인데, 자신의 눈에는 곰보에 시커멓게 못생기고 입냄새를 풍기고 다니는 여자도 아닌 남녀추니를 평생 티격태격 의지하며 사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남녀추니를 주요 인물로 부각시킨 이유는 꽤나 상징적이다. 남녀추니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다. 또한 남자이면서도 여자인 사람이다. 그들은 그러나 사회적으로는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도 도둑이나 강도짓을 하지 않고 나름대로 자기가 가진 노동력을 팔아 받은 정당한 댓가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직접적인 윤락행위는 불법이지만 수요와 공급이 지배하는 자본의 논리로 생각해볼 때, 여자게에 유일한 생계 수단이 섹스의 제공 밖에 없다면  순수한 노동적 행위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속성인 것이다. 그러니 창녀들에게 손가락질 하면서 한 때는 돌로 쳐서 죽이고 마녀 사냥을 해서 화형을 시키곤 하면서 천시하면서도 그리 장구한 세월동안 어느 세계에서나 다양한 이름으로 존재해온 것이 아닌가. 하렘 얘기도 많이 나오는데 소설 속에서는 그들이 알라를 외치고 코란을 섬긴다고 해서 여자를 인격적으로 존중한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하렘에서 어린 나이에 팔려와 수십명의 여자들이 한 남자의 노예가 되어 섬기는 대신 잘 곳과 밥과 옷을 얻어먹는 일이 창녀들보다 더 나은 건 그들 사회 내에서 공개적으로 비난받을 일이 없을 사회적 제도권 내에 놓여 있다는 것 뿐일 것이다. 


글이 샜다. 남녀추니가 남과 여로 구분된 세계에서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것처럼, 우리의 세계에는 양분된 두 개의 선택 중 이것도 저것도 아닌 채로 살아가야 할 때가 있다. 수십년간 우리 민족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이념논쟁에서도 중도에 서면 자주 양쪽 모두에서 비난의 화살을 받는다. 우파건 좌파건 그들의 선택에 가장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것은 그들의 안위일 때가 많다. 그래서 때로 뭐야 좌파야 우파야 라는 질문을 받는 대신 그들은 한쪽을 선택해서 줄을 선다. 그건 좋다.어차피 이념이란 게. 가장 순수한 인간조차도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으니까. 이런 저런 쪽으로 나뉘고 이쪽 저쪽으로 쏠리는 건 당연한 본성이다. 그런데 태어나길 애초부터 한쪽 소속으로 태어났는데 먹고 살려니 저쪽 행세를 해야할 때가 있다. 남녀추니 바그마티는 중성이어서 수염도 나고 목소리도 걸걸하지만 몸을 팔려니 스스로를 여자로 만들었다. 주인공 또한 1970~80년대쯤을 살아가고 있는 인도산 시크교도 독신 남성이지만, 영국에서 공부한 것인지 세련된 영국식 영어를 구사하는 덕에 어디를 가나 외국인 대접을 받는다. 그는 나름 인테리로서 신문에 컬럼 기고를 하고 고위층의 가족들이 오면 델리 가이드를 해주면서 먹고 사는데, 여자가 '하찮은' 인도 가이드로 보곤 무시하다가 세련된 영국 억양으로 말하는 자신의 말 한마디에 태도가 급변하는 것을 알고 즐기는 종류의 남자다. 그의 이야기는 별로 없다. 양념처럼 쬘끔 쬘끔 600년 역사를 담고 있는 전체 소설 속에서 현재의 델리를   환기시키는 장치일 뿐이다. 그의 눈에 들어온 델리의 풍경. 그리고 전체 소설이 담고 있는 델리의 역사.


그것이 델리다. 삶이 너무 힘겨워질 때면 니감보드 가트 화정터로 가서 죽은 자가 불길에 휩싸이는 것을 지켜보고 그 가족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며 한 시간을 보내기만 하면 된다.  그런 다음에는 집으로 돌아와 위스키를 두어잔 털어넣는다. 델리에서는 죽음과 술이 인생을 살 만하게 해준다. 


진짜 이야기는 긴 시대를 훑어 올라오며 세기 세기마다 다채로운 시각으로 다루어진 소설 속의 개별 스토리들이다. 방대한 세월에 걸친 델리의 역사가 여러 이야기를 품은 하나의 소설 속에 녹아 있는 것이다. 끊임 없는 침략과 도륙과 포악하고 잔인한 학정과 반목의 그 장구한  시간이 다양한 각도로 조망되는 동안 화자는 짧막 짧막한 현재의 델리 남녀추니와의 사랑 아닌 사랑을 기반으로 한 현재의 삶을 때로 천박하고 때로 엉뚱하게 때로 슬프지만 때로 당황스러울 만큼 직접적인 성행위의 묘사와 욕지기들로 이루어진 델리에서의 생활을 담는다. 


역사는 누구의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같은 줄기라도 완전히 달라진다. 작가가 델리를 희화하해서 보는 방법은 웃기면서도 슬프다.  여러 세기의 여러 이야기들 화자의 관점은 대량 학살을 역사 속 황제, 술탄에서부터 불가촉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그 역사의 곳곳에서 평범한 인도인으로서 운명에 순응하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한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남녀추니와 비슷한 존재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불의의 편에 서고, (우리가 생각하는) 불의의 편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통치자들이 자신의 민족을 학살할 때,통치자의 녹을 먹으며 그를 돕고, 영국의 통치하에서 자신들이 섬겨왔던 황제의 군대와 맞설 용병을 모집하는 댓가로 뉴델리 신도시 건설의 수혜를 받아 부자가 되거나 그런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역사를 바라보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들여다본 이야기 속의 삶은 우리가 이해하는 대의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삶과 가치에 있는 것이다. 


이 책 한 권을 읽기 위해 다른 책들을 읽는 걸 포기했다. 600에 가까운 페이지에 문단이 자주 바뀌지 않는 탓에 밀도가 높은 책이다. 때로 한권의 책이 열권의 다른 책보다 더 많은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한다. 오래도록 읽었지만, 다 읽고도 책이 쉽게 책장으로 들어가지지 않는다. 앞부분을 읽을 때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넘어갔던 부분들이 뒷부분을 읽으면서 다시 읽고 싶어졌고 책에 나오는 델리의 거리, 황궁과 회교사원들, 이야기속의 배경을 일일히 사진으로라도 찾아보게 된다. 세계사를 공부하는 중이라면 설령 12세기부터 이민족의 침략과 대량 학살에 진이 빠지고 회교도, 시크교도, 힌두교도들이 서로를 죽이고 나라를 떼어가고 그렇게 뒤엉켜 피범벅 진창에 빠져 살아온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얼마나 힘겹게 역사가 흘러갔으며  민족의 정체성이 지켜졌으며, 또 어떻게 문화와 문화가 섞이어 들었는지에 대한 이해를 개개인의 삶과 그 삶의 배경이 되는 역사 속 디테일한 사건들을 통해 지금까지 읽었던 역사책들과는 아주 매우 다른 종류의 방식으로 접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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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국가 - 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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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와서 그 때의 심경을 옮겨본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속담처럼, 아이들의 죽음이 일부는 정치가의 꼴같지 않은 시로, 일부는 절제없이 뿜어대는 감정 소비의 형태로, 아이들의 죽음을 그렇게 추모라는 이름으로 함부로 부르고, 함부로 해석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아이들을 그곳에 그렇게 가라앉게 내버려두었어도. 그걸 그렇게 했어도. 그 다음은 최소한 그러면 안되는 거잖아. 울어도 혼자 울어야지. 왜 우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고, 왜 백일장이 열린 것처러 앞다투어 전시하듯 함부로 탄식의 말을 쏟아내는 시를 써서 나르고, 한마디씩 보태며 이목을 끌고 소비하느냐고. 나는 무엇에 화를 내고 있었던걸까. 결국은 우리가 손가락질하고 욕을 퍼부으며 날려보낸 불신의 화살끝이 향한 곳은 바로 우리 자신의 심장이었다. 이 책이 나왔을 때도 '흥 얍삭빠른 출판사라니' 했다가, 수익금이 유족에게 돌아간다는 말을 보고 나서는 바로 애먼 작가들에게 의혹의 시선을 보냈다. 이 책에 글을 쓴 작가들은 작가들대로, 문학동네 소속이면서도 이 책에 글 한꼭지 채우지 않은 작가들은 그들대로. 아이들의 죽음에 어떤 개인적 반사이익을 챙기진 않았을까. 반대로 평소 존경하던 다른 유명 작가들은 왜 책이 이렇게 얇아지도록 한꼭지 더 올리지 않았을까. 혹시라도 정권을 의식했을까. 사건을 이용하려는 정치가들이 만들어 덫을 의식하고 함구하기로 한건가. 


 우리 사회가 우리 스스로에게 보내는 의심과 원망의 화살은 이렇게 서로를 향하다가 결국은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그 때. 세월호 아이들은 군집명사였다. 한명 한명의 아이들은 개별적으로 인격체를 갖추고 한 가정의 부모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이들이었지만, 학교라는 제도권 아래 한꺼번에 경쟁의 칼끝에 겨누인채, 웃고 떠들고 나누러 나가는 여행길조차 개별 인간으로서가 아닌 군집명사가 되어 스러졌다. 아무도 움직이지 못하도록 지시받고, 뭉처서 하나처럼 취급받은 집단명사였다. 배가 가라앉는 그 무서운 시간에 단체로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에 따라야 했던, 개별적인 저항없이 똑.같.이 따라야 했던, 그래서 함께 동시에 바다 밑으로 가라 앉은 아이들은 집단적인 희생 뒤에서 무언가를 황홀하게 취하게 될 보이지 않는 어떤 인간들에 의해 군집명사가 되었다. 부모와 친척이 아닌 이상 우리는 그 군집 명사를 향해 오랫동안 눈물을 흘리고 또 흘릴 망정, 누구도 한 명씩 그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다. 우리들은 그들의 집단 떼죽음만을 알 뿐, 그 한명 한명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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