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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말들 - 나와 당신을 연결하는 이해와 공감의 말들
은유 지음 / 어크로스 / 2019년 3월
평점 :
은유 저자를 어떤 계기로 알게 됐었던가. 이젠 기억나지 않는다. 책으로 먼저 알게 됐는지, 강좌 수강이 먼저였는지. 길지 않은 시간인 것 같은데 저자 은유는 '작가'라는 이름을 달고 많은 책을 냈다. 저자의 블로그를 자주 드나들던 때가 있었다. 아마도 『글쓰기의 최전선』을 읽고 나서였던 것 같다. 글쓰기 선생님으로 알고 있었는데 책을 읽어보니 그가 하는 '글쓰기'가 남달랐다. 성폭력·가정폭력 피해자, 성노동자들과 같은 글쓰기와는 거리가 있어 보니는 사람들이 글을 쓸 수 있도록 돕고 있었다.
그가 하는 이야기를 더 들어보고 싶었다. 저자의 블로그에는 글들이 있었다. 생활에서 건저 올린 생각, 공부하면서 풀어낸 사유, 가족 이야기까지. 저자의 문장을 아쉬움없이 만날 수 있는 장이었다. 그래서 『다가오는 말들』이 낯익었다. 블로그에서 읽었던 글들 다수를 다시 만났기 때문이다.
『올드걸의 시집』이 시를 통한 사유라면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는 여성으로서 겪는 일상에 대한 생각을 담아낸 책이었다. 『다가오는 말들』에서는 저자가 사유하는 방식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일과 가정에서 얻은 삶의 소재로 글을 쓰면서 하나의 글에는 그에 적절한 책 한권씩이 들어가 있다. 문장을 인용하기도 하고 책 내용을 소개하기 한다. 저자가 어떤 책들을 읽고 생각을 만들어 왔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글을 쓰는 동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발견합니다. 글을 써보지 않으면 자신이 무엇을 쓸 수 있는지, 무엇을 알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48쪽) "미리 어떤 것을 써야지 생각하고 머릿 속에 준비해둔 원고를 '프린트아웃'한다고 해서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218쪽)
p.75, 우치다 다쓰루,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인용
여성의 말하기와 글쓰기의 어려움에 대해 쓴 저자의 글을 읽다보면 겪으면서도 이유를 몰랐던 상황들이 이해가 된다. 여성에게 말하기 기회가 드물었다는 것, 남성에겐 여성의 말하기를 듣고만 있기를 어려워 한다는 걸 저자의 글에서 선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내 주변의 상황에도 대입해볼 수 있었다. 왜 나의 말이 특정인 앞에서 그렇게 매번 동강나는지, 왜 누군가는 듣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지.
여성의 말하기 기회가 드물기에, 여성의 말하기를 듣는 기회도 없다면 '그냥' 듣고 있는 게 남성으로선 어렵고 어색한 일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평생의 억울함을 터놓는데 잠시의 억울함도 견디지 못하고 끼어드는 말은 제 스스로 힘을 잃는다.
p.50
젊어 고생은 사서 한다는 말, 아마 그것 고생 끝에 낙이 온 사람에게만 발언권이 주어졌기 때문일 거다. 그들은 자서전으로, 인터뷰로 자기 말을 퍼뜨리지만, "성실한 나라에서 살아남기 위해 성실했다가 개죽음을 단한"(189쪽) 이들은 말이 없다.
pp.124-125, 천주희, 《우리는 왜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가》 인용
에릭 호퍼는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떠돌이 노동자 출신의 사상가다. 도스토옙스키나 몽테뉴의 저서를 거의 외울 정도로 읽었고, 글을 쓰면서는 "제대로 된 형용사를 찾는데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31쪽). 밑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은 무모함, 빠져나가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부어댈 때 잠깐의 흘러넘침, 그것이 사유의 결과물로 손에 쥐어진다. 이 아름다운 낭비에 헌신할 때 우리는 읽고 쓰는 존재가 될 수 있다.
p.142, 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 인용
"게으름뱅이로서 나는 맹세한다. 터무니없이 오랜 시간을, 특히 몇몇 기업 양아치들을 위해서 일하지 않으려 투쟁하기로. 가능한 한 스트레스가 나를 침범하지 못하게 막아내기로. 천천히 먹기로. 리얼 에일을 자주 마시기로. 더 많이 노래하기로. 더 많이 웃기로. 토하기 전에 정시 근무라는 회전목마에서 내려오기로. 혼자 있을 때나 남들 앞에서나 스스로 즐기기로. 일이란 단지 고지서에 찍힌 비용을 지불하기 위한 것임을 인식하기로. 친구들이 힘의 원천임을 항상 기억하기로. 단순한 것을 즐기기로. 자연 속에서 소중한 시간을 보내기로. 대기업과 회사에 소모하는 시간을 줄이기로. 그 대신 좋은 것을 많이 만들기로. 순리를 벗어나기로. 아무리 사소한 수준이라도, 세계와 주위 사람을 변화시키기로."('영국 게으름뱅이 연합 맹세' 목록 중에서)
p.271
글쓰기와 나에 대한 성찰을 연결한 대목도 인상깊었다. "자기-삶을 진득하게 들여다"보아야 글을 쓸 수 있다는 저자의 말은 내 글의 부족함의 이유를 생각해보게 했다. 저자가 지적한 대로 "남의 사고에 집중하는 연습"보다는 나의 생각을 직조하는데 집중해야 할 일이다.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대해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제 글이 이상하고 못났던 것은 배움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했어요. 필사를 하지 않아서, 단어를 많이 몰라서, 독서량이 부족해서. 그게 아니더라구요. 나를 생각하지 않아서였어요. 나를 바라볼 수 있을 만큼의 고독과 외로움이 괴로워서, 그럴 때 늘 찾았던 친구들, 드라마, 영화, 책이 문제였어요. 나 자신과 생각보다 서먹한 사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글쓰기에 대한 귀한 깨우침이 담긴 고백이다. 나는 수업과 강연을 진행하면서 사람들이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것, 아니 자기-삶을 진득하게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는 걸 자주 느낀다. 그래 본 적이 없어서인 것 같다. 한국에서 입시제도 위주의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에게 글쓰기란 남에게 평가받는 일이다. 출제자 의도에 부합하는 표준화된 '답'을 찾다 보니 자기로부터 멀어지고 남의 사고에 집중하는 연습을 꾸준히 하게 된다.
p.74
읽고 생각하고 삶의 경험에 대입하는 저자의 능력은 부러울 지경이다. 무슨 수행을 해서 얻은 능력일까 싶다. 답은 당연히 저자의 삶에 있다. 이른 나이에 사회 생활을 했고 노동조합에서 일했다. 일만 하지 않고 읽고 배우고 쓰기를 쉬지 않았다. 저자의 공부는 학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과 삶에 밀접한 것이었다. 그런 공부를 장기간 하다보니 공부와 삶이 하나로 화하는 경지에 오를 것이리라. 노인의 삶을 '고생한다'고 정서화하기 보다 '노동한다'로 정밀화하는 저자의 날카로움은 그렇게 벼려진 것일 거다.
퇴근이 없고 정년이 없어 평생 몸을 가만두지 못하면서도 노동자로서 최소한의 보상과 보호도 받지 못한 여성들. 자식 돌봄. 부모 봉양, 가사 노동, 남성 부양 의무까지 이중·삼중 노동을 수행하는 쪼글쪼글한 그들로 인해 나는 여자는 '고생한다'는 막연한 통념을 벗겨내고 '노동한다'로 인식을 바로잡았다.
p.104
저자의 르포 작업을 보면 그가 얼마나 듣는 데 능숙한 사람인지 느껴진다. 간첩조작사건 피해자를 인터뷰한 『폭력과 존엄사이』, 비정규직 노동자의 죽음을 다룬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은 여러 사람의 말을 씨실과 날실 삼아 묶어낸 이야기다. 다수의 목소리가 들어 있되 하나의 주제를 밀고 나가는 힘이 있다. 말하는 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하려 한 저자의 노력을 "들을 준비"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말을 소리로 흘려버리지 않고 준비하고 귀 기울여 듣을 때 '고통의 서사'를 제대로 들을 수 있다는 뜻이리라.
내가 아는 공감 방법은 듣는 것이다. 남의 처지와 고통의 서사를 듣는 일은 간단치 않다. 자기 판단과 가치를 내려놓으면서, 가령 '왜 이제 말하느냐' 심판하는 게 아니라 왜 이제 말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해하려 애쓰면서, 동시에 자기 경험과 아픔을 불러내는 고강도의 정서 작업이다. 온몸이 귀가 되어야 하는 일. 얼마 전 본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당신이 할 말을 생각하는 동안 나는 들을 준비를 할 거예요."
p.128
무엇보다 열린 마음이 저자가 가진 글쓰기의 기본 자세다. "생각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생각한다고 생각하는" 무서운 "기성세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깨질 용기가 필요하다. 저자는 글을 쓰면서 자신이 "편견이 많다는 사실을 안" 것을 가장 큰 수확이라고 썼다. 자신의 편견을 깨달을 수 있는 인지와 그것을 부끄러워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저자 은유의 다음 에세이를 기다린다.
"말투에 트집을 잡는 사람은 대화에 집중하지 않는 것"
(…)
기성의 관념에 갇히는 건 게으름 탓 같다. 특히 이분법은 사유의 적이다. 생각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생각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누구나 기성세대가 된다. "선입관이 현실을 만나 깨지는 쾌감"(고레에다 히로카즈)은 세상에 자기를 개방할 때만 누리는 복락이다.
pp.170-1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