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스페인 내전에 고통받은 세대의 아픔을 만화로 그려낸 작품으로 문학성이 짙은 작품이라고 하니 더욱 기대된다. 아버지의 삶의 궤적을 만화 속 화자가 되어 따라가는 과정 속에 속에 담긴 진정성을 느낄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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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서점에서 포인트 1000P가 사라진다고 문자가 와서 무료 배송에 맞춰 두 권 주문

1.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작품을 들여다보자.




2. 눈먼자들의 국가...
가격도 저렴하여 5만원 맞추기용으로도
● 이 책은 세월호 참사를 잊지 말자는 뜻에서 열두 분의 필자와 문학동네가 뜻을 모아 발간합니다.

● 이 책은 232p에 달하므로 11,000원의 정가를 매길 만하지만, 보다 많은 독자들이 부담 없이 구매해서 읽을 수 있도록 절반 가격인 5,500원의 정가로 정했습니다.
● 저자들은 이 책의 인세를 모두 기부하기로 했습니다. 
● 문학동네도 저자들의 뜻에 동참하고자 판매 수익금 전액을 기부합니다.
10만 부까지는 저자 인세가 포함된 매출액(정가에서 서점 마진 40%를 제외하고 출판사가 수금하는 금액) 전액을 기부합니다. 10만 부 이후의 판매분에 대해서는 저자 인세와 출판사 판매 수익금(매출액에서 제작비와 물류비와 제세공과금을 제외한 금액) 전액을 기부합니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 등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고자 하는 다양한 움직임’에 기부됩니다


















3. 올리버 색스의 팬이라면 이 기회를.. 

블로그 돌아다니다가 어디 가서 올리버 색스를 아는 척을 했는데, 달랑 한 권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밖에 읽은 적이 없었다. 그 많은 책들 중에서.. 인터넷 서점을 돌아다니다보면, 어디는 이 책이 할인이고 또 어디는 저 책이 할인이고 그렇다. 마침 찾는 저자의 책을 대거 할인 대열에 넣어놓은 곳이 알라딘. 기뻤으나 이런 기쁨이 한 달 후면 사라진다니 슬퍼진다. 구간 중 할인되는 책 중 관심잆어 주문한 책. 거의 50% 할인이다. 이런 횡제가





 로빈윌리엄스 주연의 영화. 본적이 있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만큼이나 상큼한 제목


4. 베개를 갖기 위해 주문. 
베개를 하나 받았는데, 5만원 맞추면 베개가 하나 더 생길 것 같아서 주문하다보니 집에 있는 베개랑 똑같은 게 나타나서 3천원 포인트로 바꿔받았다. 창문넘어 베개가 갖고 싶을 뿐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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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추천도서는 계속해본다.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만 쓴 것이 아니지..


934년에 『코스모폴리탄』에 발표한 단편소설「One Trip Across」와 이후 1936년 『에스콰이어』에 후속편으로 발표한 중편소설「The Tradesman’s Return」을 1937년에 한데 묶은 책.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첫 번째 사회소설. 격변의 시대, 키웨스트의 평범한 바다 사나이였던 해리 모건과 그 주변 인물들을 그린 이야기다. 낚싯배를 운영하는 해리는 손님에게 사기를 당하고, 그 후 생계를 위해 중국인 밀항과 밀수업에 손을 대다가 쿠바 혁명단과 엮이게 된다.  


헤밍웨이는 당시의 시대상에 영감을 얻어, 목표를 위해서라면 살상도 개의치 않는 혁명 군단, 생존을 울부짖는 빈자, 부유 속에서 헤엄치면서도 정신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자 등, 극단화된 사회를 대표하는 인물을 설정하여 시대의 파도가 개인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를 지독할 정도로 잔혹하고도 현실적으로 보여준다.(출판사 소개글)


낯선 이국땅에서 그들만의 방식으로 사랑에 빠진 두 남녀의 사랑은 '타락'으로 비춰지지만 그들에게 있어 '타락'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모조리 소진하고 영점으로 직하하는 치명적인 움직임일 뿐, 세상이 말하는 그것과는 다른 지점일 뿐이다. 

모든 것을 소진하고 이 세계에서 사라져 다른 또 하나의 시공간에서 되살아남으로써 구원이 아닌 타락을 통한 부활-영원회귀 신화를 이뤄내는 낯선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28년 작가 생활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중견 소설가였던 구효서의 새로운 작품세계를 알리는 시발이 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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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의 비극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서계인 옮김 / 검은숲 / 2013년 5월
평점 :
품절



오랜만에 읽은 정통 추리 소설이었다. 1932년작. 80여년이 넘은 시간이 흐르고, 몇 대에 걸쳐 미스테리 소설의 진보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시점에서도 여전히 흥미롭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고 기억되는 것, 시간이 가치를 증명한 것들에는 두 종류가 있다. 그쪽 시간과 이쪽 시간 사이의 간극이 몰입을 방해하는 것과, 흥미를 촉발하는 것이 있다. 전자는 문학의 역사적 학술적 가치와  지식이란 이름으로 단편화된 조각 정보들이 교과서와 지적인 대화 사이를 구름처럼 떠돈다.  후자는 그냥 조용히 많은 사람들에게 읽힌다. 추리소설 팬이 아니라서, 교과서에서 본 적이 없어서 잘 알고 있던 작가가 아니었지만, 읽고 나서 알아 보니 엄청 읽혔다. 수많은 버전의 다른 출간본이 있고, 많은 이들이 번역을 했고, 많은 독자들이 리뷰를 했다.

 

두 명의 저자 x 두 개의 필명 x 두 개의 페르소나

소설의 저자와 주인공에 얽힌 이야기는 추리 소설 못지 않게 흥미롭다. 원래 이 책은 바너비 로스 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물리적 저자는 만프레드 리와 프레더릭 다네이라는 쌍동이처럼 닮은 동갑의 사촌 형제이다. 앨러리퀸은 두 사람을 하나로 묶은 필명이자, 주인공 탐정의 이름이며, 두 사람의 페르소나다.  그런데, 리와 다네이 이 두 사람을 하나로 묶은  또 하나의 필명이 있었으니 그것이 드루리 레인을 주인공으로 택한 바너비 로스이다. 둘이 하나인 그들은 서로 다른 사람이 되어 공개석상에서 서로를 공격하기도 하는 등, 개구장이 같은 행동들을 즐겼다고 한다. 미스터리와 위트 가득한 삶을 영위했던 그들이다. 바너비 로스의 생은 고작 3년이었다. 출판사와의 저작권 분쟁으로 바너비 로스는 x,y,z의 비극 등 그들의 지적이고 고뇌에 찬 햄릿 스타일의 드루리 레인을 탐정 주인공으로 한 많지 않은 작품을 던져놓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 신중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전직 배우는, 실존했던 작가 만프레드 리와 프레더릭 다네이의 감추어진 또 다른 자아, 깊이 내재된 보이지 않는 분신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기록으로는 그들의 페르소나는 엘러리 퀸이었고, 드루리 레인과는 정 반대의 성격이었다고 한다. 

 

둘이서 하나의 소설을 쓰는 것이란 어떤 것일까? 글과 그림을 따로 써서 하나의 동화책을 엮는 것처럼, 글의 논리적 전개와 스토리, 그리고 문장을 분리해서 각자 역할 분담을 했을까. 그렇게 역할 분담을 했더라도 최종적으로 글을 쓰려면 머리 속에 굴러다니는 여러 가지 생각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일관된 문장 속에 배열해야 하는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둘이 머리를 맞대고 곰곰히 함께 스토리 구조를 짜내고 하나씩 하나씩 그 디테일을 상의해 가며 한 문장 한 문장 함께 완성했을까.  초기에 그 둘은 서로 다른 직업을 가졌으므로 시간이 그렇게 충분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한 워낙 많은 작품을 써냈기에 많은 것을 조율해서 쓰는 일은 더욱 어려웠을 듯하다. 그렇다면 모든 스토리를 함께 짜고 일정을 맞추기 위해 부분부분 챕터별로 나누어 병렬로 동시에 쓰는 작업을 진행했을까. 알쏭달쏭한 두 사람의 탐정소설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가 궁금하다.

 

당신은 이미 범인을 알고 있다.

사건이 일어난다. 바다에서 건져올린 시체다. 불우한 해터가의 주인, 화학자, 요크 해터씨다. 석연치 않은 자살 판정. 그러나 그의  죽음은 서막에 불과했다. 몇달 후 해터가에서는 루이자를 겨냥한 또다른 살인 미수극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해 발생한다. 어두운 광기에 휩싸인 해터 가의 저택이 공간적 배경의 전부이다. 독자는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르는 으스스한 저택에 괴이한 해터가의 자식들과 함께 갇혀 답답하다. 용의자이자, 잠재적 피해자이자, 새로운 사건의 잠재적 범인인 해터가의 모든 사람들에게는 외출금지령이 떨어지고, 여러 명의 경찰이 구석구석 배치된다. 아들과 며느리, 손자들, 두 딸과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루이자, 가정교사, 운전사, 하녀 등 그 집에서 생활하는 많은 사람들이 집에서 한 발작도 떠나지 못하지만,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결정적인 알리바이들이 있다. 사건을 담당한 섬 경감도 감시와 사건 해결을 위해 해터가를 떠나지 않고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지만, 그가 있는 동안에도 루이자를 향한 살인 미수극은 계속된다. 드루리 레인은 섬 경감이 의지하고 있는 민간인으로, 타고난 직관으로 논리적인 사고력으로 문제 해결을 하는 인물로, 한물 간 퇴역 배우이다.  그 역시 청각 장애인이다. 그에게는 잃어버린 하나의 감각을 상쇄시키는 또다른 감각을 주었다. 논리적 추리력, 직관이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내가 범인을 아예 못맞춘 것이 아니었다.  '아 그럴 줄 알았어'가 아니라 '설마' 했던 거다. 모든 단서가 처음부터 정확하게 오차 없이 범인을 향해 있었고, 출간 당시 바너비 로스라는 이름을 썼던 저자는 숨김없이 그것을 꼼꼼하게 독자에게 알렸다. 알아가는 과정 자체에 인간의 차가운 본성에 또한번 굴복해야 하는  윤리적 이슈를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건의 단서가 가리키는 모든 힌트들을 부정하는 데 온힘을 쏟았다.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 루이자는 시청각장애인이다. 추리 소설에 헬렌 켈러 드라마를 소재로 쓸  이유도 없는데 그녀가 등장한 데는 이유가 있다. 그녀의 증언이 문제 해결의 열쇠다. 

보통의 우리가 시각과 청각에 의지하는 양 만큼 루이자의 다른 감각은 발달할 수 밖에 없다. 목격자가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고 해서, 그녀가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그녀의 나머지 감각이 있다. 저자는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루이자의 초감각적인 힘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독자(나)는 독자가 경험한 것, 독자가 알고 있는 것에만 집중한다.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가 손에 쥐어주는 사건의 단초를 흘려 버린다.  거기에 설마 하는 마음. 불편한 마음을 제거하고 그 설마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단서가 제시하는 길을 스스로 차단한다. 차단할 수밖에 없다. 성선설을 믿지 않는다 해도, 아무리 많은 타락과 부패를 묵도해  온 경찰이라 해도 그렇게 목격자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범인을 지목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인간 본성을 그렇게 취급해도 된다고 교육받지 않았다. 

부정하고 싶은 인간의 본성
다른 소설도 마찬가지지만 특히나 미스터리나 탐정 장르 소설은 소소한 일성에서는 볼 수 없는 삶의 가장 극한까지 상황을 몰고 가기 때문에 개연성이 부족해지기 쉽다. 납치나 살인과 같은 사건의 원인은 현실에서는 대개 금전적인 이유나 원한 관계가 대부분이어서 진부해지거나 작위적이기 쉽다. 내가 추리소설을 많이 안읽는 이유 중의 하나다. 이 소설은 그같은 우려는 밀쳐버리고 다른 종류의 고뇌를 안겨준다. 인간 본성과 죄의 근원에 대해 성찰이 요구되는 이 소설은, 나에게는  사실 드루리 레인의 윤리적 선택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혼돈스럽게 한다. 주인공인 그의 결정이 독자인 나의 결정과 언제나 같을 수만은 없다. 그의 선택에 윤리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면 다른 어떤 선택이 있을까. 

사건 종료 후, 레인은 섬 경감과 부르노 검사에게 비극적 결말을 초래한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면서 자신의 결정에 대해 충분히 변호할 기회를 갖는다. 만일 범인을 확신하였을 때 이를 알렸다면 초래할 수 있었던 결과에 대해 그가 고뇌했던 이유들 때문에 그는 면죄부를 갖는다. 한 사람의 한 때의 잘못이 꼬리를 끊지 못하고 그대로 혈통으로 이어져 자식과 그 자식에게 그대로 되물림되고, 결국 돌고 도는 관계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드루리 레인은 비통해한다. 그렇다. 나의 악하거나 약한 유전자는 선조로부터 온다. 그건 맞다. 유전자는 승자이다. 레인이 내린 결론은 아무래도 찝찝하다.  유전자의 결함이 어떤 특정한 질병 때문이었을 때, 그 결함이 일으키는 모든 악행의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할 대상은 영원히 개인의 몫이다. 사회의 몫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들, 외면하고 싶은 것들을 건드리며 드루리 레인이 내린 결론을 유예하기엔 우리가 믿고 있는, 너무나 당연시 되고 있는 가치가 때로 허황되고 근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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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정원 - 제4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박혜영 지음 / 다산책방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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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하지 않은 소설을 쓰는 일은 어렵다. 그래서 진부하지 않은 소설을 만나기도 어렵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정해진 형식의 틀을 벗어나서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진부하지 않은 소설을 읽는 일은 모험이고 때로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또, 진부하지 않다고 해서 모두 최고의 예술이라고 할 수는 없다. 훌륭한 예술은 발상의 전환, 새로운 시도, 침신한 구성과 소재가 필수다. 이 소설 어딘지 진부한듯 하면서 파격적이다. 


20세기초 봇물터진 서양문물에 도취한 명문가 지식인들의 나르시스적인 엘리트 의식에 흠뻑 절은 듯하면서도 고색창연한 고가의 풍경을 한없이 느리고 정적인 악보위에 써나갔다. 거의 반이 지나도록 진도가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작가는 이야기를 펼칠 의지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강릉 선교장을 연상케하는 노관이라는 명문 고가의 풍경과 일상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고즈넉한 고가의 풍경은 직유의 융단 폭격으로 압사할 듯하다. 생경한 비유는 때로 그려내고자 하는 이미지에 적절히 매치되지도 않았고, 사춘기 소녀의 시쓰기 습작 노트를 무작위로 조합하여 나열한 문장 같은 인상을 주기도 했다. 그렇게 전개 없이 반을 읽어나가면, 그 다음 단계로 이야기의 폭격이 시작된다. 이번엔 감정의 과잉이다. 비밀이 파헤처지는 광경도 진부하다. 잘 배치된 추리소설같이 하나씩 실마리가 풀려나가는 게 아니라, 폭로하듯 촌스러운 독백이 과도한 감정과 함께 이어진다. 


이렇게 이상야릇한 책이 독자에게 제목 그대로 신비한 비밀 정원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책을 덮고 나서 왜 자꾸 그 곳에서 살다 나온 것 같을까. 시간이 멈춘 곳 같은 그 노관에서  자신때문에 하루하루 절망으로 죽어가던 시동생에게, 초연하게 차를 대접하고 음악을 듣던 요의 어머니가 머리에 떠나지 않는 걸까. 사랑을 극복한 것인지, 애써 숨기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책의 제목은 비밀정원, 이야기 자체로만 본다면 제목이 암시하는 비밀은 막장드라마처럼 진부하다. 비극적 사랑은 운명의 회오리 속에서 비껴갔고, 무고한 생명이 잉태되었으며, 고택의 가문을 지키고자 비극은 끝까지 비극을 지킨다. 그러나 비밀은 진짜 비밀은 흔한 막장 드라마 코드가 아니다. 그것은 노관의 집주인인 어머니이다. 비밀 정원은 요의 어머니의 마음 속 정원이다. 그 속에 숨겨온 사랑, 끝내 이승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랑. 사랑의 씨앗이 잉태되어 손만 뻗치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는데도 초연했던 그 마음이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딸의 존재를 알면서, 지척에 있는 딸에게 초연한 것 역시 이 소설의 미궁같은 매력이다. 기존 소설이었다면, 혹은 일일 드라마였다면, 딸의 존재가 소설의 축으로 이어지거나 갈등의 매개체가 되어 드라마틱한 이야기의 형성에 기여했을 터인데, 이곳에서 딸의 존재는 마치 그녀가 요에게 보낸 동화처럼 초월적이다. 이 두가지 요소, 두 여성에 대한 비밀스런 마음의 문에 끝내 빗장을 끝까지 열어두지 않은 것과 최대의 결핍을 절제로 표현한 것,. 그것이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고 새로움이다.  


사실 율이 삼촌의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사랑은 너무나 오버스러워서 20세기를 통과해온 세대로서도 그대로 읽어 주기가 메슥스럽다. 사랑의 감정에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지더려빠진 놈 약먹었나 싶다.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미숙한 사춘기 소년의 거친 사랑의 찬미와 같은 그의 시도 유치해보인다. 그러면서 밤늦도록 멈추지 못하고 책장을 계속 넘기는 이유는 바로 어머니의 마음 속 정원에 무엇이 있는지 그 비밀을 알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철저히 베일을 벗지 않는다. 실제로 비련의 여주인공이고, 이러한 소설에서 가장 많이 독자와 교감하고 감성을 전달해야 할 사람이지만 소설에서는 철저히 그 사람의 감정이 없고 묘사가 배제되어 있다. 어머니는 저 멀리 깊숙한 안채에서 모든 것을 감독하고 지시할 뿐 독자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명맥이 끊어질 듯 겨우 이어가고 있는 대가 노관의 안주인으로서 고작 책을 읽고 손님을 대접하는 정도의 묘사가 전부이다. 대사도 거의 없다. 


1인칭 시점의 소설은 자주, 화자의 생각을 빈틈없이 독자에게 세세하게 전달하고 아주 밀접하게 독자와 교감한다.  그래서 책을 읽는 것은 소설 속의 인물과 가장 내밀하게 소통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소설은 1인칭임에도, 화자인 요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대화가 표현하는 감정, 요가 묘사하는 고택의 풍경, 그것을 통해 독자가 느끼는 것이 반대로 화자에게 이입된다. 스토리는 그가 우연히 듣게 되는 대화에서 형성된다. 


심사에서 '과잉과 결핍'이라는 단어에 격하게 공감하였는데.. 작품 전체에 흐르는 과잉과 결핍은 의도된 것으로 보인다. 천명관의 <고래>를 읽을 때, 그 말도 안되는 스토리들을 너무나 통쾌하고 진지하게 읽었었던 것처럼 비록 심사의원이 지적한 것처럼 기존 소설의 정형화된 틀에서 많이 벗어난 이 작품은 혼불문학상의 정체성을 잘 보여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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