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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든 파티
캐서린 맨스필드 지음, 홍한별 옮김 / 강 / 2010년 6월
평점 :
품절
토론 모임을 위해 준비한 캐서린 맨스필드의 단편집이다. 모임 주제 작품인 단편 「가든 파티」 하나만 읽고나서 망설였다. 책상에 들어오는 빛을 가리도록 숙제 책들을 쌓아두고 있었다. 명절을 앞두고 마음은 조급해졌다. 시간은 없고 몸은 굼뜬데 단편집의 나머지 열두 개의 이야기들이 궁금했다. 책이 손 안에 있을 때 읽지 않으면 언제 다시 캐서린 맨스필드라는 작가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토머스 포스터 교수가 문학 강의 책에서 굳이 단편 전문을 실어 분석한 걸 보면 영문학사에 특별한 위치를 점한 작가일텐데, 놓쳐버리긴 아까웠다. 번역자 홍한별도 호기심에 한 몫을 더했다.
맨스필드의 작품은 대부분 단편으로 단펴소설이 문학의 한 장르로 자리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맨스필드는 체호프의 영향을 받아 플롯이나 캐릭터에 대한 탐구보다는 깨달음의 순간, 균형이 깨어지는 파열의 순간 등을 포착하는 작품을 많이 남겼다.
p.354
맨스필드가 포착한 "깨달음의 순간"과 "균형이 깨어지는 파열의 순간"을 확인하고 싶었다. 특히나 맨스필드는 비평가들에게 "체호프와 비교해 폄하되"었다고 한다. "체호프가 넓은 시각을 가진 객관적인 관찰자인 반면 맨스필드는 개인적이고 사적이며 시야가 좁다"는 비판을 받았다고. 당대의 부정적인 논평은 지금에 이르러 주목해야할 대목이 되었다. 거시적, 객관적 시선보다는 "개인적이고 사적이며" 좁아진 시야가 오늘의 소설에 맞춤하기 때문이다. 맨스필드의 깨달음과 파열의 순간들을 모아보고 싶었다.
단편 「딜 피클」에서 여자는 헤어진 옛 남자를 우연히 조우한다. 함께 했던 시간에 대한 서로의 기억이 다름을 확인하던 여자는 과거의 선택에 의심을 품고 마음이 흔들린다. 그러나 잠시후 과거와 변함없이 남자의 고지식하고 이기적인 면모를 발견한다.
세상에!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행복을 발로 차버렸다니. 이 사람은 그녀를 이해했던 단 한 사람인데. 너무 늦은 걸까?너무 늦어버린 걸까.
(…)
그가 고지식해 보이는 투박한 태도로 큰 소리를 냈다. 끔찍하게도 예전에 그랬던 것과 똑같이……
(…)
그녀는 가버렸다. 그는 깜짝 놀라 그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충격이었다.
여자는 남자가 과거의 모습에 회한을 느끼고 여자의 진정한 모습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착각할 뻔했다. 남자는 달라지지 않았다. 여자는 과거의 선택을 반복한다. 의심없이. 여자가 나간 뒤 남자의 행동을 보면 그녀의 선택에 더 공감하게 된다.
「대령의 딸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두 딸이 겪는 마음의 출렁임을 따라간다. 폭압적인 아버지 아래 가사를 돌보며 독신으로 지낸 조세핀과 콘스탠셔는 권위의 공백에도 마음이 자유롭지 못하다. 쉽게 웃지 못하고 아버지의 임종을 도운 간호사와 집안일을 돕는 가사도우미 케이트의 눈치를 본다. 죽은 아버지의 그늘을 벗기 위해 자매는 용기를 내 케이트를 해고하자고 상의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둘의 생각은 흩어지고 만다. 케이트와 콘스탠셔는 원하던 것을 잊어버린 과거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번에는 평상시와는 달리 멍한 상태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어떤 갈망 같은 것이 솟았다. (…) 바닷가에 갈 때마다 혼자 최대한 바다 가까이 다가가서 쉴새없이 움직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자기가 지어낸 곡조를 흥얼거리곤 했던 것도 기억났다. 그것과 다른 여기의 삶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동굴 속에서 일어난 일 같았다. 실제가 아니었다. 동굴에서 나와 달빛 속에 있을 때나 바닷가나 폭풍 속에 있을 때만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왜 그럴까? 그녀가 늘 원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어디로 가는 걸까? 지금은? 지금은?
(…)
무언가를 조세핀에게 말하고 싶었다. 뭔가 아주 아주 중요한 것, 무언가ㅡ 무언가 미래와 또……
(…)
침묵. 잠시 뒤 콘스탠셔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말할 수가 없어. 잊어버렸거든……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는지."
pp.66-67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갈망은 말이 되지 못하고 잊혀진다. 미래도 더불어. 자매의 망각은 우발적인 걸까 의도적인 걸까. 서로에게 말을 미루더 끝에 언니 조세핀은 "나도 잊어버렸어."라고 말한다. 살아오던 관성에 벗어나기가 두려워 다른 삶을 잊고 싶었던 건 아닐까.
삶의 변화를 거부하는 미묘한 심리는 「신식 결혼생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사를 하고 친구들에 둘러싸여 가족에 소홀했던 이자벨은 남편의 편지에 감동해 태도를 바꾸려 한다. 하지만 놀러나가자는 친구들의 부름에 답장을 미루고 친구들에게 발길을 돌린다. "전과 달라진 그 방식"으로 웃는 그녀는 '전'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
때가 왔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 '아, 망설일 게 뭐가 있나? 당연히 가지 말고 편지를 써야지.
(…)
아냐, 편지 쓰기는 너무 힘들어. '가야지, 가야겠다. 편지는 나중에 쓰고. 나중에. 언젠가. 지금은 말고. 하지만 꼭 쓰긴 쓸거야.' 이자벨이 서둘러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고는 전과 달라진 그 방식으로 웃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p.227
「어린 가정교사」는 냉정하고 단호한 모습의 영국 가정 교사가 겪은 불행을 고소해하는 호텔 급사의 환호로 끝난다. 젊은 가정교사는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고 여행 기분에 들떠 급사를 낮춰 보고 하대했다. 급사의 말은 교사 고용주에게 나쁜 인상을 주고 가정 교사는 낯서 도시에 고립된다. 작가는 영국에서 독일로 가게 된 교사가 겪는 충격과 혼란이 급사의 기쁨과 대비되는 장면을 절묘하게 묘사했다.
"부인은 어디 계세요?"
어린 가정교사는 온몸이 주체할 수 없이 부들부들 떨려 손수건을 입에 갖다 대야 했다.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급사는 이렇게 말하고 새로 들어온 손님을 맞으러 잽싸게 달려갔다. 갈빗대 속에서 심장이 얼마나 신나게 뛰던지 킥킥 웃음이 터져나올 지경이었다.
'잘했어! 잘했어! 본때를 보여줬지.'
p.98
「미스 브릴」에서는 소박하지만 나름대로 자기 삶의 모습에 만족하고 살았던 부인이 타인의 폭력적인 언사에 상처받는 모습을 그렸다. 반대로 스스로의 모습을 직시하지 못하던 여성이 다른 사람의 직언에 눈을 뜨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을까. 내 판단은 전자쪽이다. 부인에게 쏘아붙이는 남자는 젊은 여자와 함께 있는 현재에 취해 안하무인이다. 함부로 내뱉은 말은 미스 브릴의 선물같은 휴일을 울음소리로 끝맺게 했다.
「가게집 여자」는 "작품이 가볍다고 거절당한 뒤에 야수파의 영향을 받아" 쓴 단편이다. 스릴러의 분위기가 물씬하다. 세 명의 짐꾼이 남편 없는 여자가 주인인 도로 한 켠 가게집에서 하룻밤을 머문다. 그들 중 하나는 주인 여자와 눈이 맞아 머물기를 선택하고 나머지 두 사람은 여자의 아이가 그린 그림을 보고 가던 길을 재촉한다. 아이는 무슨 그림을 그렸던 걸까. 폭풍치는 밤 여행객의 방문은 아이가 그린 그림으로 인해 섬뜩한 공포로 마무리된다.
힌과 나는 그림을 옆에 두고 새벽이 올 때까지 앉아 있었다. 비가 멎고 아이는 잠이 들어 색색 숨소리를 냈다. 우리는 일어나 집에서 빠져나와 방목장으로 갔다. 분홍빛 하늘에 흰 구름이 둥실 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젖은 풀 냄새가 났다. 안장 위에 앉자 조가 가건물에서 나와서 우리에게 가라고 손짓을 했다.
"곧 따라갈게."
조가 소리쳤다.
길모퉁이를 돌아서자 그곳 전체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p.133
조는 친구들을 따라갈 수 있었을까. 길모퉁이만 돌면 사라지는 '그 곳'에서 그도 영원히 사라진 건 아닐까 싶어 서늘한 기분이 든다.
「심리」는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은 남자와의 소통에 실패한 여성이 마침 찾아온 숭배자를 맞이하며 변화하는 마음을 그렸다. 의도와 다르게 어긋나던 남성과의 대화에 의기소침했던 여성은 자신을 숭배하는 사람을 만난 후 마음이 달라진다. 냉대당하면서도 계속 찾아오는 숭배자를 보면서 비록 엇나가는 관계일지라도 아름다워질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던 걸까.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는 다짐은 가볍고 편안해졌고 "또 오세요"라는 편지로 이어진다.
「마 파커의 인생」은 평생 노동으로 피폐해진 여성 마 파커가 어디서도 쉴 곳을 찾지 못하는 상황이 황량하게 그려졌다. 그녀는 딸이 걱정할까 집에도 가지 못하고 모든 것을 잃고 고통스러웠던 삶을 애도할 장소가 없어 방황한다.
아, 숨어서 혼자 있고 싶은 만큼 있을 수 있는 데는 없는 걸까? 다른 사람한테 피해도 주지 않고 다른 사람이 신경 쓰지도 않을 데가? 이 세상에 그녀가 울 수 있는 데가, 그토록 참았다가 마침내 울 수 있는데가 한 군데도 없나?
마 파커는 멈춰 서서 위아래를 쳐다봤다. 얼음 같은 바람이 앞치마를 풍선처럼 부풀렸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무데도 없었다.
pp.200-201
홍한별이 번역한 도서출판 강의 『가든 파티』는 캐서린 맨스필드의 "초기부터 후기까지의 작품 가운데 오늘날 많이 읽히는 작품을 골라" 엮은 선집이다. 작가가 죽기 전 해에 출간한 같은 제목의 책과는 다르다. 「레만 식당」은 1911년, 「가겟집 여자」는 1912년, 「심리」, 「영화」, 「딜 피클」, 「어린 가정교사」는 1920년, 「대령의 딸들」, 「미스 브릴」, 「마 파커의 인생」, 「신식 결혼생활」, 「가든 파티」, 「만에서」는 1922년에 출간됐고 「인형의 집」은 작가 사후 발표된 작품이다. 맨스필드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단편을 모았다고 할 수 있겠다. 책을 읽고 맨스필드의 성취에 대해 검색해보니 옮긴이가 말한 "번역을 통해 작품이 많이 소개되지 않"았다는 말이 실감난다. 이제라도 맨스필드를 알게 되어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