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세계에서는 아폴론적 예술가인 조각가의 예술과 디오니소스의 예술인 비(非)조형적 음악 예술 사이에 그 기원과 목표에 따라 커다란 대립이 존재한다는 우리의 인식은 그들의 두 예술의 신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와 결부되어 있다... 그 충동들은 그리스적 "의지"의 형이상학적 기적 행위를 통해 마침내 서로 결합하여 나타나고, 이 짝짓기를 통해 마침내 디오니소스적이기도 하고 아폴론적이기도 한 아티케 비극을 산출한다. _ 《비극의 탄생》, p.25/360

 

니체는 그리스 비극을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로 상징되는 충동들의 격렬한 대립이 낳은 산물로 바라본다. 이제는 문헌으로만 일부 전해지는 그리스 비극. 니체는 《비극의 탄생》을 통해 '우리는 논리적 설명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현대의 우리는 각자 고립된 개별자로 살아가지만, 니체는 이를 고전적 의미의 "개별화의 원리(principium individuationis)"로 파악한다. 이는 단순한 사회적 단절이 아니라, 아폴론적인 '환영'이 만들어낸 존재론적 경계다. 《비극의 탄생》은 '디오니소스적 도취'를 통해 존재론적 경계를 일시적으로 흔들며, 우리의 질문에 답해가는 작품이다. 


 니체는 세계를 불균형과 균형이 동시에 작동하는 생성(Werden)의 장으로 바라본다. 바닷가로 밀려드는 파도처럼 마치 반복처럼 보이지만 매번 다른 배열의 세계. 그것은 끝없는 내면을 향한 '극소(極小)의 무한', 즉 존재의 강도(Intensity)를 높이는 운동이다. 그것은 세계를 더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더 강하게 느끼는 일이다. 아폴론적 개별화의 경계와 디오니소스의 뜨거운 긴장이 충돌할 때, 비로소 무한한 밀도의 창조적 에너지가 분출된다. 아폴론의 명징한 조형 언어는 디오니소스적 파멸의 공포를 '감상 가능한 비극'으로 변주해내는 필수적인 여과 장치다.


  비극은 고통을 거세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의 심연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안락한 '개별화의 감옥'에서 해방시킨다. 관객은 비극을 통해 아폴론적 가상 뒤에 숨겨진 '근원적 일자(Das Ur-Eine)'의 고통스러운 진실을 목도한다.


 '근원적 일자(예술신)'는 스스로의 고통을 예술로 전환하기 위해 '비극'이라는 가상을 만들어내고, 비극은 관객에게 일시적으로 자기 개별성을 넘어서는 힘의 감각을 제공한다. 그리고, 관객들은 비극이라는 거대한 흐름에 몸을 던짐으로써, 스스로가 예술신(근원적 일자)의 창조적 행위 그 자체를 경험한다. 요한 하위징아가 《호모 루덴스》에서 말한 유희적 인간을 넘어, 그리스 관객은 디오니소스적 제의(Orgiasmos)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는 결코 가벼운 '놀이'가 아니다. 자기 파괴를 통해 생명의 근원적 분출을 경험하는 성스러운 Agon(투쟁)이다. 투쟁을 통해 관객들은 아폴론의 언어로 전달된 디오니소스의 정신을 발견하고, 파괴 속에서 솟구치는 생명의 환희를 느끼게 된다.


 이제 처음에 우리가 던졌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논리적 설명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가?' 니체는 되묻는다. '차갑게 설명할 것인가, 뜨겁게 예술로 견딜 것인가?'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삶의 공포를 예술로 견뎌내는 인간은, 개별적 자아를 부수고 세계의 근원적 생명력과 합일된 '비극적 인간(der tragische Mensch)'의 모습을 예고한다. 예술을 통한 고통스러운 현실의 목도. 이것이 곧 개별성의 균열이며, 근원적 생명력의 감각이다.


니체에게 세계는 고정된 실체를 추구하는 형이상학적 여정이 아니라, 존재의 강도를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생명력의 장이다. 니체는 마치 이렇게 도발하는 듯하다. 


우리는 과연 ‘비극적 인간’이 될 수 있는가. 


 AI가 박제된 데이터를 통해 세계를 ‘설명’하려 할 때, 우리는 예술로 세계를 ‘견딜’ 수 있는가. 과연 우리는 아폴론적 이성을 도구 삼아 디오니소스적 카오스를 창조로 전환하려 시도할 수 있는가. 데이터는 개별화된 표상만을 수집한다. 그러나 디오니소스적 체험은 개별화 이전의 강도에 속한다. 그렇게 탄생하는 존재가 바로, 삶의 공포를 예술로 승화하는 ‘데이터에 포섭되지 않는 단독자’다. 그리고 이는 니체가 《비극의 탄생》을 통해 오늘날의 우리에게 전하는 서늘하고도 뜨거운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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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의점. 이제는 거의 건물마다 하나쯤 자리한, 생활용품과 식료품을 갖추고 밤늦게까지 불을 밝히는 상점. 예전에는 동네 슈퍼가 차지했던 자리는 어느새 편의점으로 대체되었다. 동네 사랑방이던 슈퍼에서는 인심 좋은 할머니의 배려로 가능했던 외상이, 바코드로 재고 관리되는 편의점에서는 가능하지 않기에 예전 시골 가게, 동네 문방구에 대한 추억을 가진 세대들에게 편의점이라는 공간은 어쩐지 삭막하게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어쩌다가 우리는 편의점이라는 가장 비인간적으로 보였던 공간에서 인간적인 이야기를 찾게 되었을까.


 삭막함도 반복되면 풍경이 된다. 편의점을 소재로 한 여러 작품들에서는 사람이 교감하는 공간으로 그려진다. 무인 편의점이 늘어나는 요즘, 아르바이트 점원이 있는 상점에서조차 작은 온기를 느끼게 되는 까닭일까. 빠르게 자신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사서 돌아가기 바쁜 편의점 풍경이지만, <불편한 편의점>, <바다가 들리는 편의점>은 그 짧은 순간에서 사람을 느낀다. 점원은 수시로 바뀌고, 손님 또한 대부분 스쳐 지나가는 존재다. 그럼에도 두 작품 모두 점원, 손님에 인격을 부여하며 따뜻함을 나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다만, 이들은 인물, 공간, 온기의 방식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불편한 편의점>은 편의점이라는 일상의 공간에서 우연히 스며드는 관계를 그린다면, <바다가 들리는 편의점>은 소수의 손님과 1:1로 매칭되는 관계가 그려진다. 전자는 우연히 스며드는 관계의 축적이라면, 후자는 특정한 손님과 점장이 1:1로 맺는 선택적 관계에 가깝다. 텐더니스 편의점은 애초에 모두에게 열려 있는 공간이라기보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공간처럼 보인다. 그러고 보면, 이들의 입지도 다르다. <불편한 편의점>은 서울 용산구 청파동이라는 번잡한 동네에 위치한 반면, <바다가 들리는 편의점>은 멀리 떨어진 기타큐슈 모지항에 자리한다. 생활의 동선 위에 놓인 편의점과, 일부러 찾아가야만 닿을 수 있는 편의점. 처음부터 텐더니스 편의점의 손님은 선택된 이들이다. 이런 면에서 일상을 그린 <불편한 편의점>은 사실적인 반면, <바다가 들리는 편의점>은 보다 수채화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충분히 고립된 도시 속에서, 가장 익숙한 공간에서조차 위로를 기대하게 된 것은 아닐까.


 한때는 동네 슈퍼를 몰아낸 삭막한 도시화의 단면으로 보였던 편의점이 이제는 휴머니즘의 공간으로 그려지는 현실을 보며, 삭막함에 아쉬워해야 할지, 아직은 사람의 온기가 남은 곳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해야 할지 묘한 감정이 교차한다. 편의점은 여전히 바코드와 계산대의 공간이지만, 그 안에서 잠시라도 사람이 사람을 바라보는 순간이 있다면, 우리는 아직 완전히 삭막해진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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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준이라는 이름은 그간 과도한 플랫폼 노동 구조 속에서 안타깝게 희생된 인물 정도로 기억됐다. 그러나 새로운 폭로와 자료를 통해, 장씨의 죽음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쿠팡이라는 기업은 산재를 ‘어떻게‘ ‘얼마나 열심히‘ ‘조직적으로 은폐하려 했는가. - P9

다수의 직원들이 일일이 기록한 장씨의 ‘행동 데이터‘는 항목별로 합산되었다. 고발장에 첨부된 또 다른 사진 자료에 따르면, 쿠팡 직원들은 당시 장씨의 일거수일투족을 총 8가지 카테고리로 분류해 분 단위로 기록했다. 일하는 도중 화장실을 몇 분 동안 갔는지, 업무 중간 중간 동료와 대화를 나누거나 잠시 서 있는 시간은 몇 분이었는지, 업무 중에 물을 마신시간은 몇 분이었는지도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다. - P11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인구 300만명이 넘는 부산이 왜 소멸위험지역등으로 분류됐는지 말이다. 과거 개발 시대,
중앙정부가 설계한 국가전략에 따라 몸집을 불려온 부산은 정작 그 거대한 덩치를 유지할 ‘스스로의 결정권‘을 가져본 적이 없다. 지역의 미래를 지역이 직접 결정하지 못한 채 국가가 정해준 경로만을 뒤따랐던 자치 공백이 결국 오늘날의 쇠락을 불러왔다는 뼈아픈 진단이다. - P16

보수 출신 인사들의 민주당행은 분명하나의 ‘현상‘이다. 이는 국민의힘에 부담을 가중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판세‘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상과 판세가 인물의 됨됨이를 드러내진 못한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옷을 갈아입는다고 사람이 달라지는가. 서부 경남 유권자들 앞에 놓인 선택지는 역설적이다. 보수 독식 체제를 개르고 싶어도, 그 대안으로 나선 이들은 저마를 다 과거의 짐을 짊어지고 있다. - P18

이 문제는 ‘기후정의‘와도 맞닿아 있다. 기후위기는 모두에게 같은 방식으로 닥치지 않고 그 부담은 더 취약한 곳으로흘러간다. 농촌은 도시보다 쓰레기를 적게 만들지만, 처리는 훨씬 어렵다. 집중호우는 농로와 하천변에 쌓인 쓰레기를 유실시키고, 폭염은 악취와 위생 문제를 키운다. 특히 소각은 산불로 번질 위험이 크다. - P20

재판소원 제도의 도입은, 이 판결과 무관하게, 재판청구권을 침해하는 위법·위헌의 재판절차 관행을 깨기 위해 당연히 필요하다. 대법원장이나 법원장은 재판에 개입해도 직권남용죄 무죄라는 부끄러운 전원합의체판결은 재판소원의 정당성을 높여주는불쏘시개가 될 것이다.  - P27

워시가 새 연준 의장으로 취임한다면 그는 앞으로 4년 동안 두 가지의 곡예를 부려야 한다. 우선, 양적긴축과 동시에 장기 국채금리의 상승을 막아야 한다. 술마시고 운전대에 올랐으나 음주운전은 하지 않는 수준의 난이도다. 그러나 더 어려운 일이 있다. 경제 데이터가 ‘기준금리인하 불가‘로 나오더라도 워시는 트럼프의 명령을 수행해야 한다. 연준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트럼프를 거스른다면?트럼프는 ‘배신자‘를 그냥 두는 사람이 아니다. - P33

재생에너지는 민주주의를 양분 삼아 자란다. 재생에너지가 확대된다는 것은 정부로부터 독점된 에너지 권력을 다양한 시민들이 나눠 갖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어린이도, 노인도 모두 에너지의 주인이 될 수 있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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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
백승영 지음 / 책세상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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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주체로 위버멘쉬를, 위버멘쉬라는 존재 양태를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영원회귀 사유를 제시한다. 이렇듯 디오니소스적 긍정은 오로지 영원회귀 사유에 의한 인간의 위버멘쉬적 존재로의 변화에 의해서만 가능하게 된다. 위버멘쉬적 존재로의 변화는 곧 인간의 자기 긍정의 표현이며, 인간의 운명에 대한 사랑이다. 니체가 운명애 Amor fati를 디오니소스적 긍정에 대한 최고의 표현으로 제시하는 것은 이런 맥락이다. _ 백승영,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 p.111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을 통해 힘에의 의지, 위버멘쉬, 영원회귀의 주요 개념을 바탕으로 형이상학, 윤리학, 예술생리학, 인식론 등 여러 부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외부에서 우리를 억압하는 낡은 가치, 도덕 등의 힘에 저항하여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고양시키는 힘에의 의지를 갖고, 영원 대신 순간을 살아가는 위버멘쉬(초인). 과거를 극복하는 순간 바로 다음에 주어지는 가치의 도전을 웃으며 받아들이며 끊임없이 나선형 상승의 궤적을 그리며 나아가는 방향성.


 인간이 스스로를 가치의 설정자이며 창조자로, 해석 주체로 긍정하는지의 여부에 따라서 관점적 인식 상황이 단순한 허무적 위험으로서의 데카당스인지 아니면 그 반대로 적극적 기회의 역할을 하는지가 결정된다. _ 백승영,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 p.213


 알 수 없는 이데아를 향한 막연한 기대를 품고 현실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부딪히고 현실에서 이상향을 만들려는 처절한 삶의 투쟁. 그 과정에서 주어지는 운명적 패배마저도 웃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초인의 모습. 그의 발 아래 서양 전통의 진(眞), 선(善), 미(美)는 파괴된다. 마치 눈 먼 삼손이 건물 기둥을 무너뜨리며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최후를 맞이하듯, 니체 또한 그의 철학을 통해 서양 철학의 토대를 무너뜨리며 그의 죽음과 함께 20세기를 연 것은 아니었을까. 


 여기에 더해 니체 초기 <비극의 탄생>에서 보였던 예술적 구원에 대한 갈망이 힘에의 의지를 통해 스스로의 구원이 되었는가를 담아둔다. 이를 바탕으로 니체의 저작들을 차례로 읽어보자. 낡은 관습이 누르는 중력을 거부하고, 자신 스스로의 의지를 갖고 순간을 살아가는 위버멘쉬의 발자취를 따라서...


 다수로 존재하고 관계적으로 존재하는 힘에의 의지를 니체는 생기Geschehen라고 부른다. 더불어 이런 힘에의 의지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생기라는 이름을 부여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에 내재하는 "내적 생기 innerliches Geschehen"이기도 하다. _ 백승영,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 p.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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