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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도 엄마 딸 ㅣ 다산책방 청소년문학 3
스즈키 루리카 지음, 이소담 옮김 / 놀(다산북스) / 201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하드커버 표지를 보려고 겉표지를 열었는데 겉표지 안쪽에 잘 익은 복숭아 과육 색깔에 맛있어 보이는 복숭아가 둥실 떠다닌다. 잘린 복숭아 위에는 어른과 어린이가 앉아있다. 까맣게 탄 큰 사람은 홍차를 마시고 건강하게 그을린 작은 사람은 케이크를 먹는다. 제목이 『다시 태어나도 엄마 딸』이니 어른은 엄마일 테고 어린이는 딸일 것이다. 표정이 색감만큼 따뜻하고 행복하다. 표지 안쪽의 일러스트가 이야기를 살짝 엿보여주는 것 같아 책이 궁금해진다.
『다시 태어나도 엄마 딸』감성을 자극하는 낭만적인 제목이다. 아이를 키우는 사람에게는 육아의 고됨을 잊게 만드는 만족감을 주고, 아이가 없는 사람에게는 아이와 함께하는 환상을 불러일으키며, 여성의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을 무급으로 사용하여 사회를 지탱하는 가부장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회유지를 위한 모성이데올로기를 탄탄하게 하는 흐뭇한(?) 문구이다. 아마도 태어나면서부터 ‘엄마’라는 단어에 반응하도록 생활 속에서, 매체를 통해, 사회적으로 암시를 받아서 뇌가 자동으로 작동하는 것이리라.
제목의 앞뒤 문맥이 궁금해서 차례를 먼저 펼쳤다.
차례
언젠가 어딘가에서…13
꽃도 열매도 있다…71
D랜드는 멀다…171
은행 줍기…185
안녕, 다나카…209
옮긴이의 말…284
차례에는 ‘다시 태어나도 엄마 딸’이라는 제목이 따로 없다. 어디서 제목과 연관된 이야기를 만나게 될까 기대하며 처음부터 읽어나갔다. 23페이지 만에 제목이 들어간 문장을 찾았다.
예전에 엄마랑 만약에 다시 태어난나면 뭐가 좋을지 얘기한 적이 있다. 부자가 좋다고 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벌레가 좋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먹고 배설하고 그냥 사는 거야. 삶의 보람이니 의무니 과거니 장래니 일이니 돈이니 하는 것과 관계없이 단순하게 살다가 죽는 게 좋겠어.”
나는 하나도 안 좋을 것 같지만 벌레든 동물이든 괜찮으니까 다시 태어나도 엄마의 딸이었으면 좋겠다.(p.23)
제목과 관련된 이야기는 이것이 끝이다. ‘다시 태어나도 엄마의 딸’만 떼어놓고 보면 카피로 사용하기 좋은, 감성을 자극하는 감동적인 문구이다. 거기까지, 설득되지 않았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제목인가 했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설득되지 않았다. 이 책은 설득되는 이야기로 읽는 책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읽어야하는 책인 모양이다.
『다시 태어나도 엄마 딸』속표지와 차례 사이에 ‘이 책에 쏟아진 찬사’가 실려 있는데 ‘이 책은 이렇게 읽으세요’하고 방향을 알려주는 가이드 같다.
이 책은 재미있다. 특히 인물 묘사 중 엄마 다나카 미치코와 집주인 아줌마에 대한 설명이 ‘리얼’하다. 주변에서 만날 것 같은 생생한 인물들이다.
볕에 탄 머리카락은 퍼석퍼석하고 잘 먹는데도 말랐다. 날씬해서 부러운 몸매가 아니라 가난해서 비쩍 마른 몸이다. 잘 씻어도 얼굴이 어딘가 지저분해 보이고, 여름에 반바지와 러닝셔츠를 입고 대자로 뻗어 낮잠을 자는 모습은 꼭 밭에서 방금 파낸 흙 묻은 우엉 같다.(p.21~22)
엄마는 흙탕물을 빨아들인 낡은 걸레처럼 온몸이 지저분했다.(p.53)
소화력이 유난히 강한지 먹어도 금방 배가 비워져서, 헝그리 정신이라는 비유적인 표현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며 늘 배고파한다. 말 그대로 리얼하게 헝그리다. 굶주린 늑대라고 표현하면 멋있을 텐데, 엄마는 꼬르륵거리는 배를 안고 먹이를 찾아다니는 들개 같다.(p.73~74 엄마 다나카 미치코에 대한 묘사)
빠글빠글 파마한 머리는 가발 같고 공처럼 통통하게 살이 쪘다.(p.26~27)
기합이 단단히 들었는지 평소보다 훨씬 빠글빠글한 파마, 밀가루를 바른 것처럼 하얀 얼굴, ‘열심히 그렸습니다’라고 주장하는 눈썹, 번질번질 새빨간 립스틱, 그리고 까만 바탕에 빨간 부용화 무늬가 커다랗게 새겨진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마치 암컷 하마가 신에게 부탁해 하루만 인간이 된 듯한 모습이었다.(p.102~103 집주인 아줌마에 대한 묘사)
반면 이 책에는 머리숱이 없거나, 대머리이거나, 배가 나오거나, 뚱뚱한 남성은 없다. 특히 누구의 아빠이거나 예비 아빠에 대한 묘사는 단란한 가족이 나오는 캠페인 광고에 등장하는 이상적인 아빠 이미지와 닮았다.
미키의 아빠는 키가 크고, 갸름한 얼굴이 미키와 많이 닮았다. ...... 뼈마디가 두드러진 긴 손가락, 마른 몸에 비해 탄탄하게 근육이 잡힌 팔뚝, 새하얀 폴로셔츠와 희미하게 나던 헤어스프레이의 향 같은 것이 산뜻해서 내게도 아빠가 있다면 이렇겠거니 싶었다.(p.13~14 미키의 아빠에 대한 묘사)
갸름한 얼굴에 쌍꺼풀이 진한 눈. ...... 하얀셔츠에 남색 치노 바지를 입었고, 나이는 미키의 아버지와 비슷해 보였다.(p.29 다카이 유카의 아버지 다카이 신이치에 대한 묘사)
키가 큰 편은 아닌데 배도 나오지 않았고 치열도 골랐으며 무엇보다 웃는 얼굴이 다정해 보였다.(p.104 가자마 히로시에 대한 묘사)
성인 여성은 ‘다시 태어나도 엄마 딸’로 태어나고 싶은 엄마라도 ‘리얼’하게 묘사할 수 있는 대상이지만 성인 남성 가부장은 이상적인 모습이어야 한다는 관념이 바탕에 깔려있는 것으로 보인다. 남성과 여성을 대하는 일본사회의 시각을 작가의 묘사를 통해 읽을 수 있어 흥미롭다. 작가 스즈키 루리카가 사회의 암묵적 의식을 판단하지 않고 흡수하는 나이이기에 가능한 묘사일 것이다.
‘안녕, 다나카’에서 중학교 입시를 준비하는 미카미 신야가 학원에서 느끼는 심정을 묘사한 부분은 대한민국의 많은 학생들이 공감할 것 같다.
우리는 그냥 앉아 있을 뿐이다. 아까부터 사고가 정지했다. 수업이 시작하면 ‘오늘이야말로 꼭 열심히 해야지’하고 선생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만 그것도 고작 몇 분, 곧 머리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다. 선생님이 하는 소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머리가 따라가지 못한다. 선생님의 말이 내 위를 그냥 흘러 지나간다. 이렇게 되면 그냥 끝이다. 아예 뇌가 모든 걸 차단해버린다. 마치 머리에 점토가 꽉꽉 들어찬 것처럼. 게다가 딴생각만 떠오른다. 선생님이 무슨 소리를 해도 머릿속에서는 ‘가네코가의 간장 라면, 없어서 못 먹죠!’같은 광고 노래가 반복된다. 아마도 뇌가 파업하는 것이겠지. 옆에서 보기에는 그냥 넋을 놓은 것으로 보이리라. 머리가 포화 상태다. 그런 수준인 아이들을 모아놓은 반이다. 입시 공부를 전혀 이해하지 못 하고 흥미도 없다. 그런 수업을 몇 시간이나 듣는 것은 몹시 고통스럽다. 그냥 앉아 있을 뿐이지만 정말 괴롭다. 고행이라고 느껴질 정도로.(p.219~220)
대한민국에서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 중 입시에 집중하는 아이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학교에 그냥 앉아 있을 뿐인 학생들의 내면을 꺼내 펼쳐본 것 같다. 이 학생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고행이라고 느껴질 정도’의 고통을 받으며 그냥 앉아서 시간을 보내게 하는 것이 우리 사회가 할 수 있는 교육의 전부인가? 앉아있기만 하면 최소한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을 수 있으니 그것으로 된 것일까? 성적 상위권 학생의 보호자에게 이런 고민은 다른 사람의 것일까? 열네 살 작가 스즈키 루리카가 보여준 입시생 미카미 신야의 내면은 재미있게 읽혔지만 대한민국 학생들을 생각하니 여러 가지 생각이 많아진다.
『다시 태어나도 엄마 딸』을 읽는 동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아무도 모른다’가 계속 떠올랐다. 영화장면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이 책에 쏟아진 찬사’에 흘러넘치는 감동의 물결에 함께 흘러가지 못 했다. 다 읽고 나서도 감동과 따뜻함이 가득한 이야기를 읽었음에도 마음이 불편해져서 여러 날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