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도덕의 계보 읽기 세창명저산책 45
강용수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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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음(good)과 나쁨(Bad). 선(Virtue)과 악(Evil). 니체는 선과 악의 가치 판단에서 가치 자체보다 가치를 말하는 사람에게 주목한다. 누가 말하는가에 따라 중심가치가 정해지고 뒤이어 상대가치가 결정된다.

능동적인 감정은 활동적인 것(active)으로서 자신에서 출발하여 타자로 가치 평가를 전환한다. 곧 자신에 대한 긍정에서 타자에 대한 긍정, 또는 부정으로 확대된다. 반면에 반동적인 감정은 반동적인 것(reactive)으로서 타자에서 출발하여 자신에게 되돌아가는 가치 평가로서, 타자에 대한 부정에서 시작하여 자신에 대한 긍정으로 이어진다. 선과 악을 넘어서 있는 것은 좋음과 나쁨이다. _ 강용수, <니체의 <도덕의 계보> 읽기>, p.76/87

고귀한 자들의 가치는 '자기 긍정'에서 출발한다. 이는 곧 좋음이며. 탁월함(Arete)이 다. 이들에게 외부의 '나쁨'은 자신에 미치지 못한 경멸이나 무관심에 불과하다. 그에게 중심은 온전히 그 안에 있다. 이에 반해, 노예의 가치는 증오와 복수심(Ressentiment)다. 그들은 외부를 먼저 본다. 자신을 괴롭히는 강자를 규정하는 가치가 바로 '악'이며, 그 이후 '선'이라는 가치로 자신의 나약함을 합리화한다. 금욕과 무해함이라는 가치는 무력함을 도덕으로 재해석한 결과다. 그의 중심은 언제나 외부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는 도덕의 '지층'을 '쟁기날'로 파헤치는 책이다. 니체는 본문에서 주인의 '좋음'이 노예의 '선'으로 전도되면서 빚어진 비극을 특유의 날카로운 해석으로 해부한다.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니체의 대표작에 대해 강용수의 해설서는 특히 좋음/선, 나쁨/악의 개념 전환을 구조적으로 정리해 주어 초심자가 길을 잃지 않도록 돕는, 큰 흐름을 잡기에 적합한 입문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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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선고 현장은 윤석열을 둘러싼
‘작은 세상‘을 드러내는 자리이기도 했다.
수감 중인 윤석열의 세계에서 그가 마주하는 얼굴은 그를 변호하는 변호인들, 그리고 법정에 모습을 보이는 지지자들이 전부다. 그의 작은 세상에서만 통하던 각종 궤변은 이번 재판과 선고 과정에서 상당 부분 무너져내렸지만, 윤석열은 여전히 그의 세계를 포기할 생각이 없다.  - P11

거듭된 ‘절윤‘ 메시지에도 장동혁 대표를 비롯한 국민의힘 지도부에 ‘윤어게인과 절연한 것이 맞느냐‘라는 질문이 반복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윤어게인 세력이 계속해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 P36

"동양, 특히 한국은 불확실성을 싫어하는 대표적인 나라예요. 제 박사과정 지도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아토피‘가 그리스어로 ‘원인을 알 수없다‘는 뜻이라고. 실제로 아토피는 원인을 알지 못하는 병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아토피‘라고 하면 ‘아, 그거‘ 하고 이해하잖아요. 이름이 있으면 이해가 되는 거죠." - P39

스위스 전체 사망자 중 의사조력자살이 차지하는 비율은 연평균 2% 내외이다. 왜 대다수 스위스 사람들은 그 ‘존엄한 죽음‘을 선택하지 않을까. 그 의사는 집이나 상급병원을 생의 마지막 장소로 선택하는 이가 있듯이, 자신이 만나는 노인들은 요양시설에서 평온하게 지내는삶을 선택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의
‘느긋함‘은 한국의 안락사 논쟁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 P45

역사 동역학적 분석에 따르면, 심각한 빈부격차에 따른 대중의 빈곤과 좌절 엘리트의 수로 볼 때 현재 미국은 무너질 위기기에 처해 있다. 지배 엘리트의 일부인 민주당은 빈부격차와 같은 문제는 건드리지않고,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집 ness PC: 인종, 성별, 성적 지향, 장애 등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적 언어, 행동을 지양하자는 사회적 운동)‘ 지형의 문제중에서만 주로 싸우려 한다. 이들도 세금을기 더 많이 내거나 자기 자식이 엘리트 사회진입에 실패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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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커 다산책방 청소년문학 30
김선미 지음 / 다산책방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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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은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기도 하지만 그 결과가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이 작품을 쓰게 되었다. _ 작가의 말 中

소망을 품는 것과 저주를 원하는 것. 무엇이 다를까?

소망은 마음의 지향이 자신의 내면으로 향한다. 반면, 저주는 외부로 흘러나간다. 한 번 내 손을 떠난 마음은 다른 사람과 부딪히며 어디까지 번질지 알 수 없다. 그 순간부터 그것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으로 넘어간다. 이처럼 둘 사이에는 영향력과 통제가능성이라는 차이가 있다.

저주의 부작용은 그런대로 받아들일 만했는데 자연재해가 일어난다고 생각하니 생각이 많아졌다는 뜻이다. 이렇게 빠르게 일어난다고 하니 당황스러웠다. 인류가 멸종하고 동물만 살아남길 바랐는데 자연재해가 일어나면 동물까지 다치게 된다. _ 김선미, 《스티커》, p.114

철학자 칸트(Kant)는 《실천이성비판》에서 타인을 수단으로 삼지 말라고 말한다. 철학자 칸트는 타인을 수단으로 삼지 말라고 말했다. 저주는 타인의 불행을 목표로 삼는다. 그렇기에 쉽게 정당화되기 어렵다. 작가가 제시하는 ‘선택의 기회’는 이 어려운 도덕을 일상 속에서 실천하게 하는 장치처럼 보인다.

내용을 한 번 더 스스로 적게 하는 이유는 작성하는 동안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진짜 저주를 하고 싶은 건지, 순간적인 충동인지... 손님은 다시 선택의 기회를 얻는다. 추천한 저주 가운데 마음에 드는 게 없으면 입금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저주하지 않을 기회라고 할 수 있다. _ 김선미, 《스티커》, p.145

이 소설은 자극적인 저주의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던진 마음이 어떤 파장을 만들지 생각해 보게 하는 이야기다. 저주는 타인을 향해 날아가지만, 그 파장은 결국 나에게 돌아온다. 그래서 《스티커》는 저주가 아니라 ‘책임’에 관한 성장소설이라 할 수 있다.

PS. 만약 칸트가 이 소설을 읽었다면, 자신의 정언명령이 ‘스티커’라는 이야기 속에서 이렇게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았을지도, 그리고 ‘멈추어 생각하는 힘’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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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 세계에서는 아폴론적 예술가인 조각가의 예술과 디오니소스의 예술인 비(非)조형적 음악 예술 사이에 그 기원과 목표에 따라 커다란 대립이 존재한다는 우리의 인식은 그들의 두 예술의 신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와 결부되어 있다... 그 충동들은 그리스적 "의지"의 형이상학적 기적 행위를 통해 마침내 서로 결합하여 나타나고, 이 짝짓기를 통해 마침내 디오니소스적이기도 하고 아폴론적이기도 한 아티케 비극을 산출한다. _ 《비극의 탄생》, p.25/360

 

니체는 그리스 비극을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로 상징되는 충동들의 격렬한 대립이 낳은 산물로 바라본다. 이제는 문헌으로만 일부 전해지는 그리스 비극. 니체는 《비극의 탄생》을 통해 '우리는 논리적 설명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현대의 우리는 각자 고립된 개별자로 살아가지만, 니체는 이를 고전적 의미의 "개별화의 원리(principium individuationis)"로 파악한다. 이는 단순한 사회적 단절이 아니라, 아폴론적인 '환영'이 만들어낸 존재론적 경계다. 《비극의 탄생》은 '디오니소스적 도취'를 통해 존재론적 경계를 일시적으로 흔들며, 우리의 질문에 답해가는 작품이다. 


 니체는 세계를 불균형과 균형이 동시에 작동하는 생성(Werden)의 장으로 바라본다. 바닷가로 밀려드는 파도처럼 마치 반복처럼 보이지만 매번 다른 배열의 세계. 그것은 끝없는 내면을 향한 '극소(極小)의 무한', 즉 존재의 강도(Intensity)를 높이는 운동이다. 그것은 세계를 더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더 강하게 느끼는 일이다. 아폴론적 개별화의 경계와 디오니소스의 뜨거운 긴장이 충돌할 때, 비로소 무한한 밀도의 창조적 에너지가 분출된다. 아폴론의 명징한 조형 언어는 디오니소스적 파멸의 공포를 '감상 가능한 비극'으로 변주해내는 필수적인 여과 장치다.


  비극은 고통을 거세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의 심연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안락한 '개별화의 감옥'에서 해방시킨다. 관객은 비극을 통해 아폴론적 가상 뒤에 숨겨진 '근원적 일자(Das Ur-Eine)'의 고통스러운 진실을 목도한다.


 '근원적 일자(예술신)'는 스스로의 고통을 예술로 전환하기 위해 '비극'이라는 가상을 만들어내고, 비극은 관객에게 일시적으로 자기 개별성을 넘어서는 힘의 감각을 제공한다. 그리고, 관객들은 비극이라는 거대한 흐름에 몸을 던짐으로써, 스스로가 예술신(근원적 일자)의 창조적 행위 그 자체를 경험한다. 요한 하위징아가 《호모 루덴스》에서 말한 유희적 인간을 넘어, 그리스 관객은 디오니소스적 제의(Orgiasmos)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는 결코 가벼운 '놀이'가 아니다. 자기 파괴를 통해 생명의 근원적 분출을 경험하는 성스러운 Agon(투쟁)이다. 투쟁을 통해 관객들은 아폴론의 언어로 전달된 디오니소스의 정신을 발견하고, 파괴 속에서 솟구치는 생명의 환희를 느끼게 된다.


 이제 처음에 우리가 던졌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논리적 설명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가?' 니체는 되묻는다. '차갑게 설명할 것인가, 뜨겁게 예술로 견딜 것인가?'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삶의 공포를 예술로 견뎌내는 인간은, 개별적 자아를 부수고 세계의 근원적 생명력과 합일된 '비극적 인간(der tragische Mensch)'의 모습을 예고한다. 예술을 통한 고통스러운 현실의 목도. 이것이 곧 개별성의 균열이며, 근원적 생명력의 감각이다.


니체에게 세계는 고정된 실체를 추구하는 형이상학적 여정이 아니라, 존재의 강도를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생명력의 장이다. 니체는 마치 이렇게 도발하는 듯하다. 


우리는 과연 ‘비극적 인간’이 될 수 있는가. 


 AI가 박제된 데이터를 통해 세계를 ‘설명’하려 할 때, 우리는 예술로 세계를 ‘견딜’ 수 있는가. 과연 우리는 아폴론적 이성을 도구 삼아 디오니소스적 카오스를 창조로 전환하려 시도할 수 있는가. 데이터는 개별화된 표상만을 수집한다. 그러나 디오니소스적 체험은 개별화 이전의 강도에 속한다. 그렇게 탄생하는 존재가 바로, 삶의 공포를 예술로 승화하는 ‘데이터에 포섭되지 않는 단독자’다. 그리고 이는 니체가 《비극의 탄생》을 통해 오늘날의 우리에게 전하는 서늘하고도 뜨거운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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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의점. 이제는 거의 건물마다 하나쯤 자리한, 생활용품과 식료품을 갖추고 밤늦게까지 불을 밝히는 상점. 예전에는 동네 슈퍼가 차지했던 자리는 어느새 편의점으로 대체되었다. 동네 사랑방이던 슈퍼에서는 인심 좋은 할머니의 배려로 가능했던 외상이, 바코드로 재고 관리되는 편의점에서는 가능하지 않기에 예전 시골 가게, 동네 문방구에 대한 추억을 가진 세대들에게 편의점이라는 공간은 어쩐지 삭막하게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어쩌다가 우리는 편의점이라는 가장 비인간적으로 보였던 공간에서 인간적인 이야기를 찾게 되었을까.


 삭막함도 반복되면 풍경이 된다. 편의점을 소재로 한 여러 작품들에서는 사람이 교감하는 공간으로 그려진다. 무인 편의점이 늘어나는 요즘, 아르바이트 점원이 있는 상점에서조차 작은 온기를 느끼게 되는 까닭일까. 빠르게 자신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사서 돌아가기 바쁜 편의점 풍경이지만, <불편한 편의점>, <바다가 들리는 편의점>은 그 짧은 순간에서 사람을 느낀다. 점원은 수시로 바뀌고, 손님 또한 대부분 스쳐 지나가는 존재다. 그럼에도 두 작품 모두 점원, 손님에 인격을 부여하며 따뜻함을 나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다만, 이들은 인물, 공간, 온기의 방식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불편한 편의점>은 편의점이라는 일상의 공간에서 우연히 스며드는 관계를 그린다면, <바다가 들리는 편의점>은 소수의 손님과 1:1로 매칭되는 관계가 그려진다. 전자는 우연히 스며드는 관계의 축적이라면, 후자는 특정한 손님과 점장이 1:1로 맺는 선택적 관계에 가깝다. 텐더니스 편의점은 애초에 모두에게 열려 있는 공간이라기보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공간처럼 보인다. 그러고 보면, 이들의 입지도 다르다. <불편한 편의점>은 서울 용산구 청파동이라는 번잡한 동네에 위치한 반면, <바다가 들리는 편의점>은 멀리 떨어진 기타큐슈 모지항에 자리한다. 생활의 동선 위에 놓인 편의점과, 일부러 찾아가야만 닿을 수 있는 편의점. 처음부터 텐더니스 편의점의 손님은 선택된 이들이다. 이런 면에서 일상을 그린 <불편한 편의점>은 사실적인 반면, <바다가 들리는 편의점>은 보다 수채화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충분히 고립된 도시 속에서, 가장 익숙한 공간에서조차 위로를 기대하게 된 것은 아닐까.


 한때는 동네 슈퍼를 몰아낸 삭막한 도시화의 단면으로 보였던 편의점이 이제는 휴머니즘의 공간으로 그려지는 현실을 보며, 삭막함에 아쉬워해야 할지, 아직은 사람의 온기가 남은 곳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해야 할지 묘한 감정이 교차한다. 편의점은 여전히 바코드와 계산대의 공간이지만, 그 안에서 잠시라도 사람이 사람을 바라보는 순간이 있다면, 우리는 아직 완전히 삭막해진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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