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to Dugarjapov  (러시아, 1966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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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네파벨 2005-10-24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눈부시다기보다 왜...쓸쓸하다는 느낌이 들죠?
왠지...뜨는 해가 아니라 지는 해(석양)를 바라보는 느낌이 들어서요.
저는 사춘기 무렵..해가 질 때면 아주 발광을 할 정도로 괴로와지곤 했어요. 그때 딱...독서실에서 집에 밥먹으러 오던 무렵이던가..항상 해가 어둑어둑 질 무렵에 거리에 나올 일이 있었는데...너무 괴롭고 힘들어서 견디다못해 엄마께 도시락을 싸다달라고 부탁을 했다눈...거의 병적이었죠..

얼마 후 읽은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책에..조르바 역시 해질녁이면 괴로움에 빠진다는 대목을 읽고 무릎을 쳤답니다.

그게...예전에 미개인들은 해가 져버리면 다시 떠오를지 확신이 없어서 엄청난 두려움에 빠졌었고...그래서 밤새 해를 부르는 의식을 했다던가 어쨌다던가..암튼 그 두려움이 우리 핏속에(유전자에!) 새겨져서 일부 사람들(조르바나 저 같은)에게 비합리적인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는..뭐 그런 내용을 읽은거 같아요...

지금은 그때보다 덜하지만..여전히..해질녘에는 마음이 쓸쓸하고 불안해지죠...

어쨌든...
아름다운 그림이예요...
 
달의 제단 - 개정판
심윤경 지음 / 문이당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오호라, 신기하지 않은가.

여자작가가 쓴 남자 주인공 심리라니. 여자 작가가 1인칭 시점으로 남자 주인공을 설정한 소설은 샬롯 브론테의 The Professor 이후 간만에 본다. The Professor는 여자 작가의 가치관이 투영된 남자 주인공의 의식이 읽으면서도 참으로 계속 불편하게 느껴졌었는데, 어째 이 소설은 덜 하다.

대체로 남자 작가가 그려내는 여자 주인공(1인칭 이 있던가?????)은 주로 3인칭 타자로만 억세게 그려지더만. 살덩이, 요부, 부정형의 혼돈, 비논리,,,,,등등으로 채색되어. (정말...이것 밖에 못보냐???하고 덩달아 외쳐주고 싶을만큼 철저히 외곡하더만.)

여자 작가가 쓴 1인칭 남자 주인공의 심리는 어떠한가. 여성작가가 재현해 낸 가부장 사회는 어떠한가. 어찌 더욱 예리한 통찰이 내비치는 가.

차이는 과연, 비기득권자가 기득권 사회를 보는 시각일까.

아, 궁금하다. 내가 여성 독자라서 모르는 것일까. 헤이. 남성 독자들 어디 한 번 한 마디 해보시게나들.

과연 여성작가가 그려낸 1인칭 남자 주인공 심리에서 어떠한 불편함과 낯설음을 느끼는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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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근깨 2005-06-02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1인칭 남자 주인공 전문(?)이야요..데뷔작도 그렇고...^^;;..그나저나 요새 어찌 지내시나요...지나가다 궁금궁금...

2005-08-15 1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왜 영어가 세계어인가
데이비드 크리스털 지음, 유영난 옮김 / 들녘 / 2002년 5월
평점 :
절판


'리딩' 유니버시티 가 아니라 '레딩' 유니버시티 라고 읽습니다.

영문학이건 영어교육학이건 전공하신 분이라면 아실 겁니다. 원어민들이 발음하는 대로 적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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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확실히 있다
토마스 주 남 지음, 조용기 옮김 / 서울말씀사 / 2003년 12월
평점 :
품절


로 쓰여진 책이라는 데에 동의할 수 밖에 없다.

실질적으로 천국은 존재하고, 이 세상이 천국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확신을 준 책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막연하게나마 구원받았고 새 예루살렘에서 주님을 뵐 수 있을 거라는 느낌이 아니라 실존하는 천국을 확인 받을 수 있었고, 내 가족 그 어느 누구도 지옥에 가게 해서는 안된다는 절실한 동기 부여를 준 책이었다.

중간에 겹치는 부분이 많고 늘어지는 구성이 있으며, 저자의 묘사가 실제 보고 싶은 것을 많이 보고 온 바,가 있으나, 세상에서 잘난 자가 아니라 평범한 자를 통해 역사하시는 주님의 방식으로 볼 때에 외려 저자의 평범성이 진실하게 다가왔다.

나 역시 이따금 영적인 체험을 한다. 이 육신 이외에 눈을 뜨고 돌아보는 다른 몸이 있다는 것을 안다. 주로 나는 훼방하는 악의 영들을 본다. 기도하고 열심을 낼 때에 극렬하게 훼방하고 형상으로 위협하고 겁을 주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동시에 내 속에 뜨거운 불길로 타올라 역사하시는 내 안에 임재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체험한다. 아직 믿음이 작은 자라 파도처럼 일렁이는 성령님의 움직임은 어떤 것인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온통 내 속에서 일렁이며 꿈틀 거리며 마음을 치는 성령님의 역사를 어찌 부인할 수 있으랴 말이다. 가위에 눌리고 악한 영들의 형상을 볼 때마다 두려워 벌벌 떨지만, '예수 이름으로' 물리칠 ‹š에, '예수'라는 단어만을 듣자마자 우당탕당 도망치는 것을 보았고, 그 이름의 권세를 실감한다.

이 책을 읽고 박스터 여사의 지옥은 있다, 도 읽었다. 영원히 불타는 지옥 역시 실존한다. '불지옥'이라는 게 유치하다, 고 생각할 수 있으나, 이따금 기도 할 때에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내 부정함이 너무도 절절하게 마음을 찔러 통곡하고 울 수 밖에 없다. 하나님 앞에 섰던 자들이 감히 부정한 자로 주님을 보았다고 엎드려 졌던 것 처럼, 인간의 몸을 입고 죄된 속성을 가지고 주님의 심판 앞에 서면 온통 그 부정함을 감당을 못해 정말 활활 영혼까지 타고도 남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지옥은 있다, 에서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은 주님의 영적인 역사가 이땅의 크리스천들의 기도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깨달음이었다. 사탄의 역사 역시 내가 틈을 주고 방심할 때에 문을 열고 들어오며 (정말 문과 창문으로 들어온다. 이 존재들은. 내 영적인 주거를 표상하는 물질적인 집의 형태를 문을 통해, 창문을 통해 걸어들어온다.), 하나님의 역사 역시 이 미천한 자의 겨자씨만도 못한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받으셔서 불길같이 역사하심이다. 크리스천들의 기도가 적어서 영적인 전투에서 힘겹다는 천사의 호소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어디까지가 인간의 의지이고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개입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 유한한 3차원 존재의 유한한 기도가 수십차원을 넘어서는 무한한 하나님의 차원으로 열리는 통로임을 안다. 시간을 앞서가시고 온 우주의 지식을 앞서가시는 존재가 단 하루 24시간내내도 하나님을 담고 있지 못하는 이 존재가 드리는 1분, 5분, 10분, 30분의 기도를 통해 어마어마한 차원의 문을 열고 내게 달려 오심은 황홀한 경험이다.

기도 중에 하나님은 온 우주를 지은 내가 너를 위하여, 너 하나를 위하여 온 우주를 버렸다, 는 감히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구원에 합당하지 못한 죄인이나, 조금이라도 그 사랑에 감당하는 길을 이제는 걷고 싶다. 질기도록 변하기 힘들없고, 질기도록 돌이키기 힘들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는 사는 크리스챤들이 있는데, 왜 나에게만, 이런 걸 요구하냐고 못 변하겠다고 차라리 죽여달라고 대들고 울부짖었었다. 그러나, 이제....고난의 풀무에서 나를 택하셨다는 주님의 말씀의 지극한 주님의 사랑임을 안다.

악한 영들을 보거나 느껴서 두렵고 무섭고 시험들 때, 이 육체를 찢어서라도 내 영혼만은 주님께 드린다, 고 처절히 투쟁해야 하지만, (아...아직도 무섭다) 이것이 시작임을 이제 나는 이 3차원의 세상에 살되 수십차원의 scheme대로 움직이는 존재로 변했음을 알기에 가슴은 뛴다. 이 땅에서 하늘나라를 체험한다는 비밀이 이 것임을 감히 고백한다. 중상과 모략과 경쟁이 넘치는 직장서 이전에 나는 조그만 악의에도 내 마음하나 지키지 못하고 금세 무너지고 악의를 악의로 갚고자 분분하는 세상의 인간이었으나, 어떤 중상과 악의와 모략이 나를 둘러싸도 그 3차원의 계략을 넘어서는 수십차원 높은 세계의 행로에 내 발걸음이 있음을 알 때, 그 세상의 방식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다른 세상을 볼 수 있음을 믿는다.

야곱이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하늘로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봤다는 구절이 실질적으로 존재함을 믿지만, 하늘이 열리고 보다 높은 차원의 행로의 일부가 되었음을 통해 이 구절이 또한 내게 이루어짐을 믿는다. 나는 그 믿음으로 차원의 한계를 뛰어 넘어 이미 하늘의 길을 걷는 자이다.

시간을 뛰어넘으셔서 내 결국을 아시는 주님께 그래서 기도한다.

주님. 제게 두신 주님의 소망이 이미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수고와 주님의 역사를 통해 시간을 뛰어넘는 그 시간에서 이미 이루어졌음을 감사드립니다. 제가 정녕 죽지 않고 살아서 주님께서 이루신 그 소망을 보고,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양하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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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빈치 코드 1
댄 브라운 지음, 양선아 옮김, 이창식 번역 감수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서양 문화의 상징과 코드, 그 안에 담긴 생명과 사랑에 대한 메시지까지 원한다면 움베리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푸코의 추를 볼지니, 그 발끝에도 못미치는 어설픈 지식을 뒤범벅한 책이 왜 그리 인기란 말인가. 물론 단 한가지 장점이 있지. 에코의 책보다 쉽다는 것.

그래서,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근거가 대략 다빈치의 그림에 대한 해석 뿐이란 말인가.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 옆에 그린 인물이 막달라 마리아라는 해석 하나가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 근 2천년 다져온 종교를 뒤엎을 만한 근거나 된단 말인가. 성당기사단에 대한 내용은 완전히 허구인거고, 서구 문학에서 그리도 오래 울거먹은 성배찾기 (Quest for Holy Grail)이 단지 막달라 마리아와 교합의 상징이었단 말인가. 움푹 들어간 용기나 잔이 '여성 상징'이라는 건 이미 수천년 수만년 인간 의식, 무의식에서 지속된 바, 남녀의 교합이 그리도 축복받을 성당기사단의 비밀이었단 말인가 말이지.

아주 기독교 문명의 심오한 상징을 깡그리 하향 평준화 시키는 구나.

이집트 신화를 짜집기하고 재 창조한 게 기독교가 아니라, 단지 선사 시대 이전부터  인간 문화에 공통적인 상징을 공통 분모로 가지고 있을 뿐인데 말이다.

예수를 믿지 않아도 좋지만, 일개 야만족에 불과한 게르만 족을 세계 최강의 문명으로 부흥 시킨 기독교의 코드를 그렇게 폄하 시키지는 말란 말이다.

포퓰리즘의 결정체. 딱, 대중이 이해할 만큼의 얄팍한 지식으로 포장한 상업주의의 승리.

더도 말고 덜도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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