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 매뉴얼
제더다이어 베리 지음, 이경아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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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지 않은 세계를 상상으로 창조한 것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영화 <인셉션>에서  천재 소녀가 함께 꾸는 꿈을 위해 실험적으로 설계했던 반으로 접히던 도시다. 아무리 현실적인 사람일라도, 그런 종류의 기발하고 환상적인 장면에 감탄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상상의 세계에서 과학적 파라다임의 벽은 쉽게 사라진다. 중력은 무시되고 시간은 균질성을 잃는다.

 

이 책의 배경은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20세기 초 쯤에서 시간이 멈춘 어떤 도시이다. 이름도 없는 시대도 알 수 없는 이 도시에서 사람들은 몽유병 환자들처럼 꿈 속을 살고, 안개 쌓인 거리는 온통 잿빛이고, 거리엔 매일 비가 내린다. 인셉션의 도시처럼 환상적 신기함이 미로처럼 펼쳐지는 기상천외한 도시가 아니다. 도시의 외향은 비루한 현실적 모습을 감추지 않는다. 그러나 그 현실속에 비현실적 풍경들이 수묵화처럼 펼쳐진다. 탐정 소설의 주인공 언윈이 매일 비에 젖어 질척거리는 양말을 낡은 구두 속에 신고  자전거를 타고 빗속을 출근하는 곳은 고층으로 올라갈 수록 안개에 점점 히미해지는, 거대하고 높은 건물의 '탐정 회사'다. 


영화 <설국열차>처럼 계급과 계급이 철저하게 구분되어 있고,  계급간 대화와 이동, 통신이 차단된 디스토피아적 사회다. 상관과 부하 직원 사이의 개인적 관계가 통제되어 있어서 배달부를 통해 상하층으로 배열된 수직적 계층 구조 사이로 업무가 하달된다. 엘리베이터의 모든 층을 액세스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배달부 뿐이다. 상관이라 하더라도 그 수직 관계에 더 많은 특권이 부여된 것은 아니다. 그저 높은 층에 있고 업무가 아래로 흐를 뿐이다. <설국얼차>와 같이 노골적으로 자본주의적 계급 사회를 빗대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실무자들 사이에서 음성이나 구면을 통해 작업하기 보다는 이메일로 대부분의 일을 처리하는 현대, 현실의 많은 사무실 작업 환경과 크게 다른가.   효율성 내에서 파생된 공상적 조직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 

 

친절한 해설을 기대하고 읽은 책의 마지막 해설 편에서 듀나라는 필명을 가진 평론가는 엄청나게 많은 전문 작가들과 전문 장르들을 언급하며 '이 모든 것이 장르적 패러디다'라고 얘기한다. 난해한 책의 해설까지 난해할 필요가 있을까만 어쨌든, <탐정매뉴얼>은 사건을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단서를 모으고 추리를 한다는 점에서는 추리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배경과 몽환적 공상적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는 환상 혹은 공상 문학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읽기가 어려웠다. 장면과 장면의 연결 관계를 추리해야 했고, 부분 부분은 읽을만 해도, 전체 속에 하나로 연결되는 서사구조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여기 저기서 이야기는 단절되고 단절된 부분들은 한참 뒤에 다시 계속 언급되며 찔끔찔끔 설명된다.  너무 많은 세부사항들이 사건의 단서와 혼동되어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언윈은 꿈을 세세하게 꾸는 사람이다. 꿈 속의 세부 사항, 현실 속의 세부사항이 한첨 뒤의 어느 지점에 가면 하나로 만난다. 그리고 그것을 단서로 알고 읽어 나가다 보면, 또다른 세부 사항이 합체했다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건물의 14층 소속 서기인 언윈에게  갑자기 주어진 탐정 일에는 매뉴얼이 따라온다. 언윈이 읽은 구절 '세부 사항을 단서로 혼돈하지 말아라'라는 부분은 독자에게는 단서로서의 위상을 갖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말장난이다. 독자는 어떻게 세부사항과 단서를 혼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들이 지금 하고 있는 장면이 무엇을 왜 어디에서 하는 것인지를 파악하기도 힘든 판에 말이다. 

 

1/3 쯤 되었을까. 어떤 지점이 지나자 나는 조금씩 이런 몽환적 방식의 서술이 익숙해졌다. 이 소설의 이질적 요소들을 수용하고 나면, 새로운 장르로서 그리고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에 호응하며 처음에 기대했던 추리소설의 형식적 익숙함를 잊고 이 새로운 장르의 소설을 나름대로 즐길 수 있게 된다. 그 이질적 요소란 이런 것들이다. 


꿈과 현실이 모호하다. 작가가 꿈과 현실을 수수께끼처럼 왔다갔다 하는 건 아니고, 꿈은 꿈이다 라고 명시해 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현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현실과의 관계가 모호해지는 것이다. 현실이 꿈을 모방하는가 꿈이 현실을 모방하는가. 현실 속의 사람들은 잠든 채 꿈을 모방하고 꿈 속의 세부사항들은 사건 해결의 단서처럼 의미 심장하다. 이런 것들의 파악이 힘들어서 앞뒤로 책장을 넘겨가며 읽다가 어느 순간, 독자로서의 탐정노릇을 포기하고 나니 흥미로운 요소들이 거기에 별처럼 반짝거린다. 다시 말해, 어릴 때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를 읽거나 <인셉션>같은 영화를 볼 때의 기이함에 촛점을 맞추니, 이 책을 읽는 것에 대한 새로운 눈이 떠졌다.

 

이 소설은 탐정 소설이 아니다. 물론 듀나의 설명처럼 장르적으로 탐정 소설의 형식을 고루고루 갖추었으므로, 장르적 패러디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탐정 소설, 범죄 소설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교묘하게 독자를 혼란에 파뜨리는 작가의 함정을 우회해서 읽는다면 이제까지 읽어온 소설과는 다른 새로운 소설을 읽는다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도 있다. 

 

이 소설이 탐정소설이 아닌 이유 첫번째, 이 소설에서 죽음은 끔찍하지 않다. 살인은 범죄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이다. 끔찍하고 참혹하고 죽음을 묘사하는 방식은 인간의 절망과 욕망을 드러내는 장르 소설의 특성을 가장 잘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죽음은 우스꽝스럽다. 살인 사건의 목격은 마치 코미디의 한 장면 같다. 그 이후에도 총을 쏘고 죽고 죽이는 장면이 등장하지만, 그 죽음들의 무게는 새털처럼 가볍다.죽음이 소설을 끌고 나가는 주요 동력이 되지 못한다면, 그 소설은 범죄 소설, 탐정 소설일까?  두번째로 대개의 장르소설에서처럼, 비밀이 천천히 드러나는 방식은 소설의 긴장감을 계속해서 높여줌으로써 마치 탐정소설과 같은 효과를 주지만, 결국 그 인과관계가 설득력이 없다. 현실적이지 않은 배경속에서 현실적이지 않은 목적들로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얽히고 섥혀 있고, 지나간 사건들의 오류 속에서 현재의 사건들이 발생하지만, 그 인과관계를 밝히기엔 불충분한 심리묘사 불충분한 인물의 성격들로 답답함을 준다. 대신 사건이 진행되며 사건이 설명된다.


그러므로 독자로서 탐정 소설을 읽으면서 으레히 가지게 되는 왜 라는 논리적 필요조건을 포기하고, 엘리스가 동굴에서 만난 많은 기이한 것들처럼 그 기이한 현상들을 즐기면서, 꼬이고 꼬인 사건들이 풀려가는 과정을 읽어가면 된다.  그것이 이 책을 재밌게 읽는 방법이다.

 

이 소설이 유일하게 어떤 하나로 수렴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꿈과 현실 그 모호한 경계에 대한 것이다. 이야기 속에도 장자의 호접몽 이야기가 이야기의 일부로서 나오지만, 이 책은 전체로서 호접몽과 같은 알레고리를 갖는다고 볼 수도 있다. 장자가 꾸었다는 나비의 꿈, 나비가 꾼 장자의 꿈. 거기에 탐정적 형식을 취해 디테일을 가미한 것이라고도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그들은 꿈을 통해 의식을 제어한다.  사건의 발단도 꿈 속에서 있었고, 사건의 해결 역시 꿈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 이상한 탐정 회사의 비밀은 무의식을 수사하는 임무를 맡은 감독관이라는 계급의 존재에 있었다.  그리고 꿈의 탐정이라는 세계가 그려내는 환상적 디테일은 이 소설이 가진 가장 독자적이고도 위대한 영역이다. 컴퓨터도, 스마트 폰도 없이, 어떤 최첨단의 장치도 부재한 약 1950년대 쯤으로 추정되는 애매한 아날로그 시대에, 읽기 전용의 재생 꿈과 같은 개념을  가진 레코드판 주파수가 등장하고, 죽은 자의 의식 속에 들어 있는 단서를 찾아 꿈의 형상을 소리로부터 재생해 내는 모습은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를 열어준다. 의식을 지배하기 위해 꿈 속에 들어가지만, 결국 그 꿈에 갇히고 마는 모습, 누가 누구의 꿈에 있는지 꿈이라고 얘기하는 것들이 사실은 현실이고 현실이라고 얘기하는 것들이 꿈인 것은 아닌지.. 이런 몽상들을 하면서 따라 읽는 <탐정매뉴얼>을 읽는 내내 잠과 꿈과 같은 몽환적 서술 때문인지 자주 잠이 왔고, 실제로 여러 차례 책을 읽다가 잠들게 했지만, 문학은, 예술은 기존의 가치에 저항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가는 성스러운 작업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해준 흥미로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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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드 모파상 - 비곗덩어리 외 6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9
기 드 모파상 지음, 최정수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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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똑같은 사람과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밥을 먹고, 매일 보는 사람들과 함께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일상에 아무 변화가 없다면 인생은 얼마나 지루할까. 권태로운 삶에 변화를 주는 것은 대단한 것들이 아니다. 일상중에 마주치는 작은 일들 속에 예상치 못한 작은 반전이 있기에 우리는 때로 꿈꾸고 소망한다. 


매일 서로를 미워하고 싸우던 부부에게 희망이라면 대단한 게 아니라  단지 그 상태를 벗어나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거다. 그렇지만 그 벗어남, 헤어짐의 뒤에 또 어떤 반전이 숨어 있을 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불안한 미래를 선택하기 보다는 불행한 현재를 유지한다. 결정 뒤에 찾아올 지 모르는 더 끔찍한 반전이 겁나기 때문에, 반전없이 그대로의 삶에 만족할만한 숱한 핑계들을  만들어낸다. 거기에 사랑이 들어설 자리는 없어 보인다. 만일 이별 후에 다시금 서로를 향항 사랑을 발견했다면 로맨틱 문학작품이, 이별 후에 복수를 시작했다면  장르소설이 될까.  대개 소설 속에는 훨씬 더 자극적이거나 로맨틱한 반전이 있다.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야기로서의 삶이 전개되어 나갈 때 우리는 반전이라 부를 수 있다.


모파상의 짧은 단편들을 읽으면 반짝이는 별빛과도 같은 아주 작은 수많은 반전들과 맞닥뜨린다. 그것은 평범한 인간들이라면 상상할 수 없거나, 혹은 윤리적 도덕적 관습적 가치 체계에 맞서는 대단한 반전이나 복수와 같은 것들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의 다양성을 설명해주는 것들이다. 독자는 소설을 읽으며 상상도 못할 대단한 반전이나 혹은 매혹적 문체를 기대한다.  그러나 우리가 주로 접하는 짧은 단편 속에는 반전보다는 대개 어떤 상황이나 주인공의 내면 세계를 통한 주제의식과 더 자주 만난다. 그래서 단편은 자주 이해하기 어렵다. 모파상의 단편은 그렇지 않다. 그가 19세기에 쓴 짧은 단편들은 예측을 조금 벗어나는, 완결된 하나의 이야기들이다. 


그 반전들은 때때로 따스한 결말에 안도감을 준다. <어느 농장 아가씨 이야기>에서 하녀 로즈는  마을 청년 아이를 임신하고 버림받아 고향 유모 집에 맡기고 돌아와 일을 계속 하지만 주인의 청혼으로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숨긴 채 결혼한다. 그러나 그들에겐 6년동안 아이가 없고, 남편은 자식에 대한 욕구로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사이가 나빠지는데 결국 로즈는 폭력을 견디다 못해 그를 떠날 작정으로 혼전 아이가 있다는 비밀을 터뜨린다. 반전은 여기에 있다. 혼전 임신을 거의 범죄 수준으로 비난했던 당시 사회의 불문률을 깨고 남편은 기뻐하며, 왜 그 얘기를 이제야 하느냐며, 우리가 그렇게 기다리던 아이를 데려다 키우자고 제안한다. 세상에는 이런 종류의 따스한 반전도 있는 것이다. 남편에게 중요한 것은 둘 사이에 아이었을 뿐, 그녀의 과거 따위, 아이의 핏줄 따위, 사회적 관습 따위 개의치 않았다. 짧은 단편 속에 퍽이나 긴 스토리가 담겨 있지만, 짧은 문장과 대사와 여백의 세 요소가 짧은 얘기를 길고 오래도록 머물게 한다. 


모파상과 함께 한 덩어리의 연상작용으로 따라다니는 비곗덩어리는 처음 읽었다. 1880년 에밀 졸라를 비롯한 6명의 젊은 작가들이 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취재한 단편집 <메당야화>에 실린 작품이다. 아마도 우리 구세대들에겐 교과서에서 모파상과 함께 짝으로 외운 낯익은 작품이지만, 누가 읽었을지 의문이다. 모파상은 이 뛰어난 작품으로 화려하게 문단 데뷔를 확고히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의 반전은 슬프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도시를 빠져나가기 위해 마차에 함께 탄 숱한 인간 군상들 속에 이질적인 여자 한 명. 그녀는 몸을 팔아 먹고 살던 창녀였고 멸시의 시선을 받지만, 여행 중 배고플 때 음식을 나누고 여관에서 장교의 통행 허가를 받기 위해 장교에게 몸을 바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지는 비련의 여자다. 그러나 정작 이 스토리를 이끄는 작가의 시선은 그녀를 멀찍이서 건조하게 바라볼 뿐 어떤 감정이입도 없다. 그녀가 필요하자 귀족과 부르주아들은 그들의 목적인 통행허가를 얻기 위해 똘똘 뭉쳐 그녀가 희생하기를 은밀히 요구하지만, 막상 그들 뜻대로 떠날 수 있게 되자 이제  떠나는 마차에서 그녀는, 그들을 위기에서 구해준 영웅이 아니라 그들이 경멸하는 매춘부로 다시 돌아와있다. 그것도 마차가 떠나기 직전 아침까지 적군인 프로이센 장교와 몸을 섞은 더러운 여자로 말이다.


그 전에 우리는 시대를 떠나, 생각해 볼만한 또다른 도덕적 딜레마와 마주치게 된다. 여관에 몇일씩 몸이 묶여 장교의 허락 없이는 꼼짝 달싹도 못하게 된 일행에게 필요한 건 장교가 원하는 걸 주는 것이다. 그런데 프로이센 장교는 '고맙게도' 다른 귀족 부인의 몸이 아닌 매춘부의 몸을 원한다. 매춘부는 지독한 모멸감을 느끼고 몸을 허락하지 않고, 일행들도 처음엔 그녀를 이해하는 척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그들의 여정이 언제 다시 이어질 지도 모르는 막막한 상태가 되자 차츰 그녀를 비난하기 시작한다. 어차피 몸을 팔던 창녀에게 장교와의 하룻밤이 무슨 대단한 일일 거냐는 거다. 모두를 위해 그런 일쯤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그들은 작전을 세우고 그녀를 끈질기게 설득한다. 그들의 위선적인 태도는, 그들의 목적이 달성 된 다음 날 태도를 바꾼 후에야 구역질나지만, 그 전에 나는 그들의 말에 어느 정도 설득당했다. 


첫번째 딜레마는 전체를 위해 한명의 희생을 은근히 강요할 수 있는 것이냐에 대한 부분이다. 목숨이 달린 일은 아니지만, 그들의 여행이 계속 지체된다면 그들은 적국 프로이센이 지배한 곳으로 되돌아가야 할 지도 모른다. 만일 목숨이 달려 있었다면 그녀는 더욱 노골적으로 그들에게 이용되었을 지도 모른다. 두번째는 그 희생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일을 전문적으로 해 온 직업적인 여성었을 때 그렇게 대단한 희생이냐는 질문에 대한 것이다.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은 귀족 부인이 아니라 다름아닌 원래 몸을 팔던 사람이다. 어쨌든 그녀는 원치 않았지만, 했고, 함으로 인해서 전체는 도움을 받았지만, 그들 사이에서 자신은 똥덩어리가 되어 버렸다. 


모파상의 단편에는 이런 사소하면서도 중요한 도덕적 딜레마에 많이 부딪힌다. 사랑은 숭고하기만 한 것인가. <의자고치는 여자>는 허망하고 비참한 짝사랑의 비애를 이야기한다. 당시 의자 고치는 직업은 떠돌이 집시와도 같은 것이었던 것 같다.   거지꼴의 집시같은 여자가 자신을 사랑하는 사실에 불쾌해하던 남자 부부는 그 여자가 자신에게 유산을 남기고 죽었다는 말을 듣자 갑작스럽게 태도를 바꿔 그녀가 타던 마차까지도 요구한다. 자신을 원치 않는 상대를 평생 사랑하는 일은 바보짓이다.  사랑이 아름답다고 누가 그러는가. 모파상은 그것을 일찌감치 간파했다. 그의 소설 속 사랑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 간결한 문체 속 사랑은 언제나 날카로운 그의 해학과 만난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소년을 안고 입맞춤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돈을 주었고 그를 기쁘게 하기 위해 부모의 돈까지 훔쳐내고 모았다. 그렇게 해서 가진 순간의 입맞춤 순간의 포옹. 그게 어떤 의미일까.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다. 나쁜 사람을 단죄하는 우화처럼 짧은 이야기는 그 어리석은 사랑이 아무 의미도 없음을, 허무하다는 말 조차도 사치라는 걸 알려주는데, 그걸 직접 알려주는 게 아니라 꼭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알려준다. 서양 문학사를 제대로 잘 모르지만 19세기라면 액자 구조 같은 문학적 구성의 프레임이 일반화되어 있지는 않을 때라고 짐작되지만, 그의 단편 중 거의 대부분은 유사 프레임 구조로 되어 있다. 작가의 시선은 완전히 배제된 채 누군가의 얘기를 전하는 것이다. 


사랑에 대한 단편들은 대체로 그런 종류의 예상치 못한 작은 반전을 품고 있다. <들놀이>는 굉장히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작품이면서 우리의 안방과 극장을 차지하는 비껴 지나가 버린 안타까운 사랑의 전형적 형태를 보여주면서도, 그 건조한 시선의 결말에 이르러서는 서늘한 사랑의 본질을 느끼게 한다. 어느 화창한 봄날 가족과 약혼녀와 함께 들놀이에 나선 여자가 약혼자와 아버지가 잠든 사이 그 날 낮 함께 어울리던 청년과 뱃놀이에 나선다. 그 짧은 뱃놀이 중 둘은 강렬한 사랑의 감정을 품게 되지만 아쉽게 헤어지고 얼마 후 남자는 여자가 그 날 함께왔던 꺼벙한 남자와 결혼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쳐 다시 찾은 그 곳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낸 물놀이를 하던 섬엔 그토록 그리던 그녀가 새 남편과 함께 있다. 예정에도 없이 번개처럼 갑자기 나타난 사랑, 그러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길도 없이 헤어진 후, 서로의 갈 길을 갈 때, 그 작은 추억이 영혼이 되어 버리는 것. 그것은 사랑일까. 아니면 무료한 인생을 가끔 반짝이게 하는 별들일까.


매우 짧은 단편 <봄>의 반전은 참으로 기발하다. 봄날에 대한 찬사와 막 만난 여자와의 사랑의 노래는 마치 아름다은 시처럼 황홀한 사랑을 시처럼 반짝이다가 결혼과 함께 무너지는 경험을 한다.


여자와 함께 하면 인생이 달콤해 질 거라 생각 하지요 그래서 여자와 결혼 합니다 그러고 나면 그 여자는 아침부터 밤까지 우리에게 욕설을 퍼붓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수다를 떨고 중략 석탄 상인과 말싸움을 하고 관리인에게 집안의 내밀 한 일들을 이야기하고 이웃집 하녀에게 침실의 비밀을 모두 털어놓고 거래하는 상점에서 남편을 헐뜯습니다. 그녀의 머릿속은 너무나 어리석은 이야기들로 너무나 바보 같은 믿음들로 너무나 기괴 한 견해들로 너무나 놀라운 편견 들로 가득 차 있어요서 절망스러운 나머지 눈물이 나올 정도랍니다


그의 소설은 전쟁, 사랑 등 다양한 주제로 다가오며, 예상치 못한 결말로 이끈다.  우리의 삶에도 반전이 있다. 반전은 비루한 삶과 일상에 활력을 주고 반전은 소설에서 극적 스토리를 완성시킨다. 우리의 삶에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을 좌우하는 반전을 참 기발한 방법으로 짦막하고, 아름다움 문체로 재현해냈음에도, 그 속에 아무런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고 전달하는 모파상이 왜 고전이 되었는지 이해할만하다. 그의 글에선 권선징악적인 메시지도 없고, 선과 악도 없다. 단지 어리석음이 있을 뿐이다. 겉멋만 요란한 허무주의나 염세주의와는 다르다. 그냥 그대로, 인간의 본성을 가지고 푸욱 이성을 찌른다고나 할까.  아직 좀 더 남았다. 62편의 많은 단편이 실려 있지만 한편 한편 모두 다 너무 좋다. 고전 이라고 생각하면, 왠지 어렵고 재미없을 것 같은 편견에 사로잡혀 지루해서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반대다. 너무 재밌어서 꼼꼼히 한편한편 여운을 즐겨가며 읽다보니 세월아 네월아 오래 걸린다. 


모파상은 19세기를 살았다. 그는 당시 보불 전쟁에 군인으로 참전했고, 패전으로 인한 사회 분위기를 소설 속에 잘 녹아내었다. 천재는 모두 매독에 걸렸었는가. 정신이상과 자살시도... 화려한 인생의 마지막이 안타깝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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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인생수업 - 지금,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이동섭 지음 / 아트북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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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중반까지 결혼하지 않았던 친구 하나가 풀어놨던 사랑 이야기가 아직도 먹먹하다. 남자는 수도꼭지에서 뜨거운 물이 나오는 곳에서 살림을 차릴 수 있는 여건만 되면 결혼하겠다고 했다. 멀지 않은 과거, 수도꼭지에서 뜨거운 물이 넘치도록 흘러 나오던 시절이었다. 그 남자는 뜨거운 물이 나오는 수도꼭지를 갖지 못해 그녀와 헤어졌다. 친구는 그 남자의 그 말을 오랫동안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 뉴욕의 혼자 사는 아파트에 뜨거운 물이 나올 때마다 그 남자를 생각했다.

 

명절 때마다 대체 결혼은 언제 할거냐고 친척들 앞에서 성화를 들어야 했던 한 살 많은 선배와 연락이 닿았다. 오랜 만의 소식에서 결혼과 자녀를 둔 평범한 삶을 가졌다는 게 기특하게 여겨질 정도의 어떤 결핍을 몸에 걸치고 다니던 선배였다. 그는 가난했었다고 했다.

'승진도 하고, 작은 아파트도 장만하고, 그러고 나니까 이제 결혼해도 되겠다 싶더라.'

사랑이 아니라  조건위에 자신을 올려 놓을 때까지  미루었던  결혼 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안타까왔다. 가난을 이유로 떠나보낸 청춘의 사랑이. 저자는 자신의 인생을 빈센트 반 고흐의 인생에 투영했다. 고흐의 인생 곳곳에 조명을 들이대고 비추며 자신에게 찾아왔던 갈림길을 성찰했다. 그 성찰은 때로 자기 변명이기도 했고, 삶의 고백이기도 했고, 때로 한 인생의 성장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고흐의 생은 많이 알려져있다. 고흐의 사랑도 우리는 잘 안다. 철없이 고흐가 가난한 빈 손으로 사랑을 갈구했던 것과 달리, 저자 이동섭은 갖추어지지 않은 애정의 조건을 핑계로 사랑을 포기하고 많은 여인들을 떠났다.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 자신이 행복해서는 안될것 같다는 죄책감을 느꼈다고 고백하고, 아버지에게 인정받으려 노력했던 젊은 날을 풀어놓았다.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막막한 삶을 이어가면서, 생활고에 시달렸던 많은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통해 정신적으로 교유했다.

 

고흐가 그림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의 편에서 항상 함께 위로하고 위로받은 깨끗하고 맑은 영혼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순수한 예술적 행위를 서포트하기 위해 먹고 사는 삶의 현실적 무게를 떠안아야 했던 사람이 있었다. 고흐의 인생에 있어 동생 테오는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이지만, 테오의 내면을 들여다볼만한 기회는 없었다. 이 책에서는 . 충분하지는 않지만 형을 사랑하고 지원하면서도 그 때문에 경제적으로 고통스러웠을 테오의 삶을 심리학적 접근을 통해 조금은 다가서려는 부분이 보인다. 테오와 빈센트의 관계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밥을 벌어먹어야 하는 현실을 외면하면서 추구하는 일을 하며 사는 것은 어느 시대에서나 어렵다. 사마천이 사기를 완성하기 위한 시간을 벌기위해 성기가 잘리는 굴욕적인 형벌을 선택했던 것처럼, 빈센트에게는 성인 이후의 일생동안 동생에게 굴욕적으로 돈을 부탁하면서까지 일생을 통해 이루려고 했던 절실한 일, 영혼을 담은 그림을 그리는 일이 있었다. 그것을 저자 자신에게 투영했다. 자신은 사회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글을 쓰고 강의를 하는 일을 하고 먹고 살기 위해 유학을 떠났으며, 그것을 빈센트 반 고흐가 여러 번 직업을 버리고 마지막으로 선택했던 화가로서의 길과 비유하였다.

마모되는 자아에 대한 안타까움은 술자리의 불판 위에서 타들어가던 고기 냄새 속으로 사라져갔다. 직업에서 돈과 자아실현은 양립하기 어려웠고, 돈이라도 가지면 다행이었다. 그 무렵 돈을 벌지 않아도 된다면, 나는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222

빈센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테오에게 경제적 지원을 받아야 했지만, 저자는 스스로를 해결하였다. 빈센트와의 가족과의 관계를 자신에게 투영하고, 빈센트식의 사랑과 자신이 사랑했던 방법을 비교하기도 했다. 그 비교는 매끄럽고 부드럽게 어을리지는 못하는 듯, 약간의 무리수가 보였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스스로 진실되게 성찰하고 고백한다는 면에서 어떤 이에게는 큰 공감을 불러올 수도, 또 다른 이에게는 영양가 없이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으로 읽힐, 읽는 이의 호불호가 크게 작용할 책이다. 또한 책의 성격이 애매하게 심리서 같기도, 수필같기도, 예술 에세이 같기도 하면서 이도저도 아닌 게 되어버린 느낌도 함께 있다.  현실과 추구 속의 힘겨운 선택 과정에 대한 진실된 고백에게 격려를, 아직 무명 작가로서 스스로 내딛은 돈 말고 다른 이상을 향한 용기있는 발걸음에 응원을 보낸다. 왜냐 하면 이 조급한 설국열차 같은 사회에, 누군가는 그래도 소박한 꿈을 꾸고 소박하게 이루는 세상에서 산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빈센트의 인생의 전환점들을 돌아보면서 함께 한 그의 그림, 그리고 그 그림에 대한 작은 에세이들이 가장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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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형사 베르호벤 추리 시리즈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서준환 옮김 / 다산책방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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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이후 가장 숨죽여 읽은 스릴러이다. 새장처럼 생긴 작은 괘짝에 온몸을 구겨넣은 여성이 발가벗겨진 채로 지상 2미터 높이에서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쥐들의 먹이가 될 운명에 처한다. 이 끔찍한 사건은 전개만으로도 피를 말릴듯 조마조마하지만, 다른 한 쪽에서는, 책 밖으로 막 걸어나올 것 같은 생생한 캐릭터들로 구성된 다양한 인간 군상의 수사팀의 인간적인 면모들이 슬며시 웃음을 선사하기도 한다.

 

수사반장 카미유는 납치 현장을 목격한 신고를 접하고 막막한 채로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알렉스의 치열한 생존을 위한 몸부림과 정체 모를 그녀의 흔적을 경찰은 언제나 한 발 늦게 쫓는다. 사건과 탐정이  교차하며 진행되는 복잡한 스토리는 반전에 반전에 반전을 수학 공식처럼 치밀하게 구성된 퍼즐 틀 안에 반듯하게 끼워 넣는다.

 

수사팀이 맞닥뜨린 사건은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 지 황당하고 막막한 것이다. 프랑스엔 왜 그 흔한 감시 카메라도 없는지, 목격자가 본 건 길가던 미모의 어떤 여성이 갑자기 어떤 남자에게 가격을 당하고   탑차에 태워져  납치됐다. 그녀가 누군지 그녀를 끌고 간 사람이 누군지 힌트도 없다. 형사에게 주어진 유일한 정보는 오로지 어떤 여자가 어떤 남자에게 폭행후 탑차에 실려 납치됐다는 것 뿐이다. 납치 사건으로 아내 이렌을 잃은 후론 강력 사건을 맡지 않겠다고 버텨왔던 카미유 반장은 담당 형사가 휴가에서 돌아올 때까지 하루 이틀만 그의 공석을 대신해  임시로 맡은 것이다.  그렇게 왕년의 멤버들과 팀을 이루어 시작한 사건은 그가 빠질 여유를 주지 않고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급류에 휘말려갔다. 그동안 발생했던 연쇄 살인에 더해져 사건 발생 직후 더욱 가속적으로 발생하는 황산 살인 사건과 연루되며 미스테리는 점점 커진다. 한편 공은 취하고 실은 카미유에게 돌리려고 혈안이 된 예심판사와의 위태로운 갈등 속에서 부유하는 조각 정보들로 하나씩 실마리를 풀지만, 하나가 풀리면 다른쪽 매듭은 더욱 꼬여만 간다. 사건을 쫓는 과정은 유병언 사건 같다.  뭔가 한 가지의 단서를 잡고 뒤를 쫓으면 그 땐 이미 한 발작 늦는다. 국민들은 수사팀의 무능을 비난하고, 예심판사는 조금이라도 실적이 생기면 가로채갈 생각만으로 가득차 있고, 모든 매체에 나서서 변명하고 설명하고 땀을 흘리는 것은 서장의 몫이다.

 

소설은 사건 해결을 위한 수사팀의 이야기와 납치된 알렉스의 시선으로 된 이야기의 두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알렉스의 이야기로 들어오면 피가 뚝뚝 떨어지고 전형적인 참혹한 스릴러가 쉴 새 없이 펼쳐지지만, 수사팀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신원 파악도 안된 알렉스의 정체와 비밀이 서서히 파헤쳐지는 과정이 카미유의 시점을 중심으로 인간적이게 서술된다. 수사 반장 카미유와 예심판사 사이의 으르렁거리는 기싸움과 그 사이에 낀 채 양쪽에서 쿠션역할을 하는 르 구엔 서장,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어버린 듯한 지식과 엄청난 부, 그리고 따스하고 사려깊은 엄친아 같은 남자 루이, 스쿠루지처럼 돈을 아끼며 주변사람들에게 빈대붙어 먹고 사는 아르망, 어떤 결핍의 상징처럼 고집스럽고 자신 밖으로 한 발작도 나오려 하지 않는 난쟁이처럼 작은 카미유, 권위에만 의존한 채 허수아비처럼 서 있으면서도 사사건건 카미유와 위태로운 관계를 만들며 부딪치는 예심판사.

 

이러한 장르 소설을 많이 접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여러가지로 7년의 밤과 유사한 요소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첫번째는 소설 속에는 어마어마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거다. 피해자는 가해자이고, 가해자는 다시 또 피해자이다. 비밀들이 하나씩 하나씩 벗겨지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최초의 어떤 피해자에게 어떤 도덕적 비난을 해야 할 지 알지 못한다. 두번째는그들의 책의 저자가 서사의 끝에서 내린 최종 결론에 대한 도덕적 딜레마이다. 사건의 내막을 독자는 알고 있다. 그러나 주인공 카미유는 과연 모르고 있을까? 그는 그 모든 사건의 발달을 만든 최초의 가해자를 단죄한다. '범인'은 항변한다. 카미유 당신은 알고 있어. 이 모든 것이 조작이야 라고.. 카미유는 날키로운 직관의 소유자이다. 알렉스가 어떤 사람인지 그의 추리로 인해 서서히 모든 비밀이 밝혀진다. 그런 그가 둔감한 독자까지 눈치챘던 그녀의 의도까지 눈치채지 않았을 리 없다.

 

딜레마는 이거다. 최초의 악이 있다. 그 악이 다른 악을 불러왔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된 것이다. 만일 최초의 악에 대한 복수를 가해자가 자기 일생을 걸고 차근 차근 실천했고, 그것이 완전 범죄에 가까운 것이었다면, 그 최초의 악을 복수로 단죄한 것에 대해 법의 테두리에 있는 수사관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한 명의 독자로서 한 발작 멀찌감치 떨어져 볼때 그 근원적 악이 처절한 복수의 대상이 된 것이 꼬소하고 당연한 어떤 정의의 실현 같아 작은 안도감을 주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결국 진실은 외면당해도 싸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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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슬립 2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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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  태초에 인간이, 유인원에 더 가까왔을 인간의 조상이, 컹컹거리던 대신 소리로 생각을 전달했던 그 최초의 순간에, 언어가 없던 안개처럼 희미하고 혼란스런 세상 속에서 막 하나의 단어로 생각의 교환이 이루어졌던 첫번째 순간이 생겨났던 것처럼, 어쩌면 그것이 가능해질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생각만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아이디어에 계속 매료되었다. 소설에서처럼, 샤이닝이 가능한 사람 비슷한 생명체나 특수한 인간들이 이미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개미들이 인간의 감각과 현재의 기술로는 도저히 한 근접할 수도 없는 페로몬을 통해 정교한 의사소통을 하고, 고래들이 물속에서 노래하여 서로를 찾고 부르고 사랑하는 것처럼. 최초에 유전자에 어떤 변이가 일어나고, 그 사람들끼리 어떤 우연에 의해 생각덩어리들의 일부를, 그 안개 덩어리 같이 희미하고 무게 없고 형체없는 감정과 의지와 욕망 더미들에게 하나하나 소리에 대응하여 사물의 이름과 개념을 형성하고 의사소통을 했던 것처럼. 어느 순간 빅뱅의 순간처럼 생각이 소리를 통하지 않고 전기처럼, 혹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현재 우리가 전혀 모르는 암흑 물질 같은 걸 통해 생각에서 언어를 제거하고 생각끼리만 소통하는 미래의 인간후손들이 나타날 지도 모를 일이다. 


내겐 익숙하지 않은, 장르 소설 시즌에 처음 만나보는 스티븐 킹의 닥터 슬립은 1편과 2편 통틀어 우려했던 것만큼 자극적이지 않았다. 알콜 중독으로 삶을 쓰레기처럼 굴려 마침내 아슬아슬한 벼랑끝에 섰을 때 한 사람의 아주 아주 작은 친절이 인생을 송두리째 구하는 과정, 삶이 아무렇게나 굴러갈 때 행한 죄의식과 마주할 때마다 중독의 유혹에 다시 빨려들어가는 아슬아슬한 순간들, 증조 할머니 모모와 아이의 각별한 관계, 감초처럼 등장하는 출생의 비밀, 이런 다분한 요소들이 오싹하고 소름끼치는 장르 소설이 가진 속성을 희석시키고 자잘한 감동과 그럴 듯한 개연성을 충분히 부여하였다. 


판타지적 요소로만 볼 때에는 한동안 소녀들의 마음을 흔들었던 미소년 뱀파이어의 얘기 <트와일라이트>가 생각났다. 트와일라잇 속 뱀파이어들이 다양한 '재능'을 가진 것처럼 닥터 슬립의 트루들과 샤이닝 역시 가진 인간들은 자기들끼리 머리 속으로 들어가서 생각의 교환을 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능력을 가진다. 1편에 등장했던 앤디는 귓속말로 '잠들어라~'라고 속삭여서 사람을 잠들게 한다. 벙어리 새라는 자기 몸을 반투명 상태로 만들어서 없는 것으로 위장할 수 있다. 우리의 주인공 닥터 슬립은 죽음이 임박한 사람이 고통 없이, 두려움 없이 편히 가는 것을 돕는다. 1,2권을 통해 인간과 트루들을 모두 합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두번째 주인공 아브라 역시 대결구도에서 기발한 재능들을 보여주었다. 강력한 악과 어리고 강력한 선의 대립적 측면에서 봤을 때에는 해리포터 시리즈가 생각난다. 해리포터처럼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태어났고, 어린 아브라는 해리포터처럼 때로 무모하지만, 자신의 초인간적 능력을 드러내지 못하고 거짓으로 평범한 척 해야 하는 고독한 운명이었을 때, 아저씨 댄이 나타났고, 댄의 어린 자아와 대화를 나눈다. 


선과 악의 싸움. 어차피 끝을 아는 내용이라, 디테일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군데군데 있었지만, 영화화를 의식한듯, 빠른 화면 전환과 함부로 지나칠 수 없는 장치들과 연결되어 하나씩 밝혀지는 비밀들이 액션씬과 마주치면서 마지막 2/3 지점 정도부터 끝까지는 빨려드는 듯한 최고의 긴장감으로 달린다. 소녀 아브라의 캐릭터는 참으로 소녀답고도 매력적이다. 재미있게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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