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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고나서 나에게 정착된 두가지 경향이 있다. 첫번째는 이제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게 굉장히 힘들어졌기에, 기존에 있던 친구들을 유지, 보수, 관리하며 여생을 살아야겠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만나서 불편한 사람을 억지로 보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불편한 자리에 나가 억지로 만든티가 역력한 웃음을 짓곤 했는데, 이제 그런 짓을 하기가 귀챦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지라 때로는 만나기 싫은 사람도 봐야 하지만, 앞으론 피할 수 있으면 피하겠다는 얘기다.

두번째 원칙에 너무 충실해져서인지 최근 들어서 친구를 만나면 단점만 보이고, 그래서 안만나는 친구들이 늘어나는 느낌이다. 엊그제 얘기. 초등학교 때부터 만나는 친구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야구를 보잔다. 20분쯤 고민하다 "간만에 연락했는데..."란 맘에 그러자고 했다. 두산이 안타를 4개인가 치고 7-0으로 지는 바람에 경기 자체는 하나도 재미가 없었는데, 엘지팬인 내 친구 두명, 특히나 엘지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친구 하나는 신이 났다. 날도 덥고해서 집에 가고픈 날 붙잡더니 "술이나 한잔 하자"고 한다. 그러자고 했다. 간만에 만났으니깐.

술마시는 건 사실 별 문제가 아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문제는 장소다. 이것들은 만나기만 하면 단란주점으로 날 끌고간다. 몇번 끌려가 봤지만 사실 난 단란주점에서는 어떠한 재미도 못느낀다. 돈 10만원에 여성이 두시간 동안 성적으로 착취를 당하는 것도 영 맘이 불편하지만, 파트너로 나온 여자의 손도 안잡는 내가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내가 손을 안잡는 건 그런 맘이 없어서가 아니라, 친구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러고 싶지가 않아서다). 정말 웃기는 건 계산을 할때다. 카드로 계산을 하면서 그 친구는 늘 이런다. "야, N분의 1이야" 머리숫자대로 똑같이 내잔 말이다. 난 그게 싫다. 싫다는 사람을 끌고 갔으면 지가 돈을 내던지 하지, 두시간 동안 우두커니 앉아 여자랑 몇마디 주고받고선 30만원씩 내라는 게 잘 용납이 안되었다.

그래서 난 언제나 단란주점 가는 것에 저항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숫자의 논리'에 밀려 말처럼 끌려갔다. 그런데 그날 역시 그 친구들이 X-point라는 아주 후진 단란주점에 가잔다. 이번엔 좀 세게 버티었다. 십분 가량 싸우다 결국 타협을 본 게, 자기가 아는 Bar에 가잔다. 그동네에도 맥주를 마실 곳은 많았지만 굳이 차를 타고 그 Bar로 갔다. 아주 귀여운 사이즈의 양주 한병, 그리고 과일안주 하나. 술을 끊은 난 양주 한잔만 받아놓고선 물만 마셨고, 노래도 가능한 곳인지라 친구들은 노래도 몇곡 했다. 좀 화려해 보이는 Bar라 만만치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막상 36만원이 나온 계산서를 보곤 좀 놀랐다. 노래 5곡을 부른 게 5만원이라나. 친구의 말이다. "N분의 1이야!"

내가 12만원을 내야 한다는 얘긴데, 그보다 더 많은 돈을 쓸 때도 물론 있지만 이번엔 왜이렇게 돈이 아까운지. 우아한 카페에 가서 맥주를 아무리 많이 마셔도 십만원이 안될테고, 좀 덜 우아한 곳-내가 좋아하는 양재동 바라든지-에 가서 양주 두병을 마신다 해도 그렇게까지 나오진 않을 것이다. 아, 돈아까와....

돈도 돈이지만, 그들과 있는 내내 맘이 편치 않았다. 가장 친한 친구라면 같이있는 것만으로 편해야 할텐데,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타인에 대한 배려가 별로 없다. 둘다 사업을 하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업 얘기만 계속해 날 멍청하게 만든 것도 그렇고, 친구 차를 타고 오는 동안 계속 어디론가 전화만 해 굉장히 심심했다. 무료함을 달래려 나도 아는 애한테 전화를 했다가 잠자는 걸 깨워버렸다. 아무리 이쁜 여자라 해도 자다 일어난 목소리-"여-보-쇼?"-는 과히 이쁘지 않으며, 인간의 소리가 아닌 것처럼 들리기 마련이다. 물론 굉장히 미안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관계가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그건 내가 "재는 원래 그런 애야"라면서 친구의 특성을 인정하고 그걸 기꺼이 감내해 왔던 데 있다 (참고로 그 친구의 별명이 '파쇼' 혹은 '장군'이다). 그러던 것이 나이가 들고 사회적 지위가 조금 올라가자 내 인내력이 많이 감소했고, 그래서 그 단점들이 눈에 보이는 것이리라. 물론 나 자신도 그렇게 편한 인간이 아닐 것이며, 내 친구들 중에는 나의 그런 점을 알면서도 그러려니 하고 참은 애들이 많을 것이다. 30세가 넘어서 "너 이런 게 나쁘니 고쳐라"라고 말하는 것은 "우린 안맞아. 그러니 그만 만나자"라고 말하는 것과 같을 것이니깐.

편하기 짝이없는 친구 관계지만 그 관계를 잘 유지하는 건 이렇듯 어려운 일이다. 사소한 단점을 빌미로 인해 하나씩 하나씩 맘 속에서 지워 나간다면 내 주위에는 친구가 하나도 남지 않겠지. 친구의 단점을 보기보단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인내력을 키워 나가는 게 더 중요한 게 아닐까?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막상 가슴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그래서 갈수록 편협해지는 내 자신이 굉장히 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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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플라시보 > 가족

뭐가 옳은 것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 내 동생처럼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받을 지언정 인간으로 도리는 다 하고 살아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나처럼 스트레스 따위는 전혀 받지 않지만 인간의 도리라고는 하지 않고 사는게 옳은 것인지

언제나 그런것 처럼 내 동생은 명절에는 바쁘다. 첫번째로는 언니인 내 집에 한번 들려야 하고 그 다음에는 엄마집. 그 다음에는 아빠 집이다. 여러 친척집을 돌아다녀야 하는 사람도 있는데 저게 뭐가 피곤하냐고 말 하겠지만 이건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 쉽게 설명하자면 보통은 하나의 덩어리로 존재하는 가족이 내 동생에게는 세 개의 덩어리로 존재한다고 보면 된다. 우리는 여동생을 제외한 나머지 식구들은 절대로 서로 연락을 하거나 만나지 않으며 아직까지도 서로를 미워하고 증오하고 있다. 그러니까 동생은 엄마에게 가면 아빠와 내 욕을 들어야 하고 아빠에게 가면 역시 엄마와 내 욕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엄마는 여러번 결혼과 이혼을 거쳐 지금은 혼자이다. 아빠는 엄마와 이혼 한 직후부터 살기 시작한 여자가 있고 거긴 얼추 가족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배다른 형제들 따위는 없지만 나는 엄마도 아빠도 왠지 맘에 들질 않아서 집을 나온 이후 부터는 연락을 딱 끊고 살고 있다. 원하지도 않는 이들과 신경써 가며 산 것은 내가 독립이 불가능했던 미성년자 였을때 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아주 행복하다. 여동생을 제외한 그 누구와도 집안식구와는 거의 왕래를 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하지만 여동생의 경우는 다르다.

그애는 어느 날 울면서 말했다. 너무 피곤하다고. 전부 각자 자기에게 전화를 해서 왜 그렇게 연락을 하지 않냐며 괴롭히고 엄마에게는 아빠와 왕래하지 않는 척을 해야 하며 아빠에게는 엄마집 보다 아빠집을 먼저 들르는 척 해야 하고 언제나 전할 소식이 있어도 나를 포함해서 총 세 군대에다 전화를 해야 하며 혹시나 자기가 알리지 않은 뭔가에 있어서는 필요 이상으로 서운해하고 어떤 문제라도 말 할라치면 서로 경쟁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 해 주겠답시고 설치는 것이 너무 피곤하다고 말이다.  얼마 전 까지 백수였던 내 동생은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다만 나한테만은 말을 하고 약간의 돈을 빌려 썼다. 그나마 그애를 가장 덜 괴롭히는 것이 나 인가보다. 그애는 아파도 결코 말하지 않는다. 모든게 너무 피곤하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에서 부터 일찌감치 물러나 있는 나로서는 그냥 안되었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나는 정이 없는 인간인가 보다. 가족과 10년째 떨어져서 나 혼자 지내지만 정말로 단 한번도 가족이 있었으면 했다던가 명절날 처량했다던가 해 본적이 없다. 그 모든 복잡한 일들을 명절 단 하루를 위해 참아내고 싶지도 않고 내 주변에 걱정하거나 축하하거나 해결하거나 해 줘야 할 일들이 북적거리는 것도 진심으로 원하지 않는다. 나는 가족을 벗어나고 부터 진짜로 행복해 졌다. 나는 엄마건 아빠건 어떤쪽과 함께 가족을 이룰때도 행복하지 않았다. (물론 그 모두 함께 가족을 이룰때도 마찬가지 였다.)가족은 서로에게 너무 지나친 스트레스를 준다. 나는 그걸 견디고 싶지 않았지만 성인이 될 때까지 눈을 감고 귀를 막고 기다렸다.

엄마가 또다시 재혼을 하지 않는다면 여동생은 엄마가 명을 다 할때 까지 돌봐 드려야 한다. 그애는 엄마로 부터 지난 10년간 내가 받지 않은 혜택까지 포함해서 모두 받았기 때문이다. 엄마로서는 당연히 여동생을 맘대로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신다. 여동생이 서울에 가서 일을 하는 이유는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아직 엄마가 많이 늙거나 아프지 않은 순간 만이라도 엄마를 벗어나 있고 싶기 때문이라고 했다. 엄마에 비해 현저하게 가난한 아빠쪽도 여동생이 돌봐야 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가진 재산을 엄마에게 다 빼앗기고 원래부터 돈을 모은다든지 하는 것에는 신통치 않았던 아빠는 거의 비슷한 부류의 여자를 만나고 부터 저축따위는 모르고 살고 있다. 지금은 그다지 늙지 않았기 때문에 여동생에게 기대지 않지만 내 생각에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그들은 금전적으로 여동생에게 기댈 것이다. 그들 역시 나에게 해 줄것 까지 다 포함해서 여동생에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혜택이란 혜택은 다 포기했었다. 대학 입학금을 끝으로 나는 그들에게 어떤 금전적 도움도 받지 않았다. 먹고 사는 것은 온전히 다 내 몫이었다. 물론 평범하게 주는 밥 먹고 산 나로서는 진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스무살 짜리가 어느날 갑자기 자기 자신을 혼자 책임 진다는 것은 녹록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상황이 안좋아져서 일주일 넘게 굶을 망정 절대 손을 뻗어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필요 없을때는 연락을 끊다가 내가 아쉬울때 연락하는 엿같은 짓은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시간들을 전부 내가 해결했기 때문에 나는 가족들로 부터 완벽하게 떨어져 나올 수 있었다. 이제는 그들에게 아무런 감정이 남아있지 않다. 그들은 어렵거나 힘들어도 나에게 손을 뻗지 못할 것이다. 내가 그러지 않았듯이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가족인데 어쩌고 하지만 모르면 입 다물라고 말 하고 싶다. 나는 가족이 없어도 되는 사람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가족 같은 불편한 울타리를 만들 생각은 없다. 지금으로 충분하게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가끔은 헤깔리기도 한다. 여동생처럼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양 쪽 다 찾아다니면서 자식 노릇을 해야 하는건지... 이렇게 정말 연락 딱 끊고 모른척 하며 살아도 괜찮은 건지. 내 마음은 이래도 괜찮다고 하지만 내가 배운 모든 것들은 나에게 나쁜년이라고 말하고 있다. 잔인하고 정없고 독한년. 모두들 땡긴다는 그 핏줄에 늬년이 뭐라서 그렇게 쿨할 수 있냐고. 앞으로 더 살아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일까? 올해도 여동생은 나머지 두군데에 거짓말을 하고 내 집에 왔다가 엄마에게 갔다. 그리고 또 엄마에게 올라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아빠에게 갈 것이다. 어쩌면 가기 전에 그 두집에서 받은 스트레스에 관해 말하기 위해 나를 한번 더 찾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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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sweetmagic > 運命...殞命......하다

운명을 따르다..... 결국 운명대로 되다. ........운명하다

 

운명하다.!!

그리고 결국.... 운명대로 되었다.

운명의 날...  그 전날.....
아침에 일어나 목욕1) 갔다.
목욕 갔다와서는 화장2)하면서 TV3) 살짝 보다가
아빠 엄마랑 셋이서 큰댁4)에 갔다.
음식 하는 거 약간, 살짝 거드는 척 하다가 일당5)만 챙기고
친구네 놀러가서 먹고 싶은 음식 재료 사다가 만들어서 실컷 먹고는...6)
영화한 편7)보고 나서 친구 방에서,
음악8)을 들으며 술9) 마시며 밤새도록 수다10)를 떨었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새벽 3시 47분까지는 같이 떠들고,
그 이후는 나 혼자 떠들었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새벽 3시 47분까지는 내가 더 많이 떠들었고,
그 이후로는 진짜 혼자 떠들었다.
나11), 내 주위의 사람들...
엄마12), 아빠13), 친구들14), 남자들15), 운명16), 그리고 잘 사는 법17)
그리고 잤다.
살짝 늦잠18)을 잤다.
일어나서는 친구가 끓여 주는19) 떡국20) 먹고, 나이21) 한 살 더 먹었다.
그리고 TV22)를 보고  큰 일23)보러 화장실 갔다가, 
예전에 봤던 영화24) 또 보고, 햇빛 따땃 할 때 나와서25)
버스26)타고 집에 와서, 아까 다 못 본 남은 볼일 봤다.27)  
그리고 그 과정 틈틈이....
철저히, 온통, 흠뻑 내 운명을 실감28)했다.
운명한 것이다.

난 , 나의 운명에 취해 있었다.
철저히 도취되어 있었다. 그리고 오늘부터 심취하는 기분을 느꼈다.
도취 그리고 심취...
내가 아주 좋아하는...열정의 단어들이다.
둘은 아주 비슷해 보이지만 아주 다르기도 하다.
사전적 정의를 살펴보자.

도취(陶醉)는 어떠한 것에 마음이 쏠려 취하다시피 되는 것
심취(心醉)는 어떤 일이나 사람에 깊이 빠져 마음을 빼앗기는 것

둘 다 무언가에 홀린 듯 열중하거나 기분이 좋아진다는 면에서는
다 같은 말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주 다르다.
중독될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취하는 것을 매우 즐기는 나로서는...
이 두 말의 차이를 밝히고 이해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 차이..... 
도취는 순간성을.
심취는 영원성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

무슨 말 일까 ?

차이를 느낄 볼 수 있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거기에 내가 원하는 말을 집어넣어 생각해 보기만 하면 된다.
물론 내 방식대로의 방법이다.

예를 들어보자...

나는 술에 도취되었다.
나는 사랑에 도취되었다.
나는 나에게 도취되었다.

나열된 문장들은 왠지 대입하는 모든 단어들에게서...

마치....내가...!
마취에서 깨어나 듯, 또는 꼭 깨어나야 하 듯
깨든 깨지 않든 간의 선택을 해야할 것 같고,
선택을 하지 않고 싶더라도 언젠가 그 끝이 꼭 있을 것 같다.

내 삶 , 내 역사 속의 언제나 나처럼....
그것이 술이 취했다가 깨든....
사랑에 취했다가 깨든....
나에게 취했다가 깨든....
그 끝이 ...꼭....마치 그래왔던 것처럼...
절망감, 실망감, 열등감,,으로 이어질 것 같고
또 덧없다, 어쩔 수 없다, 운명이 그렇다 라는 말로 잘 포장해서 
언젠가 다시 빠져들 그리고 빠져들어야 할 것들을 찾고
또 찾을 준비를 해야 할 것 같고...
도취되면 될 수록...나는 힘 빠지고 여려져만 갈 것 같다
술, 사랑, 나로부터 꼭 정신차려야 할 것. 같아
마음이 부담스럽다.


그럼 이제 심취를 살펴보자.

나는 술에 심취되었다.
나는 사랑에 심취되었다.
나는 나에 심취되었다.
술에 사랑에 나에 취한 것은 도취와 같은데..
심취는 굳이 그것을 깰 필요성을 느낄 수가 없다.
깊이가 있고 이해가 있다.
정신차리고 다시 심취하기 위해
찾아야 할 것도, 구해야 할 것도 필요도 없다.
정신 차릴 필요조차 없다.
다만 , 심취하면 할수록...
술이든 사랑이든 나든 존재는 더욱더 분명해 진다.
그렇기 때문에 찾으려 애쓸 필요도 없다.
마음이 평화롭다.

그래서 사람이 가슴부여 잡고 쓰러졌을 때...
심장뛰어 심장..! 라고 하기보다...
정신차려 정신..! 라고 외치는지 모른다.
뭔가 깨달음을 하고 운명을  느꼈을 때
정신 차렸다고 하는걸 지도.....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에 변화가 생겨남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변화를 어디까지나 외부적인 조건의 소산이 되게
하지 말고 영혼의 소산이 되게끔 하지 않으면 안될줄 안다. -톨스토이-

아름다운 영혼이 아름다운 형체와 조화되고, 이 두가지가 하나로
다져지며 그것은 앞날을 정시하는 눈을 가진 사람에게 가장 아름
다운 모습이 될 것이다. -플라톤-

나는 진보라는 것을 믿는다. 인류가 행복해질 수 있는 운명을 타
고났음을 나는 믿는다. -하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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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플라시보 > Movie : 28일 후

인간은 언제나 한날 한시에 쫄딱 망해버릴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 극심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는것 같다. 가장 흔하게는 세계 제 3차 대전이 일어나서 핵전쟁으로 번지거나 몇년 전부터 유행한 지구와 행성의 충돌. 그리고 오래 전 부터 영화속에 등장한 바이러스 감염에 의한 인류의 멸종. 외계 존재에 의한 파괴. 그 밖에도 기계의 반란에 의한 전멸. 혹은 하나의 존재가 막강한 어둠의 파워를 가지고 지구를 집어 삼키려는 것들이 있다. 대게는 용감한 인간 몇 몇이 저 위기를 간신히 극복해서 인류를 살린다.

내가 봤던 바이러스가 지구를 어쩌고 하는 영화 중에서 가장 재밌었던 것은 12몽키즈 였고 외계의 존재가 우리를 어쩐다는 것은 화성침공이 제일이었던 것 같다. 핵전쟁에 의한 것은 그날 이후가 단연 돋보였다. 그 밖에는 전부 그저 그랬다. 그리고 이제 여기 한개를 더 추가해야 겠다. 대니 보일의 28일 후.

이 영화의 내용은 이러하다. 어느 날 사고로 병원에 누워있던 퀵서비스 맨은 사고 당시로 부터 정확하게 28일 후 에 깨어난다. 그런데 깨어나 보니 병원은 물론 영국 전체가 텅텅 비어있다. 어떻게 된 일인고 하니 이 남자가 의식을 잃고 있는 동안 원숭이에게서 시작된 분노 바이러스(미칠듯한 분노에 사로잡혀 미친듯이 상대를 공격함. 눈이 벌개지고 각혈을 함. 피를 통해 전염됨) 가 안간에게 옮겨가서 서로가 서로를 공격해서 죽고 죽이게 된 것이다. 남자는 감염자에게 죽음을 당할 뻔 하다가 도시에서 살아남은 남 녀 두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때부터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난다. 감염이 되면 친구건 애인이건 가족이건 20초 안에 사살하지 못하면 엄청난 힘으로 공격하고 얼굴에다 피를 내뿜어서 감염자로 만든다. 이들이 안전한 곳이라 생각하고 찾아간 곳은 9명의 군인이 지키고 있는 것인데 이들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생존자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군인들은 결코 생존자를 안전하게 보호 할 목적으로 방송을 한 것이 아니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 가 떠 올랐다. 그 책 역시 종류는 다르지만 일제히 눈이 멀어버리는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고 세상은 혼란속에 빠진다. 그리고 역시나 거기서도 강자는 존재하고 약자도 존재한다. 28일 후 에서 총 아홉명의 군인들이 방송을 하고 생존자를 찾은 이유는 바로 여자 때문이다. 그들은 여자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당장에는 성적욕구 해소를 위해 그리고 좀 더 위대한 목적으로는 인류의 재건을 위해서 방송을 듣고 찾아 올 여자들을 기다리는 것이다. 처음에 그들은 친절하게 안전을 보장하지만 곧 본색을 드러낸다. 결국 주인공은 그들을 다 사살하고 안전한 곳으로 여자 두 명을 데리고 간다. 거기에는 두 가지의 결말이 존재한다. 하나는 치명적인 중상을 입은 남자가 죽은것이고 하나는 남자가 살아난 것이다. 하지만 해피엔딩은 어디에도 없다. 그들은 세상 전부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 아니면 섬나라인 영국 하나만 이런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비행기가 날아다니기는 하지만 무엇이 목적인지 알 수 없다. 그들은 비행기에서 보이게 하려고 천으로 커다란 글씨를 만들어 평원에 펼쳐 놓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글자는 Help가 아니라 Hello이다.

영화를 보면 바이러스의 공포 보다도 더 한 것은 혼자 살아남은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다. 온통 텅텅 빈 도시에 혼자 남아있고 가끔 감염자들이 미친듯이 공격 해 대는 곳에서 살고 있다면 심지 약한 몇몇은 충분히 자살하고도 남을 상황이다. 주인공이 만나는 사람들은 저마다 감염되지 않은 자신 이외의 인간을 만났다는 것에 감격스러워 한다.

극한 상황에서 약자일 수 있는 사람들은 평상시에도 늘 약자이다. 어른 대 아이가 그렇고 남자 대 여자가 그렇다. 암만 아닌척 해도 사실은 사실이다. 여러가지 이성을 가지고 만든 규칙이나 법들은 서로 평등하다고 외치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주 평화로울때나 가능한 얘기이다. 당장 전쟁이라도 터지면 여자와 어린아이 그리고 노인들은 가장 먼저 착취의 대상이 될 것이 뻔하다. 그래서 나는 별로 남녀 평등을 부르짖지 않는다. 위기의 상황이 닥치면 언제건 뒤집어 질 수 있는 것을 얄팍한 이성의 막으로 아닌 척 한다는 것은 내가 볼때 눈가리고 아웅식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자와 아이 그리고 노인은 상대적 우위인 존재들에게 무조건 기며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뭐랄까 암만 입으로 부르짖어 봐야 너무 쉽게 무너지고 깨어질 수 있는 구호가 허망하다는 것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 등장하는 눈먼 여자들은 눈먼 남자들에게 집단 강간을 당한다. 그녀들은 자신과 또 남자와 아이들을 먹여 살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근본적으로는 강자인 남자가 요구를 했기 때문에 죽지 않으려면 들어주는 수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28일 후 에는 여자 두 명이 9명의 군인을 상대할 뻔 한다. 그 중 한명인 흑인 여자는 감염자들을 때려 잡거나 살아 남기 위해 냉정한 면을 볼때 남자보다 백번 나은 모습을 내내 보여주지만 결국은 살기 위해 몸을 내어놓으라는 군인들의 요구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저 자기보다 어린 여자가 수치심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 약을 퍼 먹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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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나는 행복해 > 데일 카네기의 <화술 123의 법칙>

 그 사람의 이름을 불러라.

 남을 비난하지 말라.

 말할 기회를 주어라.

 결론은 상대방이 내릴 수 있게 하라.

 욕구를 자극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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