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주의적 사고방식과 인종차별주의의 결합은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온다. 구류중 사망 문제를 다루는 사회단체 인퀘스트(Inquest)에 따르면, "지나치게 많은 숫자의 흑인과 소수민족 공동체 사람들이 과도한 무력 사용, 신체구속 또는 의료조치 없는 심각한 방치의 결과로 사망한다. 우리는 이 사태가 형사법 체계에 내재된 제도적 인종차별주의를 드러낸다고 본다.

정치엘리트들이 부여해준 새로운 권력 덕분에 경찰은 대담해졌다. 그러나 이 권력은 평등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어떤 공동체는 다른 공동체보다 경시되고, 그 결과는 비극적이다. 경찰의 권위주의로 고통받는 사람들은 사회의 가장 아래에 있는 이들이다. 반면에, 힘과 영향력을 가진 이들은 겁낼 이유가 거의 없다.

공격적인 치안유지, 주전자 전술, 대규모 체포, 허위에 근거한 시위 참가자들의 악마화, 부상과 심지어 사망까지 초래하는 조치?이것이 기득권층의 권위주의가 불러온 결과다. 많은 운동가들이 나에게 이야기하길, 운동가의 정치적 관심사에 동의하지만 주전자 전략으로 몇시간 동안 갇혀 있거나 체포되거나, 그보다 더 나쁜 상황을 맞게 될까 두려워서 시위에 참가하길 꺼리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권위주의적인 새 기득권은 급진적 반대자들을 탄압하기 위해 경찰에게 압도적인 힘을 부여했다. 이로 인해 경찰은 예전의 동독 같은 경찰국가에서나 있을 법한 작전들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 쇄신된 권위주의로 고통받는 것은 시위자들만이 아니다.

자본주의 이념의 대부인 애덤 스미스가 반대한 것이 바로 이 유한책임제인데, 왜냐하면 유한책임제가 아니라면 주주는 자신이 투자한 회사가 내린 결정에 완전히 책임져야 할 것이고, 그러므로 그냥 배당금이 굴러 들어오기만 기다리는 대신 회사의 결정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장려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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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소년 2022-05-25 16: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권위주의적 사고방식의 권력자들에 의해 민중은 탄압받았습니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5-25 19:42   좋아요 1 | URL
<기득권층>에는 특권의식을 갖고 있는 엘리트층에 대한 이야기가 상세하게 서술됩니다. 영국 엘리트 층에 대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단면과 많은 공통점을 갖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논리야놀자님께서 말씀하신 방향으로의 전환이 쉽지 않음을 깊이 느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가야할 길임에도 분명하겠지요...
 

"당시 보수당은, 기본적으로 다시 집권하는 유일한 방법은 예산안을 노동당과 똑같이 맞추는 길뿐이라고 여겼을 뿐 아니라, 사실 정부지출을 노동당보다 늘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엘리엇이 말할 때, 그의 목소리는 예전 보수파가 취했던 자세를 향한 경멸을 겨우 숨기고 있었다. 하지만 보수당의 그런 저자세 덕분에 엘리엇의 말처럼 ‘낮은 세금과 자유시장의 메시지’를 밀어붙일 수 있는 ‘정치적 여지’가 생겼다.

공공정책연구소가 노동조합에서 기부를 좀 받긴 하지만, 그 연구소의 가장 큰 기부자에는 조세회피 다국적 기업인 구글, 공공자산을 인수해 돈을 벌어들이는 사기업 캐피타(Capita), 그리고 EDF 에너지나 E. ON UK 같은 에너지기업이 있다. 다시 말해 공공정책연구소는 기득권에 도전하기는커녕 기득권에서 독립된 싱크탱크조차 아니라는 말이다.

정치인들은 감히 언급도 못할 사상이나 정책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선동자의 본성이다. 그런 활동을 통해서, 그들은 창을 옮겨놓았다. 설령 정치인들이 선동자들의 개념을 절충시킨다 해도, 무엇이 중도적이라고 여겨지는지가 이미 변한 것이다. NHS의 민영화가 한 예다. 마거릿 대처조차 감히 NHS를 민영화하진 못했지만 보수-자민당 연립정부는 그것을 현실로 만들고 있다.

그들은 그냥 국가 지배엘리트의 핵심부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선동자들은 국가 지배엘리트가 현재와 같은 형태로 구조화되는 데 기여했다. 선동자들은 신자유주의 영국에서 부와 권력을 누리며 번영하는 기업과 부유한 은행가들에게 현명한 투자처임이 증명되었다. 국가의 정치 담화는 가차없이 부와 권력이 있는 자들에게 유리한 언어로 이루어진다.

국가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것처럼 묘사된 사람들이 특히나 악마화되었는데, 하원의원들은 대중의 분노를 사회에서 가장 빈곤한 사람들에게 집중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럼으로써 최상류층을 향하던 면밀한 감시의 눈길을 굉장히 효과적으로 분산시킬 수 있었다. 국가개입을 후퇴시켜야 한다고 가장 목청 높여 부르짖던 자들이 종종 국가의 단물을 가장 많이 빨아먹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권위자들은 한때 천하무적이었던, 이 보수당이라는 정치세력이 과연 다시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겠는지를 두고 심각한 토론을 벌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대처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토니 블레어가 우리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그녀는 자신을 경외하는 무리에게 선언했다. "우리는 우리의 반대자에게서 변화를 이끌어낸 것입니다." 노동당이 집권은 했을지 모르나, 대처가 보기에 노동당은 진실로 대처 자신의 정치적 신념의 불꽃을 피워올리고 있었다.

오늘날 노동당의 성격은 매우 달라졌다. 1994년 토니 블레어가 노동당 지도부를 장악한 이후, 당 활동가들의 이의제기가 두려웠던 신노동당 지도부는 당내 민주주의를 축소했다.

"신노동당은 계속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진보 정치라면 이의를 제기해야만 하는 부분에선 맞서지 않은 채로 이겼던 겁니다." 다시 말해서 신노동당은 선거 승리는 따놓은 당상이며 한때는 노동당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믿었던 불의의 종식 같은 문제는 떠맡을 이유가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렇게 대처리즘이 이뤄낸 합의가 존속되었다.

고위 각료들은 유권자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를 정당화할 때 자유시장의 세계화를 들먹인다. 부자에게 세금을 더 물리라는 대중의 요구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자들, ‘부를 창출하는’ 사람들이 해외로 달아나버릴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요구는 억제되어야 한다는 논리다. 노동자의 권리 향상이나 최저임금 인상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정치인들이 행정부 탓으로 기득권층의 관념에 갇혀 있는 건 아니다. 주류 정치인들을 자연스럽게 현상의 수호자로 만드는 것이 바로 영국 정치엘리트의 본성이다. 정치는 특권층의 전유물이 되어버렸다

전반적으로 유권자들이 정치인 하면 떠올리는 단어는 암울하다. "거짓말쟁이, 거만함, 그들과 우리, 자기 잇속 챙기기… 아주 안 좋았죠." 이토록 널리 퍼진 선출 정치인에 대한 경멸은 민주주의 상태에 대한 고발임이 분명하나, 만연한 냉소는 낮은 투표율이나 당원수의 감소와 마찬가지로 소극적인 체념의 표현이다. 투표율은 1992년 77.6%에서 2010년 65.1%로 떨어졌다.

영국의 정치적 삶은 숨 막히는 이데올로기 통제하에 있다. 부자의 세금을 깎고, 공적 자산을 팔아치우고, 국가개입 영역을 후퇴시키고, 사회안전망을 축소하고, 노조를 약화시키는 이 모든 일은 주류, ‘중심부’로 무자비하게 침투하여, 선거에서 당선될 수 없는 극단적인 이들만이 거기서 벗어날 수 있다

이 합의를 옹호하는 자들은 합의의 지속에 개인적 이해가 달려 있다. 정계와 부유층 엘리트들은 서로 분리된 독립체가 아니라 극심하게 겹쳐지는 집단이다.
물론 기득권층의 생각을 집행하는 건 정치인만이 아니다. 제대로 기능하는 민주주의에서 언론은 아마 현 상태를 비판하고 거기에 도전하기 위해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언론은 기득권층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로비처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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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해하는 ‘기득권층’의 의미는 이렇다.
오늘날 기득권층은 언제나 그렇듯이 권력있는 자들의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은 성인 인구의 거의 전체가 투표권을 가지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지킬 필요가 있다. 기득권층은 민주주의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협하지 않도록 ‘관리’하려는 권력 집단의 시도를 대표한다. 이런 점에서, 기득권층은 권력자 집단을 더 광범위한 인구로부터 보호하려는 방화벽으로 볼 수도 있다.

자주 ‘신자유주의’로 묘사되곤 하는 이 이데올로기는 소위 ‘자유시장’이라는 신념을 토대로 삼는다. 공공자산을 되도록 많이 영리사업으로 전환하고, 이전에 국가가 경제에서 담당해온 역할에 어느 정도 반대하거나 혹은 그런 국가개입을 적대시하며, 사익에 부과되는 세금의 감면을 지지하고, 어떤 형태이건 현 상태에 도전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조직을 격퇴한다. 이 이데올로기는 자주 ‘자유’, 특히 ‘경제적 자유’라는 명목으로 합리화되며, 자신을 개인주의의 언어로 방어한다. 기득권층은 이것이 마치 날씨처럼 당연한 것이자 삶의 진실이라고 여긴다.

기득권층은 그들이 받아야 할 철저한 감시를 받지 않는다. 결국, 권력있는 자들의 행동을 조명하는 건 언론의 책무다. 그러나 언론은 기득권층의 필요불가결한 부분이다. 언론 소유주들과 기득권층은 같은 전제와 신조를 공유한다. 권력자를 조명하는 대신, 언론인과 정치인들은 한결같이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의 행동을 비난하고 공격한다. 실업수당을 받는 실업자나 다른 국가보조금 청구인, 이민자, 공공부문 노동자?이들은 비난조의 폭로나 심지어 명백한 비방에 직면한 집단이다. 이런 힘없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면 실제로 사회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이들을 향한 분노의 방향을 너무나 편리하게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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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계급의 악마화는 국민당의 성공 스토리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노동계급의 문화는 지배엘리트들에 의해 무가치한 것으로 폄하되었지만, (올바르게도) 소수민족 집단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그 가치를 인정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살아왔다. 나아가 자유주의적인 다문화주의는 불평등을 계급이 아닌 순수하게 인종의 프리즘을 통해 이해해왔다. 이런 요소들이 합쳐지면서 결국 백인 노동자들은 다문화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민족적 자부심과 유사한 관념을 발전시키고, 인종에 기초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구성하도록 고무받았다. 국민당은 백인 노동계급 구성원들을 이처럼 재앙에 직면한 사람들로 재정의함으로써 그들을 또 하나의 주변화된 인종적 소수자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주류에 속하는 어떤 정치적 목소리도 숙련 일자리의 감소를 세계화와 제조업에 대한 정부 지원의 부재라는 맥락 속에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매일 우익 언론인과 정치인들의 왜곡된 선동에 고스란히 노출되고 있다. 고든 브라운이 ‘영국의 일자리는 영국 노동자들에게’라는 공약으로 희대의 오판을 저질렀을 때, 그는 단지 (영국 기업의) 일자리들이 지금껏 다른 곳으로 유출돼왔다는 견해만 확신하고 있었던 것 같다.

계급정치는 부자들과 그들을 정치적으로 옹호하는 자들의 전유물이 되어버렸는데, 이는 노동계급의 악마화에 핵심적 역할을 해왔다. 부자의 계급정치가 가진 첫번째 신조는 단순 명확하다. 계급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계급을 부정하는 것은 정말 편리하다.

노동계급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혹은 사라지고 있다고 사람들을 기만하는 것은 분명 정치적으로는 유용하다. 지금까지 우리는 차브라는 캐리커처가 대다수 노동계급이 처한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없도록 어떻게 이용됐는지를 살펴봤다. 엘리트 계급의 대변자들이 충분히 간파하듯, 지금까지 좌파가 줄곧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노동계급 덕분이었다.

주장의 결론은 명확하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서 문제라는 것이다. 잔인하게도 이 밑바닥 인생들에겐 자기 자신들 말고는 탓할 사람이 없다.

좌파는 사회에서 가장 주변화된 집단을 꾸준히 옹호한다. 그것은 좌파의 의무기도 하다. 그러나 좌파는 너무도 자주 노동계급을 ‘대체할’ 누군가를 찾아왔다.

금융가들의 탐욕이 빚어낸 경제위기를 겪으며, 부자들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조직된 사회가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사회인지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새로운 계급정치는 헤게모니를 쥐고 있고 어떤 도전도 받지 않는 부자들의 계급정치가 이 사회에 만들어낸 불균형을 시정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개인들의 이익이 아닌, 민중들의 필요에 기반한 새로운 사회를 또 한번 구현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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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브’라는 꼬리표가 붙은 사람들은 복장이나 음식에서 중간계급의 높은 기준을 맞추지 못해 비웃음을 사는 경우가 많다.

반인종주의가 차브 때리기(chav-bashing)를 정당화하는 데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지, 언론인인 야스민 알리브하이-브라운(Yasmin Alibhai-Brown)이 쓴 칼럼을 예로 살펴보자. 칼럼에서 그녀는 "세금을 납부하는 이민자들이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까지도 게으른 영국 거지들이 거실 소파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TV를 보게 해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이민자들)는 이들 게으른 인간들이 원하지 않는 일자리까지도 마다하지 않기 때문에 멸시를 당한다."

차브들에 대한 혐오감을 지속시키는 데 이용되는 또다른 허구는 나이든 점잖은 기성 노동계급은 사라지고 도덕성을 잃어버린 일부 소수만이 남아 있다는 주장이다.

레이첼 존슨은 "우리의 언론 매체는 중간계급에 의해, 중간계급을 위해 운영되는 중간계급의 매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라고 말한다.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차브에 대한 혐오감을 부추긴 언론인들은 소수의 특권층 출신들이다. 그러나 독자들의 절대 다수가 노동자인 신문들조차도 차브 때리기에 동참한다.

노동계급 사람들을 악인으로 만들어서 입장권 가격인상을 정당화하고, 또 가격인상을 통해 노동계급을 축구경기에서 배제시켰다. 이와 동시에 축구는 거액이 오가는 대형 사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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