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1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88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문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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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읽다가 멈춘 책이다. 라스콜니코프가 살인하는 장면,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고 노파의 동생에게 우발적으로 도끼를 휘두르는 장면에서 책을 미뤄뒀었다. 몇 십 년 전 일이다.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됐는지는 기억에 없었다. 그러나 도끼로 노파의 머리를 가격한 장면, 벌벌 떨며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또다른 피해자에 대한 붉은 이미지는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내게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은 선혈이 낭자한 범죄로 구성된 추측이었다. 추측을 사실로 대체하기까지 오래 걸렸다. 문학동네에서 세계문학 전집으로 『죄와 벌』을 발간하면서 다시 읽을 기회가 왔다.


책은 책임질 수 없는 이상을 쫒아 살인을 저지른 라스콜니코프가 고뇌 끝에 자수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가족, 친구,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과 거주지 인근에 사는 주변 인물들의 사연이 라스콜니코프 이야기의 사이사이에 끼어든다.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실행한 살인은 주인공에게 공포 이외에 아무 것도 가져다주지 못한다. 자신의 범죄가 밝혀질까 두려워하고 그런 두려움 때문에 쇠약해져가는 자신에게 환멸을 느낀다. 그의 두려움에는 죄책감이 담겨있지 않다. 사람을 죽인 일에 대한 죄스러움이나 후회가 없다. 그저 자신이 스스로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라는 단 하나의 사실에 좌절한다.


다시 읽은 『죄와 벌』에서 가장 눈에 들어온 부분은 이 책이 ‘심리해부서’라는 것이었다. 작가는 일찌감치 살인 사건의 범인을 드러내고 그가 자수에 이르기까지의 심리를 철저히 묘사한다. 라스콜니코프는 살인을 저지르기까지 무척 망설였다. 막연히 세운 범행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를 미뤘었다. 그러나 우연히 엿듣게 된 대화가 범행을 촉발한다. 잔인한 행동에 대한 두려움, 망설이는 자신에 대한 실망이 교차하는 심리가 촘촘히 이어진다.


‘정말 그렇게 끔찍한 생각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단 말인가? 내 마음이 그렇게 더러운 걸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무엇보다도 더럽고 지저분하고 추악하다, 추악해! 그런데도 나는, 한 달 내내……’ 

1권 p.19


하지만 도대체 왜, 도대체 왜 그렇게 중요하고, 그렇게 결정적이며, 동시에 그렇게 순전히 우연한 만남이 센나야 광장에서(더구나 그 길로 갈 필요도 없었는데), 하필 바로 그 시간에, 인생의 그런 순간에, 다시 말해 운명 전체에 너무나 결정적이고 너무나 최종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그런 기분과 그런 상황에 자신이 놓여 있을 때 그것이, 그 만남이 다가왔을까?라고 그는 항상 묻곤 했다. 꼭 일부러 거기서 그를 기다리기나 한 듯이 말이다!

 1권 p.97


전당포 노파와 그 동생을 살해한 후 라스콜니코프는 혼돈에 빠진다. 머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살인의 광경에 더해 누군가 자신의 범행을 알아챌까 전전긍긍한다. 자신을 돌봐주려는 친구와 오랜만에 상봉한 어머니, 여동생까지 밀쳐낸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비밀을 가졌기 때문에 세상에 혼자 남은 것 같은 고독감을 느낀다.


이 순간 스스로를 모든 사람, 모든 것으로부터 가위로 도려낸 것처럼 느껴졌다. 

1권 p.179


노파를 살해하고 괴로워하는 라스콜니코프를 보면서 ‘대체 왜 살인을 저지른 걸까’라는 질문이 계속 떠올랐다. 사건의 희생자는 없는 사람들의 푼돈까지 끌어모으는 밉상이긴 했지만 직업이 그런 것일뿐 잘못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또 돈이 궁색해져 살인을 저질렀다면 훔쳐낸 금품을 잘 이용해야하지 않는가 말이다. 라스콜니코프는 범죄현장에서 허둥지둥 챙겨 온 금품이 뭔지도 알려하지 않고 땅에 묻어버린다. 게다가 자신에게 있는 얼마 안되는 돈도 어려운 사람을 만나면 스스럼없이 줘버린다. 그렇다면 그의 범죄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핵심은, 이분 논문에서는 모든 사람이 어떻게든 ‘평범한 사람’과 ‘비범한 사람’으로 분류된다는 거지. 평범한 사람은 순종하며 살아야 하고, 법을 뛰어넘을 권리를 갖지 않아, 왜냐하면 알다시피 그들은 평범하니까. 반면 비범한 사람은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온갖 방법으로 법을 뛰어넘을 권리를 갖는데, 그건 그들이 말 그대로 비범하기 때문이야.“

 1권 p.401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이 ‘비범한 사람’이길 원했다. 법을 초월한 권리를 가진 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의 생각에 역사적으로 위대한 사람들은 범죄에서 자유로웠다. 그러므로 ‘비범한’ 자신이 세상의 피를 빠는 ‘이’같은 존재인 전당포 노파를 없앨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쩌면 성공적일 수 있었다. 그를 의심할 수 있는 심증은 있었지만 물증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자신이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는 ‘비범’하지 않았다.


“난 당신에게 절을 한 게 아니야. 난 모든 인류의 고통에 절을 한 거야.”

“내가 당신에 대해 그렇게 말한 건 수치와 죄가 아닌, 당신의 크나큰 고통 때문이야. … 당신이 죄인인 이유는 무엇보다 자신을 헛되이 죽이고 배반했기 때문이야. … 자신이 그렇게 증오하는 더러운 삶을 살면서, 동시에 그러다 한들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하고, 누군가를 어떤 것으로부터도 구원할 수 없다는 걸 스스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끔찍하지 않을 수 있겠어!” 

2권 p.75


소냐의 고통은 라스콜니코프에게 동류의식을 일깨웠다. 그녀가 ‘자신을 헛되이 죽이고 배반’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소냐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몸을 판다. 그녀의 희생에도 가족은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데다 아버지는 딸의 몸값으로 술독에 빠져 있다. 라스콜니코프는 소냐의 값없는 희생이 마치 자신의 것과 같다고 느꼈다. 소냐를 만난 후 그는 ‘강렬한 생명의 느낌’을 경험한다.


그는 온몸에 열이 났지만 그걸 의식하지도 못한 채, 서두르지 않고 조용히 걸어내려갔는데, 어떤 새롭고 무한하며, 갑자기 밀어닥친 충만하고 강렬한 생명의 느낌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 느낌은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 느닷없이 뜻밖의 사면을 받았을 때의 느낌에 비견할 만한 것이었다.

 1권 p.290


"신기루야 사라져라, 거짓된 공포도 사라져라, 환영이여 사라져라!…… 삶이 있다! 나는 지금 살아있지 않은가? 내 삶은 아직 늙은 노파와 함께 죽어버리지 않았다! 하늘의 왕국이 노파에게 임했으니 그걸로 되었다, 노파여, 이제 편히 쉬시라! 이제 이성과 빛의 왕국이, 그리고…… 의지와 힘의 왕국이 도래하리니…… 어디 두고 보자! 한번 겨뤄보자고!“ 어떤 어두운 힘을 향해 도전하듯 그가 오만하게 덧붙였다. ”난 이미 1아르신의 공간에서 사는 데 동의하지 않았던가!“

 1권 pp.292-293


사건을 조사하던 예심판사 포르피리는 라스콜니코프의 심리를 꿰뚫어 본다. 예심판사는 라스콜니코프가 잡지에 게재한 논문과 사건 후 그가 보인 행동을 분석한다. 다른 일을 가장해 예심판사를 찾아간 라스콜니코프를 우회적으로 추궁하는 장면은 심리묘사의 절정이다.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듯 질문하는 포르피리와 교묘히 피해가는 라스콜니코프의 대화는 긴장의 연속이다. 포르피리는 라스콜니코프가 무엇 때문에 범행했는지 그리고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할지까지 내다보고 있다.


현실과 본성은 말입니다, … 때로는 대단히 통찰력 있는 생각도 쓸모없게 만들어버리지요! … ‘모든 장애를 넘어서려는’ 젊은이는 자기 재치에 푹 빠져서 이점은 생각조차 못합니다. … 본성이라는 거울은, 그 거울은 정말 투명하게 비춰주지요! 

2권 pp.107-108


도망은 추악하고 고단한 일이지만, 당신에겐 무엇보다 삶과 일정한 지위, 그에 상응하는 공기가 필요합니다. 자, 그곳에 당신에게 맞는 공기가 있을까요? 도망쳐도 스스로 돌아올 겁니다. 당신은 우리 없이는 안 되니까요

2권 p.297


라스콜니코프는 범행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범행이 죄라는 생각에 짓눌린 자신 때문에 자수를 생각한다. 소냐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한 후의 일이다. 소냐와 함께 한 순간은 그에게 ‘이해받는’ 시간이었다. 소냐가 그의 행동 모두를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마음으로 다 이해해”보려 했다. 이해해보려는 마음, 라스콜니코프를 움직인 것은 그 마음이었다고 생각한다.


“그저 지금에 와서야, 이 불필요한 수치를 감당하러 가기로 결심한 지금에 와서야 내 소심함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확실히 알겠구나! 난 단지 내 비열함과 무능함 때문에 그렇게 결심한 것뿐이야, 더구나 어쩌면 그게 더 이로울 테니까, 그…… 포르피리가 제안했듯이 말이야!……”

 2권 p.386



라스콜니코프는 속죄하지 않았다. 자수를 통해 쫒기는 자로서의 고통을 덜었을 뿐이다. 그는 여전히 평범한 사람과 법을 뛰어 넘는 사람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고수한 채이다.


‘자, 어째서 내 행동이 저들에게 그렇게 추악하게 여겨지는가? … ‘악행이라서? ’악행‘이란 단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 양심은 평온하다. 물론 형사상의 범죄를 저질렀다. … 자, 그러니 법조항 대신 내 목을 가져가란 말인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당연히 권력을 물려받지 않고 스스로 쟁취한 많은 인류의 은인들조차 첫걸음을 내딛자마자 처형당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자신의 걸음을 견뎌냈고, 그래서 그들은 옳다. 하지만 난 견뎌내지 못했고, 그래서 그 걸음을 자신에게 허용할 자격이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가 인정한 유일한 자신의 죄였다. 첫걸음을 견뎌내지 못하고 자수했다는 것, 그뿐이었다. 

2권 p.425


라스콜니코프는 8년간의 수감을 선고받고 유형을 떠난다. 소냐는 유형지로 그를 따라 나선다. 에필로그에는 소냐의 정성과 라스콜니코프의 감화가 드러나 있다. 내겐 에필로그가 사족처럼 느껴졌다. 급조된 해피엔딩의 느낌이랄까. 작가가 그런 행복한 결말을 위해 긴긴 이야기를 끌어온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럴 요량이었다면 등장인물의 심리를 생각의 세밀한 토막까지 서술하는 작가가 이렇게 짧게 처리할리 없다. 라스콜니코프의 참회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그 역동적인 과정을 놓쳤을 것 같지 않았을 것 같다. 


도스토옙스키는 라스콜니코프와 같은 이상을 추구하는 인간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죄와 벌』을 썼던 거라고 생각한다. 현실과 괴리된 이상으로 가득 찬 채 고립된 골방에서 나온 청년이 어떤 사건을 겪고 어떤 마음의 소용돌이를 지나 운명적인 장소에 가닿는지를 그리고자 했던 것이다.


7월 초 몹시 무더운 저녁 무렵, 한 청년이 S골목의 세입자에게 빌려 살고 있는 골방에서 거리로 나와 망설이듯 천천히 K다리로 향했다. 

1권 p.9


그 순간 라스콜니코프는 이제 소냐가 영원히 그와 함께할 것이며, 운명이 이끄는 대로 세상 끝까지라도 그를 뒤따를 것임을 단번에 느끼고 이해했다. 심장이 온통 뒤집어졌다……하지만 그는 이미 운명적인 장소에 도달했다…… 

2권 p.398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책이다. 길고 여럿으로 불리는 이름 덕에 혼란스러울 때도 있다. 고전 중의 고전인지라 인물과 사건에 대한 해설도 다양하다. 한 번 읽고 이 모든 것을 소화하기 어려운 건 당연한 일이지 싶다. 우선은 쉴 새 없이 읽히는 가독성 있는 책이라는 것, 더 치밀할 수 없을 만큼 자세한 인물 심리분석이 펼쳐진 책이라는 점을 안 것에 만족하기로 한다. 고전이라는 이름에 의문의 여지가 없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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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밭에 숨은 보물 찾기 초등학생이 보는 지식정보그림책 21
박신영 지음 / 사계절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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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무엇이 숨었을까~ 

나뭇잎, 돌, 열매, 곤충, 꽃…… 예쁜 보물 숨어있네.


『풀밭에 숨은 보물 찾기』 의 빨간 신발 아이가 찾은 예쁜 보물을 잃어버렸습니다. 아이는 풀숲에서 보물을 찾는데요. 부지런하기도 합니다. 이리저리 다양한 식물들이 자라는 장소들을 잘도 다닙니다. 그곳엔 민들레가 피어있고 히아신스 향기가 가득합니다. 수목원 숲길을 거닐고 흐드러진 장미 정원에도 놀러갑니다. 맑은 물 개울가를 지나 낙엽 수북한 도토리나무 숲에도 들릅니다. 


아이가 찾는 보물은 아주 특별합니다. 나뭇잎, 돌, 열매, 곤충, 꽃 때로는 작은 짐승과 물고기까지 있습니다. 아이는 '분홍 구슬 팔찌, 유리구슬과 작은 장난감, 조그마한 물건들'을 가지고 다니는데요. 풀숲에 갈 때마다 이 조그만 것들을 잃어버립니다. 아이는 숲속 보물과 잃어버린 물건들을 찾으러 가자고 말합니다. 빨간 신발의 아이가 고사리같은 작은 손을 내밀며 하는 말입니다.


함께 찾으러 나가 볼까요?

p.3


아이의 뒤를 따라 풀숲을 헤맵니다. 봄볕에 어린 풀들이 올라오는 풀숲에서는 달팽이 집을 찾습니다. 히아신스 꽃밭에서는 네발나비와 벌 그리고 청개구리를 찾고요. 수목원 숲길에는 다람쥐가 숨어 있습니다. 장미가 가득 피어난 덩굴에는 꽃무지, 벼메뚜기, 쌍살벌, 풍뎅이를 찾아야 합니다. 토끼풀숲에서는 나방 애벌레와 벌, 개미들을 일별하고뜨거운 여름 개울가에서는 다슬기, 모래무지, 소금쟁이와 송사리를 따라가 봅니다. 낙엽 속에서도 쌓인 눈 속에도 보물이 있습니다.


얼핏 숨은 그림 찾기 책인 줄 알았던 책입니다. 풀밭에 숨어 있는 숨은 그림을 찾는 책 말입니다. 이런 책의 경우 풀밭에서 찾는 숨은 그림은 장소와 아무 상관이 없죠. 망치, 바늘, 고깔모자 등이 숨어 있게 마련입니다. 박신영 저자가 쓰고 그린 『풀밭에 숨은 보물 찾기』는 그런 기대와는 달랐습니다. 책의 그림들은 아이의 눈높이에서 내려다본 풀숲 세상이었습니다. 높지도 않고 그렇다고 확대경을 들이댄 것과도 다른 딱 아이의 눈높이로 보는 자연을 세밀화로 그려냈습니다. 자연의 구성물은 다채롭습니다. 낙옆쌓인 도토리숲에는 도토리 나무만 있지 않습니다. 같은 낙옆도 올해 떨어진 것과 작년, 그 이전에 떨어진 것이 다른 색깔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말라버린 죽은 곤충들도 있습니다. 책은 계절에 따라 풀숲바닥에서 어떤 보물들을 발견할 수 있는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아이가 찾는 보물들은 정말 꼭꼭 숨어 있습니다. 때로는 꼬리털 한 줌만 보입니다. 자연 풍경 속에 숨어 있는 곤충과 식물들을 일별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덕분에 이렇게 자세할 수 있을까 싶은 자연 세밀화를 살펴보고 또 살펴보게 됐습니다. 생김새를 알지 못하는 것이 보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아이들에게는 낯선 이름들입니다. 꽃무지, 벼메뚜기, 쌍살벌, 환삼덩굴 열매 꼬투리 등. 어떤 모양인지 알지 못하면 찾기 어렵습니다. 저자는 친절하게 책 뒷부분에 내용에 등장하는 식물과 곤충의 세밀화를 붙여놓았습니다. 흑백으로 그려진 자연 속 보물의 전체 모습을 눈에 익힌 뒤 다시 보물 찾기에 나서면 됩니다. 


어쩌면 이렇게 자세하게 그릴 수 있는 걸까요. 얼마나 관찰하면 이렇게 묘사할 수 있는 걸까요. 작가가 담아낸 자연은 사진보다 더 선명합니다. 얼핏 봐서는 눈에 띄지 않는 자연의 보물들을 잘도 숨겼습니다. 책에서 본 자연의 보물들은 우리 생활 속에서도 만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집 문밖을 나가 자연이 있는 곳 어디라도 나선다면 또 발밑 자연의 생김생김을 자세히 관찰한다면 찾을 수 있는 장면들입니다. 




『풀밭에 숨은 보물 찾기』는 미션을 완료하듯 숨은 그림을 찾아내는 책은 아닙니다. '다 찾았다!'를 외치고 덮어버릴 책은 아니라는 거죠. 힌트 없이 다 찾기도 어렵고요. 차근히 한 장 한 장 느긋하게 책장을 넘기며 보는 책입니다. 한 면에 가득 차 있는 한 계절의 풍경을 감상하고 그 안에 있는 자연의 선과 면과 색깔을 맛보아야 합니다. 숨어 있는 보물들은 덤으로 찾는 거고요. '초등학생이 보는 지식정보그림책' 시리즈지만 아이와 함께 어른도 즐길 수 있는 책입니다. 아이가 숨은 보물을 찾는 동안 담백한 자연을 그린 세밀화를 감상할 마음의 준비만 한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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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경이 2020-07-26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신영입니다. 소중한 후기 감사합니다.
 
일의 기쁨과 슬픔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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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이 참 곱게 생기셨다. 표지 책 날개에 실린 옆모습이 단아하기도 하다. 2018년 창비신인소설상을 받으며 등단한 신인 작가의 얼굴이다. ‘장류진’이란 이름을 기억하지는 못했다. 『일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책이 좋다는 소문을 듣고 읽으려고 목차를 봤을 때 우리가 구면인 걸 알았다. 「새벽의 방문자들」? 혹시? 작년 페미니즘을 주제로 한 동명의 테마소설집에서 작가를 만났었다. 단편집 『아내들의 학교』를 읽었던 터라 박민정 작가만 눈에 들어왔었다. 표제작의 작가라면 응당 그만한 작품을 썼을 텐데 그땐 눈여겨두지 못했었다.


장류진 작가는 데뷔 이후 만 2년이 못 되는 시간에 단편집을 묶어냈다. 부지런하다. 발표지면에 표기된 날찌를 보니 근 2~3개월에 한 작품을 발표했다. 짧은 분량이니 쉽겠거니 생각할 수 있겠지만 쓰는 사람으로서의 고민을 토로하는 여러 작가들의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부지런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작가는 직장생활도 병행했다. 직장인의 로망인 완벽한 투잡을 이뤘었다.(지금은 퇴사해 전업작가란다.)


IT회사에서 일하며 회사 생활을 녹인 등단작 「일의 기쁨과 슬픔」은 창비 홈페이지에서 40만 조회수를 기록하는 전설을 남겼다. 읽고 보니 내가 직장인이라도 꼬박 챙겨봤을 이야기였다. 장류진 작가의 글은 젊었다. 흰 벽에 칸막이가 총총 들어앉은 회사 한 층을 똑 떼어다 글 속에 심어놓은 듯하다. 집단 속에서 이뤄지는 대화, 은근히 오가는 눈치, 뒷담화, 알 수없는 케미의 순간들이 담겨있다.


책을 읽으면서 소설사 김중혁이 팟캐스트에서 말한 단편 소설의 정의가 계속 떠올랐다.


단편은 사건을 겪은 인간의 이야기고 장편은 인간이 겪은 사건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단편은 거대한 사건보다는 한 인간이나 가까운 사람, 관계를 조망한 작품이 많아요. … 우리가 옆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듯이 혹은 누군가를 관찰 하듯이 단편을 보면 사소한 관찰로 굉장히 큰 것을 얻을 수 있어요. … 단편의 경우는 인간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죠.

<이동진의 빨간책방> 117회 대성당 1부 中


장류진의 단편들은 정확히 ‘사건을 겪은 인간의 이야기’다. 단편들에 등장하는 사건이 크던 작던 그 배경이 어디건 눈길이 가는 건 사람이다. 어이없고, 황당한 일에 부딪친 사람, 그들의 심리와 반응들이 모이고 엮인다.


청첩장을 달라며 밥을 얻어먹고는 결혼식에 나타나지도 않은 회사 동기 언니가 청첩장을 두고 갔다. 주인공은 오고 간 밥값을 정확히 계산해 차액만큼의 선물을 건넨다. 웬만하면 기분 상한 상대의 마음을 알아챌 만도 한 상황인데 언니는 그저 고맙다고 눈물까지 보인다. 주인공이 보기에 언니의 행동은 무례하고 의도가 있는 것처럼만 보였다. 그런데 소설이 마지막으로 갈수록 정말 그럴까 싶다. 동기 언니는 그저 아무 생각 없는 아이 같은 사람이었던 건 아닐까 싶어진다. 세상의 원리를 가르쳐주겠다던 마음은 그저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바뀐다. 「잘 살겠습니다」의 이야기다.


“빛나 언니한테 가르쳐주려고 그러는 거야. 세상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아직도 모르나본데, 여기는 원래 그런 곳이라고 말이야.… ”

p.28


빛나 언니는 잘 살 수 있을까. 부디 잘 살 수 있으면 좋겠는데.

p.33


표제작 「일의 기쁨과 슬픔」에는 월급을 카드 포인트로 받는 사태가 등장한다. 사장에게 찍혔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직원의 월급 전체가 포인트로 지급된다. 말도 안되는 이런 일이 소설 속에만 있을까. 아니라고 본다. 작가는 재미있지만 등골이 서늘한 지점을 짚어냈다. 우리 사회는 이런 일들을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곳이다. 그래도 회사는 다녀야하고 포인트는 어떻게든 돈으로 만들면 된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런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 같은 일반 회사원들과 사고구조가 아예 다르기 때문에 그들의 논리나 행동에 의문을 갖지 않는 편이 좋다는 것이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안 해야 돼요. 그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머리가 이상해져요.”

p.50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의 주인공 남자는 썸을 타던 여자를 만나러 후쿠오카에 간다. 본인은 둘 사이에 특별한 감정이 흘렀다고 확신하고 있다. 다시 만난 여자 쪽의 반응도 기대했던 그대로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다. 마지막 순간 직전까지만. 어쩜 이렇게 자신만만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서로의 수를 훤히 꿴 고수들의 밀당전쟁이다. 남자의 마지막 행동에서 여자에 대해 추측했던 모든 생각이 혼자만의 것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는 말도 안 되는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말도 안 돼. 종이컵 안에는 커피가 들어 있었다. 거지가 아니라 그저 커피를 마시고 있는 할머니였을 뿐이라는 걸 그제야 알아차렸다.

p.98


「다소 낮음」에서는 우연히 유튜브에 올린 영상이 인기를 얻으며 부침을 겪는 인디밴드 멤버의 이야기다. 그는 왜 다른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효율성’에 근거한 선택을 전혀 하지 못하는 걸까. 그런 선택이 편한 사람이 있는 걸까. 작가는 그런 선택도 존재하고 인정해야 한다는 걸 말하고 싶었을까.


「도움의 손길」에 등장한 도우미 아주머니와 주인공의 심리전도 흥미로웠다. 아이는 그랜드 피아노와 같아서 작은 평수의 집에는 감당할 수 없다는 주인공의 논리부터 새로웠다. 그런 식의 해석이 가능할 수 있구나 싶었다. 화자는 부부끼리 사는 대신 완벽한 인테리어를 하고 그에 걸맞게 가사 도우미를 고용하고 싶어 한다. 너무 깔끔 떠는 집주인이다 싶다가도 점점 태만해지는 도우미의 행동이 밉살스럽지도 하다. 둘의 행동이 어느 한 편으로 기울지 않게 아이러니함으로 가득하다.


「탐페레 공항」은 소설집에 실린 단편 중 가장 아름다웠다. 육년 전 핀란드 탐페레 공항을 경유하면서 만난 노인을 회상하는 이야기다. 희망했던 대로가 아닌 직장, 노력과 다르게 풀리는 인생, 쌓여가는 후회들. 회복 불가능할 것 같은 후회 하나를 기적처럼 되돌리는 이야기다. 용기를 내고 미뤄뒀던 일, 천천히 서랍을 여는 일부터 시작하면 된다.


나는 알고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후회하는 몇가지 중 하나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애써 다 털어버렸다고 생각했지만 내 안 어딘가에 끈질기게 들러붙어 있고, 떼어내도 끈적이며 남아 있는, 날 불편하게 만드는 그것. 내가 그것을 다시 꺼내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고 꺼내서 마주하게 되더라도 차마 똑바로 바라보기는 힘들 거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p.209


장류진 작가의 소설집은 ‘사소한 관찰’에서 ‘굉장히 큰 것’을 느끼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사소한 일들의 나열같지만 소설 한편 한편의 전체를 볼 때 굉장히 촘촘한 의미의 그물이 펼쳐져 있었다. 쉽게 읽히면서도 자꾸 곱씹게 했다. 어느 한 쪽 편을 들 수 없는 사람들이 자꾸 생각난다.


주물공장 노동자였던 김동식 작가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자 한 대학 문예창작과 교수가 이런 우스갯 소리를 했다고 한다. 우리도 주물기계를 들여놔야 하는 거 아닐까. 장류진 작가의 경우 회사 생활 1년이 지나고부터 한겨레 문화센터에 다니며 처음 소설을 쓰게 됐다고 한다. 앞으로의 작가지망생들은 대학보다 문화센터 소설 창작교실에서 더 많은 배움을 기대하게 되진 않을지. (단, 장류진 작가는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긴 했다.)


단편「연수」로 장류진 작가는 2020년 젊은 작가상을 수상했다. 앞으로 작가가 보여줄 세계가 자못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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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반하는 글쓰기
강창래 지음 / 북바이북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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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재능과 창의성 그리고 책의 정신'이라는 주제의 시민강좌에서 강창래 저자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책의 정신』으로 워낙 유명해진 분의 강연은 어떨지 궁금해했던 기억이 있다. 글 솜씨와 말솜씨가 비례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번 경우는 좀 달랐다. 책 속의 진지한 목소리를 상상하고 만난 저자가 정말 소탈하고 편안한 태도로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강연을 정말 많이 한 분이구나, 듣는 사람에 대해 아주 잘 이해하는 분이구나'하는 느낌을 받았었다. 저자의 책을 다 읽어보고 싶어진지 오래다. 새로 나온 책 『위반하는 글쓰기』로 시작해볼까.


저자는 오랜 시간 출판 편집기획자로 일했다. 책을 기획하고 편집, 교정/교열하는 과정에서 고스트 라이터, 윤문 전문가로도 활동했다. 『위반하는 글쓰기』는 글쓰기의 방법에 대한 책인 동시에 저자만의 쓰기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책이었다. 저자는 수많은 글쓰기 책이 나오는 와중에 이 책을 내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지난날의 원칙에 얽매여 있다면 글을 잘 쓰기는 어렵다. 삶의 환경이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에 맞추어 글쓰기 원칙 역시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p.9


책은 1부 바로잡기, 2부 쓰기, 3부 고치기로 구성돼 있다. 글쓰기에 대해 잘 알려져 있는 '원칙'을 검토해보는 것이 1부의 내용이다. 2부에서는 글쓰기의 방법을, 3부에서는 쓰기보다 중요하다는 글 고치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책의 전반에는 널리 알려진 기존의 글쓰기 원칙을 막연히 쫓지 말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1. (저마다) 자기가 잘 쓸 수 있는 글을 잘 쓴다.

2. 집중하되 전문가의 피드백을 통해서 잘못된 부분을 고쳐 나가야 한다.

3. 정독과 다독의 경험이 필요하다.

4. 필사는 정독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5. 글쓰기란 말을 글로 받아 적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글로 번역하는 것이다.

6. 인간의 언어는 있는 것을 묘사하고 설명하기보다는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데 훨씬 특화된 마법의 도구다.

7. 한국인의 정체성이 과연 고유어에 담겨 있는것일까? 그런 의문을 진지하게 짚어 보자.

8. 한자어는 대개 추상적이고 객관적인 용법으로 쓰이기 때문에 감정을 느기기 어렵다. 대신 의미가 좀 더 분명하다.

9. 언어는 라이프 스타일과 사고방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10. 순수한 일본제 한자어 같은 것은 없다.

11. 생각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이 생각을 쓰는 것이다.

12. 언제라도 꺼낼 수 있는 절실한 이야기로 가슴속을 채워 두어야 한다.

- 1부 바로잡기 中


잘쓰는 작가라고 모든 글을 잘 쓰는 것이 아니며 많이 쓴다고 잘 쓰게 되는 것도 아니다. 다독과 필사도 필요에 따라 해야 하고 말하는 것처럼 써서는 좋은 글이 될 수 없다. 한국인만의 고유어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봐야 하고 생각한 대로 풀어낸 것이 좋은 글이 되지도 않는다. 기술적인 수련보다 중요한 건 좋아하는 것이다. 무엇을? 글쓰기를.


그게 무엇이든 의식적으로 '열심히' 하는 것은 꼭 좋은 게 아니다. 자연스럽지 않은 '열심'은 글에도 묻어난다. 부담스러울 뿐이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게 되니 잘하기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작위적인 느낌 때문에 공감을 끌어내기 어렵고 설득력도 떨어진다. '열심히' 하지 말고 몰입할 수 있어야 한다.

p.101


2부 쓰기에서 가장 기억하고 싶은 대목은 글쓰고 싶은 마음 채우기에 대한 부분이었다. 쓰기에 집중하기 보다는 좋아하라는 맥락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글을 잘 써보겠다고 애쓰지 말고 "글쓰기를 살이 있음의 기쁨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보라는 말이다. 그러면 즐겁게 오래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제 생각으로는 '어떻게든 날마다 쓰겠다'는 결심보다 '글로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생각을 만드는게' 더 중요하지 않을 까 싶습니다.

p.109


글은 주제에 대한 합리적인 생각을 펼쳐놓는 것이 다가 아니다. 주제와 연결된 수많은 자료를 수집 정리하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맥락을 찾아내야 한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느껴보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어떤 주제를 다룰 때 그것에 대해 잘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며 "그것에 대한 분명한 느낌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느껴 보는 것'은 어떤 사안을 판단하는 데 무척 중요하다. 느낌이 없다면 판단도, 선택도 없다.

p.135


그 선택은 '감정의 몫'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제가 펼쳐지는 상황에 들어가 당사자의 입장이 되어 보아야 한다. 바로 그 '대상'이 되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느껴 보아야 하는 것이다.

p.143


선택과 집중을 거쳐 무엇을 쓸지 또는 쓰지 않을지를 결정하기 위해선 주제에 깊이 몰입하고 느껴야 한다. 그래야 만족스러운 글을 쓸 수 있다.


저자가 제시하는 글쓰기의 기술, 글 고치기의 실제를 읽다보니 저절로 나의 글쓰기에 두려움이 생겼다. 정말 이렇게 되는 대로 써도 되는 걸까. 저자는 자신이 이 책을 통해 글쓰기의 시작과 끝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 "쓰기 시작하자"고 말한다. 하지만 책을 읽고나니 겁이 났다. 글 고치기 부분에 나온 모든 고칠 문장들이 나의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 문장들은 그렇게 이상했다. 그러나 저자의 또다른 말에 힘을 얻어보려 한다. 저자의 원칙은 뼈아픈 깨달음을 주었다. 다 실천할 엄두를 낼 수 없을 지경이다. 이제 그만 잊고 다시 써보자. 내 속에 생채기를 냈던 원칙들이 얼마간 조화를 부려 조금 더 생각하고 조금더 고치는 글쓰기가 되길 기대할 밖에.


특히 문장 고치는 기술은 따로 깊이 공부해야 한다. 기계적으로 외워서는 절대 안 된다. 원칙은 언제나 알고 나서 잊어야 한다. 깊이 깨달아야 한다.

원칙은 암기의 대상이 아니라 깨달음과 망각의 대상이어야 한다.

pp.200-202


좋은 글은 지극히 걱정하고 사랑한 결과물이다. 글쓰기라는 두근거림 앞에서 이제 당신은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끝내야 할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 쓰기 시작하자.

p.271


책도 책이지만 저자의 살아온 모습이 더 인상적이었다. 그가 낸 책들의 목록만으로도 성실한 삶의 족적을 알 수 있었다. 삼성출판사에서 출판 경력을 시작했고 90년대에는 컴퓨터 관련 실용서를 여럿 냈다. 한겨레 노동교육연구소에서 출판 편집 강의를 하고 이후에는 인문학 강연과 여러 기관의 자문 역할을 했다. 사람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던지 실용서 외에 처음 낸 책들은 인물을 탐구한 책들이다. 하긴 그가 이전에 냈던 컴퓨터 관련 서적들도 남달랐다고 한다. 기술 사용법을 설명하면서 그 기원과 이유 등까지 상세히 서술했다고 한다. 무언가 깊이 파고드는 태도는 90년대 후반 언어학을 연구했다는 대목에서 더 확실해진다. 아마도 직업상 오래 만져온 '언어'라는 대상을 잘 알고 싶었기 때문에 시작한 공부가 아니었을까. 『위반하는 글쓰기』에 얼핏얼핏 등장하는 언어학적 분석들을 보면 그 공부가 상당히 깊었음을 알 수 있다. 뇌과학에도 관심을 가졌었다. 올리버 색스의 『편두통』을 번역할 정도다. 색스는 흥미로운 서사 중심의 병례사로 유명하다. 그러나 『편두통』은 의학 전문서에 가깝다. 전문용어와 임상 병리적 서술로 채워져 있다. 그저 관심이 좀 있다고, 영어 좀 한다고 번역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최근 저자가 깊이 연구한 분야는 요리다. 아내의 병수발 기간 동안 음식을 도맡아 하면서 그리됐다. (꽤 알려져 있고 앞으로 (영화 덕분에) 더 잘 알려질 사연이다.)


저자의 글쓰기는 '성실한 글쓰기'다. 서평 하나를 쓰기 위해 "7권의 책과 10편의 비디오"를 봐야 하는 작업이다. 이런 방식이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 지난한 과정을 거칠 때 그렇고 그런 소모적인 글이 아닌 "나를 성장 시"키는 글이 된다는 말이다. '글쓰기의 즐거움'을 아는 '글쟁이'가 된 저자 자신이 그가 한 모든 말에 대한 증명이다.


'제가 믿는 진실을 써내기 위해 싸운 겁니다. 글쓰기의 즐거움을 위해서는 싸울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여기에서 이긴다면 언제까지나 이길 수 있겠지요.' 쓰기를 위한 '읽기'에서도.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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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행성에서 너와 내가 사계절 1318 문고 123
김민경 지음 / 사계절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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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모비 딕』이 눈에 들어온다. 읽을 때가 된 걸까. 스쳐본 포털에서 작가정신에서 낸 『모비 딕』의 표지가 자주 보았다. 아몬드 모양의 새까만 눈동자가 커다랗게 박혀있는 책. 아름다운 문장과 헤아릴 수 없이 넓은 지식, 인간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 마리아 포포바의 『진리의 발견』을 읽는 동안 멜빌과 그의 고래를 또 만났다. 전에 어떤 글에서 『모비 딕』은 소설이 아니라 고래백과사전이라는 말을 읽었었다. 서사가 부족한 책을 읽기 어려워하는 나의 도서 특성상 이 책은 어렵겠다고 판단했었다. 포포바가 소개하는 『모비 딕』은 내가 알고 있던 책과 달랐다. 작가가 고래에 대해 풍부한 지식을 가지게 된 배경과 책을 쓴 시기 등을 읽으면서 호기심이 동했다. 그리고 이 책 『지구 행성에서 너와 내가』를 읽게 됐다. 책을 매개로 한 소년과 한 소녀가 만난다. 청소년기의 독서에 대한 묘사가 궁금했고 책을 통해 그들이 어떤 것들을 나눌 수 있을 지 알고 싶었다. 주인공 소년과 소녀가 함께 나눈 책이 『모비 딕』이었음은 물론이다. 


소설은 소년의 시점과 소녀의 일기가 교차로 병행되는 구성이다. 마음에 드는 소녀를 만난 소년은 그녀와 어떻게든 교차점을 만들고 싶었다. 그런 그에게 소녀가 요구한 것은 『모비 딕』 읽기다. 둘은 고등학교 1학년이다. 입시 전쟁을 코앞에 두고 두툼한 소설을 읽는 일은 '보통'의 고교생에겐 어려운 선택이다. 만화도 아니고 가벼운 소설도 아닌 고전소설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소녀에 대한 호감은 소년을 움직인다. 781쪽자리 책을 다 읽으면 소녀가 제주도로 전학가기 전까지 매일 만날 수 있다. 빨리 읽으면 읽을 수록 소녀와 함께 할 시간이 길어진다. 소년의 마음이 급해졌다. 대체 이렇게 두껍고 난데 없는 고래를 다룬 책이 어떤 의미가 있길래 두 번씩이나 읽었다는 건지 알고 싶었던 거다. 소녀를 만나려면 책을 완독하는 수 밖에. 소년은 하루에 읽을 분량을 나누고 책를 시작했다.


소년이 책을 읽으며 변화해가는 모습이 나에겐 독서사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모조리 보여주는 것 같았다. 책의 문장이 생활 속으로 들어오고 소설 속에 몰입되어 내가 이야기 속에 들어간 기분이 되고 자신에 대한 존재론적 탐구에서 자신도 몰랐던 스스로의 편견을 깨는 일까지. 소년은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모든 경험을 『모비 딕』이라는 소설 한 권안에서 얻는다. 그야말로 책읽기의 정석이다.


책의 첫 부분을 읽은 소년의 감상은 이렇다.


무슨 책이 이따위야. p.9


어원과 기나긴 발췌록으로 시작하는 대목에서 소년은 지레 질려버린다. 하지만 이야기가 시작되는 첫 문장에 매혹되고 만다. 많은 독서가들이 경험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첫문장에 홀리는 일 말이다. 오죽하면 『소설의 첫 문장』(김정선, 유유), 『내가 사랑한 첫 문장』(윤성근, MY)같은 책이 나왔을까. 유명한 『모비 딕』의 첫 문장과 소년의 단상이다.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 두자.

『모비 딕』의 진짜 첫 문장이다. 나는 첫 문장을 뚫어져라 보았다. … 얼마나 자신 있기에 이런 식으로 첫 문장을 쓰나. 작가의 자신감과 거만함이 느껴졌지만, 솔직히 말해 내가 읽은 책의 첫 문장 중 최고였다. 첫 문장에서 마음이 이렇게 확 끌리는 건 처음이다. pp.15-16


소년의 독서는 순풍에 돛을 단다. 『모비 딕』에는 멜빌 자신의 목소리가 직접 담긴 장면이 있었다. 소년은 이 문장을 읽고 포경업에 대해 작가가 가졌던 애정에 공감한다. 작가의 목소리와 직접 대면하는 경험은 서사 집중력을 높이고 주인공을 따라 나서는 모험이 시작된다.


그러다가 그 장 끝에서 유언이나 다름 없는 무장이 나와 나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이건 이슈메일의 목소리가 아니라 작가의 직접적인 목소리였다.

… 내가 죽을 때, 내 유언 집행인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내 빚쟁이들이 내 책상 속에서 귀중한 원고를 발견하단다면, 나는 모든 명예와 영광을 포경업에 돌린다고 여기서 미리 밝혀 두겠다. 포경선은 나의 예일대학이며 하버드대학이기 때문이다. pp.39-40


『모비 딕』의 문장은 소년의 경험과 겹쳐진다. 책 속에서 이규메일과 퀴퀘그는 함께 책을 보며 "대화의 범위를 조금씩 넓혀" 간다. 그리고 "마음의 밀월"을 나눈다. 소년은 이 대목에서 소녀와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린다. 책이 내 경험을 고스란히 대신 말해주는 것 같은 순간과 맞닥뜨린 것이다. 이런 순간은 사람의 마음을 흔들고 울렁이게 한다. 소년은 책으로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번역해내고 있었다.


사람은 영혼을 감출 수 없다.

나는 이 문장을 뚫어져라 보았다. 새봄이를 처음 본 날이 떠올랐다.…처음 본 아이였는데 그런 느낌이 들어서 나 스스로도 놀랐다. 한 학기를 돌이켜 봤을 때 새봄이에 대한 나의 첫 느낌이 맞았다. 그래, 사람은 영혼을 감출 수 없다. 아름답고도 무서운 말이다. pp.22


소설의 문장이 독자의 경험으로 변환되는 일을 잘 묘사한 대목이 있다. 한낮의 도서관에서 나온 소년은 책 속의 문장을 떠올린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피쿼드호가 지나갔던 열대 해역을 떠올리고 육지는 구경도 못한 채 몇 년씩 바다에서 보내는 삶을 상상한다. 대리 체험의 단계로 진입이다. 소년은 피쿼드호에 승선해 숨가쁜 고래잡이를 경험한다.


한낮의 태양 아래를 걸으니 낮은 그렇게 매력적이고 밤은 그렇게 유혹적이어서, 잠을 언제 자는 게 좋을지 선택하기가 어려웠다는 문장이 떠올랐다. pp.42-43


거의 스무 장을 몇 시간만에 읽었다. 나도 피쿼드호의 선원이 되어 그들과 함께 고래를 잡아 죽이고 해체하고 장례를 치른 것만 같았다. 머릿속이 텅 빈 듯하고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책을 읽는 게 이렇게나 힘들다니……. pp.69-70


오래된 소설책이지만 『모비 딕』은 소년에게 사회를 만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포경선 내의 위계를 보면서 자본주의가 사회적 계층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고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숙고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사회의 구조와 그 사회 속에서 사는 자신의 위치에 대해 생각해 보는 일, 소년의 독서는 생각의 확장을 이끌어 낸다. 앞으로의 인생을 성찰하고 잊지 말아야할 미래를 위한 질문까지 떠올린다.


포경선 또한 하나의 사회였다.… 미국이 그걸 인정할지는 모르겠지만, 생각해 보면, 자본주의에서는 좀 더 힘 센 놈과 좀 더 약한 놈이 늘 있어 왔다. 그 기준은 '돈'이다.

아직 나는 직접 돈을 벌어 먹고살지는 않는다. 그래서 모르는 걸까. 솔직히 나는 많이 가지면 무엇을 더 누릴 수 있는 건지 궁금하다.… 나이가 들고 직업을 가지면 알게 될까.… 언젠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 궁금증을 잊지 않는 한 말이다. 내가 이걸 궁금해한다는 걸 잊지 말자. p.41


"책은 얼어붙은 정신과 감수성을 깨는 도끼"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고래를 묘사는 멜빌의 문장에서 소년은 자신의 편견을 깨닫는다. 소년의 감수성이 놀라울 따름이다. 현실 고1의 독서가 이럴 수만 있다면 아니 성인이 독서에서 이런 자기 성찰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좀 다른 세상을 살고 있지 않을까. 제대로 된 책읽기는 "날마다 뒤통수 엊어맞"기다. 기분 나쁘지 않은 뒤통수 엊어맞기.


나는 인간 말고는 어떤 살아 있는 동물도 아름답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문득, 그동안 내가 너무나 편협하게도 '아름다움'을 예쁘다는 뜻으로만 생각했으며, 이 지구상에 오직 인간만이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 착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작가가 이 책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고래뿐만이 아니라 인간이기도 한 것이다. 오늘이 이 책을 읽은 지 나흘째인데 날마다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 언젠가부터 세상을 거의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모르는 세상이 아직도 많고 무한하다는 걸 깨달았다. pp.85-86


소설의 나머지 반은 소녀가 죽음의 손길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다. 소녀는 2016년 4월 16일 이후로 4년간 칩거했다. 사회와 떨어져 자신만의 세계에서 죽음과 벌인 싸움의 기간이었다. 소녀는 살기를 선택했고 다시 학교에 나왔다. 4.16은 우리 사회와 소녀에게 서로 다른 의미로 '상전이'를 가져온 날이다. '상전이'는 물질이 일정한 외적조건에 따라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바뀌는 현사을 말한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특성이 생겨난다. 우리는 그리고 소녀는 어떻게 해도 4.16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가지고 있던 특성이 변했기 때문이다. 변화의 필연성을 인식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향해야 한다. 도서실에서 우연히 만난 『모비 딕』의 문장은 삶과 죽음에 대한 소녀의 생각을 바꾼다. 소녀를 『모비 딕』으로 이끈 문장은 작은 포스트잇에 씌여 있었다.


인간은 누구나 포경 밧줄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모든 인간은 목에 밧줄을 두른 채 태어났다 하지만 인간들이 조용하고 포착하기 힘들지만 늘 존재하는 삶의 위험들을 깨닫는 것은 삶이 갑자기 죽음으로 급선회할 때뿐이다. - 『모비 딕』 pp.76


포스트잇의 문장은 인간 삶에 편재한 죽음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녀는 책을 다른 의미로 읽는다. "진정 『모비 딕』을 아는 사람은 죽음을 배척하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느낀다. 소녀에게 『모비 딕』은 "살아 있는 것, 살아 있음에 대한 이야기"였다. 소녀는 소년을 만나면서 자신이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여전히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책은 그 만남의 매개가 된다. 소녀는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꿈꾼다. 소녀가 책을 두 번 완독하고 적은 남긴 문장이다.


진정한 힘은 결코 아름다움이나 조화를 손상시키지 않고, 오히려 아름다움과 조화를 가져다 준다. 당당한 아름다움을 지닌 모든 것이 발휘하는 불가사의한 매력은 힘과 깊은 관계가 있다. p.134


소년이 『모비 딕』을 읽는데 걸린 시간은 단 엿새가 걸렸다. 엿새 간의 폭풍같은 읽기와 생각하기 그리고 엿새 간 이어진 소녀와의 토론. 두 사람은 때로는 책 이야기를 때로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마음의 밀월"을 나눈다. 책이 끝날 즈음 둘의 이야기가 영원히 계속됐으면 좋겠다 싶었다. 올리버 색스의 『고맙습니다』가 등장한 책의 마무리는 그 이상 좋을 수 없었다. 소년과 소녀의 대화는 책을 읽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바로 그 자체'였다. 그런 이야기 나눌 여유, 그리고 누군가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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