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지] 스티븐 킹 신작도서! 『닥터슬립』서평단을 모집합니다.

안녕하세요. 황금가지 입니다 :)


36년 만에 출간된 『샤이닝』의 후속작,

뉴욕타임스 종합 베스트셀러 1위.


 

 



전 세계 3억 독자를 둔 세계적인 이야기의 제왕 스티븐 킹의 최신작!

스티븐 킹 신간도서『닥터슬립(Doctor Sleep) 서평단을 모집합니다.

(어서와 황금가지 온라인 서점 서평단은 처음이지..?!!)



▶ 도서소개 


광기 어린 아버지의 폭력에서 살아남은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공포가 아닌 치유를 보여주는 작품, 『닥터 슬립』 출간!


스탠리 큐브릭 감독, 잭 니콜슨 주연의 동명 영화로도 잘 알려진 소설 『샤이닝』의 후속작으로서, 36년 만에 출간된 속편 『닥터 슬립』(전2권). 이 작품은 출간 즉시 뉴욕타임스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등극하고, 브람 스토커 상 최고 작품상을 수상하며 화제가 되었다. 


『샤이닝』에서 살아남은 소년 대니가 중년이 된 후를 그리는 『닥터 슬립』은 기존의 '공포'에서 탈피하여 초능력을 가진 소녀와 그녀를 죽여 영생의 기운을 받으려는 괴집단과의 쫓고 쫓기는 스릴을 담는 한편, 알코올 중독자로 인생의 끝에 섰던 주인공이 자신의 삶을 회복하는 과정을 담고 있어 재미와 감동을 함께 준다. 


『시녀 이야기』의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는 『닥터 슬립』에 대해 "스티븐 킹의 여러 걸작에서 드러난 장점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며 극찬하면서, 이 작품은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며, 이는 너대니얼 호손과 에드거 앨런 포에서부터 이어진 미국 호러 문학의 본질이라고 평했다.



 

 

 


 


▶ 줄거리


어린시절 오버룩 호텔에서 겪은 악몽의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해 댄(대니)은 작은 마을에서 호스피스 일을 한다. 그의 특별한 능력 '샤이닝'은 임종을 앞둔 이들이 편안하게 눈감도록 인도해 주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닥터 슬립'이라 불리운다. 그러던 어느날 오래 전부터 그의 주변을 맴돌던 한 소녀가 모습을 드러내며, 도움을 요청한다. 


전국을 떠돌며 샤이닝을 가진 어린 아이를 고문하고 죽여 거기서 나온 기력을 먹고 사는 괴집단 '트루 낫'이 다음 목표로 소녀를 선택한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강력한 샤이닝을 가진 소녀의 목숨과 영혼을 구하기 위해 댄은 초능력자 집단인 '트루 낫'과 생존을 위한 전쟁에 나서게 된다. 



▶ 『닥터슬립』서평단 모집 상세내용


하나, 해당 페이지를 자신의 블로그에 스크랩 한 뒤 읽고 싶은 이유를

간단하고 성실하게 댓글로 작성하여 스크랩 링크와 함께 남겨주면 응모가 완료됩니다.


둘, 응모 기간은 2014년 07월 16일(수)~2014년 07월 20일(일) 5일간 입니다.


셋,추첨 인원은 10명입니다.


넷, 당첨자 발표일은 2014년 07월 21일 (월) 오후 입니다.


다섯, 서평기간은 2014.07.24(목)~08.03(일) 10일간입니다. 

        

마지막, 당첨자 분들은 서평을 작성 한 후 『닥터슬립』 서평단 발표 페이지에

온라인 서점 블로그와 개인 블로그에 남기신 서평 링크를 댓글로 달아주시면 됩니다.

(도서는 닥터슬립 1,2권 모두 발송 됩니다)

 


- 서평단 지원자가 모집 인원에 미달할 시,

출판사의 의도에 따라 일부 인원만 선정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해당 기간 안에 작성하지 않을 시에 다음 서평 모집 시 불이익이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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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목가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7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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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친구의 아들은 왜 다들 똑똑하고 잘생기고 공부도 운동도 잘하고 효자고 자상하고 부드럽고 능력있고 모든 여자들이 다 좋아하는 걸까. 왜긴. 엄마 친구 아들이라서다. 여기서 엄마 친구는 엄마의 어떤 친구가 아니라 엄마의 모든 친구들의 교집합이다. 그런 남자, 엄마가 매일 자기 아들과 비교하는 그런 남자가, 단일한 인격체로는 별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희귀한 종들을 엄친아라고 한다. 또 순정만화에서 튀어나올 것 같이 길쭉하게 생겨서 부드러운 머리결을 바람에 휘날리며 상콤한 미소를 보내는 남자들을 만튀남 혹은 순튀남이라고도 한다. 이건 만화니까. 어쨌거나. 그런 남자들은 없다. 있다 해도 우리가 아는 건 그의 일부일 뿐. 스위디는 그런 존재였다. 실제로는 존재할 것 같지 않은 온동네 모든 소녀들, 친구, 동생의 친구, 학부모들과 선생님들, 그리고 동네를 넘어 도시의 모든 사람들까지 숭배하는, 강인하고 자신감이 넘치고 능력이 있으면서 부모에게는 복종하고 절대로 거만하지 않고, 유대인이라는 낡은 가치에는 도전했던, 이상적인 소년이었다. 훤칠한 키, 금발, 뛰어난 운동신경, 완벽한 빚어진 근육으로 뉴어크의 팬들에게 승리감을 안겨주는 스포츠 스타. 친절하고 상냥하고 부드럽고 균일한 성격과 인내심. 순혈의 북구 피를 가진 사람처럼 금발을 가진 잘생긴 소년 스위디는 미국 이민자들이 4대에 걸쳐 어메리칸 드림을 향해 이룬 과정의 거의 끝인 1960년대 완성품이었다. 그리고 그의 딸 메리는 2천년동안 받아온 박해의 최종 장소인 홀로코스트를 피해 바다 건너 미국으로 온 선조들이 4대에 걸쳐 피와 땀과 민족적 자부심으로 이루어낸 낸 성취를 성년이 되기도 전에 가장 반미국적이고, 폭력적이고, 비타협적이고, 혐오받을 방식으로 박살내었다. 딸 메리로 인해 완벽하고 흠없는 인생이 저 밑바닥 끝모를 나락으로 어지는 과정, 그게 소설의 전체 내용이다. 
 
나는 여기서 스위디의 딸 메리가 극렬 베트남 반전 운동가로서 폭파범이 되어 서서히 스위디와 그의 가족을 파멸로 이끄는 과정보다, 소설의 프레임 구조에 숨긴 수수께끼가 궁금했다. 필립 로스는 자신의 분신, 저크맨이라는 1인칭 화자를 통해 스위디의 이야기를 완성시킨다. 왜 작품 속 나는 스위디가 아니라 저크맨일까. 게다가 저크맨이 스위디의 이야기를 쓰게 되는 동기와 그에게 스위디라는 한 인물의 인물을 회상하는 묘사는 상세하다. 소설가로서 성공한 나 저크맨은 유대 이민자의 후손으로 가난하고 페쇄된 커뮤니티 내에 살았던 경험 속에서 스위디와 그의 동생 제리와의 기억을 떠올리고, 동창회에서는 고등학교 시절의 온갖 친구들을 만나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수다들을 끝도 없이 묘사한다. 참으로 지루하다. 거기서 그는 스위디의 동생을 만나, 스위디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우연하게도, 저크맨은 바로 두 달 전 스위디의 요청으로 수십년만에 그를 만났다. 그는 스위디가 실은 죽기 전 소설가인 자신에게 무엇인가 할 남길 사연이 있었음을 깨닫고 그의 인생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 워웨이크의 영웅 스위디에 대한 기억은 소설가로서의 어떤 허구의 인물을 창조하고자 하는 창작자로서의 욕망보다 자신이 아는 스위디의 삶을 재현해보고자 하는 인간적인 욕구에 더 이끌리게 한다. 그러나 스위디는 이미 죽었다. 그는 스위디의 진짜 이야기를 쓸 수가 없다. 자신이 아는 것은 독단적이고 냉혹한 성격의 그의 동생 제리를 동창회에서 우연히 만나 전해 들은 짧은 미완의 이야기가 전부이다. 자신의 형을 몰락시킨 주위 사람들에 대한 독설을 토대로, 저크맨은 상상한다. 엄친아, 우리의 영웅 스위디는 어떻게 몰락해갔을까. 

 

그래서 스위디의 이야기는 로스의 소설이 아니라, 로스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나, 저크맨의 소설이다. 그는 수십년만의 짧은 만남에서 얻은 아주 작은 단서들과 제리가 알려준 비극적 결말을 실에 꿰어 스토리를 써나간다. 이 때부터 우리는 나 저크맨의 상상 속에서 완성되어 가는 허구 속의 스위디와, 그 스위디라는 인물이 상징하는 미국적 가치 체계 속에서 나오는 주변 인물의 생각을 만난다. 제리가 전해 준 메리라는 인물이 저크맨을 통해 스위디의 머리 속에서 실패와 독선과 폭력 증오의 화신인 딸이 되어 그녀의 이기적인 아내와 이루어 살아간 '목가적' 삶을 만난다. 저크맨은 스위디가 되어 글을 썼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알고 있는 인물은 스위디 뿐이다. 그를 추적할 수 있는 것은 그를 통과한 시간과 공간이라는 역사적 배경 뿐이다. 그래서 실은 스위디를 이해하지 못한다. 스위디를 이해하고 싶다. 스위디의 삶을 좀 더 추적해서 그의 전기를 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로스가 로스 자신과 스위디 사이에 나 라는 저크맨을 화자로 등장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이 소설이 특히, 제리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최대한 스위디의 인생에 가깝게 쓰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나는 한 번에 여섯, 여덟, 때로는 열 시간씩 스위드 생각을 하고, 내 고독과 그의 고독을 바꾸어보고, 나와 전혀 닮지 않은 이 사람 안에서 살아보고, 그의 안으로 사라져보고, 낮이나 밤이나 겉으로는 텅 비고 순수하고 단순한 것처럼 보이는 이 사람을 측정해보려고, 그의 붕괴의 도표를 그려보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를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만들어 보기도 했다. 중략. 나는 제리에게 원고를 보내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몯고 싶은 아마추어같은 충동을 느꼈다. 121

 

 

로스는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답해야 하는 역사적 문제 의식에 대한 질문에 대답을 회피하고 싶었다. 전쟁의 광기와 폭력과 혼돈의 시대 속 매리라는 인물을 스스로 규정하고 싶지 않았다. 왜 그건 독자들의 몫이니까. 이미 자유라는 이름의 최고 가치가 미국인이라는 자부심과 정체성을 형성한 후에야 자신들의 과거인 이 소설을 읽게 되었으니까. 메리는 스위드의 동생 제리의 눈에, 1960년대 미국의 반항적이고 병적인 광기와 이미 실패한 혁명이란 이름의 모든 폭력적 운동을 상징한다. 우리는 메리를 모른다. 스위디가 상상한 메리의 생각이 있을 뿐이다. 저크맨은 스위디가 메리를 몰이해하는 방식으로 무너져내리게 묘사했기 때문에 독자는 스위디가 바라보는 만큼, 저크맨이 상상한 것만큼 밖에 메리를 알 길이 없다. 첫번째 프레임 내에서 오로지 메리를 보았고, 말을 해본 사람은 냉정하고 비판적인 제리 뿐이다. 그 아이는  어쩌면 착한 아이였을 수도 있다. 자신의 부가 어떤 착취를 통해서 왔는지 자신의 나라가 자유 라는 이름의 오지랍으로 어떻게 베트남 민족을 분열시키고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고 있는지를 설명할 수 없는 미국인을 자신과 스위디 사이에 끼워 넣었다.  '로스 ≠ 저크맨  ≠ 스위디'의 공식은 그런 것이다. 이게 나의 생각이다. 

 

 저크맨이 스위디에 대해 가진 환상은 컸지만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아주 작은 단서로 미국의 1960년대 역사적 배경 속에서 창조해 내야 했다. 폭파범은 혁명 전사의 또다른 이름이었다. 미국은 독립과 평화를 원하는 베트남 민간인을 향해 끝도 없는 공습을 퍼부었고, 매리는 '폭력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세상에, 미국 사람 모두에게 알리기 위해 16세의 어린 나이에 폭파범이 되어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것을 보는 시각은 제리가 악마라고 규정한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수밖에 없다. 제리의 시선을 저크맨에게 주입시키기 위해 그 길고 상세하고 쓸모없어 보이는 고등학교 동창회가 길어졌다. 저크맨의 상상이 빚어낸, 외향적으로는 긍정적이고 평화적이고, 이타적이고 강인한 미국적 가치와 이상적으로 부합되는  스위디를 미국과 동일시하고, 이기적이고, 폭력적이고 부정적인 그의 딸 메리를 반미국적으로 대치시켰다. 그리고 그것이 로스의 생각과 어떤 이견이 있는지 어떤 일치가 있는지를 밝히지 않기 위해, 자신이 한 발 더 물러서기 위해 저크맨이라는 인물을 드러내고 자신은 그 뒤에 철저하게 숨었을 것이다.  

 

로스의 알레고리는 미국 = 스위디다. 강인하고 긍정적이고 이타적인 그의 뒤에 숨은 것들. 보이지 않는 것들. 깨닫지 못할 것들. 영원히 알지 못할 것들이다. 그들이 흑인 노동자를 착취한 것이 아니라 '구해' 주고 베풀어 주었다는 근본적이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다. 자신들이 선하다고 믿는 그 해맑은 미국적 정신이다. 선한 자신들이 과거 인디안에게 그랬듯 흑인 노예들에게 그랬듯 지금 앞으로도 계속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쭈욱 모른 채 선한 얼굴로 남게 될 미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이 비로 스위디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감추고 떨쳐내 온 미국 사회의 어두운 폭력과 광기로 대변되는 매리의 삶은 그래서 스위디의 기억과 상상으로만 재생된다. 그 재생이 로스의 손을 떠나 제리를 거쳐 스위디의 머리속으로  탄생되는 몇겹의 이중장치를 통해 실상은, 메리의 진짜 마음속, 메리가 품은 이상에 절대로 근처에도 갈 수 없다는 것과 그 잔인한 폭력의 이면에 갇힌 진짜 문제들을 덮고 있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감추는 것이다. 

 

필립로스는 인물의 생각을 끝도 없이 파고, 파고 또 파서 생각하는 것의 디테일의 끝판을 보여준다. 가죽공장과 장갑을 만드는 공정, 지리적 위치, 대화의 상세한 기술과 묘사는 대단하다 대단하다가 결국 질리기에 이른다. 필립 로스의 소설은 잠시 이제 여기서 고만 보자. 최근 들어서만 <포트노이드의 불평>과 <에브리맨>까지 읽었다. 더 늙어서 쓴 에브리맨에서 작가로서의 원숙의 끝을 보이지만, 포트노이드의 불평은 젊지 않으면 결코 이를 수 없는 위트를, 미국의 목가는 또 그가 그 나이가 아니면 이룰 수 없는 소설적 완벽함을 보여주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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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평점 :
품절


 

썼다가 지운다. 다시 썼다가 다시 지운다. 그렇게 일주일이 열흘이 지났다. 격앙된 목소리로 그날의 기록에서 받은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쏟아내었다.. 지운다. 슬픈 얼굴로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글자들을 화면위에 늘어뜨렸다.. 지운다. 눈물로 울음을 울지 못한다. 그동안 흘렀던 눈물과 똑같은 눈물을 흘릴 수는 없다. 그동안 쌓았던 을분과 똑같은 을분을 터뜨릴 수는 없다. 이것은 소소한 감정의 소비로 마무리할 수 있는 종류의 진실이 아니다. 울면 안된다. 가족과 싸웠다고, 몸이 아프다고, 저녁 어스름이 감성을 건드린다고 흘렸던 것과 똑같은 물리적 성분으로 구성된 액체를 흘려 내림으로 해서 잠시 머물렀다가 떠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고통이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마주해야 할 진실은.

 

1980년 광주, 5.18은 '고립'의 또다른 이름이었다. '은폐'의 또다른 이름이었다.  아직 끝나지 않닸다. 죽은 사람들의 영혼은 아직 우리 곁을 떠나지 못해 아른아른 우리들 삶의 틈새로 흘러다니고 죽지 않은 사람들은 방사능 피폭처럼과 유전자들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와 시간이 갈수록 더욱 더 잔인하게 세포들을 태운다. 죽었거나 살았거나 그 총검 앞에 학살.고문.폭력.살인.능욕과 같은 가장 잔인한 언어들은 무기력하다. 그 어떤 언어도 참담했던 기억 앞에서는 무능하게 스크린과 지면을 채울 뿐 희생자를 가둔 가장 깊은 곳의 진실은 여전히 희생자들의 몫이다. 이 책에서 다시 깨닫는 그 날 광주의 실상은, 25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아픔, 이들의 고립, 저들의 은폐, 저들의 폭력이 희생자들에게는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방가능 피폭처럼 몸속의 유전자와 시간이 함께 파멸해가는 것이어서, 영원히 치유되지 않고, 계속되는 고통이고, 순간순간의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시간과 함께 켜켜히 산처럼 쌓여 점점 더 무겁게 짓누르는 것이 곧 삶이 되어 버리는, 우리가 한 때 외면하고, 오해하고, 은폐했던 가장 잔인한 역사의 한 장이다.

 

그 열흘간의 고립이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날의 폭력과, 그 날의 학살과 도륙의 잔인성이 아니다. 그 날의 피와 멍, 찢기고 찔리고 총에 맞아 헤집어진 내장과 머리통과 썩어가는 시체 냄새와 함께 있었던 16세 한 소년의, 16세 나이의 순진하고 맑은 영혼이 삶과 죽음이 공유하는 두렵고 냄새 역겨운 현장 속에서 맞설 수 있었던 고결함의 원천이 어디에서 나왔는지에 관한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소년은 알지 못했다. 단지 소년의 친구, 그 시간 죽어 원혼이 되었을 정대가 먼저 죽었다. 함께 대열에 있던 정대가 총소리와 함께 무너졌을 때 함깨 잡고 있았던 손을 놓쳤고, 공포의 순간이 스쳐간 후 친구의 죽음을 외면했다는 자책감이 소년을 그렇게 했다. 소년은 마르크스의 혁명 전사도 정의의 수호 천사도 아니었다. 왜 태극기로 주검을 덮는지가 궁금했던 한 소년이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지 궁금했던 소년이 은숙 누나에게 들은 대답,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고, 그들은 나라가 아니라는 궁색한 대답을 듣고 혼란스러운만큼 딱 그만큼밖에 역사도, 민족도, 자유도, 민주도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소년이었다. 엄마가 찾아와 회유해도 끝까지 도청을 떠나지 않게 했던 소년의, 가슴에 총탄이 박힌 채 다른 소년들과 함께 가지런히 한꺼번에 주검이 되어 도청바닥에 누워있던 사진 한 장 속에 남겨져야 했던 그 소년의, 죽음에 대한 공포와 맞설 만한 고결함의 원천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아마도 지극히 인간적이고 상식적인,  그들이 소년인 나를, 죄없는 나를, 죽이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는 죽음의 공포를 충분히 인지할 수 있는 16세 아이였다.  소의 눈망울처럼 순진한 16세 아이의 눈에 비친 도륙과 학살의 현장에서 그토록 순수하고 단순하게 맞서게 했던 것의 실체가 '불의에 맞서는'이라는 말로 설명되어 질 수 있는 단순한 것이었을까.

 

책을 읽고 꽤 시간이 흘렀다. 책을 덮고 일주일이 지나도록 한 글자도 적지 못했다. 다른 책도 또 다른 책을 읽었어도 아무 것도 적지 못했다. 적는다는 것의 의미, 생각한다는 것의 한계, 공감하고, 간접경험을 하고, 깨닫고, 알게 되고 책 속의 글자를 통해 하는 정신적 행위가 차고 단단한 벽에 부딪치는 느낌이었다. 모르는 사실을 알았던 것도 아니고, 예상 외의 잔인함에 치를 떨었던 것도 아니고, 어쩌면 사진으로 다큐로 다른 종류의 문자로 자주 접했던 내용이었지만, 그 때마다 엄숙하고 숭고한 무엇이 내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조용히 반추하게 했지만, 공포에 맞선 양심적 선택이 역사적 순간을 외면하고자 하는 내적 이기적 자아를 이길 수 있을까. 소용없다.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그럼 지금 무얼 할 수 있느냐는 것은 또다른 선택이다.

 

광주가 고립되어 있는 동안, 내가 살던 도시와 대부분의 다른 도시에서는 폭도들이 총을 탈취해 도시를 불태우고 체계를 전복하려 해서 진압되었다는 소식이 뉴스로 나왔다고 했고, 나는 그것을 알지도 못했거나 혹은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해와 달이 엄청나게 많이 바뀌어 광주와 인연이 닿아 살게 되어 처음 찾은 5.18 묘역에서 17세, 18세의 비석을 보았을 때의 먹먹함은 대학 시절 이후 시청각 자료로 접했던 무참했던 사진과 동영상과 글들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이 곳 사람들에게 그 날의 기억에 대해 조심스레 물어보았을 때, 사람들은 그 깜깜했던 5월의 밤을 기억했다. 여학생의 목소리를 기억해 냈다. 2007년 여름 흥행돌풍을 몰고 왔던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김요원이 맡았던 여학생의 목소리다. 그 목소리는 까만 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모르던 광주 시민에게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되는 목소리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극중 김요원이, 영화 속 결혼식장 모두 웃고 있는 단체 사진 속 유일하게 어둡고 무표정한 모습의 김요원이 그 모든 사람들 중 유일한 생존자였다는 사실 외에, 그 다음 일에 대해 영화는 말할 기회를 잃었다. <소년이 온다>에는 그 다음 이야기가 있다. 차라리 죽음이 더 편했을 그 다음 이야기, 인간으로서 어느 처할 수 있는 어떤 종류의 고문과 맞닥뜨렸는지에 대해 여자로서 더는 치욕적일 수 없을 가학행위를 받고, 그 기억과 공포와 함께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의 구체적이고 상세한 디테일이 여기에 있다.

 

가해자들. 그들을 총으로 쏘고, 그들의 시체를 트럭에 퍼 나르고, 개머리판으로 머리통을 빠개고, 잡혀온 사람들을 온갖 이름의 고문으로 세포의 구석구석 상흔을 남긴 그 가해자들은 그럼 누구일까. 가학적이기로 가장 유명한 실험으로 밀그램의 전기고문 실험과 짐바도르의 스탠퍼드 감옥 실험을 떠올렸다. 인간의 권위에 대응하는 본능을 보여준다는 이 실험은 파시즘과 홀로코스트의 가해자들의 심리를 변호하는 데 쓰였고, 많은 비판을 받았다. 총을 쏜 사람들 중에는 일부러 총구를 하늘로 치켜올려 맞추지 않게 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게 인간의 잔학한 본성을 이해하는 데 무슨 위안이 될까.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날 군인들이 지급받은 탄환이 모두 팔십만발이었다는 것을. 그 때 그 도시의 인구가 사십만이었습니다. 그 도시의 모든 사람들의 몸에 두발씩 죽음을 박아넣을 수 있는 탄환이 지급되었던 겁니다. 117

잔혹함. 부당함. 아니아니 그 말은 너무 남용되어왔다. 나는 울지 않기로 했다. 눈물을 흘리지 않기로 했다 나의 값싼 눈물을 내가 사소한 삶의 불평 불만 때문에 눈 밖으로 짜내었던 똑같은 눈물을.  내가 삶의 무게에 짓눌렸다고 징징거릴때 빼내던 똑같은 눈물을.  내가 지는 석양의 고독함에 홀려 충만한 감성이 불러내는 삶의 원초적 슬픔을 느꼈을때 흘렸던 똑같은 성분의 눈물을.  내가 인간 관계에서 상처 받아 이 세상 나만 혼자라고 느꼈을 때 흐느끼던 똑같은 성분의 눈물을. 그 값싼 눈물을 너 16세 소년의 원혼을 향해 흘리지는 않기로 했다. 너는, 혼이 되어 육체가 없이 내게로 온 너는 그렇게 소비될 수 있는 감정으로 닦아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나는 소소한 일을 가지고 너무 그동안 많이 울었다. 쉽게 소비되고 또 다시 채워지고 했던 나의 눈물이 광주 민주화 운동의 학살 앞에 스러져가 혼이 된 너를 향한 마음과 같은 가치가 될 수 없다. 너의 혼은, 너는 죽어서, 왜 죽었어야 했는지 이유를 알지 못한다.  너는 그래서 이 여름, 나에게로 왔다.  작가를 한강을 통해

 

서정적 예술성을 지향하는 작가가  목적의식을 가진 계몽적 글쓰기를 선택해야만 하는 암울한 시대를 만났을 때  예술성을 버리고 진실을 알리는 일에 경우가 있다. 한강은 예술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역사가 결코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될 진실을 전한다. 김형수는 문학적, 창작적, 작가적 가치관을 확립하는 방법에 대한 강의를 묶은 그의 글에서 '피할 수도 없고 극복할 수도 없는 것을 감당하는 유일한 길은 그것을 삶으로 송두리째 안고 가는 것'이라고 했다. 서럽고 몽환적이면서도 서정적인 시작에서 우리는 16세 소년의 영혼을 맞는다. 대의가 무엇인지나 알았을까. 자신이 무엇을 위해 거기 서 있는지에 대해, 역사의 무엇이었는지, 그가 그 자리에 서고 달리고 앞으로 진전하고 끝내는 친구의 손을 놓치고 총을 맞고 리어커에 십자 모양으로 실리고, 서러운 혼이 되어 더럽혀진 썩어가는 몸들 사이에 붙잡혀 아른아른 거리고 있었던 것의 의미가, 그것이 어떻게 역사를 바꾸어놓았으며, 그 역사의 수혜자들이 자신의 희생을 어떻게 망각해가고 있게 될지 전혀 눈꼽만큼의 아이디어도 없을 그 순박하기 짝이 없는 정대를, 그의 혼을 묘사할 때, 작가는 시인이다. 값싸게 슬퍼하지 않으면서 진정으로 그 소년의 혼, 갑작스레 죽어 다시는 몸이 될 수 없는 혼이 가까스로 썩어가는 자신의 몸으로부터 멀어져, 우리에게로 다가오는 혼을 향해 눈을 감고 바라보고 안고 공유한다. 깊이 공유한다. 

 

경험이다. 짧막한 어린 시절의 기억과, 기록과 역사를 허구라는 형식으로 엮었지만, <화려한 휴가>를 소비하는 형식으로 혹은 다른 역사 소설을 소비하는 형식으로 이 책을 통해 감정을 자극받거나 카타르시스적 슬픔을 배출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소년을, 자꾸 멀어져가는 소년의 원혼을 붙잡아 멀리 보내지 말고, 기억하고, 다짐하고, 계속해서 경험해야 할 것이다.

 

*  EBS의 지식채널 e에서 실려보내준 영상 속에 이 책의 주인공 동호의 실제 이야기가 약간 있어서 링크한다.

 http://youtu.be/uTiIbqqUDA0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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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사자마자 바로 읽어 치우는 것보다 좀 묵혀뒀다 읽어야 깊은 맛이 난다.

집에서 묵혀두는 것도 좋지만, 이미 책방에서 묵은 걸 주문하면 할인이 크다.

도서정가제를 언제 시행하게 될 지는 모르지만, 자주 조바심이 나서.. 요몇달 특가 도서들을 사들인다.

 

오늘은 이런 책... 사고 나니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은 10% 밖에 할인이 아니고, <불안>도 20% 일반 서적과 다름이 없다. 덜렁대기는.. 사실 보통의 책 중 가장 갖고 싶은 것은 <영혼의 박물관>인데 말이다. 왜그랬어.. 

 

밀란 쿤데라의 책은 오래전에 읽었는데 몇년 전부터 다시 읽고 싶어 주문. 개정판 이전 책이라 그런지 50% 할인이다. <생각의 탄생>은 30%.  줄리안 반스가 좀 더 젊은 시절 쓴 책을 읽고 싶어 <10 1/2>을 선택했는데 30% 할인이다.

 

생각해 보니 원래는 장하준 교수의 새 책 소식에, <그들이 말해주지 않는 23가지>를 사려고 카트를 들락거렸는데 엉뚱한 책을 주문했네. <나쁜 사마리아인> 까지 세 권 세트로 살까. 하나만 살까 고민하다가 옆으로 밀어두고 원래 카트에 있던 것 중 고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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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의 신간이 나왔다. 단편집인가보다.



표제작 「신중한 사람」은 ‘신중함’ 때문에 계속 곤경에 빠져 들어가는 사람 Y의 이야기다. 그는 ‘억지와 불합리와 막무가내’로 들끓는 도시를 떠나 은퇴 후의 한적한 전원생활을 꿈꾸는 사람이다. 오랜 시간 공들여 교외에 집을 완성했으나 아내와 딸의 압력에 못 이겨 해외 파견 근무를 거절하지 못해 이웃에게 집 관리를 맡기고 떠나게 된다. 3년간의 타국 생활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보니 애써 가꾼 정원이 엉망이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낯선 사람들이 들어와 살고 있었다. 세입자라고 주장하는 험악한 인상의 사내에게 자신이 집주인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진땀을 흘리는 Y. 하지만 사내는 집을 관리해주겠다던 이웃(장팔식)이 임의로 작성해준 임대 계약서를 내밀며 ‘장팔식에게 따지라’고 막무가내로 버틴다. 이러한 순간 Y는, ‘신중한 사람’이므로, 그렇게 하기로 한다. 심지어 하루에 만 원씩 쳐서 월세를 내고 퀴퀴한 다락방에 기거하며 하루하루 집의 정원을 가꾸고 연못을 고치기에 열심이다. 본질적인 문제 해결은 뒤로한 채 이전의 외형만을 복원하는 데 매진하는 것이 스스로 편하기 때문이다.(출판사 해설글)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작가 컴백.


1961년,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 체제하에 만들어진 흑인 빈민촌 <소웨토>의 콩알만 한 판잣집에서 놈베코가 태어난다. 아버지는 그녀가 수정되자마자(!) 사라졌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마법의 하얀 가루로 잊어 보려던 어머니는 일찍이 세상을 떴다. 다섯 살 때부터 공동변소에서 똥을 치우며 생계를 이어야 했던 놈베코. 그녀는 빈민촌의 여느 주민들처럼 까막눈이었지만 <셈을 할 줄 아는 능력>, 즉 수(數)에 대한 감각과 세상만사를 영리하게 따져 보는 능력만은 타고났다. 문학애호가인 옆집 호색한과 라디오를 통해 글과 말을 깨우친 놈베코는 바깥세상이 너무도 궁금하다. 어느 날 강도에게 습격당해 죽은 호색한의 집에서 수백만 달러 어치의 다이아몬드를 발견한 놈베코는 그 길로 빈민촌을 탈출한다. 요하네스버그쯤 이르러 <백인의 차에 치인 죄>를 범하고 만 놈베코는 죗값을 치르기 위해 이중 철책으로 둘러싸인 비밀 핵무기 연구소에서 청소부로 일하게 된다. 이때만 해도 그녀가 세계의 왕들과, 대통령들과 사귀고 열국(列國)을 벌벌 떨게 하고 또 세계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리라고 상상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비천한 태생이지만 두뇌만은 비범했던 한 여인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종횡무진하는 여정이 재치와 유머가 넘치는 필체로 그려졌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바보들에 대한 요나스 요나손의 풍자가 오달지다! (출판사 제공 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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