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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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날개 달린 것, 심연을 건너가는 것, 우리가 두 손을 맞잡거나 포옹하는 것, 혹은 당신이 내 소설을 읽는 것, 심연 속으로 떨어진 내 말 들에 귀를 기울이는 것.

부디 내가 이 소설에서 쓰지 않은 이야기를 당신이 읽을 수 있기를.

'작가의 말' 中


백신패스가 처음 적용됐을 때 코로나19 사태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고립감을 느꼈다. 바깥 나들이를 즐기지도 않으면서 누군가와 함께 할 공유할 수 있는 외부 공간이 없어진다는 사실 자체가 벽으로 느껴졌다. 백신 미접종 상태로는 지인에게 차 한잔 같이할 수 없었고 한 달도 전에 미리 예매해 둔 연극을 PCR검사를 받고 나서야 볼 수 있었다. 백신패스는 물리적인 제약 이전에 심리적인 차단이었다. 타인과 연결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낙인. 어딜가도 혼자. 그날도 혼자 커피를 주문하고 서성이던 서가에서 김연수를 다시 찾게 됐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이라는 낭만적인 제목에 끌려 펼쳤지만 막상 읽기를 결정한 건 ‘작가의 말’ 때문이다. 김연수 작가는 “우리는 서로에게 건너갈 수 없다”고 말하는 ‘심연’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한다고 쓴다. 작가는 자신을 고독하게 만드는 그 ‘심연’ 저편에 말을 걸었기 때문에 소설을 시작할 수 있었다. 심연에 둘러싸여 침잠하지 않고 건너편으로 연결되고자 하는 의지가 작가에겐 서사의 실마리가 됐다. ‘심연’을 “건너가지 못한 채, 그럼에도 뭔가 말”하려 시도하는 일, 주변과의 단절 상황에서 작가의 시도가 의미깊게 느껴졌다.


물론 마음은 단단히 먹었다. 내게 김연수의 소설은 그의 에세이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알고 있었으니까. 작가에 대한 나의 편견을 확인했다. 그의 소설이 모두 하나같으리라는 편견. 책은 시작부터 막힘이 없었고 어딘가 이해력을 시험하는 대목이 분명 있으리라는 조바심은 어느새 잊혔다. 서사도 서사지만 문장이 시였다. 막힘없이 읽었고 여운이 길게 남았다. 차오르는 말들을 삭이기 아쉬웠고 좋음을 나누고 싶어졌다.


소설의 첫 대목 주인공 카밀라가 작가로 변신하는 장면이 흡인력있었다. 미국에 입양돼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사춘기를 보내고 성인이 된 카밀라는 양모의 죽음 이후 양부로부터 어린 시절 물건이 담긴 상자를 배송받는다. 이십일 년 동안 이질감을 느꼈던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남자친구 유이치는 카밀라에게 유년을 소재로 글을 써보라고 제안한다. “사물에 들러붙은 삶의 흔적”은 카밀라를 작가로 만들고 친모를 찾는 여정을 시작하게 한다.


나는 유이치의 말대로 한번 해보기로 했다. 그가 제안한 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일단 매일 시간을 정한다. 한 시간 정도라면 가장 좋겠고, 삼십 분이라도 상관없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글을 쓰기 시작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기억해. 뭔가 쓰는 순간, 넌 작가가 되는 거야.”). 그 시간이 되면 노트와 연필을 들고 그 상자 앞으로 간다. 눈을 감은 뒤, 상자에 손을 넣고 무엇이든 처음에 잡히는 물건을 꺼낸다. 그걸 책상 위에 올려놓고 바라본다. 그런 물건은 태어나서 처음 본다는 듯(“갓 태어난 아이의 시절로 돌아가서 모든 걸 다시 시작하는 거지.”). 우선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사물의 표면을 관찰한다. 그다음에는 기다린다. 자기 내부에서, 겹겹이 쌓인 기억의 지층 아래에서, 무의식의 짙은 어둠을 뚫고, 마그마가 꿈틀대듯이 어떤 일들이 떠오를 때까지.

p.27


유이치는 훌륭한 선생님이다. 부담갖지 않고 글을 쓰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이렇게 주문했다. 매일 쓰기, 머리 속에 있는 생각을 “순서나 논리 같은 건 신경쓸 필요 없이” 받아쓰기, 하루에 최소 세 페이지는 반드시 채우기, “충분히 썼다는 생각이 들면 노트를 덮은 뒤, 지정된 장소에” 두고 숙성과정을 거치기. 남자친구의 친절한 코칭은 카밀라의 유년을 ‘너무나 사소한 기억들: 여섯 상자 분량의 입양된 삶’이라는 책으로 변신시킨다.


양모의 단속 덕에 카밀라는 자신의 출생과 관련된 어떤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이 카밀라의 심연이었다. 이십 여년간 묻혔던 과거는 죽음을 앞둔 양모의 유언과 상자 속 사진 한 장으로 열렸다. 소담스레 핀 동백꽃을 배경으로 찍은 갓난 아이와 어린 엄마의 사진. 카밀라는 사진 한 장과 친모가 출산 당시 열일곱 살이었다는 양모의 말을 붙들고 심연 건너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카밀라의 엄마 정지은은 고등학교 재학 중 임신과 출산을 했고 그 결과 카밀라와 자신의 심연을 만들었다. 지은이 친부의 존재를 숨겼기 때문에 소설은 스릴러 분위기를 띠게 된다.


노동운동 과정에서 발생한 동료의 죽음에 책임감을 느끼고 자살한 아버지의 존재는 지은을 고립시켰고 친부를 밝히지 않은 임신과 모두가 만류했던 출산은 그녀를 막다른 길로 몰았다. 친오빠를 비롯한 친구, 선생님 그 누구도 지은의 진실에 닿지 못했다. 지은은 자신의 아이가 타인과의 사이를 건널 수 있는 날개가 되리라 생각했다. 자신에게 쏠린 오해의 심연을 아이의 날개로 건널 수 있길 바랐다.


너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다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사람과 사람 사이를 건너갈 수 있니? 너한테는 날개가 있니? (…) 나한테는 날개가 있어, 바로 이 아이야 (…) 

p.244


지은의 ‘날개’는 강제 입양으로 꺾였다. 날개 잃은 어린 엄마는 깊은 바다 심연으로 가라앉아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아이가 자신보다 더 나이를 먹고 엄마를 찾아 돌아올 때까지. 편견이 만들어낸 불편한 진실이 날개를 달고 바다를 건너올 때까지.


소설은 사람 사이에 놓인 층층의 심연을 드러낸다. 심연은 한 사람의 내부에도 존재했다. 자신의 마음과 불화하는 사람이 있었다. 어두움 너머로 말을 걸어보려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드물었다. 저 너머 누군가가 응답해올 때 회피했던 진실을 덮어버렸던 과거를 마주해야했기 때문일 것이다. 카밀라는 친모의 바람대로 이름을 ‘정희재’로 바꾸면서 진실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고 ‘바람의 말 아카이브’를 통해 그때 있었던 일을 보여주던 또다른 ‘희재’를 만난다.


사람 사이의 건널 수 없는 심연, 불가사의하게 그 사이를 건널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는 김초엽 작가의 단편집 『방금 떠나온 세계』와 겹쳐 읽혔다. 김초엽 작가가 상호 이해 불가능성을 전제하는 공존을 그렸다면 김연수 작가는 십 년쯤 전에 사람 사이의 간극을 넘을 가능성을 믿었던 것 같다. 두 작가가 보이는 다름은 서로를 이해하는 일이 그만큼 더 어려워진 시대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일 수도 사람 사이를 보는 시야가 더 촘촘해졌음에 대한 증명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중요한 건 사람 사이의 ‘이해’라는 행위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어떤 경우에도 속단은 관계의 실패 가능성을 높일 뿐이다. 사람 사이의 넓은 거리, 그 사이를 건너기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혼자 좋고 말 수 없어 한국 소설 읽기 모임 토론 도서로 추천했다. 참여자 모두 김연수의 발견을 외쳤다. ‘관계’에 집중해서 읽은 나와 달리 시적인 문장에 집중해 읽거나 사회문제를 개인의 문제와 엮으면서 죽은 지은의 목소리를 더한 구성을 눈여겨본 분도 있었다.


내가 심연의 고독을 건너는 방법은 책이다. 책으로 상대를 만날 수 있고 관계를 잇는 도구도 책이다. 에밀리 디킨슨은 시 「Hope is the thing with feathers」에서 ‘희망은 날개 달린 것’이라 노래했고 지은은 딸 희재를 ‘날개’ 삼아 희망을 발견하려 했다. 내게 날개 달린 희망은 책 하나로 수렴된다.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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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에도 길은 있으니까 - 스물다섯 선박 기관사의 단짠단짠 승선 라이프
전소현.이선우 지음 / 현대지성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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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바다 위에도 길은 있으니까』는 "스물다섯 선박 기관사의 단짠단짠 승선 라이프"를 담고 있다. 표지 일러스트를 보니 작업복을 입은 발랄한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다. 이십 대 중반의 선박 기관사 이야기로도 충분히 흥미로운데 게다가 여성이다. 직업에 성별 구분이 없다지만 어떤 직업의 종사자를 상상할 때 물리적 한계를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장기간 배를 타고 일하는 직업, 게다가 기계를 만지는 기관사라는 직업을 젊은 여성이 선택했다는 건 보통의 선택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전공만 하고 기술을 이용해 다른 길을 뚫어보려는 것도 아니고 배움을 살려 직업을 선택하고 그 일을 2년여간 충실히 해오고 있는 선박 기관사 '전소현'이 궁금했다.


책은 현직 선박 기관사인 전소현을 인터뷰한 자료를 토대로 이선우 저자가 내용을 재구성한 공동저작이다. 전소현 기관사는 특별하다면 특별할 수 있는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고 싶었고 이선우 저자는 자신만의 책을 위한 글감을 찾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고 '여성 선박 기관사'라는 직업을 알리는 책 『바다 위에도 길은 있으니까』가 나올 수 있었다.


전소현의 원래 목표는 '의사'였다. 공부를 꽤 잘했던 중학교 시절의 희망은 고등학교 재학 기간 동안 무너졌다. 수능 실패 후 좌절한 그녀에게 아버지는 한국해양대학교 진학을 권했고 이것이 신의 한수가 됐다. 딸이 "그저 공부 발하니까 당연히 의대를 목표로 했"었다면 아버지는 딸의 "멘탈이 재수의 중압감을 이겨낼 만큼 강하지 못"하고 "이과적인 성향과 잘 맞"는 다는 걸 감안했다. 전소현은 애초 기계만지는 걸 좋아하는 이과형 인간이었고 배를 움직이는 기관을 돌보고 관리하는 일에서 기대하지 못한 소질을 발견했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고 했던가. 전소현은 "세상에는 의사가 아니라도 성공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는 걸 무엇보다 자신에게 확인시켜주고 싶었"고 이젠 다른 이들에게 그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책에는 전소현이 "대가리 박아!"로 시작한 한국해양대학교의 군사 훈련식 수업을 받는 과정과 태평양을 오가는 '승선 실습' 과정이 잘 그려져 있다. 저자는 자신의 직업에 드리운 명암 또한 세세히 묘사했다. 바다 한가운데서 일하지만 기관실에서 하루 종일 근무하다보니 일부러 찾아보지 않으면 물구경할 일이 없는 아이러니, 고소공포증을 월급의 힘으로 이겨낸 에피소드, 뱃멀미와 땅멀미를 오가는 수난이 있고 고소득 상위에 오르는 연봉 수준, 다양한 분야로 진출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특히 자신에게 해양 기관사라는 직업에 잘 맞았던 이유를 외로움을 잘타지 않는 성격과 앉아있기 보다 몸을 움직이는 쪽을 선호하며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보고자 하는 모험심으로 설명했다.


전소현 저자는 대학 생활과 선상 근무를 하는 동안 고등학교 시절 잃었던 자존감을 찾았고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을 이어갔다. 이젠 실패했을 땐 깨끗이 인정하고 좌절할 시간에 차선책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자신이 바꿀 수 없는 환경을 탓하는 일은 성공한 이후로 미루는 성숙한 태도도 가지고 있다. 젊은 세대가 잘못된 시스템때문에 좌절하는 일에는 앞선 세대의 책임이 있다. 그러나 구조의 문제는 하루 아침에 달라질 수 없다. 한계를 인정하고 가진 조건 안에서 성공하는 것, 이것이 저자의 선택이다. 마음처럼 풀리지 않은 삶 앞에서 한정된 상황을 앞세우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원망하며 시간을 버리기보다 현재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려는 저자의 태도가 더 각별하다.


고등학교 때부터 또래 경험치를 넘어서는 숱한 좌절을 겪으면서 확실하게 깨달은 한 가지는 주어진 환경을 탓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는 것이다. 그럴 시간에 그 환경에서 성공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잘못된 부분에 대한 시정은 성공한 다음에 해야 더 잘 먹힌다. 유리 천장을 깨부순 선배들의 말 한마디가 더욱 뼛속 깊이 와닿는 이유다.

pp.285-286


바다 위 배 안 근무라는 특수 상황에서 저자가 겪은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읽는 일도 이 책의 흥미 포인트. 스타벅스 커피를 좋아해서 승선 전에 뱃 속이 찰랑거리도록 커피를 들이 붓고 배에 오른다는 이야기, 아무리 술을 좋아하고 면세 덕에 술이 과자 보다 싸다해도 하루 맥주 2캔 구매 제한이 있어 술고래 뱃사람은 될 수 없다는 이야기, 알고보니 해양술에 있어서는 한국보다 뒤져 있던 덴마크 교환학생들이 술실력으로 바이킹의 후예임을 증명하더라는 등. 특히 바람 없는 적도 밤하늘을 묘사하는 대목은 바다를 가로지르는 뱃사람이 아니면 느껴볼 수 없는 진귀한 경험을 보여준다.


보름달이 뜨면 별들이 바다에 그대로 비친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없어지면서 바다는 하늘이 되고 하늘은 바다가 된다. 그 속을 지나가노라면 꼭 우주선을 타고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별 사이를 가르고 항해하는 기분이다. '환상적이다', '경이롭다' 인간이 만들어낸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대박이다.

p.272


전소현 기관사는 더 나은 배움과 발전을 위해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 항해 선진국인 일본과 영국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일하는 틈틈히 어학을 공부한다. 남들이 선택하지 않은 길에 들어서서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전념할 뿐 아니라 지치지 않고 미래를 준비하는 청춘이라니. 소질과 관심 분야와 상관없이 성적에 맞춰 전공을 정한 후 많은 시간을 방황하는 이가 적잖은 시대다. 전소현 저자의 선택과 집중이 유달리 빛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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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의 두려움을 없애라 - 당신을 위한 글쓰기 레시피
김민영 지음 / 청림출판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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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영 저자의 책은 음성 지원을 음성지원 기능을 탑재하고 있다. 술술 풀리듯 읽히는 입말체가 귀에 들리는 듯 하다. 저자의 강연 또는 유튜브 영상을 본 적 있는 독자라면 문장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더 잘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똑떨어지는 말 매무새처럼 책 속 문장이 깔끔하다. 글쓰기와 토론에 이어 말하기까지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당연하지 않나 싶을 수도 있지만 이론과 실제를 겸비하기란 (많은 이가 알고 있듯) 쉽지 않다.


배우는 사람으로서 저자를 만났을 때 인상적이었던 점은 초보에게 공감하는 태도였다. 글쓰기든 말하기든 토론이든 처음 해보려는 사람의 마음은 대다수 움츠려들어 있다. 궁금하고 잘 하고 싶긴 하지만 모르는 사람들 속에 섞여 내 글이나 말 또는 생각을 내보이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저자는 그런 '처음'의 순간에 쫄아있는 사람의 마음을 배려한다. 배우러 왔으니 당연히 자신의 것을 내놓을 거라는 가정을 최대한 미룬채 주저하며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보듬을 줄 안다. 강의현장에 나와 앉아 있는 사람이 한 마디의 말을 하고 한 줄의 글을 써보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자신의 안내를 따라 조금씩 전진해보자,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 뭔가를 썼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등의 말로 초심자들이 시작하려는 마음을 북돋는다. 강의에서 느꼈던 장점은 책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책은 "머릿속 빨간 펜은 잊어라", "탄탄한 글쓰기를 위한 얼개를 세워라", "읽는 이의 마음을 잡아라"는 소제목을 단 3부로 구성돼 있다. 글감찾기에서 퇴고, 공개로 이어지는 글쓰기의 과정을 13단계로 구성해 각 부에 나눠 넣었다. 글쓰기 책의 구성으로 특별할 것없지만 쓰기의 어려움을 전제한 친절한 서술 덕에 '쓰기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 '읽는' 재미가 있다. 여러 직업을 거친 저자의 경력 덕에 사례가 풍부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공지영 작가를 인터뷰 했던 경험은 '글감 찾기'의 예시로 등장하고 글쓰기 강의에서 만난 수강생과의 대화는 '글쓰기의 '발동'걸기'의 어려움의 소재로 쓰인다. 생생한 사례를 보면서 나의 글쓰기에 앞서 다른 이의 글쓰기 과정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쓰기를 다루는 이 책에서 가장 이례적인 대목은 "말하면서 글쓰기" 부분이다. 글감을 찾고 용기를 낼 것이며 과욕을 부리거나 남의 눈을 의식하지 말고 개요부터 짠 후 첫 단락을 쓰기 시작했다면 이제 글을 흐름을 살펴 자연스러운 연결을 만들어야 한다. 저자는 이 단계에서 '말하면서 글쓰기'를 효과적인 방법으로 제시한다. "자연스럽게 연결"된 글은 "술술 읽"히므로 거꾸로 말로 잘풀리는 글의 연결이 매끄럽다는 논리다. 이 방법에는 한계와 주의 사항이 있다.


마치 앞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것처럼 해야 한다는 게 조건입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조용한 도서관에서 쓸 수 있는 방법은 못 됩니다. 자칫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거나 왕따가 될 수도 있으니, 조용한 공간에 숨어서 하는 게 좋아요.

p.99


그러나 이 방법을 사용하면 "글감을 찾을 수도" 있고 "보다 빠른 시간에 글을 쓸 수" 있다고 하니 한번 쯤 시도해볼 만하다. "특히 잡생각이 많아 집중력이 떨어지는 사람"에게 권한다는 대목이 솔깃하다. (저자가 나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글쓰기에 필요한 읽기를 설명한 대목에서도 흠칫했다. "문학 편독, 간결한 글쓰기의 장애물"이라는 부분이다.


소설을 많이 읽으면 글을 잘 쓰게 될까요? 개인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감수성이 풍부해지는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 

그러나 치명적인 한계를 갖고 있죠. 바로 객관성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특히 다른 분야의 책은 보지 않고 소설과 에세이만 읽는 사람들의 글은 객관성이나 설득력, 논리가 부족합니다. 넘치는 감수성으로 글을 쓰다 보니 장황해지거나, 마무리가 잘 안되기도 하죠.

p.132


이 말에 따르면 인문 고전과 소설 언저리를 맴도는 독서가 '치명적인 한계'를 가진 글을 생산한다. "다양한 분야의 독서를 통해 생각을 객관적이고 논리적으로 정리하는 법을 배"울 일이다. 저자 말마따나 독서습관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편독은 글쓰기의 적입니다. 읽을 땐 재미있을지 몰라도, 소비형 독서에 그치기 쉽지요. 책을 많이 읽은 편인데도 배경지식이 부족하거나 잘 읽히는 글을 쓰지 못한다면, 독서 습관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pp.132-133


저자가 블로그에 『첫 문장의 두려움을 없애라』의 개정판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을 알렸다. 절판된 책을 출간 십여년 후 다시 낸다는 건 여전히 그 책에서 기대해볼 만한 바가 뜻이다. 뒤늦게 읽고 배운 점이 많은 독자는 개정판에서 초판 이후 저자가 쌓은 글쓰기 지도 공력을 기대하게 된다. 그나저나 개정판 '읽기'에 앞서 '쓰기'에 좀 더 공을 들이는 게 저자에 대한 예의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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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든 파티
캐서린 맨스필드 지음, 홍한별 옮김 / 강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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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모임을 위해 준비한 캐서린 맨스필드의 단편집이다. 모임 주제 작품인 단편 「가든 파티」 하나만 읽고나서 망설였다. 책상에 들어오는 빛을 가리도록 숙제 책들을 쌓아두고 있었다. 명절을 앞두고 마음은 조급해졌다. 시간은 없고 몸은 굼뜬데 단편집의 나머지 열두 개의 이야기들이 궁금했다. 책이 손 안에 있을 때 읽지 않으면 언제 다시 캐서린 맨스필드라는 작가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토머스 포스터 교수가 문학 강의 책에서 굳이 단편 전문을 실어 분석한 걸 보면 영문학사에 특별한 위치를 점한 작가일텐데, 놓쳐버리긴 아까웠다. 번역자 홍한별도 호기심에 한 몫을 더했다.


맨스필드의 작품은 대부분 단편으로 단펴소설이 문학의 한 장르로 자리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맨스필드는 체호프의 영향을 받아 플롯이나 캐릭터에 대한 탐구보다는 깨달음의 순간, 균형이 깨어지는 파열의 순간 등을 포착하는 작품을 많이 남겼다.

p.354


맨스필드가 포착한 "깨달음의 순간"과 "균형이 깨어지는 파열의 순간"을 확인하고 싶었다. 특히나 맨스필드는 비평가들에게 "체호프와 비교해 폄하되"었다고 한다. "체호프가 넓은 시각을 가진 객관적인 관찰자인 반면 맨스필드는 개인적이고 사적이며 시야가 좁다"는 비판을 받았다고. 당대의 부정적인 논평은 지금에 이르러 주목해야할 대목이 되었다. 거시적, 객관적 시선보다는 "개인적이고 사적이며" 좁아진 시야가 오늘의 소설에 맞춤하기 때문이다. 맨스필드의 깨달음과 파열의 순간들을 모아보고 싶었다.


단편 「딜 피클」에서 여자는 헤어진 옛 남자를 우연히 조우한다. 함께 했던 시간에 대한 서로의 기억이 다름을 확인하던 여자는 과거의 선택에 의심을 품고 마음이 흔들린다. 그러나 잠시후 과거와 변함없이 남자의 고지식하고 이기적인 면모를 발견한다.


세상에!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행복을 발로 차버렸다니. 이 사람은 그녀를 이해했던 단 한 사람인데. 너무 늦은 걸까?너무 늦어버린 걸까.

(…)

그가 고지식해 보이는 투박한 태도로 큰 소리를 냈다. 끔찍하게도 예전에 그랬던 것과 똑같이……

(…)

그녀는 가버렸다. 그는 깜짝 놀라 그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충격이었다.


여자는 남자가 과거의 모습에 회한을 느끼고 여자의 진정한 모습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착각할 뻔했다. 남자는 달라지지 않았다. 여자는 과거의 선택을 반복한다. 의심없이. 여자가 나간 뒤 남자의 행동을 보면 그녀의 선택에 더 공감하게 된다.


「대령의 딸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두 딸이 겪는 마음의 출렁임을 따라간다. 폭압적인 아버지 아래 가사를 돌보며 독신으로 지낸 조세핀과 콘스탠셔는 권위의 공백에도 마음이 자유롭지 못하다. 쉽게 웃지 못하고 아버지의 임종을 도운 간호사와 집안일을 돕는 가사도우미 케이트의 눈치를 본다. 죽은 아버지의 그늘을 벗기 위해 자매는 용기를 내 케이트를 해고하자고 상의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둘의 생각은 흩어지고 만다. 케이트와 콘스탠셔는 원하던 것을 잊어버린 과거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번에는 평상시와는 달리 멍한 상태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어떤 갈망 같은 것이 솟았다. (…) 바닷가에 갈 때마다 혼자 최대한 바다 가까이 다가가서 쉴새없이 움직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자기가 지어낸 곡조를 흥얼거리곤 했던 것도 기억났다. 그것과 다른 여기의 삶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동굴 속에서 일어난 일 같았다. 실제가 아니었다. 동굴에서 나와 달빛 속에 있을 때나 바닷가나 폭풍 속에 있을 때만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왜 그럴까? 그녀가 늘 원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어디로 가는 걸까? 지금은? 지금은?

(…)

무언가를 조세핀에게 말하고 싶었다. 뭔가 아주 아주 중요한 것, 무언가ㅡ 무언가 미래와 또……

(…)

침묵. 잠시 뒤 콘스탠셔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말할 수가 없어. 잊어버렸거든……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는지."

pp.66-67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갈망은 말이 되지 못하고 잊혀진다. 미래도 더불어. 자매의 망각은 우발적인 걸까 의도적인 걸까. 서로에게 말을 미루더 끝에 언니 조세핀은 "나도 잊어버렸어."라고 말한다. 살아오던 관성에 벗어나기가 두려워 다른 삶을 잊고 싶었던 건 아닐까.


삶의 변화를 거부하는 미묘한 심리는 「신식 결혼생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사를 하고 친구들에 둘러싸여 가족에 소홀했던 이자벨은 남편의 편지에 감동해 태도를 바꾸려 한다. 하지만 놀러나가자는 친구들의 부름에 답장을 미루고 친구들에게 발길을 돌린다. "전과 달라진 그 방식"으로 웃는 그녀는 '전'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


때가 왔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 '아, 망설일 게 뭐가 있나? 당연히 가지 말고 편지를 써야지.

(…)

아냐, 편지 쓰기는 너무 힘들어. '가야지, 가야겠다. 편지는 나중에 쓰고. 나중에. 언젠가. 지금은 말고. 하지만 꼭 쓰긴 쓸거야.' 이자벨이 서둘러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고는 전과 달라진 그 방식으로 웃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p.227


「어린 가정교사」는 냉정하고 단호한 모습의 영국 가정 교사가 겪은 불행을 고소해하는 호텔 급사의 환호로 끝난다. 젊은 가정교사는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고 여행 기분에 들떠 급사를 낮춰 보고 하대했다. 급사의 말은 교사 고용주에게 나쁜 인상을 주고 가정 교사는 낯서 도시에 고립된다. 작가는 영국에서 독일로 가게 된 교사가 겪는 충격과 혼란이 급사의 기쁨과 대비되는 장면을 절묘하게 묘사했다.


"부인은 어디 계세요?"

어린 가정교사는 온몸이 주체할 수 없이 부들부들 떨려 손수건을 입에 갖다 대야 했다.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급사는 이렇게 말하고 새로 들어온 손님을 맞으러 잽싸게 달려갔다. 갈빗대 속에서 심장이 얼마나 신나게 뛰던지 킥킥 웃음이 터져나올 지경이었다.

'잘했어! 잘했어! 본때를 보여줬지.'

p.98


「미스 브릴」에서는 소박하지만 나름대로 자기 삶의 모습에 만족하고 살았던 부인이 타인의 폭력적인 언사에 상처받는 모습을 그렸다. 반대로 스스로의 모습을 직시하지 못하던 여성이 다른 사람의 직언에 눈을 뜨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을까. 내 판단은 전자쪽이다. 부인에게 쏘아붙이는 남자는 젊은 여자와 함께 있는 현재에 취해 안하무인이다. 함부로 내뱉은 말은 미스 브릴의 선물같은 휴일을 울음소리로 끝맺게 했다.


「가게집 여자」는 "작품이 가볍다고 거절당한 뒤에 야수파의 영향을 받아" 쓴 단편이다. 스릴러의 분위기가 물씬하다. 세 명의 짐꾼이 남편 없는 여자가 주인인 도로 한 켠 가게집에서 하룻밤을 머문다. 그들 중 하나는 주인 여자와 눈이 맞아 머물기를 선택하고 나머지 두 사람은 여자의 아이가 그린 그림을 보고 가던 길을 재촉한다. 아이는 무슨 그림을 그렸던 걸까. 폭풍치는 밤 여행객의 방문은 아이가 그린 그림으로 인해 섬뜩한 공포로 마무리된다.


힌과 나는 그림을 옆에 두고 새벽이 올 때까지 앉아 있었다. 비가 멎고 아이는 잠이 들어 색색 숨소리를 냈다. 우리는 일어나 집에서 빠져나와 방목장으로 갔다. 분홍빛 하늘에 흰 구름이 둥실 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젖은 풀 냄새가 났다. 안장 위에 앉자 조가 가건물에서 나와서 우리에게 가라고 손짓을 했다.

"곧 따라갈게."

조가 소리쳤다.

길모퉁이를 돌아서자 그곳 전체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p.133


조는 친구들을 따라갈 수 있었을까. 길모퉁이만 돌면 사라지는 '그 곳'에서 그도 영원히 사라진 건 아닐까 싶어 서늘한 기분이 든다.


「심리」는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은 남자와의 소통에 실패한 여성이 마침 찾아온 숭배자를 맞이하며 변화하는 마음을 그렸다. 의도와 다르게 어긋나던 남성과의 대화에 의기소침했던 여성은 자신을 숭배하는 사람을 만난 후 마음이 달라진다. 냉대당하면서도 계속 찾아오는 숭배자를 보면서 비록 엇나가는 관계일지라도 아름다워질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던 걸까.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는 다짐은 가볍고 편안해졌고 "또 오세요"라는 편지로 이어진다.


「마 파커의 인생」은 평생 노동으로 피폐해진 여성 마 파커가 어디서도 쉴 곳을 찾지 못하는 상황이 황량하게 그려졌다. 그녀는 딸이 걱정할까 집에도 가지 못하고 모든 것을 잃고 고통스러웠던 삶을 애도할 장소가 없어 방황한다.


아, 숨어서 혼자 있고 싶은 만큼 있을 수 있는 데는 없는 걸까? 다른 사람한테 피해도 주지 않고 다른 사람이 신경 쓰지도 않을 데가? 이 세상에 그녀가 울 수 있는 데가, 그토록 참았다가 마침내 울 수 있는데가 한 군데도 없나?

마 파커는 멈춰 서서 위아래를 쳐다봤다. 얼음 같은 바람이 앞치마를 풍선처럼 부풀렸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무데도 없었다.

pp.200-201


홍한별이 번역한 도서출판 강의 『가든 파티』는 캐서린 맨스필드의 "초기부터 후기까지의 작품 가운데 오늘날 많이 읽히는 작품을 골라" 엮은 선집이다. 작가가 죽기 전 해에 출간한 같은 제목의 책과는 다르다. 「레만 식당」은 1911년, 「가겟집 여자」는 1912년, 「심리」, 「영화」, 「딜 피클」, 「어린 가정교사」는 1920년, 「대령의 딸들」, 「미스 브릴」, 「마 파커의 인생」, 「신식 결혼생활」, 「가든 파티」, 「만에서」는 1922년에 출간됐고 「인형의 집」은 작가 사후 발표된 작품이다. 맨스필드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단편을 모았다고 할 수 있겠다. 책을 읽고 맨스필드의 성취에 대해 검색해보니 옮긴이가 말한 "번역을 통해 작품이 많이 소개되지 않"았다는 말이 실감난다. 이제라도 맨스필드를 알게 되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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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원이 되고 싶어
박상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0월
평점 :
품절


작가 황정은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책읽아웃>을 듣고 박상영 작가와 그의 첫 장편 『1차원이 되고 싶어』를 알게 됐다. 출간전 연재때부터 열독했다는 황정은 작가의 폭풍칭찬과 엉뚱한 위트로 무장한 박상영 작가의 입담을 들으며 호기심이 충만해졌다. 두 작가의 대화에서 엿보이는 소설의 내용은 얼핏 '살인'(?) 사건의 범인을 찾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게다가 등장인물의 퀴어 성향이 복합돼 있다는데 그렇다면 서사는 밝은 분위기로 가기 어렵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방송으로 들은 박상영 작가는 유머러스하고 유쾌한 사람으로 보였다(들렸다). 이렇게 이야기할 줄 아는 사람은 어떤 소설을 써낼까. 작가에 대한 궁금증이 책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졌다.


소설은 십년이 넘는 세월을 사이에 두고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전개된다. 시간의 간극을 넘어 도착한 메시지가 발단이다. 심리상담 전문가인 '나'는 방송 인터뷰로 이름이 알려지게 된 후 '1004'라는 아이디로부터 인스타그램 다이렉트 메시지를 받는다. '1004'는 '나'에게 "과거가 되지 않은 채 현재로 남은" 기억을 떠올린다. "철저히 숨길 수 있"다고 믿었던 한 시절은 두려움이 되어 되돌아왔다.


학교, 학원, 집을 오가는 2000년대 초반 학창 시절을 세밀하게 묘사한 청춘의 이야기처럼 보이는 소설은 주인공 '나'의 비밀에 의해 스릴러의 색채를 띤다. '나'는 동성 친구 윤도를 사랑했고 그것이 폭로될까 두려워했다. '나'와 윤도의 관계를 공개하겠다는 태리를 물 속으로 밀치고 도망쳤던 밤 이후로 진실은 그 무게를 더해간다.


'나'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야기는 두 가지 갈래다. 사랑의 기쁨과 그에 따른 두려움. '나'는 동성을 좋아하는 자신을 철저히 숨기고 모범생으로 살아왔다. 아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려고 위장전입을 서슴지 않은 부모 아래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는 학생으로 말이다.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서 자신의 고향을 떠나는 날만을 고대한다. 지금사는 이 곳을 떠나면 정체성의 혼란이 해결될 것이라 믿은 것이다.


오늘 하루는 단지 또다른 하루일 뿐이다. 이대로 조금만 더 버티면, 무사히 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떠나면 모든 게 괜찮아질 것이다. 이곳에서 벗어나면 비로소 나 자신인 채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괜찮다. 정말 괜찮다.

p.91


그러나 우연히 한 동네에 사는 윤도에게 마음이 흔들리고부터 갈등이 시작된다.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아야하는 마음과 윤도에게 기우는 마음이 부딛혔기 때문이다. 마음을 드러내지 않은 윤도의 주변을 맴도는 '나'는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흔들린다.


내가 알고 있는 윤도의 세계는 얼마나 단편적이었는지, 내 비밀의 무게에 짓눌려 남들도 자신의 몫의 비밀을 짊어지고 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짐작도 하지 못할 만큼 나는 어렸고, 어리석었다.

p.125


윤도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은 절절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사랑의 특별함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 '나'는 윤도가 자신과 같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나'의 마음을 아는 듯 모르는 듯 한 윤도의 태도는 '나'를 괴롭게 한다.


너이기 때문에, 그 어려운 일이 가능한 것 아닐까. 네 목소리로 들으면 무슨 얘기든 재밌고, 너를 보고 있으면 네가 아주 나쁜 일을 저질러도 이해해줄 수 있을 것만 같거든. 나는 언제든 너라는 세계를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은데. 너는 어떨까. 너를 향해 쏟아져 버릴 듯 차오른 내 마음을 이해해줄 준비가 되어 있을까.

역시나 무리겠지. 너에게 난 영영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일 테니까.

p.293


윤도와 함께한 기억은 십여년이 지난 현재까지 선명하게 '나'의 마음에 새겨져 있다. 윤도는 정체성을 억누르며 살아온 '나'의 두려움을 넘어 두 사람이 연결된 세계를 꿈꾸게 했다. 세상 어디로도 넓어지지 않고 둘만 이어지는 '1차원의 세계'는 아름다운 꿈이었다. 그들의 '1차원'은 학교라는 3차원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럼, 우리 1차원의 세계에 머무르자."

네 말을 이해할 수 없어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너와 나라는 점, 그 두 개의 점을 견고하게 잇는 선분만이 존재하는, 1차원의 세계 말이야."

p.130


학교 안에 '나'의 비밀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윤도마저 '나'를 외면했다. '나'의 두려움은 '나'에게 마음을 표현한 태리에 대한 폭력으로 표출됐다. 혼자가 되리라는 공포, 모두가 나를 외면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이렇게나 컸다. '나'는 심리적 붕괴 상태에 이른다. 소설은 이 대목에서 성적 지향성이 본인의 의지에 반하여 공개되는 일이 당사자에게 어떻게 '폭력'으로 경험되는지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아웃팅은 "약점을 드러낸 채 짐승처럼 달려드는 사람들에게 물어뜯기는" 것같은 "죽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이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쳐서야 실은 내가 꽤 오래전부터 태리의 연락을 무시해왔으며, 그는 그저 나에게 생일 선물을 준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아버렸다. 내 생일을 축하하고 싶었던 사람을 밀쳐낸 것도 모자라 진심을 다해 원망하고 있는 나. 그런 내가 견딜 수 없이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그래도 별수없었다. 태리를 원망하는 게 가당치 않음을 알았지만, 그런 마음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나는 두려웠다.

두려워서 견딜 수 없었다.

p.287


이들 중 누군가가 나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 내 목숨줄을 쥐고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비밀이 전염병처럼 퍼지는 날, 이 모든 아이들은 순식간에 나에게 등을 돌릴 것이다. 나는 완벽한 혼자가 될 것이다. 

p.302


윤도와의 시간을 부정하며 과거에 두고 살았던 '나'는 친구 무늬의 말에서 힘을 얻는다. 무늬 역시 동성을 사랑한 아이였기 때문에 '나'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윤도와 '나'가 "서로를 똑바로 바라보"던 "순간"의 진실을 일깨워주었다. '나'와 윤도의 마음이 같은 방향으로 가지 못했다 하더라도 둘이 마주보던 한 때, 서로에게 "진짜"였다는 사실은 '나'가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게 했다.


"그냥, 그건 진짜였다고. 너희 둘이 무슨 말을 주고받았고, 무슨 일을 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때 그 순간은 진짜였다고."

서로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 그의 눈 속에 내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감각하는 것.

그 순간들이, 그 때 우리의 마음이 다 진짜였다는 것.

그 한마디로 말미암아 내가 살 수 있었다는 것을, 그것을 마치 경전처럼 주워 삼키고 되새겼기에 내가 간신히 그 시절을 버틸 수 있었다는 것을 무늬는 알고 있을까?

p.395


박상영 작가는 2000년대 초반 학창시절의 향수를 섬세하게 그려냈다. 만화책, 음악으로 소환되는 기억들이 아련한 가운데 사춘기의 혼란이 묘사된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는 아이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서로를 밀쳐내고 배신하는 모습" 속 한 켠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몸을 기댄 채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 위안이 되는 관계"가 숨어 있다. 작가는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구원의 서사에서 누군가 "차마 들여다볼 수 없었던 과거의 어떤 시절을 마주"하기를 바랬다고 썼다. "고통조차도 때로는 희망의 한 조각이" 되길 바란 작가의 진실이 누군가에게 가닿길. "현재형의 공포를 과거의 한 시절로 남"기기 위한 저자의 노력이 누군가에게 이어지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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