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에렉투스의 유전자 여행 - DNA 속에 남겨진 인류의 이주, 질병 그리고 치열한 전투의 역사
요하네스 크라우제.토마스 트라페 지음, 강영옥 옮김 / 책밥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베리아에서 발굴된 작은 손가락 하나가
우리를 새로운 원시 인류의 세계로 안내한다.

황금광이라도 발견한 양 들떠 있는 유전학자들은

이제 만능기계를 손에 쥐고 있다.

아담과 이브는 따로 살았다.

지금까지 우리가 네안데르탈인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은 허상이었다.

쥐라기 공원은 모든 것을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갔다.

p.19


수수께끼 같기도 하고 시 같기도 한 문장으로 첫 장을 시작한다. 손가락 하나에 이끌려 가게 될 새로운 세계는 어디며 영화 <쥐라기 공원>은 무슨 일을 벌인 걸까. 요하네스 크라우제와 토마스 트라페의 책 『호모 에렉투스의 유전자 여행』은 스무고개 놀이를 하는 것 같다.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고고학 또는 진화인류학의 지식들이 과연 진실일까를 물은 후 최신 유전학 기술 분석 결과를 보여준다. DNA 분석 기술은 기존의 고고학 연구 결과를 뒤집는 놀라운 결과를 드러내기도 하고 근거가 부족했던 이론을 확정하는 증거가 되기도 했다.


의학 기술로 발명된 DNA 분석기술은 고고학 분야에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었다. 인간의 유전자를 분석하는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삶과 관련된 거의 모든 생물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오랜 세월 인간의 삶에 영향을 준 개와 말, 질병의 매개가 된 박쥐, 곰쥐, 물개, 아마딜로 같은 동물, 질병의 원인이 되는 박테리아와 바이러스의 DNA도 실험대에 올랐다. 고고학과 유전학이 결합한 '고고유전학'이라는 학문은 마치 시간이 파묻어버린 모든 비밀의 문을 열 수 있는 신비로운 열쇠같다.


고고유전학이라는 신생 학문은 우리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근원적인 질문들 중 일부에 새로운 답을 찾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인간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 인간은 어디에서 왔는가? 인간은 어떻게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되었는가?

p.21


요하네스 크라우제는 분석했던 손가락은 데니소바인의 것이었다. 일명 '데니'라고 불리우는 이 소녀의 유전자는 원시 인류에 대한 기존 지식을 상당부분 수정했다. 네안데르탈인과 같은 시대를 산 또다른 인류 종이 있다는 것이 밝혀짐과 동시에 두 종의 유전자가 섞여 있음을 드러냈다. 또 이후의 연구에서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이 현생 인류와도 DNA를 교환한 것으로 나타났다. 90년대만 하더라도 현생 인류가 다른 인류종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가설은 배척됐다. 있을수 없는 일로 여겨졌다. 게놈 비교 결과 현생 인류는 네안데르탈인은 물론이고 데니소바인의 유전자도 일부 가지고 있었다. 2005년 이후 고고유전학은 비약적인 발전을 해왔고 이 책에서는 최전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학자의 연구 결과물이 담겨 있다.


책의 주요 내용을 기술하면서 추가로 알아야 할 정보는 따로 파란색 문자의 단락으로 인쇄되어 있다. 예를 들어 3장에서는 인류의 이주에 대해 큰 그림을 그린다. 이주의 가장 큰 원인으로 기후가 꼽히므로 기후 변화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저자는 친절하게 '과거와 현재의 기후 변화'라는 단락을 추가해 기후 변화와 이주의 관계를 설명한다.

책에는 유전자 연구를 통해 밝혀진 새로운 정보들이 가득하다. 사르디니아 섬 사람에게는 수렵민과 채집민의 유전적 요서가 섞이지 않은 초기 농경민의 순수한 유전자가 남아있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유전 정보는 아시아인의 것보다는 유럽인의 것과 더 가깝다. 시궁쥐는 페스트로부터 유럽인을 구했다. 한센병은 유럽에서 아시아로 전파된 것이다. 결핵균은 소가 인간을 감염시킨 것이 아니라 인간이 소를 감염시킨 것이다. 이런 결과를 얻기 위해 수행한 일련의 유전정보 분석 과정과 논리적 맥락이 찬찬히 서술되어 있다.


좀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유전학에 관한 지식도 고고학에 관한 지식도 일천한데다 계속 등장하는 '무슨무슨 인'과 같은 낯선 단어들이 헷갈렸다. 수시로 등장하는 세계 각지의 지명도 대략의 위치를 알지 못하면 내용을 따라가기 어려웠다. 유전자가 어떤 경로로 이동했는지를 설명하는데 지리를 모르면 당연히 알기 쉽지 않다. 물론 이해를 돕는 지도가 각 장 앞에 제시되어 있다. 공들여 만든 인포그래픽이다. 해당 장에서 설명하는 동선을 지도에 표기해주고 있다. 심도 있는 읽기를 원하는 독자는 각 장의 지도를 수시로 참고하면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는 중간중간 문장이 잘 읽히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앞뒤 문장과 논리적으로 맞지 않거나 문장 자체가 난해했다. 아마도 고고유전학이라는 전문분야에 대한 배경 지식이 번역에 영향을 준게 아닌가 싶다. 이런 책의 경우 번역만 전문으로 하는 번역자보다는 해당 분야에 대한 전공 지식이 어느 정도 갖춰진 번역자가 참여했으면 어땠을가 싶다. 상당히 재미있을 법한 책이 문장의 난해함으로 어렵기만 한 책으로 묻히는 게 아닌가 싶어 아쉬움이 남았다.


그럼에도 고고유전학에 남다른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각 장의 첫머리에 수수께끼 질문처럼 제시된 문제들이 어떻게 풀려가는지를 차근차근 따라가다 보면 DNA 염기 서열 분석이 밝히는 세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30개 도시로 읽는 세계사 - 세계 문명을 단숨에 독파하는 역사 이야기 30개 도시로 읽는 시리즈
조 지무쇼 엮음, 최미숙 옮김, 진노 마사후미 감수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계 문명을 단숨에 독파하는 역사 이야기

수천 년 세계사의 주요 흐름을 도시 이야기를 통해 한눈에 펼쳐내다!

표지 문구 中


5천 년 인간 역사를 표지의 말처럼 "단숨에" 알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있을까. 아쉽게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남긴 역사는 350페이지의 책 한 권에 담을 수 있지도 않을 뿐더러 속속들이 다 밝혀져 있지도 않다. 그럼에도 길고 넓고 많은 세계사를 짧게 줄여서 알려준다는 책들에 끌린다. 인간사를 한 줄로 꿰어보고 싶은 욕망, 어차피 속속들이 알지 못 할 거라면 줄거리라도 더듬어보고 싶은 욕심때문이다. 나아가 역사의 얇은 줄기들을 거듭해 모으다 보면 제법 굵은 세계사의 타래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부질없는 소망도 있다. 수없이 등장하는 연대와 동서양이 맞물리는 시기를 꿰어맞추다보면 과거 어느 시절에서 미아가 되어 버린 기분을 종종 느낀다. 그럼에도 과거를 잃는 일에서 현재를 보는 시각이 가장 많이 넓어짐을 느끼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다. 조금 더 헤매보는 수 밖에.


'조 지무쇼'라는 저자는 단일 인물이 아닌 '기획·편집 집단'이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복잡하고 어려운 전문 지식에서 꼭 알아야할 핵심만 추려 단순 명쾌하게 풀어내자는 목표"에서 모였다고 한다. 그러니 이 책은 한 사람이 쓴 책이 아니고 다수가 '엮은' 책이다. 여럿이 쓰다보면 장 별로 다루는 내용의 깊이가 차이나거나 중복이 있지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세계사 강의로 유명한 입시학원 강사분의 감수로 오류의 위험을 피했다.


『30개 도시로 읽는 세계사』는 30개 주요 도시의 역사를 훑으며 세계사의 흐름을 정리한다. 나라나 왕조가 아닌 '도시'를 중심 주제로 삼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기원전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세계사를 총 30개 도시의 역사를 통해 단순하고 명쾌하게 풀어냅니다. 세계사는 도시 문명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기 때문에, 세계 주요 도시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 모습에 이르렀는지 살펴보는 것은 세계사의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p.5


바빌론에서 시작해 두바이로 끝나는 구성은 책의 의도에 충분히 부합한다. 나머지 28개 도시들은 대략 시간 순서에 따라 배열되어있는 듯하다. '듯하다'라는 의미는 정확히 시간 순서대로 도시의 등장 순서를 매긴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기원전 658년에 건설됐다는 '비잔티움'은 기원전 11세기부터 시작된 '장안'보다 앞서 배치돼 있다. 아마도 같은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서유럽의 도시들을 차례대로 이야기한 후 다른 도시로 넘어가기 위한 순서로 보인다. 도시의 순서를 정한 기준을 제시해주었었으면 더 좋았겠다.




각 장의 첫 머리에는 해당 도시가 세계사에 자리매김한 가장 중요한 이유를 소개한다. 덕분에 도시의 소개와 역사를 읽기전에 요점을 알고 시작할 수 있다. 또 각 도시가 그 나라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도와 도시의 내부 구조를 알 수 있는 지도도 도시마다 들어가 있다. 역사와 지리는 불가분의 관계다. 지리적 위치에 따라, 위치에 따른 기후에 따라 인간의 역사는 크게 영향을 받는다. 지리를 잘 알면 역사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때문에 역사를 다루는 책에 지도가 없는 경우 난감해진다. 지도를 일일이 찾아보면서 책을 읽기는 번거롭고 그렇다고 위치 정보를 무시할 수도 없어 답답해진다. 그런 점에서 사이사이에 적절한 지도를 보여주는 책을 읽을 때마다 만든이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도시를 소개하는 순서는 우선 도시의 유래와 역사, 그리고 주요 건축물과 유적 순이다. 도시가 처음 시작된 연유를 서술하면서 전설처럼 다뤄지는 이야기를 사실적인 역사처럼 기술한 부분은 좀 아쉽다. 예를 들어 콘스탄티노플을 창건한 사람이 '메가라의 바자스'라는 것은 사실이라기 보다 신화에 가깝다. 신화에 기초한 서술이라는 첨언 정도는 있었으면 싶었다.


책에 등장한 도시들 중 모스크바와 이스파한, 상트페테르부르크가 기억에 남는다. 모스크바는 그저 추운 도시 쯤으로만 인상에 남아있었는데 생각보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제 3의 로마를 지향했던 일이나 '붉은 광장'의 의미도 새로운 지식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와의 비교도 흥미로웠다. "유럽풍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비해 러시아 전통의 분위기가 강"한 모스크바. 또 유럽을 지향한 표트르 대제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기억 속에 『죄와 벌』의 도시로 남아 있다. 소설 속의 음울함과는 달리 유럽의 화려한 문화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장소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성형요새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의 아름다운 사진을 보고 한동안 성형요새 자료를 찾아보기도 했다. 이스파한은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도시다. 주인공이 청년시절 가고 싶어한 도시다. 소설에서 막연한 이상향처럼 그려졌었던 도시를 이번 책을 통해 실체로 만날 수 있었다.


잦은 전란과 정변으로 혼란한 도시를 싫어했던 루이 14세가 파리와 떨어진 베르사유를 건설한 일이 중대한 변화를 초래했다. 국민과 유리된 왕족은 국민의 생활을 알 수 없었고 그들의 고통에도 무심해졌다. 이러한 변화가 프랑스 대혁명의 원인 중 일부가 되었을 것이다. 도시의 형태가 정치와 역사에 미치는 영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싶다.


30개나 되는 도시를 다루기 때문에 내용이 간결할 수 밖에 없다. 이름만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에 대해 모르거나 인물 이름과 같은 배경지식이 없을 경우 그림 구경에 그칠 수도 있다. 그림만 구경해도 호사스러운 독서가 되긴 하겠다. 그러나 조금 품을 들여 정보를 찾아보면서 읽는다면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세계사 지식을 맥락이 있는 지식으로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이야기에 능한 세계사 강사에게 요점 정리를 들은 것같은 기분이 든다. 역은이는 '들어가는 말'에서 "이 책은 첫 장부터 순서대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썼다. "각자 흥미를 끄는 부분부터 시작해서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체감하는 방식으로 역사의 재미를 느껴"보자고 말한다. 책을 완독한 독자로서 여기에 한 마디 덧붙이고 싶다. 가고 싶은 도시가 있다면 또는 특정한 도시에만 호기심이 있다면 해당 부분만 읽으시라고. 그러나 세계사가 궁금하고 인간의 역사가 궁금하다면 첫 장부터 차근히 읽어보시기를 권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켄 리우 한국판 오리지널 단편집 1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정한 일에 굼뜬 편이다. 읽기도 예외는 아니다. 읽을 책 목록에 『종이 동물원』이 쌓인지가 언제인지. 그 사이 작가는 쓴 글을 모아 두둠한 단편집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를 냈다. 부지런하다. 그의 이력을 보면 입이 더 벌어진다. "낮에는 기술 전문 법률 컨설턴트로 일하고 밤에는 소설을 쓰"는 분이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의 테드 창에 이어 글보다 먼저 근면함으로 독자를 놀라게 만드는 작가다. 테드 창은 과작이니 그나마 읽는 이의 느린 속도가 따라갈 수 있지만 켄 리우는 그런 축도 아니다. 2002년 데뷔한 이래 단편집 두 권, 대하 3부작의 장편소설의 첫 두 권을 낸데다 만만찮은 분량의 중국 SF소설 『삼체』를 번역해냈다. 법률 컨설턴트가 되기 전에는 세계 굴지의 IT회사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하버드 법학 전문대학원을 졸업해 변호사로도 일했다. 총명함과 근면함을 두루 갖춘 사람이다. 이런 분이 글까지 잘 쓰는 건 하늘의 불공평함을 원망할 일이지만 이랬거나 저랬거나 독자로서는 좋은 글, 재밌는 소설을 내주는 작가를 한 명 더 만날 수 있으니 기쁘다.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는 발표된 후 아직 책으로 출판된 적없는 12개의 단편들을 모았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켄 리우의 두 번째 단편집 세계 최초 출판본이라고 할까. 작가는 "사실과 숫자가 인간을 설득하지 못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SF, 환타지라는 장르를 택했을 것이다. 그가 "오로지 이야기만 할 수 있"다고 말한 "세계를 이해"하는 일에 한 순간 빠져들었다. 켄 리우는 이야기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잘 아는 작가이면서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는 더 능숙한 작가였다.




책 제목이 아름답고 서정적이다. 로마의 멸망을 노래하는 W.H. Auden의 시 한 구절에서 따온 문장이다. 표제작에서 지구상의 인간이 만든 피조물 전체가 고대 유적으로 변한 세계를 묘사하는데 인용된다.


...


Altogether elsewhere, vast

Herds of reindeer move across

Miles and Miles of golden moss,

Silently and very fast.

        「The Fall of Rome」 W.H. Auden


표제작은 싱귤래리티 3부작 마지막 작품이다. '특이점'이라고 부르는, 인공지능이 인간을 넘어서는 지점을 말하는 '싱귤래리티'가 책에서는 조금 다른 맥락으로 사용된다. 한계를 지닌 신체에서 벗어나 기계로 인간의 정신을 옮기는 과정으로 말이다. 세 작품을 각각 읽으면 담고 있는 내용이 긍정하는 측면이 작품마다 다르게 느껴진다. 3부작 중 첫 번째 작품인 「카르타고의 장미」에서는 몸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시도의 무모함을 들려준다. 두 번째 작품 「뒤에 남은 사람들」은 정신의 '업로드'를 선택하는 사람과 물리적 세상에 '잔류자'로 남는 사람들의 갈등을 다룬다. 세 번째 표제작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에서 업로드를 안한 사람은 '고대인'으로 불린다. 업로드가 자연스러운 데이터 센터 속의 삶이 그려진다.3부작이 '싱귤래리티' 전, 중, 후를 시간순으로 다루고 있다. 각각의 단계마다 갈등은 있다. 싱귤래리티 이전에는 싱귤래리티의 성공 여부를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싱귤래리티가 진행되는 시기에는 데이터로의 무한한 삶을 선택하는 사람과 물리적 인체안의 유한함이 인간 존재의 본질이라 믿는 편이 갈등한다. 업로드가 끝난 세상에서는 인간이 창조한 모든 물리적 세계가 폐허가 돼 간다. 데이터로 이뤄진 수차원의 가상 세계가 진짜 삶의 터전이 된다.


결국 작가는 어느 한 쪽만을 긍정하지 않는 걸 알 수 있었다. '싱귤래리티'와 관계없이 인간이 사는 세계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신체를 가진 인간이 사는 세계나 데이터로 된 정신만 사는 세계나 선택의 문제와 알력이 존재했다. 지금의 세계가 굴러가는 방식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아보였다. 작가는 "살아남아서 꿈꾸고자 분투하는 모습", "미래를 향하여 끝없이 분투하는 것, 앞으로 나아가는 것", "진짜 아름다움"을 남기는 일을 인간이 사는 의미로 묘사한다. 과학 기술이 발달하면서 사는 모습이 변할 뿐 인간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양한 이야기 속에 담았다.

작가는 과학 소설이 현실을 명확히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고 썼다. 소설들은 그 말 그대로다. 켄 리우가 창조한 세계는 일견 먼 훗날의 시간을 보여주는 것 같다. 뇌를 스캔해 데이터 센터에 업로드 하고 재생 신약으로 아프지 않고 늙지 않는 시간을 산다. 그러나 영원을 바라보며 사는 생은 권태에 물들었고 데이터로 된 인간 존재에게도 고뇌가 있다. 우리의 고민과 다르지 않다.


내가 생각하기에 과학 소설이 하는 일, 또는 적어도 내가 이야기속에서 하고자 하는 일은, 오히려 희망과 공포로 가득한 지금 이 순간의 현실에 확대경을 가져다 대는 것이다. 최신 경향을 토대로 추론하고 점차 흔해지는 패턴들을 상술하고 아직 덜 여문 혁신의 논리적 귀결을 제시함으로써, SF는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의 면면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강조하는 고성능 필터로서 기능한다. 그것도 좋은 면과 나쁜 면, 양쪽 모두를.

p.8


작가가 최근 집중한 주제는 "격렬한 변화 앞에서 인간으로 남고자 부단히 애쓰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고 한다. 이런 주제 의식은 책에 실린 모든 작품에서 공히 느낄 수 있었지만 「모든 맛을 한 그릇에 ━ 군신 관우의 아메리카 정착기」에서 각별히 두드러졌다. 삼국지의 관우를 닮은 (어쩌면 관우의 환생일지도 모르는) 남자의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 진출기다. 금을 찾아 모여든 중국인 한 무리가 미국 사회에 적응해가는 모습을 관우의 일생에 빗대어 그렸다. 사금을 채취하기 위해 아이다호시티에 몰려든 중국인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인 아이 눈에 비친 중국인 아저씨의 모습은 얼마간의 판타지가 버무려져 있다. 먹고 살 길을 찾아 죽음의 항해를 견디고 밟은 미국 땅에서 녹록지 않은 삶을 꾸린 중국인, 고난과 차별 속에서도 자기 욕심만 채우기보다 주변과 어울릴 줄 알고 불의에 맞서는 라오관 또는 로건의 모습은 작가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인간일 것이다.


언뜻 보면 서로 어울리지 않는 역사와 언어, 기술이라는 요소를 SF와 판타지를 넘나들며 짧지만 여운이 긴 이야기로 직조하는 탁월한 이야기꾼

옮긴이의 말 _ p.415


"탁월한 이야기꾼" 켄 리우는 자신이 풀어 놓는 이야기 속에 심어놓은 또다른 이야기들로 의미의 그물을 촘촘히 짜나간다. 백 살 터울의 남매는 함께 만든 이야기로 친밀함을 나눈다. 데이터 센터 속에 업로드된 채 무형의 존재로 살아가는 아이는 간혹 만나는 엄마가 들려주는 이야기로 인생의 의미를 공유한다. 망명 신청자는 변호사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야 제대로 된 도움을 청할 수 있다. 대양을 건너는 배의 화물칸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했던 것 또한 이야기였다. 등장인물은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로 진실의 그물을 짜고 작가는 그 그물을 독자에게 멀리, 넓게 던진다.


이야기란 건 말이지, 어떤 이야기든 간에, 네가 진실이라고 믿을 때에만 진실인 법이야.

p.286


켄 리우의 문장은 쉬우면서도 아름답고 의미가 깊었다. 미래를 그리는 듯 현재를 짚어내고 현재의 의문이 먼 훗날의 시간이 도래해도 다르지 않을 거라고 차분하게 그러나 단단한 목소리로 전했다. 체온없는 데이터로 이루어진 미래를 들려주는 문장들에 온기가 가득했다. 작가 켄 리우가 들려주는 SF와 판타지를 넘나드는 이야기에서 진실을 발견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듣고 싶은 이야기, 가치있다고 생각되는 일부의 이야기만 들어서는 안된다. 작가가 하는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든 진실이라고 받아들"일 때 켄 리우가 말하고자 하는 그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미뤘던 『종이 동물원』 읽기를 서둘러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디 아더 피플 - 복수하는 사람들
C. J. 튜더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3년째 여름마다 만나는 작가다. 잊고 싶은 어린 시절로부터 온 편지 또는 죽은 줄 알았던 동생과 함께 스산한 냉기를 몰고와서 수백 페이지의 책을 쉬지 않고 읽게 만드는 C.J.튜더. 이번엔 잃어버린 딸 이야기다.


표지를 보자마자 익숙함이 느껴진다. 『초크맨』의 모티브가 된 분필 그림과 닮은 졸라맨이 그려져 있다. 강렬한 데뷔작의 그림자는 지워지기 힘든 걸까 생각했다. 도입부에서는 딸을 태우고 가는 차를 쫒아가는 아버지의 추격전이 펼쳐진다. 이 설정 또한 얼마전 읽은 다른 소설의 데자뷰였다. 부모가 모르는 사이 아이가 납치당하는 설정이 자극적이어서 여러 소설에서 차용되는 걸까. 데뷔 3년차, '여자 스티븐 킹'은 비슷한 소재를 택한 다른 작가들과 어떻게 다른 길을 갈지 궁금했다.




게이브는 3년전 강도에게 아내와 아이를 잃었다. 그날은 아이와 저녁시간을 함께하겠다고 한 아내와의 약속했었다. 꽉 막힌 도로 위에서 초초해져 있던 그의 눈에 딸과 닮은 아이가 타고 있는 차가 눈에 들어온다. "아빠!"를 부르는 아이의 얼굴을 자세히 볼 틈도 없이 아이를 태운 차는 꽁무니를 뺀다. 휴대전화 배터리는 마침 떨어지고 급히 찾은 공중전화 수화기에선 경찰의 목소리가 들린다. 경찰이 말한다. 아내와 딸이 죽었다고. 시체로 발견된 둘의 장례식도 치러졌다. 아내와 딸에게 닥친 불행을 게이브는 믿을 수 없다. 그날 그 도로위 그 자동차 안에 딸이 있었다. 딸을 찾기 위한 아버지의 시간이 시작됐다. 희망은 그를 살게 하지만 고통의 시간을 사는 그는 산 목숨이라기 보다는 죽음에 가까워 보인다.

사람들이 말하길 인간을 망가뜨리는 건 증오와 가슴에 맺힌 응어리라고 한다. 아니다. 인간을 망가뜨리는 건 희망이다. 기생충처럼 안에서부터 갉아먹는다. 상어 위에 매달린 미끼처럼 만든다. 하지만 희망이 인간을 죽이지는 않는다. 희망이 그 정도로 친절하지는 않다.

p.22


이지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가 이 소설의 중요한 결말은 아니다. 이미 소설 초반부터 살아있는 이지를 등장시키기 때문이다. 이름은 다르지만 눈치빠른 독자라면, 스릴러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알아채지 못할 수 없다. 당연하게도 소설의 절정은 앨리스라 불리던 소녀가 이지라는 이름을 되찾는 장면이다. 그 중요한 사실이 어떻게 밝혀지게 될까를 따라가는 과정이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스릴의 거의 전부다. 한 아이의 존재를 지우게 한 원인은 무엇일까. 이렇게 살아 있는 아이를 죽었다고 믿게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단순하지 않다.


책은 딸 이지를 찾는 게이브의 동선을 쫒는 가운데 침대에 누워 있는 소녀를 병치해서 보여준다. 의식을 잃고 오랜 시간 누워지내는 소녀다. 이 소녀와 생존을 숨긴 아이는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저자는 과거의 일이 원인이 되어 현재의 고통이 되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듯하다. 『초크맨』과 『애니가 돌아왔다』에서도 학창시절 사건의 결과가 수 십년 후에 돌아왔다. 과거는 끝임없이 현재에 달라붙어 인물들의 삶을 달라지게 만들었다. 『디 아더 피플』에서도 마찬가지다. 게이브에게는 과거의 족쇄가 있었다. 자신은 그 댓가를 치렀다고 생각하는 일. 하지만 그 일과 관련된 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인생은 불공평하니까. 골라서 선택해야 하는데 가끔은 선택하기가 어려울 때도 있다. 가끔은 아예 선택권이 없을 때도 있다. 끈으로 묶고 풀로 발라서 고칠 수 없는 물건과 사람도 있고 누구나 앞 베란다에서 햇살을 맞으며 생을 마감하는 것은 아니다.

p.278


과학 실험의 인과 관계와는 다르게 인간 세상의 원인과 결과의 값이 정확히 일치하기는 쉽지 않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래 보인다. 누군가 한 일에 대한 보상이나 처벌이 지나치거나 턱없어 보일 때가 많다. 특히 타인이 나에게 준 피해에 대한 처벌은 언제나 적게 느껴지게 마련이다. 그럴 때 생기는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가슴과 영혼에 병'을 초래한다. 세상의 잣대와 처벌로 잠재우지 못해 쌓인 억울함이 자기 구제의 방법을 찾았다. '디 아더 피플'. 그들은 누군가의 요청을 어떠한 것이든 실현해준다. 그것이 무엇이 됐든. 그리고 댓가로 요청자는 언제 올지 모를 그들의 다른 요청을 실행해야 한다. 반드시. 주고 받는 거래다. 단, 나에게 온 요청은 거절할 수 없다. 실행하지 않으면 상응하는 보복이 뒤따른다. 선택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관계 속에서 세상과 다른 그들만의 정의를 실현한다.


'디 아더 피플'이 법 체계가 용인하지 않는 사적 정의 구현을 추구한다. 하지만 그렇게 실행된 정의는 또다른 악의 그물을 짤 뿐이다. 분노 속에 저질러 버린 일들은 사지지 않았다.복수는 복수를 낳고 내가 휘두른 칼은 총알이 되어 돌아왔다. 그 과정에서 소중한 것들이 계속 부서졌다. 사라져가는 것은 분노가 아니라 삶이었다.


하지만 케이티는 뭐든 잘 버리지 못했다. 얼마나 쉽게 잃어버릴 수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인생, 가족, 사랑. 모든 게 너무나 쉽게 부서졌다.

p.271


비극이 일어난다. 누군가의 의도 없이 일어나는 참사가 있다. '그때 이랬더라면, 저쟀더라면, 그랬다면, 안그랬다면' 모든 게 달라질 수 있었을 것만 같아 후회한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아주 깊숙한 곳까지 파헤치고 보면 단순히 재수가 우라지게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분노와 억울함을 해결하는 일은 물론 중요하다. 개인들의 억울함이 쌓인 사회가 좋은 사회일리 없다. 부조리함에서 기인하는 납득할 수 없는 분노와 억울함은 해소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다른 시각이 필요한 비극들도 있지 않을까. 완전한 정의 구현이라 생각한 일이 그에 상응하는 억울함을 유발하는 비극이 되기도 하므로.


게이브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비극의 포인트는 말이 안 된다는 데 있는데, 사람들은 비극을 이해하려고 애를 썼다. 그냥 벌어진 일인데.

p.429


『디 아더 피플』에는 환상적 요소가 다분하다. 『애니가 돌아왔다』에서 얼핏 보였던 초월 세계에 대한 서사가 이번 책에서는 더 짙어졌다. 삶과 죽음의 중간 지대인 바닷가가 묘사된다. 그 해변에는 삶을 떠나지 못한 소녀가 누군가와 함께 떠나기를 기다리며 방황하고 있다. 그 바닷가에 발을 디뎠던 누군가는 삶을 향한 새로운 마음을 먹게 되기도 한다. 소설에 신비로운 분위기를 드리우는 바닷가에 대한 서술을 읽으며 언젠가는 작가 C.J. 튜더를 완전한 심령스릴러물로 만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또한 기대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떠오른 국가와 버려진 국민 - 메이지 이후의 일본
강상중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떠오른 국가와 버려진 국민』의 저자 강상중은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 한국인 2세다. 같은 재일 한국인 2세인 서경식 교수의 『내 서재 속 고전』을 읽으며 디아스포라의 관점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었기에 강상중 교수의 책에도 기대를 가지게 됐다. 국내 저자와 비교해 볼 수 있는 국외자로서의 시점이 궁금했다.


강상중 교수의 『떠오른 국가와 버려진 국민』은 자이니치의 눈으로 일본의 현재 모습을 비판한 책이다. 저자는 현재의 일본이 150년전 메이지 유신의 시대에서 미래의 근거를 찾으려 한다고 말한다. 19세기 서구에 맞선 메이지 일본의 국가 전략을 세계화 시대에 다시 불러내려 한다는 말이다. 메이지의 정신은 국가주의와 일맥상통한다. 즉 '국민의 정부가 어떤 죄를 저지르더라도, 때로 시민이 그 죄에 어떤 방식으로 가담한다 하더라도 네이션은 궁극적으로 선하다'고 여긴다.




저자는 일본에서 반복되는 원자 폭탄 투하, 미나마타 병, 원전 폭발과 같은 역사적 비극의 원인을 메이지 정신에서 찾고자 한다. 비극적인 상황을 마주했을 때 권력집단이 국가나 기업, 조직이나 제도 뒤로 몸을 숨기는 '무책임 체제'를 드러내 보이려 한다.


비극은 어디에서 왔으며 누구의 책임인가. 무엇을 해야 비극 안에서 한줄기 희망의 빛을 찾을 수 있을까. 비극이 되풀이되는 이유를 밝히지 않고, 한갓 자연재해로 치부하고, 망각이라는 안전지대로 도망가서 희극적 일상을 계속하는 것이 일본 근대의 패턴이란 말인가.

p.20


비극의 최대 희생자는 변경으로 벗어난 사람들이다. 소수자들은 사회 곳곳에서 고통받았다. 그 고통의 현장을 찾고 기록하기 위해 저자는 사회가 침묵하는 문제의 지점들을 방문했다.


군함도와 미이케 탄광에서, 후쿠시마와 미나마타에서, 한센병 환자 수용 시설에서, 사람이 살지 않는 중산간 지역에서, 아시와 광독 사건이 벌어진 야나카무라에서, 대도시의 슬럼과 미군기지에 짓눌린 오키나와에서, 그리고 코리아타운에서. 거기에는 떠밀려난 이들의 비극이 있다. 희미하게 빛나는 희망도 있다. 인간적, 사회적 특징은 벗겨내고 '단일하고 순수한 일본인'으로 환원된 네이션의 선성을 더 이상 믿지 못하는 사람들의 역사가 떨치는 빛이다.

p.21


생명 보호를 위한 어떤 조치도 없이 국부를 위해 채탄 노동에 동원된 사람들이 있다. 국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발생한 원전폭발의 피해는 고스란히 주민에게 전가됐다. 권력층과 기득권의 어느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다. 삶의 터를 통째로 빼앗긴 사람들은 사회적 원인의 고통을 고스란이 개인의 문제로 떠안고 있다. 기업 활동의 결과로 발생한 수질 오염은 지역 주민을 병들게 했다. 놀라운 것은 패해가 확인되고도 12년이 지나서야 오염물질 방출 시설이 멈췄다는 것이다. 환자 단체와 협의는 40년이 지나서야 이뤄졌다. 병든 주민들은 오히려 차별에 내몰려 이중의 고통을 받았다. 도쿄 수원지 오염을 보호하기 위해 산간 마을 하나를 통째로 수몰시킨 사례도 있다. 기업의 무모한 벌채로 홍수가 발생하고 인근 광산의 독성 물질이 유출된 것이 원인이었다.원인을 제공한 기업은 책임지지 않았다. 주민이 소개되고 집들은 물에 잠겼다. 사회적 원인으로 발생한 병이든 유전적 원인으로 발생한 병이든 아픈 사람이 차별을 받고,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의 주민들도 정상적인 국민에서 배제되긴 마찬가지다. 책은 사회에 재난이 발생했을 때 그 사회의 본질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지진이라는 천재지변은 우리 사회의 강점과 약점을 폭로했다. 재난이 닥쳤을 때 지역, 사회, 국가의 '본성'이 드러난다. 강점과 약점, 그리고 각 개인의 삶과 죽음을 드러낸 대지진은 전쟁에 필적할 정도로 강렬하게 우리에게 물었다. "너희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또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느냐?"

p.72


사회적 차별의 원인은 차별받는 쪽이 아니라 차별하는 쪽에 있다. 이러한 점에서 차별을 통해 우리 사회의 질서와 규범, 공통의 인간성과 감수성이 드러난다.

p.157


재일 한국인으로서의 고통을 서술한 대목이 절절했다. 저자 본인의 경험이 생생해서다. 일제시대에 일본 땅으로 건너간 조선인의 후예는 어느 순간 '제국의 신민에서 외국인으로 강등'된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저자를 비롯한 일본의 자이니치는 공생을 희망하고 있었다. 과거와 달라질 수 있는 미래를 위한 마음가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내 안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은 지역과 사회, 국가와 공생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각오였다. 함께 살아가고 싶다, 민족을 넘어 한 지역에서 함께 살아가는 동료로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p.193


저자는 일본을 '약한 사회 위에 우뚝 솟은 국가주의'를 버리지 못했다고 하며 '한국은 여러 한계를 극복하며 착실하게 시민과 사회운동의 힘을 키웠다'고 평가했다. 책 내용을 들여다보며 '정말 그런가?'라는 의문이 계속 들었다. 소수자를 차별하고 가진자의 권리와 이득이 우선되는 한국의 현실이 일본과 얼마나 다를까 싶었다. 정도의 차이일 뿐 한국에서도 다르지 않은 문제인듯 보였다. 다르다면 일본에는 국외자의 시선으로 비판을 가하는 강상중 교수같은 비판자가 있다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현실을 조목조목 따지고 사회적 문제가 발생한 전국의 현장을 발로 누비며 피해자를 만나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기록하는 지식인이 있는가. '일본과 한국은 지금 완전히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저자의 단언이 맞는 것이라 믿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